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대한민국 태극기이 누리집은 대한민국 공식 전자정부 누리집입니다.

공식 누리집 주소 확인하기

go.kr 주소를 사용하는 누리집은 대한민국 정부기관이 관리하는 누리집입니다.
이 밖에 or.kr 또는 .kr등 다른 도메인 주소를 사용하고 있다면 아래 URL에서 도메인 주소를 확인해 보세요.
운영중인 공식 누리집보기

상속

  • 작성일 2024-03-01
  • 조회수 1,669

상속 


김유담


   너는 길 건너편에서 신호가 바뀌길 기다리며 서 있었다. 그냥 건너오라는 손짓을 해도 너는 꼿꼿이 서서 녹색불이 켜지기를 기다렸다. 유령이 저렇게까지 교통법규를 철저하게 지킬 필요는 없지 않나, 나는 조금 우습다는 생각이 들었다. 길 건너편에서 우르르 횡단보도를 건너오는 사람들 중에서도 너는 단연 눈에 띄었다. 나를 향해 걸어오는 네 모습이 마치 런웨이를 걷는 모델 같았다. 나는 미니스커트에 가죽 코트를 걸쳐 입고 부츠를 신은 네 모습을 보고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법정에 가는 옷차림치고는 좀 요란하다 싶기도 했다. 오늘 같은 날은 최대한 후줄근하게 입는 게 낫지 않나, 혼자 생각에 잠겼다가 너는 옷차림을 신경 쓸 필요가 없다는 걸 아차차 하고 깨닫는다. 

   “안 늦었지? 강남은 올 때마다 복잡하고, 사람이 많아서 긴장돼.”

   원래 키가 큰 편인 데다 굽 높은 부츠까지 신은 네가 나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나는 너를 잠깐 올려다보았다가 이내 사거리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눈을 마주치는 게 어색했다. 

   “밥, 어디서 먹을까? 먹고 싶은 거 있어?”

   반갑다는 인사 대신 내가 꺼낸 말이었다. 

   “이 근처에 오면 꼭 가고 싶었던 맛집 있어. 거기 가보자. 서초동에 해운대암소갈비 분점이 있더라고. 해운대에서 먹었던 갈비를 여기서 먹을 수 있다니, 설렌다. 고기 괜찮지?”

   내 대답도 듣기 전에 너는 앞장서 성큼성큼 걸었다. “괜찮아?”라고 묻지 않고, “괜찮지?”라고 묻는 것은 네 아버지의 질문 방식이었다. 정확히는 “괜찮제?”였다고, 기억한다. 

   “갈비는 좀 헤비하지 않나? 간단한 걸로 먹어. 사실 나 점심 생각도 없어.”

   너를 좇아가며 네 뒤통수에 대고 내가 말했다.

   “중요한 날이잖아, 든든하게 먹고 들어가자.”

   너는 뒤돌아선 채로 나를 향해 손짓했다. 재판까지는 두 시간 정도 남아 있었다. 미리 만나 밥을 같이 먹자고 한 건 너였다. 너는 먹고 싶은 거 있으면 돈 주고 사 먹을 수 있지만 난 그럴 수가 없단 말이야. 떼를 쓰듯 말하는 너를 어쩔 수 없이 따라나섰다. 

   아버지들끼리 절친한 친구 사이라 너와 나는 어려서부터 자주 만났다. 서로의 집을 격의 없이 오갔고, 계절마다 같이 나들이를 다녔다. 매년 봄 진해에 가서 벚꽃을 봤고, 여름이면 남해로 휴가를 다녀왔으며, 가을마다 가야산 단풍 구경을 빼먹지 않았다. 겨울에는 무주에 가서 스키도 탔다. 계절이 바뀔 때마다 그 계절을 가장 만끽할 수 있는 명소를 찾고, 제철 음식을 먹어야 한다는 것은 너의 아버지 지론이었다. 네 아버지는 좋은 것을 누려 왔고, 즐길 줄 아는 사람이었다. 너희에게는 그런 여유가 있었다.

   학창 시절, 내 아버지는 학교에서 손꼽히게 가난한 축이었고, 네 아버지는 그 학교에서 가장 부유하기로 소문난 학생이었다. 너의 조부는 부산 지역에서 이름난 유지였고, 그래서인지 까까머리 중학생임에도 네 아버지는 어깨에 힘이 잔뜩 들어가 있었다고 한다. 주변 친구들이 눈치를 보고 비위를 맞춰 주는 게 익숙했는데, 내 아버지만 유독 그 앞에서 기죽지 않은 모습을 보여줘서 오히려 마음에 들었다고, 아나고회와 소주를 앞에 두고 목소리를 높이던 네 아버지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내가 동길이 니 눈에 든 기가, 니가 내 눈에 든 기지!” 아버지도 거기에 지지 않고 대거리를 했다. 두 가장이 잔뜩 취하는 통에 결국 우리 모두 집에 가지 못하고, 횟집 근처 여관에서 하룻밤 잤던 기억이 난다. 가족 동반 모임에서 자주 벌어지던 일이었다. 아버지는 동길 아저씨와 있을 때면 평소와는 다른 사람이 됐다. 크게 소리 내 웃었고, 말이 많아졌다.  

   너를 만나던 날을 손꼽아 기다렸던 때도 있었다. 해수욕장에서 모래놀이를 하고, 물놀이를 한 후 발가벗고 같이 목욕을 하며 깔깔거렸던 시절도 있었다. 어느 크리스마스이브에는 함께 스키장에 갔다가 머리맡에 양말을 두고 나란히 잠들기도 했다. 아침에 눈을 떴을 때 미미인형 선물 세트 두 개가 놓여 있는 걸 보고 산타가 다녀갔다며 동시에 폴짝폴짝 뛰어다녔던 장면이 유독 잊히지 않는 것은 그것이 유년 시절을 통틀어 내가 받아 본 가장 비싼 선물이었기 때문이다. 너희 가족은 늘 베푸는 쪽이었고, 우리는 받는 쪽이었다. 동갑이지만 나보다 훨씬 키가 컸던 너에게 옷도 물려받아 입었다. 너희 가족을 만날 때면 엄마는 꼭 네게 물려받은 옷을 입고 나가길 종용했다. 그게 내가 가진 것들 중 가장 좋은 옷이기도 했다. “니가 잘 입어 줘야 또 주지. 안 입고 내팽개친다 싶으면 서희 엄마가 또 주고 싶겠나?” 엄마는 네가 입던 옷을 얼룩 하나 남지 않게 깨끗하게 다시 세탁해 새 옷처럼 손질해 내게 입혔다. 이 비싼 옷을 손빨래도 하지 않고 세탁기를 돌려서 입힌 게 분명하다며, 서희 엄마가 옷을 얼마나 함부로 다루는지 험담을 늘어놓으면서 엄마는 외투에 붙은 보풀을 하나하나 손으로 떼내곤 했다. 

   아버지는 네 아버지와 어려서부터 잘 통했다고, 서로 비슷한 점이 많다고 말했다. 하지만 어린 내가 보기에도 두 사람은 많이 달라 보였다. 네 아버지는 해운대에 있는 호텔을 물려받아 경영하고 있었고, 내 아버지는 창구에서 고객들을 상대하는 은행원이었다. 머리가 크면서 나는 네가 점점 불편해졌다. 너와 내가 다른 인생을 살게 될 거라는 걸 아무도 말하지 않았지만 분명히 알 수 있었다. 기사가 운전해 주는 차를 타고 사립초등학교에 다녔던 너 역시 우리가 친구가 될 수 없다는 걸 일찌감치 알아챘을 것이다. 네가 가평에 있는 국제중에 진학하게 되고, 아버지의 발령으로 우리 가족이 부산을 떠나 인천으로 가게 되면서 너를 만날 일이 더는 없었다. 아이들을 동반한 가족 모임은 단출한 부부동반 모임이 됐다가 나중에는 친구인 아버지들끼리만 만나게 됐던 걸로 기억한다. 

  

   “몇 분이세요?”

   식당에 들어서자 종업원이 내게 물었다. 한 명이라고 대답한 다음 자리로 안내를 받았다. 생갈비 2인분과 공기밥 두 개를 시키자 종업원은 “누가 더 오시나요?” 하고 물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너는 히죽 웃으며 나를 따라 앉았다. 

   불판에 고기를 올려놓고 굽기 시작했다. 너는 맞은편에 앉아 고기를 바라보며 입맛을 다셨다. 

   “오 마이 갓, 냄새 진짜 죽인다!”

   “윤서희, 너 리액션 너무 과하고 시끄러워. 이걸 나만 듣고 있어야 한다니 나야말로 죽을 맛이다.”

   “야, 죽은 사람 앞에서 그런 말 쉽게 하는 거 아니야. 내 말투는 그냥 받아들여. 아메리칸 스타일이야.”

   “미국 좀 다녀왔다고 뻐기는 거니?”

   고기가 익으면서 고소한 냄새가 났다. 너는 고기를 한 점 입에 넣더니, 젓가락을 손에 든 채로 발을 동동 구르기까지 했다.  

   “선아야, 이거 먹고 양념갈비도 하나 시키자. 양념도 맛있단 말이야.”

   “야, 이거 한우라고, 엄청 비싸. 너 알잖아. 나 돈 없는 거.”

   “안 왔으면 모를까, 여기까지 와서 양념갈비도 안 시킨단 말이야?”

   “네가 먹고 싶다니까 왔지. 양념갈비까지는 과해”

   “그래도 시켜 줘.”

   너는 물러서지 않고 졸랐다. 이런 경우 나는 너에게 질 수밖에 없었다.

   “그래 그럼 1인분만이야. 나도 너희 아버지한테 많이 얻어먹었잖아, 입 짧은 나도 해운대암소갈비는 사주면 진짜 많이 먹었거든. 그땐 눈치 하나도 안 보고 먹었는데, 미안해. 그렇게 배 터지게는 못 먹여 줄 것 같아.”

   옛날 생각이 나는지 너는 말이 없어졌다. 공기밥이 나오자 나는 고봉밥 위에 숟가락을 수직으로 꽂아서 네 앞에 놓았다. 제사상에 놓던 모양대로였다. 너는 천천히 음미하듯 밥을 떠먹었다.   

   동그란 접시 위에 갖가지 쌈 채소가 담겨 나왔다. 너는 손바닥에 상추와 깻잎을 한 장씩 쌓은 다음 고기를 올려 야무지게 쌈을 싸 먹었다. 네가 아무리 먹어도 쌈 채소와 고기는 줄지 않는다. 너희 식구와 우리 식구가 같이 둘러앉아 고기를 구워 먹었던, 불판 위에 고기가 익기가 무섭게 사라졌던 과거의 식사 자리와는 사뭇 다른 모습이다. 뭐든지 잘 먹고 식성이 좋았던 어린 시절의 너를 기억한다. 서희는 저렇게 복스럽게 잘 먹어서 키가 큰 거라고, 너는 왜 깨작거리고만 있느냐는 꾸지람을 들었던 식사 모임 자리도 떠오른다. 

   “내가 낼게.”

   나는 너보다 먼저 일어나 밥값을 계산한다. 

   “잘 먹었어, 선아야. 근데, 여기 해운대 본점보다는 역시 못해. 다음부터는 여기 가지 말자. 이 돈이면 딴 거 먹는 게 낫겠어.”

   식당에서 나와 내 옆에서 나란히 걸으며 너는 말했다. 실컷 얻어먹고 괜한 꼬투리를 잡는 건 내 아버지의 화법이었다. 미안하고 겸연쩍은 마음에 그런 소리를 했다는 걸 알았지만, 사주는 입장에서는 생색이 나지 않는 소리였다.  

   아버지는 네 아버지에게 어려서부터 신세를 많이 졌다고 했다. 언제나 밥값을 선뜻 내주는 친구 덕에 굶고 다니지 않았다고, 그런 고마움을 잊을 수 없다고 말했다. 아버지는 그 신세를 갚으려다 자신의 신세를 망치고 말았다. 나로서는 고3을 목전에 두고 겪은 일이었다. 15년이나 지난 일이지만 지금도 그때 일이 생생하다. 네 아버지가 참여한 토지개발 사업이 잘 풀리지 않았고, 해운대 호텔이 경영상 어려움을 겪었다고 들었다. 부도 위기에 처하면서 아저씨는 여기저기 빚을 졌다. 마지막에는 동창들에게도 손을 벌렸다. 아버지는 자신이 다니던 은행에 대출을 알선하고, 친구를 위해 보증을 섰다. 그렇게 하면 급한 불을 끌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이미 망할 대로 망한 호텔을 살리기는 불가능했다. 빚을 막기 위해 또 빚을 지고, 빚은 눈덩이처럼 불어나다가 호텔은 결국 부도가 나버렸다. 아버지가 직장을 잃고 온 집 안에 빨간 딱지가 붙던 날을 기억한다. 지금 이게 무슨 일이냐고, 어서 동길 씨를 찾아가 보라고 울부짖던 엄마의 목소리도 떠오른다. 동길이는 지금 더 난리라고, 감옥에 잡혀가게 생겼다며 아버지는 그 상황에서도 네 아버지를 걱정했다. 


   석 달 전, 늦은 밤 갑자기 네가 찾아와 깜짝 놀랐다. 전화를 걸어도 받지 않기에 시간 될 때 연락 달라고, 만나서 할 이야기가 있다는 메시지를 남기긴 했지만 별안간 내 집 문을 두드릴 줄은 몰랐다. 

   “선아야, 문 좀 열어 줘. 내가 전화를 받을 상황이 안 돼서 직접 왔어.” 

   인터폰 화면으로는 네가 보이지 않았는데 문밖에서 문을 두드리는 소리는 확연하게 들렸다. 오래된 다세대 원룸이라 화질이 구린 탓이라고 생각하며 문을 열었다. 초등학교 고학년 즈음에 마지막으로 보고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었는데 너를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키가 훌쩍 큰 너는 네 아버지와 똑 닮은 얼굴이었다.

   “여길 어떻게 알고 찾아왔어?”

   “전화를 하도 여러 통 하기에 급한 일인가 싶어서 왔어.”

   “급하다기보다는 당황스러워서. 너도 소장 받았을 거 아니야, 상속 포기를 했는데도 우리한테 소송을 걸 수가 있는 거니? 그거 관련해서 너랑 이야기 좀 하고 싶었을 뿐이야.” 

   “나도 거기까진 잘 모르겠어. 근데 미안하지만 나 목이 너무 마른데 물 한 잔만 줄 수 있겠니?”

   그리 춥지도 않은데 너는 몸을 많이 떨고 있었다. 나는 너에게 생수를 한 잔 따라주고, 뜨거운 물을 끓여 차도 한 잔 내주었다. 

   “고마워,”

   너는 차를 후후 불어 마시며 말했다. 자세히 보니 입술도 시퍼렜다. 나는 너를 의아한 눈길로 바라보며 물었다.

   “근데 서희야, 너 괜찮니? 어디 아픈 거 아냐? 좀 이상해 보여.”

   “아니야, 괜찮아. 너는 어때? 별일 없는 거지?”

   “별일이야 늘 있지. 이렇게 상속 채무 갚으라는 소장도 받고. 너한테 이런 얘기 하는 거 불편할 수 있다는 거 아는데, 사실 너희 아버지 때문에 여기까지 온 거잖아.”

   “그래, 나도 알아. 늦은 밤 찾아와서 미안해. 언제 한번 보고 싶었는데, 이렇게 보게 됐네. 아빠 통해 네 소식 종종 전해 듣긴 했는데······.”

   네가 풀죽은 소리로 말하자 할 말이 없어졌다. 나는 티백을 뜨거운 물에 한 번 더 우린 찻물을 내 컵에 따랐다. 너와 마주 앉아 차를 마시면서 창백한 너의 얼굴을 천천히 바라보았다. 너는 계속 오들오들 떨고 있었다. 나도 아버지를 통해 네 소식을 들은 적이 있다. 미국 고등학교로 진학해 대학 입시를 준비하던 너 역시 집안의 사업이 망하면서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고, 어렵사리 미국 대학에 입학은 했지만 제대로 졸업은 하지 못하고 한국에 돌아와야 했다는 이야기도 알고 있었다. 나중에 인서울 대학에 편입도 하고, 졸업 후 외국계 회사에 취직했다는 네 소식을 듣고 그래도 나보다는 나은 인생을 살고 있다는 생각에 씁쓸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너는 나에 대해 어떤 소식을 들었느냐고, 열여덟 살 이후의 내 삶에 대해 제대로 알고는 있는지 묻고 싶었다. 집안이 풍비박산이 나고 가족들이 뿔뿔이 흩어진 후로 내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한 번쯤은 구구절절하게 읊어 주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너의 탓이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이런 이야기를 들어 줄 사람은 너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서로의 소식을 전해 주던 우리의 아버지들은 세상을 떠났고, 우리는 같은 사건 번호의 피고인으로 재판에 출석하라는 소장을 받은 상황이었다. 고(故) 손종식, 윤동길의 상속인 앞으로 청구된 채무 이행 청구 소송이었다. 

   그날 밤 이후로 너는 내 앞에 불쑥불쑥 나타났다. 밤낮 가리지 않고, 다른 사람들이 있을 때도 개의치 않았다. 나에게만 네가 보이고, 네 목소리가 들린다는 사실을 깨닫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이상하게도 네가 유령이 되어 내 곁을 맴돌고 있다는 사실이 그리 무섭지는 않았다. 이미 세상에는 유령보다 더 끔찍한 것이 많다는 걸 경험한 후였다.   

 

   재작년 세상을 떠난 뒤로 아버지는 유령의 모습으로도 내 앞에 나타난 적이 없었다. 이제 편안한 곳에서 쉬고 있으려나, 나는 꿈에서조차 보이지 않는 아버지가 때로는 궁금했다. 폐섬유종을 앓고 있던 아버지의 사인은 코로나 합병증이었다. 아버지가 사경을 헤맬 때 네 아버지도 말기 암 투병 중이었다는 사실을 나는 미처 알지 못했다. 두 사람은 가장 친한 친구였으므로, 나는 네 아버지 연락처로 부고를 전하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동길 아저씨는 연락이 없었고, 대신 낯선 번호로 메시지를 하나 받았다. 


   저는 윤동길 씨의 딸 윤서희입니다. 아버지가 위독하셔서 연락을 드리기 어렵습니다. 제가 대신 답장을 드립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그때 나는 메시지를 보고, 네 번호를 저장해 두었다. 왠지 그러고 싶었다. 아버지들끼리 친구라고 내가 너를 친구로 생각했던 건 아니었다. 그래도 언젠가는 만날 일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어렴풋이 했다. 이런 식으로 만나게 될 줄은 몰랐지만.  

   아버지와 네 아버지는 끝까지 사이가 틀어지지 않았다. 눈물겨운 우정이라고 생각하면서도, 그 대단한 우정 때문에 내가 피눈물을 흘려야 했다는 생각을 지우기 어려웠다. 아내도, 형제들도 모두 등 돌린 아버지 곁에는 자신을 망하게 한 옛 친구 하나 남아 있었다. 나는 친구를 사귀고 사람을 곁에 두는 건 사치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되어버렸다.  

   5년 전쯤 네 아버지와 우연히 마주친 적이 있다. 아주 오랜만에 아버지를 보러 간 집에서 네 아버지를 만났다. 여전히 둘은 가장 친한 친구 사이이고, 가끔 만나기도 한다는 걸 알고는 있었지만 막상 아저씨를 직접 마주치니 표정 관리가 쉽게 되지 않았다. 

   “어, 왔나. 서울에 일이 있어 가지고, 다니러 왔다가 느그 아부지도 한번 보러 안 왔나.”

   아저씨는 묻지도 않은 말을 늘어놓으며 내 눈치를 봤다. 굳은 표정으로 멀뚱히 서 있는 내게 아버지가 소리쳤다. 

   “뭐 하노, 인사 안 하고! 어른을 봤으믄 인사를 해야 될 거 아이가.” 

   나는 일그러진 얼굴로 꾸벅 고개를 숙였다. 그날 어쩌다 보니 셋이서 밥까지 먹게 됐다. 아버지가 주로 가는 6천 원짜리 순대국밥 집에서 국밥과 소주를 시켰다. 네 아버지는 소주만 몇 잔 들이켜고 밥술은 뜨는 둥 마는 둥 했다. 나는 네 아버지가 입고 온 고급 아웃도어 브랜드의 점퍼를 계속 힐끗거렸다. 언제나 최고급으로 빼입고, 미식가로 유명하던 네 아버지는 세월이 지나도 크게 변하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여전히 좋은 옷을 입고 음식을 가리는 네 아버지가 아니꼽게 느껴졌다. 

   신수가 훤해 보인다고, 우리는 지금 이 모양으로 사는데 아저씨는 잘만 사는 것 같다고, 나는 네 아버지가 자리를 비운 사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아버지 들으라는 소리였다. 아버지는 버럭 화를 냈다. 

   “좋아 보이기는 뭐가 좋아 보이노. 서희가 외국계 회사 다니가 돈을 잘 번다 카대. 딸이 사준 옷 입고, 딸이 대주는 생활비로 사는데 그기 뭐 좋은 팔자겠노.”

   동길 아저씨를 안쓰러워하는 아버지의 모습에 기가 막혔다. 나의 무능력을 탓하는 말처럼 들리기도 했다. 채무 때문에 자신의 이름으로 제대로 된 경제 활동을 하기 어려웠던 아버지는 일용직으로 혼자 벌어 먹고살았다. 가난한 대학원생인 나는 아버지에게 좋은 옷을 사줄 수도, 생활비를 대주기도 어려웠다. 

   끝까지 이럴 거냐고, 너는 왜 이렇게 철이 없냐고, 이런 형편에 왜 공부를 하느냐고, 고모가 늦은 밤 내게 전화를 걸어와 다그친 적이 있다. 고모는 이따금 내게 전화를 걸어와 밑도 끝도 없이 화를 냈고, 그럴 때면 나는 그 말에 대꾸하지 않고 고모가 퍼붓는 말을 고스란히 들었다. 고모 역시 아버지에게 적지 않은 돈을 떼였고, 오랫동안 어려움을 겪었다는 걸 알고 있었다. 고모는 오빠에 대한 원망과 울분에 차 있었다. 그러다가도 오빠가 안쓰럽다고 흐느꼈고, 나중에는 자신의 신세를 한탄했고, 마지막에는 꼭 조카와 올케를 비난하는 것으로 통화가 마무리됐다. 

   내게도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어 비난하고 울분을 토해 내고 싶은 날이 있었다. 너에게도 그런 밤이 있었느냐고 물어 보고 싶었다. 너도 그러지 않았느냐고, 우편함에 차곡차곡 쌓여 가는 독촉장과 경고장들이 마음에 켜켜이 울분으로 쌓이진 않았느냐고, 나는 많이 억울했다고, 주로 아버지를 원망했고, 종종 네 아버지를 저주했으며, 때로는 너를 미워했던 날도 있었다고, 그런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나는 결국 끝까지 버텨내지도 못했다. 고모의 마음을 이해하면서도 더는 시달릴 여력이 없어서 나중에는 고모의 전화번호를 차단했다. 아버지가 건강이 악화되면서 일을 할 수 없는 상황이 되자 공부도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공부를 그만뒀다고 경제적으로 썩 나아지는 것도 아니었다. 급하게 들어간 박봉의 회사에 다니며 받은 월급으로 병든 아버지와 나, 둘의 생활이 겨우 해결되는 수준에 불과했다. 그렇게라도 생활을 이어 나가야 했다. 

   “고모가 한 번씩 전화해서 나 괴롭히거든요. 공부를 왜 하느냐고, 어서 일해서 자기 돈 아버지 대신 갚으라고. 내가 대학원 때려치우고 일하면 떼돈이라도 벌 줄 아나. 아버지 어떻게 생각해요? 결국 고모 뜻대로 됐네요.”

   “고모가 한 말 담아 둘 거 없다. 그런 거 신경 쓰지 말고 니 공부하고 니 인생 살면 된다.”

   갈수록 나빠지는 아버지를 내버려둘 수 없어서 서울에 있는 자취방을 정리하고 아버지가 사는 부평 집으로 들어왔을 때 아버지는 미안하다는 말 대신 태평한 소리만 했다. 정말 그래도 되는 건가. 아버지의 빚과 상관없이 나는 내 인생을 살 수 있는 건가.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마자 나는 최대한 빠르게 한정승인 절차를 밟아 그가 남긴 빚이 내게 상속되지 않도록 막았다. 아버지 사망일로부터 3개월 이내에 법원에서 판결문을 받아야 했기에 마음이 급했다. 아버지의 부채를 털어냈음에도 내게는 적지 않은 빚이 남았다. 학위를 끝내지 못했지만 학자금 대출이 남아 있었고, 아버지의 병원비와 생활비를 충당하느라 진 빚은 고스란히 내 몫이 됐다. 

  

   너는 나보다 상황이 나을 거라고 생각했다. 나보다 좋은 교육을 받았고, 꽤 괜찮은 회사에 다녔으니까. 그런 생각을 하면 괜히 부아가 치밀기도 했다. 내가 겪는 생활고가 너와는 무관한 문제라는 걸 알면서도 네가 어딘가에서 잘 먹고, 잘살고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하면 억울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그런 마음이 혹시나 이상한 방식으로 가닿은 것은 아닐까, 그렇다고 해서 네가 불행하길 빈 건 아니었는데. 내 주변을 떠도는 너를 볼 때면 괜한 죄책감마저 들었다. 

   진동벨이 울리자 너는 내게 어서 일어서라는 눈짓을 보냈다. 나는 카운터로 가서 커피 두 잔을 받아왔다. 따뜻한 커피를 네 앞에 놓고, 아이스커피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법원 앞 카페에 앉은 사람들은 하나같이 표정이 심각했다. 서류봉투를 들고 왔다 갔다 하는 사람들, 테이블 위에 서류를 놓고 진지한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들 사이에서 커피를 마시다가, 나도 가방에서 서류 봉투를 꺼냈다. 미리 제출한 답변서를 다시 한 번 살폈다. 변호사를 선임할 비용도 부담되는 형편이라 직접 내가 품을 들여서 쓴 답변서였다. 고인의 유족은 고인이 남긴 재산 범위 안에서만 채무를 변제하면 된다는 한정승인 판결을 받았으며, 아버지에게 상속받은 재산은 아무것도 없었다는 것을 상세하게 기술한 서면이었다. 답변서를 제출하면 재판에 나오지 않아도 된다는 걸 알면서도 혹시나 서류가 판사에게 제대로 전달되지 않았을까봐 걱정이 됐다.

   “그만 봐. 계속 보면 기분만 우울해져.”

   너는 서류를 집어넣으라며 손짓을 했다.

   “마음이 계속 불안하네. 제대로 소명을 안 하면 법원에서 상속인에게 채무를 갚아야 한다고 판결할 수도 있대.”

   “그런 일 없을 거야. 너는 내가 아니잖아.”

   나를 안심시키려는 그 말이 가슴에 아프게 박혔다. 

   빚을 갚지 않으면 빚진 자의 경제활동은 중단되지만, 그 빚의 생명력은 퇴색되지 않는다는 걸 나는 아버지를 보고 알았다. 아무리 세월이 지나도 빚은 사라지지 않은 채 채무자가 주소를 옮길 때도 따라다녔다. 채무자가 사라지면 상속인에게, 그 상속인이 사라지면 그 다음 상속인을 계속 찾아다니며 빚을 떠안기려 들었다. 나에게 소송을 건 원고는 P자산관리회사였다. 아버지가 그들에게 돈을 빌린 건 아니었지만, P사는 채권을 양수했다. 15년 전 아버지에게 돈을 빌려준 제1금융권의 은행은 일찌감치 그 채권을 다른 대부업체에 팔아넘겼다. 아버지의 채무는 15년간 여기저기 흘러 다녔다. 연체이자가 붙으면서 불어날 대로 불어난 빚은 나중에는 부실 채권이 되어 떠돌다가 채권추심업체로 넘어갔다. 죽은 사람의 육신이 떠나도 그가 남긴 빚은 여전히 가족들 주변을 계속 떠돌고 있다는 사실이 나는 소름 끼치도록 두려웠다. 유령보다 유령처럼 나를 따라다니는 빚이 더 공포스러웠다.

   “무섭지 않니, 이승을 떠나도 빚은 그대로 남는다는 게.”

   내가 너에게 물었다.

   “재산도 마찬가지잖아. 누군가는 빚을 물려받고, 누군가는 재산을 물려받는다는 게 불공평한 거지만.”

   너는 천천히 커피를 홀짝이며 대답했다. 나는 줄지 않는 네 커피를 바라보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네 입에서 불공평이라는 말을 들으니까 이상해.”

   “내가 왜?”

   “너야말로 불공평한 혜택은 받을 대로 받고 자란 금수저였잖아.”

   나는 너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며 말했다. 너는 가만히 생각에 잠기더니 헛웃음을 지었다.

   “그랬었나, 전생의 일 같아서 기억이 안 나.”

   “너희 아버지 호텔 잘못되지만 않았더라도 넌 빚 대신 호텔을 물려받았겠지.”

   “그랬으려나, 그럼 지금쯤 법원 앞 카페가 아니라 바다가 보이는 호텔 라운지에서 커피를 마시고 있었을지도. 해운대 땅값도 많이 올랐을 테고 말이야. 그랬다면 지금과는 뭔가 달랐을지도······.”

   너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나는 괜한 말을 꺼냈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개를 숙인 채 빨대로 컵을 휘저었다. 얼음이 부딪치는 소리가 났다. 


   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건 지난해 봄이었다. 동갑내기 친구였던 두 남자는 같은 해에 각각 딸을 낳았고, 한 해 차이로 세상을 떠났다. 

   나는 두 사람이 저 세상에서라도 편하게 만났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내비쳤다. 그들이 간 곳이 어디인지도 잘 모르면서 그런 마음이 들었다.  

   “아버지 돌아가시고 핸드폰 해지하기 전에 통화 내역을 한번 뽑아봤거든. 제일 연락 많이 주고받은 사람이 동길 아저씨더라.”

   “응, 종식 아저씨 돌아가셨다는 연락 받았을 때 그때 우리 아빠도 많이 안 좋으셨거든. 그래도 말씀을 드려야 할 것 같아서 내가 얘기했는데, 아빠가 병상에 누운 채로 많이 우시더라고.”

   “나 없는 자리에서 어땠을지는 모르지만, 아버지는 단 한 번도 아저씨 원망하거나 탓한 적이 없었어. 난 솔직히 모르겠어. 대체 그게 어떤 우정인지. 그런 친구를 못 사귀어 봐서 그런지 가늠조차 되지 않아.”

   “너는? 넌 어땠어? 우리 아빠 탓 많이 했지?”

   “응. 내 입장에서는 너무 많은 걸 잃어야 했으니까.” 

   나는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너는 이해한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럴 만하지. 그래도 이제 돌아가셨으니 우리 아빠 너무 미워하지는 마. 있잖아, 선아야. 내가 대신 사과하면 받아 줄래?”

   네가 간절한 목소리로 물었다. 나는 단호하게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

   “왜? 야, 유령이 되어서까지 사과하는 게 쉬운 줄 아냐. 어지간하면 사과 받아 줘.”

   “그럴 수 없어. 네 잘못이 아니니까.”

   다시 침묵이 흘렀다. 미안한 마음까지 상속받을 필요는 없는 거라고, 네가 이렇게 된 것도 네 잘못이 아니라는 말을 해주고 싶었다. 

   너는 네 아버지의 상속을 제때 포기하지 못했다. 재산을 포기하듯 빚 상속도 포기하는 절차가 있다는 걸 제대로 알지 못했다고 했다. 뒤늦게라도 상속 포기를 하려고 했을 때, 네 아버지의 통장에서 인출한 돈으로 병원비를 결제했다는 게 문제가 됐다.

   “말기 암으로 마지막까지 병원에서 지냈으니까 아빠 병원비가 좀 됐어. 아빠 이름으로 된 통장이 하나 있었거든. 기초생활수급자 지원금 받던 계좌였어. 아빠 돌아가시고 퇴원 처리 하면서 본인 병원비니까 그거 인출해서 병원비에 보태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했지. 그 통장에 있는 돈은 정말 소액이라서 별 도움도 안 됐단 말이야. 근데 그게 상속에 대한 단순승인으로 받아들여졌어. 그러니까 아빠의 재산을 사후에 내가 처분했으면 그의 모든 재산을 상속하겠다는 사인으로 받아들이는 거래. 아빠의 빚까지도 모두 내가 고스란히 상속을 받게 되는 거더라고. 여기저기에서 소송이 들어오고 회사로까지 압류 경고장이 날아오니까 더는 회사를 다니기가 어려웠어. 알다시피 우리 아빠가 지고 있던 채무 규모가 훨씬 크잖아. 아빠가 살아계실 땐 그래도 내가 아빠를 책임져야 한다는 마음으로 버텨 왔던 거 같아. 돈을 벌기 시작한 후로 부양에 시달리느라 바빴는데 남은 인생은 변상이래. 정말 그거까지는 좀 자신이 없더라. 그냥 내가 사라지면 되는 게 깔끔한 게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었어.”

   “아니, 네가 사라지더라도 그 빚은 사라지지 않아. 그리고······ 어쩌면 그렇게까지 두려워할 일은 아니었을지도 몰라.” 

   다른 방법이 있었을 거라고, 그러니까 같이 찾아봤어야 한다는 말을 하려다가 나는 입을 다물었다. 그런 말을 하기엔 이미 너무 늦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신 손이라도 잡아 주려고 다가갔지만, 내 손은 네게 닿지 않고 매번 미끄러졌다. 


   재판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법원 정문으로 들어가 별관 쪽을 향해 걸었다. 아버지에게 어떤 자산도 물려받지 못했으며, 그가 남긴 것은 자산을 초과하는 채무일 뿐이라고, 적법한 절차를 거쳐 상속 포기를 했으니 더는 괴롭히지 말아 달라는 말을 전할 참이었다. 아버지에게 빚만큼이나 물려받기 싫었던 것은 무기력한 마음이었다. 하지만 그것을 떨쳐버리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고, 운이 따라 주어야 겨우 가능한 일인지도 몰랐다. 불운한 것 외에는 아무런 죄가 없었던 너는 무해한 얼굴로 나와 나란히 걷고 있었다. 나는 이제 너와 그만 붙어 다니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굳이 안 따라가도 돼. 너는 너대로 떠나도 돼.”  

   나는 너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너는 조금 머뭇거리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서희야, 여기까지 같이 와줘서 고마워. 하지만 나는 니가 이제 좀 편안해졌으면 좋겠어.”

   나는 진심을 담아 너에게 말했다. 

   “그래, 우리 모두 그럴 수 있기를. 재판 꼭 이겨.”

   너는 주먹을 쥐고 파이팅하는 포즈를 취했다. 이기고 지는 싸움은 아니었지만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슬며시 웃었다. 

   너는 정원 쪽으로 걸어가다가 어디론가 사라졌고, 나는 홀로 법원 건물로 들어섰다. 재판은 3층에서 열릴 예정이었다. 아버지처럼 살고 싶지 않은 마음이, 너처럼 되고 싶지 않은 마음이 먼저 떠난 이들의 삶을 훼손하는 건 아닐 거라고, 어떤 삶은 뭔가를 포기함으로써 이어지기도 한다는 생각을 떠올리면서 천천히 계단을 올랐다. 



   * 집필 과정에서 한국일보에서 제작한 빚 상속을 피하기 위한 상속 시뮬레이션 게임의 사례를 일부 참고했음을 밝힌다.

   https://interactive.hankookilbo.com/v/inheritance/

추천 콘텐츠

좋아하는 마음 없이

좋아하는 마음 없이 김지연 안지는 이른 결혼을 했는데 실패로 끝났다. 아니, 그걸 실패라고 할 수 있을까? 이혼을 한 건 사실이었지만 안지는 자신의 인생 여정에서 그때 이혼한 일을 실패라고 단정 지을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 뒤로 더 행복해졌다고 할 수는 없을지언정 조금 더 자기 자신에 가까운 삶을 살게 된 것은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혼이라는 단어를 떠올릴 때면 늘 그에 대해 변호하고 싶은 여러 말들이 떠오르곤 했기 때문에 처음부터 결혼 같은 건 하지 않는 편이 더 나았을 거라는 생각을 하곤 했다. 때문에 이혼했다는 사실은 안지의 비밀은 아니었지만 먼저 나서서 밝히지도 않았다. 어릴 때 안지는 무척 전형적인 사람이 되고 싶었다. 구체적으로 그런 표현을 떠올리지는 않았다. 그저 자신이 속해야 하는 집단에서 튀지 않는 사람, 아주 평균적인 사람이고 싶었고 그런 사람이기 위해서 부단히 노력을 했다. 찬반투표를 할 때면 눈치를 보다가 다수의 의견에 따라 슬그머니 손을 들었다. 친구가 좋아하는 가수를 따라서 좋아하고 친구의 것과 비슷한 브랜드의 신발을 사서 신었다. 친구들이 싫어하는 선생을 따라서 싫어했다. 사실 안지는 그 선생에게 남몰래 호감을 갖고 있었지만 친구들과 함께 떡볶이를 먹다가 술술 흘러나온 그 선생에 대한 욕을 듣고 재빨리 노선을 바꿔 함께 욕을 했다. 한동안 안지는 수학 시간마다 왜 애들은 저 선생을 싫어할까? 에 대한 답을 알고 싶어서 더 열심히 선생의 행동거지를 살폈다. 수학을 가르친다는 점만 빼면 딱히 나무랄 데 없는 사람이었다. 학생이 쉽게 답할 수 없는 내용을 골리듯 물어보지 않았고 무엇보다 학생들한테 사과를 할 줄 알았다. 뭔가 잘못 알고 섣불리 화를 냈을 때, 그러다 결국 진실을 알게 되었을 때, 다른 선생들은 그러게 헷갈릴 만한 짓을 왜 하고 다니느냐고 도리어 짜증을 부렸는데 그 선생은 재빨리 미안하다고 말했다. 미안하다. 내가 잘못 알았어. 미안해. 가끔 안지는 머릿속으로 그 목소리를 재생해 보곤 했다. 그 때문에 선생이 더 좋아졌지만 여전히 싫어하기 위해 애썼다. 누구나 다 그런 식으로 청소년기를 보내지 않나? 내가 아닌 사람이 되어 보려고 노력하면서? 안지는 대학에 갔고 연애를 했고 졸업을 했고 취직을 했다. 결혼도 했다. 아주 평균적인 삶이었다. 조금씩 빠르기도 했다. 조바심이 나 있었으므로. 자신도 남들처럼 지극히 평범하게 살 수 있다는 것을 빨리 증명해 보이고 싶었으므로. 어느 정도 성공적인 것 같기도 했다. 남편이 바람이 나기 전까지는 그랬다. 식도 올리기 전 임신을 해 낳은 아이가 막 돌을 지난 참이었다. 임신이 아니었으면 결혼까지는 이어지지 않았을지도 몰랐다. 남편은 계속 후회하는 것 같았다. 그때 낙태를 밀어붙이지 않은 것을, 시간을 끌다가 영영 타이밍을 놓쳐버리고 만 것을, 어떤 결단력을 가지지 못한 자신을 자책했을지도 모른다. 그때 뼈저리게 깨달은 바가 있었는지 새로운 여자가 생겼을 때는 안지가 알아차리기도 전에 이혼을 해달라고 요구했다. 겨우 육 개월을 만났을 뿐

  • 관리자
  • 2024-07-01
소금 샹들리에

소금 샹들리에 정한아 호주에 사는 김이 오랜만에 귀국해서 친구들이 다 같이 모이기로 했다. 4명이 만나는 건 대략 7년여 만이었다. 방을 잡고 밤새 보자고 해서 오기 직전까지 망설였는데, 남편이 등을 밀었다. 정민이와 자신에게도 내가 없는 날이 필요하다고 큰소리를 치더니 정말 밤새 전화 한 통 없었다. 친구들과는 대학 동기였다. 전공은 문예 창작이었는데, 나는 2학년까지 다니고 학교를 그만뒀다. 그렇지만 정작 작가가 된 사람은 나뿐이라고 친구들이 투덜거렸다. 나는 작가가 아니라고 아무리 말해도 소용없었다. 그들은 십 수 년 전 내가 낸 단 한 권의 책을 기억하는 몇 안 되는 사람들이었다. 세 명 모두 미혼이었고, 아이를 가지지 않았다. 놀라울 정도로 예전 그대로인 친구들 사이에서 나만 철 지난 옷차림에 좀처럼 대화에도 섞이지 못했지만, 그런 것 때문에 마음이 상하지는 않았다. 오랜만의 서울 나들이에 술자리도 즐거웠다. 좋은 친구들이었다. 7년 전 정민이 자폐 스펙트럼 장애 판정을 받았을 때 그들은 자신의 일처럼 울어 줬고, 이후에도 종종 아이의 간식과 선물을 집으로 보내 줬다. 서서히 연락을 거둔 것은 내 쪽이었다. 애써 관계를 유지하는 일이 힘에 부쳤을 뿐, 그들에게 섭섭한 마음은 조금도 없었다. 지난 몇 년 동안 나는 집이 아닌 곳에서 밤을 보낸 적이 없었다. 다들 술에 취해서 침대로 간 뒤에도 좀처럼 잠이 오지 않아 휴대폰만 들여다보았다. cctv 속 거실은 엉망이었다. 엎어진 식판, 사방에 흩어진 블록 조각, 길게 늘어진 옷가지들. 남편은 불도 끄지 않고 아이를 재우러 방에 들어간 모양이었다. 나는 정지화면 같은 그 풍경을 한참 바라보다가 해 뜰 무렵에야 겨우 잠이 들었다. 다음날 우리는 점심을 먹고 헤어지기로 했다. 맛집마다 대기가 길어 종로의 좁은 골목을 돌고 또 돌았다. 앞장서 구글 맵을 보며 걷던 김이 갑자기 작은 서점 앞에서 멈춰 서더니 책을 사야겠다고 말했다. 지난 이사 때 내 책을 분실했다는 것이었다. 나는 집에 돌아가서 책을 다시 보내 주겠다고 김을 달랬다. 다섯 평도 안 되어 보이는 그 작은 서점에 내 책이 있을 리는 만무했기 때문이다. 김은 막무가내로 서점에 들어갔다. 할 수 없이 그녀를 따라 들어갔다가 전면 책장에 전시된 내 책을 발견했다. 죽은 친구를 만났다고 해도 그처럼 놀라지는 않았을 것이다. “미애 씨!” 그곳에서 누군가 나를 불렀다. 우아한 노부인이었다. 린넨 바지에 화이트 셔츠, 큼지막한 호른 목걸이를 한 여자는 환하게 웃으면서 나를 바라봤다. “반장님?” 나는 말끝을 흐리며 물었다. 여자는 성큼성큼 내 앞에 다가와서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나를 와락 끌어안았다. 누군가 나를 그렇게 안은 것이 너무 오랜만이라 온몸에 힘이 풀리는 것 같았다. 그녀는 오래전 나와 함께 공부했던 문우였다. H 백화점 문화센터 소설 창작 교실의 반장. 친구들이 책을 구경하는 사이 나는 그녀와 짧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ldqu

  • 관리자
  • 2024-07-01
그동안의 정의

그동안의 정의 최예솔 작정하고 사라진 사람은 작정하고 찾아야만 한다. 나는 윤정수를 작정하고 찾지 않았다. 보통의 남매 사이라는 게 정확히 어떤 건지는 모르겠지만 윤정수와 나를 그냥 보통 남매, 라고 하기에는 좀 어렵지 않을까. 윤정수는 나보다 4년 먼저 태어났다. 그리 적지도, 그리 많지도 않은 애매한 나이 차이 덕분에 윤정수와 나는 딱히 친해지지 못했다. 내가 초등학교에 입학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윤정수는 중학교에 갔고, 내가 중학생이 되었을 때 윤정수는 고등학교에 갔다. 물론 윤정수와 내가 영 친해지지 못한 건 우리의 나이 차이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윤정수는 내게 없는 사람에 가까웠다. 말수도 없고 센스도 없고 자존심도 없고 공부머리도 없고 돈도 없고······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나? 아무튼 남매 사이에 정이라도 있었다면 걱정이라도 했을 텐데 그럴 이유조차 없었다. 쥐뿔도 없는 윤정수니까. 특이사항이라곤 개그맨 윤정수와 동명이인이라는 것 정도밖에 없는. 그러니 윤정수가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집을 나갔다고 해도 이상할 것 하나 없었지. 뭐 내가 찾는다고 윤정수가 나타났을 거라는 보장도 없지만 나는 막연히, 어련히 때 되면 나타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했다. 하지만 윤정수는 죽을 때까지 나타나지 않았다. 물론 내가 죽은 것은 아니다. 윤정수가 죽었다. 내 나이가 이제 서른이니까, 윤정수는 서른넷에 죽었다. 이제 내게 남은 혈육은 없다······ 아닌가? 고모. 그렇게 부르지 마. 왜요. 낯설어. 저도 고모가 낯설어요. 윤현수는 맹랑하다. 윤정수와 장현아의 딸이라고 해서 윤현수. 그거 좀 유치하지 않니? 물었을 때 윤현수는 뭐 어때요 엄마아빠말곤 모르는데, 하고 대답했다. 이제 나도 아는데? 하니까 이젠 고모도 모르는 척해 달라고 했다. 참 나 어디서 이런 게 굴러왔는지. 현수야. 네. 네 엄마 입국 날이 언제라고 했지? 다음 주 토요일이요. 아직 한참 남았네. 고모도 고모 할일을 해요. 시간 금방 갈걸요. 알겠다 그래. 윤현수를 데리고 온 사람은 장현아다. 이제는 나흘쯤 됐으려나. 아침부터 현관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하도 시끄러워서 나가 봤더니 장현아가 윤현수의 손을 붙잡고 서 있었다. 장현아는 다짜고짜 윤정수를 아느냐고 물었고 나는 오랜만에 듣는 윤정수의 이름에 잠깐 벙쪘다가 네, 저희 오빠네요, 하고 대답했다. 조카입니다. 그날 장현아의 대사를 나는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그건 도저히 내가 아는 사람이 뱉을 만한 말이 아니어서 대사라고밖에는 표현할 수 없겠다. 아직도 문득 의심스러울 때가 있다. 윤현수가 정말 나의 조카가 맞고 장현아가 정말 나의 새언니가 맞을까. 가족관계라는 게 그렇게 단순하게 정리되는 거라면 이제까지 윤정수와 나는, 또 윤정수와 나와 우리의 부모는, 왜 이렇게 흩어지거나 죽거나 혼자 남을

  • 관리자
  • 2024-07-01

댓글 남기기

로그인후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생각을 남겨 주세요!

댓글남기기 작성 가이드

  • 타인에게 불쾌감을 주는 욕설, 비방 등은 삼가주시기 바랍니다.
  • 주제와 관련 없거나 부적절한 홍보 내용은 삼가주시기 바랍니다.
  • 기타 운영 정책에 어긋나는 내용이 포함될 경우, 사전 고지 없이 노출 제한될 수 있습니다.
0 / 1500

댓글1건

  • 하얀머리

    아프네요...

    • 2024-05-18 15:59:01
    하얀머리
    0 / 1500
    • 0 / 15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