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장웹진(2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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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소설 장풍의 역사
장풍의 역사 노희준 아마도 그것은 위기에 몰린 입시학원장의 책상 위에서 탄생하지 않았을까. 단기간에 자신의 노하우를 학생들에게 모두 전수하는 건 미친 짓이었지만 일단은 빚부터 갚고 보자는 심산이었겠지. 그런데 예상 밖의 빅 히트를 친 거다. 사실 효과를 본 건 극소수였으나, 너도 나도 그 몇 명이 될 수 있다는 희망을 품고 몰려들었을 거야. 민들레 씨처럼, 아니면 민들레 씨인 척하는 버들개지 솜꽃가루처럼, 녀석은 치맛바람을 타고 엄마들의 ‘나와바리’ 곳곳에 씨를 퍼뜨렸으리라. 뿐이랴. 바깥양반들의 밤 문화를 휩쓸고, 아이들의 일상으로 되돌아와 온갖 형태의 변종으로 번성하는, 때는 바야흐로 속성(速成)의 전성시대였다. 속성파마, 속성다이어트, 속성만남, 속성 게임 아이템, 드라마 속성 폐인 되기 등등. 어디에 가나 ‘속성’이라는 단어가 붙은 간판은 쉽게 눈에 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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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소설 약의 역사
약의 역사 오현종 나는 공항 출국장에서 비행기가 뜨길 기다릴 때마다 약을 샀다. 비타민제, 프로폴리스, 오메가3, 홍삼 같은 것들을. 무료해서이기도 했고 필요에 의해서이기도 했으며, 어쩌면 여행 마지막 날의 피로를 풀어 줄 거란 기대에서 시작된 습관일지도 몰랐다. 색조 화장을 즐기지 않기 때문에 다른 여자들처럼 화장품 코너에서 환율을 따져 보고 있을 필요는 없었다. 약의 종류가 다양하고 저렴한 홍콩 첵랍콕 공항을 경유할 때는 비타민제는 물론이고, 파스며 연고며 백화유까지 비닐 백 가득 담아 가지고 탑승을 했다. 나는 기내용 캐리어 지퍼를 열고 약병을 챙겨 넣을 때 느끼는 안도감 같은 것을 좋아했다. 당분이 높은 초콜릿 박스를 집어들 때 느낄 죄책감보다는 분명 나았다. * 내가 태어나 가장 처음 먹은 약이 무엇이었는지는 기억나지 않았다. 다만 두 살 무렵 자라를 끓여먹었다는 건 들어서 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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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시 독주의 역사
독주의 역사 권현형 숫자로는 다 말할 수 없는 그때 선조 물고기 아란 다스피스도 우울증을 앓고 있었을 것이다 지느러미가 없고 척추가 있었으므로 등뼈를 타고 검은 피가 아래로 흘러내려 갔을 것이다 지느러미 대신 옆구리에 손가락이 붙어 있던 사억년 전의 아칸 소스테스에게로 삼억 육천만년 전 바다에서 육지로 처음 걸어 나온 (날아오르거나 헤엄쳐 나오지 않고) 저벅저벅 걸어나온 헤데롬푸스에게로 그리고 진화를 거듭했건만 여전히 날개가 없는 현 인류에게로 내게로 우울증이 척추를 타고 흘러왔을 것이다 우울증엔 독주가 최고다 취해 있는 동안(살아 있는 동안이 아니라) 섹스를 하지 않고도 등뼈를 뜨겁게 하는 저 우울한 방편, 독주가 사억 오천만년 전의 아란 다스피스에게도 사무치게 필요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