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장웹진(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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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_콤마 > 수필 「속 썩은 매화(梅花)」외 1편
속 썩은 매화(梅花) 김희재 앙상한 가지 끝에 팥알만 한 붉은 구슬이 조롱조롱 달렸다. 작은 꽃망울이다. 죽은 지 오래되어 보이는 마른 나무에 꽃눈이 틔었다. 제목을 ‘속 썩은 매화’라고 붙인 분재 화분이었다. 한국어는 물론 영어와 중국어, 일본어, 러시아로도 화분을 설명해 놓았다. 이런 내용이었다. ‘수령이 100년 정도 된 매화나무입니다. 가까이 가서 보면 몇 그루의 나무를 합쳐 심은 것 같은 착각을 하게 되는데 그것은 합쳐 심은 것이 아니고 본디 한 그루의 나무 가운데가 썩어서 속이 넓어진 것입니다. 나무는 목질부인 가운데가 약하고 표피부가 강합니다. 그래서 오래된 나무 가운데가 썩어서 공동화 현상을 일으키게 됩니다. 세월이 지날수록 약한 부분은 썩어 들어가게 마련이라 생긴 결과입니다. 분재한 나무도 속이 썩어야 넓어지는 것처럼 사람도 마음이 썩어야 넓어지게 됩니다.’ 속이 썩었다는 표현에 문득 어떤 사람이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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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시 내게 슬픔이 있다면
내게 슬픔이 있다면 이대흠 묵은 매화 껍질 뚫고 자라난 여린 가지 한숨처럼 눈뜨는 꽃눈 같은 것이라고 신선이 춤추는 형국이라는 그 마을 살보다 붉은 언덕 너머로 옷고름처럼 풀어진 하얀 길 위로 내 어린 신부가 똬리에 물동이 이고 이마 훔치며 넘어올 때 아지랑이 매화 향 와락 번지는 어지러움 같은 것이라고 소녀는 가까워지며 몸이 자라고 제 눈앞의 길만 보고 있을 때 돌담 모퉁이에 박힌 못난 돌멩이처럼 나는 붙박인 자리에서 제 안이 까맣게 굳어지는 줄도 모르고 물 한 모금 기다리는 목마름 같은 것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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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기획 저물녘에 이르러 꽃은 왜 환하게 피어 있는가
시집에는 「첫 매화」, 「못난 꽃」 등 꽃이 등장하는 시편이 모두 14편 수록되어 있다. 꽃이 빈번하게 등장하는 까닭은 몇 편의 시를 통해 파악할 수 있다. 「꽃밭」에 따르면, 시인이 “처음으로 세상을 바라보았을 때/ 거기 어머니와 꽃밭이” 있었으며, 시인이 고향을 떠난 뒤에도 그 꽃들은 그를 떠나지 않았다. 시인이 꽃밭을 거의 생득적인 수준에서 끌어안은 셈이니 꽃의 빈번한 등장은 당연한 귀결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위에서 꽃은 마치 거울처럼 성찰의 매개로 활용되는 양상이다. “이른 봄에 핀/ 한 송이 꽃은/ 하나의 물음표다// 당신도 이렇게/ 피어 있느냐고/ 묻는”(「한 송이 꽃」). 그래서인가, 시인이 피워낸 꽃은 향기도, 빛깔도 쉬이 사라지는 법 없다. “꽃은 젖어도 향기는 젖지 않는다/ 꽃은 젖어도 빛깔은 지워지지 않는다”(「라일락꽃」 3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