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장웹진(4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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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시 종이
종이 이기성 밤이 오는 동안 무엇을 만들었습니까? 어둠의 형상으로 녹아내리는 촛농처럼 밤의 검은 입술을 빌려서 당신은 창백한 의지를 만들고 가벼운 신념을 만들었어요 헐렁한 고무신처럼 그걸 신고 여기저기 돌아다녔습니다 철벅철벅 웅덩이의 물을 튕기며 노래를 불렀습니다 그 노래는…… 기억나지 않는군요 웅덩이의 물이 말라붙고 다시 밤이 오는 동안 당신은 무엇을 만듭니까? 오래된 질문이 촛농처럼 뚝뚝 녹아내리고 다시 밤이 오는 동안 검은 밤의 입술을 모아서 봄비가 내리는 동안 옛 애인이 늙어 가는 동안 그것은 희게 굳은 얼굴로 꺼지지 않는 촛불처럼 당신을 바라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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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_콤마 > 아동청소년문학 종이 왕
[아르코문학창작기금 - 동화(단편)] 정란희 종이 왕 “야, 종이 왕이다!” 누군가 소리쳤다. 학교에서 나오는데 횡단보도 주변에 아이들이 웅성웅성 모여 있었다. “미친 할아버지 또 왔나 봐.” 사랑이가 재미난 걸 놓칠 수 없다는 듯 잽싸게 뛰었다. 나도 뒤를 따랐다. 아이들이 몰린 곳에는 낯익은 할아버지가 종이 상자로 만든 칼과 방패를 들고 엉거주춤 서 있었다. 폐지 할아버지였다. 폐지 할아버지가 어디에 사는지는 아무도 몰랐다. 폐지 할아버지는 손수레를 끌고 다니며 상가나 빌라 골목에 놓인 종이 상자를 수거했다. 그런데 할아버지는 종이 상자를 오려서 만든 게 분명한 누런 종이 왕관을 쓰고 다녔다. 우리에게 그건 무척이나 웃기고 신기한 모습이었다. 누가 처음 그렇게 불렀는지는 모르지만, 우리는 그 할아버지를 놀리듯이 종이 왕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물러나라, 괴물아!” 폐지 할아버지는 앞을 노려보며 고함을 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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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소설 종이 무덤
방문을 열자 종이 뭉치 속에서 잠들어 있던 해피가 꼬리를 흔들며 나왔다. 해피는 첫날부터 종이 뭉치를 제 집으로 생각하고 그 안에서 잠을 잤다. 해피는 남자가 주인이나 되는 것처럼 정신없이 짖어대며 무릎으로 뛰어올랐다. 머리가 나쁜 건지 성격이 좋은 건지, 해피는 진짜 주인을 벌써 잊어버린 것 같았다. 남자는 조금만 더 기다려 보기로 했다. 주인의 마음을 좀 더 애태우면 나중에 ‘사례금’이란 단어가 추가된 전단지가 새로 붙게 될 것이다. “과연 니 주인은 너의 존재가치를 얼마로 칠까?” 해피는 그런 거에는 관심 없다는 듯 방 안 가득 쌓여 있는 종이 뭉치를 입으로 물어다 남자 손에 쥐어줬다. 던져 달라는 뜻이었다. 남자가 종이를 벽으로 던지자 해피는 공중으로 가볍게 몸을 날려 그것이 바닥으로 떨어지기 전에 잽싸게 낚아챘다. 놀라운 재주에 남자가 입을 벌리고 박수를 쳤다. 해피는 다시 남자의 손바닥 위에 동그란 종이를 올려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