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장웹진(8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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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시 마음
마음 김은경 키 작은 내가 가끔은 키 큰 수숫대의 마음을 알 것 같기도 한 것처럼 어느 날엔 애 둘 낳고 서른에 집 떠난 큰삼촌의 마음을 알 것 같기도 하다 엄마가 우리 몰래 무언가를 숨겨 놓던 다락에도 장롱처럼 깊고 캄캄한 곳에도 그것은 있다가 없고 없다가 있었다 조약돌만 할까 그것은? 솜사탕처럼 바스라지기 쉬운 걸까? 불같다는 소문이 돌았고 누구는 귀신같다며 가만히 입술에 손가락을 댔다 기실은 물뱀의 무늬처럼 여린 배신자의 마음 추분이 오기 전 벼락같이 떨어져 내리는 능소화의 마음 기어이 물을 건너가는 사공의 마음 사탕 봉지를 열면 달콤한 사탕 냄새 곧 죽어도 괜찮을 것 같던 사랑스런 냄새 어떤 사람은 그 냄새를 찾는 데 일생을 바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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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_콤마 > 소설 애도의 마음
애도의 마음 김민혜 책 속의 글자들이 흔들리며 하나하나 떨어질 것처럼 보였다. 중간중간 빠져 있고 두 개 세 개씩 겹쳐 보이기도 했다. 희수는 인공눈물 약을 넣고 한동안 눈을 감았다가 떴다. 스탠드의 불빛이 바르르 떨며 깜박거리자 흐릿한 눈동자로 한 번 바라볼 뿐, 고개를 돌렸다. 그녀는 자주 눈을 감거나 손으로 눈을 문질렀다. 때로는 안구를 이리저리 움직이며 휘돌렸다. 근래 시력이 나빠진 건 조도가 낮은 거실에서 책을 보거나 논문을 썼기 때문일 것이다. 병원에 가야 한다고 마음먹지만 생각뿐이었다. 음음한 창밖으로 자동차가 지나갈 때마다 하얀 섬광이 끼어들어 눈이 부셨다. 책에 책갈피를 끼운 채 덮어 협탁에 올렸다. 스탠드 줄을 당겨 불을 끄고 몸을 일으켰다. 희수는 그의 방에 들어갔다. 그의 소품들이 놓인 방은 기괴한 적요가 깔린 가운데 묘한 광채가 한 줄기 흘러나왔다. 오래전부터 그 자리에 바닥과 밀착되어 굳어 있는 설치물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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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소설 가벼운 마음
가벼운 마음 김연희 아내는 알람이 울리자 끄고 밖으로 나갔다. 자는 척하고 있던 그는 몸을 일으켜 침대에 비스듬히 기댔다. 닫힌 문을 통해 아내가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다. 아내는 욕실에서 샤워를 하고, 드레스 룸에 가서 옷을 갈아입고, 주방으로 이동했다. 창가에서 잠을 자던 재용과 용진이 깨어났다. 녀석들은 말티푸 형제였다. 말티푸는 말티즈와 푸들의 혼합 견종으로 말티즈의 귀여운 외모와 푸들의 곱슬곱슬한 털이 섞여서 인기가 많았다. 그는 2년 전에 전문 브리더에게 비싼 값을 치르고 재용과 용진을 분양받았다. 개들은 창가의 쿠션에서 침대로 뛰어 올라왔다. 그가 목덜미를 어루만지자 개들이 꼬리를 홱홱 흔들었다. 아내는 재용과 용진이 지서를 닮았다고 했다. 지서는 아내의 약국에서 일하는 아르바이트생이었다. 그녀는 대학에서 국문과를 전공하는 4학년 학생이었다. 그도 국문과를 나와서 지서를 후배로 여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