문장웹진(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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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시 젖소와 함께 티타임
젖소와 함께 티타임 황성희 젖소의 무리들이 나타난 것은 오후 무렵. 주차장을 가득 메운 젖소들은 느긋하게 화단의 풀을 뜯고 인도 위로 배설을 한다. 놀이터에 진을 친 사자들에겐 벌써 이름이 붙었다. 서두르지 않으면 새로운 이웃이 늘어난다. 저기요, 삼삼오오 주차장의 젖소들은 이상합니다. 의문을 제기하기 위해서는 단단한 하체가 필요하다. 뿌리에서 나뭇잎에 이르는 나무의 줄거리와도 같은. 거실 바닥에 놓여진 두 발을 다시 한 번 확인한다. 오른쪽과 왼쪽의 나라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걱정 말아요, 당신은 코끼리처럼 보이지 않아요. 식탁 위 화병처럼 나는 안정된 자세로 놓여있다. 새로운 종을 발굴하고 학명을 붙이는 일에 골몰합시다. 그래도 시계 밖으로 시간이 흘러나오면 고장이지요. 아파도 결석은 안 된다 선생님 말씀처럼 받아들이길. 가면을 벗는 게 부담스러우면 그냥 공존하면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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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시 꿀사과들에게 고함
꿀사과들에게 고함 황성희 나보다 더 먼저 불기 시작했으면서 나보다 더 늦게까지 부는 바람이 싫었다. 나보다 더 먼저 태어났으면서 나보다 더 늦게까지 태어나는 나무가 싫었다. 잠깐! 이건 마트에도 없는 너무 뻔한 상상이잖아요. 괜찮아, 고양이 한 마리쯤 죽여 버리면 되지. 어머니는 차마 못 죽이겠고 아버지도 차마 못 죽이겠고 파리나 한 수천 마리 죽이면 되지. 사실은 내가 그 파리인지 파리 잡는 손바닥인지 궁금한 거 아닌가요? 그러니까, 넌 어떤 사과니? 도로변에 놓인 청송 꿀사과들에게 소리친다. 혹시 72년 식목일 이름도 모르는 애송이 손에 함부로 심긴 너 국방색 맛이 나는 사과니? 미안, 편지라면 사양하겠어. 꿀사과들아, 난 주소가 없단다. 내가 누군지 정 알고 싶다면 늘 하던 대로 천천히 죽어. 첫사랑2)이 말했듯 널 알기 위해 세상의 모든 사과나무를 조사할 필요는 없단다. *1) 박찬욱 감독의 영화 *2) 투르게네프의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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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시 자기소개서
자기소개서 황성희 저는 흰옷을 즐겨 입습니다. 태어난 지는 반만년 됐습니다. 저는 싸움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식민지는 당해도 식민지는 안 만듭니다. 저는 올드보이1)가 싫습니다. 이순신 장군께선 알 리 없는 올드보이가 싫습니다. 누구냐? 누구냐 넌? 정말 실례적인 추궁입니다. 저는 묻는 것도 대답하는 것도 싫습니다. 오늘만 알아들을 수 있는 질문도 싫습니다. 내일이 되면 어제가 되는 질문도 싫습니다. 지금 당장 죽기보다는 목을 맬 밧줄 고르기를 평생 즐긴다고나 할까요. 그러니까 천년 뒤에도 지금인 것처럼 얘기 좀 나누면 안 되겠습니까. 아흐 다롱디리한 소원이라구요? 하긴 거북이 머리를 왜 구워먹겠다는 건지 어떻게 알겠습니까. 요즘 같은 글로벌 시대에 훈민정음이 언제나 중요한 건 아니지요. 그나저나 시간에겐 말 좀 걸고 있습니까. 여보세요? 여보세요? 저는 지금 연대표의 어디쯤에 와 있습니까. 제가 없더라도 연대표를 읽어줄 당신 하나 정도는 있었으면 좋겠는데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