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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 2013년 가을 제12권 3호 통권 46호
우리 시, 넘치는 것과 모자라는 것―우리 시와 비평에 관한 다섯 가지 테제권혁웅1. 진정한 것은 많으나 진실한 것은 적다영화 「너는 내 운명」에서 애교 만점의 주인공 은하 (전도연 분) 가 입에 달고 사는 말이 있다. “진정?” ‘정말’이나 ‘정녕’ 대신에 썼음 직한 이 말을 가장 흔하게 접할 수 있는 곳이 시 비평계다. 황현산은 이 말에 관해 이렇게말한다.‘진정성’이란 말이 우리에게서 비평 용어로 등장한 것은 내 기억에 20년 남짓 되지만, 그동안 이 말로 모든 평문의 결론을 삼는 비평가들이 한 해에 한명 꼴로 늘어났던 것 같다. 그러나 놀랍게도 이 말은 국립국어원의 『표준국어대사전』 을 비롯한 거의 모든 국어사전에 등재되지 않은 어휘다. (…중략…) 프랑스어 형용사 ‘authentique’는, 영어의 ‘authentic’와 마찬가지로, 왕조 등이 정통성을 지녔다는 뜻에서부터 고서 등이 진본이라는 뜻에 이르기까지 폭넓게 쓰이는 말이다. (…중략…) 이 ‘진정성’은 한자로 표기되지 않았지만, 그거야 달리 생각할 것도 없이 ‘眞正性’이다.그러고 나서 문학비평, 특히 시 비평의 차례가 온다. 심사소감 같은 데서 얼0 08009굴을 내밀기 시작하던 이 말이 어떤 종류의 담론에서는 작품의 질을 가늠하는 가장 확실한 잣대를 가리키기에 이르렀다. (…중략…) 한자 표기를 살펴보니 ‘眞情性’이다. 요점은 ‘情’에 있을 것 같다. ‘情’은 물론 마음이고 감정이다.그래서 이렇게 정리된다: ‘진정성(眞情性)’은 심정에 의해서 채택되고 승인된‘진정성(眞正性)’이다.―황현산, 「시를 둘러싼 몇 가지 미신」 (『포지션』, 2013.봄)두 가지 뜻을 동시에 지닌, 어떤 고의적인 착란을 통해 진정성이란 말은권위를 획득했다. 이 말에는 ‘옳다’ ‘정통적이다’ ‘진짜다’라는 뜻과 ‘감동적이다’ ‘마음이 진실되다’ ‘정서를 움직인다’라는 뜻이 결합되어 있다. 물론진정(眞正)이나 진정(眞情)과 같은 말은 있다. 하지만 그 두 뜻을 모두 포함하고 있는 진정성이란 말은 없다. 두 말은 결코 동의어가 아니며, 따라서 두말의 결합에는 어떤 공모의 냄새가 난다. 감정에 솔직하고 감정을 잘 드러낸 작품이 좋은 작품이라는 전제 말이다.사실 이 말은 비평 용어가 아니다. 비평의 언어는 가치판단의 기준을 제공하는 언어, 한 텍스트의 ‘진정(眞正)함’을 판단하게 해 주는 잣대를 제공하는 언어여야 한다. 그런데 진정성이란 용어는 (내가 보기에) 옳은 그 무엇이며, 따라서 내가 보기에 옳은 것이 작품으로서도 옳은 것이라고 말한다.이 동어반복은 작품과 무관하게, 내가1 (이미) 좋다고 승인한 것을 (다시)내가 승인한다는 말에 불과하다. 왜 좋은지를 말해야 하는 자리에 ‘좋으니까’를 이유로 대고 있는 셈이다. 비평은 이런 자기 위안적 공모 관계를 청산해야 한다. 그렇다면 저 진정(眞正)함을 떠받쳐 주는 진정(眞情)함이란 무엇일까. 황현산은 이어서 말한다.1 아가 여기에는 시인의 ‘의도’가 결합한다. 시인이 진실되게 쓴 것이 작품으로서도 좋은 것이나라는 전제다. 이 점에서 관해서는 2장에서 언급하겠다.‘진정성’의 문학적 이데올로기에서 진실의 최종심급은 언제나 감정이다. 그러나 감정은 진실을 오로지하여 판단하기에 적절한가. 감정은 ‘애틋하다’의 풀이에서 보듯이 자주 어떤 강렬함의 위기에 몰리거나 어떤 모호한 분위기에 얹혀 있지 않은가. 그리고 무엇보다도 감정의 진실과 감정 밖에 위치하는 진실은어떤 관계를 맺는가. 중세 이전의 사람들이 여러 가지 과학적 증거에도 불구하고 천동설을 쉽게 버릴 수 없었던 것은 꾸밈없는 일상적 감정과 거기서 비롯된 습관 때문이 아니었던가. (…중략…) 벌써 습관이 되었기에 편안하고 편안하기에 사실인 것처럼 보이는, 또는 어떤 흥분을 선동하고 자극하기에 사실인것처럼 보이는 나태한 감정의 너울을 서로 용서해주기 위해 이 말이 자주 사용되는 것도 그 때문이다.(같은 글)요컨대 감정과 진실은 대척적인 관계까지는 아니더라도 각기 고유한 영역을 갖는 별개의 영역이다. 어떤 진실은 감정을 움직이고 어떤 진실은 감정과 무관하게 작동한다. 감동적인 작품은 좋은 작품이지만, 감동적이지않은 작품의 경우에도 좋은 작품은 얼마든지 있다.너는 그를 원했다. 길들이고 싶었다. 거둬들이고 싶었다. 너는 뒤춤에 감춰두었던 당근과 채찍을 야심차게 꺼내들었다. 네가 면전에 대고 당근을 시계추처럼 흔들자 참다못한 그가 말했다. 나는 육식주의자야. 5년 후, 너는 괴혈병에 걸려 잇몸에서 피가 나게 된다. 정신을 차린 너는 채찍을 휘두르려고 폼을잡았다. 채찍이 쩍쩍 공기를 가르자 참을성 없는 그가 말했다. 나는 마조히스트야. 10년 후, 너는 정부로부터 피 같은 봉급을 받게 된다. 네 입이 뒤춤처럼부끄럽게 실룩거렸다. 너는 할말을 잃고 탈 말을 거두었다. 당근과 채찍을 길바닥에 버리며 길든 상태로 비로소 길에 들었다. 20년 후, 너는 누구의 마음속에도 남아 있지 않게 된다. 그가 된 너는 지하철에 올라타는 사람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쩝쩝 입맛을 다시게 된다. 바람을 휙휙 가르며 거대한 인공 초원을 달리게 된다. 온몸으로 피를 부르게 된다.0 10011―오은, 「부조리―육식과 피학」 전문이런 시를 진정성이 없다고 폄하하고 말 것인가. 사실은 진지한 장난도있지 않은가. 아니, 모든 장난이 사실은 진지한 장난이다. 소꿉놀이를 하는 아이들은 장난만을 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아이들은 땀을 뻘뻘 흘리며자신들이 할 수 있는 가장 성실한 방식으로 맡은 일을 수행한다. 아이들은정말로 엄마가, 아빠가, 자기 자신인 아이가 되어 놀이에 참가한다. 소꿉놀이는 노동과 놀이가 분화되지 않은 경지 하나를 우리에게 소개해 준다. 이것이야말로 시가 꿈꾸는 경지 가운데 하나이기도 하다. 이 시는 진정하지는 않지만 진실한 작품이다. 말들의 미끄러짐은 장난스럽지만, 그 과정에서 삶의 심연이 얼핏 모습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길들이다’는 말이 데려온관용어(“당근과 채찍”)가 있고, 당근↔육식↔괴혈병이란 역접 연상의 계열과채찍→마조히즘→체제 순응주의자란 순접 연상의 계열이 있다. 타는 말[馬]이 하는 말 [言語]로, 길에 들다가 길들다로 미끄러지는 말장난도 있고, 말이 지하철로 바뀌는 은유적 변환도 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사랑의 본성과 체제의 속성과 욕망의 본모습이 얼핏 모습을 드러낸다. 적어도 이 시는감정을 차단한 자리에 사실성 하나를 도입하고 있다. 감정이 도입되었다면가려졌을 진실 하나를 말이다.2. 의도는 많으나 결과는 적다진정성의 신화는 환원주의의 신화다. 시를 늘 최초의 자리, 그 시를 낳았다고 생각하는 시인의 자리로 끌고 가기 때문이다. 그런데 의도와 결과는같은 것이 아니다. 경천동지할, 귀신도 울고 가게 만들 작품을, 밤을 새워내 인생 최고의 작품을 쓰겠다는 시인의 포부는 늘 있어 온 바이지만, 다음날 아침이 되면 어제의 결기와 만족은 흔적 없이 사라지고 시인 앞에 남은것은 휴지통으로 들어가야 할 파지들뿐이다. 이 보잘것없는 결과물을 최초의 의도로 환원할 수는 없는 일이다. 욕심 같기만 했다면 시인은 이미 새로운 말의 창세기를 지었을 것이다. 발화하는 순간 사물이 되는, 우주의 언어로 쓰인 기원의 책 말이다.실상은 정반대다. 최초의 의도란 건 존재하지도 않았다. 기원이란 결과가 만들어 낸 가상의 일점이기 때문이다. 작품은 사후적으로 자신의 기원을창조한다. 지금의 실패가 최초의 성스러운 시작을 증언하고 있으며, 그것만이 이 범작의 유일한 존재 증명이라는 듯이 말이다. 그러니 기원이나 의도란 숱한 시들의 현장부재증명(알리바이)에 불과한 것이다. 시가 태어난 자리는 시인의 심중이 아니다. 시는 다른 데서 온다. 말들의 긴 그림자가 끌고 온 어떤 사후적인 효과가 시의 배태지다.나는 한국말 잘 모릅니다 나는 쉬운 말 필요합니다 길을 걷고 있는데 왜 이인분의 어둠이 따라붙습니까연인은 사랑하는 두 사람입니다 너는 사랑하는 한 사람입니다 문법이 어렵다고 너가 말했습니다이 인분의 어둠은 단수입니까, 복수입니까 너는 문장을 완성시켜 말하라고합니다 그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매일 나는 작문 연습합니다―나는 많은 말 필요합니다―나는 김치 불고기 좋습니다―나는 한국말 어렵습니다너는 붉은 색연필로 OX표시합니다 X표시투성이입니다 너 같은 애는 처음이다 너는 나를 질리게 만든다 너는 이제 끝이다 당장 사라져라 이것은 너0 12013가 한 말들입니다한국말이란 무엇입니까 처음과 끝을 한꺼번에 말하는 말을 나는 잘 이해하지 못합니다이마에 난 X표시가 가렵기만 합니다나는 돌아오는 길을 이 인분의 어둠과 함께 걸어갑니다 이 인분의 어둠이말없이 걷습니다―황인찬, 「나의 한국어 선생님」 전문이 시에 무슨 의도를 물어야 할까? 1연에서 보이는, 저 고의적으로 서투른 문장이 말하듯 우리말을 갓 배우기 시작한 외국인의 난처함을 얘기해야할까? 아니면 2연에서 보듯 이 시가 그것에 빗대어 연애의 문법을 이야기하고 있다고 해야 할까? 실상 어느 한곳에 귀속시킬 수 없는 의도란 이미 의도가 아니다. 서로를 그리는 에셔의 손처럼, 하나가 다른 하나의 의도(기원)이자 결과가 되기 때문이다. 이 시는 두 가지 뜻의 상호작용에서만 제 정념을 길어 올린다. 정확히 말하자면 이 두 가지는 서로가 서로의 사전적 그늘이자 배경이며, 사후적 결과이자 효과다. 한 사람이 가장 잘 구사할 수 있는모국어로도 사랑을 고백하기는 어렵다는 것, 고백이란 방금 배우기 시작한언어를 구사하듯 서툰 일이라는 것, 그리고 언어를 배울 때에는 고백의 문장부터 시작한다는 것 등이 이 상호작용의 전제이자 결론이다. 시는 의도에서 태어나지 않고 말들이 던져 놓은 의미 작용에서 태어난다. 돌이켜 보면 카프 때부터 우리는 의도로 결과를 평가하는 데 익숙했었다. 그것은 시를 신비주의에 헌납하는 행동이다. 봉인을 뜯어봐야 그 신비가 품은 것은아무것도 없다. ‘무엇인가’가 그 너머에 있을 것이라는 포장 효과만이 있을뿐이다. 신비는 그 너머에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숨긴다.3. 의미는 많으나 무의미는 적다비평은 그 ‘무엇인가’를 ‘의미’라고 부른다. 아무개의 시는 어떤 ‘사상’으로충만하다, 어떤 ‘주의’를 품고 있다고 비평은 말한다. 이 경우 의미는 의도의 다른 이름에 지나지 않는다. 얼핏 보면 의도는 시인에게 귀속되는 주관성의 표현이고 의미는 비평이 부여한 객관성의 지표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것은 객관성을 가장했으되 여전히 기원의 신화를 내부에 은닉하고있는 용어다. 사상은 시의 내용이 아니며 주의는 창작의 강령이 아니다. 비평이 의미에 관해 발언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그 자신의 무능을 통해서일 수밖에 없다. 시에서의 의미란 일종의 장(場)이어서 무한을 품고 있다.그 무한을 유한의 도구로 포착해야 하는 것이 비평의 운명이다. 시는 비평이 의미를 부여하는 순간, 그 의미 너머로 비약해 버린다. 이것을 무의미라고 부르자.김춘수가 그의 압축된 시형(詩形)을 통해서 되도록 를 배제한 시적경제를 도모하려는 의도는 짐작할 수 있는데, 그의 시나 그의 시에 대한 주장을 볼 때 아무래도 고개를 갸우뚱하지 않을 수 없다. 그는 자기의 입으로도 시는 넌센스를 추구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데, 이런 좋은 의미의 넌센스는진정한 시에는 어떤 시에고 있는 것이다. 그가 말하는 넌센스는 시의 승화작용이고, 설사 시에 그가 말하는 가 들어있든 안 들어있든간에 모든 진정한 시는 무의미한 시이다. 오든의 참여시도, 브레히트의 사회주의시까지도종국에 가서는 모든 시의 미학은 무의미―크나큰 침묵의―미학으로 통하는것이다. 이것은 예술의 본질이며 숙명이다.2무의미라는 것이 있다면 혹은 그렇게 불러야 할 것이 있다면, 비평이 맞2 김수영, 「변한 것과 변하지 않은 것」, 『김수영 전집 2: 산문』, 민음사, 1981, pp.244-245.0 14015닥뜨릴 수밖에 없는 어떤 한계개념의 이름일 것이다. 비평이 가닿을 수 없지만 역설적으로 그 가닿을 수 없음을 통해서만 지시되는 무한에의 ‘개방’말이다. 이것은 시에도 똑같이 적용되는 사항이다. 시 역시 어떤 한계개념을 통해서만 실재의 심연을 포착할 수 있다.누군가 나의 이름을 착한 사람이라고 부를 때그 이야기의 주인공은 묵묵히 동의한다.누군가 그의 이름을 악한 사람이라고 부를 때도그 이야기의 주인공은 반대할 의사가 없다.두 번에 걸쳐 그는 거짓말에 익숙해졌다.그 이야기의 주인공을 말하는 사람과그 이야기의 주인공이 말하는 사람은늘 모함에 시달리고 모함에 빠진 자신의계략을 한 번도 의심해본 적이 없다.그에게는 그를 지켜보는 많은 사람들의 눈이 없다.눈, 코, 입을 말할 때의 귀도 없다.그는 오로지 보고 듣고 말하면서 떠나왔다.떠나면서 완성되는 그의 인격이많은 사람들에게 들리지 않는 이유많은 사람들이 주목하지 않는 이유―김언, 「동의하는 사람」 부분누군가 한 사람을 일러 착하다고 혹은 악하다고 할 때, 그것이 그 사람의정체가 될 수는 없다. 술어는 주어의 본질을 설명하는 게 아니라 제한할 뿐이다. 본래 제한이란 이중적인 경계를 통해서 경계 너머로 나아가는 방법이다. 착하다고 그를 제한할 때, 그 사람은 착하지 않은 모든 제한의 바깥에서 무한해진다. 악하다고 이름 지을 때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그러니 저두 말은 이중의 거짓말이다. 그는 ‘착하다/악하다’라는 제한 바깥으로 튕겨져 나간다. 그는 그 제한의 적중할 수 없음=무능력을 통해서 제한 바깥으로열렸다. 결국 그는 그 모든 명명이 모함이라고 생각한다. 그 자신의 정체성을 관통하지 못했기 때문이다.이것은 소문에 대한 이야기지만, 시나 비평이 가진 의미/무의미에 대한알레고리이기도 하다. 비평은 시를 똑바로 보지 못하고 시가 아닌 것만을본다. 비평의 의미란 비평이 시에서 의미화함으로써 실제로는 밝히지 못하는 바로 그 부분이며, 이 부분이 곧 시의 무의미다. 비평에게는 시를 정시할 수 있는 눈이 없고 시의 말을 들을 귀가 없다. 비평이 완성한 시의 인격이란 그처럼 불구의 것이지만, 바로 그것을 통해서 시는 무한해진다. ‘무의미가 예술의 본질이며 숙명’이라는 통찰이 자리한 곳이 바로 여기다. 해석의 무능이란 해석의 역량이다.4. 의식은 많으나 무의식은 적다이 때문에 시는 필연적으로 두 번 적힌다. 표면의 시로 한 번, 이면의 시로 한 번. 의도나 의미가 간신히 포착할 수 있는 시의 윤곽이란 표면에 지나지 않는다. 이것이 시의 의식으로, 산문으로 간신히 번역되는 빈약한 전언의 다발이다. 시가 그 자신을 의식할 때, 시는 시가 아닌 그 무엇이 되어 버린다. 이것은 시가 자의식의 자식이 아니라 자의식이 시의 자식이기 때문이다. 자의식이란 시적 발화의 결과로 생겨나는 주체의 상연물이지 시적 발화를 산출한 자아의 동력이 아니다. 자아란 주체의 ‘없음’을 가리기 위한 가림막에 지나지 않는다. 주체는 시의 윤리, 시의 정치, 시의 실천, 시의 미학의 결과로 생긴다. 시인과 시적 주체를 구별하지 않는 시와 윤리, 시와 정0 16017치, 시와 실천, 시와 미학에 대한 모든 이야기들이 공전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우리는 시인을 변호할 것이 아니라 시를 변호해야 하며,그것은 자기도 모르면서 실천하고 있는 바로 그 실천을 변호하는 것이다.비평이 흔히 제출하는 ‘시 의식 연구’야말로 시의 표면에 대한 연구이다.시 의식이란 시를 낳은 심층의 결과가 아니라, 시의 주제 (사상과 의도)나 제재(이미지와 율격)에대한 연구이기 때문이다. 시는 이 표면 너머에서 어떤 심연으로 존재한다. 시는 시인의 의식에도 떠오르지 않은 것, 곧 무의식을 내장하고 있으며 그래서 흔히 그 무의식의 그림자극이 된다.1오빠가 남긴 건 한쪽 귀와 자둣빛 문틈이다방문객들 앞에서 하필 그의 머리는 향기로운 복도를 구르고 있었다2집 안으로 이어지는 행렬은 우리들의 옷을 벗기고 모든 방에서 창을 닦기시작했다여긴 미치도록 하얀 녀석들뿐이군권총을 찬 거구들이 오빠의 복도에서 앞구르기를 하는 동안에도 그걸무서워하지 않으면 더 무서운 일을 당하게 되지3기울어진 사시나무 축대어둑한 저택 안팎에서 출몰하는 백색들내부의 삐걱거림턱을 힘껏 치켜들고 겁에 질린 얼굴의 사진―남자가 전력으로 달리던 중임을 알 수 있다≻4차라리 잠드는 일을 사랑해서 침대 밖으로 사랑했던 꿈을 버리던 방바닥에 놓인 새빨간 귀는 모든 소리를 듣고 있었지 훗날 떠다니는 유령들속에서 오빠는 스스로를 가장 불쌍히 여긴다―김상혁, 「자매들」 전문첫줄을 읽어 보자. 오빠는 “한쪽 귀와 자둣빛 문틈”을 남겨 두었다. 얼굴을 붉힌 채 한쪽 귀를 세우고 문틈으로 무언가를 엿듣는 오빠를 상상했다면, 그게 첫 줄의 표면이다. 저 말에서 “귀”와 ‘(자)두’를 잘라 내어, 수음하는 오빠(귀+두)를 불러냈다면, 그게 첫 줄의 이면이다. 하필이면 그의 머리는 방문객이 있을 때 “향기로운 복도”까지 굴렀다. 보나마나, 맡으나마나, 이 향기는 밤꽃 향기였겠지. 어느 집이든 문을 잠그지 않고 수음을 하다가 식구(방문객)에게 들킨 오빠를 하나쯤 갖고 있다. 후자에 따라 시를 읽으면 우리는 “미치도록 하얀 녀석들”이나 “권총을 찬 거구들”이 누군지(그들은 티슈로 대표되거나 제 몸에 찬 살덩어리 무기로 대표된다),오빠가 왜 “턱을 힘껏치켜들고 겁에 질린 얼굴”을 하고 있는지(오빠는 지금 모니터 앞에서 “전력으로 달리”고 있다),“잠드는 일을 사랑”해 놓고도 왜 “침대 밖으로 사랑했던 꿈”을버리는지(그것은 침대 위에서 벌어질 만한 일이지만 실제로 침대를 필요로 하지는 않는 일이다),왜 “오빠는 스스로를 가장 불쌍히” 여기는지(그는 그 밤 내내 혼자였다)를알 수 있게 된다.시의 무의식에 대한 비평은 시의 존재근거를 묻는 비평이기도 하다. 시는 저 심연의 구조화된 결과물이다. 당연히 이 구조는 논증이나 서사물의구조와 달라서, 의식이 이해할 만한 일반문법을 따르지 않는다. 그것은 늘개별화의 경로를 따른다. 무의식의 문법은 일반화되는 순간 의식의 문법으로 전환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일반화가 아니고서는 한 발짝도 내딛지 못하는 시 의식 너머에까지 우리의 시선을 주어야 한다. 거기 진정한 시의 무의미가 숨어 있을 테니까.0 180195. 박자는 많으나 리듬은 적다무의식에 관한 언급이 적으니 무의식의 박동이 만들어 내는 음악에 대한언급도 적다. 음악에는 두 종류가 있다. 드럼이나 북을 규칙적으로 쳐 대는것과 같은 박자가 첫 번째라면, 자연이나 생명체가 내는 리듬이 두 번째다.리듬에 관한 두 번째 개념은 아주 다르다. (…중략…) 우리가 온종일 만들어내는 리듬이 있다. 바로 생명체의 움직임에서 나오는 리듬이다. 그것은 달리는 사람과 장대높이뛰기를 하는 사람의 리듬이며 떨어지는 폭포수와 세차게 부는 바람의 리듬이자 급상승하는 참새와 도약하는 호랑이의 리듬이다.그것은 또한 언어의 리듬이다. 이러한 종류의 리듬에는 정확히 조정된 리듬의반복적이고 고르게 주어지는 강세가 결여되어 있다. 음악에서 이 리듬은 그림의 부분들이 때로는 완벽한 균형을 이루고 또 때로는 서로 다른 힘들이 한데뒤엉키듯이, 일련의 불규칙한 음파 형태들이 다양하게 결합되어 만들어진다.이를 표준 용어로 프레이징이라 부른다.리듬에 대한 두 가지 개념들은 종종 성악적(프레이징에 대해서)인 것과 기악적(박자에 대해서)인 것으로 이해된다. 프레이징은 노래와 말에서 자연스럽게나오기 때문에 성악적이다.3드럼이나 북의 규칙적인 소리는 등량화되고 형식화된 박자를 만들어 내지만, 자연이나 생명체가 만들어 내는 소리는 불규칙적이고 의미화된 리듬을 만들어 낸다. 전자가 정형시의 음악에 해당한다면 후자는 자유시의 음악에 해당한다. 우리가 그동안 시의 음악으로 간주해 왔던 운율은 정형시에만 적용 가능한 이론이다. 형식의 강제가 불러온 기계적이고 자동화된3 베르 주르댕 저, 채현경•최재천 공역, 『음악은 왜 우리를 사로잡는가』, 궁리, 2002, 로pp.204-205.소리(운)와 소리 패턴(율)의 반복이 운율이다. 그러니 자유시에서 운율을 찾는 모든 논의는 폐기되어야 한다. 형식의 강박을 벗어던진 시가 자유시인데, 거기에 속박된 시 곧 진정한 자유시에 이르지 못한 채 정형시의 잔재를 품은 시만이 운율론의 대상이 되기 때문이다. 그것이 음수이든 음보이든 사정은 같다. 그것은 형식이 강제한 소리 우선주의이므로 소리/의미의이분법에 기초해 있다.시는 의미의 자식이며 이 점에서 시의 음악은 기악보다는 성악에 가깝다.성악에서는 리듬이 절정에 오르면 가사도 절정에 오르고, 리듬이 느슨해지면 가사도 느슨해진다. 노래를 부르는 주체의 심리가 그에 따라 오르내리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시에서도 마찬가지다. 시적 주체의 정동 그 자체가의미이므로, 시에서 의미의 패턴은 곧바로 리듬에 아로새겨진다. 의미와리듬이 동조하므로 여기에서만 진정한 소리=의미의 일원론이 수립된다.김천의료원 6인실 302호에 산소마스크를 쓰고암 투병 중인 그녀가 누워 있다바닥에 바짝 엎드린 가재미처럼 그녀가 누워 있다나는 그녀의 옆에 나란히 한 마리 가재미로 눕는다가재미가 가재미에게 눈길을 건네자 그녀가 울컥 눈물을 쏟아낸다한쪽 눈이 다른 한쪽 눈으로 옮아 붙은 야윈 그녀가 운다그녀는 죽음만을 보고 있고 나는 그녀가 살아온 파랑 같은 날들을 보고있다좌우를 흔들며 살던 그녀의 물속 삶을 나는 떠올린다그녀의 오솔길이며 그 길에 돋아나던 대낮의 뻐꾸기소리며가늘은 국수를 삶던 저녁이며 흙담조차 없었던 그녀 누대의 가계를 떠올린다두 다리는 서서히 멀어져 가랑이지고폭설을 견디지 못하는 나뭇가지처럼 등뼈가 구부정해지던 그 겨울 어느 날0 20021하건대, 내가 쓴 시에서도 리듬을 이루는 소리들의 박동은 있었다.어머니, 월수금 오후 두 시마다 사지에 못 박히네골고다로 가는 칠성판 위에 누워 골골 신음하네이곳은 회생 한의원, 개량한복 입은 로마군병이주변을 슬슬 돌아다니며 감시하네어머니, 두 손과 발에서 시작된 통증이온몸을 돌아 나오네 주기도문도 가상칠언도가 닿지 않는 심연이 몸 안에 있네쥐며느리처럼 몸을 동그랗게 말고아니 어머니, 언제 며느리가 된 거지요?얘, 말도 마라 죽은 네 할머니가손과 발을 붙잡고 놓아주질 않지 뭐니?조만간 그 분과 낙원을 산책하겠구나흥, 불굴의 어머니, 월수금 오후 세 시마다박힌 못 탈탈 털고 일어나 부활하네정말 살아나셨어요, 로마군병도 증언하네―권혁웅, 「부활절에 관하여」 부분나는 의식하지 못하였으나, 완성된 시에선 저런 리듬이 구현되어 있었다. 시의 제목이 “부활절”이었기 때문에 저런 소리들이 출현했으리라고 나는 추측한다. “골고다, 칠성판, 골골, 슬슬 돌(아다니다), (가상)칠(언)”과같은 소리가 죽음 쪽에 가깝다면, “불굴, 탈탈 털(고), (정)말 살(아나다),(부)활” 등은 부활 쪽의 소리이며, 이를 연계하는 소리가 “발”→“불굴”→“부활”이다.5 무의식의 박동이야말로 소월과 미당과 지용과 백석 시의 숨은 마5 개 의미의 분할이 일어나는 곳에서는 소리-뜻의 분할도 일어난다. ‘소리-뜻’(프로조디)의 대0 22023을 생각한다그녀의 숨소리가 느릅나무 껍질처럼 점점 거칠어진다나는 그녀가 죽음 바깥의 세상을 이제 볼 수 없다는 것을 안다한쪽 눈이 다른 쪽 눈으로 캄캄하게 쏠려버렸다는 것을 안다나는 다만 좌우를 흔들며 헤엄쳐 가 그녀의 물속에 나란히 눕는다산소호흡기로 들이마신 물을 마른 내 몸 위에 그녀가 가만히 적셔준다―문태준, 「가재미」 전문4먼저 한 편의 시를 이루는 주요한 의미상 핵심어가 출현한다. 「가재미」에서 그 핵심어는 당연히 “가재미”다. “암 투병 중인 그녀”와 “나”를 매개하는이 시어가 리듬에서도 소리-뜻의 핵심어가 된다. 다시 말해서 “가재미”가의식적, 무의식적 리듬 충동의 첫 번째 메커니즘이 되어 시의 다른 곳에서비슷한 소리들을 출현시키는 것이다. 위에서 밑줄을 그어 표시한 부분이그것이다. “가재미”를 이루는 ‘ㄱ+ㅈ+ㅁ’ 소리가 그 순서대로, 혹은 순서를 바꾸어, 혹은 간격을 두고 출현하면서 전편에 풍요로운 리듬을 펼쳐 놓고 있다. 더욱이 시의 마지막 행에 이르면 이 소리가 거듭해서 출현함으로써(“가재미”를 이루는 각각의 자음이 2번(‘ㄱ’), 2번(‘ㅈ’), 4번(‘ㅁ’) 출현한다) 의미와 리듬의 절정을 이루게 된다.소리-뜻이 의식의 소관이 되면 흔히 소리은유 (동음이의어법 및 유음이의어법)가 되지만, 무의식의 간섭을 받으면 저처럼 시 전체에서 리듬을 만들어 내게 된다. 이것은 예외적인 현상이 아니라 대단히 일반화된 현상이다. 고백4 시의 비유와 리듬에 대한 상세한 해명은 졸고, 「현대시의 장(場) 연구」, 『어문논집』 68호, 이민족어문학회, 2013을 참조하라. 최근 몇몇 논문을 통해 시의 리듬을 논구하기 위한 일반 협약과 그것의 적용 예를 제시한 바 있다. 졸고, 「김소월 시의 리듬 연구」, 『한국시학연구』 37호, 한국시학회, 2013.8; 졸고, 「소리-뜻을 중심으로 구성되는 현대시의 리듬」, 『한국문학이론과 비평』 59집, 한국문학이론과비평학회, 2013.6; 졸고, 「한국 현대시의 리듬 연구」, 『우리어문연구』 46집, 우리어문학회, 2013.5. 현재 서정주 초기 시의 리듬에 관한 논문을 학회에 제출한 상태이며, 앞으로도 힘닿는 대로 우리 시의 대표적인 작품들을 검토하려 한다.성을 밝혀내는 핵심적인 메커니즘일 것이다.정의와 리듬의 분할에 관해서는 앞의 논문들을 참조하라.권혁웅 1996년 『중앙일보』를 통해 문학평론, 1997년 『문예중앙』을 통해 시 등단. 시집으로 『황금나무 아래서』 『마징가 계보학』 『그 얼굴에 입술을 대다』 『소문들』, 평론집으로 『시적 언어의 계보학』 『미래파』 등이 있음. 현대시동인상, 시인협회 젊은시인상, 현대시학작품상, 미당문학상 수상.박진성 「나의 아름다운 사전」이찬 안녕하신지요? 오늘 좌담에 참석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그럼 이제부터 좌담을시작하겠습니다. 우선 박진성 시인의 「나의 아름다운 사전」부터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이 시는 이영주 시인이 추천하셨는데, 제가 먼저 말문을 열자면, 이 시는 제목에서도 그렇고 “사전”이라는 단어가 자주 등장하는 특징을 가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사전”으로 표상되는 언어 너머의 실제 세계의 역동성과 참혹함을 드러내려는 기획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런데 “사전”이라는 것이 한계가 있지 않습니까? “사전”이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언어, 이 세상에서 실제로 일어나는 모든 사건과 사태 들을 모두 다 표현할 수는 없을 테니까 말이죠. 시인은 “사전” 너머의 실제 세계에 대해 고민을 한 듯합니다. 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사전”적인 언어로 수렴될 수 없는 어떤 창조성의 세계 곧 시적인 세계가 “사전” 너머에 있다는 사실을 시인이 말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을 했습니다.모든 얼음을 만져볼 수 없지만 나의 사전에는 자주 냉기가 다녀간다 나의오감이 실패한 단어를 나의 사전이 대신 닿는다 그러니까 나무 안에 흐르는꽃이 내 사전의 일이다나의 모국어를 읽을 수 있는 대륙까지가 이 사전의 가능성이겠지만 멀리, 반도를 버린 무덤들도 무간으로 사전에 드나든다 문장도 사전에 정박할 수 있는이유이다푸른 송곳을 들고 한 남자가 자주 다녀간다 그 남자의 하루가 모르는 숲에서●혼자 쓰러지는 나무 일지라도 그건 나의 사전의 일이 아니다 프랑스 사람 키냐르 집 앞 욘 강에 자주 시선이 빠지는 것도 죽은 사람들이 다시 푸른 눈빛으로문장을 던지고 가는 것도 나의 사전의 일은 아니다사전을 수첩이라 부르는 여자의 눈에서 다친 물고기를 건지는 일도 있다 어2 56257떤 날은 사전만 바라봐도 몸이 흐리다 나의 사전은 나의 신체를 흐르는 것이다 사전을 잃어버릴 때마다 악천후가 신체로 드나들었지만 나의 죄 없는 부주의는 그때마다 다른 기후로 이주했다이 사전이 끝날 때 모든 말들이 일어나 나의 한때를 버릴 것을 안다 폐허에서 무너진 자신의 시간을 바라보는 눈, 그 눈이 나의 사전의 이름이다●이성복, 『타오르는 물』(현대문학, 2009) 중 「모르는 숲 속에서 혼자 쓰러지는 나무」에서.장석원 박진성 시인이 이성복 시인의 팬이기 때문에 이런 부분이 인용되었네요. 저는 제가 잘 아는 사람의 시를 읽으면 그 사람의 얼굴이 떠올라서 시가 잘 보이지 않아요. (웃음) 이찬 평론가가 말했던 것과 달리 이 작품에서 저를 움직인 문장은 “나의 사전은 나의 신체를 흐르는 것이다”였는데, 자신이 시를 쓰고 있을 때 시인의 언어들이 신체 속으로 들어왔다가 나간다는 이야기 같아서 “사전”이라는 말이, 기재되기 위한 단어 자체로 만들었던 사전이 아니라, 내가 시를 쓰는 시어 사전들은 내 육체를 통과한 그런 것들이다, 이런 느낌이 들었어요. 그리고 4연, 5연으로 넘어가는부분이 매력적이라고 생각했구요.이찬 “실패한 단어를 나의 사전이 대신 닿는다”라는 표현이나, “문장도 사전에 정박할 수 있는 이유이다”라는 표현을 좀 더 골똘히 들여다보면, 그것은 그 누군가가 말했던 것처럼, 문학적 언어와 시적 사유라는 것이 결국 육체적 사고에 해당된다는 바로 그 지점을 말해 주고 있는 것 같아요. 다시 말해 시인은 시와 문학의 언어가 육체적 사고를 포함할 수밖에 없으며, 몸으로 아는 것만이 진실로 아는 것이고,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살아가는 실제의 세계다, 바로 이런 말을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기혁 시인의 신변을 생각하면 떠올려지는 고정된 정서라고 할까요, 박진성 시인의시를 읽을 때마다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아까 장석원 선생님이 말씀하신 것처럼,저 역시 시인의 신체를 암시하는 시어들을 눈여겨보게 되었는데요, 쉽게 치유될 수2 5859259없는 어떤 근원적 고통이나 아픔 같은 것을 놓치고 있지는 않나 곱씹어 봅니다. 그럼에도 그렇게 읽어야만 이해될 수 있는 작품이라면, 그 또한 한계가 아닐까 생각이들기도 했어요. 특히 이번 추천작에서는 시인의 신변을 잠시 잊고 읽어도 될 만큼 풍부하게 시적 상상력이 확장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시가 언어로 구축된 세계라면 “사전”은 바로 그 무한한 세계의 자궁이겠죠. 그런데 이 “사전”이라는 단어가 절묘하게‘사전(事前)’의 의미로 다가와요. 그렇다면 언어의 세계를 만드는 자궁이란 결국 실제사건이 일어나기 전, 어떤 가능성의 양태들이 모인 집합체라고 볼 수도 있지 않을까요? 이러한 경우 시인의 신체는 ‘사전(事前)’의 개념을 떠올리기 전에 이미 존재하고있던 몸이 되고, 행동을 실행하는 실질적인 주체로 생각해 볼 수 있어요. “어떤 날은사전만 바라봐도 몸이 흐리다 나의 사전은 나의 신체를 흐르는 것이다”와 같은 시구는 고통스러운 몸을 드러내는 것일 수도 있지만, 반대로 실천 의지를 가진 몸의 가능성에 초점을 맞춘 것처럼 읽히기도 하거든요.장석원 육체를 점령한 병에 관련된 얘기가 박진성 시인의 시에 많이 나오는데요,“폐허에서 무너진 자신의 시간을 바라보는 눈” 같은 구절은 자신의 육체와 정신이 그것 때문에 무너지는 순간을 말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병든 육체를 바라보는 “그 눈이 나의 사전의 이름이다” 같은 구절은, 시를 마무리 짓는 자신을대상화시키는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기혁 시인이 말했듯이, 이 사전이 ‘사전(事前)’ 즉 무엇이 일어나기 전이라는 의미로 충분히 여겨지기도 하고. 그렇다면 이작품은 징후의 시가 될 것이고. 박진성 시인의 시는 의문의 시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 봤어요.이영주 저도 언어와 현실, 실재 세계의 간극, 그 틈에서 시인 자신이 실감하고 느끼는 슬픔의 양태를 시로 쓰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가 여기서 집중하는 점은 “악천후”라든지 “폐허”라든지 이런 구체적이고 풍부한, 바닥의 정서 있잖아요, 파괴되고 망가지고 그 이후에 남는 것이 무엇일까를 추측하고……, 그것에 대해서 시인이 동경의 시선을 보내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것이에요. 이런것들이 갖고 있는 정서가 혹시, 장석원 선생님이 병 얘기를 하셨는데, 병든 육체에대한 자장 안에서만 머물 수도 있다는, 매몰되는 지점으로만 보이는 혐의에 대한 시2602 61261인 자신의 자의식도 있을 것 같아요. 사실 세간의 평들이 그런 부분으로 흘러갔던것도 한몫했을 것이고요. 그래서 시인이 폐허의 정서가 길어 올리는 단단한 아름다움에 집중하고, 자기 나름대로 개진의 방식으로 가고 있다, 라는 쪽으로 이 시를 봐도 좋을 것 같습니다. ‘사전’이라는 언어의 상자는 시의 풍부한 원천을 드러내는 틀로 봐도 좋으니까요. 저도 읽고 나서 개인적으로 가슴이 찡한 부분이 있었어요. 비극 안에서 꿈틀거리는 아름다움, 폐허여서 찬란한 세계를 중층적으로 쌓고 언어를조율하려는 감별사적인 태도는 확실히 박진성 시인의 새로운 에너지를 보여 준다고생각합니다. 그런 점에 응원을 보내고 싶습니다. 이 에너지는 구조적 완결성을 지향하다 보면 한계를 만나기도 하는데, 그것이 장점이자 단점이 될 수 있을 것 같아요. 시 내부에서 그런 갈등이 빚어내는 이상한 긴장 같은 것이 있는데, 사실 흥미로운 부분이기도 하구요.이찬 일단 주의를 기울여서 생각해 볼 부분이, “사전”이 아니라 “나의 사전”이라는점, 그리고 “나의 모국어”는 “나의 사전”과 같은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는 점이에요.“나의 사전”이라는 말은 내가 실제로 활용하고 있는, 현실화된 나의 시어라는 의미로쓰이고 있는 듯합니다. 그런데 제 느낌으로는, 이 시인을 단지 언어주의자로만 파악해서는 곤란할 것 같아요. 이 시인은 언어 너머의 실제 세계에 대해 훨씬 더 많은 고민과 집중력을 가지고 있는 듯하고, 이 세상에 존재하는 언어 바깥의 언어 곧 잠재적인 언어의 발생 가능성 그것에 대한 고민이 상당한 정도로 축적되어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이 문제를 조금 더 이론적인 차원에서 이야기해 보자면, 우리가 흔히 말하는 사건, 나아가 그 모든 사건을 언어가 표현할 수 없다는 것은 어떤 필연일 수밖에 없겠지요. 다시 말해 실제 사건은 무한하지만, 그에 비해 그것을 표현하는 언어는 유한하다는 말이에요. 시인은 이 문제에 대해 고민을 지속적으로 품어 온 듯 보여요. 예컨대 들뢰즈가 사건을 이야기하고, 들뢰즈의 철학을 사건의 철학이라고 이야기할 때, 그것은 프레드릭 제임슨이 ‘언어의 감옥’이라고 약간은 경멸 어린 어조로 부른 저 ‘언어 중심적 사유’와 그 이론적 모델들을 넘어서지 않습니까? 사건이라고 하는것으로 언어-표현의 문제를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니까요. 이 작품도 바로 그 자리,그 고민을 이야기하고 있는 듯합니다. 그래서 언어-기호-형식주의를 넘는 지점은2 6263263분명히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 점이 아까 다른 분들이 말씀하신 육체성, 신체성 문제와 연관되어 있는 것 같고, 시인 자신의 실존에 들어 있는 고통 이런 문제들로 연결되는 지점이 있는 것 같습니다. 따라서 이 작품은 전체적으로 울림 있는 시로 읽힙니다. 보다 명확하게 정리해서 말하자면, 이 작품은 방법론이 승하고 형식주의적인 그런 것에 매몰되어 있는 시가 아니라, 그 이상의 무언가 실존에 대한 물음이함께 있는 작품 같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기혁 박진성 시인의 시어들 가운데 ‘출렁이다’, ‘일렁이다’라는 시어가 자주 나오는데, 그 액체적인 움직임들이 이 작품에서는 “흐르는” 것이라고 표현되어 있어요. 신체가 불안하다는 어떤 강박이 역으로, 이찬 선생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언어 이전의 세계라든지, 경직되지 않고 액체 상태로 머무르려는 운동에너지를 내는 것도 같았어요.이찬 그 문제는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어요. 언어라는 것은 항상 우리의 실제 사건을 고형화시키고 붙잡으려고 하는 것이니까 말이에요. 특히 “사전”이라고 하는 것은 어떤 코드들을 통해 그것을 기성의 언어 질서로 단순화할 수밖에없는, 더 나아가 기성의 규범 체계로 가둘 수밖에 없는 숙명과도 같은 한계를 지니고 있으니까요. 그런데 실제로 우리가 겪는 사건은 사실 그렇게 어딘가에 갇히지 않고 흘러 다니는, 다시 말해 “사전”적인 언어로 포획될 수 없는 역동성을 지닐 수밖에 없는 것 아니겠어요.기혁 맥락에서 조금 벗어나는 얘기지만, 박진성 시인의 첫 시집부터 지금까지 쭉 관통하는 것이 무엇일까, 우리가 읽어 낸 ‘박진성’이 정말 그러한 것을 충족시키고 있는것일까, 좀 더 논의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이영주 시인의 말씀처럼, 병든 육체의 이미지로부터 자신의 작품이 매몰되는 것을 막기 위해 언어를 조율하고자 애쓰고있다면, 그 노력을 읽어 주는 것에서부터 다시 시작해야 할지도 모르겠어요. 저 역시 언어에 천착하는 태도가 나타난다고 보았는데, 어쩌면 이 시인이 구축하려는 세계가 “폐허에서 무너진 자신” 즉 병든 육체의 시선으로 이룩된 것이 아니라, 그 “폐허”의 바깥에서 “자신의 시간을 바라보는 눈”, 보편적 육체를 가진 자의 시선을 통해 만들어지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닌가 생각해요. 간혹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거나조금 감상적인 포즈가 드러나는 경우도 있지만, 그러한 언어를 구사한다는 건 쉬운일이 아니거든요.이찬 언어 이전의 세계는 역동적인 세계입니다. 언어로 상징화되기 이전의 세계라는 것이 역동적이고 천변만화하는 세계라는 바로 그 문제를 박진성 시인은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고 있다고 보면 될 것 같아요. 언어는 고정시키는, 지금 내가 무슨 말을 하는 순간 붙잡아서 코드화시키는 것인데, 실제 사건의 세계, 경험의 세계는 실상 매 순간 천변만화하는 역동성을 품고 있지 않습니까? 사실 그러니까 언어의 상징화 작용에서는 자꾸 어떤 빠져나가는 것들, 망각된 것들, 명명되지 않거나 표현되지 않은 것들이 생겨날 수밖에 없어요. 예컨대 라캉이 ‘실재(The Real)’를 이야기할 때, 그것은 의미 속에 고형화되기 이전의 어떤 역동적인 무의미의 세계 같은 것을 가리키지 않습니까? 그가 ‘상징화되지 않는 잔여들’, ‘의미들 속의 구멍’이라는 말로 표현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이 시에는 그런 문제의식이 분명히 있고, 그것이 또묘하게도 신체성이라고 하는 것과 결부가 되고 있는 것이 틀림없어 보여요. 따라서이 작품은 전체적인 시적 구상이나 자기 사유, 이미지의 조형 등 모든 지점에서 좋은 힘을 품고 있는 시라는 평가를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박진성 시인의 시에 대해더 하실 말씀이 없으시다면 이만 정리하고, 다음은 안현미 시인의 「상수리나무」에대해 이야기하겠습니다.안현미 「상수리나무」스스로 용서할 수 없을 것만 같은 날 배봉산 근린공원에 갔지 사는 게 바빠 지척에 두고도 십 년 동안 한 번도 가보지 못했던 그곳 상수리나무라는 직립의 고독을 만나러 갔지 고독인지 낙엽인지 죽음인지 삶인지 오래 묵은 냄새가 푸근했지 스스로를 용서할 수 없을 것만 같은 날 죽음이 다음이어야 하는지를 묻기 위해 배봉산 근린공원에 갔지 바퀴 달린 신발을 신은 아이는 바퀴를 굴리며 혼자 놀고 있었지 어차피 잠시 동안만 그렇게 함께 있는 거지 백 년후에는 아이도 나도 없지 상수리나무만 홀로 남아 오래전 먼저 저를 안아버렸2642 65265던 여자의 젖가슴을 기억해줄 테지 스스로를 용서할 수 없을 것만 같은 날 그곳에 갔지 직립의 고독을 만나러 갔지 죽음이 다음이어야 하는지를 묻기 위해 상수리나무를 만나러 갔지이영주 이 시도 제가 추천했습니다. 안현미 시인의 시의 특징은 점점 증폭되는 이미지가 쌓여서 마지막에 특유의 정서로 마감되는 힘에 있거든요. 그런데 그 힘들이 어떤 순간에는 굉장히 루즈하게 확 빠져 버리면서 물이 흐르듯 스며들 때가 있고, 어떤 순간에는 페이소스가 강한 재미있는 감각이 되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 시는 이 두가지 사이에서 묘하게 걸어 다니고 있어요. 삶과 죽음의 문제를, 세계를 이루는 아주 크고 원론적인 질서들을, 말랑말랑한 덩어리로 만들어서 자기만의 리듬 안에 넣었다, 라는 점이 주목할 만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사랑이나 이별, 회한, 고독 등의정서는 빈번하게 안현미 시인의 시 세계를 끌고 가는 통로이지만 이 시에서는 삶의고독이 죽음과 만나면서 좀 더 증폭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특유의 품, 넓은 품 안으로 끌어안으려고 하는 에너지 같은 게 느껴져서 전 개인적으로 따듯하게 읽었어요.장석원 이 작품의 핵심적 이미지는 “백 년 후에는 아이도 나도 없지 상수리나무만 홀로 남아 오래전 먼저 저를 안아버렸던 여자의 젖가슴을 기억해줄 테지”입니다. 시의 후반에 악센트가 돌출합니다. “스스로 용서할 수 없을 것만 같은 날 배봉산 근린공원에 갔지”. 이런 구절이 축자적으로 쌓이고 반복되면서 그 사이사이에 움직임이생성되는 시죠. 이렇게 보면 구조 자체는 단순한 시인데, 이 단순한 구조 안으로 침입하는 것이 죽음과 고독입니다. 죽음과 고독이라는 핵심어가 시에 출현하는 순간,시인은 ‘죽음이 살아 있는 내 곁을 스치네요’ 이렇게 말하려는 듯합니다. 배봉산 근린공원에서 “바퀴 달린 신발을 신은 아이”를 보고 백 년 후면 너도 없고 나도 없다고진술하는 시인, 시간이 지나서 모두가 사라져도 그때 상수리나무만 남아서 죽은 자들을 기억할 것이라고 말하는 시인. “먼저 저를 안아버렸던 여자의 젖가슴을 기억해줄 테지” 같은 구절이 텐션을 유지한 채 “스스로를 용서할 수 없을 것만 같은 날” “직립의 고독을 만나러 갔지”에 이르러 그 유려함의 극치가 이룩됩니다. “스스로를 용서할 수 없을 것만 같”다라고 말하는 이유가 이 시에서 어떤 것으로 드러나고, 그리고 무엇으로 변형되는지를 우리가 찾아내면 더 좋겠지요. 그렇다고 그 이유를 우리가 꼭 알아야 하는 것은 아니겠고, 시인이 꼭 보여 줘야 되는 것도 아니겠지만, 무엇때문에 “스스로를 용서할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일까요?이찬 그 정보를 주지는 않는 것 같아요. 한마디로 말하자면, 자기 스스로를 용서할수 없는 이유가 무엇 때문일까에 대해서는 노출하지 않는다는 말이에요. 그럼에도불구하고 이상하게 시 전체의 느낌은 “용서”라는 말, “직립의 고독”이라는 말, “죽음”이라는 말, 이런 것들이 축자적으로 쌓이면서, 어떤 윤리적인 문제가 바닥에 놓여 있는 곧 윤리적인 성찰을 근본 문제로 삼고 있는 시 같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제가 공부해 본 바로는, 철학자들 가운데 가장 열심히 윤리학에 대해 고민했던 사람은 레비나스인데요, 철학의 제일원리로서의 윤리학을 주장했던 레비나스는 철학에인식론, 존재론, 가치론, 미학 등등 여러 분야가 있겠지만 그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윤리학이라고 이야기하고 있고, 윤리는 당연히 고통이다, 고통이 수반되지 않은것은 윤리가 아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고통이 수반되어야만 그것이 윤리일 수 있다고 말하고 있는 셈인데, 정확하게 레비나스적인 의미의 윤리학이고 말할 수는 없지만, 어쨌든 이 작품은 어떤 부분에서 그런 단초가 슬몃슬몃 엿보이는 지점이 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저도 그래서 다른 분들이 말씀하셨던 것처럼, 이 시를 어떤 따듯한 느낌을 풍겨 내는 시로 읽었어요. 이영주 시인이 말했던 따뜻한 느낌이라는 것이, 바로 이런 윤리학에 기초하고 있는 데서 온다는 말이죠. 결국 레비나스의 윤리학은 가난한 자, 고통받는 자, 그리고 버림받은 자, 그들을 보지 않고 그들의 고통과 신음 소리에 귀 기울이지 않는 건 윤리적으로 악이라고 하는 주장을 하는 것이기때문에 그래요. 마찬가지로 연대라고 하는 것도, 같은 수준의 사람들끼리 맺는 결합이 아닙니다. 그것은 연대가 아니라 거래라고 하죠. 동일한 처지에 있는, 동일한 수준, 동일한 부와 동일한 명예, 동일한 권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끼리 서로 합치고하는 것은 거래라고 하고, 연대라고 하는 건 서로 다른 조건과 상태와 부와 권력을가진 사람들이 결합하고 하나의 테두리를 이루는 것을 가리키는 것이에요. 묘하게도 저는 그런 단초 같은 것이 이 작품에서 슬며시 엿보이는 것 같아요. 그런데 정확하게 레비나스의 윤리학적 관점에서 읽을 수 있다고 확신할 수는 없을 것 같아요. 또2 6667267한편으로는 이런 생각도 들어요. 이런 해석을 계속 밀고 갈 수 없는 이유가, 죄의식혹은 자신을 용서할 수 없는 이유가 구체적으로 드러나 있지 않은 데서 오는 것은 아닌가. 이 시인이 밝혀 놓지 않았으니까요. 사실 레비나스의 윤리학에 따르면 사람은다 죄인일 수밖에 없거든요. 왜냐하면 우리 모두가 다 예수가 될 수는 없잖아요. 예수처럼 살 수도 없고. 그러니까 우린 다 죄인일 수밖에 없겠지요. 그렇게 고통받는,신음 소리를 내는 자의 얼굴을 피하는 것이 악이라고, 고통받는 자의 얼굴, 고통으로 일그러진 얼굴에서 고개를 돌리는 것 자체가 악이라고 본다는 말입니다. 만일 레비나스의 윤리학으로 이 시를 읽는다고 한다면, 저 죄의식의 정체가, 내가 나를 “용서”할 수 없다는 것이 바로 그 윤리학의 무서운 기초라고 볼 수 있을 것도 같아요. 또그러면서도 그것은 결국 우리에게 어떤 따뜻함을 선사한다는 점이 특이합니다. 왜냐하면 이 시의 화자는 자기 자신을 벌주고 있을 뿐만 아니라 한편으로는 그것을 통해자기반성을 자연스럽게 표출하기 때문입니다.기혁 저는 좀 쉽게 읽었어요. 장석원 선생님도 말씀하셨지만, “스스로 용서할 수 없”는 날, “상수리나무라는 직립의 고독을 만나러 갔”다라는 부분의 연관 관계가 궁금했어요. “직립의 고독”과 관련해서는 어느 시인의 시구가 떠오르는데(“그러므로 오해마라 다리는 길에 갇히라고 있는 것이 아니라 계속 걸으라고 있는 것이다. 사람의 다리가 하나가 아니라 둘로 갈라져 있는 것은 제 다리가 만드는 길을 쉴 새 없이 부정하라고 있는 것이다.”: 이원, 「나는 부재한다 고로 존재한다」 ) 그러니까 다리가 계속해서 걷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라면걷지 못하는 상황은 고독한 것이 되고, 반대로 걷는다 해도 다리가 두 개인 것이 결국 그 길을 부정하라고 있는 것이라면 우리는 고독을 피할 수 없어요. 시적 화자인“나”와 “상수리나무”의 관계는 이와 유사한 경우가 아닐까 해요. 살아 있는 한 계속해서 직립보행을 해야만 하는 시적 화자의 고독이 그로 하여금 “스스로를 용서할 수없”게 만든 건 아닐까. 문제는 그런 직립보행의 고독을 멈추려고 찾아간 “상수리나무” 역시 걸을 수 없는 “직립의 고독”에 직면해 있기는 마찬가지라는 점이죠. 비약해서 본다면 이 시인이 본 세계는 완전한 절망의 세계일지도 몰라요. 그런데도 시인은 완전한 절망을 찾아낼 뿐 스스로는 결코 절망하지 않아요. 안현미 시인의 장점이드러나는 지점이 바로 이 지점이라고 생각하는데, 시적 화자는 그러한 절망을 인정하면서도 “상수리나무”에게 말 걸기를 계속해요. 아니, 말 걸기를 계속해서 “상수리나무”를 “직립의 고독”에서 벗어나게 만들고 있어요. 그럼으로써 “스스로를 용서할수 없”는 날의 불안을 끝끝내 ‘스스로를 인정할 수 있는 날’의 위안으로 탈바꿈시켜요. 예를 들면, 백석이 ‘갈매나무’를 보고 자신의 이야기를 늘어놓는 듯한 그런 느낌으로 말이죠. 그럼에도 단순한 토로가 아니라 무언가를 감싸 안는 포용력이 있어요.안현미 시인 특유의 강한 여성성인 셈이죠. 대체로 사소한 일상어를 사용하는 안현미 시인의 시편들이 조금 더 넓은 곳을 바라보게 만드는 이유도 “죽음”과 같은 시어를 사용했기 때문이 아니라 부조리한 현실 인식과, 고립된 개인들을 감싸 안는 포용력이 동시에 교차하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했어요. 물론 그 대결을 승리로 이끌기 위해선 남성적인 폭력성을 능가하는 힘이 있어야 하겠지만. 죽음의 문제를 이영주 시인이 말씀하신 것처럼 깊게 생각하지 않아서 해석을 조금 축소시킨 감이 있어요. 사실, 이찬 선생님처럼 접근하고 싶었는데, 그러다 보면 어느 순간 처음 느꼈던 감동이 증발해 버리더라구요.장석원 이 시의 끝 부분, “죽음이 다음이어야 하는지를 묻기 위해 상수리나무를 만나러 갔지”가 재미있어요. 우리는 살아 있는데 이 나무는 죽음이라고 말합니다. 받아들일 수밖에 없지만 정말 죽음이라고 말합니다. 안현미 시인은 이렇게 말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어요. 죽음에 대해서 되물어 보는 것이고, 되묻는다는 것은 죽음을 인정하는 것이고, 그 너머의 상실감을 기억하면서도 따뜻한 어떤 것이 우리에게는 있는 것이고, 죽음은 서서히 시간 속의 우리를 장악하는 것이고, 나는 그 안쪽으로 빨려 들어가겠지만……. 이런 이야기들을 편하게 쉽게 뽑아내는 것이 이 시가 주는 감동의 기원이 아닐까 생각해요.이영주 공원에서 바퀴 달린 신발을 신고 아이가 혼자 놀잖아요. 안현미 시인의 시를보면, 대체로 그 여성성이 모성인데, 이 모성이 사회에서 강요된, 무조건 품어 안는모성이 아니에요. 약간 특이한 모성의 측면이 있는데, 혈연이나 제도적인 가족 관계를 자연 질서로 확장시킨 비유로써의 상투적인 모성은 아닙니다. 안현미 시인이 가장 노릇을 하면서 세상을 살아왔기 때문에 공원에서 혼자 놀고 있는 아이를 유독 섬세하게 관찰하고 그 상황에 집중하게 되었다는 거죠. 삶에 도사린 고독이라는 것은2 6869269결국 개개의 크기, 각자가 짊어지고 가는 천형 같은 것인데, 그러나 결국 이 고독들이 서로를 알아보고 껴안게 되는 것은 아닌가 싶어요. 이런 부분들 때문에 한 번 더곱씹게 되는 지점이 있습니다. 크게 보든 작게 보든 간에 지금까지 말씀하신 고통이라는 것, 가난한 자들의 고통, 버림받는 자에 대한 시선이 시인을 끌어당기고 있어요. 그 안에 자기도 있고 자기 아이도 있고 저도 있어요. 그리고 시인도 있고 시인 너머에 있는 불쌍한 아버지도 있고.장석원 핵심 시어라고 할 수 있는 “직립의 고독”에서 그런 감정을 느낄 수 있었어요.배봉산, 거기가 동대문구 전농동이에요. 서울의 삶에 굴욕들이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타워팰리스’ 하면 상징적으로 떠오르는 게 있지요. 압구정도 청담동도 그렇잖아요. 배봉산 근린공원은 순전히, 정말로, 그냥 그런 데에요. 그렇고 그런 사람들, 보통 사람들, 시민들, 서민들이 엉켜 사는 곳이에요. 잘살지 못하는, 좀 가난한, 아주많이 가난한 사람들이 층층을 이루어 뒤죽박죽 뭉쳐 있는 곳, 이 공간을 선택하여 시를 쓴 안현미 시인의 감각이 참 좋습니다.이찬 죽음 이미지가, 결국 우리는 모두 다 죽을 수밖에 없다는 사유가 우리에게 강제하는 반성 작용이 있다는 것은 분명한 것 같아요. 더 많이 가져야 뭘 할까, 결국 모든 것이 다 공(空)으로 돌아가고 아무것도 아닌데, 결국 다 죽는 것일 수밖에 없는데,이런 근원적인 사유가 우리를 일상 너머의 다른 참된 질문의 자리로 이끌고 간다는것입니다. 그런데 저는 이런 생각이 들어요. 죽음의 고독이라는 것이 안현미 시인이품고 있는 바닥의 어떤 근원적인 윤리학으로 자리 잡고 있는 것 같아요. 그런데 그것이 한편으로는 타인과 소통이 잘 안 되는 지점으로 나타날 수 있을 겁니다. 보통 사람들은 죽음이라는 궁극적인 삶의 무의미를 보지 않으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보통 사람들이 더 많이 소유하려고 하는 것, 더 많이 가지려고 하는 것은 죽음이라는 삶의 허무와 무의미를 보지 않으려고 하는 데서 온다는 말입니다. 아니 그 허무와 죽음을 피하기 위한 방편으로 오히려 더 기를 쓰고 가지려고 하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이 시인은 그것이 다 죽음 때문이다, 내가 갖고 있는 윤리학이 죽음 때문이다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삶 때문이라고 이야기하고 있는 듯해요. 죽음을 한 번 더 되치는 것 같은 느낌. 하이데거가 이렇게 이야기하잖아요. 죽음으로 미리 달려간 자의 결단성, 그 결단성이 본래적인 실존을 데려온다라고 말입니다. 이에 따르면, 만일 내가 내일 죽는다면 BMW를 몬다는 것, 그런 돈과 힘을 가지고 있다는 것 역시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될 수밖에 없겠죠. 그래서 그것이 본래적인실존을 데려온다고 하는 것일 텐데요, 안현미 시인은 하이데거 식으로 묻는 게 아니라 오히려 삶을 더 잘 살기 위해서 죽음이 필요하다, 이렇게 반문을 하고 있는 것은아닌가 저는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이영주 결국 삶을 가져가는 것이 중요한 시인이기 때문에 죽음도 아주 중요하죠.기혁 그런 느낌을 완전히 설명하지는 못하겠지만, 짐작은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안현미 시인이 「거짓말을 타전하다」에서 쓰고 「실내악」에서 다시 인용하고 있는 “고아는 아니지만 고아 같았”다라는 시구의 경우처럼, 처음 들으면 수사랄 것도 없는 간단한 문장인데 머리로 그런 말을 쓰기는 정말 어렵거든요. 고아는 아니지만 고아 같았다는 말은, 이미 시인의 개인사가 수사를 뛰어넘은 위치에 있다는 의미이고 그것은곧 수사이기를 포기함으로써 얻어진 결과라고 말할 수 있을 거예요. 다만 죽음은 아니지만 죽음 같았다는 경우가 있다면, 결국 죽음을 겪고서도 살아남았다는 불가능을현실로 만들어 버리고 싶은 시인의 욕망이 투영되어 있는 셈이지요.이찬 그런데 이 작품은 죽음 때문에 윤리적이고, 죽음 때문에 진실의 사막을 본다고말하는 것은 아닌 것 같아요. 오히려 “상수리나무”라고 하는 것이 시인 자신이 가지고 있는 윤리적인 이상을 표현하는 이미지처럼 보여요. 시인의 모든 것을 모조리다 기억하는 것이 “상수리나무”로 읽힌다는 점에서 그렇습니다. 시간의 풍화 작용을“상수리나무”가 보고 있으니까요. 그러니까 일종의 전지적 작가 시점에서, 모든 걸다 보고 있는 시인의 이상적 자아의 시선이 바로 “상수리나무”인 셈이고. 그 앞에서현실적인 자아가 일종의 자기 고해를 수행하는 것 같다는 말이에요. 아까 말한 레비나스의 윤리학 얘기를 하자면, 매 순간 우리가 사는 것 자체가 미진하고 불충분한 것일 뿐만 아니라 우리 자신도 의식하지도 못한 채 죄악을 저지르고 있는 것은 아닐까,그런데 그런 자신이 가지고 있는 부족함, 윤리적으로 덜 된 부분, 잘못한 부분 그런것들을 되돌아보는 일종의 거울 이미지로 “상수리나무”를 제시하고 있는 것 같아요.그걸 통해서 자기를 되비쳐 보게 만드는 그런 존재로 말이에요. 따라서 상수리나무2702 71271는 윤리적으로 이상적인 자아의 모습을 띠고 있는 것이 틀림없어 보여요. 결국 안현미 시인이 자신을 이중화시킴으로써, 나아가 그런 분열적 주체로 만들어 냄으로써나날의 삶을 살고 있는 나 곧 현실적인 자아와 그것 너머의 이상적인 자아를 통해 반성하고 성찰할 수 있는 계기를 이 작품 내부에서 만들어 내고 있다고 볼 수 있겠죠.“상수리나무”가 바로 그런 기능을 담당하고 있다는 것입니다.기혁 이찬 선생님의 말씀을 들어 보니까, 자아가 바라보는 모든 것이 결국 자아라는생각이 들기도 하네요. 백석이 ‘갈매나무’를 보고 고백할 수 있었던 것도 실은 그것이꼭 갈매나무이기 때문이 아니라, 나무의 수종과는 상관없이 나무가 선 자리에 시인자신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니까요. 다만 안현미 시인의 경우는 “그 드물다는 굳고 정한” 갈매나무 대신, “백 년 후에”도 “상수리나무만 홀로 남”는 극단이 있는것 같아요. 시간의 마모 속에서 주체는 사라지고 투영시킨 대상만 남는다는 것. 이를테면 나무는 아니었지만 나무 같았던 무엇이라고 해야 할까요?이찬 그것 때문에 자신을 “용서”할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이 아닌가 싶어요. 그런데 제가 생각하기에 중요한 점은,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되비추어 보려는 강한 충동, 끊임없이 자기를 성찰하는 힘을 “상수리나무”를 통해 획득하고 있다는 것이에요. 달리 말해 매 순간 현재화되는 이상적 자아의 윤리를 품고 있는 것이 “상수리나무”이기에, 시인은 또한 다시 매 순간 자신을 반성하고 성찰할 수 있는 힘을 얻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시인은 이러한 지속적인 반성과 성찰의 터전으로 자신을 밀어 넣으려는 자세와 태도, 나아가 그것을 지속적으로 견지하겠다는 의지를 “상수리나무”로부터 얻는 것으로 추정되기 때문이에요. 이 작품에서 풍겨 나는 따듯한 느낌 역시 바로이 자리에서 기원하는 것처럼 보여요.김이듬 「나의 정체성」이찬 그럼 이제 김이듬 시인의 「나의 정체성」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이 시는 기혁시인이 추천했는데 말씀을 먼저 해 보시지요.암흑 한가운데서 눈이 사라진 두개골로 물살을 가르는 심해어에게물의 흐름과 진동을 감지하는 감각 수용기가 있을 거라 믿는다면어두운 시간이 준 노래를 들었다면그러기를 바라는 것이다너는 연두, 엎드린 아이그 옆의 물고기는 얼마예요?나 또한 먹이를 고르는 중이었다시선으로 들어온 방문객들은 한순간 나를 조화롭게 만든다식기장 속 그릇처럼 어색하면서도 다정한아무렇게나 쌓아놓은 책들처럼어이, 여기 술 더 줘!술꾼들이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한순간 나는 종업원이 되어 어두운 카페 안 냉장고를 찾아본다다른 건 없어요?물건을 고르던 여자가 나한테 묻는다나는 다른 사람이 되고 다른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생각해본다손님들은 손님인 나를 착각한다나는 주인이 아닌데 주인이 되면 어떤 기분일까 생각해본다아마도 사람의 진동을 느끼는 감각기관이 다를 거야나는 의심스럽게 모호한 인상을 하고 있나 보다직업을 드러내는 옷차림도 고유한 성격을 보여주는 표정도 없을 것이다2722 73273식기장 속 유리병처럼휘어진 책장처럼내게 오는 사물을 맞이한다나는 나든 아니면 또 다른 한 사람 일생으로 그 짧은 한순간 다르게 불리어질 때암흑 한가운데서 내가 두리번거릴 때너에게로 이행할 감각이 생겨난다기뻐하며 누가 맡아도 상관없을 배역을 맡자너는 우연히 연두, 엎드린 아이, 아름다운 검은 나비뭐든 되거나 아무것도 되지 않을 자유를 가진이 소리 없는 유령들과 함께기혁 시인이 특정한 언술을 구사하게 되면, 그에 걸맞은 의미라든지 해석이라든지시인의 신변이라든지 여러 요인들이 뒤따르잖아요. 특히 여성 시인의 시편을 읽을때면 그런 여러 요인들이 선입견처럼 들러붙는 경우가 있었어요. 일종의 암묵적 코드화인데, 육체든 성적인 파토스든 피해 의식이든 ‘이것은 이러한 필연적인 이유 때문이다’라는 식의 보이지 않는 해석의 틀에 시가 묶이는 거죠. 물론 능청스러운 시인들은 그걸 역이용하기도 하지만, 시의 주제가 단순해지거나 근거 없는 냉소로 흐르기 쉬워요. 김이듬 시인의 작품을 추천하게 된 이유는 특유의 여성성을 잃지 않으면서도 그러한 코드화로부터 비교적 자유로운 위치를 점하고 있기 때문이었어요.“물의 흐름과 진동을 감지하는 감각 수용기가 있을 거라 믿는다면/ 어두운 시간이 준노래를 들었다면/ 그러기를 바라는 것이다”라는 첫 번째 연처럼 여성으로서의 “감각수용기”가 있어서 시를 쓰는 것이 아니라, 그런 “감각 수용기”가 있다고 믿기 때문에 “그러기를 바라”기 때문에 시를 쓴다는 고백은 분명 기존의 여성성과는 차별되는지점이에요. “너는 연두, 엎드린 아이”라는 자기 정체성을 포착하는 과정 역시 마치무당과 같이 어떤 무아의 경지에서 타자화된 자신을 인식함으로써 비롯된 것이 아니라, “손님들은 손님인 나를 착각”하거나, “나는 주인이 아닌데 주인이 되면 어떤기분일까 생각해” 보는 지극히 일상적인 차원에서 이루어지고 있거든요. 이것은 결국 여성의 독특한 감수성을 전면에 내세워 정체성을 구축하는 대신, 일상에서 거래되는 사물들을 맞이하고 매 순간 빚어지는 오해의 경험 속에서 여성으로서의 감각이‘믿음’의 형태로 자리 잡아 가고 있다는 걸 말해 주는 거죠. 그럼에도 아비투스로서의 여성이 아니라 믿음을 통해 “감각 수용기”가 발달하고 마침내 “암흑 한가운데서내가 두리번거릴 때/ 너에게로 이행할 감각이 생겨”날 수 있는 운동성과 능동성을 지닌 주체로서의 여성성이 드러나거든요. 남성 독자의 입장에서 말하자면 여성 시인의 “나의 정체성”이라는 구절은 다소 불편한 지점을 형성할 수도 있는데, 그러한 것을 피해 의식 없이 벗어나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너는 연두”라는 어감이둥글둥글한 구절이 나오는 것도 좋았고, “기뻐하며 누가 맡아도 상관없을 배역을 맡자” 이런 부분도 뭔가를 달관했다기보다 지극히 자연스러운 진술인 듯해서 긍정적으로 읽었어요. 이 한 편으로 너무 큰 의미를 부여한 감이 없진 않지만 최근 여성 시인들이 조금씩 나아가고 있는 게 아닌가, 이런 전망도 조심스럽게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다른 분들은 어떻게 보셨는지요?장석원 김이듬 시인의 시를 개인적으로 무척 좋아해요. 김이듬 시인의 시를 좋아하는이유는 우선 시를 잘 쓰기 때문이에요. 하하, 어이없는 이유네요. 저와는 다른 지점들이 있어서 특별히 더 좋아해요. 제가 매혹된 구절은 “너는 우연히 연두, 엎드린 아이, 아름다운 검은 나비”입니다. 불확정적인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게 해 주어서 좋았지요. 이 시는 “정체성”이라는 제목을 달고 술집에서 벌어지는 오해에 대해 쓴 거잖아요. 이 시의 화자는 손님인데, 손님이, 고객이, 종업원이 되는 순간을 우리도가끔 겪잖아요. 기분 더럽게 나쁠 때가 있는데, (웃음) 그런 상황에 대해 시를 쓰다니 남다른 감각을 지니고 있는 시인임에 틀림없어요. “너에게로 이행할 감각이 생겨난다// 기뻐하며 누가 맡아도 상관없을 배역을 맡자”라는 구절을 통해 자신의 강제적 변신을 끄집어내면서, 자신의 정체성이 타자로의 이행에서 드러난다고 말하는 지점, 김이듬 시인이 포착해 내는 시의 포인트가 저를 뚫어 버렸습니다. 이 시인이 한국 시단의 자산이구나라는 생각을 했습니다.2742 75275이영주 저도 김이듬 시인의 시를 좋아해요. 왜냐하면 얼마 전에 김이듬 시인의 시집을 꼼꼼히 읽을 기회가 있었는데 맞닿는 지점이 있었거든요. 제 눈물을 끌어내는 부분은 굉장한 비극성이었어요. 그 비극성이라는 게 아주 근본적인 비극성이라기보다는 상황, 고통으로 점철되어 있는데, 빼도 박도 못하는, 아이러니한 상황, 그래서더 강화되는 함정들…… 울컥했었거든요. 그런데 그런 느낌의 시와는 다르다는 생각이 들어서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장석원 선생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나는 누구인가,여기는 어디인가가 아니고, 이 정체성은 기존에 있었던 나라고 하는 데서 다른 곳으로 이동하려고 하는 것이죠. 이동해간다라는 의지는 변혁이나 혁명의 방식을 벗어나는 의지인 것 같아요. 삶이라는 것도 결국 미끄러져 가기 마련이지 않나, 그 미끄러짐이 수동적이지 않고 의지를 가진다는 것은 대단한 거죠. 무겁게 끌고 가지 않고어두운 면을 아름답게 만들고자 하는 점이 저는 좋았어요. 이 과정을 좀 더 극적이거나 감각적으로 구성했다면 또 다른 재미가 있었을 것 같아요. 김이듬 시인의 능력으로는 좀 더 재미있게 쓸 수 있지 않았을까 싶어서요.이찬 1-6연까지는 정황 설정이고, 시인이 정말 얘기하고 싶었던 것은 마지막 세 연인 것 같은데, 재미있는 것은 “내게 오는 사물을 맞이한다”라는 구절과 “너에게로 이행할 감각이 생겨난다”라는 구절입니다. 이 구절들은 결국 마지막 연으로 수렴되는데, 그것이 사실은 아주 낯선 문법은 아니죠. 가면이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고, 상황과 조건과 맥락에 따라서 그렇게 정체성을 바꿀 수 있는 개체의 능력을 말하는 것으로 보여요. 그런데 일종의 활달한 그 가면들을 무거운 느낌으로 처리하지 않는 것같아요. 시인 자신의 수많은 페르소나들을 활달한 가면으로 바꾸어 놓았고, 오히려무겁지 않고 심플하고 가벼운 느낌으로 만들어 놓은 것 같아요. 전체적으로 아까 말씀들 하셨던 것처럼 약간 단순한 느낌은 있습니다. 구조 전체가 단순하다는 느낌이들어요. 그래도 이미지들이 결합되는 부분들은 설득력이 있고 맨 마지막 부분, 특히 “너는 우연히 연두, 엎드린 아이, 아름다운 검은 나비”는 뭐랄까요 매혹적인 이미지라는 생각이 듭니다. 맨 마지막의 “이 소리 없는 유령들”은 그러니까 ‘나’한테 오는 수많은 정령들이겠죠. 예컨대 노래방에서 미친 듯이 노래할 때 미친 사람이 되는 거고, 또 슬픔에 한번 빠지면 슬픈 사람이 되는 거고, 때와 장소와 조건과 상황에 따라 무한히 변화할 수 있는 자아의 역동성, 주체의 역동성 그걸 얘기하고 있는것일 테니까요.장석원 이 역동성이 ‘참-현실’에서 실현되는 뚜렷한 지점들이 있기 때문에 김이듬 시인의 시가 좋은 시로 여겨지겠지요. 산문시라는 단순하고 안일한 형식이 선택되었다면, 이 시가 어떻게 바뀌었을까요? 이 작품의 국면 자체가 복잡해지면 임팩트가있을까요? 술집에서, 나는 손님인데 다른 사람들이 나를 종업원인 줄 착각하고 있다, 일종의 해프닝인데, 그걸 더 복잡하게 만들면…… 이거 뭐 완전히 뒤집어엎자는 말이 되나. (웃음)김이강 「폭설」이찬 그럼 이제 김이강 시인의 「폭설」 로 넘어가죠. 이 시는 제가 추천한 시입니다.저는 김이강 시인의 「서울 또는 잠시」라는 시 한 편을 대상으로 글을 쓴 적이 있는데, 독특하고 매력이 있었어요. 그때와 비슷한 느낌이 있는데, 저는 그 이유가 독특한 시 쓰기의 지점이 김이강 시인에게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서였고, 이 작품 역시 무언가 자기 얘기를 하고 있는데 이상하게 감정을 다 드러내지는 않는다는 느낌이 들어요. 그리고 이미지와 이미지 사이에 여백이 상당히 많아요. 또 한편으로는미래파 시인들의 시가 나왔을 때 굉장히 과격하게 때로는 격정적으로 분출되었던 시풍들과는 달라서 황인찬, 이우성 그리고 김이강 이러한 시인들은 한편으로는 절제하고 이미지 간의 여백을 많이 두고 깔끔하게 벼려진 이미지들을 구사해서 한국 시단에서 하나의 새로운 예술적 매듭을 만들고 있는 것은 아닌가 그런 생각을 했어요.그래서 이런 감정의 절제, 이미지의 단아함, 이런 쪽의 이야기를 해 보고 싶어서 이시를 추천했습니다.당신이 머물다 온 곳에서 사람들은좋은 단어를 사용한다 했다좋은 단어를 사용하면2762 77277좋은 사람이 된다고 믿는이국의 언어 근처에서이방인처럼좋은 단어에 대해 생각해보려고 했다*집으로 오는 길에배가 고파서 더 이상 생각을 할 수가 없었다나는 이제밥을 먹고 체조를 하면서옥상에 대해 생각하지 않고옥상으로 간다해가 지고 불빛들이 늘어가는 것을 본다느릿느릿 달리는 버스도눈길에 미끄러져 깔깔거리며 일어나는 사람들도당신이 머물다 온 곳에서 눈은모든 걸 가두어버리는 것이었다지만이곳에서 폭설은좋은 것이라 해도 되겠지*어깨에 눈이 쌓여 간다≻버스가 사라진 길 위로다시 버스 한 대가 지나가고버스 두 대가 세 대가지나간다눈 속에 가로막힌옥상을 가로질러 간다기혁 저 역시 이찬 선생님의 말씀에 공감합니다. 다만 여백을 살리고 절제하는 시풍을 지닌 최근의 젊은 시인들이 그러한 절제를 통해 추구하는 바가 무엇인가 하는 점에 대해서는 생각해 볼 여지가 있는 것 같아요. 한편에서는 자폐적 방백에서 벗어나제대로 된 서정성이 나타날 것이라고 내다보는 견해도 있습니다만, 제가 보기에는서정시의 정신보다도 이제는 중견의 자리에 올라 버린 미래파 시인들과는 다른 지점을 모색하다 보니 그러한 형태가 출현하게 된 것이 아닌가 합니다. 형태상의 고민이시대적 감수성이나 문학사적인 토양 위에서 이루어진 것이라기보다 우선 선배 세대와 다르게 써야 한다는 강박에서 조금 성급하게 이루어진 것 같은 느낌이 들거든요.물론 그러한 감수성과 문학사적 토양이 존재하고 있음을 확인해 주는 역할은 평론의몫이겠지만, 조심스럽게 추측하자면 전 이러한 여백과 절제의 시풍이 정형시의 형태로 가는 전초 과정에 있다고 생각해요.이찬 아니, 정형성이 문제는 아닌 듯해요. 미래파 시인들을 도식화시켜서 얘기할 수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굉장히 작위적이고 격정적으로 자기 실존과 내면의 감정을 쏟아 낸 시인들이 미래파 시인들이었고 그래서 산문시처럼 길어지고 진술이 많아지고그랬는데, 단아한 이미지의 표현이라고 하는 이 현상들을 김이강 시인을 비롯한 몇몇의 젊은 시인들이 만들어 내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 현상들에 대해 기혁 시인은부정적으로 보고 있는 건가요?기혁 부정적이라기보다는 좀 더 정형성이 드러날 거라는 생각이 든다는 거죠. 왜냐2782 79279하면 저희 세대가 시 공부를 할 때만 해도 하나의 연에 특정한 단어나 직유를 두 번이상 쓰고 그러면 욕먹었거든요. 하지만 최근의 시풍에서는 그런 반복이 더 이상 어색하지 않아요. 점점 더 짧아지고 정형화되어 갈 텐데, 그걸 퇴보라고 생각하지는 않고요. 그 정형성이 기존의 정형시가 아닌 새로운 형태로 도래해야 하지 않나, 그리고그럴 만한 충분한 문학적 근거가 뒷받침되어야 하지 않나 생각합니다.이영주 기혁 시인의 이야기를 받아서 하자면 이런 절제를 통해서 추구하는 게 뭘까하는 궁금증이 들어요. 미래파로 지칭되는 시인들이 많은 에너지를 쏟아 냈던 것에비해 차별화하고자 하는 전략적 지점이 아닐까라는 추측을 해 보기도 합니다. 절제를 통한 세계의 환기, 그 양태가 좀 더 명확하게 보이면 이런 세대론적 얘기를 할 필요가 전혀 없는 거거든요. 아직 형성 중인 과정인 거니까 여러 가지 측면을 생각해볼 수 있는 가능성이 있기도 합니다. 1, 2, 3, 4연, 이 부분이 참 재미있잖아요. 뭔가 순수하고 투명한 이미지로 쭉 흘러가다가 “집으로 오는 길”에 배가 고프잖아요.정갈한 이미지가 일상으로 들어오면서 재미있어지는 거예요. 아이러니도 독특하게느껴집니다. 이방인으로서의 자의식이 “좋은 단어”와 연결되어 있는 세계라는 것도아름답고요. 시의 끝에서 그것에 대한 방향성이나 에너지가 열려 있다면 어땠을까하는 생각은 들었습니다. 자칫하면 상투적이라는 느낌을 줄 수도 있을 거 같아요.장석원 내용 측면에서, 짧고 밋밋했어요. 깔끔했다, 압축되었다 말고요. 언제나 이런의심 하나를 갖고 있습니다. ‘내가 생각한 게 요만큼이야, 그것밖에 생각할 수 없어,아무것도 없는 거야, 그거 하나밖에.’ 이런 경우를 두고 압축, 생략, 이렇게 평가하는 것은 의심스러워요. 짧은 시를 말할 때 들이대는 ‘생략’이나 ‘함축’이라는 용어도바쇼 정도나 돼야 통하는 것 아닐까 싶구요. 짧지만 그 안에서 어떤 리듬이 느껴져야하는데, 이 시는 그에 해당되지 않는 듯해요. 이 시를 읽고 난 후의 첫 느낌은 ‘허무하다, 허망하다’였어요. 그래서 “이곳에서 폭설은/ 좋은 것이라 해도 되겠지”가, 앞에 나오는 “좋은 단어”와 “이국의 언어”, “이방인”과 연결이 되지 않았어요. 이건 어디까지나 제 개인적인 취향인데, 한 편의 시를 대상으로 삼아 한 세대를 진단하고 세태를 진단하는 것은 굉장한 무리수지만, 젊은 시인들 사이에 짧은 시가 유행하는 현상도 문제적이라고 생각합니다.이찬 제가 이 작품에 주목했던 이유가 뭐냐 하면, 김이강 시인이 장기가 하나 있는데슬로우비디오를 만드는 데 탁월하다, 마치 정지 화면처럼 풍경을 붙잡아 두는 데 능숙하다, 그러니까 풍경을 슬로우비디오처럼 묘사한다는 그런 점인데, 그게 참 독특하다고 생각해서였어요. 이 시에서도 폭설임에도 불구하고 어떤 고립의 이미지, 폭설 때문에 고립이 된 것일 텐데, 그 고립의 이미지가 뭐랄까 세상으로부터 단절된 느낌을 주고 세상과 섞이지 못하는 느낌을 주고 그게 일종의 고독의 느낌을 풍겨 낸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런데 그 느낌이 이 느릿느릿한 풍경 묘사와 잘 어울린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바로 이 지점이 김이강 시인의 독특한 시 쓰기 방법 같다는 것입니다.바로 이 지점이 김이강 시인 외에도 짧은 형식으로 시를 쓰고 정념이 승하기보다는감각적이고 압축적이고 여백이 넓은 시를 쓰는 시인들이 새롭게 일구어 내는 한국시의 새로운 예술적 짜임 관계이자, 이를 통해 하나의 새로운 흐름을 만들어 가고 있는것은 아닐까,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그리고 저는 김이강 시인의 첫 시집을 좋게 읽었는데, 독특하고 묘한 고독의 감각이 있을 뿐만 아니라 그 감각을 울부짖는 게 아니라 느릿느릿한 풍경 속에서 담아 쓰고 있는 점에서 특히 그랬어요.이영주 그게 잘 되면 굉장한 강점이 될 수 있고 손을 확 놓아 버리면 정형화되는 거겠죠. 언제나 장단점이 있는데요, 시인이 의식적으로라도 경계를 해야 할 거 같아요.그것을 어떻게 끌고 올 것인가라는 시인의 고민이 좋은 방향을 만들어 주겠죠. 장점이 될 경우에는 여백과 압축이라고 하는 것은 내가 할 말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할 수도 있지만 시에서는 이만큼 얘기하고 싶다 하는 명징한 태도가 보일 때겠죠.장석원 이찬 평론가의 얘기를 들어 보니까 시의 독특한 미학적 아름다움이 느껴지네요. 저의 무지 때문에 김이강 시인이 상처를 받게 되었다면, 죄송하다는 사과를 하겠어요. 공부가 부족해서 벌어진 일입니다. ‘아, 슬로우비디오!’ 아무나 그렇게 표현할 수는 없죠. 하지만 이런 시 쓰기 방법이 저 현실 세계와 무관하기 때문에, 나는 무관한 저 세계에 끼어들고 싶지가 않아, 이런 식이 될 수도 있다고 봐요. 저는 한편으로 이런 경향이 내재되어 있다면, 조금은 위험하다는 느낌이 들어요. 어떤 경우에는차 버리고, 어떤 경우에는 끌어안고, 술도 마시고, 뭐 이러는 것이 삶과 문학의 형식이겠죠. 그런데 이러한 방법이, 자동적으로 패턴화되는 순간을 경계해야 된다고 봅2802 81281니다. 언제나 저 멀리서, ‘세상은 흘러갈 뿐이네’, 이렇게 이해한다면, 세계를 시 안으로 끌어들이는 방법이 아니라 ‘그건 잘 모르겠어, 이해하고 싶지 않아’, 김이강 시인이 그렇다는 게 아니라, 시의 패턴이 그렇게 경직된다면 위험해지지 않을까요. 저자신에게 하는 말입니다. 제 시의 부패를 막기 위해서요.이찬 이에 대한 긍정성과 부정성을 지금 이 자리에서 논하기는 참 어려울 것 같아요.그런데 이런 건 있는 것 같아요. 폭설이란 것이 엄청난 사건이고 지금 현재의 시간속에서 사람을 비롯한 그 무엇인가를 가둬 놓고 뭔가를 하지 못하게 하고 흐름을 끊어 놓는 자연 사태가 발생한 것일 텐데, 이상하게도 이 시적 화자의 태도는 대단히피곤하면서도 단절감과 고독을 즐기는 느낌이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 상반된 느낌들이 이상하게, 묘하게 겹쳐지면서 여운을 만드는 그런 지점이 있어요. 그래서 저는이 시를 추천했고 그것도 새로운 징후처럼, 어쨌든 최근의 젊은 시인들이 다시 만들어 가고 있는 어떤 새로운 지점이라는 생각이 들어요.장석원 김수영 시인의 시는 복잡하고 어지럽게 느껴지지 않습니까. 김수영 시인에게는 ‘노래’인 시가 있어요. 그는 시를 노래라고 생각하기도 했죠. 머리로 쓰는 시가 아니라 노래로 쓰는 시. 그런 시가 있다면, 개진의 시와 노래의 시를 결합하기 위해,상호 모순되는 것들을 하나로 만들기 위해 오늘의 시인들은 무엇을 해야 할까요. 이과정에서, 이 지난한 모험 중에, 휴식을 말하고 피곤을 말한다면 과연 온당할까요?이영주 저는 솔직히 심정적으로는 동의하거든요. 이 세대들에겐 자신들만의 감수성이 있는 거죠. 다만.장석원 저는 젊은 시인들이, 우리를 포함해서, 너무 일찍 피곤해 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이런 생각이 들어요.이영주 그렇게 살아온 생활 방식이 있기 때문에 너무 압박을 받게 되면 이들이 가지고있는 장점들이 부서질 수 있다는 우려도 들긴 해요.기혁 오히려 평론 쪽에서 젊은 시인들에게 가이드라인을 제시해 주었으면 좋겠어요.무조건 너희들 한번 해 봐라, 다른 걸 쓰면 우리가 알아줄게, 이런 식이 아니라. 좀더 정치하게 지금 당신들이 쓰고 있는 게 이런 맥락인 거고, 문학사적으로 이런 토양이 바탕이 되어 있다, 이런 식으로요. 황인찬 시인만 하더라도 모 평론가가 김종삼 시인을 언급한 이후에 늘 그 그림자가 따라다니는데, 그런 식의 논의는 시인의성장에 큰 도움이 되지 않는 것 같아요. 기성 시인과 결부시켜 계보를 짜는 일도 중요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젊은 시인들 스스로 ‘지금, 여기’에서 자신들이 추구하는 행로의 최종 목적지가 어디인지 추측할 수 있도록 해 주는 데 있다고 믿어요. 여담이지만, 평론가로 막 등단했을 때 선배들이 이런 얘기를 해 주더라구요. ‘시를 읽을 때 단순히 시어나 문장을 해석하는 데만 급급해서는 안 된다, 그것이 왜 시로 씌어져야 하는지가 중요하다.’ 그런 생각을 하기 시작하니까 형태의 패턴화가 보이더라구요. 저 역시 시를 쓰는 입장에서 앞 세대의 시를 제외하고 참고할 만한 시사적자료가 생각보다 빈약하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구요. 개인적으로 우리말에서 정형성의 문제와 운율의 문제는 여전히 진행 중이라고 생각하거든요. 그런 상황에서 시가조금 짧아지고, 여백이 조금 드러났다고 해서 곧바로 새로운 것을 바란다는 것은 무리가 있을 수 있어요. 일단 저는 김이강 시인의 시에 대한 평은 유보하도록 할게요.다만 그를 포함한 젊은 시인들이 “옥상”에서만 세계를 내려다볼 게 아니라, 좀 더 넓은 곳으로 나와 주었으면 좋겠어요. “이방인”처럼 포즈를 취하는 대신 정말로 “이방인”이 되어서 말이죠.이문재 「백서 (白書)」이찬 이제 이문재 시인의 「백서」에 대해 이야기해 보죠. 제가 이 시를 추천한 이유는,어쩌면 시의 리듬 문제에 대해 여러분과 다양한 생각들을 나누어 보고 싶어서였는지도 모르겠어요. 이 작품에는 “죽음” “죽었다” “삶” 그다음에 “죽이고” 등의 어사들이계속 반복되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처럼 반복을 하면서 변주를 하고 변주를 하면서묘한 리듬을 만들어요. 그리고 리듬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의미론적인 뭔가를 만들어 내는 것이 있어요. 특히 “죽음이 죽었다”는 여러 번 반복되잖아요. “죽음이 죽었다”가 세 번 반복이 되는데, 처음과 맨 마지막이 조금 달라요. 이미지들을 관통해오면서 맨 마지막에 다른 의미가 생성되는 느낌이라는 말이죠. 한편으로는 이영광시인이 만들어 냈던 ‘유령’ 이미지가 떠오르기도 하지만, 조금 다른 것 같긴 합니다.2822 83283죽음이 죽었다.죽음이 죽어서 죽음과 동떨어졌다. 죽음이 죽음과 멀어졌다.죽음이 죽었다.삶이 죽음을 인정하지 않아서, 죽음이 삶을 간섭하지 못해서삶이 죽음과 함께 살지 못해서죽음이 죽음으로 살지 못했다. 죽음이 죽지 못하고 죽어서삶이 살지 못했다.죽음이 죽었다.삶이 죽음을 죽여서 죽음이 죽었다. 죽음이 죽음을 죽여서삶이 죽었다.삶이 삶을 살지 못해서 죽음을 죽이고죽음이 죽지 못해서 삶을 죽였다.삶이 삶을 죽이고 죽음이 삶을 죽였다.죽음이 죽었다.이영주 이 작품에서 “죽음이 죽었다”라는 구절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이 구절이 역동성을 가지고 반복되는 양상이 상당히 흥미로웠어요. 이 묘한 반복은 왜 일어날까 생각해 봤는데, 2연에서 “삶이 죽음을 인정하지 않아서, 죽음이 삶을 간섭하지 못해서”라는 부분에서 힌트를 얻었어요. 삶과 죽음이라는 게 동전의 양면처럼 함께 가는것인데 이것이 분리가 된다는 것, 우주의 질서에서 약간 벗어나 있는 거거든요. 삶과 죽음은 원래 넘나들면서 함께 가는 것이 맞는데, 현대사회에서는 이런 면조차 부서지고 깨져 버린다는 거죠. 삶도 죽고 죽음도 죽고 죽어서도 죽게 되는 이런 묘한상황이요, 나름대로 의도를 가지고 진행되는 같아요. 강하고 단호한 언술이 경직되게 읽힐 수도 있겠지만 이 또한 의도되어 있는 것 같고요.기혁 저는 이 시를 읽고 처음 떠올랐던 게 연극이었어요. 연극 중에서도 이오네스코의 부조리극에 나타나는 언어유희의 한 패턴. 물론 이문재 시인이 일부러 부조리극의 형식을 차용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이러한 언어유희의 패턴은 그리 독창적인 경우라고 보기는 어려워요. 결국 이 말장난 역시 현대의 소통 부재를 드러낸다는 혐의가 짙은데, 이것이 시로 넘어오면서 유희가 아니라 독자로 하여금 무언가를 찾아보라는 식의 불친절한 느낌을 주는 요소로 작용하고 있는 것 같아요. 부조리 계열의 작가들이 언어유희를 사용한 건 어떤 심오한 뜻이 있어서라기보다, 소통 부재의대사가 발생시키는 웃음의 순간이 존재하기 때문이거든요. “죽음이 죽었다”라는 단순한 문장에 너무 많은 해석을 가하는 것에 저는 회의적이에요. 아직도 이문재 하면「기념식수」를 떠올리는 저로서는 조금 당황스럽기도 하구요.장석원 이 시에는 리듬이 있어요. 이 리듬이 의미를 어떻게 끌고 가느냐가 문제겠지요. 이 작품이 사용한 방법 즉 동일한 단어의 연속적인 반복 과정이 삶과 죽음의 의미 차이를 무화시켜야 하는데, 이 작품은 의미의 소거를 달성하지 못한 듯 보입니다. 죽음은 죽음대로 삶은 삶대로 그 의미를 간직한 채 변화 없이 반복됩니다. 죽은리듬이에요. 쉽게 말해서 시계추가 왔다갔다 왔다갔다 하는 것이죠. 리듬을 느끼지못한 것은 아니지만, 이것을 리듬이라고 읽어야 할지 의미의 연쇄적 충돌이라고 읽어야 할지 헷갈렸습니다. 아틀라스처럼 세계를 짊어지고, 삶, 죽음, 삶, 죽음, 이아까운 말들을 무한 반복하고 있지 않나 싶어요. 의미를 소거시키지 않습니다. 삶과 죽음의 의미를 반복하면서 독자들에게 강요하는 듯해요. 제목이 ‘백서’인데 ‘흰책’이 아니잖아요, ‘자백’이잖아요. 우리에게 삶과 죽음의 의미를 되새겨라! 혹시 이런 강요가 있지는 않을까요. 저는 이 강요하는 듯한 느낌 때문에 불편했습니다. 우리더러 어떻게 하라는 것일까요. 삶과 죽음처럼 철학적인 것은 어디에도 없다, 삶과 죽음처럼 일상적인 것이 또 어디에 있으랴, 이런 진릿값을 주기(朱記)하라고 강요하는 것은 아닌가요.이찬 저는 좀 다르게 생각하는데, 이 시의 리듬에는 말을 끌고 가는 힘 같은 것이 있2842 85285다는 생각이 들고, 단순한 언어유희는 결코 아니라고 생각해요. 마지막에 보면 “삶이 삶을 죽이고 죽음이 삶을 죽였다”라고 적혀 있는데, 죽음이 다른 수많은 형태의그것처럼, 마치 나와는 아무런 상관없는 저 먼 나라의 일처럼 받아들여질 수 있는 현대 세계의 단면을 이렇게 드러내고 있는 것은 아닌가, 그렇게 생각했어요. 그냥 나와, 나의 이해득실과 관련되지 않는 문제라면, 죽음조차, 죽음이라고 하는 궁극적인 사건조차 그냥 하나의 신문 기사처럼 그렇게 가볍게 지나쳐 버리는 현대인의 삶을 풍자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곧 죽음마저도 그저 하나의 소문이나 가벼운에피소드처럼 지나쳐 버리는 세태, 나아가 바로 그 세태를 만든 현대 세계 전체에 대한 비판의 지점을 품고 있다는 말입니다.기혁 굳이 이 시에서 부조리극의 언어유희를 뛰어넘는 지점을 찾아보자면, 소통의부재와 공허한 웃음을 통해서 우리에게 남아 있는 것은 ‘죽음’뿐이라는 부조리극의진리가 “죽음이 죽었다”라는 표현을 통해서 역전되고 있다는 점이에요. 비약하자면이 작품은 기존의 부조리극에 대한 부조리극이고, 기존의 언어유희 대한 언어유희가되는 셈이죠. 그렇게만 본다면 이찬 선생님이 말씀했듯이 모종의 비판 의식이 드러난다고 얘기할 수 있겠죠. 하지만 “죽음이 죽었다”라는 문장을 사용했다고 해서 기존의 형식이 극복되거나 새로움을 주는 것 같지는 않아요.이찬 저는, 죽음조차도 삶을 의미화하지 못하게 되는, 죽음조차도 의미화될 수 없는, 그러니까 의미화될 수도 없고 대단한 사건이 될 수도 없는, 지나친 개인화, 단자화, 그런 현대 세계 전체의 벡터에 대한 비판적 의식을 가지고 있는 시다라는 생각이 들어요. 반복과 변형의 리듬을 통해 이문재 시인이 말하고자 하는 것도 그것이라는 생각했고요. 조금 무겁고 풍자적인 요소를 가지고 있지만, 이렇게 단순한 말조합을 가지고 어떤 부분에서는 상당히 무섭게 만드는 자리가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느낌이 듭니다. 저와는 좀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는 듯한데, 장석원 선생님께 한말씀 부탁드립니다.장석원 리듬에는 결국 삶이 붙어 있어요, 명확하게. 리듬을 통해서 삶과 죽음 저 너머의 역동적인 것에 도달할 수 있다는 희망을 버릴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획득되는것이 아니라고 봐요. ‘나’의 몸이 그곳으로 움직여 나아가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이시는 반복을 방법론으로 사용해서, 삶과 죽음에 대해 시인의 주관적 의미 성찰을 강력하게 개진하고 있어요. 그렇기 때문에 리듬이 없다는 말이에요. 이찬 평론가의 말이 백 퍼센트 맞아요. 저는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고 얘기해 보고 싶은 거예요. 의미의 강요가 폭력적이라는 느낌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어요. 의미의 자장 속에 단어를 밀어 넣은 채 강요하는 거죠. 이 세상에 죽음이 이렇게나 많은데, 어떻게 이런 사실을 몰라, 마치 이런 느낌이었어요. 죽음의 세계를, 죽음이라는 단어를 무기로 사용해서, 가감 없이 드러내겠다는 의도가 성공했다고 할 수 있겠네요. 다른 측면으로보면, 조금의 틈도 없이 말을 너무 세게 쏟아부은 것은 아닐까요?기혁 사실 부조리극의 대사는 그냥 눈으로 보기엔 무미건조한 말장난 같지만 상연하면 정말 재밌거든요. 그 어감 자체가 재미있으니까 전혀 뜻밖의 상황이 계속해서 벌어져요. 절박한 상황과 소통 부재의 언어가 그러한 아이러니를 만들어 내기 때문인데, 사실 이 시에서 그런 요소까지는 찾아보기 힘들어요. 오히려 언어유희를 쓰면서도 너무 진중하고, 자꾸만 의미에 매몰되고 있는 것 같거든요. 그럴 거라면 언어유희를 사용하는 시적 전략이 적절한 것인가 의문이 들어요.이찬 어떤 의미로 집결해 가는 말의 리듬과 이미지의 응집력이 시인이 메시지로 전달해서 그걸 만들어 내는 힘인데, 저는 사실 이 시와 같이 리듬을 가지고 만들어 낸 시들이 한국시에 많은가 그런 생각을 했어요.이영주 이 시가 강력한 리듬을 주기도 합니다. 그 반대급부로 경직된 느낌을 받는다면 시인의 의도와는 달라지게 되겠죠.장석원 현대시는 말소리와 의미의 간극을 인정하는 데에서 시작된다고 봐요. 이 시는죽음과 삶이라는 단어를 선택해서, 제목을 달고, 기표와 기의 간의 간극을 완벽하게우그러뜨려서 일음일의(一音一意)로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리듬이라는 불가사의가개입할 여백이 전혀 없다고 느껴져요.이찬 그런데 이 시는 어떻게 보면 첨언과 배제가 많이 들어갈 수밖에 없는 시라는 생각이 들어요. 장석원 선생님께서 말씀하시는 기표와 기의의 여백의 문제라든가, 말의 반복과 변주가 만드는 틈새라는 문제는, 현대 한국시 연구에서도 그리 활발하지못했던 논의 영역이었던 것 같고, 최근의 한국시에 대한 비평 작업에서도 여전히 미2862 87287진한 부분 같습니다. 어쩌면 이 시에 대한 우리의 이야기가 이렇게 하나로 모이기 어려운 이유 역시 한국시에서 리듬에 대한 논의가 제대로 이루어져 본 적이 없다는 데서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어요. 아무튼 시의 리듬 문제는 논증하기 어려운 난해한영역임에는 틀림없겠지만, 앞으로 현대 한국시의 연구 작업이나 현장 비평에서 보다 본격적인 차원에서 논의되어야 할 중요한 문제라는 데는 모두들 동의하시고 있는것 같네요. 그럼 이 작품에 대한 이야기는 이렇게 매듭을 짓고, 다음 작품으로 넘어가 보도록 하겠습니다.이태선 「팽창」이찬 그러면 이제 이태선 시인의 「팽창」 으로 가 볼게요. 우선 시를 추천하신 장석원선생님부터 이야기해 주시죠.1놀이공원 입구에서 그는 풍선을 불어 자전거에 묶어 놓는다 아이들이 팽팽한 풍선을 산다 그는 계속 풍선을 분다 풍선을 불 때마다 그는 고압선에 엉켜있는 자신의 영혼을 한 가닥씩 입술 새파랗도록 풍선 속에 불어넣는다 그의아버지 아버지로부터 이어진 것이다 그는 풍선을 산 아이와 그들 부모에게 팽팽한 풍선에 대해 별다른 주의 사항 일러 주지 않는다 그들도 묻지 않는다 아이들은 풍선을 들고 부모의 손을 잡고 간다 아이의 까만 머리카락이 부모 엉덩이 사이에서 나풀거린다 가끔 어떤 아이는 풍선 장수를 뒤돌아보고 어떤 아이는 갑자기 위로 치켜 올라가는 풍선을 놓칠 수 없어 손을 치켜들고 간다 공원은 붐비고 시끄러워 이런 일쯤은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는다 풍선 장수는 계속 파랑 노랑 빨강 풍선을 불어 자전거 손잡이에 매달아 놓는다2검은 짐승의 주둥이 땅에 부딪힌다 일어나 몇 발짝 내달리다 또 꼬꾸라진다짐승은 단 한 번의 호흡이 필요하다 온몸이 팽팽하게 부풀었다 제 몸뚱이 구석진 곳에 끼어 있을 숨을 찾는다 맹렬히 끌어모은다 그러나 숨은 자신의 뒷다리에 조금 남아 있을 뿐이다 그것은 버둥거리고 있는 제 뒷다리의 몫이다목구멍까지 도착할 숨은 팽창한 몸 어디에도 없다장석원 제가 매력적이라고 생각한 점은 제목 “팽창”과 ‘1’과 ‘2’로 구성된 형식의 간극사이에서 발생하는 긴장이었어요. “아이의 까만 머리카락이 부모 엉덩이 사이에서나풀거린다” 이 부분, 풍선도 엉덩이도 동그랗죠. 비극을 예고하고 있는 음성으로,죽어 가면서 부들부들 떨고 긴장하고, 사물과 사람의 팽창이 이뤄지고, 온몸이 “팽팽하게 부풀었”는데 숨과 연결이 되면서, 사실 터져서 죽는 게 아니라 터지지 못해서죽어 가는 힘, 죽음의 팽창 이런 걸 느껴서 독특한 시라고 생각했어요. 이태선 시인이 이런 데 장기가 있고, 그 장기가 제대로 발휘되고 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어요.이 시인에게 평소, 죄송하지만, 끝까지 견뎌 내는 힘이 모자라다는 생각을 했는데,이 시에서는 이태선 시인의 강력한 시의 힘을 느꼈어요.이찬 저도 일단 1과 2 사이에 이질적인 비약이 있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1과 2는 이질적인데도 불구하고, 그 이면에서 분명히 연결되는 지점이 있어요. 시 내부에서 이미지가 연쇄되면서 정말 그 무엇인가가 “팽창”하는 느낌이 있잖아요. 의미가 팽창하고, 이미지가 누적되면서, 그 무언가가 부풀어 오르는 느낌을 실감나게 만들어 냈다는 데 이 작품의 특장이 있는 것 같아요.이영주 물질성, 즉 1에서는 ‘풍선’이라고 하는 것이 팽팽하게 부풀어 가고, 그 물질성의 팽창과 함께 아이와 아버지, 역사적인 측면까지 아우르고 있는 장면 묘사가 인상적이었습니다. 2에 가면 “온몸이 팽팽하게 부풀었다”가 “숨을 찾는”, 이게 팽팽하게부풀기 때문에 숨을 찾을 수밖에 없는 이미지 구사가 참 특이하고 독특해요. 1에 보이는 정황 묘사, 이것을 보여 주는 것 자체가 풍선처럼 팽팽하게 다가옵니다. 무엇보다 풍선 이미지가 ‘짐승’과 연결되는 건 흔치 않은 것 같아요.기혁 저는 “풍선 장수는 계속 파랑 노랑 빨강 풍선을 불어 자전거 손잡이에 매달아놓는다” 이 부분이 인상적이었어요. “풍선”에 내재한 생명력의 근원을 끌어내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거든요. “파랑 노랑 빨강”은 우리가 아는 일반적인 풍선의 색인데,2 8889289이 세 가지 색은 물감의 삼원색이고 이걸 가지고 못 만들 게 없잖아요. 그런데 이 세가지 색깔을 합치면 검은색이 되거든요. 어쩌면 2연의 “검은 짐승”일 수도 있는 것이죠.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면 약간 애매한 지점이 있어요. “풍선”과 “풍선 장수”사이의 관계뿐 아니라, “풍선을 산 아이”와 “그들 부모”가 등장하기 때문에, “풍선장수”의 “그의 아버지 아버지로부터 이어진” 세대론적인 이야기는 또 아니에요. 그러면서도 제목은 “팽창”이구요. 그렇다면 몸에 대한 것인가 싶어 생각해 보면 마치애드벌룬처럼 몸이 부푸는 장면이 떠오르기도 해요. 그 애드벌룬이나 풍선 같은 것들 모두 공원 구석을 차지하고 있는 거잖아요. 공원에서 공은 ‘비어 있다’라는 뜻의한자어인데 그 ‘빌 공 (空)’ 자를, 그걸 채우고 있는 느낌이에요. 만약 여러 인간 군상을 “파랑 노랑 빨강”으로 나눌 수 있다면 공원에 모여 뒤섞인 사람들은 “검은색”이될 테고, 바글바글하게 모인 그 광경이 짐승처럼 느껴질 수도 있을 테니까요. 그래서 인파가 빠져나갈 무렵에는 “그것은 버둥거리고 있는 제 뒷다리의 몫이다 목구멍까지 도착할 숨은 팽창한 몸 어디에도 없다”라는 문장처럼 공간이 채워지고 다시 비워지고 나가는 순간의 공허, 혹은 빈 곳과 가득 찬 곳의 역전 현상 같은 걸 드러내는 것 같기도 해요. 어떤 역사를 의미하는 것 같기도 하고. 좀 과도하게 읽어 본 것인데, 풍선에서부터 여러 가지로 확장되는 것들이 살짝 안 맞는 지점, 그게 오히려이 시의 매력인 듯해요.이영주 이야기를 듣다 보니 “검은 짐승의 주둥이 땅에 부딪힌다 일어나 몇 발짝 내달리다 또 꼬꾸라진다” 이것도 풍선 같네요. 어떤 아이는 뒤돌아보고 또 어떤 아이는갑자기 위로 그것을 치켜들고 가는데, 공원에서는 아무도 이런 일들을 눈여겨보지않죠. 이 사건이 징후적으로 보이는데, 그것에 대해 정보를 주지는 않고요. 2에서짐승 자체가 풍선이 되는 현상은 분명 긴장을 불러일으키고 있습니다. 징후적인 것들이 환기하는 것을 좀 더 드러내면 어땠을까 싶기도 합니다.장석원 이태선 시인은 태생적으로 이미지를 잘 다루는 것 같아요. 부러워 죽겠어요.공원에서 파는 풍선은 기계로 공기를 집어넣지만, 아이들에게 쥐어 줄 풍선은 대개엄마 아빠의 날숨으로 풍선을 불잖아요.이영주 그래서 영혼이.장석원 그래서 “숨”이 2에 드러나는 거죠. 긴장이 풀어지지 않아요. 팽창되지만 터지지 않거든요. 터지기 일보 직전까지 가는데, 이 작품에서, 터지기 일보 직전은 양수가 터지는 광경으로 저를 몰아갔어요. 터져야 생명이 탄생하지만, 살아 있는 생명체가 터지면 죽잖아요.이찬 도입부는 우리가 놀이공원에서 겪을 수 있는 일상적인 풍경으로 시작했어요. 그런데 거기 보면 섬뜩한 이미지가 있어요. “고압선에 엉켜 있는 자신의 영혼”이라는구절 말이에요. 여기서 뭔가 약간 불길한 느낌을 한번 줬고, 그다음에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는다”라고 했어요. 그러니까 이런 느낌은 결국, 아까 죽음 얘기도 비슷한데, 사실은 이미 죽음이 전조처럼 이미 예기되어 있지만, 우리는 결코 보지 못하거나 볼 수 없다는 그 말을 전해 주고 있는 것 같아요. 특히나 놀이공원 같은 데서는,사람들이 다 그렇게 안락하게 즐기고 있는 삶 안에 깃든 죽음의 어떤 전조를 절대 볼수가 없잖아요. 그게 뒤에 있는 짐승의 이미지와 묘하게 잘 맞닿아요. 죽음의 이미지인데, 숨이 거의 다 끊어져 가는 듯한 이미지 말이에요. 거기 보면 “제 몸뚱이 구석진곳에 끼어 있을 숨을 찾는다”라고 말했는데, “숨은 자신의 뒷다리에 조금 남아 있을뿐이다” 이렇게 썼고 “목구멍까지 도착할 숨은 팽창한 몸 어디에도 없다”라고 했거든요. 이 구절들은 우리가 인식하지 못하는 삶에 끼어 있는 어떤 불행, 어떤 죽음, 어떤운명, 우리가 볼 수 없는 어떤 그런 것들이 일상 안에 내려와 있다는 것을 말해 주고있는 것 같아요. 그 누구도 볼 수 없는 저 운명선을 풍선의 이미지에 덧입혔는데, 오히려 뒤에 “짐승”의 이미지가 같이 오면서 좀 더 명확해지고 힘이 실리는 것 같아요.이질적인 이미지가 힘을 실어 주는 자리가 있으니까요. 제가 보기엔 이 작품은 상당히 잘 만들어진, 구조도 잘 만들어졌고, 이미지도 잘 만들어진 시 같습니다. 결국 우리 삶에, 그 누구도 인식하지 못하는, 삶 안에 끼어들어 있는 어떤 죽음 혹은 어떤 운명, 불행, 사고, 뭐 이런 것들을 포착해 내는 힘이 굉장히 뛰어나다고 생각합니다.기혁 저는 장석원 선생님의 말씀처럼 생명이 탄생되는 지점과 연결해 보는 것도 타당한 해석인 것 같아요. 다만 그러한 탄생의 순간을 풍선에 비유한다면 충분히 아름답게 만들 수도 있는데, 어째서 이토록 무서우리만치 담담하게 서술하고 있는지는 의문이에요. 만약 “풍선”을 사는 행위가 “아이”를 만들어 내는 과정을 비유한 것이라2902 91291면, “부모”의 존재도 필요 없고 오직 재화의 교환가치만이 남게 되요. 그런데 그것이숨을 헐떡이는 “검은 짐승”과 관련된다면 그러한 탄생은 굉장히 불행한 모습일 수밖에 없지요. 물론 작품에 직접적으로 드러나지는 않습니다만.이찬 어쨌든 여기에는 현대인이 누리는 안온한 일상적 삶에 대한 비판적 시선이 있다고 보여요. 그런데 누구도 인지하지 못하고 예측하지 못하는 불행한 죽음, 죽음은아무도 예측 못 하는 거잖아요, 그래서 어떻게 보면 이 시는 그러니까 한편으로는 저뒷면에 신의 시선이 있다고 봐야 할 거 같아요. “그는 고압선에 엉켜 있는 자신의 영혼을”이라는 표현이 상당히 육중하고 무섭게 느껴지는 이유가, 그것을 우리는 알 수없지만 만약 신이 있다면 그 신은 볼 수 있다는 거죠. 그리고 이게 묘하게 놀이공원의 이미지와 같이 가면서, 어떻게 보면 현대 문명의 안온한 삶을 추구하는 것에 대한비판적 시선이 은근히 드러나는 건 아닌가 싶어요.이영주 여담이긴 한데 저도 버스나 지하철 등 사람들이 많은 델 가면 무슨 큰일이 일어나랴 싶을 때가 많거든요. 그런데 항상 그럴 때 사건이 일어나요. 많은 사람이 있기 때문에 안전할 거라고 생각하는데 그 안정감을 배신하고 사건이 일어나 버리거든요. 놀이공원을 보면 항상 그런 생각을 했었어요. 여기서 뭔가가 터질 수도 있겠다는 불길함 같은 것. 놀이공원이기 때문에 더더욱. 애들은 그런 불길한 예감을 상징하기라도 하듯 풍선을 들고 있죠.이찬 그 의미를 조금 더 확장해 보자면 현대인이 누리는 일상적 쾌락 그리고 쾌락을누리려고 하는 욕망, 그 욕망이 사실은 굉장히 허망한 것이라는 얘기를 하고 있는 측면이 있어요. 이런 점에서, 이 작품도 현대 세계의 안온한 일상적 삶의 패턴과 그것을 지속적으로 누리려고 하는 쾌락의 구조에 대한 비판적 시각이 돋보이는 작품이라고 정리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백무산 「시간 광장」이찬 그럼 이제 백무산 시인의 「시간 광장」에 대해 얘기를 해 보죠.증기기관차가 들어오면 꼭 어울릴 낡은 읍에 가서간판 글씨 절반은 달아난 전파사 구석 먼지 앉은30년도 더 지난 에로이카 전축과 턴테이블과LP판 백여 장 합계 십삼만 원에 사서집으로 온다 모처럼 종일 두근거린다스마트폰 살까 아주 잠깐 망설이던 돈이다하루는 이미자 듣고 하루는 배호를 따라 부르고또 하루는 아바와 놀고 일요일엔 나훈아와비틀즈와 카펜트와 조미미와 만나고조잡한 건 조잡한 대로 유치한 건 유치해서 나쁘지 않다눈물 나는 건 훌쩍거리며 노래는 세월의 갈피다갈피갈피에 접어 둔 가슴앓이 사연들 실밥이 풀려그 시절 그 페이지 지지직지지직 바늘 긁힌자국마다 핏방울 뿜어져 나온다노래는 공장에서 죽은 내 동무의 얼굴을 재생한다피를 뒤집어쓴 오후 세 시 삼십 분 여름 햇살이 눈을 찌른다가난한 이별이 재생되고 비에 젖은 눈물은 지지직흘러내린다 까맣게 잊은 여자아이 얼굴이 숨이 턱 막히도록그립다 검은 얼굴 검은 손의 스무 살 내가지금 막 내 방문을 두드리는 것 같다판을 뒤지다 노래 하나 찾아낸 내 손이불에 데인다 험한세상에다리가되어, 다그 노래는 내 추억의 팔할이었다사이먼 앤 가펑클이다2922 93293≻하지만 하지만 추억이 나를 데려가기에는세상은 아직은 더러운 빚쟁이다뒹굴기에는 추억에 가시가 너무 많다이쯤에서 나는 머리를 흔든다 옛날이 그립지만그만두자 그때도 몸서리쳤지만 지금도그게 그거다 다만 추억은 시간을 호수로 만든다스마트폰에 SNS에 눈길도 주지 않는다고기계치냐고 누가 묻지만 그 반대다 나는 오랫동안다빈치와 에디슨과 테슬라의 숭배자였다그러나 어느 순간 한순간에 나는 멈추었다도시 생태계 서식지는 단일종이 점령하고별별 유사 혁명은 SNS에서 팔리고시간을 곤두세우고 끊임없이 추심하려는 자들강은 직강화 될수록 물은 소통되지 않고쏟아 낼수록 발과 발이 걸려 불통인 몸 없는 말들 때문에나는 침묵하고 앞으로도 뒤로도 가지 않는다머물려고 한 것이 아니라 나아갈 이유를 찾지 못했다내일은 해가 뜬다는 믿음은 얼마나 허약한 기회주의냐어디로 가는지 알 수는 없으나 우리는 건너야 했고그래서 필요한 것은 다리가 되는 일이라고 믿었던 날들험한세상에다리가되는데 꼭 저 첨단이 필요한 것이 아니고낡은 쟁기가 필요한 것도 아니다 꼰대가 필요한 것도 아니지만신인류가 필요한 것도 아니다 증기기관차가 필요한 것도 아니고사이보그가 필요한 것도 아니다 모든 건 도구다 도구다≻다리만 빼고 모든 도구는 그저 막대기다내 몸은 네안데르탈인과 마주하던그 몸이면서 그들이 쥐고 있던 그 막대기다그들은 여전히 나 자신 가운데 하나다시간은 광장이다 전방위 화살이다그래서 멈추는 것이 모든 방향으로 펼쳐지는 것이기를다리는 몸을 낮추고 앞으로도 뒤로도 가지 않는다장석원 저는 『만국의 노동자여』부터 백무산 시인을, (이영주 팬이에요?) 팬입니다, 좋아합니다. 한국 시단에서 ‘백무산’이라는 고유명사가 보여 줄 수 있는 것이 아직 있고, 더 많고, 지금 필요하고, 그런 만큼 상징성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해요. ‘백무산’하면, 노동자라는 아주 막강한 단어가 떠오르죠. 이 시인은 여전히 그 몫을 하고 있나요? 최근 백무산 시인이 사람, 철학, 불교 쪽으로 가서, 저 세계의 질서 이면에 숨겨져 있는 것을 초월적으로 접근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아요. 다른 사람도 아니고, 백무산 시인이. 나쁜 선입견이에요. 제목이 “시간 광장”이네요. 만약 학부생이 이런 제목을 쓰면, ‘야, 이거 말이 되니’ 하고 혼내잖아요. (웃음) 백무산 시인이그런데 ‘시간’을 제재로 삼아 시를 썼어요. 편하게 시를 시작해서 공장 체험, 죽어 가는 동료들을 통과하고, 사이먼 앤 가펑클을 통과하고, ‘험한 세상에 다리가 되어’를통과하고, 기회주의와 “모든 건 도구다 도구다”라는 말을 쏟아 내고, 그다음에 하나를 더 말하지요. “내 몸은 네안데르탈인과 마주하던/ 그 몸이면서 그들이 쥐고 있던그 막대기다”, 이 부분에서 저는 이태선 시인의 ‘풍선’처럼 터졌어요. 전율했어요.역시 웅혼한 목소리로 세계에 접근하고 있구나, 그런 걸 느꼈습니다. 오늘 우리가본 시들 또한 나름대로 무엇인가를 보여 주고 있지만, 시간에 대한 사유를 한국 시단에서 백무산 시인처럼 품어 올릴 수 있는 시인이 지금도 있다는 사실에 감격합니다.7080세대여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이영주•기혁 그래서 그래요. 웃음) 백무산 시인이 아직도 세계를 품을 수 있는 큰 사람이구나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정말로 좋은2 9495295시인이다, 내가 배울 것이 많은 시인이구나, 이런 생각을 했어요.이영주 7080.기혁 저도 79년생이라서.이영주 79구나, 전 74년생이에요.장석원 7•4 남북공동성명이 생각나는군.이영주 저는 90년대 초반 학번인데, 우리에게 힘든 게 뭐였냐면 80년대 학번들에게만날 쪼임 당했달까 하는 거예요. (웃음)장석원 우리가 그런 짓을 하긴 했지.이영주 제 세대는 어떤 경계에 있었기 때문에 백무산 시인이 일종의 화두예요, 화두,제 세대에게는.이찬 독특한 점은 이거 같아요. 저는 이 시가 개인의 추억을 얘기하는 것인데, 수많은 팝송들이 나오고, 자신의 기억 안에 들어 있는, 자기의 삶의 감각 안에 들어 있는여러 가지 맥락들을 나온다는 점이 독특하다고 생각했어요. 결국은 그 맥락들과 그감각들을 가지고, 그 추억의 역사를 통해 현대 한국의 사회•역사적 차원을 다시 보여 주고 있다는 느낌이 들거든요. 이 지점은 어떻게 보면 1980년대의 민중시나 최근의 정치시와 또 다른 맥락에 있는 같아요. 그래서 좀 놀라워요. 시의 힘이 주술성에 있다고 할 때, 제가 볼 때 시의 가장 무서운 힘은 이미 오래전 화석으로 굳어 버린 그 머나먼 과거조차도, 아니, 그 오랜 과거의 물질성조차도 지금 여기에서 살아꿈틀거리는 살갗처럼 만들어 버리는 그게 시적 언어의 가장 중요한 힘이라는 생각이드는데, 이것을 백무산 시인이 지금 이 시에서 만들어 내고 있거든요. 사실 메시지차원에서 보면 리얼리즘의 문법인데, 흔히 읽던 민중시의 문법, 그런데 그 메시지가마지막에 나오기까지 이미지를 조직하는 방식은 굉장히 미학적으로 세련되어 있어요. 그리고 이미지를 직조해 가는 구성 방법 역시 단단하다고 생각했어요. 이 지점은 예전의 1970-80년대 민중시도 하지 못했고 지금의 정치시도 이루어 내지 못하고 있는 그런 특장이라는 생각이 들어요.장석원 소설은 상대적으로 공적인 영역이라고 생각해요. 기법 자체, 매체 자체가 공적인 것인데, 시는 완전히 사적인 거라고 생각하거든요. 그래서 시인이 거느리고 찾아내는 사적인 영역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시간에 대한 개진 과정이 추억을끌어올리는 부분 말고도, ‘나는 이렇게 살아, SNS 얘기하고 그러면서’ 이렇게 사적인 영역을 시에 드러내는 것이 좋았습니다. 사적인 것들 뒤에 “도구다 도구다”라는구절에서 보듯, 저 먼 네안데르탈 시대까지 올라가서 도구의 본질로 급속 상승하는것이 오히려 자유롭고 폭넓은 상상으로 보여서 더욱 매력적이었습니다.이영주 처음부터 끝까지 끌고 나가는 이 특유의 에너지가 아주 좋았습니다. 3연이 참압권이었어요. 사적인 영역인데도 불구하고 경험 여부를 떠나 제가 확 들어갈 수 있는 부분이 생겨 버린다는 점에서요. 또 ‘어느 한순간 나는 멈추었다’라는 지점이거든요. 계속해서 달려가다가 멈추었다는 것에 의미를 부여하신 거 같아요. 그러니까 폭주하는 근현대 문명을 잠깐 멈추는 거, 이게 일반적으로 휴식을 취하기 위한 멈춤이아니라는 점입니다. 뒤로 가면 이것이 근원적인 것을 끌어올리기 위한 제동이라는것을 알 수 있어요. 마지막에 보면 “멈추는 것이 모든 방향으로 펼쳐지”고, 이게 커지거든요. “다리는 몸을 낮추고 앞으로도 뒤로도 가지 않는다”는 것, 감동적으로 다가왔습니다. 다만 중간에 흐름이 단선적이라고 해야 하나, 이런 부분들이 세대를 뛰어넘어 독자들에게 어떻게 읽힐 것인가 하는 고민도 듭니다. 약간 우려스럽기도 하고, 결국 이렇게 갈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라는 생각도 들고요.기혁 사실 선생님들이 말씀하신 정서들이 제게는 많이 낯설어야 하는데, 개인적으로민중가요라든지 리얼리즘 계열의 시를 좋아했어요. 그런 걸 접하면 굉장히 뜨겁고울컥하는 무언가가 느껴지고 그랬거든요. 하지만 지금 다루고 있는 백무산 시인의작품은 좀 다른 것 같아요. 오히려 저는 패스티쉬된 여러 텍스트들 때문에 더 친숙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제가 보기에 이 패스티쉬를 통해 말하고자 하는 바는“조잡한 건 조잡한 대로 유치한 건 유치해서 나쁘지 않다”라는 문장에 있는 것 같아요. 이런 관점에서 쓰인 시라면 이영주 시인께서 지적하신 것처럼, 설명을 너무 해버리고 친절하게 다가옴으로써 시적 긴장이 떨어지는 상황을 미리 인지했다는 말이되고, 그것은 곧 다른 것을 추구했다는 의미가 될 수도 있어요. 사실 처음 읽었을 때‘와, 정말 좋다’라는 느낌은 받지 못했어요. 다만 “강은 직강화 될수록 물은 소통되지않고/ 쏟아 낼수록 발과 발이 걸려 불통인 몸 없는 말들 때문에”라는 구절이 MB의2 962974대강 정책을 비판한 것임에도, 시적 화자가 “나는 침묵하고 앞으로도 뒤로도 가지않는다”라는 진술을 덧붙임으로써 현실 비판의 차원을 넘어서려고 한다는 점이 고무적이었어요. ‘나’를 내세워서 나머지 세계를 죽이는 게 아니라, 현실을 비판하고 있음에도 이 세계를 포용하려는 태도가 드러난다는 점에서 기존의 민중시와는 다른 차원의 감동을 주고 있다고 생각해요.이찬 그러니까 이런 대목, “그 노래는 내 추억의 팔할이었다”라는 서정주의 구절도있고 (기혁 되게 많아요.) 그리고 사이먼 앤 가펑클의 노래도 좀 가져왔고. 이런 현상은 또 어떻게 보면 요즘 시인들에게서도 많이 나타나는 현상이라고 할 수 있어요. 채상우 시인도 여러 가지 노랫말들을 가져다가 시 작품 중간중간에 끼워 넣잖아요. 또오은 시인도 그렇고. 말하자면 이 작품은 요즘 시인들한테서 영향받았다는 생각도들어요. 젊은 시인들의 문법을 미학적으로 수용하고 있는 게 보이고. 그런데 놀라운건 뭐냐 하면 그 미학적 방법에 있는 것 같아요. 이 시를 보면서 참 재미있다고 생각했는데, 저는 정치시를 민중시의 일종의 계승자라고 봐요. 미학적인 방법론은 아닐지언정 주제론적인 차원에서 말이죠. 정치시는 민중시의 재현론적 방법, 곧 자명하게 보이는 것들의 모사와 재현이 아니라 그것과는 다른 오히려 보이지 않는 것들의현시라는 방법론을 가져오기는 했지만, 그래도 계승되는 부분이 있다고 생각해요.그런데 이 시는 최근의 정치시와는 좀 다르게, 어떤 새로운 사회역사적 상상력이라는 것이 가능하구나라는 점을 보여 준 것은 아닐까 생각해요. 특히 아까 압권이라고얘기했던 3연의 이 부분은 참 좋잖아요. “노래는 공장에서 죽은 내 동무의 얼굴을 재생한다”라고 했고 “스무 살”이 되니까 “지금 막 내 방문을 두드리는 것 같다”라고 적었는데, 과거가 현재에 살아 있는 것 같은 (이영주 너무 슬퍼.) 과거가 단지 그냥 지나가 버린 역사의 차원에 머물러 있는 게 아니라 우리 삶의 현재로 육박해서 같이 오니까요. 바로 이 지점이 과거를 활물화하는 시적 언어의 주술성의 최대치를 제대로 살려 낸 지점으로 높게 평가될 수 있을 것 같고, 이 작품의 뛰어난 미적 성취라고 할 수있을 것 같아요. 제 입장에서는, 1980년대의 민중시는 주제 의식에 대해서는 동의할 수 있지만, 리얼리즘이라는 방법론적 측면에서 보자면 뭐랄까 미학적으로 좀 세련되지 못한 경직성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런데 2000년대에 등장한 정치시나 백무산 시인의 이 시는 미학적 그리고 방법론적 차원에서도 세련된 느낌을 주고,전혀 고루하거나 경직되어 있다는 느낌을 주지 않는다는 것이죠.이영주 나름대로 의미를 보충하고 있어요. “조잡한 건 조잡한 대로 유치한 건 유치해서 나쁘지 않다”. 의도적으로 거칠게 간 측면도 있다는 뜻이죠.이찬 그런 맥락에서 더 나아가 보면 재미있는 게 있어요. 뭐가 재미있냐면, 예컨대김수영이 「거대한 뿌리」에서 요강, 망건, 뭐 이런 게 좋다, 그러고선 반동이 좋다,그래 버리잖아요. 오히려 뒤처진 한국 역사 자체를, 외국의 세련된 문물이나 문화를베끼는 게 모더니즘이 아니라, 우리가 살고 있는 이 현실에 충실해지는 것, 후진성에 철저해지고 그 몸에 충실해지는 것, 그게 현대적인 것이다라고 말하잖아요. 그래서 그는 다시 전통을 재발견하잖아요. 그에 따르면, 우리의 이 후진적인 삶의 조건을 이루는 게 역사이고 전통이잖아요. 우리 삶의 현재적인 감각을 이루는 조건, 그것이 역사이고 전통인데, 이 시에서 “조잡한 건 조잡한 대로 유치한 건 유치해서 나쁘지 않다”라는 말이나 김수영이 “무수한 반동이 좋다”라고 할 때 그것은 국수주의도아니고 전통주의도 아니고, 우리가 무슨 신성한 전통을 가지고 있다는 의미가 아니잖아요. 오히려 김수영에게 전통이란 우리 삶의 일부이고, 우리 삶의 현재적 감각을만들어 온 바로 그것이니까. 따라서 김수영은 우리 사회가 후진적이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하고, 그 육체성을 인정하는 것, 그 감각을 인정하는 것에서부터 새로운 긍지가 생겨날 수 있다고 말하잖아요. 바로 이 자리에서만 새로운 모더니즘이 가능하다라고 말했던 김수영의 어떤 놀라운 인식이, 그런 힘이 이 작품에서 느껴져요. 그래서 “조잡한 건 조잡한 대로 유치한 건 유치해서 나쁘지 않다”라는 말이 놀랍다고 생각했어요. “내일은 해가 뜬다는 믿음은 얼마나 허약한 기회주의냐”, 이 부분도 새삼 놀라워요. 진보주의 담론을 요약하면 ‘내일은 해가 뜬다’ 아니에요? 사실 이런 진보주의 담론이라고 하는 것 자체가 허망하기도 하거든요. 자동화된 낙관주의 역시 어떻게 보면 아이러니한 맹점이 있는데 그것도 묘하게 짚고 넘어간다는 점이 놀라워요.이영주 저도 이 부분 때문에 멈추어야 하지 않는가라는 생각을 했어요. 그리고 백무산시인이 계속해서 좋은 시를 쓰고 있다는 사실은 고무적이에요. 다양한 변주를 통해계속해서 현실과 밀착해서 앞으로 나아가는 세계를 보여 주고 있거든요.2982 99299이찬 논의의 폭을 조금 확대해 보면 미래파가 처음 등장했을 때 키워드가 감각이었잖아요. 감각이라고 하는 것은 공소한 이념이나 주제, 의미, 이런 게 아니라 바로 육체의 기억, 그 직접성과 연관되어 있는 것이잖아요. 어떻게 보면 그러니까 미래파의치열성도 감각의 신선함에 있었다고 볼 수 있겠죠. 그런데 이 시는 그런 감각의 측면에서도 전혀 수준이 떨어지지 않는다고 생각해요. 삶에 녹아 있는 감각의 차원과 그개인의 감각을 둘러싼 역사적 힘, 사회역사적인 힘을 잘 교직시켜 만들어 냈다는 생각이 들어요. 제가 아까부터 말한 것, 민중시의 현재적 계승자로서의 정치시, 바로그 정치시가 나아가야 할 새로운 지점을 백무산 시인이 보여 주고 있는 건 아닐까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저는 재미있고 좋았습니다.기혁 이찬 선생님의 말씀을 듣다 보니까 충분이 설명이 되긴 하는데요. 그럴수록 이시가 민중시로 분류될 수 있는가에 대한 회의가 드는 것도 사실이에요. 오래되고 낯익으니까 옛날 거, 혹은 꼰대 이런 도식을 깨고 굉장히 첨단의 자리에 그것들을 놓고 있는 것 같거든요. 마치 최신 유행의 빈티지함을 보는 느낌이 들었어요. 그래서기존 민중시가 그러하듯이 ‘지금, 여기’의 문제를 다룬다기보다 이미 아이콘화된 어떤 것들을 모던하게 재구성하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구요. 혹시나 백무산 시인이 썼기 때문에 민중시의 탈피가 아니라, 새로운 대안처럼 보이는 것은 아닐까 의심해 보게도 되요.이찬 제가 말하고 싶은 것은 뭐냐 하면, 백무산 시인은 어떤 확신이 있다는 것이에요.결국 감각, 그 개인의 감각, 개인의 실존의 역사 안에 들어 있던 수많은 감각들의 목록들이 있는데, 그 목록들이 역사성의 큰 테두리 안에서, 사회역사의 큰 테두리 안에서, 그 장력 안에서 움직이는 것이다, 라는 확신이 있다는 것이지요.장석원 노동시의 전형에서 벗어나지 못한 투쟁가들은 공장에서 투사였던 사람이 변화하는 것을 제대로 쳐다볼 수 없었을 거예요. 백무산 시인이 조금 편해졌다고 하면,자동적으로, 야 드디어 반동이 되었구만, 이렇게 말할 사람들도 있겠죠.이영주 아직도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단 말입니까? (웃음)장석원 그것은 생각이 아니라 우리의 감각이, 틀 지워진 감각이 조작해 내고 있는 것이겠죠.이찬 문제는 이 작품에 현대 세계의 여러 가지 감각적인 목록들이 나오잖아요. SNS도 나오고, 스마트폰도 나오고, 수많은 음반들, 가수들, 팝가수들, 그게 현대의 일상 세계를 지배하는 감각적 목록들로 추가될 수 있을 텐데, 저는 이런 점을 오히려반기고 싶어요. 도시적인 풍경, 일상적인 풍경, 감각으로 수용되는 게 좋아 보여요.역사적 아프리오리라는 말을 푸코가 하잖아요. 칸트가 말하는 선험적 아프리오리를비판하는 것인데, 어떤 논문에서 저는 그것을 우리의 현재적 삶의 일부를 이루는 문화적 전통과 그 조건들이라고 해석했거든요. 역사적 선험을 이루는 건 전통이다라고. 역사와 전통이라고 하는 것이 우리 삶의 조건을 이루는 거잖아요. 그런데 김수영이 말했던 전통의 재발견과 사랑 그래서 「거대한 뿌리」나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에 나왔던 그 전통의 재발견의 이미지들이 그것에 대한 생각이고 그래서 김수영시인이 탁월하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데, 지금 백무산 시인이 보여 주는 것도 “시간 광장”이라는 제목 자체가 결국 역사적 아프리오리를 얘기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리고 선험성인데, 역사적 선험은 우리의 삶의 감각을 이루어 온 규범과 제도이기도 하고 물질적 조건이기도 하고 역사적 조건이기도 하죠. 그게 사실은 사회의 물질적 맥락과도 같이 가는 것이고, 당연히 과학기술의 발전과도 같이 가는 것일 수밖에 없구요. 저는 개인의 감각과 사회역사적 총체성까지는 아니지만 사회역사적 조건을 이렇게 잘 교직해 내기가 쉽지 않다고 생각하는데, 이 시는 그런 점에서 성공했다고 봅니다. 그리고 바로 이 지점이 새로운 미학적 가능성을 보여 주고 있다는 생각을 했어요.기혁 학생운동을 경험해 본 적이 없기 때문에 민중시라는 어떤 아우라를 포착해 내기가 힘들어요. 오히려 그렇게 보다 보니까 민중시의 현실 비판 기능 즉 ‘지금, 여기’에 대한 비판이 드러나는 작품이 더 민중시에 가깝게 느껴지거든요. 이를테면 김소연 시인의 「평택」 과 같은 시인데, 분명 김소연 시인 특유의 어투로 자분자분 써 내려간 서정시예요. 하지만 그 현재성 때문에 울컥하게 만드는 지점이 존재해요. 개인적으로는 그러한 시가 많아지고 그것이 민중시라고 불려야 하지 않나 생각해요. 잘 아시다시피 이제 민중가요 엘피판을 들으려면 대학교 앞 학사주점이 아니라 홍대 앞이나 한남동의 비싼 음악 바에 가야 하거든요. 제 입장에서 볼 때 오늘날 민중시에는3 003 01301일정 부분 감상적이고 낭만적인 아우라가 덧씌워지고 있다고 생각해요. 그것을 깨지못하면 자칫 지나간 이야기를 하는 작품 이상의 것을 성취하기 어려울 수도 있어요.이영주 노동 현장에서 힘들게 일하는 사람들, 점점 더 큰 수렁에 빠져드는 사람들, 그리고 그에서마저도 소외되는, 얼굴색이 다른 외국인 노동자들…… 등등이 제가 느끼는 현장 감각이거든요. 현장성이라고 하는 측면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 하는 고민 같은 것입니다. 물론 이 시 한 편으로 그걸 다 얘기할 수는 없겠죠. 이 시가 지향하는 바는 그것까지 끌고 들어가는 것은 아니니까요.이찬 저는 이 시는 “시간 광장”이라는 제목 자체가 사회역사적인 압력, 그러니까 우리 개인의 감각을 이루고 만들고 조정하고 이끌고 나아가는, 사회역사적 보편과 사회역사적 힘들에 대한 사유가 빛나는 시고, 그러니까 지금 우리 삶의 현장보다는1970년대부터 지금까지 이어져 내려온 그런 감각의 퍼즐들을 맞춰서 보여 주는 데훨씬 장점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런데 저는 이전 시집에서 나타났던 산속에들어간 성자의 이미지보다는 오히려 여러 가지 대중문화의 감각들을 드러내고 일상으로 내려와 있는 시인의 그 일상적이고 도시적인 감각이 훨씬 더 좋게 느껴졌어요.그래서 좀 전에 말했던 그 현장성, 달리 말해 사회•역사적 상상력이라고 하는 것 내부에, 현장으로 갈 수 있는 가능성이 이미 그 안에 내장되어 있을 수밖에 없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렇게 산속으로 들어가는 게 아니라, 사원을 짓고 사는 사원 속의 수도승이 아니라, 현대 세계 안에서 역사적 상상력으로 나아갈 수 있는 단초를 보여 주는 이 시가 그래서 훌륭할 수밖에 없지 않나, 저는 그렇게 생각해요.이영주 이 시에서는 그게 가장 의미가 있습니다. 단초를 마련하는 것. 문학의 현장성이라는 문제는 다른 기회에 좀 더 깊게 논의되어야 할 부분이긴 합니다.이찬 백무산 시인이 앞으로 어떻게 2010년대 이후의 일상들, 감각적 목록들, 그 풍경들, 기계문명의 여러 가지 편린들을 어떤 식으로 형상화하고 어떤 방식으로 시적인 차원으로 승화하여 우리에게 보여 줄 것인가는 좀 더 봐야 될 것 같아요. 그런데저는 가능성이 보여요. 이전 시집이 『인간의 시간』인가요? 거기에서 어떤 수도승에가까운 금욕적 이미지가 엿보여서, 한편으로는 좋았지만 한편으로는 걱정도 되었는데, 저는 김수영 시인과 닿을 수 있는, 김수영적인 어떤 현대 세계의 일상성, 그 분열의 한복판 안에서 싸우는 자의, 그곳으로 갈 수 있는 자의 단초가 엿보이는 게 아닌가 그렇게 느꼈어요. 그럼 이 계절의 시들에 대한 평은 이것으로 정리하겠습니다.황병승 『육체쇼와 전집』이찬 그럼 이제 시집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황병승 시인의『육체쇼와 전집』부터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이영주 이 시집의 감수성은 황병승 시인의 시가 그동안 보여 줬던 연장선상에 있지만그 연장선에서 조금 더 솔직해진 것은 아닌가라고 생각했습니다. 황병승 시인이 가상의 세계, 또 가상의 지점에 가려고 하지만 근본적으로 이루고 있는 정서는 생활에서 오고 있거든요. 그런 부분이 굉장히 실감났다고 할까요. 또 그것을 둘러싸고 있는 핵심은 알레고리적인 방식으로 아주 풍부해지고 있어요. 비슷하게 느껴지는 목소리 때문에 익숙하게 여겨질 수도 있지만 불쑥불쑥 생활로 돌아오고 있어서 묘하게 그것이 긴장감을 불러일으켜요. 이 시집에 등장하는 여러 화자들이라든지 등장인물 등이 더 강화되거나 약화되거나 하는 것이 아닌, 일인칭의 정서로 귀결되고 있다는 느낌입니다. 그래서 내면을 엮을 수 있는 코드가 많이 보이고요. 이제 독자들이 황병승 시인의 어법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되었다는 점도 흥미롭죠. 그래서다음 시집이 궁금합니다.장석원 오랜 만에 나온 시집이잖아요? 두 번째 시집 뒤에 긴 시간이 흘러갔네요. 황병승 시인의 시집들 가운데 가장 얇은 시집이어서 고마웠어요. (웃음) 황병승 시인의 두꺼운 시집 안, 긴 시들이 많이 줄어들었습니다. 이번 시집도 형식은 두 번째 시집과 비슷하다고 얘기할 수 있어요. 이전 시집 두 권과 크게 다른 부분이 있냐고 물어 보면, 시를 쓰는 형식 즉 포맷은 비슷하다고 해야겠지만, 우선 짧은 시들이 많이있어서 다른 지점이 보인다고 말할 수 있겠네요. 이 말은 이번 시집이 앞의 두 권보다 조금은 쉬워졌다라는 얘기인데요, 우리가 비슷한 형식의 시들을 자주 봐서 익숙해진 것도 있지만, 진짜로 시가 좀 쉬워진 것 같아요. B급 하위문화 코드들이 시에많이 간섭하고 있었는데 그 점이 줄었고, 이영주 시인도 짚어 주었는데, 대신 시인자신의 얘기들이 강력하게 전면화되는 지점들이 많이 보이고 있어요. 이번 시집의3 0203303시들이 생활 세계의 비극, 이 세계 자체가 비극적이라는 인식에서 출발한다고 말하고 싶어요. 해설에도 실패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지만, 실패한 생애의 실패한 시 쓰기에 불과하다는 인식의 이면에는 그래도 계속되어야 할 시 쓰기에 대한 다짐이 숨어 있다고 생각되네요. 이 시집은 실패한 자의 내면 이야기인데, 시인은 실패를 받아들이고, 내가 다음에 ‘무엇을’이나 ‘어떻게’가 아니라, ‘그냥 이렇게 살래, 시 쓰면서, 속된 말로 조금 아파하면서’, 이런 태도를 보여 주고 있어요. 존재에 대한 자기성찰이 새롭게 시작되고 있어서, 독자들은 ‘진지한’ 시인의 얼굴을 보게 되었습니다.기본적으로 황병승 시인이 시를 잘 쓴다는 생각을 하기 때문에, 개인적으로 좋아해요. 팬이에요.기혁 저희 세대에게 황병승 시인은 마디가 있는 시인인 듯해요. 영향받은 시인들도많고. 황병승 시인 하면 떠오르는 어떤 환상과 기대감 같은 게 있거든요. 이 시집 역시 그런 기대 속에서 읽었어요. 장석원 선생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기본적인 포맷이라든가 특유의 연극적 구성 같은 건 그대로 유지되는 것 같아요. 다만 세 번째 시집인 만큼 능청맞고 짓궂은 아이가 바라본 성인의 세계를 무너뜨리려는 것에서 나아가, 성인들 사이에서의 어떤 견고한 영역까지도 포착하고 그러한 영역을 무너뜨리려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인상을 받았어요. 유년의 기억이라든지, 하위문화, 직간접적인 여러 가지 경험들에 기댄 진술이 줄어든 반면 우리 주변의 환경을 낯설게 하는시도가 두드러지는 것 같아요. 하지만 그러한 전략을 뭐라고 딱 집어서 말하기가 어려운데, 가령 마지막에 배치된 「내일은 프로」 같은 시를 보면 후반부로 갈수록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에 등장하는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의 대화가 떠오르거든요. 하지만 시인이 말하고자 하는 바가 정확히 세상의 부조리에 있는 것 같지는 않아요. 오히려 그러한 형식을 가지고 논다고 해야 하나. “나는 결국 실패를 보여주는데 실패하고 말았다! 쓸모없는 독자들이여”( 「내일은 프로」 )라는 구절에서 볼 수 있듯이 ‘부조리를 보여 주지 못해서 생기는 부조리’에 가까워요. 그러니까 황병승 시인은이 세계를 읽는 독법 자체가 달려져야 한다는 걸 주장하고 있어요. 그렇다면 그러한독법을 지닌 황병승 시인이 이 시집에서 말하고 싶은 것은 과연 무엇이었을까라는의문이 생기는데, “육체쇼와 전집”이라는 제목처럼 “전집”이라는 원전의 집합체이자 권력의 집합체와, 그 존재 자체가 “쇼”로 전락해 버린 “육체”의 관계를 통해서 우리 사회의 새로운 공백을 드러내려고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 봤어요. 반대로 생각하면, 하위문화가 점점 일반화되는 추세 속에서 “전집”이 가진 권력은 박제가 된 권력일 수도 있고, “쇼”로 전락한 “육체”의 존재 가치가 더 큰 보여 주기의 권력을 지닐 수도 있구요. 결국 건드리고 있는 지점이 달려졌다는 게 앞선 시집들과의가장 큰 변별점인 것 같아요.이찬 비극적이기는 하지만 생활을 환기시킨다는 얘기가 나왔는데 저도 그렇게 생각했어요. 저는 일단 주제, 이 시인의 의도, 즉 내용적인 측면에 대해 조금 더 얘기하고 싶은데요, 이 시집이 분명히 어떤 알레고리 형식을 차용하는 것 같긴 하거든요.예컨대 어떤 영화 혹은 어떤 만화의 내러티브를 가져온 듯한 느낌을 받았어요. 각기무엇인지는 정확히 모르겠지만, 기존에 있던 영화나 만화의 내러티브에서 많이 차용하고 있는 것은 분명해 보여요. 그런데 이런 차원에서 보면, 이 시집에서 추구하고있는 것은, 정확하게 말하자면 일인칭 자아의 내면과 영혼을 고백적 어조로 읊조리는 시적 발화의 양식은 아니죠. 자유간접화법을 대폭적으로 활용하고 있는 셈인데,남의 이야기 그리고 세상 이야기 그걸 통해서 그럼 뭘 하고 있는 것이냐가 문제가 될것 같은데요, 묘하게도 결국 그게 자기 자신의 삶의 어떤 모습, 어떤 정서, 어떤 느낌을 표현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렇게까지 자유간접화법을 전면적으로 내세웠던 시집은 그다지 많지 않았던 것 같거든요.이영주 교차 지점을 빌려 와서 그것을 시 안에서 풀어내는 방식에 있어서 황병승 시인은 철저히 문화적인 인간으로서의 태도를 보이고 있는데요, 우리가 생각하는 ‘생활’이라고 하는 게 가만히 생각해 보면 표현되지 않는, 수수께끼 같은 일들로 이루어져 있거든요. 문화적 코드가 시의 전면으로 나와서 구조를 이루는 방식이 살짝 불손하게 느껴지기도 하면서 세계의 본질을 얘기하는 데는 부족하다는 관습이 있었잖아요. 황병승 시인은 그런 관습에 대한 혐오가 있지 않았는가 싶어요. 첫 시집이 나왔을 때 B급 문화, 하위문화 이런 얘기들이 많이 나오고 논란이 많았죠. 오히려 그것이 젊은 독자들에게 어필했던 측면이 있지 않았을까요? 반대급부로. 그래서 그들에게는 어쩌면 당혹과 놀라움보다는 오히려 익숙한 세계라는 느낌을 주었을 것도 같습3043 05305니다. 이 세계에서 느끼고 있는 고통과 부조리한 측면이라고 하는 게 일차적인 상태로는 표현하지 못하는 부분이 분명히 존재한다, 그러므로 나다운 어법으로 가지고가겠다 하는 의지가 보였죠. 사실 시는 사랑과 고통에 대한 얘기잖아요. 과정이 다르면 그것이 도달하는 지점이 달라지거든요. 아까 말한 실패할 수밖에 없는 그런 운명을 환기하는 것은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장석원 형식적인 측면에서 그 방법이 많이 줄어들었어요. 세 권의 시집들 중에서 가장적게 활용된 편이에요. 재미있는 것은, 그 익숙한 방법을 줄인, 황병승 시인의 시답지 않은 시들이 대거 등장하고 있다는 점이에요. 짧은 시들이 일단 들어오고 있고,한 페이지짜리 시들이 시집에 깔리기 시작했다는 것, (웃음) 이런 사실이 무척 재미있어요. 표제작인 「육체쇼와 전집」이 대표적인 경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시인이 충분히 의도했을 거예요. 이전 시집의 장치들을 빌려 와서 쓰는 시와 그것들 없이 쓴시 두 가지 양식의 시들이 배치되어 있는데, 이런 변화를 발전이라고 하면 황병승 시인이 무척 싫어할 것 같죠? 여하튼 능수능란하게 자기 세계를 조정할 수 있는 시인이라 방법론에 대해 큰 걱정을 하지 않아도 좋을 듯해요. 아주 길게 벽돌 쌓듯이 시를건축하는 황병승 시인 개인의 장점 이외에, 실존에 대한 고민이나 고통이나 어둠이나 욕망이나, 자신에 대한 분노, 근친에 대한 증오 같은 것들이 형식의 강요 없이 자유롭게 펼쳐지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요. 같이 사는 여자 얘기까지 시에 나오고 있어요. 그것이 고통이었다면, 그것을 이제 덜어 내기 시작했다는 확신 같은 것이 시집에숨어 있더라고요. 황병승 시인이 첫 번째와 두 번째 시집에서 보여 줬던 황병승다운화려한 시들은 솔직하게 말하면, 너무 쉽고 편하게 하위문화적인 백그라운드와 텍스트들을 사용했다는 느낌, 그래서 황병승 시인 고유의 것이 세계의 텍스트에 먹히는지경까지 보여 주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지금에서야 드네요. 순전히 이번 시집의 변화에 의해 자연스럽게 발생한 생각이에요. 지금, 황병승 시인은 그것이 아닌, ‘나’의생활 이야기를 들려줄게, 이런 태도를 설정한 것이겠죠. 자기 생활을 구성하는 세목들, ‘나 말야 밥 한 끼 안 먹고 이천 원 아껴서 비디오 빌려 볼래’, 이런 솔직한 까발림에서 외려 황병승 시인의 기운이 생생하게 뛰쳐나오는 부분이 있어요. 일본 만화와영화와 포르노그래피, 미국의 마약, 성 소수자의 생활상 등등의 소재적 측면의 코드를 분류하는 일은 유의미하거나 재미있다고 여길 수는 있겠지만, 황병승 시인의 시를 사랑하는 방법으로는 부적절하다고 생각해요. 자극적인 소재들 사이사이를, 지겨워진 고딕체 그 사이사이를 누비고 있는 다른 말들이 무엇인가를 실제로 면밀하게분석해 본 사람은 없을 거예요. 어쩌면 그 유명한, 고딕체와 이탤릭체가 황병승 시인의 내면일 수도 있겠지만, 그것이 사실인지 아닌지 따지기 전에, 바로 그런 것들,황병승 시인의 시에서 주도되는 이질적인 타자의 말들을 실제로 분류해서 그것의 의미를 논리적으로 따져 연결해 본 사람은 없지요. 대부분 황병승 시인의 시에서 고딕체로 처리한 부분이 남의 말이라고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다고 봐요. 오히려 그것이진짜 자기 말이고, 그렇지 않은 부분이 전부 가짜일 수도 있지 않겠어요? 황병승 시인다운, 소년다운 트릭일 수 있지 않겠어요? 그래서 우리를 포함한 많은 ‘우직한’ 평론가들이 황병승 시인의 시는 난해하다고 말하는 것이 아닐까요. 최근, 만해마을에서 열렸던 한 세미나에서, 한 평론가가, 여전히, 이제는 별로 인기도 없고 평론의 주목도 받지 못하는 과거의 스타 황병승 시인을 ‘개작살’내는 발표를 들은 적이 있어요.저는 그분의 발표를 들으면서 슬퍼졌습니다. 그리고는 곧 그분을 존경하기 시작했어요. 완강한 순수 서정의 무식한 폭력성이 파시즘을 연상시키기도 했지만, 우리가좋아하는 황병승 시인을 비판하기 위해, 아니 조지기 위해서라도 관심을 갖고 잘 지켜봐 주고 있다는 점 때문이었어요. 그분은 세 번째 황병승 시인은 아직 읽지 않았을거예요. 국가와 민족의 미래를 걱정하는 올바르신 ‘어버이들의 연합’이, 북한이 멸망하지 않는 한, 그 괴뢰들이 정말로 악의 무리일지도 모른다는 착각에 빠질 정도의 신념으로 우리를 공포에 물들게 하는 어른들이, 세계를 선악으로 이분시켜서 철저하게 몰이해하는 경우와 비슷하다는 느낌을 저만 감지하지는 않았을 거예요. 그쪽 순수 서정을 옹호하시는 분들에게 ‘미래파’ 무리들 그중에서 황병승 시인은 괴수나 다름없는 것 같더라고요. 김경주 시인은 괜히 껴서, 황병승 시인만큼 유명했다는 이유로, 도매금으로, 재능을 이상한 형식 파괴에 낭비하는 바보가 되어 있더라고요. 두시인이 서울대를 나왔으면 절대로 그런 말을 하지 않았겠죠. 물론 서울대를 나왔다면 시를 그렇게 쓸 수도 없었겠지만. 서울대 출신 시인들이 거의 멸종했다는 사실과그 이유를, 술에 취해 열정적으로 설파하시던 퇴임한 서울대 출신 교수님의 솔직한3 0607307이야기가 떠오르네요. 아니 두 시인이 최소한 몇몇 대학의 국문과 대학원 박사 과정이라도 다녔다면, 비판은 받았겠지만, 그런 쌍욕은 피할 수 있었겠죠? 한 가지 다행스러운 것은, 아무리 욕을 한다 해도 우리의 황병승 시인은 갈대처럼 흔들리지 않을것이라는 믿음, 그는 술에 약간 취해 ‘ㅈㄲ’ 하며 씩 웃겠죠. 황병승 시인도 시 한 편한 편을 다시 면밀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는 시인이라고 생각해요. 우리가 황병승 시인의 세 번째 시집을 얼마나 기다렸습니까. 그런데 특히 문학 담론을 구성하고 창출하는 평론가들은 흔히 첫 번째 시집, 두 번째 시집, 세 번째 시집이, 독자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데, 전부 달라져야 한다는 강박에 빠져 있는 듯합니다. 저는 이런점을 정말로 혐오합니다. 평론가들은 첫 번째, 두 번째, 세 번째 평론집이 다 다른가요? 텍스트 따라다니다가 시의 내용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다른 사람들이 먼저언급해서 해석해 주기만을 기다리다가 뒷북이나 치는 사람들이 왜 시인들에게 말도되지 않는 요구를 하는지 모르겠어요. 흔히 말하는 지도 비평이 문제입니다. 시인들에게 달라져라 달라져라, 가르치려는 듯이 요구를 해도 되나요? 영리한 시인들은 평론가들과 안 싸우죠. 싸워 봐야 손해만 보니까. 중요한 것은 ‘안 달라졌네, 똑같네,끝’, (웃음) 이렇게 말하는 것이에요. 굉장히 위험하다고 봅니다. 황병승 시인의 경우에는 특히나 다름에 대한 욕망이 강력하게 작동하지 않았나 싶은데, 다행스럽게도 황병승 시인은 달라지지 않은 모습을 (웃음) 늠름하게 보여 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참 좋아요. 그런데 황병승 시인은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변화, 변신 중이었어요. 그 과정을 눈여겨봐야 한다고 생각해요. 저는 달라지는 것도 좋지만 일관되게자기 세계를 쭉 밀어붙이는 것도 좋다고 생각해서, 황병승 시인이 달라지지 않는다는 표면 전략을 내세워,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는 드문 시인이라고 생각했어요. 당연히, 틀린 말이죠. 작품 「육체쇼와 전집」 이, 아마도 『창작과 비평』이었던 것 같은데,발표되었을 때 봤는데 확인해 봐야겠지만 시를 많이 수정한 듯해요. 원작이 더 좋았다는 느낌이, 기억이 떠오르더라고요. 그리고 “전집”은 무엇일까요. “전집”이 “와”로 묶인 “육체”에 비견되거든요. 책이랑 책의 전집이라는 온몸의 구성체, 이 두 가지를 비교하면서, 죽어 가는 어떤 자, 바로 ‘나’ 황병승을 이야기하잖아요. 내 몸이 병들어 죽어 가는데 내가 시집이라면, 내가 전집이라면, 이것은 나의 육체인가? 전집은 내 문학의 육체 전부인가? 이런 의문을 던지고 있습니다.기혁 저 역시 「육체쇼와 전집」을 재미있게 읽었어요. 그런데 이 시를 읽으면서 메타시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여담이지만, 동화 작가들이 그런 얘기를하거든요. 동화 작가가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은 성인들의 규범 체계, 성인 규범의 승리인데, 정작 자신들은 어린이가 될 수 없다구요. 그래서 어떤 동화든지 차근차근곱씹어 보면 아동이 성인 규범에서 완전히 자유로워지기란 불가능해 보여요. 더구나 이 성인 규범은 경계의 대상이면서도 아동의 사회화를 진행하는 데 반드시 필요한 것이기도 하거든요. 표제작을 포함해서 황병승 시인의 이번 시집 곳곳에 그런 모습이 드러나 있어요. 비유적으로 말하자면 초기작들이 성인 화자가 어린아이의 사고를 표현하는 단계였다면, 세 번째 시집에서는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걸 알아 버린단계, 기존의 성인 규범들이 결국은 습득해야 하는 대상이라는 걸 알아 버린 단계라고 말할 수 있어요. 그런 점에서 장석원 선생님의 말씀에 동의하는데, 황병승 시인은 아이의 시선으로 세상을 보는 것에 대한 어려움은 능청스럽게 토로할지언정 그걸완전히 내려놓지는 않을 것 같아요.장석원 ‘성인 화자’는 굉장히 흥미로운 지점이에요. 많은 시인들이 청소년 화자를 내세워요. 멀리 가 봤자 대학생이죠. 그런데 대학생 중에서도 복학생은 등장하지 않죠. 쉽게 말해서 1학년, 2학년 정도인데, 이런 현상에는 좋은 측면도 있다고 생각하지만, 시집이 달라져야 된다면, 두 번째 시집, 세 번째 시집, 네 번째 시집 이렇게 성장해 가면서도 시집의 주체가 성인으로 성장해야, 아니 성장은 너무 긍정적 가치를 강요하는 단어이니 변이나 이동쯤을 쓰고 싶네요, 된다고 생각해요. 저의 견해와 다른 시집들이 굉장히 많다는 생각을 해요. 젊은 시인들의 대부분은 유년, 소년,청소년을 편애하거나 또는 편하게 느끼는 것 같아요. 황병승 시인을 이런 관점에서본다면, 첫 번째 시집과 두 번째 시집에는 빈정대는 청소년 화자들이 많이 등장하는게 사실이죠. 어른들의 세계, 섹스의 세계, 마약의 세계가 뒤섞여 있어요. ‘저게 뭐야, 우리도 그 정도는 잘 알지, 어른들보다 더 잘하지’, 이런 사고가. 이번 시집에서는 성인의 삶의 영역으로 들어온 것 아닐까요. 조금 더 성인의 세계로 진입했다는생각이 들고, 말도 안 되는 소리지만, 인유를 넘어서는 혼종적 영역 안으로 진입한3 0809309것 같은데, 황병승 시인의 세계가 이전 시집의 세계를 떠난 듯해요. 저의 착각이겠죠? 개인의 실존을 통과하면서, 앞으로는 텍스트 없이 자신의 이야기를 더 많이 하게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나의 육체로 보여 줄 수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이렇게 질문하고 있잖아요. 육체는 아프지 않을 수 없고, 이제는 텍스트가 아픈 게 아니라, 자신이 아픈 것이겠죠. 삶이라는 텍스트를 펼쳤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어요.이찬 저도 그 부분에 동의하는데 소년 화자나 유년기 화자를 내세우게 되면 그것은 어쨌든 지금 시인이 시 작품 내부에서 설정한 미학적 장치이지 지금 자신이 싸워야 할지점을 보고 있는 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요. 오히려 성인 화자를 내세우면서 현대세계 전체의 문제점들과 사투를 벌이려고 하는 황병승 시인의 섬세한 고민이 엿보인다 이렇게 얘기를 할 수 있겠죠.장석원 우리가 바라는 성인 화자는 많이 알고 느끼고 가르치고 도사인 체 하는 사람,만물이 다 편하다 편해, 이렇게 자신을 마취시킨 사람들은 아니죠.이영주 미성년 화자에서 바로 성인 화자로 건너뛰는 것이 가능한가, 무엇보다 건강한 화자라는 것이 가능한가, 그런 화자가 풀어내는 성인의 비극들이 가능한가와 같은 의문이 들어요.이찬 갑자기 떠오른 생각인데, 예컨대 아버지가 화자인 경우는 한국 시에서 극히 드물거든요. 예컨대 김수영의 「사랑의 변주곡」 을 보면 ‘아들아, 너에게 광신을 가르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사랑을 알 때까지 자라라’라고 하는데 이는 전형적인 아버지의 화법이죠. 거기에는 꼰대라고 그럴까 이 세상을 많이 산 자가 일종의 어떤 복음과 가르침을 주는 것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우리의 삶의 현장 자체가 피로인 동시에그 피로가 사랑이라는 점을 보여 주고 있고 그래서 그 시가 감동적인 점이 있어요.그런데 황병승 시인은 어떻게 보면 성인 화자 그러니까 지금 우리가 당장 느끼는 감각 혹은 느낌들은 싸울 수 없는 지점도 있고 싸워야 하는 지점도 있는데, 그리고 곧바로 실패하는 지점도 있고, 그리고 그 지점을 고스란히 드러낼 수 있는가, 사실 그것 역시도 현장의 싸움터에서 나올 수 있는 거니까 그런 모습을 지금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는데, 그런 미학적 방법과 장치를 황병승 시인이 지금 새롭게 마련해 주고있는 것은 아닌가 이런 생각도 들어요.기혁 동화 얘기를 조금 더 하자면, 아동이 성인 규범과 맞서기 위해 필요한 것이 카니발적 요소, 환타지 기법 등이라고 하죠. 황병승의 “육체쇼”에도 그런 카니발적인요소가 엿보이는 것 같아요. 그런데 그 카니발적 요소가 초기작들에서는 트랜스젠더나 하위문화 등 특정한 기간에 허용되는 화려한 축제 같은 것이었다면 세 번째 시집의 카니발은 “육체쇼”임에도 불구하고 주변에서 그냥 일어나는 일 같아요. 정말로축제가 벌어지는 게 아니라, 다를 것 없는 일상을 시인 스스로 축제라고 여기고 거기에 들어가 헤집고 다니는.이영주 권력, 금기, 억압은 어른들의 몫이잖아요. 어른들의 그런 것들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미성년들의 세계에서는 부조리와 갈등을 느낄 수 있는데, 성인 화자의 그것에 대한 비판적 시선은 전혀 없거든요.기혁 다시 한 번 말씀해 주시겠어요?이영주 성인 화자가 미성년 상태의 주체들에 대해 뭐라고 한다면 권력을 공고히 하려거나 교훈을 주려고 하는 태도에서 나오는 것이 많거든요. 시선을 그렇게 가져갈 것이 아니라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모순이라든지 끔찍함이라든지 이런 것들을 얘기할수 있잖아요. 그런 시선은 밑으로 내려가기 때문에 권력적이라고 느낄 수 있다는 거죠. 권력화되지 않은 미성년들은 비판적으로 갈 수밖에 없는 운명이 있는 것 같아요.이찬 아까 제가 한 얘기와 지금 이영주 시인의 얘기가 맞닿는 지점이 있는 거 같아요.그러니까 어쩔 수 없이 세상을 책임져야 되는, 자신 전체가 세상에 던져져서 책임질수밖에 없는 것이 성인이 되면서 많아지잖아요. 벌써 저부터도 아이와 집이 생기고집사람이 생기고 그러면서 전에 총각일 때 책임져야 하는 것과 지금 어쩔 수 없이 책임져야 하는 것이 달라지고 그러면 정말로 싸울 수 있는 폭이라고 하는 게, 자유의 폭이라고 하는 게 아무래도 달라질 수밖에 없지 않나요? 이것을 비껴서 자기를 미학적인 일종의 방어막 속에 둘 수 있는 자리를 만들 수 있는 것이 유년 화자를 채용하는 것일 수도 있다고 생각해요. 어쨌든 황병승 시인은 같은 성인임에도 불구하고 우리가흔히 말하는 보통 사람들, 정상적이지 못한 자가 치러 낼 수밖에 없는 여러 가지 실패, 고통, 부조리, 이것들을 여러 방면에서 다양하게 보여 주고 있는 것 같아요. 이런 시인은 별로 없다는 생각이 들고, 그리고 그게 결국 황병승 시인이 말하고자 하는3 103 11311“육체쇼”가 아닌가 싶어요. 오히려 소년 화자를 채용했을 때는 실제로 시인 자신의그 실존의 알몸을 보여 주는 것은 아닌 것 같거든요. 일종의 미학적 보호막 안에 자기를 집어넣는 방식인데 그 지점을 깨고 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런 생각도 드네요.기혁 황병승 시인의 첫 번째와 두 번째 시집에서는 오히려 육체적인 것이 느껴졌고,세 번째 시집에서는 뭔가 정적인, 그래서 “육체쇼와 전집”이라는 건 결국 다 끝난 사람들의 얘기 같기도 해요. 아이의 입장에서 본다면 이건 말도 안 되는 절망이고, 더이상 아이의 세계가 아닌 거죠. 이영주 시인의 말씀처럼 아이가 성인의 규범을 향해내지르는 절규를 너무 당연시하고, 그 주변의 것들에 대한 비판적 시선이 결여되는지점이 포착되는 것도 사실이에요. 이것이 동화에서라면 완전한 실패일 수도 있겠지만, 황병승 시의 내포 독자는 분명 성인이고 그렇기 때문에 회피라기보다는 그러한 실패를 전략적으로 이용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해 봤어요. ‘난 이렇게 무너져 볼 테니까, 너희가 한번 잘 해석해 봐라’ 이런 식으로 말이죠. 특유의 천진하고 짓궂은 아이의 눈동자를 하고서 말이죠. 그리고 「신scene과 함께 여기까지 왔다」 이시를 젊은 친구들 중에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더라구요. 사실 신(神)과 신(scene) 사이의 말장난을 풀어 보고 싶은 건데, 황병승 시인이니까 단순한 말장난은 아닐 것이다라는 기대감도 있고.이영주 그것도 괜찮은 작업이죠.기혁 그런데 시집을 읽을수록 작품의 좋고 나쁨을 떠나서, 이 유명한 시인이 아직까지 어린애 같더라는, (웃음) 그런 단순한 말장난을 치고 있다는 게 흥미롭기도 하고부럽기도 하고.장석원 시인에게 ‘너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현실 세계의 시를 써라’라고 말하는 것은폭력이에요. 우리 역시 이러한 요구를 황병승 시인에게 바라는 것은 아니겠죠. 황병승 시인은 시를 보여 주면 됩니다. 삶이 그를 망가뜨리게 해서는 안 돼요. 망가지는 황병승, 우리는 바라지 않습니다. 그렇게 해서는 안 돼요. 시를 일종의 게임이라고 생각하길 바랍니다. 쓰는 자와 읽는 자의 게임. 알면서 속고, 속이려고 하면 속아 주고, 그래도 욕하지 않고, 한 시인의 시를 꾸준히 읽어 내는 것, 애정을 가지고서, 진정으로, 애정에다가 존경까지 품고서. 이런 ‘쓰기-읽기’ 공동체는 왜 없을까요. 물어뜯지 말고. 지금까지의 이야기와는 상관없는 얘기지만 저는 황병승 시인의시는 흉내 낼 수 없다고 봐요. 다른 시인들이 흉내 낼 수 없는 것들을 황병승 시인만이 지니고 있다는 생각을 하고, 비평가들이 어려워하는 구석이 분명히 그에게 있고,그 불가사의가 매혹적이라고 얘기하고 싶네요.이영주 직설적으로 자기의 슬픔을 복잡함 가운데 툭 던졌는데 팍 와서 꽂히는 ( 장석원 농구 선수처럼) 그런 게 또 입체감을 보여 주는 것 같아요.이찬 그런 부분들이 이전 시집들보다는 많아졌다고 얘기할 수 있겠죠. 그리고 만약사석에서 단 둘이 만난다면 꼭 한 번 물어 보고 싶은 게 있는데, ( 장석원 사석에서 만날 수 없을 거예요. 이영주 그리고 대답도 안 할 겁니다. 웃음) 이런 장치, 내러티브나 어떤 장면들의 알레고리나 그런 장치들을 활용하는 이유가 무엇인가에요. 그런데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집 곳곳에 자기 자신의 직접적 발화가 나타나기 때문에, 거기에서 어떤 감성적 울림을 주는 건 분명한 것 같아요. 이에 대해 사적으로 물어 보고싶기도 해요. 그런데 「신scene과 함께 여기까지 왔다」라는 시를 보면 한편으로는 일단 장면들이 있잖아요. 그리고 그걸 가지고 시를 쓰는 것일 테고. 그런데 더 생각해보면 시인도 시 안에서 자신이 실제로 결정하는 것은 그리 많지 않거든요. 쓰다 보니까 어쩌다 떠밀려서 오는 경우가 많은데, 마치 내가 조종당하고 있는 듯한 느낌이랄까요. 그래서 황병승 시인이 일종의 언어유희라기보다는, 우리 삶의 세부를 잇는 낱낱의 국면들, 장면들이 내 의지라기보다는 어떤 운명의 그림자 같은 그런 것들로 만들어졌고 내가 도대체 여태까지 살아온 삶, 이런 삶을 사는 건 과연 내 의지였는가,의지인가 이렇게 묻는 지점이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한용운의 「알 수 없어요」라는작품과 닿는 지점이라는 것이 바로 이런 지점이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또한 굉장히울림이 강해진다는 느낌이고요. 사실 저도 결혼을 했지만 결혼할 때 든 생각이 이거였어요. 이게 정말 내 의지인가. 왜냐하면 상황이 나를 이렇게 밀고 가고 있다라는느낌에 빠졌기 때문이죠. 우리가 왜 시인이 되고 왜 비평가가 되었는가를 생각해 보면 신(scene)과 함께 이렇게 온 게 아닌가요? 신들, 그냥 장면들, 어떻게 보면 무수한 순간들의 선택과 배제를 통해 우리의 삶이 여기까지 왔을 텐데, 거기에는 백 퍼센트 우리의 의지가 아니라, 그것이 거의 오십 퍼센트도 작용하지 않는 부분들, 인간3 1213313삶의 어쩔 수 없는 운명적인 부분이, 그 어떤 지점이 있다는 것이에요.기혁 이찬 선생님의 말씀이 너무 멋있어서 시를 쓰고 싶을 정도예요. (이영주 저도 경청했어요.) 신에 대해 말씀하시는데 말이죠. 사실 그것 때문에 이 작품을 읽었을 때황병승 시인이 말하고 있는 것은 남의 말을 옮기는 게 아닐까도 생각해 봤어요.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가정에 불과합니다만, 무대 밖에서 보고 있다가 갑자기 툭툭 치고 들어가는 신(神). 그러면 이 장면(scene)에서, 장면 밖에 있을 때 신은 정말 자기가 주인이 되는 것일까? 아니면 무대에 올라가야만 비로소 신이 될 수 있는 것일까?전 무대(scene)가 있어야 신도 존재할 수 있다고 봤어요. 신이 아닌 배역들은 무대를함부로 떠날 수 없기 때문에 결국 신 (神) 은, 그 자신의 지위를 인정받기 위해 무대에오를 수밖에 없고, 그 말은 결국 신 스스로가 자신을 숭배하는 대상으로 여기고 있다는 걸 의미해요. 잘 아시겠지만 연극의 기원이 디오니소스제에서 비롯되었다는 점을 상기해 볼 때, 황병승 시인이 차용하고 있는 연극적 요소들은 모두 신을 향한 등장인물들의 경배이면서, 동시에 신 스스로가 자신을 경배하는 카니발이기도 해요.이러한 가정 하에서 본다면 황병승 시인의 시편들은 굉장히 복잡한 구조로 되어 있어요. 그가 세계를 만들었다가 다시 부셔 버리는 행위는 모래성을 쌓았던 아이가 스스로 밟아 버리는 것과도 유사하지만, 그 이면에는 어린아이의 단순한 짓궂음 이상의 것들이 도사리고 있는 것 같기도 해요.이영주 어떻게 보면 그런 게 시인의 기질이라고 할 수 있겠죠.이찬 이 이야기를 꼭 해야 할 듯한데, 저는 무슨 생각을 했냐 하면, 결국 시 쓰기의세계, 영화의 세계, 온갖 문화예술의 세계, 이런 공간들이 일상의 압력이라거나 규범으로부터 도피할 수 있는 도피처를 마련해 주잖아요. 그래서 어떤 성채를 쌓을 수가 있죠. 나르시시즘의 어떤 성채를 쌓을 수가 있는데, 제가 볼 때는 뭐가 느껴지냐하면 그 성채마저도 허물어질 수밖에 없는 다른 삶의 압력, 시와 예술의 왕국을 스스로 건사한다손 치더라도 여전히 삶이라고 하는 게 우리의 뒷덜미를 잡아채서 우리를혹사시키고 우리를 못 살게 굴고 한다는 점을 얘기하고 있는 시집이라고 생각해요.이 시에서도 시 쓰기에 관한 얘기, 글쓰기에 관한 얘기가 일정 정도 나오잖아요. 그지점에서 이 시집이 분명 성공한 부분이 있어요. 대부분 그런 왕국을 건설한다 하더라도 그것의 완성은 없다라고 하는 그 실패의 경험, 그 참담함, 그러니까 그 왕국은잠깐일 수밖에 없다라고 하는 것 그 얘기를 하고 있는 건 아닐까라는 생각을 했어요.이영주 이렇게 오랜 시간 동안 황병승 시인의 시집에 대해 얘기를 할 수밖에 없는 이유겠죠. (웃음)이찬 저는 이 시나 다른 시들을 보면서 그게 느껴졌어요. 이렇게 성채를, 문화적인성채나 미학적인 왕국을 쌓아 올려도 결국은 망가지고 무너지고 깨뜨려질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고, 오히려 그게 이 시집을 성공하게 만드는 어떤 자리 같다는 생각을했어요. 이 시집은 수많은 수사적 장치와 복잡한 내러티브들을 표면에 드러내고 있지만, 그 바닥에는 어떻게 보면 자신의 실패를 이렇게 피하고 저렇게 피하고, 애써서 행복해지려고 하는 그 모든 사투들이 사실상 무용지물로 돌아갔던 그런 참담함에대한 자기 고백을 펼쳐 내고 있는 것이라는 생각을 했어요. 바로 그 지점이 장석원시인이 얼마 전 사석에서 이야기했던 황병승 시인의 이번 시집은 서정시다라는 얘기와 일맥상통하는 것 같아요.오은 『우리는 분위기를 사랑해』이찬 오은 시인의 『우리는 분위기를 사랑해』 이 시집으로 넘어갈게요. 먼저 이 시집을 추천하신 이영주 시인께서 이야기를 열어 주시죠.이영주 오은 시인의 첫 시집이 문장과 문장, 단어와 단어가 충돌하면서 그 힘들이 구축되고, 그 블록들이 블랙유머를 생산하고 있는 지점이 재미있게 느껴졌다고 한다면, 이번 시집에서는 태도 자체가 진지해지고 무거워졌습니다. 의미를 생산, 확대하려는 몸짓이 많아진 시집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런데 제목은 오히려 첫 시집보다 더 가볍게 느껴지고요. “우리는 분위기를 사랑해” 이러니까 호기심이 일었습니다. 이 시집에는 오은 시인이 고민하고 있는 측면들이 다층적으로 드러나고 있어요.이 세계가 겪고 있는 비극성이나 문제점, 블랙유머로써 표현할 수밖에 없었던 사실들은 이전보다 훨씬 깊은 부조리들을 담고 있고, 그것은 어떤 양태로 퍼지는가를 천착해 들어간 시집이에요. 주목할 만한 점은 유연하게 미끄러지듯이 가는 것이 아니고 탁탁 걸린다는 거예요. 말이 되게 많은데도 예전에는 쭉 읽히면서 하나로 들어오3143 15315는 재미가 있었다고 한다면 이번 시집은 읽으면서 툭 툭 툭 걸리는 지점이 있더라는거죠. 이 의지 자체가 굉장히 고무적인 일이라고 봅니다.장석원 ‘오은’ 하면 언어유희죠. 물론 언어유희의 시초가 오은 시인은 아니에요. 오은시인이 공격적으로 운영해서 유명해졌지, SNS에서 스타이기 때문에 덕을 본 것도있지만, 실제로는 박순원 시인이라고, 그의 첫 시집 『아무나 사랑하지 않겠다』가 본격적인 언어유희의 실체를 거의 전부 보여 줬어요. 구십 몇 년도 시집이니까, 시집으로 등단한 사람이니까, 나남의 시집이니까, 지금은 구할 수 없죠. 오은 시인의 시집은 박순원 시인의 첫 시집과 비슷한데, 달라요. 그래서 재미가 있었어요. 이번 시집에 대해서 이영주 시인이 잘 짚어 줬는데, 언어유희 측면에서 먼저 말해 보죠. 언어유희는 기표를 대상으로 삼습니다. 오은 시인이 이번 시집에서 수행하고 있는 장난은 기표를 끌고 다니다가 현실 세계의 의미와 그 기표를 매치하는 방식으로 진행됩니다. 장난치다가 갑자기 진지하게 성찰하는 느낌. 이 방법이 사실이라면, 정말로 위험하다고 생각해요. 한두 개 그런 것이 있으면 좋죠. ‘와우, ‘물질’이라는 단어에서 이런 상상력이 나오는구나, 정말 천재적 시인이야’ 이런 감탄이 있었죠.( 「물질」 )기표가 의미로 갑자기 전환되고, 기표가 필연적으로 부착시킨 사전적 의미가 우리를 찍어 누르는 순간, 저는 피로해졌어요. 이 방법이, 시집에서 수미일관, 반복되는 듯해요. 패턴화잖아요. 이렇게 물어 볼 수 있어요. 기표를 시작점으로 해서 마침내 기표에 기의를 얹고, 언어를 의미의 말뚝에 묶어 버리는 방법이 과연 합당한 것인가? 거기다가 오은 시인이 너무 진지해졌어요. 그에게 장난 그만하라고 부탁하는 말이 아닙니다. 악동이 갑자기 개과천선했다는 느낌. 어울리지 않는, 세상에 대한 고민의 시작, 이것이 저를 불안하게 했어요. 진보하는 펑크 밴드 ‘Greenday’ 같은 오은 시인의 새로운 면을 본 것 같지만, 저는 좀 버거웠어요, 이런 느낌들이. 딜레마예요. 유희와 의미, 기표와 기의의 딜레마가 오은 시인의 세 번째 시집에서 어떻게 진행될지 벌써부터 궁금해지네요. ‘물질’은 물질이 아니라 ‘물’과 ‘질’이 따로따로 돌아다녀야 된다고 봐요. ‘물질’이 ‘물’과 ‘질’로 분리되었다가 다시, 새로운 것도 아니고,‘물질’로 결합해서 새로운 물질의 의미를 발견했다고 하는 것은 재미가 없어요. 쉽게말하면, 봉합이 아니라, 뒤섞기 또는 새로운 실험의 문제인데, 이 시집에서 저는 아직 이런 점을 느끼지 못했어요. 물론 더 읽어 보면 달라지겠지요? 유희에서 시작된진지한 문제 제기가 방향을 잘못 설정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고, 또 그런 의미에서시가 길어진 것은 아닌지 말하고 싶어요. 시가 길다는 것은 시집도 덩달아 두꺼워진다는 차원에 국한되는 것은 아닌 듯해요. 많은 시에서, 후반부에 가서 중언부언 논평조가 출현해요. ‘물질’에서 ‘물’과 ‘질’을 분리해서 쭉 유희를 진행하면 재미가 있어요. 그러다가 고민하고, 고민하다 봉합이 안 되니까 설명으로 들어가요. 저는 이런생각을 했어요. ‘어어, 이 부분은 지금 오은이 나한테 설명하고 있는 것이지, 과외교사가 수학 문제를 풀어 주고, 정답이지, 자 다시 한 번 요약해 보자’ 이런 느낌이들어서, ‘어 이건 오은답지 않은데’, 이런 느낌이 들어서, 생각보다 재미가 없었다는거예요. ‘아, 피로해!’ 이런 느낌. 반대로 오은 시인이, 이런 생각도 했어요, 언어유희 없이 좋은 시를 쓸 수 있는 재능과 열기도 지닌 시인이구나. 차라리 가능성을 봤다고 말하는 것이 좋겠네요. 개그맨도 언어유희 하고, 시인도 언어유희 하는데, 기표로 공격해서 ‘헤헤’ 웃는데, 시인은 그 방법을 통해서, ‘자 우리 세계의 진리는 이런겁니다, 왜 이런 줄 아세요’ 질문하면서, 결국 기표로 시작해서 기의로 끝나니까, 시인이 뭔가를 만들어 간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후반부에 가면 앞의 즐거움이 모조리사라지고 말아요. 실재하는 ‘물질’이 사전적으로 나와 버리는 거예요.이영주 오은 시인이 과감해져서 흩어지고 마는 거야 하고 질러 버려도 좋을 것 같아요. 그러나 이 시집의 의도는 그것보다는 의미의 구조가 확산되는 것, ‘사태’를 만들어 내는 것에 좀 더 집중한 듯합니다.장석원 「어떤 날들이 있는 시절―망실(亡失)의 시대」라는 시가 있는데요, 여기 보면“독한 술” 다음에 “고독한 입술”이 나와요. 이 부분에서 웃었어요. 그런데 “AD 사이에 BC를 가둬버렸다” 바로 그 뒤에 설명을 해요. “AD 사이에 BC를 가둬버렸다 기원은 단박에 포위되었다”. 영어로 AD(기원후), BC(기원전) 그 얘기잖아요. ‘이건 뭐지? 이걸 왜 해설을 하고 있어, 이거를.’ 이런 부분들이 꽤 많았어요. 제가 좀 과격해졌네요.기혁 저도 장석원 선생님과 의견이 같은데 방향은 조금 다른 것 같아요. 개인적으로오은 시인의 초기 언어유희에서부터 큰 감흥을 느끼지 못했거든요. 최근 교보문고3 1617317시 부문 베스트셀러에 오른 책이 직장인이 쓴 언어유희 모음집인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재치나 유머 감각에만 의존하는 작품이라면 굳이 시인이 나서지 않아도 될 것 같기도 해요. 독자들의 언어 감각도 그만큼 올라왔다는 뜻이기도 하구요. 앞선 세대와의 경계 지점에서 오은 시인의 시집이 나왔다는 점, 그리고 그러한 주목을 끌었다는사실 자체가 여전히 회자되는 걸 보면, 장석원 선생님의 말씀처럼 코미디언과 뭔가달라야 하지 않겠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그렇다고 해서 어떻게 달라야 한다고 구체적으로 논의할 기회는 적었던 것 같아요. 최근에 본 오은 시인의 작품론들은,대개가 ‘괜찮다, 이미 오은 시인의 작품 속에는 언어유희 이상의 것이 있다’ 이와 같이 옹호해 주는 글들이 제법 눈에 띄었어요. 평자의 안목이라기보다 대세를 따른 것일 텐데, 결국 시인에게만 책임을 돌릴 수도 없는 문제인 것 같아요. 하지만 또 반대로 생각해 보면, 그렇게 시인을 믿어 주는 눈들이 있기 때문에, 시인 자신이 변화가필요하다고 느꼈을 때 과감하게 언어유희 이외의 영역을 좀 개척했어도 무리가 없지않았나 하는 아쉬움이 남아요. 결국 장석원 선생님의 의견처럼 오은 시인 특유의 언어유희가 좀 더 효과적이길 바라는 독자가 있는 반면에, 저처럼 그것 자체로는 흥미를 느끼지 못하지만 시인의 능력이 충분히 다른 면모를 보일 능력이 있다고 보고 그러기를 기대하는 독자도 있거든요. 시인 자신이 조금 주저하는 부분이 있다면, 어쩔수 없이 독자를 믿어야죠. 오은 시인 같은 시인이 독자의 반응에 민감하게 반응하는건 결코 눈치를 보거나 자기 색을 잃는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오은 시인의 평가는 일단 유보하도록 할게요.장석원 「빔」 을 보면, 한 떼의 벌떼가 나와 가지고 여왕벌만 남았데, 그러니까 떼는 해체되고 여왕벌만 남았다, 그리고 형이상학 여기서 “형이상이나 이상형, 혹은 이상한형”으로 진행하는 거예요. “형이상”에서 “이상한 형”까지 가는 이 부분은, 기표를 건드려서 의미를 공격하는 것이 아니라, 의미를 건드려서 의미를 공격하는 전래의 방법을 사용하고 있어요. 기표가 기의를 공격하는 양상을 보여 달라고 요구하고 싶어요. ‘형이상’ 다음에 ‘이상한 형’이 실제로 나오면 어떻게 하겠어요.이찬 이야기를 좀 가지런하게 표현해 보면, 이 시인의 언어와 실제의 사이가 촘촘할수밖에 없다는 게 문제인 것 같아요. 시라고 하는 것이 여백과 간극을 많이 활용하고, 침묵의 공간을 조형함으로써 시적인 공간을 만들어 내는 것일 텐데, 이 시인은반대로 촘촘한 인과의 사실을 갖고 있거든요. 그런데 인과의 사슬이 정상적인 사슬로 전이되어서 올라가는 게 아니라 불쑥불쑥 다른 데로, 우리가 예기치 못한 다른 측면으로 비약해 가는 그 사슬을 통해 시적인 장면을 빚어내고 있는 것 같아요. 조금전에 장석원 선생이 ‘기표가 기의를 공격한다’라고 했는데, 그 표현은 한편으로는 오은 시인이 어쨌든 그런 언어 체계가 가지고 있는 정상성의 모델을 공격하면서 그 뒤에 숨어 있는 질서, 사회적인 질서 혹은 어떤 규범 체계를 사실 조롱하거나 비판적으로 바라보려고 하는 것을 말씀하신 것 같아요. 그런데 이러한 즐거움과 재미라고 하는 것이 시의 궁극적인 기능인가? 바로 이 문제에 대해서 심각하게 고민을 하기 시작한 거 같아요. 그런데 그러면서 그 언어의 정상적 질서, 또는 그것을 떠받치고 있는 그 규범 체계를 무너뜨린 자리에 그러면 뭐가 남는가? 그걸 조롱하고 남는 자리가도대체 무엇인가? 그 얘기를 조금 더 해 보면 어떨까 싶습니다.이영주 질서나 규범 체계나 비판을 하고 남은 자리에 무언가를 채우면 그것이 또 정형화될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빈곤한 상태로 방치해 버리면 안 되죠. 아마도 그런틀과 격투를 벌이고 있는 것이 아닐까 싶은데…….이찬 그러니까 끝에 가면 결국 아무것도 없는 삶의 덧없음과 허무의 자리에 가는데,묘하게도 오은 시인은 체질적으로 허무나 무의미를 온몸으로 받아들이는 체질은 아닌 듯해요. 그러니까 그 공허를 자꾸 다른 의미들로 채워 넣으려고 하다 보니까 삐거덕거리는 소리가 좀 난다고 해야 할까요, 그렇습니다. 그리고 「주도면밀―이현승 兄에게」라는 시가 있는데, 이 시는 우리가 흔히 말하는 짧은 서정시에도 오은 시인이 좋은 자질과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느낌을 줍니다. 전 이 시가 울림이 있다고느꼈거든요.장석원 문제는 ‘영업 방법’인데, 끝나야 되는 부분을 논평 같은 단위로 연결시키는 것,이게 모범생의 방법이라고 얘기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우리의 오은 시인은 마구 분리시키기만 해도 될 것 같아요. 남들이 폭력이라고 불러도, 언어를 더욱 조작하고 조직하고 장악했으면, 박살냈으면, 좋겠어요. 우그러뜨리는 작업을 하고 있는데 더해도좋을 거예요. 박순원 시인이 먼저 선점해서 보여 줬는데, 그 작업, 우그러뜨려서 뭔3183 19319가를 만들어 내는 작업 말이에요. 나이를 먹고, 인생에 실패하고, 어려워지고, 아버지와 가장으로서 삶을 살아 나가면서, 저 세계를 이루고 있는 언어계 안에서 나름의실재계를 구축하고 있는 박순원 시인의 시는 자신과 대립하던 세계를 인정하면서,부드럽고 넉넉하게 저 세계를 인지하게 되었고, 그래서 그에게는 유희와 유희 아닌것의 경계가 사라졌어요. 용문고시원에 용이 들어가는 문이 있데, 이런 식으로 바라보는데, 장난으로 시작해서, 실제로 이 세계 속으로 쑥 들어가죠. 기표라는 것들은정말 장치밖에 안 되는 거예요. 그리고 빠져나올 때는 저곳은 용이 사는 세계가 아니라는 진술로 사실을 환기시켜 우리에게 유희와 슬픔이 어우러진, 웃으며 우는 사람의 표정을 만들어 냅니다. 어디까지나 관계의 문제, 조합의 문제에 의해 결정된다고볼 수 있을 듯해요. 한 편의 시에 의미는 8, 유희는 2, 이렇게 2 대 8 가르마 식으로분할해서 쓰면 박순원 시인의 시는 존재하지 않았을 거예요. 오은 시인의 경우, 지금 5 대 5 정도가 되는 게 아닐까 싶어요. 이번 시집에는 오은 시인만이 쓸 수 있는독특한 언어유희가 실종되었다고 말하고 싶어요. 기혁 시인이 얘기했지만, 오은 시인이 보여 주는 기표 유희는 어떤 경우에는 굉장히 유치해요. ‘이건 뭐니? 썰렁썰렁!’이런 느낌이 사그라들지 않아요. 유희를 예상할 수 있기 때문이겠죠. 첫 시집에서는정말 말도 안 되는 것들을 무지막지하게 보여 줬잖아요. 나중에는, ‘어라 헐! 헐헐!’이랬거든요. 마침내, ‘내가 졌어, You win!’ 이랬는데요. (웃음)기혁 비율 얘기를 해 주셨는데 작품 중에 “부조리”라는 동일한 제목을 단 작품이 여럿 등장하고, 「럭키 스트라이크」 같은 경우는 베게트의 「고도를 기다리며」에 등장하는 “럭키”와 “포조”가 직접적으로 언급되고 있어요. 그런데 정작 작품을 읽어 보면부조리극과의 관련성은 그렇게 크게 드러나지 않아요. 이 부분에서 전 이오네스코가 브레히트를 비난할 때의 문제의식과 맥이 닿는 지점이 있다고 생각해요. 이오네스코가 브레히트를 비난한 가장 큰 이유는 자꾸 관객을 의식해서 ‘낯설게 하기’를 시도하고 관객을 가르치려고 들었기 때문이에요. 이오네스코의 입장에서 브레히트의극은 관객이 알아서 해야 할 부분을 자꾸 건드린다는 거죠. 즉 누군가가 어떤 연극적 장치를 설치해서 감정이입을 하지 말라고 시켜도 관객들은 다 감정이입을 하게되고, 아무리 감정이입을 위한 치밀한 플롯을 구사한다 해도 딴생각을 할 수밖에 없다는 거예요. 전 오은 시인이 분명히 그러한 지점을 인지하고 있을 거라고 믿어요.다만 그 욕망이 때때로 컨트롤되지 못하는 현상이 발생하는 것처럼 보여요. 사실 부조리극 작가들이 단순히 소통 부재의 언어유희만으로 작품을 만드는 건 아니었거든요. 거기에도 여러 층위가 있어요. 때로는 자기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얘기도 있고,전혀 부조리하지 않은 내러티브가 있는 것도 있어요. 언어유희적인 것이 확장되는형태의 선례가 이미 존재한다는 말이죠. 오은 시인 스타일의 말놀이도 그랬으면 좋겠어요. 앞서도 언급했지만, 이오네스코가 그러했듯이 좀 더 독자를 믿고 확장해 나아갔으면 싶어요.장석원 지금 기혁 시인도 얘기한 바이지만, 반대로 하면 훨씬 더 성공할 것 같아요.말놀이로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이영주 그런 부분을 고민하고 있겠죠.장석원 이것이 방법적으로는 더 성공할 거 같아요.이찬 아까 비평가에 대해 장석원 선생님이 얘기하셨는데 적절한 말씀이라는 생각이들어요. 비평가들이 가장 고민하는 건 시인들을 보면서 느끼는 일종의 거리감이랄까, 어쨌든 시인들을 따라갈 수밖에 없다는, 일종의 자기 논리의 매트릭스 안에 갇힐 수밖에 없는 비평의 운명에 대해 통탄을 하곤 합니다. 그래도 저 같은 경우는 시적인 문장을 쓰려고 굉장히 노력하고, 논리를 넘어서는 기표의 뉘앙스와 심미성을보이지 않게 부각시키려고 무척 애를 쓰는 편인데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분적으로 그래도 여전히 달라붙는 건 뭐냐 하면 비평가는 부분적으로 시적인 문장 또는 감각적이고 심미적인 문장을 쓴다 하더라도 전체의 흐름, 전체의 구조는 논리적이고이성적이어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리거든요. 이게 안 되었을 때는 일종의 에세이 수준으로 떨어져 버리죠. 그걸 또 어쩔 수 없이 의식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 일종의 무거움 같은 것으로 작용한다는 것이죠. 그래서 제가 지금 오은 시인의 시집을 적극적으로 읽어 준다고 한다면, 결국 기표가 가지고 있는 그 거리 곧 임의성과 자의성을뚫고 들어가려는 노력이 엿보였다는 점이에요. 그냥 언어가 그 기표라고 하는 것은우리가 살아가는 실제의 감각, 현장과 실제의 고통 그것과 전혀 상관이 없는 것이잖아라고 하면서도, 그 이면에서 그것을 돌파해 내려고 하는 어떤 고투 같은 게 느껴진3203 21321다고 할까요. 단순히 시적 방법론이라고만 말할 수 없는 측면이, 그런 느낌이 이 시집 안에 들어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 지점을 높게 사 주고 싶어요. 그런데 그게 정말로 성공했는가의 문제는 조금 다른 문제 같아요. 그래서 한편으로는 기표 놀이가시를 여는 전주곡 같은 역할을 하고, 기표 놀이를 하다가 그 놀이를 통해서 다른 경험적 감각의 실제 움직임들을 따라가서 실제 세계를 드러내는 자리까지 이르게 만드는 것이 오은 시인의 독특한 방법론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그런데 앞으로 오은 시인이 이 방법론을 계속 고수하는 것이 좋은가에 대해서는 생각을 해 봐야 되는 문제라고 저도 생각했고, 그 얘기를 장석원 선생님 정리를 잘해 주셨고요.장석원 기표 차원에서만 국한된다는 한계도 있지만, 계속 우리에게 재미를 주려고 노력하길 부탁해요. (웃음) 그런데 박순원 시인에게 세계의 의미 구축 체제를 오히려오은 시인 식으로 해라, 오은 시인한테는 박순원 시인 식으로 해라, 이렇게 요구해도 될까요? 폭력이겠지요. 배치와 조작의 문제를 조금 더 추구해야 하지 않을까요.오은 시인의 시가 감정에 호소하는 시는 아니잖아요. 그러면 지적인 조작을 좀 더 해줘야 하는 건 아닌가라는 생각을 해요.이영주 재미있는 시들 중에 하나가 「지구를 지켜라」라는 시예요. ‘지구를 지켜라’라는노라조의 포스터를 보고 오은 시인에게 ‘네가 쓰면 잘 쓰겠다, 한번 써 봐’ 이렇게 제가 툭 던졌는데, 쓴 거예요. 그때 ‘지구를 지켜라’라는 포스터의 느낌을 오은 시인이과대망상의 허망함으로 갈까, 아니면 지구를 지킨다는 게 무슨 의미가 있어, 이렇게갈지도 모르겠다고 추측했거든요. 그런데 각각의 슬픔이 담백하게 쏟아져 나오는 거예요. 오은 시인에게 슬픔의 각도가 달라졌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결정적인 사고를겪고 나서인지 다른 이유에서인지는 모르겠지만 각각의 층위에 담긴 슬픔들을 말하고 싶어졌구나 하는 생각이 들면서 저도 덩달아 울적해졌습니다. 삶이라는 게 그런부분들이 불쑥불쑥 튀어 오르는 법이잖아요. 최근 오은 시인이 「아저씨」라는 시를썼는데, 발랄한 슬픔이 느껴지는 오은 시인 식의 묘사가 잘 나타납니다. 그런데 그게 자기도 포함된다고 여기지는 않을까 싶었어요. 오은 시인이 성인의 세계에 어느순간 들어와 버렸구나 하는. (웃음)이찬 그래서 저는 오은 시인의 경우 다음 시집이 궁금해요. 이전까지는 없었던 어떤 슬픔들, 그것에 대해서 고민하고 또 싸우기 시작했다는 징후는 보이는데, 그게세 번째 시집에서 다른 방식으로 이끌고 가면서 새롭게 자기만의 스타일을 만들어낼 것인지 궁금해집니다. 여기서 오은 시인의 시집에 대해서는 정리를 하겠습니다.강성은 『단지 조금 이상한』이찬 다음 시집은 강성은 시인의 『단지 조금 이상한』입니다. 이 시집은 기혁 시인이추천을 하셨죠?기혁 네. 일단은 얇아서 좋았습니다. (웃음) 그리고 단순히 얇은 게 아니라 각각의 시편들도 대체로 짧고 간결하고. 지난 주 첫 번째 좌담이 끝나고 운율 얘기가 나온 적이 있었는데, 전 여전히 그 문제가 현재진행형이라고 생각하거든요. 그런데 시집의해설을 보거나, 강성은 시인에 대한 기존 평가들을 살펴봐도 형태에 대한 언급은 부족한 것 같아요. 강성은 시인의 시집을 추천한 것은 운율에 굉장히 신경을 쓴 흔적이보이고 조금씩 변형되기는 하지만 각각의 시편들이 특유의 형태를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었어요. 최근의 젊은 시인들이 여백과 절제를 강조하기 이전부터 쭉 그러한 자신만의 어법으로 시를 쓰고 있었던 거죠. 물론 강성은 시인의 시가 그러한 형태의 최초는 아니고, 강성은 시인만이 그러한 형태를 추구하는 것도 아니지만, 단어의 반복이나 형태의 균형 같은 것이 단조로움을 극복하고 이국풍의 시편처럼 세련되어 보이는 경우는 그리 흔치 않은 것 같아요. 특히 강성은 시인의 시를 직접 낭독해 보면 단조로운 반복이 아니라 음악적인 장단고저가 나타나요. 최근 젊은 시인들의 시풍이아직 가닿지 못한 영역이기도 하지요. 그러면서도 기존의 정형시나 민요풍의 시편이가진 그런 진부한 느낌은 아니고, 굉장히 모던한 느낌이 들어요. 아이러니하게도 이렇게 안정적인 구조를 가진 강성은 시인의 시편들에서 정작 시적 화자는 불안한 정서를 드러내요. 미학자 보링게르의 말을 빌리자면, 일정한 패턴을 만들고 정형성을확보하려는 추상 충동은 외계 현상으로부터 야기되는 내적 불안으로 생긴 결과라고할 수 있어요. 추상미술 이론을 그대로 시편에 적용하는 건 무리가 있겠지만, 시인이 인식한 세계가 불안할수록 반복이라든지 정형성이 출현할 가능성은 충분하다고생각합니다. 결국 강성은 시인의 시 형태는 오늘날의 불안을 극복하기 위한 나름의3 2223323자구책이 아니겠는가, 저는 이렇게 보는 입장이에요. 일례로 「전염병」이라는 시가그러한데 시적 자아의 세계가 매우 불안한 모습이지만 이 시를 소리 내어 읽는 동안에는 쭉 말을 따라가면서 읽을 수 있었어요. 저만 그럴 수도 있겠지만, 그 순간만큼은 불안을 넘어서는 어떤 쾌감 같은 게 느껴져요. 그리고 제가 볼 때는 시인 자신도어느 정도 형태의 안정감이 주는 효과를 인지하고 있는 것 같았어요. 「올란도」라는작품에서도 “너는 누구지? 너는 누구야?” 이렇게 묻고 있지만 막상 전체 시편 속에서 읽어 보면 자아의 분열이 아니라 매우 정돈된 느낌으로 다가와서, ‘너는 누구고,너는 누구야’처럼 들리거든요. 만약의 얘기지만, 앞으로 새로운 정형시가 시도될 수있다면 강성은 시인의 작품은 그 예비 단계가 아닐까 싶어요.장석원 음악성을 느꼈다는 기혁 시인의 말을 듣고 나니까 ‘그렇다’라는 생각이 드네요. 시의 음악성은 쉽게 느껴지지 않아요. 아주 힘든, 어려운 부분이라서 따져 봐야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고, 독특한 자기만의 스타일을 획득한 것 역시 분명하다고 생각해요. 시의 형식과 잘 배합되는 독특한 이미지들이 견고하다는 느낌을 갖게 했어요. 반복되고 있는 어떤 것이 허비되거나 소비되는 게 아니라 편편마다 적절하게 잘운용된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어서, 정적인 세계를 구축하고 있다는 느낌이 강해서,그렇다고 이것이 아주 큰 개별성은 아니고요, 비슷비슷한 것들이 몇 가지 있지만,어떻게 묶어 놓으면 ‘비슷하군’이라고 할 수 있지만, 강성은 시인이 도드라지는 측면을 만들어 냈다는 것은 분명해 보여요. 그런데 이런 느낌이 들어요. ‘견고하다, 좁다, 단순하다’는 말에도 의미가 있는 게 아닐까라는 생각. 강성은 시인의 방법은 아직까지는 잘 모르겠어요. 다만 강성은 시인의 반복과 정제는 리듬 차원의 방법이 아니고, 이미지 차원의 방법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시를 더 깊이 들여다봐야 할 부분이라서 다른 얘기는 못하겠어요. 자신은 없지만 강성은 시인의 시들이 감정과 이미지에 대한 태도가 비슷비슷하다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 시집이, 두 시인 모두 좋아하지 않겠지만, 하재연 시인 느낌이 나거든요. 둘 다 싫어할 거야. (웃음) 누구 색깔, 이렇게 말한다면 하재연 시인과 비슷한 계열의 색깔로 묶일 수 있는 게 아닐까라는, 근거 없는 느낌, 이상하게도 하재연 시인보다 약간 어두움, 이런 게 느껴지고,여기다 습기를 더해서, 종합하면, 이 시집의 개별성이 느껴지겠지만, 이 분위기 속에서 새로 무엇이 나올지……. 「런던포그」 같은 시가 참 아쉬웠어요. 유명한 브랜드이름이잖아요. 런던의 안개가. 아버지 세대에게 ‘런던포그’는 비싼 옷이었고, 정말로, 그런데 ‘런던 포그’를 직역한 ‘런던의 안개’, 이 말이 웃겼거든요. ‘어떻게 하자는거지?’ (웃음) 이런 느낌이었어요.이영주 「환상의 빛」 연작이 굉장히 다양하고, 생명력을 가지고 있는 게 보이구요, 그생명력이라고 하는 게 예민한 동화적 상상력에서 온다고 생각했어요. 마음 밑에 잠재되어 있는 동화적 세계를 불길하면서도 색다른 태도로 불러내는 방식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이번 시집의 첫 시( 「기일(忌日)」 ) 2연에서 죽은 사람의 유골을 버리고 나면,만약에 죽지 않았으면 죽었다고 생각하면 되고, 하는 지점, 이 촉수에 저도 마음이가 있는데요, 그런데 이게 조금 순하게 가면 「두부」라는 시에서, 이렇게 묵묵하게 먹고 나면 새 삶이 시작된다고 믿는 부분에 굉장히 쓸쓸한 정서가 담겨 있어요. 폭풍의 잠재적 시간 같은 이런 슬픔들이 활달성을 얻지 못하고 간다면 편하게 진행될 수도 있겠죠. 이미지에 기대어서 사물이나 세계를 바라보는 시선들을 습관적으로 끌고갈 수도 있습니다. 「세계의 끝으로의 여행」이라는 시에서 보이듯 이 시집은 그런 경계를 잘 조율하고 있다는 느낌이 듭니다.이찬 저도 비슷한 느낌으로 읽었는데, 강성은 시인은 최근 젊은 시인들이 즐겨 활용하는 하위문화라기보다는 동화적인 세계를 라이트모티프로 삼고 있는 것 같아요. 그동화적인 세계가 일종의 액자 구조를 이루고 있고, 동화 구조가 자기 자신한테 줬던비현실감 그것과 동화적인 것 바깥의, 어쨌든 현실의 힘들, 폭력성들에 대한 천착이있는 것은 분명해 보여요. 저는 이런 생각을 했어요. 그러니까 동화 구조가 결정적으로 시인의 실존 차원에서 보면 유년의 화자 혹은 동화를 즐기는 화자, 그런 일종의 가상 또는 시뮬라크르의 세계 속에 살아가는 화자이긴 한데, 여기에는 이상한 비애감이 있다는 문제 말이에요. 자기 고독을 뿜어내는, 고통에 절규하는 그런 게 아니라, 묘하게도 동화 속에서 살 수밖에 없는 그 바깥에서는 결코 살 수 없는 인형 같은, 그런 일종의 성인이 되지 못한, 성인이 될 수 없는 자의 비애감이 느껴졌어요.그런 실존의 비애감, 그 느낌, 그것을 열정적이고 격정적으로 마구 풀어내는 게 아니라, 동화라는 시뮬라크르 속에서 그 액자 바깥으로 나오는 것을 너무너무 두려워3243 25325하는 자의 비애감 같은 것을 느꼈어요. 그래서 말을 많이 하지 않고 그 말의 양을 줄이고, 또 어떻게 보면 섬세하고 여린 감성의 여자아이가 조곤조곤 자기 얘기를 들려주는 것 같은, 액자 구조 바깥으로 나오는 것을 너무너무 조심스러워하고 두려워하는, 이상하게도 자기 태도와 자세를 저어하고 뒷걸음질 치는 그런 수동성이 느껴졌어요. 그런데 그게 저는 방법론적 장치라기보다는 강성은 시인의 실존의 얼굴 같다는 그런 느낌을 받아서 좀 울림이 있었거든요.기혁 이찬 선생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그 불안을 액자 속에 넣는다면 그걸 유지하는방법은 액자를 아주 견고하게 만들거나 독자의 동의를 얻는 거죠. 동의를 얻는 방법들 중 하나가 음악성의 확보가 아닐까 해요. 디오니소스제의 합창처럼. 동화 속 주인공이 현실 세계에서 살아남는 방법은 독자들이 자신과 같은 노래를 불러 줄 때거든요. 그 카니발적 순간이 영원하진 않겠지만 분명 현실과 동화적 상상의 세계가 용합되는 지점이 존재해요. 그렇다면 우리가 강성은 시인의 시집을 읽는 그 순간 자체가 이미 합장에 동참하고 있다는 얘기가 되지는 않을까요?이찬 지금 그 얘기를 조금 뒤집어서 하자면, 이 시인이 지금 역전시키고 있다는 말을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그것이 어떤 것이냐 하면, 시인은 이 동화 속의 세계를 친숙하고 편한 세계로 인식하고, 우리가 실제로 사는 이 경험 세계를 낯선 세계로 전도시켜 놓고 있다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환상과 실제를 전도시키고 있다는 그런 느낌,그래서 오히려 우리가 살아가는 이 현실 세계, 경험 세계를 낯선 것의 두려운, 프로이트가 ‘das Unheimliche’, ‘두려운 것의 낯섦’이라고 불렀던 그 자리로 인식하는그 지점이 놀랍고 또 독특한 매력이 그 전도의 자리에서 나오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어요. 아까 액자 구조라는 얘기도 바로 그 얘기인데, 그것이 울림이 있는 이유는 자꾸만 현실 세계를 너무나 두려워하고, 그러니까 유년의 트라우마 때문인지 아닌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동화 구조 바깥으로 나오는 걸 두려워하는 주체의 절실한 그 마음결이 그게 느껴진다는 것이지요.김유자 『고백하는 몸들』, 박도희 『블루 십자가』, 한세정 『입술의 문자』이찬 지금부터는 시간상 첫 번째 시집을 낸 세 명의 시집, 즉 한세정 시인의 『입술의문자』, 김유자 시인의 『고백하는 몸들』, 박도희 시인의 『블루 십자가』에 대해 함께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일단 한세정 시인의 『입술의 문자』에 대해 말하자면, 저는 이시집을 보면서 이미지를 단아하게 구성하는 능력은 굉장히 좋은 시인인데, 조금은패턴화된 느낌이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어떤 면에서는 잘 드러나지 않지만 나, 당신, 우리, 이렇게 인칭을 겹쳐 쓰고 있는데, 그게 묘하게도 어떤 분열적인 주체를 만들어 내면서 시를 쓰는 시인 주체와 그 바깥에 있는 주체를 설정하게 만드는 계기를부여한다는 생각을 했어요. 따라서 이 시집의 많은 시편들이 묘하게도 자신의 시 쓰기에 관한 시, 시작 과정에 관한 시, 그런 시들을 많이 만들어 내고 있다는 그런 생각을 했어요. 물론 시집 가운데도 자신의 실존에 관한 얘기가 나오는 시들이 있죠.그런데 그 시편들 역시 우리가 실존의 깊이를 따라갈 만한 정보를 제공해 주지는 않아요. 전체적으로는 두 줄기가 있어 보이는데, 하나는 자신의 시 쓰기에 관한 것을소재로 삼은 곧 시 쓰기 과정에 관한 시, 다른 하나는 자신의 가족사와 관련된 그런데 굉장히 많이 감추는 방법으로 만들어 낸 시, 이 두 계열로 이 시집이 만들어진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이영주 한세정 시인의 장점은 딱 필요한 말만 하려고 하는, 굉장히 좋은 언어적 태도를 가지고 있다는 점이에요. 이런 염결성을 확보하려면 정말 단단한, 수없이 부서지고 다시 붙여지는 과정이 필요하겠죠. 이찬 선생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단아함으로만느껴지는 면이 있어서 조금 아쉬워요. 사실 우리가 이런 세계에서 보여 주고자 하는것들을 들여다볼 때 이 세계가 시인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오고 남아 있는가를 보고싶기도 합니다. 참 시를 잘 쓰는구나 하는 느낌 뒤의 끈적한 빛들을요.기혁 저도 비슷한 인상을 받았어요. 특히 한세정 시인의 경우에는 각각의 시편들에참 많은 공을 들였다는 게 느껴졌어요. 하지만 이 시집이 첫 시집이라는 점을 감안할때, 그만큼 너무 깎아 버린 게 아닌가 하는 아쉬움도 남아요. 각각의 작품들은 정말좋은데 여러 편을 묶어 놓고 보면 어떤 틀에 딱 맞춰져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거든요. 제목에서부터 “구조” “원리”, “문자”, “방식”, “세계”, “궤도” 등등 다수가 명사형,으로 끝나는데, 이것은 결국 언어의 뒤편에 가려진 근원적인 무엇을 찾아내 완료하겠다는 시인의 패기와 대결 의식이 만만치 않다는 걸 드러내요. 하지만 반대로 만족3263 27327할 만한 결과가 나오지 않았을 땐 그 강박 때문에 계속해서 시를 손질할 수밖에 없거든요. 그러다 보면 예쁘게 그려 놓은 시편들만 놓이게 되고, 시인 자신의 목소리가흐릿해져요. 매우 분명한 주제 의식을 가진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그래서 어떻다는거지? 이런 물음이 계속해서 맴돌게 돼요.장석원 저도 한세정 시인의 시집에 대해서는 세 분의 말씀과 거의 비슷한 말을 하고싶어요. 도드라지는 독특함이 많지 않다는 것이죠. 그 이유는 저도 세 분과 똑같이생각하는데, ‘아, 이건 시적인 거야, 내가 쓰고 싶어 하는 건 이거야’ 같은 말을 하고싶어 하는 시인의 얼굴을 보았다고 할까요. 자신이 찍은 방점과 독자들이 읽을 때‘정말 좋은 시야’라고 판단하는 지점 간의 편차가 좀 큰 게 아닌가 싶어요. 한세정 시인이 사실은 남성적인 측면이 있어요. (웃음) 남성적인 영역을 다룬 시는 몇 안 되지만, 언어도 그렇고, 세계를 훔쳐 오는 것도 그렇고. 이 시집에서 가장 한세정 시인의시답지 않은 시가 「열려라 참깨」였어요. 자기가 의도적으로, 시적으로, 쓰려고 하는말들은 거의 없고, 그냥 흘러나오는 말 같았어요. 그런 시들이 훨씬 좋았어요. 한세정 시인은 패기와 기량을 골고루 갖춘 시인인데요, 그런 의미에서 발전적인 측면이보이는 시인이에요. 너무 시적인 모델, 잘해야 한다는 것에 대한 강박을 가지고 있고, 자기 룰 안에 시를 가둬 버리는 경우가 많다는 판단이 들었고, 성급하게 얘기하면, 지금 좌담의 대상이 된 세 분의 첫 시집들이 다 모델화되어 있었어요. 좋은 의미로 말하자면 거칠지가 않았어요. 첫 시집이라면 여러 가지 다양성들을 보여 주면서,자기가 갈 길을 아직은 잘 모르지만, ‘난 이런 것들을 펼쳐 놓겠어요, 내 안에는 여러가지가 있어요’ 이렇게 말해야 하지 않을까요, 첫 번째 시집인데. 첫 시집인데 한쪽으로만 치우쳐 있어요. 잘 쓴 시들을 펼쳐 놓고서 기량이 좋다는 것을 인정받으려고하는 느낌이었어요. 어떤 시들은 매우 거칠지만, 쉽게 말해서 시를 잘 쓰지 못했지만, 그러면 어때요. 그것이 자신만의 것을 확립하는 유일한 것이어야 하는데, 세 권의 시집이 공통적으로, 거칠지만 유일하고, 세련을 모르지만 에너지가 들끓는 어떤것이 없었어요. 저도 첫 시집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고 있지만, 신인은, 요구하는 게아니라, 제가 만약 다시 시집을 낸다면, 신인들의 시집을 보면서 오히려 배우고 있는건데, 어떤 자세가 시인다운 것일까 물어 봐야 될 것이고, 우리가 시집을 낼 때마다원론적인 질문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요. ‘나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나의 시는 어디에 와 있는가, 내가 시를 처음 쓰려고 했을 때 어떤 시를 어떻게 쓰려고 했던가’ 바로 이런 질문들을 절대로 잊지 않는 것 말이에요. 이런 것들이 반면교사로 필요해요, 저에게. 좀 거칠지만, 자기의 육성을 보여 주고, 약점도 보여 주고,혼란스러운 것도 보여 주고, 밑바닥에서부터 시작되는 무엇인가를 보여 주면 좋겠어요. 잘 깎아 잘 만든 시집, 그런데 그 만들어 낸 것들이 천편일률적으로 비슷비슷하다면……. 세 권은 다 다르지만 전체라는 측면에서는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고, 개인적으로는 이 세 권의 시집 중에서는 『블루 십자가』가 기대되는 측면이 있었어요.시의 내용 면에서 다양한 세계를 보여 줄 수 있는 시집은 김유자 시인의 『고백하는 몸들』이라고 생각하고요. 한세정 시인은 이미 한 권의 시집으로 자기 세계를 완성하려고 한 것은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너무 깎아 내고, 너무 다듬었다고 할까요.이찬 제가 보기에 한세정 시인은 어쨌든 미래파가 그랬던 것처럼, 서정시에 대한 시쓰기 방법론에 대한 전체적인 비판적 방법론, 그것을 가지고 있는 건 분명해 보여요. 나, 당신, 우리라고 하는 인칭의 변화를 통해서 하나의 주체가 분열적인 주체로나타날 수밖에 없는 지점을 만들어 놓긴 했어요. 여기서 주로 나오는 것이 데리다가말하는 ‘에크리튀르’로 수렴될 수 있는 것들을 소재로 삼은 시편들이고, 그런 계열의시편들이 상당히 많거든요. 이 경우는 일인칭 주체의 화자가 제 자신의 내면을 말하는 것이라기보다는 그 내면이 바깥으로부터 오는 것이기에, 바로 그게 조금은 서정시의 혐의로부터 벗어나게 만들어 주는 부분이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런데 그게너무 많다 보니, 일종의 패턴화의 경향을 보이고, 어떤 고정적인 틀 안에 갇히는 느낌이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오히려 저는 그래서 한세정 시인에게 어떤 도전 의식이필요하다, 좀 더 과감해져야 한다는 주문을 해야 한다고 생각해요.이영주 시라는 것, 우리가 읽었을 때 참 편안하게 읽히는 것은 과연 어떤가, 생각해보게 돼요. 거칠고 불편하게 읽히고, 첫 시집 특유의 에네르기를 우리에게 던져 줘야 하는데 세 권 다 굉장히 매끄럽게 잘 읽혔거든요.장석원 새로운 시를 보여 줘야 하는데, 첫 시집이 ‘저는 시를 잘 쓰는, 평균 이상의 실력을 가진 시인이에요’ 이 점을 확인하는 것밖에는 안 되는 것 같아요.3283 29329기혁 시인 입장에서는 이렇게도 저렇게도 하고 싶은데, 실제로는 계약도 쉽지 않고,그러다 출판사 쪽에서 수정을 요구하면 외면하기도 어려울 것 같아요.장석원 그게 제도가 신인에게 요구하는 폭력인데…… 나쁜 제도들…….이찬 한세정 시인은 어쨌든 자신의 경험적 실존으로부터 온 것들로 추정되는 시편들이 몇 편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 실존의 맨 얼굴로 용맹하게 돌진해 가서 그 날것의모습을 보여 주지 않아요. 오히려 그것을 많이 가다듬고 숨기고 감추고 정보를 많이주지 않거든요. 비슷한 시풍을 가지고 있긴 하지만 김유자 시인의 시집은 그 자리에가서 싸우려고 하는, 그냥 관조하는 것이 아니라, 가서 온몸으로 부딪혀 보려는 의지 같은 게 보인다고 그럴까요.기혁 김유자 시인의 시집 제목이 “고백하는 몸들”인데, 정작 시집 속의 “몸”은 능동적이지 않아서 조금 아쉬웠어요. 개인적으로 최근 여성 시인들이 새로운 여성성을찾아서 나아가고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런 관점에서 보면 김유자 시인은 기존의여성성에 더 가까운 것 같아요. 여전히 어딘가에 묶여 있고 흐느적거리고. 고백하는주체로서 좀 더 능동적으로 시적 발화를 할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박도희 시인의 경우는 어떤 피해 의식이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요. 계속해서 뭔가를 이야기하고는 있는데 정작 자기 자신은 그 풍경에서 빠져 있는 시편들이 여럿 있어요. 뒤에서 좋은 시편들에 대해서도 이야기하겠지만, 투명한 플라스틱 막 뒤편에 있는 느낌이랄까 그래요. 좀 더 과감하게 자신을 드러내도 좋을 것 같아요. 그리고 김유자 시인의 「도둑고양이」와 김언 시인의 『거인』에 실린 「시집」이라는 시가 형식이나 아포리즘을 말하고자 하는 내용 등에서 유사한 점이 보이는 것 같아요. 제 생각엔 제목이“도둑고양이”인 걸로 봐서, 일종의 패스티쉬로 보는 게 맞는 거 같은데, 첫 시집임에도 기교적 측면을 많이 고려한 듯해서 좀 아쉽기는 해요.이찬 이런 필법을 사용해 본 것은 장석원 시인 아닌가요?기혁 단순히 ‘-하는 것’으로 이루어진 어투만의 문제만이 아니라, 아포리즘에 대해말하고자 하는 화법의 유사성이죠.이찬 그러니까 이게 어떤 문제가 있는 것처럼 보이냐 하면, 시인이 가지고 있는 일종의 자기 시론, 무엇인가 그 시론을 형상화해 낸 것으로 보여요. 그런데 그렇기 때문에 이게 보다 복잡한 구조를 가지지 않았을 때는, 비교적 단순한 알레고리적 진술의수준으로 떨어질 수 있다는 것이 문제인 듯해요. 바로 그 자리에서, 그러니까 어떤자리에서 학습된 시적인 이상적 모델을 가지고 실제 시를 빚어내다 보니 어려웠던지점이 있었던 것은 분명해 보여요. 이 시인도 생각해 보면 일상적 자아와 시적 자아를 분리시켜서 만들어 낸, 결국은 자기 시 쓰기의 과정에 대한 시가 상당히 많은데,그 지점이 한세정 시인과 유사한 지점을 형성하고 있다고 할 수 있어요. 제가 말하고싶은 것은, 한세정 시인의 시집에서는 뭐랄까요, 자기 실존의 얼룩진 기억 안에 들어가서 그 실존의 트라우마와 뭔가 온몸으로 부딪히고 그것을 다시 퍼 올려서 그 기억들 낱낱과 싸우려는 그런 점들은 잘 안 보이지 않는다는 것인데요. 김유자 시인은그래도 싸우려고 한다고 그럴까 아니면 그 기억의 자리를 집요하게 추적하려고 하는그런 느낌이 난다는 얘기를 하고 싶어요.이영주 김유자 시인의 시집은 단단한 이미지들이 다양하게 변용되고 있어서 재미있었어요. 이 시집은 제목이 문제적이라고 생각해요. “고백하는 몸들”이니까 너무 많은것을 보여 주고 있다는 아쉬움이 들기도 합니다.이찬 시집 제목은 물론 김유자 시인이 정한 것이기는 하지만 저한테 문의를 하셨어요. 해설을 제가 썼기 때문에. 원래 제목은 ‘검은 입술들’이었는데 그것보다는 「고백하는 몸들」이라는 시가 훨씬 힘이 있어서 괜찮습니다, 그렇게 권했던 건데요, 「고백하는 몸들」에 대해 얘기해 보면 들뢰즈가 말했던 ‘hecc it ’, 우리말로 번역한다면‘사건적 개별성’이라는 것을 가지고 시를 만들어 낸 것으로 보여요. 이 ‘사건적 개별성’을 풀어서 말해 보면, 일종의 어떤 사건의 시공간적 단일성이자 그 집합이라고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다른 뜻으로 바꿔서 얘기하면 곧 어떤 장면이죠. 우리 존재자체를 어떤 고통과 충격의 장면, 그 사건의 장면 말이에요, 그 장면의 자리로 들어가 보면 그때 우리 감각 안에, 우리 기억 안에 작용했던 수많은 것들이 있잖아요. 그장면에 담긴 음악, 날씨, 음영, 목소리, 색깔, 지나가던 행인들, 바로 그 어떤 감각적 질감의 총체, 바로 그 사건이라고 부를 만한 그 안에 있던 모든 것들, 주체 바깥에 있는 수많은 것들이, 하나하나의 장면들이 딱 개별적으로 있잖아요. 김유자 시인의 시도 그 사건적 개별성, 12월, 9월, 5월, 11월, 8월, 10월, 12월, 황병승3 303 31331시인 식으로 말하자면 하나의 신(scene)을 가지고 있는 것들을 통해 시를 빚어냈다고 할 수 있겠죠.이영주 그 시( 「고백하는 몸들」 ) 자체는 저도 재미있게 읽었어요. 시집 제목이 너무 많은것을 얘기해 주고 있어서 좀 아쉬웠을 뿐이지.이찬 뭐랄까요, 이런 느낌은 들어요. 시가 가지고 있는 밀도와 그 어떤 에너지에 비해서는 시집 제목이 좀 과잉되어 있다는 그런 느낌이 들어요. 그리고 어떻게 보면당장 여기에서 그것을 구현하고 성취해 내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가 흔히 말하는 최승자 시인 혹은 김수영 시인의 ‘몸의 시학’이라고 하는 그 자리를 가려고 하는 것 같아요. 그게 자기 시론으로 있는 거고. 그러나 그걸 정말 성취했는가의 문제는 좀 다른 문제겠죠.기혁 『블루 십자가』에서 좋다고 느꼈던 작품은 「사흘간의 다운로드 5―어머니」였는데, 굉장히 도발적인 느낌을 받았어요. (이영주 저도요. 장석원 저도 좋다라고 표시를 해 놨네요.) 일찍이 김혜순 시인이 「도솔가」에서 언급했던(“죽은 어머니가 내게 와서/ 빌어 달라 빌어 달라 그러며는요/ 가슴까지 벗었더랬죠”) 모녀지간의 여성성을 업그레이드한 버전이라 할까요. 그러한 미묘한 감정들을 파괴하지 않으면서도 자신의 발언을 거침없이 내뱉고 있어요. 어머니를 고문하는 것도 아니면서 그렇다고 어느 한편을 희생시키지도 않는다는 점이 무척 고무적이었어요. 시인의 자기 현시가 뭔가 짠한 느낌마저 주거든요. 그런 측면에서 이 시집은 무척 가능성이 보인다, 이렇게 생각해요. 하지만 다른 작품들에서는 앞서 말한 것처럼 그토록 짠했던 자기 현시가 완전히 봉쇄된 느낌이에요. 특히나 표제작인 「블루 십자가」 는 멋진 제목에 비해서 역할이 좀 빈약하구요.장석원 김유자 시인은 시를 만들어 내려는 경향이 강한 듯해요. 좋은 시라고 말할 수있는 ‘패턴’이 문제가 됩니다. 시 쓰는 방법 또는 기술 말이에요. ‘a는 b’ 한다, 이렇게 문장을 꺼내어 조건을 제시한 다음, 앞부분에 대해 해석하죠. 끝에 가면 자기 얘기를 넣으면서 봉합하고요. 계속 같은 방식이 나옵니다. 시가 밋밋하고 평평해 보이는 이유예요. 보이지 않는 강요에 시달리는 것일지도 모르겠고요. ‘좋은 시는 이런거야’라는 자기 안의 모델 또는 공식이 있는 듯하고요. 그 기준에 가져다 맞추려는시도라고 해야 할 겁니다. 말을 편하게 꺼내 놓고, 거칠게! 하고 싶은 말은 두렵더라도 발화하고, 욕먹을 각오로, 시의 완결 같은 개념은 없애고, 어떤 때는 알몸도 보여주고……. 예쁜 것만 보여 주려고 하는 것은 아닌가, 이런 생각이 사라지지 않네요.이찬 김유자 시인에게는 시적 완결성에 대한 강박 같은 게 있고, 시를 상당히 여러 번고치고 깎고 다듬고 한 흔적이 엿보이는데, 그것 자체가 오히려 처음에 시가 태어날때 그 뭐랄까 시가 태어날 때의 힘과 에너지를 오히려 축소시키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김유자 시인에게는 ‘몸’이라고 하는 것이 자신의 실제적인 그 몸이라기보다는자기가 추구하는 시적 이상, 시론으로서의 몸, 일종의 선험적인 몸의 시학으로부터자신의 시적 이상에 관한 알레고리 시편들을 만들어 내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요. 그리고 그것을 어떤 모델에 기대고 있다는 얘기를 장석원 시인이 하셨고, 기혁 시인도바로 그 지점을 지적하고 있는 듯합니다.기혁 실제로 몸을 사용하는 연극을 예로 들어 보자면, 특히 사실주의 연극의 경우 무대 위 배우들의 에너지가 장관이거든요. 대본에는 아예 지시문이 없거나 단순하게혹은 반대로 적혀 있는데, 배우의 몸을 통해 폭발하는 경우가 있어요. 가령 눈물을흘리도록 되어 있는 부분에서 배우의 몸이 이미 미친 듯이 웃고 있는 식이에요. 관객들은 그와 같이 예상을 뛰어넘는 연기에 더 큰 슬픔을 느끼게 되죠. 배우가 연기에 대한 자의식을 발동하기에 앞서, 몸을 통해 등장인물과 하나가 되어 있다는 뜻에서요. 개인적으로 김수영의 온몸의 시학과 그의 연극 경험과 관련한 논문을 썼는데,양립 불가능한 대립항들을 온몸으로 밀고 나가는 것이 연극에서는 실제로 가능하다고 생각해요. 시에 있어서도 그러한 몸의 가능성은 결코 추상적인 개념이 아니라고생각하구요. 말이 나온 김에 덧붙이자면, 대본의 형식만을 빌려 와서 연극적인 무엇을 취하려는 태도도 이제는 좀 지양되었으면 좋겠어요.이찬 김수영 시인이 말했던 온몸이나 서정주 시인의 미친 듯한 광기에 휩싸인 육체성, 그것은 어떻게 보면 논리적이거나 미학적인 자의식의 측면이나 그 연동선에서나오는 건 아니거든요. 그냥 즉자적으로 무의식적인 개방성의 자리에서 끌어올려지는 건데, 그런 게 이상하게 적고 김유자 시인의 몸은 일종의 시인의 어떤 시적 이상에 대한 메타포처럼 보여요. 그런데 저는 어떤 지점을 높이 사 주고 싶냐 하면, 특히3 3233333김유자 시인의 가족사와 관련된 몇 편의 시들을 보면 그런 지점이 약간 보여요. 그러니까 그런 시들에서 이 시인은 앞으로 만약 의식적으로 웰메이드한 시를 써야겠다는강박적 의식으로부터 조금만 벗어나면 훨씬 더 무서운 시, 훨씬 더 뭐랄까 힘이 있는시로 갈 수 있는 가능성의 단초가 보인다라고 할까요. 김유자 시인의 『고백하는 몸들』은 그런 점에서 점수를 주고 싶어요. 이제 박도희 시인의 시집에 대해서 얘기해보죠. 어쨌든 이 시도 몸 얘기가 조금 나오는데 김유자 시인의 몸이 정말 살아 움직이는, 시인 자신의 몸이라기보다는 뭔가 시론 혹은 시적 이상으로서 추구해야 될 어떤 것으로써의 메타포라면, 박도희 시인은 그것보다는 훨씬 더 자신의 몸 같다는 느낌을 많이 주기는 해요. 그런데 저는 한편으로는 어떤 생각을 했냐 하면 이 시인이분명 그 자신의 삶이나 실존 자체가 불안정하거나 아니면 어떤 병력이 있어서 치료를받거나, 정말로 가족사의 심각한 어떤 것을 겪어 낸 자리가 엿보인다고 할까요. 물론위악적인 것과는 다른 것일 테고. 『고백하는 몸들』 의 그 몸보다는 살아 움직이는, 살아 있는 그 몸의 자리 같다는 생각을 했는데 다른 분들께서는 어떻게 읽으셨는지요?기혁 그런 측면에서 본다면 비교적 활발한 신체의 운동이 포착된 작품이 일단 「개」같은 작품이었어요. 그리고 저는 신기했어요. 「환선굴」이라는 시와 「즉석사진」이라는 시가 앞뒤로 배치되어 있는 게. 이런 시편들이 어떻게 「사흘간의 다운로드 5―어머니」 와 같은 시집에 실려 있을까? 특히 「환선굴」이나 「즉석사진」 같은 작품은 시의소재나 길이, 전개 방식 등이 아주 전형적이란 생각이 들거든요. 아마도 시작 초기에 창작된 작품들이 아닐까 싶기도 한데요.장석원 「즉석사진」에 대해서는 저도 기혁 시인의 의견에 일정 정도 동의해요. 그런데자기 육성이 있어요. 제가 좋아하는 거친 면도 있고. 뭘 쓰려고 하는지, 뭘 써야 하는지 모르지만 써야겠다는 마음이 느껴져요. 앞뒤 재지 않고 일단 썼어요. 결과는성공! 동물적인 에너지를 내장한 시가 되더라고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내면의 어둠이나 가족사의 숨겨진 이야기나 세계의 폭력 같은 부분들이 드러납니다. 그래서의도와 상관없이 아름다운 시가 되었다고 봐요. 「즉석사진」 을 읽으면서, ‘이 촌스러움은 뭐지? 막 썼네’ 이런 느낌을 받았지만, 오히려 그것이 신선했어요. 다듬지 않은거친 부분도 갖고 있는, 이 사람이 오히려 시인답구나, 새롭구나, 이런 느낌이 들었어요. 박도희 시인에게 아쉬웠던 점은 형식의 강박이 있다는 것이에요. 왜 괄호에다가두고, 왜 고딕체를 쓰고, 왜 중간 제목을 달고, 이유는 무엇일까요. 자기가 말하고싶은 것을 형식에 의지하지 않고 다 말하는 자가 시인 아닌가요? 제가 그랬으면 좋겠다는 의미에서, 형식이 잘 맞지 않는 옷으로 느껴졌어요. 난삽하다는 느낌이 지워지지 않을 때가 있는데, 『블루 십자가』에서 이런 느낌을 받았어요. 형식과 잔인하게 충돌하든지, 형식을 벗어 버리고 맨몸으로 부딪치든지, 아니면 이 두 가지 자체를 박치기시키든지. 새로운 모색을 시도하면 더 좋은 시가 더 많이 나올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모두가 자신이 지니고 있는 어둠을 시로 쓸 수밖에 없겠죠. ‘나’에 대해 쓰는것이죠. ‘나’를 못 견디는 것이죠. 박도희 시인은 가끔 화산처럼 분출하는 듯해요. 앞으로 더 좋은 시를 쓸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하게 되는 시인입니다. 여기서 좋은 시라는 것은 정제되지는 않았지만, 고유한 자기 것을 보여 줄 수 있는 텍스트를 말해요.이찬 자기 실존의 어둠과 연관된 고통, 그리고 그 고통스런 경험에서 나온 시들이 많이 보이긴 해요. 그것이 어떤 힘을 갖고 있는 것은 사실이고, 그 파토스를 우리에게전달해 주는 측면이 분명히 있긴 한 것 같아요. 다만 어떤 시들은 혐의가 약간 느껴지는데, 어떤 혐의냐 하면 일종의 정신분석의 논리 구조를 가지고 만들어 낸 시는 아닌가라는 그런 의혹이 느껴지는 시들이 몇 편 있어요. 제 추정으로는 자기 실존 안에, 자기 가족 안에 특히 어머니나 남편이나 가족과 관련된, 정신분석적 요소가 분명히 살아 있는 것은 분명해요. 정신분석이라는 게 본래 가족 분석으로부터 시작하니까요. 그런데 조금 더 생각해 보면 어떤 시들은 체험에서 온 것이 아니라 정신분석의 논리 구도를 뭐랄까요 그 공식을 시로 제작해 낸 느낌을 주는 시들이 있어요.그런 점이 아쉬워요.이영주 이 시집이 그렇다는 뜻은 아니고, 사람들이 착각을 하는 게 뭐냐 하면 병리적인 상황을 보여 주면 그게 시가 된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시가 될 것처럼 느껴지지만 사실 그게 다는 아니거든요.이찬 병리적 체험 그 자체가 시가 되는 건 아니죠. 그게 다른 방식으로 옮아 와야 하고, 다른 어법으로 풀려서 다시 나와야 되는데 정신분석의 공식에 너무 잘 들어맞는, 혹은 정신분석의 공식에 자기 체험을 고정화시키는 것 같은 그런 느낌이 드는3 3435335시들이 우리 시단에도 없진 않다고 할 수 있겠죠. 이 세 시집에 대해서는 이만 정리를 하겠습니다.박상수 『숙녀의 기분』이찬 이제 박상수 시인의 『숙녀의 기분』에 대해서 얘기를 나눠 보도록 할게요. 이 시집을 추천하신 분이 이영주 시인이시죠?이영주 이 시집이 가지고 있는 특장점은 다들 아시겠지만 여성적 화자의 전면 등장입니다. 남성 시인이 여성적 화자를 가지고 시를 쓰는 경우가 종종 있지만, 시집 전체가 그런 경우는 드물죠. 여성적 화자만 그려 낼 수 있는 세계를 말하면서 그것들을쫓아간다든지 수용하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변형을 통해서 일관되게 비판적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거든요. 그런 게 굉장히 재미가 있었어요. 이렇게 여성적 화자를 등장시키는 경우에는 그 여성성이 가지고 있는 것을 최대한 발휘해서 세계를 이야기하려는 태도에 집중하게 되는데, 이 시집은 그런 것으로부터 더 나아가 있습니다. 여성적 화자들이 등장해서 자기들의 일상을 얘기하는데, 그 일상이 대부분 일그러져있고 일그러진 세계라고 하는 게 네 탓도 아니고 내 탓도 아니고 우리 모두가 공범이다라고 하는 방향을 보여 주고 있거든요. 그게 뭔가 상당히 새롭게 읽혔습니다.장석원 시집이라는 집적물의 시각으로 보면, 이 시집이 한 권의 시집이 갖추어야 하는일관성과 통일성 면에서 가장 뛰어나다고 생각해요. 한 명의 화자가 우리 세계를 그대로 장악해 버리는 것. 나는 이것이 박상수 시집의 핵심이라고 봤어요. 물론 큰 모험이기도 하겠지요. 박상수 시집을 읽고 나서는 이런 말을 꼭 하고 싶었어요. “박상수, 만세!” 왜냐하면, 실패를 하든 성공을 하든 ‘저는 이걸로 승부를 한번 봐 볼게요’이런 태도가 뚜렷하잖아요. 정말 대단한 용기이자 결단이라고 생각해요. 독특한 여성 화자가 무척 매력적이었어요. 우리 현대시에는 여성 화자가 여러 부류 등장하는데, 박상수 시인은 그중에서도 특이한 여성 화자를 내세우고 있어요. 비루한 여대생말이에요. 정말로 너무너무 매력적이에요. ‘그래 나 공부 못해, 나 알바밖에 못 해,내가 뭘 하겠어, 나? 찌질해! 잘해 보고 싶어, 그런데 안 돼. 어쩌라고?’ 이렇게 자조하다가 마지막에 ‘샤라랑 샤라랑’ 하면서……. 마지막 시가 유일하게 시인이 전면에 등장하는 시라고 생각하거든요. 찌질한 언니들의 세계를 보여 준 다음에, 박상수시인 자신이 언니가 되어서 요술봉을 휘둘러 주는 거죠. ‘샤라랑!’ 그런데 요술을 부렸지만, 세계는 변하지 않아요. 그대로인 거죠. 바뀔 수가 없다는, 정말 도저한 절망을 보여 주는 것인데, 성공했다고 봐요. 우리 시단에서 찌질한 여대생들의 실패담을 박상수 시인만큼 내밀하고 섬세하게 깊게 보여 준 사례는 없다고 단언할 수 있어요. 박상수 시인이 성공했다고, 개별 시편들의 밀도나 완성도 따위 개념들은 내던지고, 한 권의 시집으로 참 좋은 시집이라고 생각했어요. 한 권의 시집을 퍼펙트하게짜서, 컨셉을 확실하게 세우고, 숙녀의 세계를 보여 주는 것. 이런 기획은 저도 한번해 보고 싶은 것이에요. 못하겠죠? (웃음) 동의하는 건가, 전부?이 찬 저도 비슷한 생각인데, 하나의 주제 의식과 일관된 소재와 일관된 모티프로 처음부터 끝까지 모험적인 시도를 보여 주고 있는 시집이라는 생각을 했어요. 그런데그 모험 때문에 약점도 있다고 생각해요. 어떤 약점이 있냐 하면 첫 번째는 너무 색깔이 하나, 단일색이라는 것이에요. 또 하나는 이런 느낌이에요. 결국 이 시집의 문법은 자기 자신에 관한 이야기라기보다는 세상에 대한 이야기, 남에 대한 이야기, 일종의 풍속세태소설의 문법을 빌려 온 것은 아닐까라는 것이에요. 시의 정통의 문법,시적인 문법이 아니라 전체가 다 풍속세태소설의 문법, 그 문법을 가지고 있는 건 아닐까? 다시 질문이 필요할 거 같은데, 왜 박상수 시인은 자기 자신에 관한 시가 아니라, 타인의 삶을, 나아가 일종의 그 풍속을 가지고 시를 쓰는 것일까라는 질문 말이에요. 시는 그 정통의 문법에서 보자면, 자기 자신에 관한 그 영혼의 트라우마 그리고 실존의 공연장을 섬세하게 고백하는 것일 텐데요. 아무리 이렇게저렇게 다른 자리에서 모티프를 빌려 온다고 치더라도 결국 자기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일텐데, 이 시집에는 그런 게 잘 보이지 않는다는 말이에요. 저는 이 시집에서 시인 자신의 절망은 느끼지 못했어요. 이 시대의 여대생, 이 시대의 이십대 여성들이 겪는체험담, 그런데 그걸 통해서 결국 박상수 시인 자신이 드러나는 자리가 있어야 할 텐데, 그건 느껴지지 않아서 이게 한편으로는 이 시집의 미학적 부담으로 작용하는 것은 아닌가,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기혁 저는 “숙녀의 기분”이라는 제목에서 흥미를 느꼈어요. 곰곰이 생각해 보니 이3 3637337제목은 두 가지 불가능한 대상을 지시하고 있는 것 같아요. 일단 이 시집을 쓴 사람이 남성이라는 점에서 “숙녀의 기분”을 완전히 알기란 불가능하죠. 두 번째로 “기분”이라는 추상어예요. 남성이라면 당연히 “숙녀의 기분”을 알 수 없겠지만, “숙녀” 역시 자신의 기분을 정확히 알 수는 없기 때문이에요. 결국 박상수 시인이 찾아낸 건남성이 바라보는 여성성의 문제일 수도 있겠지만, 좀 더 근본적으로는 우리가 결코이해할 수 없는 어떤 지점에 대한 하나의 도전 같은 느낌이 들었어요. 「기대」라는 시의 맨 끝을 보면 “니가 외치면 외칠수록 낭만적인 이 기분” 이런 구절이 있어요. 시적화자가 거기서 “낭만”을 느낀다면 남성 특유의 폭력성을 드러내는 것일 수도 있겠지만, 만약 그게 아니라고 한다면 말이 가지고 있는, 아무것도 설명해 주지 못하지만우리가 늘 사용하고 있는, 그러한 언어의 폭력성을 드러내는 것 같기도 해요. 언어의 폭력성으로부터 남성성과 여성성이 결정되고 대립 구조가 생겨났다고 보기는 어렵지만 뭔가 언어와 관련성이 있어 보여요. 특히 이 시집에는 비루한 여대생들이 많이 등장하는데, 제가 느끼기에는 그렇게까지 비참할 정도는 아니었거든요. ‘음, 뭐지? 잘됐으면 좋겠어요’라고 말해 주고 싶은 그런 여대생들의 모습 정도랄까요. 그렇다면 박상수 시인이 추구하고자 하는 바는 남성과 여성 사이의 대립 구조를 탈피해 양쪽 모두가 비루해지지 않을 수 있는, 조금 다른 여성성의 모델을 제시하고 있는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요.이찬 그 지점은 분명해요. 그러니까 이전에 없었던 명백한 자기의 스타일을 만들어내는 데 성공한 건 분명해요.이영주 그렇죠.기혁 오히려 이찬 선생님이 앞서 말씀하신 풍속세태소설의 화법이 있는지는 잘 모르겠어요. 그리고 이 시집은 굉장히 계획적으로, 전략적으로 짜인 것 같거든요. 결국분명한 대결 의식을 지니고 썼기 때문에 시인 자신의 독백이 부재하는 상황이, 한계 지점이 아니라, 일종의 도박과도 같이 극단으로 몰고 나간 결과는 아닐까, 그래서 그 지점이 독보적이라고 생각했어요. 이러한 스타일을 가진 시인이라면 다음에는이걸 허물고 또 어떤 걸 보여 줄 수 있을까, 독자로서 기대를 갖게 되기도 하구요.장석원 여기에 정말 비참하게도 정신이 나갈 수밖에 여대생들이 있어요. 알바 때문에, 가난 때문에, 공부할 시간이 없어서 학점을 빵꾸 내는, 재수가 없어서 울 수밖에 없는, 여대생들이 교묘하게 서로의 존재에 간섭하는 모습들이 보여요. 고통받지만 어쩔 줄 몰라 하고, 아무것도 의식하지 못하고, 스르륵 없어지는 여자들을 얘기하려는 시가 있어요. 이것이 절망이라는 것, 그들에게 변화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얘기하려는 시가 박상수의 시죠. 시인은 그녀들을 위로하기 위해 ‘샤라랑 샤라랑’ 주문을 걸어 줘요. 불쌍한 그녀들을 위해 시를 쓴 사람은 없었죠. 오토바이 타고 ‘오빠 달려’ 하는 중딩이나 고딩의 얘기는 있었지만, ‘알바’의 고통이나 교수의 성희롱 얘기,이런 분야를 다룬 시는 거의 없었죠? 분명히 실재하나, 아직 알려지지 않은 것들을시에 끌어왔어요. 황병승 시인이 그랬던 것처럼, 매우 소중한 시도가 성공했다고 봐요. 박상수 시인의 시를 읽고 나는 ‘절망할밖에’ 없었어요. 개선될 수 있을까요? 사회적 약자들이 여기에 있구나, 이런 인식을 가능하게 했어요, 박상수의 시가. 노동자? 현대중공업? 자식을 특례 취업시키는 제도를 만든 노조? 웃기죠. 노동운동이뻥이라는 점, 박상수 시인 식으로 말하는 방법이 새로운 비판이 될 수 있다고 봐요.이찬 사실 이 시집의 뒷면에는 첨예한 사회학적 탐구와 직관이 있거든요. 그러니까그게 어떤 정치적인 이데올로기의 선험성이 아니라 어떤 일상적 관찰을 통해서 보니까 사실은 매일매일의 일상의 순간에서 부딪히는 감각의 탐색과 수집, 곧 출구 없는청년 세대가 가지고 있는 그런 절망, 그것을 사회학적인 탐구를 통해 보여 주는 자리, 이 점이 독특한 자리로 인정할 수 있는 지점인 듯해요.이영주 왜 이런 화자를 등장시켜서 시를 썼을까에 대해 생각해 봤는데, 남성 시인이여성 화자를 빌려 올 때는 어떤 점에서 자기와 닮아 있다고 생각할까, 이것에 대해생각하게 되더라구요. 남성 시인 안에도 여성적인 게 있을 텐데, 비루하고 찌질한 여대생의 감수성이 분명히 지금 시인 자신과 만나는 부분이 있을 것이라는 추측을 하게 됐죠. 시인 자신이 대학에서 강의를 하면서 그녀들을 관찰할 기회가 많기도 할 것이고, 자기 목소리가 합치될 수 있는 부분이 분명히 있기 때문이겠죠. 자기 얘기를전혀 하고 있지 않지만 분명히 자신이 느끼는 현실 감각이 들어가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같은 여성의 입장에서 읽으면, 음, 기분 좋지는 않아요. 왜냐하면 찌질한 여대생이니까. (웃음) 찌질한 남성 화자에 대한 시는 종종 있습니다. 그리고 그 찌질함3383 39339이 극단적으로 갈 때도 있지요. 하지만 여성이 화자로 등장할 때에는 대부분 신비화되거든요. 특히 여성 자신이 여성 화자를 쓸 때조차도 일정 정도 신비화하는 게 사실이에요. 나는 아픈 사람, 나는 고통받는 사람, 나는 상처받은 대상이야, 어떤 억압과 폭력과 금기에 의해서, 그래서 나는 이렇게 망가지는 거고 내가 찌질해서라기보다는 나를 둘러싼 환경이 사실 나를 이렇게 만든 거야라고 은밀하게 외치는 화자들이 많거든요. 그런데 이 시집은 그것들을 완전히 뒤집은 거죠. 적나라하면서 조금은묘한 기분이 들더라구요. 그런 지점도 상당히 독특하죠. 살짝 아쉬운 점은 전반적으로 기획된 느낌이 든다는 거였어요.장석원 여기에 있는 시들 하나하나가 다.이영주 기획된 느낌이니까.이찬 저는 어떤 점을 좋게 봐 주고 싶냐 하면, 미래파 담론 이후의 시들이 직접적인차원에서 정치성은 없지만 개인적인 감각이 매우 섬세하게 드러나고 있다는 것인데,이 시집은 그 감각을 가져오면서도 사회학적 상상력이랄까 그게 지면에 굉장히 강하게 들어 있어서 그 지점을 높게 사 주고 싶어요. 정치시로 나아갈 수 있는, 지금 이자체가 정치시란 뜻이 아니라, 정치시로 나아갈 수 있는 그런 세부의 다른 국면들을지니고 있다는 점 말이에요. 물론 그게 어떤 스트라이크를 일으키는, 청년 세대의 가난과 절망과 분노의 문제를 정면에서 반영하거나 재현하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과는 다른 사회정치학적 상상력이라고 하는 것이 태동할 수 있고 가능할 수 있다는 점을 보여 줬다는 점에서 좋게 느껴졌어요. 곧 우리가 나날의 삶에서 엿볼 수 있고 감지할 수 있는 그런 나날의 생활의 풍속도에서도 충분히 사회정치적 상상력으로가득한 시를 만들어 낼 수도 있겠다는, 바로 그 지점을 열어 보이고 있는 점을 높이사 주고 싶어요. 다만 아까도 얘기했듯이 전체적으로 좀 기획된 시집이라는 생각이들고, 정작 그러면 박상수 시인 자신은 어디 갔지라고 하는 이 질문을 던져 보면 거기서 저는 잠깐 저어되는 지점은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시인 자신을 포함한 이 시대 청년 세대의 그 생생한 감각의 언저리를 집요하게 탐구하기보다는 미리 자리 잡은 어떤 방법론적 기획을 투사해서 바라보고 있다는 점이 아쉽다라고 그럴까요. 더말씀하실 게 없으시면 박상수 시인의 시집에 대해서는 이만 마치고, 채상우 시인의『리튬』에 대해 이야기해 보죠.채상우 『리튬』이찬 이 시집은 장석원 시인께서 추천하셨는데 먼저 얘기를 해 주시죠.이영주 저는 해설이 재미있었어요. (웃음)장석원 채상우 시인의 첫 번째 시집이 『멜랑콜리』였잖아요. 아주 오래전 시집이죠.『리튬』이 두 번째 시집인데요, 꽤 오래 걸렸습니다. 저는 방법론 자체, 텍스트들 거느리기, 흔한 것이지만, 실제로는 이 방법을 채상우 시인이 처음으로 시작했다고 생각해요. 거느리는 텍스트들이 상당히 중구난방인데, (웃음) 이 안에서도 독특한 것은 홍콩 영화의 세계지요. 거의 유일하지 않나 싶어요. 물론 박정대 시인의 경우가있었지만, ‘후까시’에도 진정성이 있다고, 채상우 시인에게는 박정대 시인 식의 후까시가 전혀 없어서, 멜랑콜리를 껴안고 아프게 걸어가는 방식은 박정대 시인도 갖지 못한 거예요. 채상우 시인이 처음이라고 봐요. 그리고 처음부터 끝까지 산문시죠, 몇 편 빼고. 처음부터 끝까지 상처받은 것들에 대한, 사라진 것들에 대한 진혼곡이에요. 저는 첫 시집도 잘 봤고, 두 번째 시집을 오래 기다렸고, 드디어 제일 처음만났는데…… 제가 먼저 얘기하고 싶은 것은, 더 강렬해졌다는 느낌이에요. 채상우시인이 정말로 오랫동안 시에 대해 고민했고, 자신이 살고 있는 세계와 살았던 세계를, 자신의 실존 전부를 걸고, 치열하게 시 속에 녹였다고 판단했어요. 지나간 세월에 대한 채상우 시인의 애도가 굉장히 독특하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어요. 저와 공유하는 부분이 많아서이기도 하지만, 저는 그 부분에서 변별되는 지점이 충분히 있다고 생각하고, 그런 것들을 지금부터 다른 분들이 봐 주셨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많이하고 있어요. 저는 해설을 쓰기 위해 어렵게 시를 봤기 때문에, 오히려 할 말이 없어지는 그런 경우에 봉착했어요. 이제 다른 분들의 생각을 듣고 싶어요. 저질 해설자로서 이 시집에 대해 ‘어떻고 어떻고……’ 주저리주저리 이야기하고 싶지 않네요. 이시인이 왜 아파하는가에 대해 좀 성실하게 추적해야 된다는 생각이 들었고요. 첫 시집에는 없었던 것들이 두 번째 시집에 새로 생겼어요. 사랑과 죽음이에요. 우리가 지난주에 사석에서 ‘NL 오빠’ 그러면서 깔깔거리고 웃었던 그 부분인데, 혁명의 실패3403 41341에 대한 이 시인의 태도도 조금 바뀌었다는 생각이 들어요 첫 번째 시집에서는 그것을 껴안으려고 했고, 그 때문에 생살이 떨어져 나가는 아픔을 느꼈지요. 『리튬』에서는 과거의 요소들이 조금 남아 있지만, 그것이 이 시집의 전체가 절대로 될 수 없다는 것은 확실합니다. 채상우 시인은 이번 시집에서, 과거의 재를 종이배에 실어 두고, 조용히, 역사의 강물에 띄어 보내고 있습니다.이영주 기본적으로 산문시의 형태를 끌고 가면서 산문적인, 산문시가 보여 줄 수 있는 입체적인 리듬의 형태를 끝까지 가져가고 있습니다. 대단한 집중력이거든요. 이시인의 집중력 때문에 독자의 집중력이 증폭될 정도로 리듬감을 쫀쫀하게 만드는 측면이 있습니다. 흔히 쓰이지 않는 한자들도 꽤 많았어요. 지적인 태도가 시와 맞물려서 그것 자체가 가지고 있는 또 이상한 재미를 발생시키고 있어요. 후일담적인 요소가 굉장히 강했는데, 이 후일담이라고 하는 게 한때의 유행이라든지 코드라든지이런 느낌으로 처음에 시작한 것 같은데 마지막에 가면 굉장히 비극적인 인식을 불러오거든요. 그런 정서를 공유하지 않은 세대에게는 어떻게 읽힐까 궁금함이 드는시집이었어요.기혁 제가 말하면 되나요? (웃음) 그러니까 저 같은 경우는 NL, PD 등등을 전혀 모르기 때문에 어렴풋이 짐작만 하는 거잖아요. 그래서 시집을 처음 읽었을 때 ‘무엇을’이 없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이 사람이 왜 이렇게 멜랑콜리하지? 산문시로 계속해서 얘기하고는 있는데 왜 이런 말들을 계속 쏟아 내는 거지? 앞선 문장은 뒷문장과어떻게 관련되고 또 제목과는 어떻게 관련되지?’ 등등요. 전체적으로 분명하게 잡히는 게 없었어요. 그런데 신기한 것이 계속해서 긴 산문시를 읽다 보니까 분명한 실체를 언급하기는 어렵지만 무언가 만져지는 지점이 있다는 거예요. 이게 채상우 시인이 가진 문장의 힘인 것 같은데, 전체적으로 긴 산문시들을 읽다 보면 개별적인 시어를 분석하기는 어렵지만 켜켜이 쌓이는 것들이 있거든요. 특히 「찰기(札記)」라는 시는 제목에서부터 드러나듯이 ‘작은 것을 기록한다’에요. 하지만 이 작은 기록들이 서로 어떤 연관성을 지니고 있는지 그리고 한 덩어리가 되는지는 설명하지 않아요. 그냥 무관한 문장들을 두서없이 쭉 늘어놓는 것 같은데 계속 읽다 보면 ‘아, 어떤 사람들이 사는 데는 인과적 논리가 필요한 게 아니었구나’, ‘무관한 문장들이 서로 붙어서 무언가를 형성하듯이 말 그대로 생의 찰기 같은 게 필요한 거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혁명의 실패를 겪어 본 사람 입장에서는 정말 당시의 혼란스러운 기록들이다 생을 엮어 내는 찰기로 보일 수도 있겠구나’, 그런. 「기왕력(旣往歷)」이라는 작품도그 제목의 뜻이 ‘병을 앓았던 내력’인데, 채상우 시인이 지금 계속하고 있는 작업이그런 게 아니가 싶어요. 자기가 병을 앓았던 역사를 끊임없이 발설해서 서로 진득하게 붙을 수 있는지 시도해 보는 것. 그래서 각각의 시편들을 읽을 때마다 ‘그 소소한역사들이 정말로 ‘지금, 여기’에서 응집될 수 있을까?’ 이렇게 되묻는 게 돼요. 그게이 시집의 가장 큰 매력이기도 하구요.이찬 이 시집을 읽으면서 제가 연상된 거는 보르헤스의 「기억의 천재 푸네스」였는데,이 시인은 제가 느끼기에 굉장히 기억력이 비상한 사람이고, 그리고 그 기억을 스캔하듯이 (장석원 복기한다고 그러죠.) 갖고 있는 사람인데, 그 기억의 세부 낱낱을 다시 어쨌든 재구성하려고 하는 의지 같은 것이 엿보였어요. 그런데 문제는 보여 주고 있는 자리, 그게 묘하고 놀라워요. 저토록 연결이 잘 안 되는 기억의 여러 가지파편들을 시적인 유사성이나 인접성이 아니라 묘하게도 유행가 가사나 입말의 웅얼거림, 우리 안에 뭔가 이렇게 찰싹 달라붙어 있는 그 웅얼거림들로 이어붙이는 것이놀라워요. 촌스러운 노래라든지 그 노래의 가사라든지 아니면 우리가 예전에 불렀던 민중가요라든지 그런 것들이, 이상하게 접착제 노릇을 하고 있는 것 같다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서로 다른 기억의 파편들을 서로 연결시키면서 그 흐름을 쫘악 밀고가게 만드는 부분이 놀라웠어요. 산문적인 시들이 많은데도 불구하고 굉장히 리드미컬하거든요. 그리고 이 지점에서 굉장히 독보적인 자리가 있어요, 리듬은. 그 산문성의 리듬감을 만들어 내는 데는 제가 볼 때에는 이 시집만큼 정말로 탁월하게 잘보여 주는 시집이 별로 없었다는 생각이 들어요. 뭔가 저도 이상하게 따라서 웅얼웅얼, 입으로 자꾸 웅얼웅얼거리게 만드는 힘이 이 시집에는 가득해요. 그게 묘하게어떤 기억을 다시 살아 있게 만드는 것 같아요. 그러니까 우리 사회가 IMF를 겪고다시 어려워지고 그래서 사회학적인 상상력 혹은 정치적인 공동체의 문제로부터 뿔뿔이 흩어져서 단자화된 개인이 되었는데, 그 단자화된 개인들을 다시 공동체의 현장으로 밀어 넣는 효과를 만들어 내는 데 있어서도 저 리듬감은 굉장히 탁월한 효과3423 43343를 발휘한다, 그게 우리 몸에 붙어 있는 입말의 리듬감을 다시 환기시키면서 그 기억을 다시 독자들에게 복기시키거든요. 그러니까 그 지점이 놀랍다는 생각을 했어요.장석원 채상우의 정서는 기본적으로 뽕끼예요. 뽕끼를 스스로 인식하는 자기 비하의투철함이, 실패했기 때문에 벌받아야 하는 죄의식의 강렬도가, 저 세계를 끌어안는힘으로 변화되는데, 그 힘이 정말 강력해요. 재미있었던 부분은 산문시의 리듬이 채상우 시의 육체를 만들어 내고, 그 육체가 한 시대의 몸을 거의 그대로 재현하고 있다는 것이었어요. 놀라워요. 1990년대 초반까지의 문화적인 코드와 정서를 완벽하게 재현하고 있는 특출한 몸을 갖추고 있어서, 저는 그 몸을 ‘리듬의 실체’라고 보는데, 채상우 시인은 기억들의 접합체로써 텍스트들을 철저하게 이용하는 방법을 체득하고 있어요. 산문시의 리듬이 현대시의 리듬인데, 산문시의 리듬을 집약적인 스타일로, 양식으로 보여 주는 경우는 채상우 시인이 유일하다고 생각해요. 박상수 시인도 그것을 보여 주고 있지만, 박상수 시인의 시들에서는 리듬의 육체가 잘 느껴지지 않기 때문에, 그래서 박상수 시인이 어떤 태도만 보여 준다고 생각될 때가 있는것에 비해 볼 때, 채상우 시인에게서는 태도도 느껴지지만 그 너머의 맨살이 느껴져요. 징그러울 정도였어요. 아우, 미워.이찬 박상수 시인이 미학적인 기획과 방법론으로써 그걸 갖고 왔다면 이 사람은 자기 거예요. 자기 몸이에요.장석원 첫 시집에서 세계의 죽음만 바라보고 있었다면, 『리튬』에서는 그 세계의 죽음뿐만 아니라 시인 자신의 죽음까지 응시하고 있어요. 바라보는 주체도 사멸할 수밖에 없었다는 걸 깨달은 것이죠. 그래서 이 시집이 첫 시집보다 훨씬 좋다고 생각해요.이영주 그런데 왜 같은 델 펴고 있어? (기혁 웃음) 사랑과 죽음이라는 말 때문에 제가이 시를 폈는데요, 「끌림」이라는 시를 보면 나이 어린 여자가 “살려 주셔요”라는 잠꼬대를 할 때 “라일락이 피려 하고 있다”라고 하잖아요. 사랑이라고 하는 게 죽음과맞닿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탁월하게 보여 주고 있어요. 「크라잉게임」에서는 그 지점을 쭈욱, 시대적 감각까지 끌고 가면서 얘기하고 있고요. 이 시집을 전반적으로읽었을 때 원래 했던 사랑이 있는데, 진혼곡처럼 재를 뿌리면서 찾아오는 것이 아닐까라는 예감이 들면서, 슬픔도 있어요. 혁명이라고 하는 것이 실패하는 순간 그 혁명에 대한 애증, 증오와 분노의 감정이 폭발하게 되죠. 사실은 사랑의 감정에서 나오는 것인데, 그게 이제 전면화돼서 저는 그 세대가 공유할 수 있는 공통감각이 좀있지 않나 싶어요.장석원 공통감각이라는 말은 적절하고 유의미해요. 그건 약점일 수도 있지만요. 제말은 아니고요, 저랑 비슷하다, 채상우와 장석원은 비슷하다라는 얘기를 많이 들었어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이영주 시인의 말대로 공통감각의 요소만을 찍어 보고는, 겉모습만 보고는 그렇게 몰아붙이는 것인데, 저는 그러한 발언에 문제가 아주많다고 봐요. 저는 그 시대를 의지적으로 기억하고 분석하려고 했지만, 채상우 시인은 정서적으로 격렬하게 반응해요. 시대의 통증을 그 누구보다 먼저 개인화하는 특이한 능력을 지니고 있어요. 저는 채상우 시인처럼 반응할 수가 없습니다. 우스갯소리인데, 이 시인이 ‘NL 오빠’라서 그렇지 않을까요. (이영주 맞아요.) (웃음) NL 오빠들은 훅, 영혼을 바쳤거든.이찬 저는 채상우 시인의 놀라운 끈덕짐에 주목하고 싶어요. 시인 자신이 이십대에진실하게 살았던 그 자리, 그리고 여기에는 분명 최근에 겪은 시인 자신의 개인적인사랑 이야기, 그리고 그 진실, 그 진실이 다른 사람들로부터 외면받고 비난당한다할지라도 그 진실을 어쨌든 다시 재고해 보려는 그 끈덕짐이 놀라워요. 그 진실을 강변한다기보다는 그 진실을 되돌아보고 다시 찾아보려고 하는 그런 끈덕짐 있죠. 그래서 수많은 기억의 파편들을 더듬는 이유가 결국은 자기 진실에 대한 탐구에 있는것 같아요. 뭐랄까요 그 진실에 대한 충실성만큼은 어쨌든 채상우 시인이 계속 견지하는 태도라는 것이고, 그 지점이 무서운 것이에요. 이 시집은 그 두려운 진실에 대한 집중력 같은 걸 갖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끈덕지게 뒤쫓으려는 충실성 같은 걸 갖고 있다는 점에서 굉장히 힘이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리고 사실은 더 깊이 읽으면 읽을수록 우리를 흔드는 힘이 더욱 강하게 느껴지는, 그런 점에서 독특한자리를 갖고 있다고 생각해요.기혁 진실 얘기를 하셔서 저도 덧붙일까 합니다. 아까 접착제라는 말씀을 하셨는데,결국 그 말은 읽는 사람이 알아서 조합해서 읽으라는 뜻이죠. 시인 자신은 순수하게3 4445345사건만 던진다는 거죠. 그런데 「끌림」이라는 짧은 시를 보면 그렇게 사건만을 던지는 과정에서조차 자기반성의 흔적이 엿보여요. “거실에서 테레비를 보다가 안방 문을 열면 나이 어린 여자가 살려 주셔요”라고 외치는 현실은, 말하자면 미디어인 텔레비전의 세계와 안방 문 너머의 세계가 폭력적으로 충돌하는 모습이라고 할 수 있어요. 그럼에도 그와는 무관한 듯 “라일락이 피려 하고 있다”는 데 이 시의 문제의식이 있어요. “라일락”이 바로 생의 접착제이자 시인의 “끌림”이거든요. 결국 전혀무관한 사건들을 늘어놓는다고 생각하지만 시를 쓰는 이상 어쩔 수 없이 기획의 혐의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거든요. 순수한 진실이 아닌 거죠. 재미있는 점은 바로옆의 시가 「크라잉게임」이라는 거예요. 작품 속에 윤동주의 「별 헤는 밤」의 일부가“추억과 발목 하나에/ 사랑과 발목 하나에” 식으로 패러디 되어 있어요. 이것은 곧시인이 본 역사, 사건, 이를테면 운동권의 여러 모습들이 있는데 왜 그걸 언급할 때마다 마치 패러디처럼 의미를 형성해야만 하는가, 되묻는 시도라고 할 수 있어요.마지막 연이 “죄 없는 발목들을 잘라야만 한다”로 끝나는데 진실 추구에 대한 결벽이 대단하고 느꼈어요.이찬 그건 이렇게 봐야 하지 않을까요. 채상우 시인은 자기가 진실하다고 하는 그 직관만 있는 것이지, 그 진실의 내용을 강변하려고 하는 건 아닌 것 같아요. 그리고 분명히 자기 삶의 진실, 혹은 진실하게 살았던 자기 자신을 계속해서 재구성해 내는 그속에 자신의 진실이 거부당했던 그러니까 예컨대 1980년대 대학가의 운동권의 문화라고 하는 것이 진실이었는데 서태지가 나오고 사회주의 정권이 무너지고 그리고그러면서 그 진실이 외면당했던 그 자리, 그 자리를 다시 다 더듬어 가서 결국 내가가지고 있었던 진실이 정말 진실이었던가, 이것은 아직도 진실로써 유용한가, 저는그 질문을 계속 던지고 있다고 봐요. 그게 놀라운 거죠.이영주 저는 그 점에 대해 약간 염려했어요. 혁명이라는, 완성되기 힘들고 실패할 수밖에 없는 운명은 아름다운 것인데 그것이 주는 어떤 절대적인 패배감이 있거든요.그런데 이 절대적인 패배감을 그냥 갖고 가거든요. 그 패배감으로 갖고 가서 보여 주는 세계라고 하는 것이 계속 진행되고 있는 이 과정을 과연 담아내고 있을까 싶은 거죠. 어떻게 보면 더 교묘해지고 더 가려지면서 더 정교해진 지점을 이런 방식으로 계속 끌고 간다는 것, 실질적으로 지금 현재 벌어지고 있는 일들에 대한 시인의 태도는잘 알기가 힘들다 뭔가 그런 아쉬움이 있었어요.장석원 아주 적절한 지적입니다.이영주 기대하고 싶은 거죠. 왜냐하면 저 같은 특히 낀세대들에게는 경험으로부터 비롯된 치열한 의식이 부럽고 아름답기도 하지만, 그래서 이제 결국 나는 어떻게 하면좋을까, 선배들이 갔던 길이 이런 것이었다면 거기서 나도 뭔가 흡수하고 혹은 비판적 지지로 가야 할 텐데……. 그것을 기대하고 전 끝까지 봤어요. 그 부분을 사실 이시집은 얘기해 주고 있지 않아서 커다란 물음표가 하나 남은 셈이 됐죠.장석원 저는 해설을 써야 했기 때문에 원고를 미리 받았고, 쓰고 있는 와중에도 수정된 원고가 왔었어요. 그런데 시집의 제목이 없었어요. 가제목이 너덧 개 있었는데,거기에 ‘리튬’은 없었어요. 없던 ‘리튬’이 제목이 되고, 「시인의 말」이 통으로 「리튬」에서 왔어요. 너바나 (Nirvana)의 「리튬」에서 그대로 가져왔어요. 왜 ‘리튬’을 제목으로 삼았을까요? 제가 채상우 시인과 농담한 적이 있어요. ‘제목으로 멋있잖아. 리튬! 니가 리튬 하면, 다음에 내가 우라늄 할게’, ‘광물질적이어서 좋잖아’ 이렇게. 그런데 너바나의 「리튬」에서, ‘신을 찾았다, 그런데 왜 나는 죽지 않는가’를 끌고 온 자의식의 실체가 궁금해요. 죽고 싶은 건가요? 죽지 못해서 아프다는 건가요? 커트 코베인이 자살하잖아요. 자살할 때, 여러 가지 이유와 정황으로, 「서프라이즈」에도 나왔던 죽음이니까 다들 잘 알겠지만, 커트 코베인이 자기를 증오했다는 것은 잘 아시죠. 그 이유들 중에 하나가, ‘나는 너무 유명해졌다’ 그리고 ‘메이저의 자본 논리를 참을 수가 없다’ 그래서 ‘나는 죽을 수밖에 없다, 내 음악은 이제 끝났다’ 이런 말을 커트코베인이 남겼어요. 그가 보여 줬던, 자기 세대의 멸종에 대한 저항 또는 자기 스스로를 멸종시키려는 욕망을 우리는 ‘사랑하는 폐멸’이라고 부를 수 있을지도 몰라요.자기 처형 의식을 실현한 가수와 시인 채상우는 그런 의미에서 겹쳐지지 않나요. 시집 제목으로 ‘리튬’이 올라온 이유, 시집에는 없지만, 너바나의 「리튬」 가사 중에 커트 코베인은 자기를 죽이죠, ‘난 날 죽일 거야, I kill you’라고 외쳐요. ‘you’가 신이기도 하지만, 나에 대한 분노, 자기모멸, 자기 학대, 자살로 이어지는……. 왜 제목이 ‘리튬’일까요? 여전히 의문이 들어요. 어쩔 수 없이 주기율표를 봐야 하고, 3번,3 4647347리튬이온전지, (웃음) 그 리튬 아시죠? 빵! 폭발하는 원소. 금속 중에서 첫 번째 원소. 맞나? 이 시집을 읽을 때 느끼는 또 하나, 정서적 반응이 폭발이었어요. 감정과정서를 하나의 틀로 만드는 데 성공했어요. 채상우 시인이 이번 시집에서 성취한 통일성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그가 제시한 감정의 틀은, 견딜 수 없는 상실감, 또 견딜 수 없는 패배감, 거기에 따른 자기모멸이라고 할 수 있는데, 정서적 코드를, 공통감각을, 단독적으로 획득한, 채상우 시인만이 발견했어요. 독특한 파워가 느껴져요. 때문에 감동적이었어요. 마지막 시, 「어떻게 사랑하게 되었을까」가 눈에 들어오네요. 시집을 닫으면서 다음 시집을, 다음 생을 얘기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이찬 뒷면에 뭐가 있냐 하면, 자기 진실에 대한 확신이 있는 것 같아요, 제가 보기에는. 그러니까 그 자기모멸을 할 수 있는 힘으로 자신이 그 진실, 내가 늘 진실하게 살았다가 아니라 나는 그렇게 모멸적이고 잘못한 것도 많고 실수한 것도 많지만 그래도 최선을 다해서 진실하게 살려고 했다라고 하는 자기 확신이 배면에 있다는 것이죠. 그래서 끊임없이 기억의 파편들을 다시 재구성하고 재조립하고, 아까 기억의 파편들을 접착제처럼 이어 놓고서 그러니까 결국은 잃어버린 시간을 다시 재구축하면서 그 진실을 찾아보려고 하는 태도가 있다고 했는데, 사실은 ‘난 진실했어’가 아니라 난 ‘과연 진실했는가’를 자문하면서 그 진실을, 자기 진실을 찾아내려고 하는 뭐랄까요 끈적거리는 힘, 놀라운 자기 집중력 그게 돋보인 시집이라는 생각이 들어요.기혁 리튬이온전지는 충전이 되잖아요? 찾아보니까 유독 리튬이온전지만 ‘기억 효과(memory effect)’가 없다고 해요. 기억 효과라는 건 전지가 완전 방전이 되지 않은 상태에서 다시 충전하게 되면 실제 용량이 줄어들어 버리는 현상인데, 리튬이온전지에서는 이 기억효과가 발생하지 않는다고 해요. 과거의 시간을 방전시키지 않은 상태에서 계속해서 현재의 에너지가 유입되고 그렇게 유입된 것이 소진되면 또 충전해야만 하는, 그러한 삶이 시인이 살아온 모습이 아닐까 싶어요. 그렇기 때문에 맨 마지막에 배치된 시에서 “너에게도 죽을 마음이 남아 있는가” ( 「어떻게 사랑하게 되었을까」 )라고 묻는 것이 깊은 울림으로 다가왔어요. 결국 시인의 기억이 재생되는 방식이 “죽음”을 초월해 이루어지고 있다는 말이고, 예수의 부활처럼( 「이 사람을 보라」 ) 그 고통의 기억을 통해 성스러움의 영역으로 나아가고 있는 게 아니었겠나, 추측해 봤어요.이찬 그런 태도가 그러니까 높이 사 줄 만한 거라고 생각해요. 선험적으로 미리 정하지 않고 과연 내가 이런 실수를 저질렀고 이러한 추문에 휩싸였고 그래서 사람들이나를 손가락질했고 또 뭐랄까 약간 저주를 퍼붓기도 했는데 과연 그러면 나는 정말로 진실했는가라고 하는 점을 끊임없이 자문한다는 것 말이에요. 그래서 시인이 다시 제 기억의 퍼즐을 더듬어 올라가서 자기 진실을 찾으려고 하지만, 어떻게 보면 어떤 내용이나 어떤 태도를 미리 확정한 게 아니라 찾아보고 계속 자문하면서 탐구하려고 하는 태도, 그게 돋보인다는 것이고 그게 놀랍다는 거죠. 그리고 이만큼 자기기억에 대해서 혹은 자기 체험에 대해서 정말 끈덕지게 물고 늘어지는 시인은 없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죠.이영주 그런 의미에서 재미있는 게, 일반적인 후일담은 아니라는 거예요. 지금까지이어지고 있는 것인데, 또 이것이 2013년에 나왔다라는 사실도 상당히 굉장히 끈덕진 거예요, 그것 자체가. (웃음)기혁 그런데 단어들이, 원래는 촌스러운 단어들인데, 이 시집에서는 꽤나 멋있어요.(이영주 그렇지.) 뭔가 빈티지스런 느낌이 나면서.이찬 여기 ‘강철서신’은 뭔지 알아요? (……) 강철이라는 사람이.이영주 아 난, ‘강철은 어떻게 단련되는가’ 이것처럼.이찬 강철이라는 사람이 내세운 게 몇 가지가 있어요. 그 가운데 그 운동권 세대의 마음을 가장 사로잡았던 것이 품성론인데, 운동하는 자는 품성이 좋아야 한다, 인격적으로 완성된 존재여야 한다, 뭐 그렇게 요약할 수 있는 것이 이른바 품성론이에요.그런 것에 대해 당시 운동권 학생으로서 실제로 그렇게 행동하고 그렇게 살았던 것이 과연 옳았는가 정말로 맞는가라고 하는 질문을 또다시 던지고 있는 셈이죠. 그러니까 자신의 기억 낱낱으로 다시 들어가서 그 기억들의 세부 속에서 과연 나의 진실은 무엇이었는가, 정말 나는 진실했는가 그 문제를 계속해서 복기하고 그 기억들 낱낱과 싸우고 있다는 점에서 놀랍다 이렇게 얘기할 수 있을 거 같아요.기혁 채상우 시인의 이 건전지가 아무리 리튬이온전지라고 해도 계속 쓰다 보면 버려야 하잖아요? 더 이상 충전해도 안 되고. 그러면 이제 어떻게 할 건지 궁금한데요.장석원 그때는 기계를 새로 하나 사든가 하겠죠. (웃음)3483 49349이 계절의 시와 시집이찬 그럼 이제 이 계절의 시와 시집을 선정하도록 하겠습니다. 지금까지 두 차례에 걸쳐 오랜 시간 동안 이야기를 진행했는데요, 마무리하는 겸 이 계절의 시와 시집을 추천하시고, 추천 이유를 간략히 말한 뒤, 이 계절의 시와 이 계절의시집을 선정하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이 계절의 시에 대해 저부터 이야기하자면 저는 두 편을 고르고 싶은데요, 백무산 시인의 「시간 광장」과 이태선 시인의「팽창」을 꼽고 싶습니다. 「시인 광장」은 개인적 감각의 미시사를 통해서 사회정치적역사성을 재구성해 주고 있다는 점에서 그리고 최근의 정치시가 새롭게 나아갈 수있는 활로를 열어 주고 있다는 점에서 추천을 하고 싶어요. 「팽창」은 현대 세계의 안온한 일상성에 대한 비판을 추상적이고 선험적인 이념의 테두리에서가 아니라, 오히려 어떤 주술적이고 야생적인 에너지를 통해 드러냈다는 점에서 새롭고 독특한 이미지와 미학적 구조를 보여 주는 데 성공했다고 평가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또한 이런 에너지가 이미지와 이미지, 행과 행, 연과 연 사이의 공간들이나 작품의 모든 부분들에서 매우 밀도 높게 묘사되고 있다고 요약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이런 이유에서「팽창」 역시 이 계절의 시로 추천하고자 합니다.장석원 이 계절의 시로 저는 이태선 시인의 「팽창」을 선택하겠습니다. 아주 주관적인 기호가 작동한 것이니까 다른 분들께서는 전혀 신경 쓰지 않으셔도 좋아요.「팽창」은 시가 감정을 어떻게 숨기고, 어떻게 배치하고, 어떻게 이미지로 번역해야 하는가에 대한 적절한 답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이제까지 이 시인을 잘 모르고 있었다는 사실이 시 읽기의 부박함과 시 읽기의 게으름을 동시에 책망하네요. 저는 이태선 시인의 시를 읽으면서 시인이 지켜야 할 기율 하나를 지켜본 듯합니다. 시가 시인에게 너그러워지는 순간, 시인이 병들고 만다는 사실을 확인합니다. 시와 시인은 서로에게 적이 되어야 한다는 점을 이태선 시인이 구축한 이미지의 성채에 거주하는 강인한 견인력을 통해 되돌아봅니다. ‘나’의 유일한 적은‘나’이겠지요. 이태선 시인의 시를 추천하는 이유입니다.기혁 전 평가를 유보한 젊은 시인들의 시가 있기 때문에 제 추천의 의미는 크진 않을것 같습니다. 이 계절에서만 뽑는다면 김이듬 시인과 이태선 시인의 작품 중에 골라야 할 것 같은데요, 우선 김이듬 시인은 제가 추천했고, 추천한 작품이 시인의 대표성보다 변화의 조짐을 보여 주고 있어서 양보하는 것으로 하겠습니다. 따라서 불가능한 의미의 ‘팽창’을 시인의 패기로 이끌고 나가는 데 성공한 이태선 시인에게 한 표를 드릴게요. 얼핏 단순해 보이지만 전체적인 구성에서 상당한 공력이 느껴졌고 대상을 장악하는 힘도 돋보였어요. 의미의 겹쳐짐이란 것이 애매모호함이나 말장난으로 그치는 경우도 많지만 이태선 시인의 작품에서는 정말 치열한 대결 의식 같은 것이 느껴졌습니다. 특히 잘 알려지지 않은 시인이라는 점에서, 이번 좌담에 더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구요.이영주 이 계절의 시로 두 편 정도를 생각해 봤는데, 안현미 시인의 「상수리나무」 와이태선 시인의 「팽창」입니다. 삶과 죽음의 문제를 각각 자신만의 강점으로 색다르게보여 주고 있어서 많이 고민했습니다. 그 깊이나 천착하는 시선의 진지함은 두 편 다빛납니다. 저는 이 두 편 가운데 이태선 시인의 「팽창」을 골라 보았는데요, 저도 기혁 시인처럼 무엇보다 지면에서 자주 볼 수 없었던 시인이라는 점, 숨겨진 보석 같다는 점에 응원을 보내 드리고 싶습니다. 팽팽한 긴장감을 끝까지 힘을 놓지 않고 끌고간다는 점에서 대단한 열정과 내공이 느껴졌어요.이찬 그럼 이 계절의 시로는 이태선 시인의 「팽창」 을 뽑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이계절의 시집을 선정해야겠는데, 저부터 말씀드리죠. 저는 채상우 시인의 『리튬』을추천하겠습니다. 황병승 시인과 박상수 시인의 시집 역시 충분히 이번 계절의 시집으로 선정될 만한 좋은 시집이라는 생각이 들긴 하지만, 좌담 내내 말씀드렸던 것처럼, 채상우 시인이 이 시집에서 시도하고 있는 기억의 복기술을 통한 자기 진실 찾기라는 그 무서운 모험에 좀 더 점수를 주고 싶습니다. 다른 것을 떠나서, 채상우 시인이 품고 있는 저 끈질긴 진실 찾기의 충실성이 저를 울렸기 때문입니다. 다른 시집들도 그랬지만, 채상우 시인의 시집이 훨씬 더 그랬다는 말로 추천의 말을 대신할까 합니다.장석원 이 계절의 시집으로 저는 한 권을 선택하지 않겠습니다. 복수 추천이에요. 박상수 시인의 시집과 채상우 시인의 시집. 두 시집 모두 놓기가 아깝기 때문이에요.3 503 51351한 권을 선택하는 순간 다른 한 권을 버려야 하는데, 한 권을 버릴 수가 없습니다. 한권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한 권도 배제할 수 없다는 의미로 이해해 주세요.박상수 시인의 시집이 쟁취한, 새로운 시적 주체들의 이야기가 획득한 빛나는 국면은 한 시집의 유기적 통일성이 완성의 국면에 오른 경우라고 할 수 있겠는데, 근래 과연 이런 시집이, 이런 노력이, 이런 무모함과 도전 의식이 있었던가요? 저는 박상수시인 식의 리얼리즘이 성공했다고 판단합니다. 채상우 시인의 시집에서는 죽음 너머의 사랑을 확인했습니다. 생의 이면에 자리 잡은 죽음마저도 사랑하지 않으면 살 수없다는 도저한 절망과 희망이 검은 노래에 실려 전율할 만한 비가 (悲歌)를 들려주고있습니다. 채상우 시인의 『리튬』을 놓을 수 없는 이유입니다.이영주 저는 박상수, 채상우 시인과 함께 오은 시인의 시집을 놓기가 아까웠습니다.오은 시인이 지금까지의 방식을 가지고 가면서도 항간의 평가에 일희일비하지 않고진지하고 넓은 세계로 성큼성큼 가고자 하는 의지와 태도가 응원을 받을 만하다고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오은 시인은 앞으로도 여전히, 많은 사랑을 받지 않을까 싶어요. 박상수 시인의 시집은 보기 드문 독특한 시집이라는 점에서, 채상우 시인은 산문시의 어떤 영역을 개진했다는 점에서 많은 응원을 보내고 싶습니다. 박상수 시인의시집이 현실을 다른 방식으로 드러내는 화자의 새로운 캐릭터를 제대로 구현했다는것은 놀라운 점이죠. 채상우 시인의 시집은 강력한 회고의 감수성을 리드미컬하게현재화하는 방식이 인상적이었습니다. 두 시집 다 모두 새로운 방향을 향해 한 발 한발 나아가고 있다는 점에서 좋은 에너지를 받았습니다. 무엇보다 아주 재미있고요.기혁 저 역시 황병승 시인과 채상우 시인, 또 박상수 시인까지 모두 추천하고 싶습니다. 다만 황병승 시인을 추천하기에는 제 주관적인 느낌에 의존하는 면이 크고, 실제로 ‘황병승’이라는 아이콘을 분석해 보고 싶은 욕심이 더 크게 작용하기 때문에 양보하는 것으로 하구요, 채상우 시인과 박상수 시인께 모두 한 표씩을 드렸으면 좋겠어요. 『리튬』과 『숙녀의 기분』 둘 다 모두 ‘나’를 말하기 위해 ‘나’를 제외한 것들을 희생시키지 않는다는 점이 가장 큰 추천 이유입니다. 각각 방식은 다르지만 반복과 재생을 통해서 시뮬라크르의 세계를 구축하고 그러한 모습들이 결국 가상이 아닌 철저한 현실의 모방임을 보여 주고 있어요. 이때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이 현실에 대한 회의인데, 그 회의가 현실을 절망으로 밀어내는 것이 아니라 질긴 생명력으로 다가왔거든요. 전 그것이 새로운 감각의 발견이기도 하지만, 또한 시의 본래의 모습에 한없이 수렴하는 경우가 아닌가 생각합니다.이찬 황병승, 오은, 박상수, 채상우 시인의 시집이 이 계절의 시집으로 추천되었는데요, 박상수 시인의 『숙녀의 기분』과 채상우 시인의 『리튬』에 대한 추천이 조금 더많은 듯합니다. 물론 황병승 시인과 오은 시인의 시집들 또한 이번 좌담에서 논의의대상이 된 다른 시집들과 함께 이 계절에 꼭 주목해야 할 시집들임에는 분명합니다.이를 전제로 격려와 비판적 관심의 차원에서 박상수 시인과 채상우 시인의 시집을 이계절의 시집으로 선정할까 하는데, 별다른 이견이 없으면 어떻게, 그렇게 하도록 하겠습니다. 오랜 시간 동안 좌담에 참석해 주셔서 대단히 고맙습니다.장석원 2002년 『대한매일』을 통해 시 등단. 시집으로 『아나키스트』 『태양의 연대기』 『역진화의 시작』 등이 있음.이영주 2000년 『문학동네』를 통해 시 등단. 시집으로 『108번째 사내』 『언니에게』, 시인들의 공동 희곡 선집 『위대한 유산』이 있음. 기 혁 2010년 『시인세계』를 통해 시, 2013년 『세계일보』를 통해 문학평론 등단.이 찬 2007년 『서울신문』을 통해 문학평론 등단. 저서로 『현대 한국문학의 지도와 성좌들』 『20세기 후반 한국 현대시론의 계보』 『김동리 문학의 반근대주의』 『헤르메스의 문장들』 등이 있음. 김달진문학상 젊은평론가상 수상.3523 5335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