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밖으로 들어가고 안으로 나가는 방법에 대한 고찰

  • 작성일 2007-12-31
  • 조회수 4,222

 

밖으로 들어가고 안으로 나가는 방법에 대한 고찰




김도언




1.


퀴르르, 퀴르르, 퀴르르.

바늘 끝으로 녹슨 철판을 긁고 있는 듯한 소리 같다. 이를테면 스피커 장치와 연결되지 않은 채로 돌아가고 있는 LP판을 레코드 바늘이 긁고 있을 때 나오는 소리 같다. 귀뚜라미다. 어디선가 귀뚜라미가 울고 있는 것이다. 귀뚜라미 울음소리를 듣는 일이 흔한 일이 아니게 되어 버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나는 귀뚜라미 울음소리를 들을 때마다 그것이 어떤 일의 전조를 깨우는 소리인 것만 같아 마음이 되게 심란해지고는 한다.

 

 

그런데 귀뚜라미는 언제부터 저렇게 울고 있었던 걸까. 마치 오래 전부터 움직이고 있는 시계의 초침 소리가 어느 순간부터 갑자기 들리기 시작하는 것처럼 귀뚜라미의 울음소리 역시 기원이 모호한 사물의 묘한 환각을 안긴다. 귀뚜라미는 아마도 내가 울음소리를 인지하지 못한 사이에 울기 시작했을 것이다. 나는 지금 울고 있는 귀뚜라미가 몇 마리나 되는지도 알지 못한다. 저 울고 있는 귀뚜라미가 무엇 때문에 울고 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 이 시간 귀뚜라미의 울음소리가 내 가슴에 사무치듯이 파고드는 것만큼은 사실이다. 어쩌면 울음이란 이처럼 감각으로 인지되기 이전에 저절로 스며드는 것인지도 모른다.

알려진 것처럼, 울음을 가진 귀뚜라미는 모두 수컷이다. 수컷 귀뚜라미들은 목으로가 아니라 앞날개를 비벼 우는 소리를 낸다고 한다. 그렇다면, 귀뚜라미가 아니라 당신이나 나 같은 사람이 너무나도 통렬한 슬픔에 잠긴 나머지 손뼉을 치거나 비빈다고 가정해 보자. 그렇다면 그 손뼉이 부딪치는 소리를 가리켜 울음소리라고 말할 수 있을까. 나는 그럴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울음이란, 단순히 청각이라는 어떤 감각적 기능으로 인지되는 것이 아니라 슬픔의 정령이 잔잔한 파동을 일으키며 주변의 나른한 질서를 환기시키는 동안 시나브로 전달되는 그 무엇이어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비애에 찬 표정, 절망에 겁먹은 공허한 눈동자, 하얗게 질린 침묵이 어떤 경우엔 울음소리보다도 명징하게 슬픔을 전달하기도 하는 걸 보면, 내 생각은 그다지 틀린 생각은 아닐 것이다.



2.


귀뚜라미의 울음소리가 유독 깊고 처량하게 들리는 지금은 깊은 새벽이다. 나는 도통 오지 않는 잠을 포기하고 책상 앞에 앉아 있다. 컴퓨터 모니터의 한글 창은 하얀 도화지처럼 비어 있다. 마감일이 이제 일주일밖에 남지 않았는데, 나는 청탁 받은 소설을 단 한 줄도 쓰지 못하고 있다. 열흘 넘게 불면만이 계속되고 있을 뿐이다. 나는 두 잔을 마시고 막아 놓았던 소주병의 마개를 다시 열고 한 잔을 따라서 천천히 마신다. 사실, 글이 되지 않을 때 소주잔을 기울이는 것은 나의 풍속에 해당하지 않는다. 다만, 이렇게라도 해 보지 않으면 나 스스로가 백지 앞에서 너무나 무기력한 것만 같아 한번쯤 시도해 보는 것이다. 시계를 보니 세 시를 조금 넘긴 시간이다. 창밖은 공포스러울 정도로 적막하고 그 적막함을 시위하듯 어둠은 사방에 빽빽하게 들어 차 있다. 아, 이 어둠은 어떤 슬픈 얼굴을 떠올려서 허공 속에 그려 보라고 이토록 검은 것만 같다. 내게 슬픈 말들을 건넸던 누군가를 떠올려 손가락으로 가리켜 보라고 이토록 창백한 것만 같다. 나는, 내게 전승된 슬픈 전통들을 생각하기에 지금이 적합한 시간이라고 생각한다. 이 슬픈 불면의 유래는 아마도 내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유구할지도 모른다.

나는 술잔을 내려놓은 손을 키보드 위에 얹어두고 한 자 한 자 타이핑 한다.

“어떻게 밖으로 들어갈 것인가.”

이것은 내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가져 보았던 거룩하고 품위 있는 질문이며, 내가 지금처럼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존재하며 영원의 시간을 꿈꿀 수 있도록 도와 준 불멸의 화두이다. 나는 이 순간 깊고 푸른 밤의 질문을 갖게 되었다.



3.


자신의 몸에 병이 있는지도 모르던 아버지는 돌아가시기 몇 달 전부터 종종 잠이 오지 않는다고 툇마루에 앉아서 마당의 감나무 가지에 걸린 달을 바라보며 술을 드시곤 했다. 나는 당시만 해도 실외에 있던, 다시 말해 대문 옆에 나 있던 화장실에 가다가 몇 번 술병을 기울이는 아버지와 부닥치고는 했다. 그 무렵 나는 군대에 가기 위해 휴학을 하고 집에서 따분하기 이를 데  없는 시간을 보내며 입영 통지서가 도착하기만을 기다리는 처지였다. 낮에는 비슷한 처지의 친구를 만나 도서관에 가서 시집이나 소설을 읽다가 저녁이 오면 당구장에서 당구를 치고 술을 마셨다. 영화관도 수없이 들락거렸다. 그때 자주 어울렸던 친구는, 아버지가 읍내에서 가장 큰 약국을 하던 친구 ‘임’이었다. 나중에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난 그는 성정이 괴팍하고 거칠어서 친구가 없었지만 어느 날 나에게 자신이 서자라는 사실을 고백했다. 내가 그 친구를 지금도 기억하는 것은, 그 내밀한 고백이 퍽이나 매혹적이라고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것은 마치 소설이나 영화 속에 삽입되어야 하는 에피소드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그의 방에 쌓여 있던 수많은 약병들.

입영통지서를 기다리는 참으로 한심하고 막막한 시기. 나는 뇌가 없는 사람처럼 행동했고 실제로 뇌가 없어도 아무런 불편 없이 생활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나는 모든 것을 긍정하는 것으로 부조리한 모든 현실을 조롱했다. 누구나 그런 처지에 이르면 그렇게 시간을 보내는 것이 당연한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며 나는 위악적인 각오를 다지고 매일 매일을 당구와 술과 영화로 허비했다. 물론 한편으로는 저주받은 젊음에 대한 자학의 의도 같은 게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아버지는, 내가 젊은 날의 소중한 시간을 그렇게 소모적으로 보내는 것에 대해 관대한 편이었다. 관대했기 때문에 그가 나에 대해 무관심했는지, 아니면 무관심 때문에 그가 나에게 관대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내가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그는 원래 자기 성질을 잘 드러내지 않는 조용한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는 언젠가 내게 이런 말을 하기도 했다.

“나의 기쁨이 뭔 줄 아니? 질문을 갖고 그 질문을 골똘히 생각하는 것이야. 그 질문을 생각하면서 고개를 숙이고 땅을 바라보며 걸을 때 아무와도 부딪치지 않는 것이 내 기쁨이지.”

그날도 밖에서 술을 마시고 늦게 들어온 나는 방으로 들어가기 전에 화장실을 더듬거리며 찾아가고 있었다. 그때 어둠 저편에서 누군가가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아버지였다. 아버지가 잠을 자지 않고 다시 툇마루에 나와 앉아 있었던 것이다. 나는 처음에는 아버지가 내가 대문에 들어서는 것을 보고 나의 늦은 귀가를 나무라는 소리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다시 들어보니, 그것은 그 누구보고 들으라고 하는 소리가 아니었다. 아버지는 툇마루에 앉아서 혼자 술잔을 기울이면서 뭐라고 혼잣말로 중얼거리고 있었던 것이다. 아마도 자정이 다 된 시간이었을 것이다. 나는 막무가내로 아버지의 그 중얼거림을 듣고 싶지 않았다. 그것은 여간 민망한 일이 아니었다. 아버지는 아버지다워야 하지 않나. 저건 무슨 청승인가 싶었다. 차라리 절로 들어가라, 스님이 되어 집을 버려라, 내 속에서는 이렇게 소리칠 때도 많았다. 그런데, 나는 정말 그 밤 아버지의 중얼거리는 소리를 듣고 싶지 않았을까. 아, 어쩌면 나는 그 중얼거림을 간절하게 해독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래, 간절히 듣고 간절히 이해하고 싶었다. 도대체 당신은 어찌하여 한밤중에 잠도 못 이루면서 어디에 대고, 누굴 향해 뭐라고 하는 건가.

지금 생각해 보면 그는 그때 자신에게 질문을 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어떻게 살 것인가, 나는 누구인가라고. 나는 아버지의 중얼거림을 한사코 외면하면서 화장실에 들어가 약간의 구토를 하고 소변을 보고 나왔다. 그때 끼이익 하면서 문소리가 들렸을 것이다. 그러자 툇마루의 아버지가 이쪽으로 천천히 고개를 돌리면서 이렇게 말했다.

“거기 누구니, 바람이 아니라면 잠깐 이리로 오렴.”

그래, 나는 화장실 문 따위를 건드리고 지나가는 바람도 아니었다. 나는 좀처럼 잠을 자지 못하는 당신의 아들이었던 것이다. 나는 어쩔 수 없이 아버지 앞으로 멈칫거리며 다가가야만 했다. 나는 아버지에게는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었다. 그리고 내가 다가갔을 때 아버지는 쓸쓸하게 웃으셨던가. 나는 그런 아버지의 모습을 볼 때마다 알 수 없게도 공연히 분한 마음이 들고는 했다. 그런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아버지는 나를 보고는 옆에 앉으라고 했다. 그러곤 예의 나로서는 알아들을 수 없는 지루하고 난감한 얘기를 하는 것이다. 그는 한쪽 손을 들어 담장 너머, 칠흑같이 어두운 밤하늘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 하늘 저쪽에 우리는 가 닿지 못하겠지. 백 년이 흐르고 천 년이 흘러도 가 보진 못할 거야. 그것은 그대로 상심이 되겠지.”

“그런데요?”

나는 심드렁한 말투로 그의 말이 어서 끝나기만을 기다렸다.

“저곳에도 따뜻한 내부가 있을 거야. 저 차가운 밤하늘 어딘가에도. 사람들은 안과 밖을 나누면서 모두들 따뜻한 내부를 갖기를 원한단다. 우리는 밖이 아닌 안에서 위로를 받으면서 고통과 슬픔을 견뎌내는 것이지. 그런데 나에게는 이 세상이 온통 까다롭고 사나운 바깥 같구나. 사는 것이 참으로 두렵고 어려워. 어떻게 저 밖으로 들어가야 할지 모르겠어.”

“그래서 그게 어쨌다구요?”

아, 제기랄, 나이가 50이 넘은 사람이, 밖에 대해서 두려워하고 있다니. 나는 순간적으로 이 아버지라는 사내에게 부아가 치밀었고, 그 다음에는 연민이 치솟았고, 어설프게 마신 술 때문인지 서러운 감정이 북받쳐 올라왔다. 아버지는 소주를 한 잔 따라서 천천히 마시더니 이렇게 말했다.

“내가 너에게 말해 주고 싶은 것은, 사람이 살아 있는 동안에는 하나의 질문을 가지고 살아야 한다는 거야. 피곤할 텐데 어서 들어가 자거라.”

그날 밤하늘을 쳐다보는 아버지의 눈길은 한없이 처량하고 쓸쓸해 보였다. 그것은 그가 세상을 떠난 후에 내 가슴속에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선연한 기억이 되었다. 아마도 아버지는 그 밤 끝내 잠을 이루지 못했으리라. 그 지독하고 괴이한 아버지의 불면이 고스란히 내게 이어지다니.



4.


지금 다시 잠에 들지 못하고 깨어 앉아 창밖에 떠오른 달을 보고 있노라니, 서른다섯 해 동안 인멸되지 않고 그 흔적을 남기고 있는 지난 것들에 대한 애착들이 떠오른다. 이제는 돌아올 수 없는 곳으로 떠난 불면을 앓던 아버지 생각도 나고, 지금쯤 기도원에 가기 위해 자전거 페달을 밟고 있을 고향 집의 노모 생각도 난다. 검은 창은 그 쓸쓸한 영상들을 천천히 내 눈앞에 펼쳐준다. 하지만 이런 누추하고 쓸쓸한 회상에 잠기자고 내가 깨어 있는 것은 아니다. 나는 새로운 신념과 진실한 울림을 기다린다.

창밖의 허공은 검디검고, 달은 얼음처럼 차가울 것이다. 나는 어떤 소설에서 저 차가운 달에 한번쯤 얼굴을 처박고 싶다고 쓴 적이 있다. 그러면 저 달의 표면에 내 얼굴 자국이 찍힐 것만 같다고 상상하면서 말이다. 달이 여성성을 상징한다는 것에 나는 동의하는 편이다. 나는 저 달의 호위를 받으며, 깊은 밤 홀로 꼿꼿하게 깨어 있다. 먼 도시에 사는 형제들은 진작 커튼을 내리고 가족들과 함께 잠을 청하고 있을 것이다. 아마도 본의 아니게 이 생을 짊어지고 종일 거리를 헤맸을 많은 사람들이 지금 이 시간 고된 잠에 빠져 있을 것이다.   

대개의 사람들이 잠들어 있는 깊은 밤,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깨어 있다. 나는 나보다 앞서 깨어 있던 이들이 그랬던 것처럼 이 밤의 고적을 마주 대하면서 ‘참돌 위에 떨어지는 수반’ 같은 하나의 명징한 질문을 가지지 않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나는 질문을 갖기 위해 깨어 있는 것인가.

아버지의 삶을 통해 배운 것이 하나 있다. 하나의 질문을 갖는다는 것이, 자신의 삶의 의미를 유한한 시간의 영역 안에서 무한히 확장시키고자 하는 이들에게서 찾아볼 수 있는 고매한 열정이라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질문이란, 진지한 삶을 살겠다는 의지의 각별한 표현이라는 것. 그래서 질문은 매혹적이고 아름다울 수밖에 없다는 것.

모든 질문에는 대답이 있어야 한다. 나는 일단 그렇게 생각한다. 그 질문이 비록 복사뼈나 팔꿈치에서 떨어져 나간 각질처럼 우리 앞에 툭 던져지는 것일지라도, 혹여 질문을 던지는 자의 의도가 가벼운 유희에 지나지 않는 것이라 할지라도 우리는 그 질문에 대답하고자 노력해야 한다. 질문에 대답하는 일은, 어쩌면 더 큰 질문을 갖는 일이 될 수 있고, 우습고 질 나쁜 질문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는 일이 될 수도 있다. 그런 것을 생각하면 대답이 질문을 만든다고도 볼 수 있다. 질문은 미혹에 사로잡힌 삶을 보다 더 명료하게 하고, 어떤 면에서는 신비롭게도 한다. 무엇보다도 질문에 얽힌 거의 모든 작용들은, 삶을 덜 지루하게 만든다.

질문을 하거나, 질문에 대답을 하는 일은, 깨어 있는 자들의 의무다. 아버지 역시, 잠들지 않고 깨어 있었기에 당신만의 질문을 가질 수 있었을 것이다. 깨어 있지 않고서는 질문을 가질 수 없다. 내가 아무것도 궁금하지 않고, 그 어떤 것에도 대답할 수 없다면, 나는 이미 사망하거나 피살된 것이다. 깨어 있는 존재로서 나는 어떤 질문을 가질 수 있을까?

나는 지금 두 평 남짓한 방안에서, 외부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외부라고 생각되어지는 곳에서 들려오는 소리들에 귀를 기울인다. 집음 장치를 설치해서라도 밖의 소리들, 외부의 웅성거림을 듣고 싶다. 아버지는 저 외부에 당신만의 내부를 만들고 싶어 했다. 그는 그 내부를 찾았을까? 밖에서는 내 귀를 자극하는 그 어떤 소리도 들려오지 않는다. 그래, 모든 사람들이 잠들어 있는, 고양이가 우는 시간도 지난 지금은 깊고도 깊은 새벽이다. 나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나는 지금 안에 있는가, 밖에 있는가. 



5.


나는 나에게 주어졌던 오래 전의 질문을 이제 여기에 꺼내 놓는다.

“어떻게 밖으로 들어갈 것인가?”

그래, 그것은 아주 오래 전의 어느 밤, 아버지가 술을 먹고 늦게 귀가하는 아들에게 툭 던지듯이 내뱉은 질문이다. 그리고 나는 어느 날 우연히 그 질문과 대면하게 되었다. 그 사람을 위해 목숨을 바쳐도 좋다고 생각했던, 사랑하던 여자와 영영 헤어지던 밤이었다. 그 밤 나는 죽기 위해 술을 마셨고, 밤새 바닥을 뒹굴면서 구토를 했고 그리고 서럽게 흐느껴 울었다. 그 다음 날, 나는 여자와 함께 찍은 사진들을 옥상에 가지고 올라가 불태웠다. 타들어 간 사진의 재가 바람을 타고 공중에 흩날렸다. 나는 그 재를 눈으로 좇았다. 바로 그때 아버지의 질문이 내게로 다가왔다.

“어떻게 밖으로 들어갈 것인가?”

사랑이 가벼운 재로 떠나고 그 질문이 내게로 왔을 때, 나는 머리가 어지러워 꼼짝도 할 수 없었다. 나는 손으로 옥상의 난간을 짚으며 겨우 몸의 균형을 잡았다. 나는 내 몸이 어떤 알 수 없는 기운에 의해서 기우는 것을 느꼈다. 무언가가 송두리째 빠져 나가는 느낌, 그 바람에 내 몸은 계속 기우뚱거렸다. 그날 이후, 나는 어쩌면 해괴한 언어유희에 불과할지도 모르는 이 질문을 머릿속에서 내려놓지 않으려 노력하며 살아 왔다. 내가 지금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성실한 질문자가 되어 살아가는 삶이 간혹 몸서리쳐지도록 외롭기는 했지만 싫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수많은 삶의 형태 중에 나에게 가장 잘 맞는 삶의 형태란 질문을 갖고 살아가는 자의 삶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들은, 자기 몸에 옷을 맞추고 자기 발에 구두를 맞추는 것처럼, 자신의 의식에 맞는 삶의 형식을 찾아야 하는 것이다. 

“어떻게 밖으로 들어갈 것인가?”

나는 이 질문을 사랑했다. 이 질문을 던지는 내 영혼을 흠모했다. 하지만 답을 구할 수 없었다. 쉽게 답을 낼 수 있는 질문이 아니었기에 나는 더욱더 갈급한 질문자가 되었다. 어느 밤에는 너무나도 외롭고 힘겨운 나머지 돌아가서 흙이 되어 있을 아버지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쓰기도 했다. 이것은 편지가 아니라 어쩌면 질문자의 주문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아버지, 

당신은 내부를 가졌나요?

말을 할수록

멀어지고 

눈을 한 번 깜빡일 때마다

멀어집니다 

내 생으로부터 내가 멀어지는

이 한심스러운 아이러니가

한 번도 중단된 적은 없습니다

지루하고 무능한 감독의

위대한 다큐멘터리처럼

나는 무엇의 주인이고

무엇의 주체인가

금기된 질문은 태어나자마자

소각장으로 실려 갑니다

말을 배우고

글을 쓰고 생각하고

가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한

세계를 상상하는 일

다른 사람의 생애를 짐작하는 일과

떳떳해지는 일

울고 싶은 마음을 참는 일

감각을 가려내는 일

소리와 색깔을 선택하는 일

모두 어렵습니다

그래서 나는 차라리

생으로부터 멀어지는 것이

가장 인간적이지 않는가

묻는 것입니다

아버지,

나는 이제 최후에 도착하는

멋진 피안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확인된 편견에 사로잡히고

그만큼 생으로부터

당신으로부터 멀어지고자 합니다

나는 오늘도 

갓 배운 말을 토스트처럼 툭 내뱉고

멀어진 거리가

몇 뼘쯤 되는지 생각하고

내 생이 얼마나 난감한지를 셈하고자

안간힘을 씁니다

아버지, 

당신은 밖에 들어가 보았나요?

 

나는 마음을 털어 놓아도 좋을 만한 사람이라고 여겨지는 몇몇의 지인들에게 질문을 안고 살아가는 자의 외로움을 호소하기도 했다. 그들에게 ‘어떻게 밖으로 들어갈 것인가’라는 질문을 안고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외로운 일인지 아느냐고 물었다.

밖이라는 곳은, 흔히 들어가는 곳이 아니라 나가는 곳으로 알려져 있다. 그래, 그것은 너무나 자명한 사실이다. 그것은 말할 것도 없이 순리의 범주에 속하는 것이다. 하지만, 밖으로 나가서 도대체 어떻게 하겠다는 것인가? 밖으로 나가는 일은, 물을 입으로 마시고, 신문을 눈으로 읽는 것처럼 너무나 당연한 일이어서 그 어떤 각성도 일으키지 못한다. 적어도, 산문적으로는 그렇다는 것이다. 밖으로 나가는 것은 상식적으로 옳은 일이긴 하지만, 결코 아름다운 일이 될 수는 없다. 적어도 그 행위가 내 질문이 된 경우엔 더욱 그렇다.

밖으로 나가는 것이 아니라 들어가고 싶다는 생각을 가지면서, 내 영혼은 맹렬해졌다. 좋게 얘기하면 그 질문의 형태로 열망을 가지게 되면서, 나는 내 삶을 각별한 어떤 것으로 간주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어느 날 운명적으로 이 언어유희에 불과할지도 모르는 질문에 대한 답을 찾게 되는, 질문에 답을 하게 되는 어떤 사건과 극적으로 마주쳤다. 그 힌트는 공교롭게도 아버지가 던져준 한 권의 책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6.


어느 날 아버지는 당신이 읽던 책을 내게 던져 주었다. 그의 취미는 술을 마시거나 대하소설을 읽는 것이었다. 그가 던져준 것은 ‘만다라’라는 제목을 가진 얇은 소설책이었고 지은이는 김성동이라는 사람이었다. 1990년, 내가 막 열아홉 살이 되었을 때였다. 나는 제목이 신기해서 그 소설을 펼쳐서 읽기 시작했다. 그 소설이 아주 유명한 소설이고 영화로도 만들어졌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그 후로 몇 년이 지나서였다.

김성동의 ‘만다라’라는 소설에는 하나의 질문이 나온다. 『만다라』는 알려진 것처럼 승려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구도소설이다. 그 소설 속에 제시된 질문이 ‘화두’의 형태로서 전제되는 것은 그래서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었을 것이다. 간화선을 주로 하는 대승불교에서 화두는 수행의 핵심적인 요소다. 소설 속에서 기행과 일탈을 행하는 승려인 지산 스님은 법운 스님에게 다음과 같은 화두를 들려준다.

새 한 마리가 있다. 아직 그 새가 작은 새였을 때 유리병에 넣어서 계속 모이를 주며 길렀다. 새는 무럭무럭 자라 몸집이 커졌다. 그래서 유리병의 입구로 나올 수가 없게 되었다. 그렇다면 새의 몸을 해하지도 않고, 유리병을 깨뜨리지도 않으면서 새를 밖으로 꺼낼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가? 어떻게 이 새를 유리병 밖으로 꺼낼 것인가?

본인 스스로가 어린 나이에 중이 되기 위해 출가를 하기도 했던 김성동에 의해서 던져진 이 질문은 까다롭고 난해한 수수께끼가 아닐 수 없다. 소설 속 스님의 화두는 곧 작가가 삶에 대해 던지는 거대한 질문이었을 것이다. 소설 속에서 작가는 이 질문에 대한 답을 보여주지 않는다. 물론 그것은 예상했던 일이다. 친절한 소설가를 만나는 것은 낙타가 바늘귀를 통과하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일이니까. 작가는 독자들에게 까다로운 화두, 질문을 던져놓고 짐짓 딴전을 피우고 슬쩍 웃고만 있을 것이다.

나 역시 이 질문을 접하고 골머리를 앓으며 답을 구하기 위해 애를 썼지만 답을 구하는 일은 너무나 요원한 것이었다. 어쩌면 이 질문에 대한 답을 구하는 행위 자체가 무의미한 것인지도 모른다. 답을 요구하지 않는 질문들이 생을 건드리고 간다. 그것은 나뭇잎을 건드리고 지나가는 바람처럼 왜 건드리는지 알려주지 않고 소멸하고 마는 운명의 가르침과도 같은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 질문에 대한 답을 풀고자 했다. 그리고, 마침내 답을 풀었다. 어떻게 밖으로 들어갈 것인가라는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질문에 대한 답이 소설 『만다라』에서 던져진 화두를 상기하는 동안 저절로 풀린 것이다. 내가 지금 꼭 말하고 싶은 것은, 내가 찾은 답이 꼭 정답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나의 대답이 그런대로 마음에 든다. 나는 답을 구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고, 답을 구하기 전까지 성실한 질문자로 살아왔다. 그렇기에 나는 내가 찾은 대답에 후회가 없고 나름대로 만족하는 것이다.

유리병과 새를 다치지 않게 하면서 새를 유리병 밖으로 꺼낼 수 있는 방법, 나는 그것을 알게 되었고, 그 답을 구한 것과 동시에, 밖으로 들어가는 방법까지도 깨우치게 되었다. 어떻게 새를 꺼낼 것인가, 이제부터 내가 찾은 답을 들어보기 바란다. 나는 내가 찾은 대답을 보다 효과적으로 당신들에게 설명하기 위해 하나의 우화를 만들어 냈다. 이 우화는 내가 찾은 답을 보다 친절하게 설명하기 위해 만들어진 에피소드일 뿐이다.


넓은 땅을 가지고 있는 어떤 부자가 있다. 그는 자신의 두 아들에게 땅을 나누어 주려고 한다. 부자는 두 아들을 차례차례 한 사람씩 부른다. 먼저 첫째 아들이 아버지를 만나러 온다. 부자는 장남에게 말한다.

“큰애야, 여기에 땅이 있다. 이 땅을 너에게 줄 테니, 네가 가지고 싶은 만큼 말뚝을 박아 울타리를 쳐서 너의 땅임을 표시해 보거라.”

그러자 큰아들은 아버지의 땅에 자기가 가지고 싶은 영토를 다음과 같이 표시한다. 그가 영토를 표시하는 말뚝을 박느라 소비한 시간은 일주일이다.

 

 

그림에서처럼 첫째 아들은 한껏 욕심을 부려서 땅의 맨 가장자리를 돌아가며 촘촘하게 말뚝을 박아 울타리를 쳤다. 그래야 조금이라도 넓은 땅을 차지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림에서 말뚝을 박아서 만든 울타리 안쪽이 당연히 첫째 아들이 갖고 싶은 땅이다. 첫째 아들은 땀을 닦으며, 저는 울타리 안의 땅을 모두 갖고 싶어요라고 말했을 것이다. 아버지는 장남에게 말뚝을 박느라 수고했다고 말하면서 조금만 기다려 보라고 말했겠지. 며칠 후 아버지는 둘째 아들을 불러서 첫째 아들에게 건넸던 말을 똑같이 한다.

“작은애야, 여기에 땅이 있다. 이 땅을 너에게 줄 테니, 네가 가지고 싶은 만큼 울타리를 쳐서 너의 땅임을 표시해 보거라.”

그러자 둘째 아들은 아버지의 땅에 자기가 가지고 싶은 영토를 표시한다. 그런데 그가 자신의 영토를 표시하는 말뚝을 박는 데 걸린 시간은 한 시간이 채 못 된다. 


 

그림을 보면 알겠지만 둘째 아들이 말뚝을 박은 모양은 첫째 아들이 말뚝을 박은 모양과는 사뭇 다르다. 그는 땅의 한 가운데에 말뚝을 서너 개만 박았을 뿐이다. 말할 것도 없이 그가 말뚝으로 표시해 둔 땅의 면적이 형이 표시한 면적보다 터무니없이 작다. 둘째 아들은 땅에 대한 욕심이 없는 걸까. 그는 재물에 대한 욕망을 초월한 사람일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둘째 아들이 아마도 심성이 곱고 착해서, 그리고 겸손하고 재물에 욕심이 없어서 일부러 울타리를 좁게 친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우화를 많이 읽은 사람이라면 이런 상상을 할지도 모르겠다. 울타리를 좁게 친 둘째 아들은 아버지로부터 정말 착하고 겸손하다는 평가를 받으며 오히려 욕심을 부렸던 형보다 더 넓은 땅을 받게 될 거라고 말이다. 사실 사람들이 그동안 접해 온 우화의 결말은 대개 그런 식이다. 하지만 나의 우화는 전혀 그런 결말을 내지 않는다. 미안한 얘기지만 사람들의 상상은 틀렸다. 욕심이 많은 건 형이 아니라 동생이다. 둘째 아들이 말뚝을 박아 놓은 것을 본 아버지는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둘째 아들에게 묻는다.

“넌 겨우 이 정도의 땅을 원하는 것이냐? 이렇게 좁은 땅을 가져서 도대체 무엇에 쓰려고 그러느냐. 넌 첫째와는 달리 왜 그렇게 욕심이 없느냐.”

그러자 둘째 아들이 무슨 소리냐는 듯 정색을 하며 말한다. 독자들은, 둘째 아들의 말을 잘 들어야 한다. 이 우화의 핵심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아버지, 저는 저 말뚝을 박아놓은 울타리 안의 땅만 빼고, 그 밖의 땅을 모두 제가 갖고 싶은 땅으로 표시한 거예요.”

그러니까 그의 말은 이렇다. 



둘째 아들이 갖고 싶은 땅은 사실 땅 가운데에 박아 넣은 서너 개의 말뚝 안쪽이 아니다. 그림 속에서 빗금을 쳐서 표시를 한 부분이 바로 둘째 아들이 갖고자 하는 땅인 것이다. 그는 말뚝 서너 개로 만든 울타리 안의 땅만 빼고 그 밖의 나머지 모든 땅을 갖고 싶은 것이다. 자, 그렇다면 둘째 아들이 표시한 저 그림속의 땅에서 어디가 안이고 어디가 밖일까? 둘째 아들에게 내부는 어디이고 외부는 어디일까. 그렇다, 둘째 아들에게 울타리 안은 바깥이 되고 울타리 밖이 바로 안이 되는 것이다. 무슨 말인지 이해하겠는가. 울타리를 경계로 표시되는 안과 밖의 통념을 둘째 아들은 보기 좋게 뒤집은 것이다. 둘째 아들의 눈에는 울타리 안이 곧 밖(외부)이 되고, 울타리 밖이 곧 자신의 세계, 자신이 갖고 싶은 땅, 그러니까 ‘내부’가 되는 것이다. 그는 훨씬 적은 시간과 공을 들이고, 형보다 훨씬 넓은 땅을 자신의 영토로 표시한 것이다. 안과 밖의 고정적인 개념을 뒤집음으로써 말이다. 그렇다면, 이제 이 우화가 드러내 주고 있는 이치를 유리병 속의 새로 가져가 보자. 우리는 유리병 속에서 갇혀 있는 불쌍한 새를 유리병 밖으로 빼내 주어야만 한다. 새에게 자유를 주어야 한다. 자, 여기 유리병 속의 새가 있다.




이 새는 그림에서 보는 것처럼 몸집이 유리병의 입구보다 훨씬 커서 밖으로 나갈 수가 없다. 병을 깨지 않는 한은 병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다. 도대체 어떻게 새를 유리병 밖으로 꺼낼 수 있다는 말인가. 그게 가능한가? 물론 처음에 나 역시 이건 도저히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김성동의 소설 『만다라』에서 이 질문을 처음 접했을 때 나는 다만 그것이 말장난일 뿐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구도소설이란 이처럼 해괴한 말놀음으로 쓰는 거군”이라고 심드렁하게 냉소했다. 그런데, 알 수 없게도 자꾸 그 화두가 내게 말을 거는 것이었다. 화두가 내게 거는 말들은 이를테면 이런 것이었다.

“잘 생각해 봐, 답이 있단 말야. 넌 왜 질문을 받고도 대답을 하려고 하지 않니? 답을 찾기 위해 노력해 보란 말야. 왜 노력도 하지 않고 비웃으며 포기하는 거니. 답은 질문을 갖는 순간 이미 내 마음속에 싹이 트는 거란 말야.”

그리고 나는 내 의지와는 무관한 형태로 조금씩 조금씩 그 말 같지 않은 질문에 이끌리게 되었다. 어느 순간부터는 그 질문에 매달려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하고는 깜짝 놀라기도 했다. 마치 의식하지 못한 사이에 시작된 귀뚜라미 울음소리나 시계의 초침 소리가 어느 순간 갑자기 인지되는 것처럼 말이다. 나는 내 의식의 한 켠에 명확하게 똬리를 틀게 된 질문에 골몰하기 시작했다. 밥을 먹으면서도, 샤워를 하면서도 클라이언트를 만나 회의를 하면서도, 여자 친구와 키스를 하면서도, 늦은 밤 택시를 타고 귀가를 하면서도 말이다. 그런데, 그런데 말이다. 저 유리병의 외부, 즉 유리병의 바깥이 정말 우리가 알고 있는 바깥이라고 장담할 수 있을까? 저 유리병의 외곽을 둘째 아들이 쳐 놓은 울타리라고 가정해 보자. 그렇다면, 유리병 안의 새는 이미 밖으로 나와 있는 것이 아닌가. 유리병이라는 울타리를 경계로 이미 새는 밖에 존재한다는 말이다. 다시 말하면 새는 단 한 순간도 안에 갇혀 있은 적이 없는 것이다. 이미 새는 밖으로 나와 있고 해방된 존재이다. 새의 눈에는 유리병 밖의 세계가 좁고 협소한 ‘유리병 안’으로 보였을 것이다. 작가 김성동은 이미 질문 속에 그 답의 실마리를 함께 넣어 놓은 것이다.   

이제 우리는 둘째 아들처럼 안과 밖의 통념을 뒤집어서 바라보는 눈을 가져야 한다. 밖의 세계가 안의 세계보다 언제나 넓은 것은 아니라는 것. 마찬가지로 안의 세계가 밖의 세계보다 협소한 것은 아니라는 것.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생각 속에서 폭풍 같은 각성을 통해 경계를 허물고 뒤집을 수만 있다면 저 한줌도 안 될 병 속의 세계가 우주와 같이 넓은 공간, ‘바깥’이 될 수도 있고, 비행기가 날아다니고 쾌속선이 질주하고 대륙 횡단 열차가 호령하는 이 세계가 한줌 병 속보다 좁은 ‘안’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이런 생각은 얼마든지 확장이 가능하다. 이 자유로운 상상은 신의 구속으로부터도 자유롭다. 그리고 이 생각은 퍽 유용하기도 하다. 이를테면 감옥에 갇혀 있는 수인들이 이런 생각을 한다면 그들은 갇혀 있다는 자각으로부터 오는 고통을 훨씬 줄일 수 있을 것이다. 내가 지금 갇혀 있는 1평도 안 되는 공간이, 실은 무한한 밖이라고 생각해 보란 말이다. 교도소 담장과 철책이 둘째 아들이 쳐 놓은 울타리라고 생각한다면, 오히려 수인들은 저 밖의 세상 사람들을 갇혀 있는 자들이라고 상상하며 비웃을 수도 있을 것이다.   



7.


작년에서야 나는 우연한 기회에 김성동 선생을 만날 수 있었다. 방송이나 신문, 지면에서는 많이 보았지만 실제로는 처음 뵙는 자리였다. 그 무렵 선생님은 내가 일하고 있는 출판사에서 펴내는 잡지에 에세이를 연재하고 있었는데, 서울에 나들이를 나오셨다가 편집장과 나를 당신이 있는 곳으로 호출했던 것이다.

처음 본 선생님의 인상은 뭐랄까, 속을 다 비워낸 자의 허허로움과 지독한 허기를 견뎌 본 자의 강기가 함께 느껴지는, 매우 복합적인 것이었다. 나는 그의 『만다라』를 시작으로 그의 모든 소설을 탐독했던 터였다. 

우리는 광화문의 참치횟집에서 소주를 나눠 마시고는 강남역 근처의 매운탕 집으로 2차를 갔다. 선생님은 환갑이 가까우신 나이임에도 독주를 마다하지 않으셨는데, 금방 취기가 오르시는지 시종 붉게 충혈된 눈가를 손가락으로 주무르셨다. 나는 선생님을 만나는 동안, 어느 정도의 감격을 품으며 내가 풀어 놓은 화두의 답을 떠올렸다. 하지만 그것을 선생님께는 말씀드리지는 않았다. 화두를 던진 자에게 그 화두의 답을 말씀드리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었을 것이다. 다행히 나는 어리석음을 피할 수 있었다.

나는 지금도 생각한다. 질문은 질문으로 남아 있을 때 가장 아름다운 것이라고. 세상의 많은 질문들이 모두, 대답을 원하는 것은 아니다. 질문은 언제나 질문으로 가지고 있는 것이 좋다. 답은 말하여지지 않는 것이 옳다. 비록 그 대답이, 하나 더하기 하나가 무엇이냐는 질문에 대한 답처럼 명료하게 내려질 수 있는 것이더라도 말이다.

나는 질문과 답을 통해 안과 밖의 경계를 바꾸어 보았다. 그렇게 해서 나는 안으로 나가고 밖으로 들어가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증명해 보였다. 이것은 자유인가? 이것이 내게 어떤 위안을 안길까. 그렇다면, 간에 악성 종양이 생겨, 고통을 당한 끝에 죽은 나의 아버지, 질문을 갖는 것을 좋아했던 나의 아버지는 지금, 무덤의 푸른 잔디를 경계로, 넓고 공활한 밖의 세계를 주유하고 있는 것인가, 아버지의 눈에는 무덤 밖의 세계가 오히려 무덤 같은, 한없는 공포와 비겁과 졸렬함이 판을 치는 좁고 부패한 내부로 보이지나 않을까? 나는 아직 아무것도 모른다. 나는 여전히 질문이 배고프다.

나는 내가 품었던 질문과 답을 이제 소설에 담아 발표한다. 그것으로 나는, 나의 생으로부터 스스로 멀어지고자 하는 나의 열망을 어느 정도 실현했을 것이다. 그리고 이제 다시 깊고 푸른 밤의 질문을 찾아 알 수 없는 길을 떠날 것이다. 다만, 오늘 밤은 푹 자고 싶을 뿐이다.《문장 웹진/2008년 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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