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장웹진(4)
-
문장웹진 > 문장웹진 > 모색 [숨겨진 보물 같은 책이야기]그런데 당신, 그거 당신 맞나요?
메를로 퐁티는 알고 있는 바 실존주의 현상학자입니다. 그는 “우리는 결코 무(無) 속에 머물러 있지 않다. 우리는 항상 충만 속에, 존재 속에 있다. 마치 얼굴이 쉬고 있을 때나 심지어 사망해 있을 때도 늘 무엇인가를 표현하지 않을 수 없게끔 되어 있는 것처럼.”이라는 말과 함께 외부 대상이 우리에게 의식되는 데 필수적으로 개입하게 되는 ‘몸’을 강조합니다. 몸이 없다면 우리는 세상을 감각하고 인지할 수 없을 것입니다. 즉, 우리가 느끼고 체험한 세상은 몸이 있기에 가능한 것입니다. 또한 몸은 우리를 세상에게 인식시키는 형체입니다. 퐁티의 말처럼 몸은 우리가 의도하지 않아도 늘 우리의 존재를 세상에 표현하고 있습니다. 나와 세상 사이에는 반드시 몸이 존재할 수밖에 없다는 말은 몸이 그만큼 살아있는 자들에게 중요하다는 말일 것입니다. 아베 고보, 『타인의 얼굴』은 『모래의 여자』, 『불타버린 지도』와 함께 아베 고보의 ‘실종 3부작’ 중 하나입니다.
-
문장웹진 > 문장웹진 > 모색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를 통해서 본 ‘권태’의 의미
그래서 카뮈나 사르트르 같은 실존주의 작가들이 부조리(l'absurdite)를 말할 때는 보통 ‘세계와 그 안에서의 삶이 가진 이해할 수 없음’을 뜻하지요. 이들의 작품들, 예컨대 사르트르의 『존재와 무』와『구토』, 카뮈의 『이방인』이나 『페스트』등은 바로 이것을 철학적 또는 문학적으로 설명하며 이해시키려 합니다. 그런데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는 이와 다르지요. 매우 특이한 이 작품은 부조리를 설명하거나 이해시키려고 하는 대신 부조리 그 자체를 있는 그대로 보여주려 합니다. 그럼으로써 관객들 스스로가 부조리와 맞부딪혀 그 자체를 느끼게끔 하는 형식과 내용을 갖고 있다는 말이지요. 그래서 이 연극을 예컨대 카뮈의 『칼리큘라』나 사르트르의 『출구 없음』(No Exit)처럼 ‘실존주의 연극’이라 하지 않고, ‘부조리연극’이라 부르는 겁니다. 그런데 ‘부조리 그 자체’를 보여주는 일이 어떻게 가능할까요? 베케트가 한 일은 - 제가 보기에는 - 적어도 두 가지입니다.
-
문장웹진 > 문장웹진 > 모색 사르트르의 『구토』를 통해서 본 ‘삶’의 의미
사르트르나 카뮈 - 흔히 말하는 실존주의 작가들이 - 파악하는 한, 우리의 삶은 무의미하기 때문에 ‘오히려’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이유인즉, 삶에는 아무런 고정된 의미가 없기 때문에 우리가 스스로 그 의미를 만들 수 있는 자유가 주어지기 때문이지요. 사르트르는 이 자유를 ‘저주받은 자유’라고도 불렀지만, 만일 우리의 삶에 어떤 정해진 의미가 있어서 단지 그것만을 쫓아서 살아야 한다면, 우리는 더 이상 자유롭지도 않고 또 자기 자신을 스스로 만들어 갈 수도 없을 것입니다. 오히려 그런 고정된 의미가 없기 때문에, 자기의 삶을 매순간 스스로 선택하여 자기 자신을 스스로 만들어 가며 살 수 있는 것이지요! 그래서 카뮈는 자신의 삶이 무의미하다는 것을 알아차리는 순간을 ‘위대한 의식의 순간’이라고 이름 붙였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