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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란탑

  • 작성일 2007-10-30
  • 조회수 1,624

 

산란탑

―채금조합 1



이우현




태훈은 핸드폰을 들었다. 두 시였다. 애인의 번호가 저장된 단축번호를 눌렀다. 아무런 신호음도 들리지 않았다. 모를 일이었다. 통화권 이탈인가 싶어 김의 것을 빌렸는데도 마찬가지였다. 담배를 한 대 피우고 술이 두어 순 돈 후에 태훈은 다시 시간을 확인했다. 두 시였다. 뭔가 이상하게 일이 진행되고 있다는 생각이 들자 더는 술을 마실 수 없었다. 김과 택시 기사는 접대부를 끌어안고 웃어대고 있었다. 태훈은 김에게 술을 그만 하라고 넌지시 말하고는 조심스럽게 일어나 룸 밖으로 나왔다.

 

 

여자는 기다렸다는 듯 태훈을 맞았다. 이전과 달리 그녀의 표정에는 웃음이 사라지고 없었다. 말없이 서로의 눈만 바라볼 뿐이었다. 태훈은 어떤 말부터 꺼내야 할지 주저했다. 왠지 여자는 이 상황을 즐기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무표정도 웃는 것도 아닌 여자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태훈은 다시 한 번 시간을 확인했다. 왜인지 모르게 선뜻 물을 수 없었다. 마침내 그녀가 먼저 입을 열었다.

“잘 들어요. 날이 밝으면.”

“여기가 어딥니까? 당신은 누구에요?”

“흥분하지 마시고.”

그녀는 다소곳이 앉아 태훈의 얼굴을 찬찬히 살피며 말을 이었다.

“이미 눈치챘는지 모르겠지만 이곳은 당신이 살던 곳과는 다른 곳이에요.”

태훈은 계속 말해 보라는 표정을 지었다.

“쉽게 말하면, 돈이 필요 없는 곳이죠. 당신들은 이곳에서 어떤 대가를 지불하지 않아도 무엇이든 누리고 살 수 있어요. 단.”

그녀의 음성에 힘이 실렸다.

“일과시간에는 일을 해야 합니다.”

“당신이 누구냐고 물었습니다.”

그녀는 또박또박 말했다.

“나는 단지 안내인일 뿐이에요.”

“무슨 일을 해야 한다는 거죠? 아니, 나는 여기서 이렇게 시간을 죽일 수는 없어요. 나는 내가 사는 곳이 분명히 있고 내 일이 있어요.”

“거듭 말하지만, 그곳의 일은 그곳의 일이고, 이미 당신은 이곳에 있어요. 이곳 사람인 셈이죠. 여기에서 일을 해야 한다는 것은 하나의 약속과 같아요. 그것을 어기면.”

“어기면?”

“당신들은 그럴 리는 없겠지만 죽을 수도 있어요.”

태훈은 애써 냉정을 찾으며 말했다.

“우리가 거절하면? 우리가 돌아갈 거라는 생각은 안 해 봤나?”

“그건 불가능해요. 길을 찾을 순 없을 테니.”

“이봐요, 나는, 우리는 집도 있고 가족도 있고 고유한 사회 안에 속해 있는 사람이야. 무슨 이유로 우리에게 이러는지는 모르겠는데 여기에 있을 이유가 없다고.”

“선택은 당신들이 했어요. 누구도 강요한 적은 없죠. 무엇보다 당신들, 당신들이 이곳을 원했어요. 스스로 부른 거예요. 그래서 날 만난 것이고.”

“이곳 사람들은 다들 그렇게 들어온 거요?”

“꼭 그렇지만도 않아요. 우연히 오는 사람, 올 수밖에 없는 사람, 당신들처럼 이해 관계가 맞는 사람들, 다양하다고만 해 두죠. 물론, 원주민들도 있어요.”

“그렇다면 왜 나 하나만 이곳에 온 거죠. 혼자 여기서 산다면 무슨 의미가 있어?”

그녀는 마치 태훈을 비웃는 듯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럴듯한 말이기는 한데, 당신은 누가 옆에 있어서 살아 온 게 아니잖아요. 당신이 더 잘 알 텐데요.”

“내가, 우리가 당신 말을 곧이곧대로 믿을 것 같아?”

“날이 밝으면 저절로 알게 될 걸요.”

태훈은 여자를 노려봤다. 여자의 눈빛은 전혀 흔들림이 없었다. 태훈은 따지듯 물었다.

“당신 말대로라면 이곳에 갇혀 살아야 한다는 말 같은데, 당신은 어떻게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지? 당신은 우릴 밖에서 만났잖아.”

“그건 내 일이니까요.”

“우릴 속여서 데리고 오는 일? 그것 나도 할 수 있나? 잘 할 수 있는데, 충분히 말이야.”

“두고 봐야죠. 오히려 당신들이 이곳을 떠나진 않을 거예요. 내가 그랬던 것처럼.”

“그건 당신 생각이고.”

“돌아갈 방법이 전혀 없는 건 아니에요. 일단 하루를 보낸 후에 다시 이야기하죠. 또 만날 거예요.”

태훈은 불현듯 떠올라 물었다.

“저 방에 있는, 아가씨들은 뭐요? 저것도 저 사람들 일이오?”

“선택이에요.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거죠. 피차 원하는 걸 얻을 테니.”

태훈은 여자의 말이 쉽게 이해되지 않았다. 여자는 일방적으로 몇 가지 주의 사항을 일러 주고는 나가 버렸다. 태훈은 그녀를 붙들고 싶었지만 별 도움이 되지 않으리라 예상했다. 그저 이 상황이 어쩌면 꿈일지도 모른다 생각하고 싶을 뿐이었다.


“무슨 말이에요. 그럼 집에 돌아갈 길이 없다는 소리요?”

택시기사가 벌떡 일어섰다. 어지간히 답답한 모양이었다.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그는 두 시간 가까이 자신의 택시를 찾아 시내 곳곳을 뒤졌다. 이곳은 경찰도, 보험 회사도, 운수 회사는커녕 통화 자체가 안 됐다. 태훈은 그가 딱해 보였으나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지금 그들에게 시급한 문제는 택시 따위가 아니었다.

“일단, 그곳에 가 봐야 알 것 같습니다.”

“까짓, 속는 셈 치고 하루 지내 보자고. 돌아갈 수도 있다면서요.”

김이 양손을 바짓단에 슥 문지르며 일어서더니 편의점 안으로 들어갔다. 잠시 후 그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돌아왔다.

“좋구만. 술도 공짜, 담배도 공짜, 그것까지도 공짜. 야, 괜찮네.”

김은 담배와 음료수를 내밀며 아예 식당으로 옮기자 했다.

“해가 중천에 뜨기 전에는 그 앞에 도착해야 한답니다.”

“거 웃기네. 해가 어디쯤 떴는지는 어떻게, 아니 뭐, 차장님에게 하는 말은 아니고. 정 형은 어때요. 이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요?”

태훈은 김이 건넨 음료수를 손에 쥔 채 택시기사를 바라봤다. 정 씨는 자신의 앞쪽에 세워 둔 담뱃갑을 손가락으로 밀어냈다.

“끊었어요.”

김과 태훈은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잠시 후 정 씨는 담뱃갑을 들어 신경질적으로 포장을 뜯어 버렸다.

“차장님, 그런데 일이라는 건 대체 어떤 걸까요?”

“글쎄, 가 봐야 알겠는데요. 저 역시 그 여자에게 자세히 듣지는 못했어요.”

“처음부터 그년이 수상하기는 했어. 무슨 일이 꼭 일어날 것 같았다고.”

태훈은 다시 정 씨의 얼굴을 살폈다. 담배를 깊게 빨아들이는 그의 눈가, 잔주름의 안쪽 눈시울이 떨리고 있었다. 그는 눈을 찔끔 감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곧 상의 호주머니에서 반으로 접어 뭉쳐 둔 지폐를 꺼내 셈을 하기 시작했다. 두세 번을 반복했다. 정 씨의 얼굴 너머로 시꺼멓게 무리 지어 몰려드는 구름이 보였다. 사위가 조금씩 어둑해지고 있었지만 해는 남중에 이른 것도 같았다. 태훈은 일어서며 말했다.

“어쨌든, 그곳에 사람들이 모인다고 했으니 일단 그쪽으로 가 봅시다.”

태훈이 앞서고 두 사람은 나란히 뒤를 따랐다. 김의 말이 많아질수록 정 씨는 말을 아꼈다. 김은 한창 진행 중인 자신의 사업에 대해 늘어놓았다. 요지는 간단했다. 자금만 되면 문제없다는 것. 다들 한방을 노리고 일을 벌인다 하지만 결국 돈이 돈을 부르는 거지 사업성은 개뿔 모두 나자빠진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정씨는 한숨을 내쉬더니 김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되물었다.

“그렇죠? 나 같은 놈은 아무래도 안 되겠죠?”

태훈은 멈춰서 정 씨를 뒤돌아봤다. 김이 너스레를 떨었다.

“무슨 말씀을. 아파트 중도금은 대출받으면 된다니까요. 주택 담보는 이자도 낮고, 전매하지 말고 일 년만 붙들고 있다가 팔면 일 억 이상 떨어집니다. 전세 준 돈으로 대출금 갚고, 착착 맞아떨어진다니까. 아이고, 이 답답한 양반, 어제 몇 번이고 설명해 드렸잖아요.”

정 씨는 뭐라 말을 이으려다 곧 그만두었다. 그는 제 나이보다 훨씬 들어 보였다. 택시만 팔 년 했다는데 개인택시 자격을 받는 것만으로 큰 성공이라 생각한다고 했다. 태훈은 그의 낡은 구두코를 내려다보며 김의 말을 거들었다.

“되파는 게 꼭 나쁜 것은 아닙니다. 불법도 아니고요. 맞는 평수를 골라 차후에 장만하시면 되죠.”

정 씨는 고개를 끄덕이기는 했지만 태훈의 말을 귀담아듣지 않는 눈치였다. 태훈과 눈이 마주친 김은 어쩔 수 없다는 듯 양 손바닥을 내보이며 고개를 흔들었다. 정 씨는 허리춤에서 짤랑거리는 열쇠꾸러미를 쥐어 보더니 다시 한 번 한숨을 내쉬었다.

여자가 말한 주유소 앞 대로에는 두 대의 대형버스가 정차해 있었다. 몇 사내들이 차에 막 오르는 중이었고 그들을 통제하는 것으로 보이는 남자가 서 있었다. 그는 명단으로 보이는 인쇄물을 들고 태훈 일행의 얼굴을 확인하더니 버스에 오르라는 손짓을 했다. 김이 앞장서 버스에 올랐다. 정 씨가 잠시 주저하며 태훈을 돌아봤지만 태훈은 딱히 해 줄 말이 없었다. 그들이 자리를 채 잡기도 전에 버스는 굉음을 내며 출발했다. 김은 어떤 남자의 옆자리에 앉아 이것저것을 캐묻기 시작했고 태훈과 정 씨는 버스의 맨 뒷자리로 가서 앉았다.


“금을 수확한다는데, 금이 쌀도 아니고 무슨 소린지 원.”

그들은 기다란 대열에 합류했다. 줄지어 선 사내들은 조합이라 불리는 건물 안으로 차례차례 들어가고 있었다. 김은 함께 앉았던 남자에게서 얻은 정보가 그뿐이라면서 돌부리를 툭툭 걷어찼다.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던 김이 정 씨에게 대뜸 물었다.

“정 형은, 여기, 어때요?”

“뭘 말이오.”

“잘 생각해 봐요. 뭐든지 공짜라잖아. 일은 시키는 대로 하면 되고. 똑같은 것 아니야? 정 형은 밖에서 왜 일을 했어요? 돈이 있어야 집도 사고 차도 사고 결혼도 하고 애들도 키우고 뭐, 어차피 다들 그런 거잖아. 그런데, 봐요. 여긴 다 있어. 굳이 아등바등할 이유가 없다, 이거지.”

“글쎄요. 나는 잘 모르겠네요. 뭐가 좋다는 건지.”

그들은 조합의 출입구에 다다랐다. ‘채금조합’이라 쓰인 현판을 보더니 김이 고개를 내저었다.

“말 같은 소릴 해야지.”

출입구 앞에는 버스를 인솔했던 사내가 책상 옆에 선 채로 다시 한 번 사람들의 이름과 얼굴을 확인하고 있었다. 책상에 앉은 사내는 확인 절차를 마친 남자들에게 가방 하나씩을 지급했다. 가방을 받아든 사내들은 우측으로 난 통로 안으로 사라져 버렸다. 태훈 일행이 통로에 들어섰을 때 후끈한 열기가 밀려들었다.


태훈은 허공에 걸린 무지개를 보았다. 엄청난 물보라 속에서 피어오르는 무지개, 숱한 사내들의 머리 위로 걸린 무지개가 나타났다 사라지고를 반복했다. 태훈은 그것이 그들로부터 분출된 것이라고 생각했다. 물보라는 사내들의 몸으로부터 시작되고 있었다. 마치 바위처럼. 그들은 두 다리를 붙박고 선 채 굽이쳐 흘러내려 오는 계곡물과 싸우고 있었다. 살풍경한 모습이었지만 왠지 기시감이 느껴지기도 했다.

태훈이 바라본 장면의 배경은 빽빽한 수풀뿐이었다. 세 남자가 그때껏 본 적 없는 밀림이 시계를 장악하고 있었다. 태훈은 정 씨와 김의 표정을 살폈다. 정 씨는 눈살을 찌푸리며 계곡의 상류 쪽을 살피고 있었고 김은 이미 물 가까이로 다가가고 있었다.

모자와 콧수염만 달아 놓으면 금세라도 ‘슈퍼마리오’로 변신할 것만 같은 사내들의 회색 뽀빠이 바지는 우스꽝스러웠다. 하물며 무릎까지 올라오는 장화라니. 태훈은 고개를 숙여 자신의 차림을 살폈다. 정 씨에겐 그 차림이 어울려 보였다. 김은 거침없이 물로 들어가 양손을 질러 넣더니 손어림으로 진흙 덩어리를 훑고 있었다.

“에이, 아무리.”

김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사금이군요.”

처음, 탈의실 바닥에서 반짝이는 것을 봤을 때, 정 씨는 이미 같은 말을 했다.

그들은 다시 주위를 빙 둘러보았다.

온통 흙탕물로 변해 버린 물속에서 사내들은 기다랗게 펼쳐진 그물망을 들어올렸다. 그물에는 일정 거리마다 대나무 홈통이 매달려 있었다. 김은 무리지어 일하는 사내들 곁으로 다가가 홈통 하나를 들어 안을 들여다보더니 작은 그릇을 꺼내 들었다. 김이 태훈과 정 씨에게 황급히 손짓을 했다.

“이게 뭐요?”

“함금사니(含金砂泥).”

검게 그을린 얼굴의 사내는 힘껏 그물을 당겨 올리며 대답했다. 그는 동료들과 그물 하나를 맞들고 뭍으로 올라서며 가래침을 뱉었다.

김이 내보인 그릇 안에는 흙탕물로부터 걸러진 사금이 고스란히 모여 있었다.

“사실이구만.”

정 씨는 나직하게 말하며 엄지와 검지로 사금을 비벼 보았다.

“어마어마하겠는걸.”

김은 위로부터 시야에 들어오는 아래까지 길게 계곡에 걸쳐 대형을 갖춰 일 하는 사내들의 수를 헤아리기 시작했다.

“당신은 저 위쪽으로 올라가야 합니다. 맨 꼭대기요.”

인솔자가 어느새 등 뒤로 다가와 말했다.

“저 말씀입니까?”

태훈은 작업장을 각각 달리 배정하리라는 여자의 말을 떠올렸다.


얼마나 걸었을까. 태훈은 문득 훌쩍 지나 버린 몇 년을 되새겨 보았다. 외국계 투신사에서 이 자리에 오르기까지 보낸 시간은 그에게 썩 보람이 있었거나 그렇다고 고생스럽던 시간만은 아니었다. 그는 다만 한눈팔지 않고 달려왔을 따름이었다. 이만 하면 되겠거니 생각해 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많은 사람을 만났지만 모두 자신보다도 상위의 사람처럼 느껴졌다. 돌이켜 보니 지난 몇 년 동안 자신을 지탱해 준 것도 바로 그들이었다.

태훈은 계곡을 거슬러 오르며 사내들의 얼굴을 살폈다. 혹 아는 얼굴이 있을 것만 같았다. 언제부턴가 태훈의 주변에서 사라져 버린 사람들, 동료나 거래처이거나 고객이거나 하는, 그들이 이곳에도 있을 것만 같았다.

상류가 얼마만큼 남았느냐고 묻자 한 사내가 손가락을 들어 방향만 가리킬 뿐 누구든 묵묵히 일만 하고 있었다. 상류로 갈수록 그물은 작아졌고 매달린 홈통의 수도 줄어들었다. 갈수록 인적이 드물었다.


사위를 가로막은 밀림 사이로 세찬 물소리가 들려왔다. 폭포 소리처럼 들렸다. 한 사내가 작고 평평한 바위에 걸터앉아 있었다. 등산모를 쓴 사내의 옆얼굴로 희끗희끗한 구레나룻이 보였다. 그는 밑에서 보았던 함금사니를 오른손에 들고는 다른 손에 든 그릇 속으로 계곡물을 퍼 담고 있었다. 무슨 짓인가 싶었다.

“상류는 멀었습니까?”

사내가 태훈을 돌아보더니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곧 폭폽니다. 어제 오신 양반인가 보오.”

그렇다고 대답하며 태훈은 그의 곁으로 다가갔다. 여러 굽이 감돌던 물길은 상당히 좁아져 작은 내를 이루고 있었다. 사내의 등 뒤를 지나치던 태훈은 무심코 사내의 손에 들린 바가지 안을 보고 멈춰 섰다. 그는 물을 퍼 올리는 것이 아니라 사금을 뜨고 있었다. 바가지에는 사금이 한 가득이었다. 사내는 손동작을 멈추고 태훈을 향해 돌아서더니 그릇을 뭍에 내려놓고는 천천히 태훈의 표정을 살피는 듯했다. 그는 번갈아 양 손목을 쥐고 천천히 돌리면서 말했다.

“놀라기는. 여기부터는 물과 그놈들만 걸러내면 됩니다.”

“그놈이라뇨?”

“가 보면 아실 게요.”

그는 누가 일부러 비스듬히 올려놓은 듯한 모자를 고쳐 쓰며 고갯짓으로 인사를 했다. 무어라 말을 더 이은 것 같았는데 물소리에 묻혀 그의 목소리가 잘 들리지 않았다. 다시 가려던 걸음을 멈추고 태훈이 물었다.

“이 산은, 산 이름이 뭡니까.”

“무산이라 불러요. 무당 무(巫)자(字)를 쓰고. 광주산맥 끝자락이지. 참, 그것보다 예서 식사를 하고 가세요. 끼니 때가 된 듯하니.”

태훈은 손을 내저었다. 탈의실에서 가방 안에 들어 있던 도시락을 처음 봤을 때 그는 쓰레기통에 처박아 버렸다. 어차피 이곳은 의심 투성이었다. 그에게 더는 묻고 싶지도 않았다. 뒤돌아보지 않고 걸음을 옮겨 깎아지른 듯한 절벽을 끼고 돌자 다시 벼랑길로 이어지며 골짜기가 나타났다. 그 순간 태훈은 나지막이 탄성을 뱉었다.

태훈의 시선을 잡아 끈 것은 거대한 폭포였다. 30미터는 족히 되는 높이였다. 홀로 물을 쏟아내고 있는 폭포와 그 아래 커다란 못은 두 산세가 접하는 지점처럼 보였다. 맞은편에서 아래로 떨어지고 태훈이 올라온 쪽에서 떠받는 형국이었다. 그곳에서부터 격류가 일기 시작하더니 이내 여러 갈래로 줄기가 갈라지며 힘이 쇠퇴해지고 있었다.

태훈은 주위를 살피다가 폭포 위쪽을 오랫동안 바라보고는 흠칫 놀랐다. 그곳에는 움막처럼 보이는 구조와 청홍색의 기다란 헝겊오라기가 바람에 나부끼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태훈이 내려온 길과 마찬가지로 폭포 우측에 길이 나 있었다. 길 양측에는 일정 간격을 두고 어른 키만한 장대가 세워 있었고 그 끝에는 불을 밝힐 요량인지 홰가 장착되어 있었다. 태훈은 길을 따라 한참을 더 올라갔다.

폭포의 위에는 수천 년 혹은 그 이상 산으로부터 흘러내렸을 토사가 모여 넓은 분지를 이루고 있었다. 다만 이제까지와는 달리 사금의 흔적을 전혀 찾을 수 없었다. 무리해서 걸었던지 무릎이 후들거리고 허벅지가 캥기기 시작했다. 태훈은 숨을 고르며 움막 가까이 다가갔다.

“이곳에서 뭘 하십니까?”

“낚시를 해야죠.”

뜻밖에도 노인은 낚시도구를 준비하고 있었다. 언뜻 보기에 노인의 낚싯대에는 바늘이 아닌 길쭉한 어망이 달려 있었다. 그것은 태훈의 팔이 들어가고도 남을 깊이였다. 노인은 능숙하게 두 개의 낚싯바늘을 어망 입구에 건 뒤 몇 번 잡아당겨 보고는 낚싯대를 내려놓았다. 노인의 발치에는 여남은 낚싯대들이 차곡차곡 쌓여 있었다.

“저는 무슨 일을 해야 합니까?”

“사금을 깨는 일인데, 지켜보기만 하면 되오. 언제부턴가 스스로 깨져 버리더라구.”

노인은 턱짓으로 폭포가 시작되는 쪽을 가리켰다. 서너 평 남짓한 누런 바닥 위로 균열이 생겨 있었다. 노인은 모래 속에 금이 가득해 폭포로부터 떨어져 내리면 된다고 설명을 덧붙이더니 낚싯대를 들고 일어섰다.

“일단 내 하는 일 좀 도와주시구려.”

태훈은 그물과 망태 등속을 들고 노인을 뒤따랐다. 그물은 생각보다 몹시 무거웠다. 노인은 상류 계류를 향해 걸었다. 태훈은 맨 꼭대기가 어디쯤일지 궁금했지만 묻지 않았다. 슬슬 강 속으로 들어가던 노인은 물속을 향해 거무튀튀한 손가락을 들어 가리켰다. 물속에는 돌무덤이 쌓여 있었다. 높이는 무릎보다 높았고 지름은 대략 1미터 가량 돼 보였다. 엉덩이가 잠길 만큼의 수심이어서 태훈은 더욱 의아스럽다는 얼굴로 노인을 바라보다 돌멩이를 향해 팔을 뻗었다.

돌멩이는 누가 빚기라도 한 것처럼 동글동글했다. 물살이 세지 않아 곱게 잠겨 있었던 듯 수초가 잠뽁 붙어 있어 매끄러웠다.

“어름치의 산란탑이오.”

노인의 말을 듣고 다시 한 번 살펴보니 맑은 물속에서 반짝이는 무언가가 휙 사라져 숨는 것처럼 보였다. 산란탑은 마치 살아 움직이듯 일렁이고 있었다.

“사람이 쌓는 것은 분명 아닌데, 신기한 일이야. 그렇지 않소? 젊은 양반.”

노인은 낚싯대를 산란탑 주위로 빙 둘러 하나씩 꽂으며 말을 이었다.

“큰 놈은 한 척이 넘어요.”

손짓으로 망태를 넘겨받은 노인은 이어 망태를 두르더니 그물을 펼치자 했다. 태훈과 노인이 맞잡은 그물은 길이가 상당해서 대부분의 물길을 막고도 남았다.

“치어를 잡는 겁니까?”

“그놈들이 저쪽으로 건너가지 않게 막는 일만 하는 거요. 큰놈들은 어차피 죽을 테니 낚시로 건져 올리고.”

“알을 낳고는 죽습니까?”

“그게 섭리야. 그놈뿐만 아니라 연어도, 피라미도, 은어도 모두 그렇지. 생전에 몇 번이나 볼까. 온통 금빛으로 반짝이는가 하면 끄리 같은 놈들은 요동을 치고 피라미들은 물을 탁하게 흐려 놓고 그걸 하지.”

태훈은 고개를 끄덕였다. 노인은 이만 하면 되겠다며 다시 뭍으로 올라갔다. 태훈은 손에 쥐고 있던 돌멩이를 슬그머니 내려놓고 노인을 뒤따랐다.

“저는 제가 왜 이곳에 왔는지 모르겠습니다.”

움막에 들어서자마자 태훈이 말했다.

노인은 낚시로 건져 올린 것들을 망태에서 꺼내 놓고 있었다.

“마음에 들지 않으면 돌아가면 되오.”

“언제부터 이곳에 사셨습니까?”

태훈은 노인의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이곳에서 났으니 한참 되어도 됐지. 금점만 하며 살았는데, 들어오는 사람이 많을수록 그 해에는 도통 사금이 안 나는 거야. 이래 뵈도 이 마을이 일제 때부터 전기가 들어왔어요. 한때는 금광을 하겠다고 이 오지까지 물밀 듯 모여 들더니 이십 년 전부터는 뚝 끊겼지. 그래 젊은 양반처럼 드문드문 들어오고는 하는데, 오래 못 가. 금방 죽는 소리를 하지.”

마치 자랑거리라도 된 것처럼 노인은 말하는 중간 미소를 짓기도 했다.

“제가 궁금한 건……, 사금을 어디에 쓰는지, 내다 파는 겁니까?”

“팔지 않아요. 알다시피 밖으로 나갈 마음은 다들 없으니까.”

노인의 표정에는 거짓이 없어 보였다.

“그렇다면 사금은 뭣 하러 캐는 건가요?”

“그야 내 일이니까. 말 배우고 걷기 시작할 때부터 아버지를 따라 산을 오르락내리락했어요. 기술이야 이것저것 배웠대도 이것만큼 신간 편한 일도 없고. 이 마을이 원래 그래. 한치 마을 하면 금, 예전에는 다 그렇게 통했대두.”

노인은 추억을 회상하듯 멍한 눈빛으로 허공을 응시했다. 태훈은 자신도 모르게 언성을 높였다.

“그 금들을 팔아서 마을 사람 모두가 물건을 공급 받는 것 아닙니까. 돈이 필요 없다는 말도 이젠 알겠습니다. 말 그대로 물물교환을 하면 되는 일 아닙니까.”

“아, 글쎄. 누가 내다 팔든 말든 그건 내 알 바가 아녜요. 댁 같은 타지 사람은 그걸 몰라. 금을 팔아서 돈이라는 걸 쌓아 놓고 산다고 합시다. 그것, 소용없는 짓이야. 사람 사는 데 필요한 건 따로 있는데 뭣 하러. 사람 욕심이 변고야. 욕심이 잦아들면 정작 원하는 걸 모른다니까.”

나름 마을의 시스템을 알아챘다 생각했지만 태훈은 달리 할 말이 없었다. 태훈은 움막을 나와 멀리 보이는 산봉우리를 바라보며 멈춰 섰다. 세상사에 휑한 노인인지 철없는 노인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 어느덧 해가 기울고 있었다.


“금을 어디로 옮기는지는 알겠어요?”

“그건 택시기사가 알 것 같아요. 그이가 수레로 나르는 일을 한다 했거든.”

그때 멀찍이 정 씨가 찔꺽찔꺽 소리를 내며 걸어오고 있었다. 정 씨는 하류에서 오는 길이라 했다. 김은 황급히 그에게 달려갔다. 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를 몇 번 내저었다. 태훈의 근처까지 왔을 때 대뜸 정 씨가 말했다.

“오늘 밤에 돌아갑시다. 여긴 역시 내가 있을 곳이 아니에요.”

화가 난 것인지 겁을 집어먹은 것인지 알 수 없었다. 태훈과 김은 무턱대고 물을 수는 없어서 그의 눈치를 살피기로 했다. 시간은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저녁을 먹는 동안에도 정 씨는 여전히 말이 없었고 김은 그를 떠 보려는 듯 일은 어땠냐는 둥 자신이 일한 곳은 진창이어서 몹시 힘들었다는 둥 너스레를 떨었다.

태훈은 함금사니를 떠올렸다. 물을 뜨듯 퍼 담기만 하면 되는 엄청난 양의 사금이 도대체 어디로 가는지 궁금할 따름이었다. 태훈과 김은 여러 사업 방식을 따지며 이 마을의 비밀에 대해 의논하는 중이었다.

“내 말을 못 믿겠지만.”

정 씨는 소주 한 잔을 들이켜더니 입을 열었다. 김이 무엇이든 말해 보라며 재촉했다.

“아닙니다. 어차피 나는 나갈 테니까.”

그가 힘없이 고개를 숙였다가 다시 태훈과 김을 번갈아 바라보며 물었다.

“같이 가시는 거죠? 꼭, 말입니다.”

김은 호기를 부리며 말했다.

“가죠. 갈 때 가더라도 여기서 금을 좀 가져가면 좋으련만. 정 형 택시로 한 차만 실어 가도.”

“그건 안 됩니다!”

별안간 정 씨가 소리쳤다. 낯빛이 온통 붉어졌다가 근심스러운 얼굴로, 다시 붉어지며 정 씨의 표정이 여러 번 교차했다. 그는 외려 무안했는지 얼버무리며 덧붙였다.

“돈은 충분한 양반들이, 금은 뭣 하러요. 그냥 돌아가는 게 좋겠습니다.”

태훈은 정 씨에게 속내가 따로 있음을 간파했지만 더는 따지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 순간 김이 넉살 좋게 그러자고 대답하면서 바지주머니로부터 무언가를 꺼내더니 조심스럽게 쥔 손을 펴 보였다.

“아니, 이봐요!”

별안간 정 씨가 악청을 질렀다. 놀란 김이 정 씨가 소리치는 것을 만류하며 달려들더니 두 남자가 껴안는 상태로 뒹굴었다. 세 살이나 어리다는 김이 외려 힘이 부치는 모양이었다. 먼저 몸을 일으킨 정 씨가 언제 그랬냐는 듯 숨죽여 말을 이었다.

“그걸 어쩌자고 가지고 온 겁니까? 당장 내버리세요.”

“알았어요. 알았어요. 허허. 이 양반, 참……. 다시 거기에 가면 버릴 게요. 갈지 모르겠지만.”

정 씨는 꼭 버리라고 몇 번을 당부하더니 연이어 석 잔의 술을 비웠다.

“그래, 금은 어디로 옮기던가요? 참나, 화 좀 푸시고. 정 형이 그것 하고 온 거 아뇨.”

정 씨의 빈 술잔에 소주를 따라주며 김이 말을 이었다.

“모르겠습니다. 옮기는 건지, 버리는 건지.”

“버린다고요?”

“그러게 말입니다. 죄 강 속으로 흘려 보내니.”

태훈은 그 순간 철없는 노인이 떠올랐다. 노인이라면 설명해 주리라 믿었다.

“기껏 금을 퍼 나르고는 강에 묻는다. 그것 참, 김 차장님은 믿겠어요?”

김은 정 씨의 대답이 마뜩찮다는 표정으로 태훈에게 물었다. 태훈은 고개를 가로젓긴 했지만 적어도 이곳에선 가능한 일이라고도 여겼다.

“그건 그렇고. 정 형, 뭔가 수상해요. 왜 갑자기 돌아가자는 거요.”

“그건……, 돌아가면, 장가도 들어야겠고, 뭐 할 수 있을지는…….”

김이 호탕하게 웃었다.

“임자가 있긴 있으신가 보네. 어제 그렇게 빼시더니만.”

“아니, 뭐 꼭 그런 건 아니고…….”

“생각보다 순정파십니다. 그럼요, 그게 제일 중요하죠.”

둘은 다시 술을 주고받으며 웃어댔지만 태훈은 정 씨의 말이 석연하지 않았다. 분명 그가 본 무엇이 있을 터였다. 한편으로 태훈은 여자가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미 어둠이 내린 지 오래였다.


“이곳이 출구예요. 그건 그렇고 다들 이해할 수가 없네요.”

여자의 뒤로 평원이 펼쳐졌다. 다만 평원은 달빛을 고스란히 반사하고 있는 흰 평원이었다. 풀도 나무도 보이지 않았다. 여자는 소금 평원이라 말했다. 정 씨의 말대로라면 이 소금 바닥 아래 어마어마한 양의 사금이 침잠되어 있을 터였다. 태훈이 정 씨의 표정을 살피자 그는 시선을 어디에 둘지 몰라 허둥거리는 모양이었다. 김은 길이 이곳뿐이냐며 투덜대기 시작했다.

여자가 정말 돌아가겠느냐 되물어 보았지만 그들은 모두 같은 대답이었다.

“노인은 분명, 마음에 들지 않으면 돌아가라고 했습니다.”

태훈의 말에 여자는 코웃음을 쳤다. 여자는 김을 향해 물었다.

“그쪽부터 말해 보세요. 왜 가겠다는 거죠? 정확히 말씀하셔야 해요. 경우에 따라 영영 돌아가지 못할 수도 있으니.”

“그건 댁이 알 바 없고. 말했지만 난 중요한 일이 있다고. 여기 김 차장님이 돌아간다면 나도 당연히 가는 거지. 안 그래요? 그리고 왜 어제랑 말이 자꾸 바뀌는 거야? 경우에 따라? 뭘 따라?”

김이 태훈을 향해 한쪽 눈을 찡긋거렸다. 태훈은 그와는 반대로 생각했다. 돌아가게 되면, 제일 먼저 그에게 리베이트를 돌려주겠노라 마음먹었다.

“아저씨는요?”

여자가 정 씨를 향해 사납게 물어보았다.

“나, 나는 뭐, 아가씨도 잘 아시겠지만, 약속한 것도 있고, 아 아니, 여기 있는 이 분들도 알겠지만 내일 모레면 아파트가 분양되는데, 그것 대출도 받아야 하고, 결혼할 사람도 있고, 아 아니 뭐, 꼭 이곳이 싫다기보다는, 나 같은 놈에게 어울리지도 않아요. 종일 차 안에 있다 보면 답답하기도 하지만, 그게 내 일이고, 뭐니 뭐니 해도 돈이 척척 들어와야 제 맛인데 여긴 또 그렇지 않고, 선생님들은 이해 못할 겁니다. 우리가 하루 벌어 하루 사는 사람 같아도 다들 계획이 있고 생각이 있다, 이 말입니다. 아니 뭐, 다 필요 없는 말이고, 우리는 거저 준대도 하루아침에 다 누리고 사는 게, 무섭습니다. 좋은 일만 있다 보면 또 무서운 일이 생기는 거 아닙니까.”

“무서운 일이라뇨? 무슨 일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기다렸다는 듯 태훈이 그의 말을 끊자 정 씨는 당황하는 눈치였다. 그는 그냥 돌아가자 했을 때와 비슷한 표정을 지었다.

“재수 없는 일이 생기기 마련이라, 뭐 그런 말 아닙니까?”

김이 제멋대로 끼어들더니 여자를 향해 말했다.

“아가씨, 평안 감사도 저 싫으면 못 한다고, 여기 정 형 말이 딱이네. 사실 여기 있으나 원래대로 돌아가나 다 마찬가지 아뇨? 어차피 일은 해야 한다면서. 기왕이면 내 좋은 일 하고 살아야지. 돈 벌자고 하는 일이지만 또 돈을 못 벌면 어때. 인생 뭐 있어요? 후회 없이 딱 한 번 사는 건데. 망해 자빠져도 내가 자빠지는 거고. 또 시작하면 되는 거고.”

“솔직히들 말해 보세요. 왜 이곳이 싫다는 거죠? 이번이 마지막 기회에요.”

여자가 태훈을 빤히 쳐다보며 말했다. 태훈은 이들처럼 딱히 내세울 말이 없었다. 돌아가는 게 옳다고 확신할 수도 없었다. 다만 이제까지 쌓아 온 자신의 것을 모두 내팽개쳐 둔 채 이곳에서 산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고 생각했다. 한편으로 정 씨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가 무언가를 숨기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에겐 이곳이 과분한 곳일지도 모른다는 게 태훈의 판단이었다.

“더 말할 것도 없어요. 길 안내를 해요, 아가씨. 우린 돌아갈 테니.”

태훈은 여자의 마지막, 이라는 말과 그 순간 흠칫 놀라면서도 반색이 됐다가 다시 표정을 감추는 정 씨의 얼굴을 놓치지 않았다. 무언가 잘못 돌아가고 있다는 예감이 들었다.

“마음을 바꿨어요. 난 여기 남겠습니다.”

태훈이 당신도 남겠느냐는 표정으로 김을 바라보자 그는 여자에게 버럭 화를 냈다.

“무슨 수를 쓴 거야! 어서 우릴 보내 주라고!”

그는 곧 여자에게 달려들 듯 일어섰지만 정 씨는 묵묵히 앉아 있었다. 그는 얼마간 고개를 숙이고 있더니 태훈과 눈이 마주쳤다. 태훈을 향해 도움을 청하는 듯한 눈빛이었다.

“왜 그렇게 쳐다보십니까?”

“아닙니다. 그저…….”

정 씨가 무슨 말을 덧붙이려다 여자의 눈치를 살피고는 그만 두더니 여자를 향해 말했다.

“오늘 밤에는 갈 수 있는 거요?”

“물론이죠. 그런데……,”

“당신 말은 더 들을 필요도 없어. 이봐요 김 차장, 김 차장님. 같이 돌아가야 하잖습니까?”

김은 울상을 짓다시피 하며 얼굴을 찌푸렸다.

“글쎄요. 저는 이곳도 그다지 나쁘지는 않습니다만.”

“이 분이 돌아가지 않겠다면 그쪽 분도 남으셔야겠네요.”

여자가 미소를 지었다. 태훈은 아무려나 상관없다는 의미로 웃어 보였다. 여기서 여자에게 지게 되면 정말 끝장이라고 생각했다. 김의 얼굴이 점차 시뻘겋게 달아오르기 시작하더니 갑자기 악을 써댔다.

“이봐 김 차장, 너 이 새끼,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는 거야. 그 따위로 말할 거면 얼른 내가 준 돈부터 토해 내. 내 돈부터 내놓고 지껄이라고. 이 새끼야!”

태훈은 시큰둥하게 받아들일 뿐이었다. 천천히 지갑을 꺼내 수표를 내밀자 김은 신경질적으로 낚아채 갔다. 태훈은 여자를 향해 너그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하시던 말씀 계속해 보세요.”

“글쎄요. 이제는 필요 없을 것 같은데.”

태훈은 정 씨가 떠나 버리기 전에 한 가지 확인해 두고 싶은 점이 떠올랐다.

“그러니까, 기사님은, 낮에 무언가를, 보기는 본 모양이군요.”

“아, 아니, 저는, 아무것도…….”

“그래요. 더는 묻지 않겠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 여자 분이 우리를 곱게 보내 주지는 않을 거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숨김없이 말해 보세요.”

여자가 한 손을 내밀며 정 씨의 행동을 제지했다.

“그렇지는 않아요. 간단한 확인만 하면 됩니다. 보내 드리는 데는 문제가 없어요.”

“좋아, 그럼 갑시다.”

김은 금방이라도 울어 버릴 것 같은 표정으로 태훈을 노려봤다. 정 씨는 조용히 고개를 수그리고 앉아 있을 뿐 입을 굳게 닫아 버렸다.

“한 가지만 알아 두세요. 만약 여러분의 마음속에 조금이라도 이곳에 대한 미련이 있다거나 하면 여러분은 돌아갈 수 없습니다. 그것만은 확실하게 말씀드릴 수 있어요.”

“누구 말이오? 내가? 허허, 이 여자 좀 보게.”

김은 웅크려 앉아 담배를 피우다가 당장이라도 여자에게 달려들 듯 몸을 일으켰다. 정 씨를 향해 한 팔을 뻗은 김이 성큼성큼 걸어 나갔다.

“어서 가자고요.”

정 씨는 자꾸만 태훈과 여자의 얼굴을 번갈아 쳐다보며 아름작거렸다. 무슨 말을 하려는 듯 입을 열었다가 다시 입술을 깨물고 고개를 뒤로 한 채 걷다 태훈의 마른기침에 주춤 걸음을 멈췄다. 그러더니 별안간 잽싼 동작으로 여자에게 다가와 말했다.

“이봐요, 나랑 약속한 건…….”

여자는 아주 천천히, 고개를, 두 번, 가로저었다. 그뿐이었다. 그랬는데도 정 씨는 크게 실망한 듯 그 자리에 무너져 앉아 버렸다.

그 사이 김은 진흙땅과 소금 평원의 경계를 넘어 저곳으로의 걸음을 걷기 시작했다. 한 걸음, 두 걸음, 김의 걸음걸이는 경쾌했다. 제자리로 돌아간다는 기쁨 혹은 열망이 그의 발걸음에서 뭉텅이져 떨어져 내리는 것만 같았다, 그 순간 태훈은 자신에게 수표를 건네던 김의 비굴하면서도 해사한 표정을 떠올렸다.

얼마쯤 걸었을까. 김이 이쪽을 돌아보고는 정 씨를 향해 소리치며 손을 흔들어댔다.

“어서 와요. 정 형. 어서 와요! 가서 장가도 가고 아파트도 사고 택시도 신나게 몰아야지! 그리고 너 이 새끼! 두고 보자고!”

달빛이 강렬해서였을까. 희디 흰 소금의 빛과 어우러진 김의 모습이 정말이지 아주 짧은 한 순간, 소금 인형처럼 하얗게 변하더니 빛의 장막 속으로 숨어들었는지 아니면 빛으로 소금으로 화한 것인지 모르게 말 그대로 사라져 버렸다.

여자는 옅게 혀를 찼고 정 씨는 앉은 자세로 반대편을 향해 기어가기 시작했다. 그가 무어라 소리를 질러댔지만 태훈은 도통 알아들을 수 없었다.《문장 웹진/2007년 1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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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하는 마음 없이

좋아하는 마음 없이 김지연 안지는 이른 결혼을 했는데 실패로 끝났다. 아니, 그걸 실패라고 할 수 있을까? 이혼을 한 건 사실이었지만 안지는 자신의 인생 여정에서 그때 이혼한 일을 실패라고 단정 지을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 뒤로 더 행복해졌다고 할 수는 없을지언정 조금 더 자기 자신에 가까운 삶을 살게 된 것은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혼이라는 단어를 떠올릴 때면 늘 그에 대해 변호하고 싶은 여러 말들이 떠오르곤 했기 때문에 처음부터 결혼 같은 건 하지 않는 편이 더 나았을 거라는 생각을 하곤 했다. 때문에 이혼했다는 사실은 안지의 비밀은 아니었지만 먼저 나서서 밝히지도 않았다. 어릴 때 안지는 무척 전형적인 사람이 되고 싶었다. 구체적으로 그런 표현을 떠올리지는 않았다. 그저 자신이 속해야 하는 집단에서 튀지 않는 사람, 아주 평균적인 사람이고 싶었고 그런 사람이기 위해서 부단히 노력을 했다. 찬반투표를 할 때면 눈치를 보다가 다수의 의견에 따라 슬그머니 손을 들었다. 친구가 좋아하는 가수를 따라서 좋아하고 친구의 것과 비슷한 브랜드의 신발을 사서 신었다. 친구들이 싫어하는 선생을 따라서 싫어했다. 사실 안지는 그 선생에게 남몰래 호감을 갖고 있었지만 친구들과 함께 떡볶이를 먹다가 술술 흘러나온 그 선생에 대한 욕을 듣고 재빨리 노선을 바꿔 함께 욕을 했다. 한동안 안지는 수학 시간마다 왜 애들은 저 선생을 싫어할까? 에 대한 답을 알고 싶어서 더 열심히 선생의 행동거지를 살폈다. 수학을 가르친다는 점만 빼면 딱히 나무랄 데 없는 사람이었다. 학생이 쉽게 답할 수 없는 내용을 골리듯 물어보지 않았고 무엇보다 학생들한테 사과를 할 줄 알았다. 뭔가 잘못 알고 섣불리 화를 냈을 때, 그러다 결국 진실을 알게 되었을 때, 다른 선생들은 그러게 헷갈릴 만한 짓을 왜 하고 다니느냐고 도리어 짜증을 부렸는데 그 선생은 재빨리 미안하다고 말했다. 미안하다. 내가 잘못 알았어. 미안해. 가끔 안지는 머릿속으로 그 목소리를 재생해 보곤 했다. 그 때문에 선생이 더 좋아졌지만 여전히 싫어하기 위해 애썼다. 누구나 다 그런 식으로 청소년기를 보내지 않나? 내가 아닌 사람이 되어 보려고 노력하면서? 안지는 대학에 갔고 연애를 했고 졸업을 했고 취직을 했다. 결혼도 했다. 아주 평균적인 삶이었다. 조금씩 빠르기도 했다. 조바심이 나 있었으므로. 자신도 남들처럼 지극히 평범하게 살 수 있다는 것을 빨리 증명해 보이고 싶었으므로. 어느 정도 성공적인 것 같기도 했다. 남편이 바람이 나기 전까지는 그랬다. 식도 올리기 전 임신을 해 낳은 아이가 막 돌을 지난 참이었다. 임신이 아니었으면 결혼까지는 이어지지 않았을지도 몰랐다. 남편은 계속 후회하는 것 같았다. 그때 낙태를 밀어붙이지 않은 것을, 시간을 끌다가 영영 타이밍을 놓쳐버리고 만 것을, 어떤 결단력을 가지지 못한 자신을 자책했을지도 모른다. 그때 뼈저리게 깨달은 바가 있었는지 새로운 여자가 생겼을 때는 안지가 알아차리기도 전에 이혼을 해달라고 요구했다. 겨우 육 개월을 만났을 뿐

  • 관리자
  • 2024-07-01
소금 샹들리에

소금 샹들리에 정한아 호주에 사는 김이 오랜만에 귀국해서 친구들이 다 같이 모이기로 했다. 4명이 만나는 건 대략 7년여 만이었다. 방을 잡고 밤새 보자고 해서 오기 직전까지 망설였는데, 남편이 등을 밀었다. 정민이와 자신에게도 내가 없는 날이 필요하다고 큰소리를 치더니 정말 밤새 전화 한 통 없었다. 친구들과는 대학 동기였다. 전공은 문예 창작이었는데, 나는 2학년까지 다니고 학교를 그만뒀다. 그렇지만 정작 작가가 된 사람은 나뿐이라고 친구들이 투덜거렸다. 나는 작가가 아니라고 아무리 말해도 소용없었다. 그들은 십 수 년 전 내가 낸 단 한 권의 책을 기억하는 몇 안 되는 사람들이었다. 세 명 모두 미혼이었고, 아이를 가지지 않았다. 놀라울 정도로 예전 그대로인 친구들 사이에서 나만 철 지난 옷차림에 좀처럼 대화에도 섞이지 못했지만, 그런 것 때문에 마음이 상하지는 않았다. 오랜만의 서울 나들이에 술자리도 즐거웠다. 좋은 친구들이었다. 7년 전 정민이 자폐 스펙트럼 장애 판정을 받았을 때 그들은 자신의 일처럼 울어 줬고, 이후에도 종종 아이의 간식과 선물을 집으로 보내 줬다. 서서히 연락을 거둔 것은 내 쪽이었다. 애써 관계를 유지하는 일이 힘에 부쳤을 뿐, 그들에게 섭섭한 마음은 조금도 없었다. 지난 몇 년 동안 나는 집이 아닌 곳에서 밤을 보낸 적이 없었다. 다들 술에 취해서 침대로 간 뒤에도 좀처럼 잠이 오지 않아 휴대폰만 들여다보았다. cctv 속 거실은 엉망이었다. 엎어진 식판, 사방에 흩어진 블록 조각, 길게 늘어진 옷가지들. 남편은 불도 끄지 않고 아이를 재우러 방에 들어간 모양이었다. 나는 정지화면 같은 그 풍경을 한참 바라보다가 해 뜰 무렵에야 겨우 잠이 들었다. 다음날 우리는 점심을 먹고 헤어지기로 했다. 맛집마다 대기가 길어 종로의 좁은 골목을 돌고 또 돌았다. 앞장서 구글 맵을 보며 걷던 김이 갑자기 작은 서점 앞에서 멈춰 서더니 책을 사야겠다고 말했다. 지난 이사 때 내 책을 분실했다는 것이었다. 나는 집에 돌아가서 책을 다시 보내 주겠다고 김을 달랬다. 다섯 평도 안 되어 보이는 그 작은 서점에 내 책이 있을 리는 만무했기 때문이다. 김은 막무가내로 서점에 들어갔다. 할 수 없이 그녀를 따라 들어갔다가 전면 책장에 전시된 내 책을 발견했다. 죽은 친구를 만났다고 해도 그처럼 놀라지는 않았을 것이다. “미애 씨!” 그곳에서 누군가 나를 불렀다. 우아한 노부인이었다. 린넨 바지에 화이트 셔츠, 큼지막한 호른 목걸이를 한 여자는 환하게 웃으면서 나를 바라봤다. “반장님?” 나는 말끝을 흐리며 물었다. 여자는 성큼성큼 내 앞에 다가와서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나를 와락 끌어안았다. 누군가 나를 그렇게 안은 것이 너무 오랜만이라 온몸에 힘이 풀리는 것 같았다. 그녀는 오래전 나와 함께 공부했던 문우였다. H 백화점 문화센터 소설 창작 교실의 반장. 친구들이 책을 구경하는 사이 나는 그녀와 짧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ldqu

  • 관리자
  • 2024-07-01
그동안의 정의

그동안의 정의 최예솔 작정하고 사라진 사람은 작정하고 찾아야만 한다. 나는 윤정수를 작정하고 찾지 않았다. 보통의 남매 사이라는 게 정확히 어떤 건지는 모르겠지만 윤정수와 나를 그냥 보통 남매, 라고 하기에는 좀 어렵지 않을까. 윤정수는 나보다 4년 먼저 태어났다. 그리 적지도, 그리 많지도 않은 애매한 나이 차이 덕분에 윤정수와 나는 딱히 친해지지 못했다. 내가 초등학교에 입학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윤정수는 중학교에 갔고, 내가 중학생이 되었을 때 윤정수는 고등학교에 갔다. 물론 윤정수와 내가 영 친해지지 못한 건 우리의 나이 차이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윤정수는 내게 없는 사람에 가까웠다. 말수도 없고 센스도 없고 자존심도 없고 공부머리도 없고 돈도 없고······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나? 아무튼 남매 사이에 정이라도 있었다면 걱정이라도 했을 텐데 그럴 이유조차 없었다. 쥐뿔도 없는 윤정수니까. 특이사항이라곤 개그맨 윤정수와 동명이인이라는 것 정도밖에 없는. 그러니 윤정수가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집을 나갔다고 해도 이상할 것 하나 없었지. 뭐 내가 찾는다고 윤정수가 나타났을 거라는 보장도 없지만 나는 막연히, 어련히 때 되면 나타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했다. 하지만 윤정수는 죽을 때까지 나타나지 않았다. 물론 내가 죽은 것은 아니다. 윤정수가 죽었다. 내 나이가 이제 서른이니까, 윤정수는 서른넷에 죽었다. 이제 내게 남은 혈육은 없다······ 아닌가? 고모. 그렇게 부르지 마. 왜요. 낯설어. 저도 고모가 낯설어요. 윤현수는 맹랑하다. 윤정수와 장현아의 딸이라고 해서 윤현수. 그거 좀 유치하지 않니? 물었을 때 윤현수는 뭐 어때요 엄마아빠말곤 모르는데, 하고 대답했다. 이제 나도 아는데? 하니까 이젠 고모도 모르는 척해 달라고 했다. 참 나 어디서 이런 게 굴러왔는지. 현수야. 네. 네 엄마 입국 날이 언제라고 했지? 다음 주 토요일이요. 아직 한참 남았네. 고모도 고모 할일을 해요. 시간 금방 갈걸요. 알겠다 그래. 윤현수를 데리고 온 사람은 장현아다. 이제는 나흘쯤 됐으려나. 아침부터 현관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하도 시끄러워서 나가 봤더니 장현아가 윤현수의 손을 붙잡고 서 있었다. 장현아는 다짜고짜 윤정수를 아느냐고 물었고 나는 오랜만에 듣는 윤정수의 이름에 잠깐 벙쪘다가 네, 저희 오빠네요, 하고 대답했다. 조카입니다. 그날 장현아의 대사를 나는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그건 도저히 내가 아는 사람이 뱉을 만한 말이 아니어서 대사라고밖에는 표현할 수 없겠다. 아직도 문득 의심스러울 때가 있다. 윤현수가 정말 나의 조카가 맞고 장현아가 정말 나의 새언니가 맞을까. 가족관계라는 게 그렇게 단순하게 정리되는 거라면 이제까지 윤정수와 나는, 또 윤정수와 나와 우리의 부모는, 왜 이렇게 흩어지거나 죽거나 혼자 남을

  • 관리자
  • 2024-0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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