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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요한 밤 거룩한 밤

  • 작성일 2009-06-26
  • 조회수 2,463


고요한 밤  거룩한 밤

 

 

이선

 

 

 

 

 

어머니. 어머니, 어머니.

어머니, 어머니, 어머니.

어머니, 어머니, 어머니.

  

어젯밤에 무명실로 칭칭 감아 놓은 손끝이 여태 욱신거린다. 봉숭아 꽃잎에 백반가루를 너무 많이 넣어 찧었나. 작년보다 진하게 꽃물을 들이려고 조금 욕심을 부렸다. 다섯 손가락 끝마디가 검붉게 물들어서 찬바람이 불 때까지는 아버지 눈을 조심해야겠지만 오래오래 봉숭아 꽃물을 보고 싶었다. 손톱이 더디 자라면 좋겠는데, 애가 탈수록 더 잘 자란다. 그렇듯 간절히 바라는 일은 등을 보이기 일쑤이다. 바라는 대로 되지 않는 것을 예감하기 때문에 간절해지는 것 같다. 다른 사람은 모르지만 내 경우는 그랬다. 무엇을 바라게 되면 안 될 거라는 생각이 든다. 그러면 반드시 되어야 한다고 마음을 졸이고 애를 태울 수밖에 없다. 그래서 아버지는 욕심이 질기다며 내게 눈살을 찌푸리신다. 계집아이가……. 아버지가 나를 곱게 보지 않는 이유가 그 때문이라는 게 너무 억울하다. 그 말을 들을 때마다 삼신할머니가 원망스럽다. 아홉 살 어린 남동생이 나보다 그만큼 먼저 태어났으면 아버지에게 미움을 덜 샀을까. 그런데 이름이 뭐더라. 이런 낭패한 일이 있나. 남동생 이름을 잊어버리다니. 아, 영기였지. 백반가루가 지나쳐서 봉숭아 꽃물이 손가락을 타고 팔을 따라 어깨로 올라가 머릿속까지 벌겋게 물들여 버렸나. 내 영민함은 아버지도 인정하시는데 하필 동생 이름을 까먹다니. 그러고 보니 영기 손가락을 봐야겠다. 영기가 하도 보채서 어머니가 왼쪽 새끼손가락만 허락하셨다. 봉숭아 꽃잎을 쌀알만큼만 올리라고 당부하셨는데, 콩알만큼 올렸다. 그래야 조금이라도 오래 영기 핑계를 대며 아버지의 타박을 면할 수 있겠지 싶었다. 영기야, 일어나 봐. 어서 일어나. 손톱 좀 보여 다오. 영기야, 영기야…….

  

어머니, 어머니, 어머니.

어머니, 어머니, 어머니.

어머니, 어머니, 어머니.         

  

영기는 들은 척도 하지 않는다. 아버지가 깨실까 봐 조심스럽다. 몸을 흔들어 보지만 도무지 꿈쩍도 하지 않는다. 사내아이라서 그런지 영기는 종일 부산스럽게 움직인다. 그러다가 지치면 아무 데나 머리를 대고 잠이 든다. 달빛만 조금 밝아도, 빗소리가 조금 청승맞아도, 바람이 조금 스산하게 불어도 좀처럼 잠을 이루지 못하는 나는 그런 영기가 부럽기도 하고 딱하기도 하다. 차마 입 밖으로 내지는 못하시지만 아버지는 외아들이 행여 우둔하지 않은가 걱정하시는 게 분명하다. 그래서 내 영민함이 더 못마땅하신 것이다. 여자가 글을 배우면 도리어 배우지 않은 것만도 못할 수 있다고 하시지만 글방에 나를 들어가지 못하게 하시는 이유는 따로 있다. 사내아이들을, 그중에서도 특히 영기를, 기죽게 만들 것을 걱정하시는 것이다. 그래도 기어코 방문 밖에서 엿들어 방 안의 사내아이들보다 먼저 천자문을 떼고 논어를 읽었지만 칭찬은커녕 눈물이 쏟아지도록 꾸중을 들었다. 그럴수록 더 오기를 품었다. 붓 대신 나뭇가지를 들고 종이 대신 마당에 글씨를 썼다. 어느 날엔 마당에 빈 곳이 없었다. 어머니는 어떻게든 방 안으로 끌어들여 수틀을 잡게 하려고 했지만 오래 붙들지 못했다. 수틀만 잡으면 머리가 어지럽고 맥이 풀렸다. 그래서 누우면 어느 땐 사나흘을 일어나지 못했다. 처음엔 방문을 열어젖히며 혀를 끌끌 차던 아버지도 이제는 손수 약을 달여 주시기도 한다. 과년해지는데 큰일이라며 어른들의 걱정은 깊어 가지만 나는 낫고 싶지가 않다. 온몸의 맥을 놓고 누워 있을 때가 나는 가장 흡족하다. 아무도 나를 방해하지 않고,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내 마음대로 무엇이든지 생각할 수가 있다. 그러므로 어머니의 안타까운 눈길도, 아버지가 감추고 돌아서다가 흘리는 혀 차는 소리도, 나를 처량하게 만들지 않는다. 도리어 나는 그렇게 온전히 나를 느끼며 평생을 살고 싶다. 그런데 영기는 왜 이렇게 못 일어날까. 영기야, 영기야…….

  

어머니, 어머니, 어머니.

어머니, 어머니, 어머니.

어머니, 어머니, 어머니.

아휴, 왜 또 부르신대.

  

이제야 알아들었나 보다. 얼른 영기의 왼쪽 손을 잡아당긴다. 단번에는 어림도 없다. 나이는 한참 어려도 힘은 나보다 훨씬 세다. 백일이 지난 영기의 등에 찹쌀 반말 자루를 올려놓았지만 아무렇지도 않았다. 한번 무엇을 손에 쥐면 아무도 빼앗을 수가 없었다. 모두 나중에 영기는 천석꾼 만석꾼이 될 거라고 말했다. 외아들이 학자가 되기를 원하셨던 아버지는 그 말을 그다지 달가워하지 않았다. 나는 다시 한번 잡아당긴다. 이번에는 아주 힘껏 당겨 본다.

  

아야, 아파라. 이 손 좀 놓으셔요. 아야, 아야. 하지 말라시면 더 하신다니까. 웬 힘이 이렇게 센지 몰라.  

어머니, 어머니, 어머니.

또 시작이셔? 눈 좀 붙일 만하면 깨우시네. 도대체 몇 시야? 이제 겨우 한 시인데 어쩌면 좋아.  

어머니, 어머니, 어머니.

기저귀 봐 드릴 테니 이 손 좀 놓으셔 봐.

어머니, 어머니, 어머니.

내가 못살아, 또 큰 것 싸셨네. 못살아, 못살아.

어머니, 어머니, 어머니.

어제 하루 종일 갈았는데 또 시작이시네. 아이고, 이 냄새…….

어머니, 어머니, 어머니.

어쩌자고 이러신대? 돌아가시려고 작정하신 거야? 관 무거워서 산에 못 올라갈까 봐 다 비우고 가시려고?

어머니, 어머니, 어머니.

아이고, 어머니, 제발 정신 줄 놓지 말고 생각 좀 하셔 봐. 내가 왜 어머니야? 그 양반이 몇 살이실 텐데, 백 살도 훨씬 넘을 텐데, 그런 양반이 어떻게 따님 아랫도리 수발을 하셔? 무슨 말인지 알아들으셔?

어머니, 어머니, 어머니.

에그, 며느리를 어머니라고 하시는 양반이 뭘 알아듣는다고, 물어보는 나도 정신 나간 거지.

어머니, 어머니, 어머니.

아이고 지겨워라, 그 소리.

어머니, 어머니, 어머니.

어머니는 나중에 저승 가서 찾으시고, 지금은 다시 주무시기나 하셔.   

  

차라리 못 알아들으면 좋겠다. 아예 못 들으면 더 좋겠는데 귀가 너무 밝다. 또 망측한 일을 저지른 것이다. 영영 정신 줄 놓아 버리고 단숨에 저승길로 달려가고 싶다. 누가 내 아랫도리를 더듬을 때마다 나는 죽고만 싶어진다. 그런데 사람 마음이 얼마나 간사한지 모른다. 그러면서도 작은 것 봤다는 말을 들으면 덜 미안해진다. 큰 용무이든지 작은 용무이든지 아랫도리를 보이는 낭패함은 마찬가지인데 저승길을 바라보던 눈을 돌려 이승을 기웃거리며 핑계를 댄다. 하루 만이라도 좋으니 기저귀 신세를 벗어나 살아 봤으면……. 언젠가 입이 매운 둘째 딸애가 그 말을 듣더니 침을 튀기며 따졌다. 어머니, 그냥 안 돌아가시고 싶다고 하셔. 그런 궁색한 핑계를 대지 말고 솔직히 말씀하셔. 아들 며느리 진을 다 빼놓아도 좋으니 오래 살고 싶다고 하셔. 돌아가시면 이도저도 다 벗어날 수 있는데 그런 걱정을 왜 하셔? 밖에서 올케가 들으면 어쩌려고 그러냐며 동생의 옆구리를 쑤셔대는 큰딸애가 픽픽 웃지만 않았어도 그냥 두지 않았을 것이다. 그만한 기운이 없기도 했지만 정나미가 떨어져서 말 한마디도 더 섞고 싶지 않았다. 하기는 열 달 동안 내 뱃속에 품었다가 죽을 만큼 고생을 하며 낳아 뼛골 빠지게 키운 자식의 소견머리가 그렇게밖에 안 되는데 무슨 할 말이 있겠는가. 그렇지만 한마디만은 꼭 해주고 싶었다. 너희도 당해 봐라, 똑같이…….

그 말을 하지 않았던 게 옳았다. 말이 씨가 된다고 행여 내 자식들이 이런 참담한 지경을 당하면 어쩌란 말이냐. 내 몸뚱이를 내 마음대로 움직이지 못하는 구차한 지경을 어찌 내 자식들에게 겪어 보라고 할 수 있는가. 그런데 도대체 누가 이리 민망한 일을 맡아 해주는가. 나하고 무슨 상관이 있어서 딸자식들도 마다하는 일을 맡아 하고 있는가. 하기는 딸자식들 탓할 수도 없다. 나도 우리 어머니 대소변 못 가리시고 누워 계실 때 한 번도 거들지 않았다. 서글퍼서 그랬다고 올케에게 둘러댔지만 사실은 징그러워서 못했다. 추접스럽게 늙은 어머니가 얼마나 원망스러웠는지 모른다. 혼자 남으신 아버지는 더 고약했다. 다행히 장조카가 효손이어서 찾아뵐 때마다 코를 쥔 채 잠깐 눈만 맞추고 못 이기는 척 등 떠밀려 아버지 방을 나왔다. 인과응보라고, 이제 그 죄를 고스란히 받는 것이다. 불효한 죄, 불경한 죄, 무렴한 죄…… 그 많은 죄명을 일일이 다 외울 수도 없다. 나는 절대로 아버지 어머니처럼 되지 않을 줄 알았으니 오만방자한 죄도 집어넣어야겠다.

그런데 어두워서 그런가, 백내장 수술했던 게 잘못되어서 그런가, 얼굴이라도 익혀 놓아야 신세를 갚을 텐데 잘 보이지 않는다. 누군지 몰라도 어지간히 고달픈지 손길이 거칠다. 원앙금침 안의 서방님이 아니라 저승 냄새 풍기는 노인네 아랫도리를 만지는데 다정할 수가 있겠는가. 서운하지만 당연한 노릇이다. 아니, 이보다 더 거칠게 굴어도 그 은혜가 백골난망이다. 죽어서도 이 은혜를 잊지 못할 것이다. 대체 뉘시오? 뉘시란 말이오?          

 

어머니, 어머니, 어머니.   

아이고, 또…….

어머니, 어머니, 어머니.

내 손을 잡으면 어떡해요? 손 좀 놔요, 놔.

어머니, 어머니, 어머니.

새삼스럽게 왜 이러신대? 여태 안 그러다가 이제 창피하셔?

어머니, 어머니, 어머니.         

제발 좀 가만히 계셔. 차가워도 할 수 없어. 지긋지긋하시겠지만 나도 마찬가지야. 잠들만 하면 일어나서 찍찍 물 뿌리고 닦아 내고, 꽃나무에 그렇게 했어 봐, 가지가 휘어지도록 대접만 한 꽃들이 방긋방긋 피었을 거야. 난 이제 분무기만 봐도 비위가 상하고 구역질이 나. 그렇게 공을 들여도 짓물러서 고생하신 게 벌써 몇 차례야? 어머니만 고생하시는 게 아니라 나도 죽겠어. 오죽하면 부채질을 했을까. 창피하고 염치없어서 그러셨겠지만, 눈 질끈 감고 주무시는 척하는 어머니가 얼마나 미웠는지 아셔?   

어머니, 어머니, 어머니.  

그때는 정신이 좀 있으셨잖아. 차마 며느리한테 미안하다고는 못하셔도 그만두라는 말은 한번쯤 하실 줄 알았지. 해 달라고 한 것도 아닌데 내가 알게 뭐야 하는 것처럼 시치미를 떼고 계시니까 밉지 않겠어? 아무튼 어머니 자존심은 알아줘야 해. 며느리 생면하는 자리에서 부족하고 아쉬울 것 없을 텐데 다시 잘 생각해 보라고 하실 때 알겠더라고. 없는 집에 와서 고생하겠다고 하셔도 되잖아? 아니, 절대 못하시지. 안하시지. 그 말도 얼마나 거만하고 당당하게 하셨는데. 그런 양반이니 오죽해서 그러실까 싶은 생각이 들면서도 너무나 미운 거야. 불쌍해 죽겠다가 미워 죽겠다가, 왜 그렇게 내가 변덕이 죽 끓듯이 하나 몰라.   

어머니, 어머니, 어머니.

솔직히 좋아서 하겠다고 처음부터 나선 것은 아니지. 우리보다 형편 좋고 넓은 집한테 미루고 싶었지. 그런데 결국 제일 마음 약한 사람이 하게 되어 있더라고. 지금이니까 하는 말인데, 애당초 결국 내 차지가 될 것 같았어. 이상하게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 그래서 다른 집들 돌아서 이리로 오셨을 때 차라리 마음이 편하더라고.

어머니, 어머니, 어머니.

기저귀를 처음 갈아 드렸을 때 얼마나 허망해졌는지 몰라. 사람 사는 게 별것 아니라는 말을 실감하겠더라고. 어머니는 또 얼마나 불쌍하던지. 며느리한테 그러고 싶은 시어머니가 어디 있겠어? 그래서 나는 아무 원망도 없이 해낼 줄 알았지. 왜 못한다고 두 손 들고 나자빠지는지 모르겠다고 혀를 찼지. 정말 내가 이럴 줄 몰랐어. 에그, 누가 보면 내가 망령 들었다고 하겠네. 주절주절, 횡성수설, 혼자서 잘도 지껄인다니까.

어머니, 어머니, 어머니.

어느 땐 내가 생각해 봐도 미친년 같아. 그래도 할 수 없어. 그렇게라도 안하면 정말 돌아 버리고 말 거야. 여기 이 명치 밑이 뭉근하게 아픈 게, 바윗덩어리가 짓누르는 것 같아서 숨을 쉴 수가 없어. 이것 봐, 또 그러네.

어머니, 어머니, 어머니.

잠자코 계셔 봐, 나 숨 좀 쉬게…….

어머니, 어머니, 어머니.

제발 그만 부르셔. 귀가 따가워 죽겠어.

어머니, 어머니.

다시 주무셔 봐. 눈 감고, 얼른 감고, 옳지, 이제 잡시다, 자요.

어머니.

그만, 그만. 그만하시라니까.

 

할 수 없이 눈을 감는 척한다. 그러나 절대로 자지 않을 것이다. 잘 수가 없다. 할 수만 있다면 이 밤을 평생 붙들고 있고 싶다. 영영 날이 밝지 않으면 좋겠다. 왜 나는 여자로 태어났을까. 전생에 무슨 죄를 그리도 많이 지어서 남자로 태어나지 못했을까. 겨우 열여섯 해를 데리고 살려고 어머니는 나를 낳으셨단 말인가. 아버지가 내게 박정하신 것은 지각이 들 때부터 깨달은 사실이지만 어머니가 이리도 매정하실 줄은 몰랐다. 시집을 가느니 차라리 죽어 버리겠다고 했는데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죽어도 처녀 귀신을 면해야 하니 시집을 가고 나서 죽으라고 하셨다. 그 말이 너무나 서러워서 이틀을 꼬박 울었다. 병약한 딸을 걱정하신 나머지 죽어도 원이나 없게 시집을 보내시려는 뜻을 나중에 외할머니에게서 들었어도 좀처럼 마음이 풀어지지 않았다. 백리나 떨어진 낯선 동네,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사람들만 우글거리는 집에서 나는 단 하루도 편히 숨을 쉬지 못할 거라고 울먹거렸다. 나도, 네 어미도 너처럼 그랬지만 이렇게 숨 잘 쉬고 살고 있지 않느냐. 외할머니의 말씀에 억장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어머니며 외할머니뿐 아니라 외할머니의 어머니도, 그 어머니의 어머니도, 그 어머니의 어머니도, 까마득한 옛날의 어머니도 그랬을 것이다. 그러니 나도 피할 수 없는 것이다. 순식간에 눈물이 마르고 서러움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그리고 나도 모르게 두 손을 불끈 쥐고 어금니를 악물었다. 내가 언제 무엇을 천지신명께 원했다고 여자로 태어나게 했는가. 그랬으면 봄날 뒷산에 만발한 진달래꽃이며, 안골 참외밭의 달큼한 여름 냄새며, 어둑새벽 군불 때는 아버지의 마른기침 소리며, 아무것도 보지도 듣지도 느끼지도 생각하지도 못하게 해야 했다. 기어코 글을 읽고 쓰고 싶은 욕심도 생기지 못하게 해야 했다. 차라리 장님이나 귀머거리를 만들던지. 아니면 수족 못 쓰는 병신이나 아무 지각도 없는 바보가 되게 했던지…… 어차피 나는 그렇게 되고 말 것이다. 이제 밤이 지나고 아침이 오면 그런 기막힌 날이 시작될 것이다. 나는 벌떡 일어났다. 이대로 가만히 있어서는 안 될 것만 같다. 내가 온전하게 살 수 있는 곳을 찾아가야 한다. 동구 밖을 나가 어디로 가야지 그런 곳을 찾을 수 있을까. 갑자기 마음이 조급해진다. 어둠 속에서 더듬거리며 옷을 주워 입고 보따리를 꾸렸다. 그리고 엉금엉금 방문 쪽으로 기어갔다. 살그머니 문고리를 잡고 힘을 주어 밀지만 꼼짝도 하지 않는다. 조급증 때문에 문고리를 쥔 손에서 진땀이 난다. 누가 들을까 봐 귀를 바짝 세워 본다. 아무도 나의 반란을 눈치 채지 못한 것 같다. 나는 기를 쓰고 다시 문을 밀어 본다.

 

아니 자다 말고 왜 방문은 두드리신대? 내가 꼭 끌어안고 잤는데 언제 빠져나가신 거야?

어머니, 어머니, 어머니.

앉은뱅이가 되신 양반이 어떻게 나를 타 넘고 거기까지 가셨대? 아무튼 기운도 좋으셔. 그렇게 싸시면서, 그렇게 안 주무시면서 어떻게 그런 기운이 생기나 몰라.         

어머니, 어머니, 어머니.

암만 애를 써도 소용없어. 고리를 따로 높이 달아 놓았으니까 어머니가 일어나시기 전에는 문 못 열어. 안 그러면 식구들이 잠을 못 자는데 어떡해. 제대로 잠을 자야지 돈 벌러 나가고 공부하러 나가지. 정 나가고 싶으면 어머니가 벌떡 일어나서 열어.

어머니, 어머니, 어머니.

맘대로 해보시라니까.

어머니, 어머니, 어머니.

소용없으니까 그만 두드리셔. 식구들 다 깨겠네.

어머니, 어머니, 어머니.

오기도 대단하셔. 그런다고 더 세게 두드리는 것 좀 봐. 아휴, 그만 좀 하셔. 온 아파트 사람들 다 깨우겠네.       

어머니, 어머니, 어머니.

그래, 기왕이면 더 세게 하셔. 그래서 다리 뻗고 속 편히 잘 자고 있는 자식들 집까지 다 들리게 더 세게 하셔.

어머니, 어머니, 어머니.

아이고, 내가 못살아, 못살아.

어머니, 어머니, 어머니.

제발 좀 그만하셔. 방문 부수겠네.

어머니, 어머니, 어머니.

자, 자, 그만하셔. 도대체 밤마다 왜 이러셔? 이렇게 진땀이 나도록 방문을 왜 두드리시냐고. 가슴이 벌렁벌렁 뛰도록 왜 그렇게 흥분을 하셔?

어머니, 어머니, 어머니.

자, 자, 고집 그만 부리고 저리로 가시자고. 기저귀도 좀 보고 잠 오는 약도 한 번 더 잡숩시다.  

어머니, 어머니, 어머니.

아이고, 징그러, 그 소리…….     

 

약을 먹어도 쉽사리 잠이 오지는 않을 것이다. 그래도 먹고, 또 먹어야지. 마음대로 손을 움직일 수만 있다면 쥘 수 있을 만큼 다 목구멍 안으로 넣고 싶다. 그까짓 쌀알만 한 걸 먹어서 까마득하게 달아나 버린 잠을 어떻게 잡을 수 있는가. 그 알량한 것을 심지어 네 토막으로 잘라 주면서도 그 양반은 마음을 놓지 못했다. 내가 몰래 온전한 것으로 다시 한 개를 삼킨 줄 알았다면 당장에 뱉어 내라고 온갖 소란을 피웠을지도 모른다. 겁이 많고 뒤가 무르기로는 누구한테도 일등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 그걸 감추느라고 버럭버럭 소리를 지르는 걸 모르고 모두 무섭고 어려워서 쩔쩔맨다. 언젠가 팔 남매가 한자리에 모여서 입을 모아 아버지 정을 모르고 자랐다고 서운해 하기에 듣다못해 털어놓았다. 간난 자식도 만지면 탈이 날까 무서워 매정하게 외면했다는 말을 아들도 딸도 믿지 않았다. 아버지를 감싸 주려고 어머니가 평생 소설을 쓰시느라 애쓴다는 고약한 말도 들었다. 너희들이 내 뱃속에서 열 달이나 있다가 나온 것들이냐는 탄식이 절로 나오는 걸 간신히 참았다. 나도 내 부모한테 그랬지만, 그래서 자식보다 징글징글한 게 없다고 하는 모양이다. 세월 잘 타고난 자식들 앞에서 나는 구차한 소리를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왜놈들이 이 나라를 빼앗지 않았더라면 할아버지가 서러운 땅을 구석구석 다 밟아 보시겠다며 복중의 아들과 생이별을 하셨을 것이냐. 층층시하 고단한 시집살이가 아니었다면 생사를 모르게 된 할아버지 때문에 애간장이 녹는 아픔을 한 번도 소리 내어 토해 보지 못하고 명치끝에 혹을 매달고 할머니가 스물도 못 채운 아들 며느리를 놓아두고 저승길로 가셨겠느냐. 같은 동족끼리 총을 들이대고 싸우는 참담한 난리가 일어나지 않았더라면 아버지가 두더지처럼 땅굴을 파고 들어가 피를 말리며 숨어 있었겠느냐. 그 양반의 반평생도 못 미치는 그만큼 만으로도 거북이 등처럼 딱딱하게 굳을 수밖에 없었던 겉 성질 속에 손끝만 스쳐도 겁에 질려 오그라드는 함수초 잎 같은 여린 속 성질이 있다는 것을 알아차릴 만한데, 마음으로 듣지 못하고 건성으로 귀만 열고 있는 자식들의 얼굴에는 지루한 표정만 가득했다. 그런다고 자식들만 나무랄 수도 없다. 살을 섞고 살았던 나 또한 그 양반의 곁에서 지겨워서 죽을 지경이라고 아우성을 치고 싶은 때가 얼마나 많았던가. 누구나 다 그렇게 제 눈으로만 보고 제 귀로만 듣는다. 그래서 곡절 많은 인생은 외로움의 골이 깊을 수밖에 없다.

아무리 기다려도 잠은 돌아오지 않는다. 하기는 무슨 염치로 편히 눈을 감는단 말인가. 자식 앞세운 죄를 받자면 평생 불면의 고통을 받아도 싸다. 그런데 저리 코를 골며 잘 수 있다니, 지독한 양반……. 하늘이 무너지는 소식을 듣고 저 양반은 사랑방으로 들어가 연거푸 큰아들 이름을 목이 터져라 불렀다. 충격으로 쓰러져 혼미한 정신으로 들었지만 천 리 밖에서 들어도 애간장이 녹을 만큼 애절한 통곡 소리였다. 저승길로 떠나는 아들도 그 소리를 들으면 차마 발을 떼지 못할 것 같았다. 그래놓고 내가 우는 소리는 막았다. 천하에 불효자식이야. 그런 지지리도 못난 놈 때문에 애통해 할 것 없어. 그리고는 남의 상가 일을 하듯이 장례 절차를 따지고 지시했다. 죽은 자식보다 그런 아비 때문에 더 기가 막힐 지경이었다. 심지어 나는 저렇게 독하니 자식을 앞세웠다며 이를 갈았다. 그런 아비 만나서 제대로 먹지도 자지도 못하고 객지에 나가 마음고생 몸 고생하다가 그래도 천운으로 타고난 복이 있어 남들이 부러워할 만한 형편을 누리는가 싶더니 저렇게 모질고 각박한 아비 때문에 제 명을 다하지 못하고 마흔둘에 가게 했다고 혼자 악을 쓰며 원통해 하기도 했다. 아비 복 없는 큰아들을 고향으로 데리고 가면서 이내 나도 뒤따라가리라 마음먹었다.

장지 일 때문에 먼저 내려가 있던 저 양반이 고향집 앞에 서서 장의차를 맞았다. 나는 저 양반이 지긋지긋해서 고개를 돌렸다. 금의환향할 고향땅을 이제 제 발로 밟아 보지도 못하게 된 아들 생각에 버스에서 내려 감히 땅에 발을 디딜 수가 없었다. 정신이 아득해졌다. 나는 그대로 정신을 잃어버리기를 간절히 바라며 버스 안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어느 순간 내 귀에 귀청이 터질 것처럼 우렁우렁한 곡소리가 들렸다. 얼마나 소리가 컸던지 나는 놀라서 벌떡 일어나 밖으로 달려 나갔다. 그리고 허둥지둥 그 소리를 찾아갔다, 그러자 채 버스에서 내리지 못한 관을 하염없이 두 손으로 쓰다듬으며 아들의 이름을 부르고 있는 저 양반이 보였다. 이상한 것은 저 양반의 목소리가 실제로는 들릴 듯 말 듯했다는 것이다. 장례의 다음 순서를 준비하려고 어수선하게 움직이고 있는 사람들은 제대로 듣지도 못할 만큼 작은 소리였다. 그런데 어떻게 버스 안에서 정신이 혼미한 내 귀에 그렇게 우렁차게 들렸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제야 나는 저 양반의 진심을 깨달았다. 더 이상 따라가지 못하고 고향집에 기진맥진 누워 버린 나보다 천하에 불효자식의 누울 자리를 간섭하려고 상여 뒤를 따라가는 독한 저 양반의 속이 더 험하게 문드러진다는 것을 아무도 짐작하지 못했을 것이다. 맥을 놓고 누워서 나는 아비의 그 애통한 소리를 듣고도 끝내 상여를 타고 저승길을 가는 아들이 어쩌면 더 모질고 야박하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그러고 보면 저 양반은 매일 밤 큰아들을 만나러 저승을 기웃거리는지도 모른다. 그러느라 고달프고 지쳐서 저승 문턱에 머리를 대고 정신없이 코를 골며 잠에 빠져들었는지도 모른다. 아무렴, 그러고도 남을 양반이지. 아무래도 약을 더 먹어야겠다. 아니지, 내가 잠을 자면 안 되지. 오늘 밤에는 저 양반 대신 내가 저승을 기웃거려야지 왜 기를 쓰고 잠을 자려고 하는가. 가자, 어서 가 보자. 얘, 큰애야, 오늘 밤엔 어미가 너를 찾으러 간다. 애야, 큰애야…….   

  

어머니, 어머니, 어머니.

아이고, 또 문 두드리시네. 미쳐, 내가 미쳐.

어머니, 어머니, 어머니.

약도 소용없으니 어쩌면 좋아. 젊은 사람도 그만큼 먹으면 맥을 못 추고 까라질 텐데 구십 노인이 어찌 저러신데.

어머니, 어머니, 어머니.

어휴, 귀 따가워. 제발 그만 좀 하셔.

어머니, 어머니, 어머니.

도대체 문 열고 나가서 뭐하시려고?

어머니, 어머니, 어머니.

그래, 맘대로 해보셔. 자, 문 열어 드렸으니 어머니 혼자 저 껌껌한 데 나가서 거실이며 부엌이며 원 없이 돌아다니셔.

어머니, 어머니, 어머니.

왜 또 그러셔? 문 열어 줘서 고맙다고? 아이고, 무슨 그런 황송한 말씀을……. 이 밤중에 시어머님한테 그런 황송한 말씀을 들으니 몸 둘 바를 모르겠네. 없는 정신에 인사치레까지 챙기셨으니 이제 그만 볼일 보러 나가 보셔.

어머니, 어머니, 어머니.

얼씨구, 엉덩이 밀면서 잘도 가신다. 어디를 가시는데 저렇게 기운이 펄펄 나실까. 저렇게 다니시니 팔에 알통이 생기지. 어두운데 어디까지 가신대? 하기는 하도 돌아다녀서 눈 감고도 다니실 거야. 그나마 앉은뱅이가 되셨기 망정이지 멀쩡하게 걸어 다니면 어쩔 뻔했어. 방문이 아니라 현관문 열고 나가서 사방천지 온 데를 다 돌아다녔을 텐데, 아이고, 그런 양반을 쫓아다니자면 내가 먼저 쓰러지고 말지, 몸뚱이뿐이야? 내 정신도 온전하지 못하지. 생각만 해도 끔찍하네.

어머니, 어머니, 어머니.

어쩌다가 영특하신 양반이 저 지경이 됐나 몰라.

어머니, 어머니, 어머니.

청산유수로 지껄이시던 말들을 어떻게 다 잊어버리고 어머니만 남았는지 몰라. 아버지, 동생, 삼촌, 언니도 아니고 왜 하필 어머니야? 어머니는 죽어서도 맘 편히 못 누워 있으라고? 그 어머니는 지금 얼마나 지겨우실까. 나 같으면 절대로 들은 척, 아는 척 안 해.

어머니, 어머니, 어머니.

아이고, 거기서 그렇게 시끄럽게 하면 어쩐대? 내일 출근할 사람 다 깨워 놓겠네. 이리 오셔, 얼른. 이쪽으로 오셔.

어머니, 어머니, 어머니.

못살아, 내가. 기어코 깨우셨네. 주희야, 별일 아니니까 들어가. 어머니, 이리 오셔.  

어머니, 어머니, 어머니.

손가락 하나 움직일 기운도 없는데 기어코 나를 부리시려고 하네. 그냥 오셔, 나 부르지 말고. 가던 대로 밀고 오시면 되잖아. 갈 때는 혼자 잘 가셔 놓고 왜 못 오셔. 십 리 길이야, 백리 길이야? 주희야, 할머니 놔두고 어서 들어가서 눈 붙여.    

어머니, 어머니, 어머니.

제발 정신 좀 차리셔. 손녀딸을 붙들고 어머니라고 하면 어떡해? 자, 이 손 놓고 우리 방으로 갑시다. 저기 우리 방, 어머니랑 나랑 자는 방말이야.

어머니, 어머니, 어머니.

우리 방, 아니 어머니 방, 어머니 방으로 가시자고. 자, 자, 어서, 저기 어머니 방, 어머니 빨리 오시라고 문도 열려 있고, 불도 환하게 켜져 있네. 어서어서 가셔.

어머니, 어머니, 어머니.

자, 다 오셨네. 어서 들어가셔. 왜 또 고집을 피우신대? 어머니 방이라니까. 봐, 어머니 이불도 있잖아. 이 방에서 사신 지가 언젠데 새삼스럽게 왜 그러신대? 일 년 반도 넘게 이 방에서 어머니가 똥 싸고 오줌 싸고 온갖 속을 다 썩여 놓고 왜 몰라? 어머니 방이라니까. 그러고 날 새려고? 나 좀 자게 해줘. 나를 자게 해줘야지 어머니하고 또 싸우지. 자, 내가 밀 테니 들어갑시다. 자, 자, 옳지, 옳지. 이제 옆으로 한 바퀴 굴려서 누웁시다. 됐다, 됐어. 자, 이제부터 꼼짝 말고 주무셔. 아무리 시끄럽게 해도 나는 안 들을 테니까 잠이 안 와도 어머니 부르지 말고 아침까지 가만히 눈 감고 계셔. 아셨어? 여기가 어머니 방이니까 어디 갈 생각하지 말고 그대로 계셔, 응?

 

어머니 방이라니. 내 방이라니. 여기가 어쩌자고 내 방인가? 아무리 봐도 낯설기 짝이 없는 그 방을 어머니 방이라고 떠밀어 넣는데, 그렇듯 황당하고 참담한 지경은 내 평생 처음이었다. 경로당에 나가 있으면 할 수 없이 자식들 집에 들어간 노인들 이야기를 심심치 않게 들었다. 자의건 타의건 그렇게 된 노인들의 뒷이야기는 처량했다. 사 남매가 매일 번갈아 가면서 찾아와 같이 살자고 졸랐다던 과수원집 할머니에게서는 흐뭇한 이야기를 들을 줄 알았다. 그래서 일부러 전화를 걸어 보았다. 쉬는 날마다 사 남매가 모여 심심치 않게 해준다고 자랑을 하는데도 목소리에 기운이 없었다. 호강에 겨운가 보다고 얄미운 생각이 들어 그만 통화를 끝내려는데 나를 붙들고 간곡하게 말했다. 아무리 호강을 해도 마음이 편치가 않아. 몸 건사 잘해서 죽을 때까지 내 방구석을 지키고 있어. 나도 그런 생각을 하지 않은 게 아니었다. 온몸 구석구석이 다 무너지고 망가져서 더 이상 자식들에게 오기를 부릴 수 없는 처지가 되었지만 정신이 말짱한 이상 자식들 눈치 보며 살고 싶지는 않았다.

물론 자식들 집에 가 있으면 그 양반도 나도 심심해서 주리를 틀 만큼 할 일이 없지만  마음은 좀처럼 쉴 틈이 없었다. 현관문이 조금만 세게 닫혀도, 며느리 목소리가 조금만 높아져도, 아들 입꼬리가 조금만 처져도, 손자가 조금만 야단을 맞아도, 밥이 조금만 꼬들꼬들해도 두 늙은이 때문인가 싶어서 저절로 신경이 곤두섰다. 생전 남의 눈치를 모르고 사신 그 양반 때문에 더 신경을 써야만 했다. 시골집에 계실 때처럼 어둑새벽에 일어나셔야 하고, 식전에 반주 한 잔을 꼭 드셔야 하고, 똑같은 시간에 세끼 식사를 하셔야 하고, 식사 후에는 커피 한 잔씩 마셔야 하고, 식구들 나가고 들어올 때마다 꼬박꼬박 인사를 다 받으셔야 했다. 아침에 거실로 나가시면 잠자리에 들기 전에는 방에 들어가시지 않았다. 아무리 말씀을 드려도 소용이 없었다. 왜 자꾸 잘못한 사람 취급을 하느냐고 역정을 내셨다. 그러면 나도 할 말이 없었다. 그렇다고 자식들 집에서는 잘못한 게 없어도 잘못한 사람처럼 지내야 한다는 말을 해드릴 수도 없었다. 그런 말도 안 되는 말을 차마 할 수가 없었다. 우리 앞에서 고물거리며 기어 다니던 자식들이 머리가 허옇게 반백이 되어 가는 동안 세상이 수없이 뒤집어져서 인륜이며 도리를 감히 따질 수도 없게 되어 버린 것도 모르고 여전히 허리를 빳빳이 세우고 있는 답답한 그 양반 때문에 속을 끓이고 애를 태우지만 기를 쓰고 끝내 말리고 싶지는 않았다. 자식한테 부모 대접 받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하시는 양반이 잘못인가. 옳고 그른 것을 분별할 수 없게 뒤집어진 세상이 잘못이지. 그래서 나는 이승의 마지막 날까지 그렇듯 난공불락의 성으로 버티어 주시기를 자식들 몰래 얼마나 빌었는지 모른다. 다시 시골집으로 돌아와 내 방에 누우면 더 간절하게 빌었다. 이보다 더 편안하고 한가한 곳이 세상천지 어느 곳에 있단 말인가. 부디 당신 덕분에 오래오래 이 방을 누리게 해주소서…….

정말 나는 그 양반이 그렇게 해주리라고 믿었다. 그래서 마음 놓고 오만방자하게 굴었다. 삭신이 쑤시고 결려서 돌아눕지도 못하겠으면, 밥상 차리기 귀찮으면, 자식들 전화가 뜸해져서 서러워지면, 귀가 안 들리신다는 핑계로 당신이 어서 죽어야 내가 자식들 집에 가서 편하게 산다는 악담을 목청껏 퍼부어댔다. 하루에 딱 세 번 드시던 커피며 반주를 돌아서면 잊어버리기를 수없이 반복하시는데도 고래고래 소리만 질러댔다. 이발하러 나가셔서 하루 종일 돌아오지 않으셔도, 삼복에 겨울 잠바를 찾아 입어도, 노망이라고는 꿈에도 생각해 보지 않았다. 마당에 비질을 하러 나가셨다가 바지가 녹아서 구멍이 날 만큼 불에 덴 줄도 모르고 들어오실 때서야 예사롭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화를 받고 부랴부랴 약을 들고 달려온 셋째가 허벅지에 손바닥만 하게 난 상처를 치료해 줘서 마음을 놓았는데, 사나흘 뒤 잠결에 듣는 그 양반 신음 소리가 심상치 않았다. 제멋대로 상처를 만지고 빨지 않은 방 걸레로 꼭꼭 싸매어 놓아서 곪아터지다 못해 살이 썩어 들어가는 것을 그 양반 자신도 몰랐던 것이다. 급히 서울로 모시고 갔지만 한 달을 채 넘기지 못하셨다. 그 한 달여 동안 어지간히 자식들이며 내 속을 썩이셨다. 하도 속이 상해서 병원으로 가신 뒤에는 좀처럼 보러 갈 마음이 생기지 않았다. 나보다 두 살이 아래시니 적어도 그만큼은 앞서 가지 않을 줄 알았는데, 아무 귀띔도 없이 칠십 년 넘게 같이 살아 준 사람을 배신하셨다는 생각에 돌아가신다고 해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작정을 했다. 속 모른 자식들은 그런 나를 두고 제멋대로 입방아를 찧어댔다. 결국 딸자식들이 나서서 윽박질렀다. 어머니 때문에 올케들 보기 민망해 죽겠어. 마나님도 마다하시는 양반을 어느 며느리가 돌보려고 하겠어? 같은 병실에 있는 사람들이 할머니는 먼저 돌아가셨냐고 물어보는데 창피해 죽을 뻔했어. 간병인한테도 얼마나 눈치가 보이는지 알아요? 아무리 힘드셔도, 함께 누워 계시게 되더라도 한 번 가 보셔야지. 할 수 없이 두 팔을 딸들에게 맡기고 질질 끌리다시피 병원으로 가 보았다. 내심 그렇게 큰소리칠 만큼 그 양반을 잘 대접해 드리고 있을 거라고 믿었다. 병실로 들어선 순간 나는 그대로 주저앉았다. 주렁주렁 주사약을 매달고 두 손을 묶인 채 코 줄을 꿰이고 몸부림을 치고 있는 그 양반은 사람의 꼴이 아니었다. 항우장사 같은 기운으로 눈 깜짝할 사이에 주사바늘이며 소변 줄까지 뽑아버려서 어쩔 수가 없다고 자식들이며 간병인이 돌아가며 변명을 했지만 도저히 용서할 수가 없었다. 차라리 살이 썩어 문드러지다 못해 뼈까지 썩어도 모른 척 그대로 시골집에 계시게 할 것을……. 어차피 노망 덕분에 아픈 것도 모르고 괴로운 것도 모르셨을 테니 그러는 편이 훨씬 나았다. 훨씬 더 사람다웠다. 후회막급이지만 돌이킬 수 없으니 더 기가 막혔다. 그 양반 앞에 넋을 잃고 앉아 그만 가시라는 말을 마음속으로 수도 없이 했을 뿐, 아무것도 도와드릴 일이 없었다. 여봐요, 아직 정신 남아 있거든 내 말 좀 들으셔요. 남은 명줄 얼른 놓아 버리고 어서 가셔요, 제발 가셔요. 여봐요, 여보…….

 

어머니, 어머니, 어머니.

어머니, 어머니, 어머니.

어머니, 어머니, 어머니

 

머리맡을 더듬어 보니 내 방이 아닌 것이 분명해진다. 물 대접, 약병, 효자손, 숟가락, 수건, 방 걸레, 파리채, 휴지, 요강…… 심지어 껄끄러운 먼지도 손에 잡히지 않는 걸 보면 내 방이 아니다. 여기가 어디인가. 막내네 집인가. 셋째네 집인가. 아니면 둘째네 집인가. 그 양반을 떠나보내며 다짐했다. 나는 어떻게든지 정신 붙들어서 사람답게 살다 가겠다고. 여자로 태어난 것도, 그래서 부모 형제를 떠난 것도, 낯선 남자와 살을 섞고 아이를 낳아 어미가 된 것도, 세월 따라 늙어 저승 문 앞에 서게 된 것도, 내가 어찌할 수 없는 천명이지만 그것만은 내 의지대로 하고 싶었다. 그러자면 어서 기운을 차려 시골집, 내 방으로 돌아가야만 했다. 부지런히 밥을 챙겨 먹고, 좋은 약이며 좋은 주사도 챙겨 자꾸만 구부러지는 무릎이며 허리를 반듯하게 세워야 했다. 하루라도 빨리 내려갈 생각을 하니 마음이 조급해져 아들을 조르고 며느리를 독촉하고 딸들을 불러들였다. 안 돌아가시려고 기를 쓴다고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려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어서 기운 차려 내려가 보란 듯이 살아 주면 어떤 누명도 다 벗게 될 테니 귀 막고 입 막고 있자고 나를 다독거렸다. 어느 날엔 뽀얀 사골국물을, 어느 아침에는 근근한 찰밥을, 어느 저녁에는 매운 겉절이를 먹으면 벌떡 일어설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내 몸뚱이는 이미 내 편이 아니었다. 먹는 대로 탈이 났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았다. 처음에는 잠자코 열심히 비위를 맞추던 딸들도 어미를 타박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시아버지 병간호 때부터 고달팠던 막내며느리가 기어코 두 손을 들고 말았다. 더 마음이 조급해져서 시골집과 가까운 셋째네로 가겠다는 말을 흘려 보았다. 그러나 막상 막내로부터 정 그러시면 잠시만 다녀오시라는 말을 듣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가만있자, 그런 게 아니었나.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 나를 내쫓았던가. 막내 집에서 살고 싶다고 했는데 아무도 듣지 않았던가. 아니다. 내 집, 내 방에서 기어코 나를 끌어내더니 어디론가 데리고 갔다. 아니, 내 자식들이 그럴 리가 없다. 없는 부모 때문에 그리 고생을 하고도 원망 한번 해본 적 없었다. 긴 병에 효자 없다고 아버지 보내느라 고생하고 한숨 돌릴 사이도 없이 또 어미가 속을 썩이니 지칠 수밖에 없다. 자식이 하나면 모를까, 죽어라고 하나만 고생시키는 것은 경우가 아니니 어찌 되었든 셋째네로 가겠다고 한 것은 잘한 일이다. 그런데 도대체 나를 어디로 데리고 갔는가. 나를 느닷없이 어느 방문 앞에 세우더니 어머니 방이라고, 내 방이라고 모두 등을 떠밀었다. 먼지도 없고, 외풍도 없고, 구질구질하게 늘어놓은 것도 없는 깔끔하고 단정한 방이었지만 나는 불안하고 무서웠다. 어떻게 알았는지 셋째 내외가 내 방을 찾아왔기에 무섭다고 했더니 매일 아침저녁으로 들러 위로를 해주었다. 그래도 마음이 안 놓였던지 내 옆에 사람을 붙여 놓았다. 음식 솜씨도 좋고, 목소리도 좋고, 마음씨도 좋은 여자였다. 그 여자 덕분에 덜 무서워졌지만 저녁밥을 주고 셋째네가 오면 돌아갔기 때문에 밤에는 여전히 무서웠다. 셋째가 나를 안심시키려고 저희 집이라고 했지만 믿을 수가 없었다. 얼른 시골집, 내 방에 가 있고 싶다고 말했더니 이 집이 저희 집이니 어머니 집이고 그래서 이 방이 어머니 방이라고 몇 번이나 말했다. 그래도 내 방을 고집했더니 그 집이, 그 방이 뭐가 좋다고 가지 못해 애를 태우느냐고 서운해 했다. 셋째는 전화기를 내 귀에 대고 다른 자식들 목소리를 들려주며 나를 달래려고 했다. 그러면 모두 내 말은 들으려고 하지도 않고 야단을 치기만 했다. 심지어 오도 가도 못하게 된 형편인 줄도 모르고 배부른 소리한다는 말도 들었다.

남들이 부러워하는 자식들을 두었는데도 그런 억울한 소리를 들으니 세상 꼴이 얼마나 험한지 알 만했다. 나는 그럴수록 하루빨리 내 방으로 돌아갈 궁리만 했다. 살다 보면 자식들이 철이 들어 내 속을 알아줄 날이 있을 거라고 믿었다. 그런데 구십을 살았는데도 자식들은 여전히 내 속을 모른다. 내 뱃속에서 나와 내 젖을 먹고 내가 해주는 밥을 먹었으면서도 어미가 어떤 사람인지를 모른다. 어미라는 인종이 따로 있는 줄 안다. 저희들도 아비 어미가 되었으면서도 모른다. 알려고 하지도 않는다. 저희들과 같이 있을 때야 그럴 수 있다고 하지만, 제각각 나가서 일가를 이루어 살고 있고, 그 양반도 가시고 나 혼자 있게 되었는데 왜 나를 한 사람으로 생각해 주지 않는지 모르겠다. 그래도 나는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걷지 못하면 기어서라도, 기지 못하면 등으로 밀고 다니면서라도 남은 생을 나, 김성순이라는 사람으로 살아 볼 것이다. 단 하루만이라도 좋으니 그렇게 살아 볼 것이다. 어서 가야지, 내 집으로, 내 방으로…….

  

어머니, 어머니, 어머니.

어머니, 어머니, 어머니.

어머니, 어머니, 어머니.

 

아무리 어두워도 갈 수 있다. 눈으로 보지 못하면 손으로 더듬어서라도 갈 수 있다. 그런데 무엇이 이리도 내 걸음을 더디게 만드는가. 도대체 이게 무엇인가.

 

어머니, 어머니, 어머니.

어머니, 어머니, 어머니.

어머니, 어머니, 어머니.

어머나, 어머나, 이게 무슨 냄새야?

어머니, 어머니, 어머니.

아이고 맙소사! 똥 기저귀를 왜 들고 계신대? 이리 내놓으셔, 얼른 이리 줘. 도대체 무슨 짓을 하신 거야?        

어머니, 어머니, 어머니.  

이 이불을 어떻게 해? 이 옷은 어쩐대? 난 몰라, 난 몰라.

어머니, 어머니, 어머니.

제발 정신 좀 차리셔, 어머니! 어쩌자고 이러셔? 나 말려 죽이려고 작정하셨어? 우선 손 닦고 옷부터 벗자고. 어머니, 말 좀 들으셔!

어머니, 어머니, 어머니.

이불 좀 뜯게 꼼짝 말고 거기 가만히 계셔. 추워도 어쩔 수 없어. 누가 겨울인지 몰라서 이 새벽에 창문을 활짝 열어 놓는대? 아이고, 이 냄새를 어떻게 해.

어머니, 어머니, 어머니.

제발 그 소리 좀 하지 마셔. 내가 미쳐 죽겠단 말이야. 벽에다 똥칠한다는 말을 들었어도 설마 했는데 이제 어쩌면 좋아. 어머니, 도대체 어쩌려고 그래? 이렇게 망령을 부리면 나도 못해. 그러면 이제 어디로 가실 거야? 요양원으로 가실 수밖에 없어. 할 수 없다니까. 그런 불효자식이 안 되려고 애를 써도 어머니가 기어코 불효자식을 만드는데 어떻게 해? 그런다고 자식들 원망할 수도 없어. 누가 견뎌? 이건 사는 게 아냐. 매일 밤 지옥도 이런 지옥이 없어. 간병인이 벌써 몇이나 달아났어?

어머니, 어머니, 어머니.

물 떠 올 테니 거기 그대로 가만히 계셔. 지금 목욕 못 시켜. 아침에 애비가 안고 가던지 해야 씻기지 도저히 못해. 아이고, 락스도 가져와야겠다. 이 방바닥을 어쩌면 좋아.

 

도대체 내가 무슨 짓을 한 것인가. 왜 저 애가 눈을 부라리며 화를 내는가. 왜 이리도 몸서리치게 추운가. 이 고약한 냄새는 어디에서 나는가. 이런 데 나를 놓아두고 저 애가 어디로 가는가. 날더러 이제 아무 데도 가지 말고 죽는 날까지 저하고 있자고 했던 애가 왜 저러는가. 내가 어떻게 했기에 저 애도 나를 버리려고 하는가.

  

어머니, 어머니, 어머니

가만히 좀 계셔. 비누칠을 해야 될 것 아냐. 누구는 보고 싶어서 보고 만지고 싶어서 만지나. 어머니, 정말 너무하셔. 다른 사람들 다 그래도 어머니는 끝까지 정신 말짱하실 줄 알았는데. 그래서 며느리 고생 안 시키고 점잖게 가실 줄 알았는데. 당신 입으로도 그러느니 혀 깨물고 죽을 거라고 수없이 장담하셔서 철석같이 믿었는데 이게 뭐야. 어머니 꼴이 이게 뭐냐고.

어머니, 어머니, 어머니.

제발 정신 좀 차리셔, 제발. 아무리 정신이 없어도 그렇지, 창피하지도 않아? 이런 꼴을 자식들한테 보이고 싶어?

어머니, 어머니, 어머니.

제발 어머니 정신 좀 차려. 이러지 마. 날더러 어떡하라고 이러셔? 어머니가 미워 죽겠어. 얼마나 미운지 그만 돌아가시면 좋겠어. 하루에도 몇 번씩 그래. 어머니 때문에 나는 천당도 못 가고 극락도 못 가. 차라리 내가 아주 악질이면 좋겠어. 그래서 어머니가 조금도 불쌍하지 않고 죽어라고 미워하면 좋겠어. 얼마든지 욕을 하고 지랄을 하면 좋겠어. 모두 용하다고, 착하다고 하지만 나를 모르고 하는 말이야. 지금도 나는 어머니가 죽어라고 미워. 지겹고 끔찍해. 그런데 아직도 마음 한구석에서는 불쌍해 죽겠어. 어머니, 정말 나도 내가 지겨워. 어머니는 더 그러겠지만 나도 내가 지겨워 죽겠어. 어머니, 날더러 어떻게 하라고 이러셔? 나한테 왜 이러셔?

어머니, 어머니, 어머니.

어머니, 제발 그러지 마. 그렇게 빌지 마.

어머니, 어머니, 어머니.

내가 빌게. 정말 간절하게 빌어. 어머니, 제발 우리한테 이러지 마셔. 나한테 이러지 마. 어머니를 미워하지 않게 해줘. 어머니, 우리한테, 나한테 더 이상 기대하지 마셔. 언젠가 그래도 어머니가 정신이 좀 있을 때 나랑 텔레비전 보면서 뭐라고 하셨지? 치매 걸려서 똥오줌 못 가리고 속 썩이는 노인네한테 예쁘다고 입을 쪽쪽 맞추는 환갑 넘은 아들 보면서 얼마나 욕을 하셨어. 저게 무슨 자식이냐고. 저걸 잘하는 짓이라고 방송에 내고 자랑하냐고. 천하에 나쁜 놈이라고……. 그런데 어머니, 속으로는 부러웠던 거야? 그래서 어머니도 우리가 그렇게 하는가 보려고 이러시는 거야? 아냐, 어머니. 기대하지 마셔. 나도 내가 얼마나 더 무서운 생각을 할지 모르겠어. 그러니 제발 나 안 그러게 해줘. 나 좀 살려 줘, 어머니.

어머니, 어머니, 어머니.

어머니, 제발 그러지 마. 제발…….

 

이제 알겠다. 내가 왜 이 방에 있는지를…… 지금 내가 무슨 짓을 했는지도 생각이 난다. 어쩌다가 내가 이 지경이 되었는가. 창피하고 속상하고 염치가 없어서 혀를 깨물고 죽고 싶다. 할 수만 있다면 내 몸뚱이를 잘라 내 버리고 싶다. 사람의 얼굴을 하고 어떻게 이런 몸뚱이를 가질 수 있는가. 미안하다, 애야, 나는 정말 징글징글한 이 몸뚱이를 너한테 맡기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네가 깨기 전에, 네가 보기 전에 나 혼자 감쪽같이 치우려고 했는데, 더 이상 너를 괴롭히지 않고 내 방을 찾아가려고 했는데, 정말 그런 것인데, 미안하다, 애야. 내가 너를, 내 자식들을 도대체 얼마나 괴롭히고 있는 것이냐. 용서해라, 제발 나를 용서해라. 아니, 용서하지 마라. 절대로 용서하지 마라. 그리고 내가 정신 줄을 다 놓아 버려 이보다 더 참담한 꼴이 되어도 두 눈 똑바로 뜨고 지켜보거라. 그러면 사람으로 태어났다고 해서 다 사람으로 살다가 사람으로 죽는 게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될지도 모른다.

정말 미안하다, 애야, 내 자식들아, 이 사람들아…….

  

어머니, 어머니, 어머니.

어머니, 어머니, 어머니.

어머니, 어머니, 어머니.  《문장웹진 7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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튤립이 있는 식탁보 강태식 존슨 카운티 외곽에는 중산층들이 모여 사는, 거의 모든 면에서 깨끗한 주택가가 형성되어 있었고, 완전히 똑같이 생긴 집들이 - 지붕과 창문과 현관 손잡이와 마당을 두른 나무울타리의 모양까지 똑같은 집들이 - 거리 이쪽 끝에서 저쪽 끝까지 죽 늘어서 있었다. 진입로에는 작고 예쁜 우체통이 서 있고 - 어느 집이나 다 - 우유 배달 업체의 상표가 찍힌 낡은 주머니나 고양이에게 먹이를 주지 말라는 팻말이 울타리 한쪽에 걸려 있으며 마당 잔디가 빗질 자국이 남아 있는 머리처럼 잘 정돈되어 있었다. 화단에 심은 꽃들도 거의 비슷하거나 완전히 똑같아 보였다. 차를 몰고 천천히 지나면서 보면 그랬다. 어디선가 가끔 피아노 치는 소리가 들리기도 했는데 모든 음이 기계가 치는 것처럼 정확했지만 음이 정확하다는 것말고는 전혀 특별할 것이 없는 연주였다. 얼마 전에 하나뿐인 아들 톰을 다른 주에 있는 대학에 보낸 벤 하우저와 로지 하우저도 그 거리에 있는 많은 집들 중 한 곳에서 살았다. 그들은 아직도 아들의 방문 앞에 멍하니 서서 그 안에 아들이 쓰던 물건들만 - 사인볼과 다 버리고 딱 두 개 남은 레고 모듈러 시리즈와 절대로 버리지 말라고 고집을 부려서 버리지 못한 낡은 청바지와 픽업트럭을 끌고 이케아 매장에 가서 사온, 벤이 꼬박 이틀 동안 조립해서 겨우 완성한 오래된 이층 침대와 디딤판에 노란색 번개 마크가 크게 프린팅된 스케이트보드 같은 것들만 – 남아 있다는 것을, 자기들이 그런 물건들과 함께 - 한때 아들이 필요로 했던 물건들과 함께 - 그 집에 남겨졌다는 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결정하지 못한 상태였다. 하지만 벤과 로지는 아들이 자기들 품을 영영 떠났다는 것을 어렴풋이 짐작했고 - 날마다 그런 짐작이 확고한 사실로 굳어 가는 것을 지켜보았고 - 자기들이 톰의 방문을 바라보며 아주 많은 시간을 보내게 되리라는 것을 예감했다. 벤은 불을 켜지 않은 거실에 앉아 - 창 너머로 어둠이 차오르고 있었지만 벤은 희미한 빛이 감도는 그맘때의 거실을 둘러보며 오래 쓴 소파에 가만히 앉아 있는 것을 좋아했다. - 로지가 외출 준비를 완전히 마치고 이제 정말 다 끝났다고 말해 주기를 - 립스틱만 바르면 된다거나 스카프만 고르고 금방 나가겠다는 말말고 진짜 이제 정말 다 끝났다고 말해 주기를 - 기다리고 있었다. 벤은 탁자 위에 놓인 리모컨을 한동안 바라보다가 리모컨으로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문득 생각이 난 것처럼 손을 뻗어 TV를 켰고, 채널을 이리저리 돌린 뒤에 다시 TV를 껐다. “뭐 해, 벤?” 로지의 목소리가 한 블록 떨어진 곳에서 망치질을 하는 것처럼 안방 문 너머로 들려왔다. 화장대 앞에 앉아서 눈썹을 그리거나 파운데이션을 더 꼼꼼하게 바르면서 몸을 뒤로 틀어 소리 지르는 로지의 모습이 눈에 선했다. 옷에 붙은 머리카락을 손가락 끝으로 집어 떼어내거나 잠자리에 들기 전에 침대보를 잡아 펴는 것처럼 오랜 세월 동안 숱하게 보아 온 모습들. “아

  •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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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사랑 없이는 깰 수 없는 유일한 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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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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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겐 낮술이 필요한 것 같은데 전하영 R과 나는 바닷가의 한 도시로 가는 기차를 타고 있었다. 우리는 그 도시에 있는 어느 서점의 초청으로 북토크에 참석할 예정이었다. 처음에는 서점이라고 해서 작은 가게인 줄 알았는데 꽤 규모가 있었고 로컬에서는 인지도도 높은 곳이었다. 사례비가 두둑해서 나는 바쁜 R을 설득해 초청 인사로 함께 행사에 참석하기로 했다. 이럴 때는 그가 야근을 밥 먹듯 하고 시도 때도 없이 불려 다니는 일을 한다는 게 도움이 됐다. 주말에 집에 들어가지 못할 이유를 손쉽게 만들어낼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북토크는 공식적으로도 그의 일의 연장이었다. 북토크에서 이야기할 책은 내가 이십 년 전에 쓴 소설로 처음에 출간됐을 때만 해도 거의 팔리지 않았는데, 영화화되면서 다시 읽히기 시작했다. R은 그 영화의 제작자였다. 그가 우연히 들른 카페에서 책을 발견했고 영화화를 제의해 왔다. 안 될 게 뭐람? 그 책은 세상에서 잊힌 것이나 다름없었으므로 나는 반갑게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 솔직히 말하자면 적지 않은 이차 저작권료에 더 관심이 많이 갔는데 알고 보니 그쪽에서는 내가 당연히 그보다 큰 금액을 부르리라 예상하고 미리 낮춰서 제시한 금액이라고 했다. 그런 사정을 파악하게 된 것은 R과의 관계가 좀 더 사적인 성격으로 진전된 이후의 일이었다. 그 후로 많은 것들이 변했다. 책이 영화화되자 죽은 사람이 돌아온 것처럼 책에 쓰인 시절도 내게 함께 돌아왔다. 이십 년 정도가 지나면 당시의 나를 더 이상 나라고 부를 수 없을 정도로 상황과 감정이 바뀐다. 인간의 몸은 7년마다 세포 전체를 모조리 갈아치운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책이 처음 출간된 이후 대략 세 번쯤은 완전히 다른 나로 거듭나 있는 셈이나 마찬가지였다. 가장 잘 아는 타인을 덕질하듯이 나는 과거의 나에게 향수를 느끼며 그때 그 시절의 장소를 방문하며 추억에 잠기곤 했고, 그때마다 함께하는 상대에게는 숨은 의도를 밝히지 않고 다른 볼일이 있는 것처럼 둘러댔다. 그것은 최근 들어 생긴 나만의 비밀이자 즐거움이었다. 북토크를 위해 우리가 방문하는 도시는 한때 유명한 관광지였지만 오랫동안 쇠락의 길을 걷다가 최근 들어 다시 각광 받기 시작한 지역이었다. 모든 것이 너무 비싸고 조밀한 서울에 진력이 난 젊은 사람들이 조금씩 모여들었고 사람들이 모이니 인터넷 매체들이 관심을 보였다. 이제 조만간 영화나 드라마의 촬영지로 물망에 오를 테고 그렇다면 이 도시도 많은 다른 곳들과 마찬가지로 프랜차이즈 카페와 플라스틱 상징물로 가득 찬 어느 평범한 한국의 소도시 중 하나로 거듭날 것이었다. 다름 아닌 영화제작자를 데려가는 셈이니 어쩌면 내가 그 도시를 망가뜨리는 하나의 중요한 계기를 마련하고 있는 건지도 몰랐다. 망상에 불과하겠지만 그런 생각이 들었다. 온 세상이 나를 쳐다보고 있다는 느낌. 내가 하는 작은 행동이 불러일으키는 더 큰 효과에 대한 전망. 책이 영화화된 뒤로 줄곧 내가 느끼는 감정이었다. 기차가 출발하기를 기다리는 동안 R에게 그 도시에 가본 적이

  • 관리자
  • 2024-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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