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장웹진(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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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시 오늘의 백야
오늘의 백야 문혜연 밀려오는 너의 등, 가끔 그곳에서 길을 잃는 나. 우리의 입술은 열리지 않고, 초침소리만 들려온다. 가만히 초침을 따라 혀를 차보면, 천천히 깊어지는 입안. 내 이름을 부르면 네가 대답하던 밤들도 있었지. 솜털들이 쭈뼛거리는 맨 어깨가 끝없이 멀어질 때, 너와 나 사이에 시차가 생겨나. 너의 아침이 나의 밤이 될 때, 나는 홀로 백야 속으로 걸어 들어갔지. 그 후로 우리는, 같은 시간을 거닌 적이 없어. 우리의 걸음마다, 끊임없이 멀어지고 가까워지는, 미묘한 시간의 그늘들. 각각의 밤은 포개진 입술 아래로 가라앉고, 너의 밤에서 생겨난 그림자가 가까스로 잠이 들 때, 백야가 나를 찾아와. 너의 여름을 건너온 백야는, 나의 겨울에서 얼어붙어. 입을 맞출 때마다 생겨나는, 너와 나의 들쑥날쑥한 시간. 너의 들숨과 나의 날숨 사이를 횡단하는 순록들이 고요한 울음을 울 때면, 네 이름이 내 입안에서 끝없이 울려 퍼지고, 나는 너에게 말하고 싶어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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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시 백야(白夜)의 해를 꺼낼 수 없듯
백야(白夜)의 해를 꺼낼 수 없듯 강신애 북극곰이 찾아오면 어떡하나 북극곰이 문을 두드리면 무얼 주나 사냥도 모르는 어린 것에게 배고픈 북극곰이 먹은 북극곰이 네 어미라고 어떻게 말하나 유빙 너머 설원 흩뿌려진 핏자국이 어미가 너를 부른 마지막 흔적이라고 어떻게 말하나 슬금슬금 제 집처럼 찾아오는 나를 어미로 착각하고 싶은 곰에게 순록의 앞 다리쯤 던져 주고 싶은 어수룩을 얼음 수평선 같은 야생의 계율을 어떻게 하나 홀쭉한 눈에 어른어른한 동토의 허기와 상실을 어떻게 뿌리치나 자기(磁氣)의 휘파람 오로라처럼 길들일 수 없는 악몽처럼 어찌할 수 없는 야수, 백야의 부드러운 해를 꺼낼 수 없듯 슬픔 속 뿌연 야생을 꺼낼 수 없어 나는 긴 작대기로 땅을 두드려 곰을 돌려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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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시 흑야
풍경에 넋을 잃고 그대는 무슨 생각에 잠기는가 왜 생각의 끝에서만 이 세계는 피어오르는가 그대는 무슨 말인가를 끊임없이 했다 왜 심장의 풍경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가 그대는 계속해서 무슨 말인가를 했다 왜 심장의 혹독한 사막은 표현되지 않는가 그대는 끊임없이 무슨 말인가를 했다 그대의 말을 듣는 나는 왜 끊임없이 본질적인 세계를 생각하는가, 본질적인 고독은 왜 그대로부터 와서 나를 통해 자라나는가 표현은 왜 욕망인가 나는 그대와 더불어 왜 끊임없이 삶을 욕망하는가 대낮의 밤은 어디로부터 오는가 (소리나지 않는 음악의 고독으로부터, 그러니까 세계는 처음엔 소리나지 않는 음악이었겠지) 누가 지금 이 고요한 세계의 고독에 관여하는가 누가 지금 이 고독한 세계의 음악을 연주하는가 밤은 어둡다 세상의 밤은, 밤이어서 모두 어두울 테지만 그러나 가령 그 밤의 바깥에서 밤보다 더 어두운 대낮이 오기도 한다 가령 지금 내 全身으로 쏟아져오는 함박눈의 시간들 눈앞엔 백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