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장웹진(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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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_콤마 > 수필 텅 빈 항아리의 시간
한 달간 머물 수 있게 된 지방 소도시의 집필실. 한 번도 가보지 않은 낯선 곳이었고 아는 사람이 단 한 사람도 없었다. 내가 이제껏 써왔던 글들은 나를 현실적으로 살게 해주지 못했는데 작가라는 명칭 하나는 나를 한 달 먹여주고 재워주는구나, 그렇게 생각하니 정말 우스웠다. 휑하리만큼 넓은 공간에 우직해 보이는 나무책상 하나만 놓인 방이었다. 커다란 창문으로 창밖의 녹음이 고스란히 눈으로 들어왔다. 사람의 손길이 미치지 않은 자연 그대로의 모습이었다. 키 큰 나무들이 우거져있는 울창한 숲, 짙거나 엷은 초록의 이름 모를 작은 나무들과 덤불 숲, 잡풀이 제멋대로 뻗어있는 야생 그대로의 작은 들판이 창과 맞닿아 있었다. 그리고, 모든 것이 고요했다. 바리바리 싸들고 온 책과 원고뭉치들을 방바닥에 내려놓았다. 이제껏 짊어지고 살아왔던 모든 인생의 짐을 다 내려놓는 느낌이었다. 이곳에서 내가 지켜야 할 규칙은 세 번의 식사 시간, 단 하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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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기획 [박경리 선생님을 추억하며] 뒷모습과 그늘의 추억
그곳의 이틀이면 뭐든 해낼 것 같아 내게는 벅찼던 숙박료를 지불해 가며(그때는 집필실 지원이 시작되기 전이었다), 오래 팽개쳐 둔 소설을 들고 그곳으로 갔다. 본관 3층 구석방에 나는 홀로 있었다. 산속의 밤은 어둠이 짙었고, 다른 방에는 아무도 없었지만 선생이 옆집에 계신다는 생각만으로 두렵지 않았다. 나는 그때 문학과 멀어진 채 물건 파는 일을 하고 있었다. 이미 3년째, 내 혼은 갈증으로 바싹 말라 부스러질 것만 같았다. 그랬기에 그 밤은 해녀가 참았던 숨을 내뱉고 깊은 숨을 들이켜듯 간절한 밤이었다. 나는 그 귀한 밤이 아까워 자리에 눕지도 않고 소설을 썼다. 그러다 깜빡 잠이 들었던가. 새벽이었다. 정 쪼는 소리에 잠이 깨어 창밖을 보니 아직 채 밝지 않은 세상 속에 선생이 쪼그리고 앉아 무언가를 쪼고 계셨다. 그러더니 선생은 일어나 밭에 물을 주셨다. 고양이 한 마리가 그 곁을 맴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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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모색 [제14회] 펜
이럴 때 저는 집필실 근처에 있는 대형서점을 찾곤 합니다. 물론 책을 읽거나 사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제 글도 쓰기 힘든데 말끔하게 정리된 남의 글을 보는 것은 너무나 힘든 일일 테니까요. 제가 발걸음을 옮기는 곳은 대형서점 한쪽에 마련된 문구점입니다. 문구점에 들어서자마자 저는 만년필을 이것저것 만져봅니다. 과거에는 파카나 몽블랑이 만년필의 이름이라고 생각했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만큼 파카나 몽블랑은 과거 세대에게는 만년필 그 자체를 의미했던 브랜드였지요. 최근 문구점을 방문한 분은 격세지감을 느끼게 될 겁니다. 파카나 몽블랑 이외에도 너무나 다양한 브랜드의 만년필들이 우리를 유혹하고 있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한 가지 달라지지 않은 것이 있습니다. 만년필은 여전히 입학과 졸업을 축하하는 자리에 단골손님으로 등장한다는 겁니다. 하긴 저도 졸업식이나 입학식 때 주변의 친지들로부터 만년필을 선물로 받은 적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