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장웹진(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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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_콤마 > 소설 박스
동족 포식이 일어난 13일째 상황을 무효로 하자며 실험 기록을 없애버리라고 말할 수도 있다. 다정에게 기간제 계약 연장을 조건으로 내세운다면···. 그녀는 그렇게까지 하긴 싫었다. 일개 조수인 그녀에게 사육실 관리를 부실하게 했다며 몰아세우고 이 모든 사태를 뒤집어씌울지도 모른다. 실험 도중에 죽어버린 마우스를 그녀에게 물어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망쳐버린 실험에 대한 보상금을 마련하느라 그녀는 다시 빈털터리가 될 것이었다. 만약 사장이 실험 사고를 책임지게 된다면 그가 받을 타격은 어느 정도일까. 기껏해야 해외여행 한두 번 못 나가는 수준일 것이다. 그런 일은 검소하다 못해 궁색한 자신의 처지에 비한다면 대수롭지도 않을 것이었다. S 쇼핑몰에서는 비공식적인 동물실험을 했으며, 실험이 끝나기도 전에 제품을 팔고 있다. 돈을 가진 의뢰인은 악인일 수 없는 세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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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시 먼지의 화학식
실험 중이오니 절대 따라하지 말 것 새로 개업한 동네 커피 집에 선물해야지. 커피 찌꺼기로 만든 블록이에요. 오늘은 의자를 만들어 봤죠. 화장실 변기도 만들 수 있어요. 커피 찌꺼기는 수지와 안 섞인다. 실험 중이오니, 해보시길. 함박눈이 내리던 밤이었다 함박눈은 눈의 알갱이가 녹았다 서로 뭉쳐진 것 그래서 함박눈은 따뜻하단다. 얘야. 사람도 그렇지. 한 번 녹았던 사람. 무서운 건 우리가 낱낱의 알갱이로 떨어져 서로의 입자들을 다 잃고 난 뒤겠지. 그리고 추운 세상이 올 거야. 넌 혼자가 될 거야. 네가 아닌 사물들이 널 들여다보겠지. 사물들의 뒤편엔 이웃들의 사유들이 먼지처럼 쌓일 거야. 먼지가 가장 중요한 세상이지. 커피 찌꺼기를 다시 얻으러 간다. 커피 가루는 순하다. 부드럽다. 혼자 있으려는 이 성질. 나도 벌써부터 혼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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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소설 굉장히 저항적인 돼지가 좋아(제3회_마지막회)
학생, 무슨 실험 하고 있었어요?” “…….” “무슨 실험 하고 있었냐고.” “모릅니다!” “몰라?” “어떻게 무슨 실험 하고 있었는지를 모른다는 거야?” “말해 줬는데도 무슨 말인지 모른다고요! 궁금하면 교수한테 직접 묻든가!” 국화가 나섰다. “아저씨, 저, 집에 갈게요.” “아닙니다, 안 돼요. 아직 처리할 게 남았어요.” “됐다구요! 나, 그냥 집에 가겠다고요!” 국화가 소리를 질렀다. 녀석이나 국화나 할 줄 아는 건 샤우팅뿐이었다. 비밀공작원들도 아니고. 무슨 독극물 제작 현장에서 잡혀온 치들도 아니고. 뭐 이런가. “학생이 그냥 가면 저 학생 처벌을 못 해요. 괜찮아요?” “상관없어요.” “그래도 피해를 입었잖아. 처벌도 하고 보상도 받아야지.” “보상요? 뭘로요?” “…….” 경찰관이 당황하는 사이 국화가 나가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