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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 작성일 2007-05-31
  • 조회수 2,669

 

오후



한수영




도로는 꽉 막혀 있다. 시내 진입을 코앞에 둔 병목구간이라지만 다른 날보다 더 복잡하다. 오후에만 배송해야 할 물건이 일곱 건이다. 이렇게 길 위에서 붙잡혀 버리면 정말 대책이 없다. 조금 전, 남자는 첫 번째 배송지에 늦어져서 죄송하다는 전화를 해 두었다. 연달아 다른 집에도 그런 전화를 해야 한다고 생각하자 머리가 지끈거리기 시작한다.

 


 

―아주 바퀴라고 달린 건 죄다 나와 있구만.

뿌연 앞 유리로 밖을 내다보며 남자가 중얼거린다. 도로 옆으로는 추수를 끝낸 논이 펼쳐져 있다. 빈 들 여기저기에 소먹이 용 볏짚을 포장해 놓은 흰색 비닐뭉치가 서 있다. 황갈색으로 이어진 들판에 드물게 초록색이 눈에 띄기도 한다. 대파밭이다. 챙이 넓은 모자를 쓴 여자들이 파밭에 엎드려 있다. 앞사람들이 파를 뽑고 지나가면 뒷사람들이 뽑힌 것을 주워들며 따라간다. 여자들이 앞으로 나아가면서 황토색이 조금씩 넓어져 간다. 여자들이 파를 뽑는 것이 아니라 초록색 물감을 지워나가는 것처럼 보인다. 그 동작만으로 들판 끝까지 갈 것처럼 여자들의 움직임은 굼뜨게 되풀이되고 있다.

남자는 조수석에 앉은 ‘61번’을 슬쩍 쳐다본다. 61번은 말없이 창밖만 내다보고 있다. 늘 쓰고 다니는 감청색 야구 모자 앞쪽에 숫자 61이 씌어 있어 배송팀에서는 이름 대신 61번이라고 부른다. 모자챙이 만들어낸 그늘 때문인지 오늘따라 61번 녀석 눈이 더 움푹해 보인다. 발육기 중 한 부분을 건너뛴 것처럼 팔다리가 눈에 띄게 가늘고 몸집도 작다. 왼쪽 뺨에서 관자놀이로 이어지는 부분에 옅은 화상자국이 있다. 부드러운 빗자루로 쓸어 올린 것처럼 귀 아랫부분 피부가 관자놀이 쪽으로 쓸려 올라가 있다. 불길이 슬쩍 핥고 지나간 자국이라고 했다. 웃을 때 그 부분이 조금 당기는 것만 빼고 아무렇지 않아 보이는데 녀석은 그 흉터에 신경을 쓴다. 그 부분을 쳐다보면 녀석 얼굴이 금세 붉어진다. 불길이 녀석의 말까지 훑어버렸는지 녀석은 워낙 말수가 적다. 함께 작업하다 보면 이런 저런 얘기가 오가는데 녀석은 묻는 말 외에는 입을 열지 않는다. 하긴 말이 많아도 골치 아프다. 지난번에 어떤 녀석은 너무 말이 많았다. 운전할 때나 작업할 때나 옆에서 쉬지 않고 앵앵거리는 통에 일을 할 수가 없었다.

차들은 여전히 움직일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이러면 오늘 배송은 한밤중에나 끝날 것이다. 오늘 안에 다 해결하지 못하고 다음 날로 넘겨야 할지도 모른다. 소비자들 반응은 눈에 안 봐도 훤하다. 남자는 홧김에 경적을 세게 울린다. 그래도 길은 꿈쩍 않는다. 61번이 남자를 쳐다본다. 남자와 눈이 마주치자 61번은 얼른 고개를 돌린다. 61번, 저 녀석도 이 바닥에서 오래 버틸 것 같지는 않다. 기술도 기술이지만 일단 체격조건이 좋아야 한다. 학교 기숙사나 대형 학원에 책장과 의자를 납품할 때는 키보다 큰 책장을 지고 계단을 올라가기도 해야 한다. 곤돌라나 엘리베이터만 기다리고 있다가는 제 때 일을 마치지 못한다. 녀석은 몇 장 안 되는 나무판 조각을 들고도 낑낑댔다. 그래도 오래 버텨주기만 하면 바랄 것이 없다. 요즈음에는 보조 구하기가 정말 힘들다. 조금만 힘들면 붙어 있지를 않는다. 침대 헤드 부분을 맞추다가 짜증난다며 그대로 가버린 녀석도 있었다. 이 녀석도 어느 날 말도 없이 그만둘지 모른다.

파밭은 그 사이 눈에 띄게 초록색이 지워졌다. 밭 귀퉁이에 쌓아둔 파단 더미가 점점 높아간다. 눈꺼풀이 무겁다. 여자들의 챙 넓은 모자가 비행접시처럼 둥둥 떠간다. 흰색 비닐에 싸인 볏짚 뭉치는 뽑아서 아무렇게나 던져놓은 치아처럼 보인다. 남자는 의자에 등을 붙인다.

  

주문한 책장은 오후 네 시에 오기로 했다. 아이가 학원에서 돌아오는 시간이다. 가구 대리점 직원이 배송 가능한 시간을 물었을 때 여자는 그 시각에 와 달라고 했다. 여자는 집에 혼자 있는 시간에 누군가의 방문을 받고 싶지 않다. 짧은 시간이라도 잘 알지 못하는 사람과 한 공간에 있어야 한다는 사실이 부담스럽다. 정수기 필터를 교체하러, 가스 검침을 위해 방문하겠다는 전화를 받으면 그 사람들이 다녀갈 때까지 마음 한 구석이 무겁다. 예고된 방문이어도 낯선 사람의 방문을 받으면 여자는 조금 예민해진다. 커피포트에서 뜨거운 물을 따르다 잔을 떨어뜨리기도 하고 과도에 손을 베기도 한다.

조금 전 배송이 늦어질 것 같다는 전화가 왔다. 전화를 걸어온 남자는 길이 막혀 차가 꼼짝을 못한다고 했다. 전화기 음질이 좋지 않았다. 남자의 목소리는 꽉 잠겨 있었다. 학원에서 돌아오자마자 아이는 밖에 나가겠다고 했다. 여자는 아이를 라면으로 붙잡아 두었다. 일부러 가스레인지 불 세기를 제일 낮은 것에 맞추고 물을 끓였다.

아이는 소리 내어 라면 면발을 빨고 있다. 국물이 매운지 자주 물을 마신다. 그릇에 대고 고개를 숙일 때마다 아이의 툭 불거진 목뼈가 드러난다. 여자는 손바닥으로 아이의 뒷목을 쓰다듬는다. 입이 짧은 아이는 제 또래보다 많이 작다. 아이는 다른 아이들의 세계에 관심이 없다. 한 번도 친구를 데려온 적이 없고 생일잔치에 초대받은 적도 없다. 늘 혼자다. 또래아이들은 자기들과 저만치 떨어져 있는 아이를 못 견뎌 한다. 아이의 담임은 아이의 몸에 난 멍 자국이나 가방 속에 가득 들어 있던 자갈에 대해서 알지 못했다. 담임과 얘기하다 여자는 아이들이 보는 앞에서 울어버린 적이 있다. 아이들이 모두 운동장에서 노는 시간에도 아이는 혼자 교실에 남아 있다. 언제부턴가 아이는 책을 뒤에서부터 읽어나간다. 몇 번 야단을 쳐보았지만 소용없다. 뒤에서부터 읽는 것이 더 재미있다고 한다. 

라면을 다 먹은 아이는 이제 됐지, 하는 표정으로 여자를 쳐다본다. 

좋아, 재미있는 얘기 세 가지만 해줘. 그럼 보내줄게.

이렇게라도 말을 걸지 않으면 아이는 한마디도 하지 않는다. 재미있는 얘기를 해줄 때마다 스티커를 준다. 스티커 50개를 모으면 아이에게 개미집 세트를 사 주기로 했다. 

개미는 죽을 때 꼭 오른쪽으로 쓰러진대.

아이는 과학 잡지에서 읽은 것 중 생각난 것을 얘기해준다.

왜?

아이는 대답 대신 여자를 멀뚱히 바라본다.

―……. 좋아, 스티커 하나.

사람 목소리만으로 커피를 끓일 수가 있대.

어떻게?

음파를 모아서

……으음, 둘.

동물들의 소리는 메아리를 만들지 못한대.

여자는 잠깐 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한다. 아이의 말이 메아리처럼 귓속에서 울린다. 여자는 자꾸 빠져나가려는 아이의 목덜미를 끌어안으며 말한다. 딱 하나만 더. 아이의 콧방울이 조금 벌어진다. 화가 났다는 표시다. 여자는 더 세게 아이를 안는다.

―오늘 체육시간에 달리기를 하다가 넘어졌어. 나는 내가 넘어질 거라는 것을 알고 있었어. 넘어지기 바로 전에 내 몸 속에서 끼익 소리가 났거든. 내가 꼭 바퀴가 된 것처럼…….

아이는 이제 더 할 얘기가 없다는 표정으로 여자를 바라본다. 뒤에서 누가 민 것 아니었니? 묻고 싶지만 여자는 묻지 않는다. 아이가 묻는다.

―이젠 나가도 돼?

  

61번은 차 유리문을 조금 내린다. 창문으로 들어오는 바람에 숨통이 트인다. 이렇게 꽉 막힌 길 위에서 남자와 함께 차 속에 들어앉아 있는 시간이 제일 어색하다.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할 것 같은데 아무 말도 떠오르지 않는다. 61번은 남자가 많이 어렵다. 빈틈없이 일을 처리하는 남자 앞에서 실수하게 될까봐 늘 긴장하게 된다.

남자는 의자에 기댄 채 잠들어 있다. 61번은 잠든 남자의 모습을 찬찬히 바라본다. 남자의 손과 얼굴에는 흉터가 많다. 드릴이나 드라이버에서 얻은 상처다. 나사를 박다 그것이 튀어 올라 실명할 뻔한 적도 있다고 한다. 남자의 하루는 나무판에 피스를 끼우고 조이는 일로 시작해서 침대 머리와 몸체를 연결하고 책상을 조립하는 일로 끝난다. 나무판과 매트리스, 나사못, 너트로 분리되어 있던 것들이 시공팀 팀장인 남자의 손을 거치면 금세 침대, 책장, 책상으로 변한다. 그의 손을 거쳐 간 책장만도 수 백 개는 될 것이다. 

저 앞쪽에서부터 차가 슬슬 움직이기 시작한다. 61번은 남자를 깨울까 하다 그만둔다. 조금 더 자게 해도 될 것 같다. 남자가 숨을 내쉴 때마다 마늘냄새가 난다. 입술 주변에 점심 때 먹은 육개장 국물이 희미하게 묻어 있다. 식사 후에 남자는 냅킨 대신 손바닥을 사용한다. 두툼한 손바닥으로 입술을 쓱, 문지르면 그걸로 끝이다. 61번은 가만히 남자의 벌어진 입속을 바라본다. 벽에 오랫동안 붙여놓은 껌처럼 검게 변한 어금니가 보인다. 61번은 혀로 자신의 어금니를 훑어본다. 어렵게만 느껴지던 남자가 조금 다르게 다가온다.         

앞에 있는 차들이 움직인다. 61번이 남자를 깨우려는 순간 벌써 뒤에서 경적을 울려댄다. 엉겁결에 몸을 세운 남자가 얼른 기어손잡이를 당긴다.

―짜식, 거, 죽고 싶어 환장했나. 어따 대고 빵빵거려.

룸미러로 뒤쪽의 트럭을 흘겨보며 남자가 내뱉는다. 느슨하게 앉아 있던 61번은 얼른 고쳐 앉는다.  

V자 모양으로 대열을 이룬 새들이 들판 끝으로 날아가고 있다. 새들이 왜 그런 모양으로 줄지어 날아가는지 책에서 본 것 같다. 하지만 잘 기억나지 않는다. 61번은 새들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창밖을 바라본다. 


광장은 온통 노랑물결이다. 햇빛이란 햇빛은 모두 광장의 은행나무 안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다. 은행잎들이 물결처럼 반짝인다. 여자는 베란다에 서서 아래를 내려다본다. 저 아래, 아이의 까만 머리가 걸어가고 있다.

내가 바퀴가 된 것처럼 내 몸에서 끼익하고 소리가 났어.

딱 30분이라는 약속을 받고 아이는 나갔다. 현관에서 신발을 신다가 아이는 다시 들어와 제 가방에서 노란색 무언가를 꺼내 쥐고 나갔다. 여자는 아이의 까만 머리를 내려다보며 손가락 끝을 만지작거린다. 손가락 끝에 아이의 목뼈에 가 닿던 감촉이 남아 있다. 아이는 놀이터 쪽으로 가고 있다. 지금 이 시간에 놀이터에 나와 있을 아이 또래는 없을 것이다. 있다 해도 아이는 어울리지 않을 것이다. 은행나무에 가려 아이의 모습이 잠깐 사라진다. 아이를 따라가던 여자의 눈에 은행나무 하나가 들어온다.  

나무는 5층 높이에서 멈춰 있다. 우듬지부터 벗어지기 시작한 나무는 아랫부분에만 은행잎을 달고 있다. 우듬지 바로 아래에 새 둥지가 있다. 잎이 지면서 이파리에 가렸던 새 둥지가 드러났다. 위에서 내려다보면 아래에서 올려다볼 때와 다르게 둥지가 작아 보인다. 둥지는 비어 있다. 여자는 갑자기 생각난 듯 베란다 창틀에 매달아 둔 종지를 살핀다. 운두 낮은 플라스틱 종지에 좁쌀이 그대로 있다.

지난 봄, 새 한 마리가 여자네 베란다에 걸어둔 화분대에 자주 내려앉았다. 몇 가지 씨앗을 뿌려두었지만 새싹이 나지 않았다. 흙에 묻어둔 상추씨, 채송화씨는 눈 밝은 새의 뱃속으로 들어가 버렸다. 맨 처음 새를 발견한 건 아이였다. 싹이 났는지 날마다 화분대를 들여다보던 아이는 새싹 대신 씨앗을 쪼아 먹던 새를 보았다. 새와 눈이 마주쳤다고 했다. 아이는 새를 기르고 싶다고 했다. 꼭 그 새여야 한다고 했다. 하는 수 없이 아이를 데리고 새를 파는 가게에 갔다. 아이가 찾는 새는 없었다. 가게 주인이 새 이름을 물었지만 여자는 대답하지 못했다. 대신 잿빛 머리에 갈색 뺨, 생쥐의 눈처럼 반짝이는 눈, 눈썹손질 용 가위만큼 작은 부리에 붉은 입 속을 가진 새라고 말했다. 가게 주인은 고개를 갸웃했다. 새 모이만 한 봉지 사들고 돌아왔다. 그릇에 모이를 가득 부어놓고 기다렸다. 새는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 그 무렵 은행나무에 있는 새 둥지를 발견했다. 아이가 날마다 그 둥지를 관찰했지만 새는 보이지 않았다.

언제부턴가 아이는 새 얘기를 하지 않는다. 여자는 발가락을 오므린다. 휑하게 드러난 둥지를 보고 있으면 발이 시렵다. 

아이가 놀이터로 들어간다. 놀이터에는 아무도 없다. 여자는 허리를 구부려 아이의 이름을 불러본다. 아이에게 들리지 않을 것이다. 여자는 더 깊이 허리를 구부린다. 평소보다 굵고 갈라진 목소리가 여자에게서 흘러나온다. 난간을 잡은 여자의 손에 힘이 들어간다. 가슴 밑바닥에서 무언가 집요한 것이 밀고 올라온다. 여자의 갈라진 목소리는 메아리를 만들지 못하고 허공으로 사라진다. 겹겹이 늘어선 아파트 건물은 모두 등을 보이고 있다. 문 닫힌 성채처럼 완고해 보인다. 그 성채를 묻어버리기라도 할 것처럼 은행잎이 쏟아져내려고 있다. 지구 한 귀퉁이가 노랗게 무너져 내리는 것 같다. 아이는 미끄럼틀 위에 혼자 앉아 있다.    


남자는 차창을 내리고 아파트 외벽을 올려다본다. 어떻게 된 게 동 번호들이 뒤죽박죽이다. 501, 502동 옆에 516동이 있고 그 뒤로 508동이 있다. 61번도 차창으로 목을 빼놓고 있다. 놀이터를 지나치다 남자는 차를 세운다. 미끄럼틀 위에 한 아이가 앉아 있다. 남자가 아이를 부른다. 아이는 쳐다보지 않는다. 얼굴이 벌게지도록 풍선만 불고 있다. 노란 풍선이다. 풍선이 어느 정도 부풀어 오르면 다시 바람을 뺐다 다시 불기를 반복한다.

―개갈 안 나는구만.

남자는 아이를 쳐다보며 유리창 밖으로 가래침을 뱉는다. 다시 목을 빼 올려다본다. 꼭대기 층들이 까마득해 보인다.

―진짜 개갈 안 나는구만.

한꺼번에 풍선껌 두 통을 다 씹은 것처럼 남자의 입 안이 뭉근해진다. 

몇 년 전, 남자는 치과 치료를 받은 적이 있다. 신경까지 파 먹힌 충치를 갈아내고 사기 재질의 이를 씌우는 치료였다. 치료용 침대 세 개에 누운 사람들이 모두 신경 치료를 받는지 핸드피스 소리가 요란했다. 핸드피스가 이를 갈아대자 머리카락 타는 냄새가 났다. 남자는 눈을 감았다. 실내에 잔잔한 피아노곡이 흐르고 있었지만 기계음에 묻혀버렸다. 머릿속으로 터널 하나가 뚫리는 것 같았다. 남자는 핸드피스 소리 사이에서 피아노 소리를 구별해내려 집중했다. 무언가에 집중할 때 남자는 미간에 주름을 잡는다. 아파서 찡그리는 줄 알고 의사가 동작을 멈추었다. 귓가에서 갑자기 소음이 사라지자 멍 했다. 아파요? 의사의 물음에 남자는 눈을 감은 채 왼손을 저었다. 신경 치료가 끝나자 간호사가 남자의 입 안 가득 바닐라 향 고무 껌을 채워 넣었다. 이 모양을 본뜨는 과정이었다. 껌이 촛농처럼 굳어가는 동안 남자는 옆 침대에서 들려오는 핸드피스 소리를 들으며 입을 벌린 채 누워 있어야 했다. 전면이 통유리로 되어 있어서 바깥이 보였다. 치과 바로 앞의 건물은 외벽이 온통 유리로 되어 있었다. 그 유리에 교회의 십자가, 전깃줄, 상가 간판들이 비쳤다. 뒤쪽으로 멀리 아파트 건물들도 비쳤다.

처음에는 새인 줄 알았다. 유리에 비친 아파트 옥상 난간에 까만 것이 보였지만 유리창의 얼룩 때문에 선명하게 보이지 않았다. 새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것이 떨어져 내리는 순간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다. 어, 어…… 저기, 아, 안 되는데. 소리를 질렀지만 입 안 가득 문 껌 때문에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순식간의 일이라 뭐가 뭔지 알 수 없었다. 치료가 끝나고 밖으로 나와 둘러보았지만 조금 전의 아파트가 어느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사방이 온통 똑같은 높이와 모양의 아파트 숲이었다. 마취 기운이 풀리면서 잇몸이 뭉근하게 아려오기 시작했다. 윗입술에 붙어 있던 껌 조각을 떼어내는데 머리가 지끈거리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남자의 편두통이 시작되었다. 통증이 시작되기 전에는 몇 가지 전조 증상이 나타난다. 머릿속에서 핸드피스 돌아가는 소리가 들리고 관자놀이 근처가 후끈거린다. 그러고 난 뒤 날카로운 통증이 레이저 광선처럼 머릿속을 직선으로 가르며 지나간다. 배송지가 아파트인 경우에 증상은 조금 더 심해진다. 어느 때는 편두통이 먼저 찾아온다. 희한하게 그날은 반드시 아파트 근처에 갈 일이 생긴다. 병원에서는 원인을 알 수 없다고 했다. 병원 몇 군데를 전전한 끝에 남자는 스스로 결론을 내렸다. 그날 바깥으로 빠져나오지 못한 비명이 편두통을 만들어내는 것이었다. 출구를 찾느라 비명은 머릿속 여기저기를 쑤셔대는 것이다. 오른쪽 어금니 두 개에서 시작된 일이었다.

단지 안을 한 바퀴를 돌고서야 61번이 배송지에 적힌 동을 발견한다. 세 번 시도 끝에 남자는 봉고차를 주차 라인 안에 정확히 집어넣는다. 편두통이 찾아오면 남자는 필요 이상으로 꼼꼼해진다. 

  

거실에는 햇빛이 깊이 들어와 있다. 가을 햇빛에는 진정 작용이 있는지 거실 안의 물건들이 원래보다 조금 더 가라앉아 있는 것처럼 보인다. 장식장 위에는 청동 조각상이 있다. 집들이 선물로 받은 것이다. 청동상 위에 먼지가 얇게 내려앉아 있다. 

며칠 전, 여자는 분명 집이 흔들리는 것을 느꼈다. 침대에 누워 막 잠이 들려는 순간이었다. 현관 쪽 방에서 무언가 쓰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남편은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다고 했다. 무너진 책 더미를 보고도 긴가민가했다. 크기가 다른 책들이 들쭉날쭉 쌓여 있어 지진이 아니어도 책은 무너질 수 있었다. 아이가 자고 있는  방문을 열어보았다. 아이는 곤하게 자고 있었다.

벽에 기대어 쌓아 놓은 책이 많은 분량은 아니었다. 언제 들어온 것인지도 모르는 ‘애완견 기르기’나 ‘퀴즈 백과’같은 책이 이런저런 문학잡지와 시집 사이에 끼어 있었다. 누렇게 변한 문고판까지 있었다. 오래된 책을 들고 아무 페이지나 펼치면 마르고 버석거리는 종이에서 싸한 냄새가 풍겼다. 책 속에 고물고물 모여 있던 글자들이 휘발하며 내는 향기였다. 여자는 가끔 책 사이에 얼굴을 묻고 큼큼거렸다. 시집 속표지에 몇 자 적어둔 자신의 혹은 남편의 낙서를 찾아 읽는 재미도 좋았다. 여자는 다시 책을 벽에 붙여 쌓았다.

두 번째 미진이 다녀간 날, 여자는 같은 단지에 사는 몇몇에게 전화를 했다. 이제 방금 집이 흔들리지 않았어? 모두들 아니, 라고 대답했다. 뒷동에 사는 여자가 물었다. 앞 뒤 베란다 활짝 열어 놓은 것 아녜요? 맞바람 치면 덜거덕거릴 수도 있잖아. 거긴 층수도 높은데.

베란다는 닫혀 있었다. 여자는 수화기를 든 채 욱신거리는 발등을 내려다보았다. 미진을 느끼고 책이 있는 방으로 들어섰을 때 책들이 막 무너지고 있었다. 두툼한 책 한 권이 여자의 발등을 내리찍었다. 여자는 발등을 싸쥐며 주저앉았다. 한 달 전, 카슈미르 지방을 쓸어버린 지진이 떠올랐다. 리히터 규모 8을 기록한 지진은 하룻밤 사이에 인근 지역을 완전히 쓸어버렸다. 무너져버린 아파트의 콘크리트 잔해를 뚫고나온 철근에 걸려 있던 이불이며 커튼 자락들. 삶이 한순간에 그렇게 부러진 녹슨 철근에 내걸릴 수 있었다. 여자는 낮은 물마루처럼 자신의 집을 타고 넘어간 미미한 흔들림이 어쩌면 카슈미르를 파괴하고 이곳까지 뻗어온 여진 때문일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출구를 찾지 못해 이리저리 헤매다 그것은 또 모두가 잠든 밤, 소리 없이 발밑으로 와 삶의 한가운데를 부수며 솟아오를 것이다. 

아무도 흔들림을 느끼지 못했다는 말에 발등이 더 욱신거렸다. 당혹감보다 모멸감에 가까운 감정을 느꼈다. 아이의 가방에 가득 차 있던 자갈을 쏟아낼 때도 그런  기분이었다. 세 번째, 집이 흔들렸을 때 여자는 아무에게도 전화하지 않았다. 학교에 가고 없는 아이의 빈 방으로 얼른 뛰어 들어갔다. 두툼한 책에 발등을 찍히지 않으려면 튼튼한 책장이 필요했다. 

여자는 인터넷을 뒤져 책장을 골랐다. 여자가 가리킨, 컴퓨터 화면 속의 책장을 본 남편 얼굴에 별론데, 하는 표정이 스쳤지만 남편은 괜찮아 보인다고 했다. 정말 괜찮아? 여자의 물음에 남편은 그래에, 그 책상이 제일 괜찮아 보인다니까, 했다. 마음에 없는 말을 하게 되면 남편은 꼭 말실수를 했다.

   

이 소비자가 주문한 책장은 상품 번호 M001에서 005. 책장은 하나로 연결된 것이 아니라 1, 2, 3, 4, 5단 각각의 책장을 소비자가 원하는 대로 배치하여 연결시키는 제품이다. 1, 3, 2, 4, 5, 순서로 연결시킬 수도 있고 5, 4, 3, 2, 1 순서로 배치할 수도 있다. 조립하는 데 시간이 좀 걸리지만 책장의 높이에 변화를 줄 수 있어 인기가 많은 상품이다. 거기에 일반 책장보다 나무판 두께가 두꺼워 책의 무게 때문에 아래로 휘거나 비틀릴 염려가 없다.

여자는 거실 한쪽 벽에 책장을 놓겠다고 말했다. 설치할 곳이 결정되었으니 각각의 책장을 조립한 다음 연결시키면 되었다. 남자가 연장통에서 드릴을 꺼내든다. 61번만 보조를 맞춰주면 빨리 일을 마칠 수 있다. 길에서 붙잡힌 시간을 벌충하려면 작업 시간을 조금이라도 단축해야 한다. 여기 말고도 여섯 건이 더 남았다. 다행히 이번 소비자는 깐깐해 보이는 인상이 아니다. 다니다보면 이상한 사람도 많다. 가구점 직원을 이삿짐 직원으로 여기는 소비자도 있다. 이쪽 방에 있는 피아노를 저쪽 방으로 옮기고 그 자리에 책상을 설치해 달라는 사람, 3단짜리 책장 하나 주문해 놓고 집에 있는 삐걱거리는 가구를 다 손봐 달라는 사람…….

61번이 커터 칼로 종이상자를 뜯고 나무판을 꺼내 놓는다. 남자는 나무판에 드릴로 피스를 박을 자리를 만들어 나간다. 조용했던 실내는 순식간에 드릴 소리로 가득 찬다. 나무판을 뚫다보면 나무판이 드릴을 꿀꺽 삼키는 순간이 있다. 나무판이 처음에는 드릴을 밀어내는 느낌이다가 어느 지점을 지나면 그 반동으로 더 깊숙이 들어가 박힌다. 남자는 그 순간 손에 와 착 감기는 손맛을 좋아한다. 드릴이 아니라 자신의 손가락이 나무판을 뚫고 들어가는 느낌이다. 짧은 순간이지만 편두통도 꿀꺽 사라진다. 남자의 손에 짜릿한 손맛을 남기며 작업은 말없이 진행되고 있다. 61번이 드라이버를 두 번이나 떨어뜨렸지만 남자는 신경 쓰지 않는다. 드릴에만 빠져 있다.

여자는 잠깐 남자들의 작업을 지켜본다. 야구 모자를 쓴 남자에게 자꾸 눈길이 간다. 야구 모자는 현관문 쪽을 흘끔거린다. 그의 가는 팔다리가 새를 연상시킨다. 야구 모자 아래 드러난 남자의 가는 뒷목이 아이의 것처럼 툭 불거져 있다. 하마터면 여자는 남자의 뒷목을 쓸어내릴  뻔했다. 여자는 손가락 끝을 만지작거리며 부엌으로 온다. 부엌 창을 연다. 냉장고에 붙어 있던 종이들이 바람에 펄럭인다.

―피스.

나사를 입에 문 남자가 61번에게 말한다. 61번은 얼른 나무판을 담아온 상자를 들쳐본다. 아무 것도 없다.

―다 꺼내 놓은 것 같은데요.

맹렬히 돌아가던 드릴이 멈춘다. 남자는 숨을 몰아쉬며 이마에서 흘러내린 땀을 두터운 손바닥으로 훔친다. 땀 냄새에 마늘 냄새가 섞여 나온다. 오늘따라 땀이 끈적거린다.

―야, 이 사람아. 이걸 보고도 그런 말이 나와 지금? 부품 봉지 하나가 비잖아. 남자가 드릴로 바닥의 나무판을 가리키며 말한다. 61번 얼굴이 금세 붉어진다. 부품 봉지는 차 트렁크에 떨어졌거나 엘리베이터 안에 뒹굴고 있을 것이다. 남자는 드릴을 던져버리고 싶은 것을 꾹 참는다.

 

드릴 소리 뒤에 갑자기 찾아든 정적에 여자는 귀가 멍하다. 누군가 문을 열고 나가는 소리가 들린다. 냉장고에서 팔락거리던 종이가 거실 쪽으로 날아간다. 나무판과 연장통으로 어지러운 거실 가운데서 남자는 고개를 숙인 채 자신의 머리를 꾹꾹 누르고 있다. 햇빛이 남자가 있는  데까지 와 있다. 종이가 나무판 위로 내려앉는다. 여자는 종이를 주워 부엌으로 돌아온다. 예정대로라면 지금쯤 책 정리까지 모두 끝내고 거실에 들어온 가을 햇빛 속에 앉아 있을 시간이다.

지난 일요일 오후, 여자의 가족은 단지 안 벤치에 앉아 있었다. 온통 노랗게 타오르는 단지 안에 점점이 은행잎들이 날리고 있었다. 사선으로 날리는 나뭇잎을 따라 그만큼의 속도로 시간도 사선으로 흐르는 것 같았다. 무엇이 울음을 터지게 했는지 모른다. 말갛고 노란 빛 속으로 소리 내지 않고 다가와 자신들의 삶을 덮치고 말 날카로운 발톱 같은 것이 스쳐 지나갔다. 여자는 자신이 몰염치한 사람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이 고요와 평화로움을 지키기 위한 번제에 누군가는 희생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여자는 소름이 돋았다. 아이는 은행잎을 줍느라 줄곧 허리를 구부리고 있었다. 죽고 싶지 않아. 자신도 모르게 그런 말이 나왔다. 남편은 방금 떨어져 내린 은행잎을 가리키느라 여자의 말을 듣지 못했다.   

거실에서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여자는 창밖을 바라본다. 아이를 내보낸 것이 후회된다. 남자가 있는 거실 쪽으로 신경이 쓰인다. 아이든 야구 모자든 누구라도 얼른 돌아왔으면 좋겠다. 일부러 수돗물을 세게 틀어 주전자에 받는다. 보리차를 넣고 주전자를 가스레인지 위에 올려놓는다. 아직도 야구 모자는 오지 않는다. 여자는 행주로 싱크대 위를 몇 번 문지르다 전자레인지 옆에 놓인 라디오를 켠다. 잔잔한 피아노곡이 흘러나온다.  


61번은 아직도 오지 않고 있다. 이럴 줄 알았다면 직접 내려갔다 왔을 것이다. 다시 남자의 머릿속이 지끈거리기 시작한다. 남자는 입술 한쪽을 씹는다. 담배라도 한 대 피웠으면 좋겠지만 소비자 집에서 그럴 수는 없다. 오른쪽 눈두덩까지 내려온 통증이 단단하게 뭉쳐 머리 뒤쪽으로 뻗친다. 저절로 눈살이 찌푸려진다. 머리를 흔들어본다. 머릿속에서 쇠구슬 소리가 난다. 슬슬 쇠구슬이 움직이기 시작한다. 한 번 시작된 통증은 몇 시간을 끌기도 한다. 어지간한 진통제로는 끄떡도 하지 않는다.

부엌 쪽에서 피아노 소리가 들린다. 바닐라껌을 잔뜩 문 채 치과 침대에 누워 있을 때도 저런 피아노 소리가 들렸었다. 남자는 얼굴을 잔뜩 찌푸리며 엄지손가락으로 관자놀이를 누른다. 손가락이 관자놀이를 뚫고 들어갈 정도로 힘을 준다. 거실 장 위의 청동조각이 눈에 들어온다. 차갑고 묵직해 보인다. 뜨겁게 달구어진 쇠구슬이 뇌 주름 사이를 엄청난 속도로 회전하다가 안구를, 관자놀이를, 정수리를 툭툭 건드린다. 정말이지 저 조각상으로 이놈의 머리통을 호두알 깨듯 깨버리고 싶다. 

  

61번은 일부러 현관문을 조금 열어놓고 들어온다. 계단으로 뛰어 올라와 얼굴이 벌겋다. 가쁜 숨을 몰아쉬지도 못하고 조금씩 뱉어낸다. 남자는 화난 표정을 감추지 않은 채 61번 손에 들린 봉지를 낚아챈다. 거실 안에 다시 드릴 소리가 차 오른다. 61번은 열려 있는 현관문을 확인하고 드라이버를 집어 든다. 어느 건물에 들어가든 61번은 먼저 비상구 위치를 확인해 두어야 안심이 된다. 이 아파트의 비상구는 복도 끝에 있다. 현관문을 열어두면 비상구에 조금이라도 빨리 도착할 수 있다.  

어릴 적, 61번의 집에 불이 난 적이 있다. 연기 자욱한 방에 커다란 손이 들어와 끄집어내려 했지만 잠결의 61번은 큰 손을 피해 방구석으로 더 파고들었다. 자기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불티 터지는 소리 위로 울렸다. 그런데도 61번은 벽 모서리에 붙어 오그리고 떨기만 했다. 머리카락 타는 냄새가 났다. 그 다음 기억은 없다. 얼굴 위로 차가운 소주가 쏟아질 때 깨어났다.

남자는 얼굴을 잔뜩 구긴 채 4단 책장에 매달려 있다. 남자의 단단해 보이는 턱뼈에 잔뜩 힘이 들어가 있다.

  

아이는 약속한 시간이 많이 지났는데도 오지 않고 있다. 부엌 창으로 보이는 아파트 뒤쪽 숲이 확 다가드는 느낌에 여자는 움찔한다. 여자는 거실을 가로질러 베란다로 간다. 놀이터는 텅 비어 있다. 미끄럼틀 위에도 그 아래에도 아이가 보이지 않는다. 아이는 가끔 숲에 혼자 가기도 한다. 어떻게든 작업이 빨리 끝나야 한다. 남자들을 두고 아이를 찾으러 갈 수도 없다. 눈앞으로 아이의 뒷모습이 스친다. 아이는 혼자 숲 쪽으로 걸어가고 있다. 책장을 주문한 것이 조금씩 후회되기 시작한다. 이대로 작업을 중지시키고 남자들을 내보내고 싶다.

4단 책장이 완성되었다. 책장은 단단하고 안정감 있어 보인다. 남자는 조립된 책장을 벽에 기대 세워 놓는다. 61번도 3단짜리 책장을 완성한다. 5단짜리만 조립해 서로 연결하면 일은 끝난다. 남자는 관자놀이를 누르다 주먹 쥔 손으로 자신의 머리를 친다. 61번은 커터 칼을 집어 든다. 종이상자는 하나만 남았다.   

여자는 아이 또래들 집에 전화를 걸어볼까 하다 그만둔다. 늘 그런 것처럼 아이는 혼자 있을 것이다. 주전자 뚜껑이 달그락거리는 소리를 낸다. 여자는 듣지 못한다. 달그락거리는 소리 속에 쉿쉿, 거리는 소리가 섞인다. 61번은 드릴 소리 사이에서 분명하게 그 소리를 들었다. 침을 삼키고 눈을 크게 뜨고 드릴에 집중하려 하지만 자꾸 그 소리에 신경이 쓰인다. 타는 냄새가 나는 것 같기도 하다. 61번은 부엌 쪽과 여자를 번갈아 쳐다본다. 여자는 베란다에서 바깥을 내다보고 있다.

―이것 좀 잡아 봐.

나무판을 세우며 남자가 말한다. 61번은 듣지 못한다.

―이것 좀 잡아 보라고!

남자가 소리를 지른다. 여자가 깜짝 놀라며 뒤돌아본다. 한 손에 커터 칼을 든 61번이 당황하며 나무판으로 손을 뻗는다. 여자는 얼른 안방으로 들어와 버린다. 거실을 그들에게 내주고 안방으로 쫓겨난 느낌이 들지만 괜찮다. 조금만 있으면 일이 끝날 것이다.

갑자기 남자가 눈을 감싸며 바닥으로 고꾸라진다. 남자의 손가락 사이로 피가 흘러나온다. 61번의 커터 칼이 남자의 눈두덩을 스쳤다. 실수하지 않으려고 해도 당황하면 꼭 이런 실수를 하게 된다. 61번은 얼떨결에 들고 있던 나무판을 떨어뜨린다.

드릴 소리가 뚝 끊긴다. 여자는 문에 귀를 바짝 댄다. 무언가 거실에서 쿵, 무너진다. 여자 머릿속이 후끈하다 차갑게 식는다. 여자는 얼른 안방 문을 잠근다. 화장대 위의 전화기를 들었지만 남편의 휴대폰 번호가 떠오르지 않는다. 욕설이 들리고 또 무언가 넘어가는 소리가 난다. 여자는 문 손잡이를 비튼다. 문이 열리지 않는다. 이 안에 갇힌 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스친다. 숲으로 걸어들어 가는 아이의 뒷모습이 보인다. 노랗게 빛나던 숲이 일시에 어두워지며 아이를 왈칵 삼켜버린다. 더 어두워지기 전에 아이를 찾으러 가야한다. 여자는 손잡이를 반대편으로 홱 돌린다.

남자의 두툼한 손이 61번의 멱살을 움켜잡고 있다. 61번은 남자 아래 깔려 있다. 남자의 뺨을 타고 흘러내린 피로 작업복 깃이 짙은 색으로 변해간다. 61번이 남자의 손아귀에서 힘겹게 고개를 틀며 여자를 쳐다본다.  

―저기…… 저, 부엌에서 타는 냄새가 나는데…….

남자가 61번의 입을 내리친다.

―가…… 스렌지…….

―이 새끼 이거, 아주 끝까지 날 가지고 노는구나.

남자가 옆에 있던 드릴을 움켜쥔다. 드릴이 돌기 시작한다. 가속도가 붙어 점점 빨라지는 드릴 끝이 61번의 눈을 향해 나선형을 그리며 내려간다.


여전한 것은 햇빛뿐이다. 거실은 나무판과 흩어진 부품들, 부서진 책장으로 어지럽다. 하루  전만 해도 이 고요한 거실에서 햇볕에 등을 내주고 앉아 있었다. 햇빛은 이제 옆집으로 옮겨 갈 것이다. 여자는 500배속 화면으로 보는 것처럼 거실 안의 풍경이 아주 천천히 움직이고 있다고 느낀다. 풍경은 한없이 고요하고 부드럽다. 드릴 끝은 천정을 향해 있다. 발끝으로만 서서 회전하는 무용수처럼 남자의 드릴은 우아하게 돌아가고 있다.  

남자는 여자의 발치에 엎드려 있다. 피로 축축하게 젖은 뒤통수와 귓불을 타고 흘러내리는 피만 아니라면 마루에 귀를 바짝 대고 아래층에서 나는 소리를 엿듣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남자한테서 흘러나온 피가 그의 오른손 아래 깔린 부품 봉지를 적시고 연장통 아래로 스며든다. 연장통은 무심하게 열려 있다. 크고 작은 십자드라이버, 줄, 톱, 망치, 펜치가 제자리에 꽂혀 있다. 드릴과 커터 칼 자리만 비었다. 별다른 일이 없었다면 남자의 드릴은 지금 나무판의 어딘가를 뚫고 있어야 하고 커터 칼은 부품을 포장해온 상자들을 뜯고 있어야 한다. 나머지 연장들을 써 보지도 못하고 작업은 끝났다. 61번의 얼굴은 지나치게 창백해 밀랍 마스크처럼 보인다. 여자와 밀랍의 61번은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눈을 꼭 감고 있다. 눈을 뜨고 있는 것은 숨이 멎은 남자와 그의 발바닥 근처에서 노작거리는 가을 햇빛뿐이다. 조금 전, 남자의 드릴 끝이 61번의 눈두덩을 향해 꽂히려는 순간 여자는 청동상을 움켜쥐었다. 

남자의 눈동자는 이 모든 상황을 담아두어야 한다는 듯 활짝 열려 있다. 눈동자 한가운데에 여자가 들어 있다. 여자의 손에는 청동상이 들려 있다. 절대 뺏기지 않겠다는 듯 여자의 손은 청동상을 꼭 움켜쥐고 있다. 청동상에 피가 묻어 있다. 청동이라 피는 눈에 잘 띄지 않는다. 주조 과정에서 잘못 얼룩진 녹물처럼 보인다. 피 한 방울이 여자의 발등 위로 떨어진다. 책에 찍힌 자리다. 벽돌이라도 떨어진 것처럼 여자의 발이 움찔한다. 여자의 흰 양말 위로 검붉은 얼룩이 생겨난다. 피 한 방울이 또 떨어지고 여자는 다시 움찔한다.

햇빛은 어제 그대로다. 아주 오래 전에도 햇빛은 이랬을 것이다. 아주 오랜 후에도 햇빛은 이럴 것이다. 여자는 오래 전 어느 가을날에도, 이런 빛 속에서 누군가의 뒤통수를 내리친 것만 같다. 어쩌면 피 묻은 청동상을 든 채, 이런 햇빛 속에 이렇게 서서, 자신에게 뒤통수를 맞을 오랜 후의 누군가를 기다리는 중인지도. 

더 어두워지기 전에 아이를 찾으러 가야 한다. 저녁 준비도 서둘러야 한다. 여자는 눈을 뜬다. 베란다 밖을 바라보며 여자는 낮게 중얼거린다.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아. 햇빛도 어제 그대로니까……. 달라질 건 없어. 내일도, 내일도, 그 다음 날도…….

베란다 앞으로 노란 풍선 하나가 둥둥 떠오른다.《문장 웹진/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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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하는 마음 없이 김지연 안지는 이른 결혼을 했는데 실패로 끝났다. 아니, 그걸 실패라고 할 수 있을까? 이혼을 한 건 사실이었지만 안지는 자신의 인생 여정에서 그때 이혼한 일을 실패라고 단정 지을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 뒤로 더 행복해졌다고 할 수는 없을지언정 조금 더 자기 자신에 가까운 삶을 살게 된 것은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혼이라는 단어를 떠올릴 때면 늘 그에 대해 변호하고 싶은 여러 말들이 떠오르곤 했기 때문에 처음부터 결혼 같은 건 하지 않는 편이 더 나았을 거라는 생각을 하곤 했다. 때문에 이혼했다는 사실은 안지의 비밀은 아니었지만 먼저 나서서 밝히지도 않았다. 어릴 때 안지는 무척 전형적인 사람이 되고 싶었다. 구체적으로 그런 표현을 떠올리지는 않았다. 그저 자신이 속해야 하는 집단에서 튀지 않는 사람, 아주 평균적인 사람이고 싶었고 그런 사람이기 위해서 부단히 노력을 했다. 찬반투표를 할 때면 눈치를 보다가 다수의 의견에 따라 슬그머니 손을 들었다. 친구가 좋아하는 가수를 따라서 좋아하고 친구의 것과 비슷한 브랜드의 신발을 사서 신었다. 친구들이 싫어하는 선생을 따라서 싫어했다. 사실 안지는 그 선생에게 남몰래 호감을 갖고 있었지만 친구들과 함께 떡볶이를 먹다가 술술 흘러나온 그 선생에 대한 욕을 듣고 재빨리 노선을 바꿔 함께 욕을 했다. 한동안 안지는 수학 시간마다 왜 애들은 저 선생을 싫어할까? 에 대한 답을 알고 싶어서 더 열심히 선생의 행동거지를 살폈다. 수학을 가르친다는 점만 빼면 딱히 나무랄 데 없는 사람이었다. 학생이 쉽게 답할 수 없는 내용을 골리듯 물어보지 않았고 무엇보다 학생들한테 사과를 할 줄 알았다. 뭔가 잘못 알고 섣불리 화를 냈을 때, 그러다 결국 진실을 알게 되었을 때, 다른 선생들은 그러게 헷갈릴 만한 짓을 왜 하고 다니느냐고 도리어 짜증을 부렸는데 그 선생은 재빨리 미안하다고 말했다. 미안하다. 내가 잘못 알았어. 미안해. 가끔 안지는 머릿속으로 그 목소리를 재생해 보곤 했다. 그 때문에 선생이 더 좋아졌지만 여전히 싫어하기 위해 애썼다. 누구나 다 그런 식으로 청소년기를 보내지 않나? 내가 아닌 사람이 되어 보려고 노력하면서? 안지는 대학에 갔고 연애를 했고 졸업을 했고 취직을 했다. 결혼도 했다. 아주 평균적인 삶이었다. 조금씩 빠르기도 했다. 조바심이 나 있었으므로. 자신도 남들처럼 지극히 평범하게 살 수 있다는 것을 빨리 증명해 보이고 싶었으므로. 어느 정도 성공적인 것 같기도 했다. 남편이 바람이 나기 전까지는 그랬다. 식도 올리기 전 임신을 해 낳은 아이가 막 돌을 지난 참이었다. 임신이 아니었으면 결혼까지는 이어지지 않았을지도 몰랐다. 남편은 계속 후회하는 것 같았다. 그때 낙태를 밀어붙이지 않은 것을, 시간을 끌다가 영영 타이밍을 놓쳐버리고 만 것을, 어떤 결단력을 가지지 못한 자신을 자책했을지도 모른다. 그때 뼈저리게 깨달은 바가 있었는지 새로운 여자가 생겼을 때는 안지가 알아차리기도 전에 이혼을 해달라고 요구했다. 겨우 육 개월을 만났을 뿐

  • 관리자
  • 2024-07-01
소금 샹들리에

소금 샹들리에 정한아 호주에 사는 김이 오랜만에 귀국해서 친구들이 다 같이 모이기로 했다. 4명이 만나는 건 대략 7년여 만이었다. 방을 잡고 밤새 보자고 해서 오기 직전까지 망설였는데, 남편이 등을 밀었다. 정민이와 자신에게도 내가 없는 날이 필요하다고 큰소리를 치더니 정말 밤새 전화 한 통 없었다. 친구들과는 대학 동기였다. 전공은 문예 창작이었는데, 나는 2학년까지 다니고 학교를 그만뒀다. 그렇지만 정작 작가가 된 사람은 나뿐이라고 친구들이 투덜거렸다. 나는 작가가 아니라고 아무리 말해도 소용없었다. 그들은 십 수 년 전 내가 낸 단 한 권의 책을 기억하는 몇 안 되는 사람들이었다. 세 명 모두 미혼이었고, 아이를 가지지 않았다. 놀라울 정도로 예전 그대로인 친구들 사이에서 나만 철 지난 옷차림에 좀처럼 대화에도 섞이지 못했지만, 그런 것 때문에 마음이 상하지는 않았다. 오랜만의 서울 나들이에 술자리도 즐거웠다. 좋은 친구들이었다. 7년 전 정민이 자폐 스펙트럼 장애 판정을 받았을 때 그들은 자신의 일처럼 울어 줬고, 이후에도 종종 아이의 간식과 선물을 집으로 보내 줬다. 서서히 연락을 거둔 것은 내 쪽이었다. 애써 관계를 유지하는 일이 힘에 부쳤을 뿐, 그들에게 섭섭한 마음은 조금도 없었다. 지난 몇 년 동안 나는 집이 아닌 곳에서 밤을 보낸 적이 없었다. 다들 술에 취해서 침대로 간 뒤에도 좀처럼 잠이 오지 않아 휴대폰만 들여다보았다. cctv 속 거실은 엉망이었다. 엎어진 식판, 사방에 흩어진 블록 조각, 길게 늘어진 옷가지들. 남편은 불도 끄지 않고 아이를 재우러 방에 들어간 모양이었다. 나는 정지화면 같은 그 풍경을 한참 바라보다가 해 뜰 무렵에야 겨우 잠이 들었다. 다음날 우리는 점심을 먹고 헤어지기로 했다. 맛집마다 대기가 길어 종로의 좁은 골목을 돌고 또 돌았다. 앞장서 구글 맵을 보며 걷던 김이 갑자기 작은 서점 앞에서 멈춰 서더니 책을 사야겠다고 말했다. 지난 이사 때 내 책을 분실했다는 것이었다. 나는 집에 돌아가서 책을 다시 보내 주겠다고 김을 달랬다. 다섯 평도 안 되어 보이는 그 작은 서점에 내 책이 있을 리는 만무했기 때문이다. 김은 막무가내로 서점에 들어갔다. 할 수 없이 그녀를 따라 들어갔다가 전면 책장에 전시된 내 책을 발견했다. 죽은 친구를 만났다고 해도 그처럼 놀라지는 않았을 것이다. “미애 씨!” 그곳에서 누군가 나를 불렀다. 우아한 노부인이었다. 린넨 바지에 화이트 셔츠, 큼지막한 호른 목걸이를 한 여자는 환하게 웃으면서 나를 바라봤다. “반장님?” 나는 말끝을 흐리며 물었다. 여자는 성큼성큼 내 앞에 다가와서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나를 와락 끌어안았다. 누군가 나를 그렇게 안은 것이 너무 오랜만이라 온몸에 힘이 풀리는 것 같았다. 그녀는 오래전 나와 함께 공부했던 문우였다. H 백화점 문화센터 소설 창작 교실의 반장. 친구들이 책을 구경하는 사이 나는 그녀와 짧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ldqu

  • 관리자
  • 2024-07-01
그동안의 정의

그동안의 정의 최예솔 작정하고 사라진 사람은 작정하고 찾아야만 한다. 나는 윤정수를 작정하고 찾지 않았다. 보통의 남매 사이라는 게 정확히 어떤 건지는 모르겠지만 윤정수와 나를 그냥 보통 남매, 라고 하기에는 좀 어렵지 않을까. 윤정수는 나보다 4년 먼저 태어났다. 그리 적지도, 그리 많지도 않은 애매한 나이 차이 덕분에 윤정수와 나는 딱히 친해지지 못했다. 내가 초등학교에 입학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윤정수는 중학교에 갔고, 내가 중학생이 되었을 때 윤정수는 고등학교에 갔다. 물론 윤정수와 내가 영 친해지지 못한 건 우리의 나이 차이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윤정수는 내게 없는 사람에 가까웠다. 말수도 없고 센스도 없고 자존심도 없고 공부머리도 없고 돈도 없고······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나? 아무튼 남매 사이에 정이라도 있었다면 걱정이라도 했을 텐데 그럴 이유조차 없었다. 쥐뿔도 없는 윤정수니까. 특이사항이라곤 개그맨 윤정수와 동명이인이라는 것 정도밖에 없는. 그러니 윤정수가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집을 나갔다고 해도 이상할 것 하나 없었지. 뭐 내가 찾는다고 윤정수가 나타났을 거라는 보장도 없지만 나는 막연히, 어련히 때 되면 나타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했다. 하지만 윤정수는 죽을 때까지 나타나지 않았다. 물론 내가 죽은 것은 아니다. 윤정수가 죽었다. 내 나이가 이제 서른이니까, 윤정수는 서른넷에 죽었다. 이제 내게 남은 혈육은 없다······ 아닌가? 고모. 그렇게 부르지 마. 왜요. 낯설어. 저도 고모가 낯설어요. 윤현수는 맹랑하다. 윤정수와 장현아의 딸이라고 해서 윤현수. 그거 좀 유치하지 않니? 물었을 때 윤현수는 뭐 어때요 엄마아빠말곤 모르는데, 하고 대답했다. 이제 나도 아는데? 하니까 이젠 고모도 모르는 척해 달라고 했다. 참 나 어디서 이런 게 굴러왔는지. 현수야. 네. 네 엄마 입국 날이 언제라고 했지? 다음 주 토요일이요. 아직 한참 남았네. 고모도 고모 할일을 해요. 시간 금방 갈걸요. 알겠다 그래. 윤현수를 데리고 온 사람은 장현아다. 이제는 나흘쯤 됐으려나. 아침부터 현관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하도 시끄러워서 나가 봤더니 장현아가 윤현수의 손을 붙잡고 서 있었다. 장현아는 다짜고짜 윤정수를 아느냐고 물었고 나는 오랜만에 듣는 윤정수의 이름에 잠깐 벙쪘다가 네, 저희 오빠네요, 하고 대답했다. 조카입니다. 그날 장현아의 대사를 나는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그건 도저히 내가 아는 사람이 뱉을 만한 말이 아니어서 대사라고밖에는 표현할 수 없겠다. 아직도 문득 의심스러울 때가 있다. 윤현수가 정말 나의 조카가 맞고 장현아가 정말 나의 새언니가 맞을까. 가족관계라는 게 그렇게 단순하게 정리되는 거라면 이제까지 윤정수와 나는, 또 윤정수와 나와 우리의 부모는, 왜 이렇게 흩어지거나 죽거나 혼자 남을

  • 관리자
  • 2024-0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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