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대한민국 태극기이 누리집은 대한민국 공식 전자정부 누리집입니다.

공식 누리집 주소 확인하기

go.kr 주소를 사용하는 누리집은 대한민국 정부기관이 관리하는 누리집입니다.
이 밖에 or.kr 또는 .kr등 다른 도메인 주소를 사용하고 있다면 아래 URL에서 도메인 주소를 확인해 보세요.
운영중인 공식 누리집보기

천국에서 온 친구

  • 작성일 2010-02-24
  • 조회수 2,967

천국에서 온 친구
조헌용





 나비 같은 여자가 머물다 떠난 뒤로 강은 자꾸만 바깥 소식들이 궁금했다.

 밤 깊어 낚시꾼 하나 없는 텅빈 자리덕에 앉아 낚싯대를 드리웠다. 밤바다에 떠 있는 굵은 전자찌가 바람에 흔들릴 때마다 강의 한숨이 멀어지는 파도를 붙잡았다. 점, 점, 점, 멀어지던 전자찌가 가뭇없이 사라졌다. 잠겼던 찌가 다시 물 위로 떠올랐다 사라지기를 서너 번, 그제야 강은 아무런 기대도 없이 낚싯줄을 감아들였다. 반 뼘도 되지 않는 작은 한치였다. 한치를 잡겠다고 가짜 미끼를 던져 놓고도 올라온 한치가 생경스러웠다. 일주일이 넘게 같은 자리에 앉아 낚시를 하면서 강에게 걸린 것은 파도에 젖은 달빛뿐이었다. 애써 잊어 왔던 수많은 그림자들이 문득문득 달빛으로 떨어져 다시 파도로 멀어졌다. 하현으로 기우는 달 주위로 먹구름이 몰려들었다. 에이, 씨. 한치가 토해 놓은 먹물에 놀라 우종종 두어 걸음 물러났던 강이 한치를 패대기쳤다. 주저앉아 먹물을 털다 말고 파르르 떨고 있는 한치를 들어 우적우적 씹기 시작했다. 작은 모래 알갱이들이 한치의 여린 살 사이로 버석거렸다. 입술 사이로 먹물이 흘러 강의 모습이 두억시니 같았다. 칼을 가지고 오지 않은 것을 후회하면서 뜯어낸 한치살을 가짜 미끼에 달았다. 전자찌 여린 불빛이 어둠을 가르며 길게 포물선을 그렸다.

 찌가 날아간 자리, 그쪽으로 걸음을 옮기다 보면 다시 또 사람들 속으로 스밀 수 있을까. 강은 생각을 멈추고 사라진 찌를 찾아 눈길을 이리저리 더듬었다. 물밑으로 사라졌던 찌가 어느 사이 떠올라 옆으로 누웠다. 강은 힘껏 챔질을 하고 낚싯줄을 감아들였다. 제법 묵직했다. 먹물이 튀지 않도록 조심스레 한치를 올려 삐꾸통에 담고 강은 또 한치살을 잘근잘근 씹어 가짜 미끼에 달았다. 다시 포물선을 그린 찌가 얼마 지나지 않아 바다 밑으로 숨어들었다.

 한치가 붙었다. 아무도 붙지 않을 것이라던 한치가 마라도에 붙었다. 며칠씩이나 한치 낚시를 들고 자리덕을 찾는 강에게 토박이 몇이 퉁바리를 놓았다. 무사? 미쓰이까나 뜰까 마라도엔 한치 안 붙어마시. 더러 쯧쯧 혀를 차는 이도 있었다. 아무래도 좋았다. 그런데도 한치가 붙으면서 강의 손이 마냥 바빠졌다. 입 주위에 먹물이 뚝뚝 떨어지는 줄도 모르고 강은 한치를 잘근잘근 씹어 가며 가짜 미끼에 한치살을 갈아 주었다. 삐구통에 더 담을 수 없을 만큼 한치를 잡은 뒤에야 강은 낚시를 멈췄다. 어림잡아도 백 마리는 훌쩍 넘어 보였다. 무거운 삐꾸통을 들고 뒤뚱거리는 강의 발걸음이 가볍기만 했다.

 달빛처럼 뽀얀 한치 몇 마리를 냄비에 넣고 소주 한 병을 부었다. 냄비 안이 달빛으로 가득했다. 소주가 남지 않을 때까지 조리면 바다에 담겼던 구름과 햇살과 달빛과 바람이 강의 입 안에 톡톡 터질 터였다. 둘이 먹다가 셋이 죽어야 마땅한 맛이지만 강은 혼자였다. 자정 지나고 새벽이 아직 먼 깊은 밤중에 찾아올 사람도 찾아갈 사람도 마땅찮았다. 개라도 한 마리 옆에서 큼큼거렸으면, 강은 곰곰이를 떠올렸다. 어느 날, 술 취한 강의 다리를 물고 늘어지던 개는 주제에 맞지 않게 곰곰 생각하는 걸 즐긴다고 곰곰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 먹을것을 주면 그제야 큼큼거리며 알은체를 하던 건방진 곰곰이는 새를 잡아먹으며 마음껏 섬을 떠돌아다니더니 지난 여름부터 어디론가 사라져 보이지 않았다.

 냄비 안에 소주가 졸아들기를 기다리며 잡아온 한치 가운데 큰놈 한 마리를 썰어 소주를 마셨다. 소주 한 병을 천천히 다 비우고 나서야 냄비 안의 한치는 제대로 졸아 있었다. 김이 모락모락 오르는 한치를 먹물째 숭숭 썰어 밥 삼아 안주 삼아 마신 소주가 네 병이었던가 다섯 병이었던가, 타는 듯한 갈증을 느끼며 강이 눈을 떴을 때는 어둠뿐이던 창으로 풍경이 펼쳐진 뒤였다. 하늘을 나는 구름이 수백 마리 한치가 되어 점점 멀어졌다. 한치, 지난 밤에 잡은. 벌떡 일어서던 몸이 휘청 흔들렸다. 그놈의 술을 끊어야지, 강은 한 번도 지켜지지 않은 헛된 다짐을 한숨으로 흘려 놓으며 몸을 세웠다. 늦여름 뜨겁고 습한 공기 속에서 삐꾸통에 담긴 한치들은 벌써 썩어가고 있을 터였다. 그렇게 썩어가는 것이 어디 한치뿐일까, 여자가 남겨 놓은 작은 바다, 수족관에는 이미 오래 전에 검은 이끼가 달라붙었다.

 삐거덕거리는 문을 열며 마당에 나갔을 때 그러나 한치는 빨랫줄에 걸려 바람이 불 때마다 뱃고동으로 흔들렸다. 누가 저 많은 한치를 손질해서 널어 놓았을까, 강은 도리머리를 흔들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직접 한치를 손질한 기억이 나지 않았다. 혹시 여자가 다시 온 것일까, 밀물처럼 슬며시 스며들었다가 나비처럼 바람을 타고 멀리 사라진 여자를 떠올리며 이리저리 고개를 돌려 보았다. 관광객들만 골프카를 타고 휭휭거리며 오갈 뿐이었다.

 

 촉촉하던 한치가 야무지고 먹기 좋게 말랐을 때 녀석이 찾아왔다.

 골프카 한 대가 마당 옆에 스르르 멈췄다. 대머리가 내려 빨랫줄에 걸린 한치를 주인인 양 자연스럽게 거둬 툭툭 하얀 가루를 털어냈다. 한치를 쭉쭉 찢어 입 안으로 가져가던 대머리가 슬며시 마당 안을 기웃거렸다. 그 모습이 하도 어이가 없어 해바라기를 하던 강이 비칠비칠 일어서다 햇살에 다시 주저앉아 손차양을 만들었다. 이봐요, 거기. 그러나 말을 더 잇기도 전에 대머리가 말을 막았다.

 거기, 여가 강선우 씨…… 어, 맞네 선우.

 ……

 나여, 나, 동진이.

 누구……

 아따 나연마 문창과 두물머리 임동진.

 동진. 임, 동진.

 강은 그제야 이 낯선 불청객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리고 아직 머리가 다 벗어지지 않았던 녀석의 모습을 떠올릴 수 있었다. 군대를 다녀오고 느지막이 들어간 학교에서 녀석을 만나 매일 술을 마시며 20대 중반을 보냈다. 문학이 세상에 존재하는 한 언제까지라도 함께할 것 같은 그런 친구들 가운데 하나였다. 그러나 졸업을 하고 밥벌이를 시작하면서 녀석도 강도 그리고 또 다른 친구들도 뿔뿔이 제 갈길을 찾아 흩어졌다.

 강은 포르노를 쓰는 이름뿐인 작가가 되었고 녀석은 고물상 주인이 되었다. 몇 해 서울에 남아 시를 쓰던 녀석은 강의 시상식 뒷풀이에서 술을 잔뜩 마시고는 아버지가 하던 고물상을 이어받겠다고 했다. 고물상 한쪽에 컨테이너 박스를 갖다 놓고 늦은 밤 스스 바람에 흔들리는 고철들의 노래를 시로 옮겨 놓겠다고 했다. 씨벌, 암튼 좆나게 축하혀, 근디 솔직히 맘이 영 거시기허다. 부러움과 질투와 환멸이 모두 섞여 있는 말이었다. 십 년이 더 지난 일이었다. 가끔 풍문으로만 서로의 소식을 들었을 뿐 따로 연락 한 번 하지 않고 지내던 사이였다. 그런 친구의 방문은 아무래도 뜬금없었다.

 아따, 이 오징어 오지게 맛나네. 근디 너 살 많이 쪘다. 그냥 보면 못 알아보겄어.

 어, 그거 오징어가 아니고. 근데. 여기는, 웬일이냐?

 니미, 제발 와달라고 사람 불러 놓고 웬일이냐고 물으면 내가 어쪄? 암튼, 혼자서 못 들고 저 밑에 선착장에 두고 왔은 게 언능 가자야.

 녀석이 하는 말을 도무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누가 누구를 불렀다는 말인가. 그런데도 강은 서둘러 엉덩이를 털었다.

 야, 씨발. 여기 진짜 좋다. 끝내줘. 소설이, 막, 그냥, 절로 나오것다야. 여서, 장편 쓰냐?

 십 년 전 어느 날처럼 녀석은 괜시리 허풍을 섞어 가며 말휘갑을 늘어놓았다. 섬에 들어오고 몇 년이 지나도록 학교에서 만났던 어떤 친구에게도 연락을 하지 않았다. 혹시 녀석이 다단계 판매원이 되어 이 작은 섬에까지 물건을 가지고 왔을까? 조심스레 얘기를 꺼냈을 때 녀석은 니미, 씨벌, 허허, 허. 알 수 없는 웃음을 흘렸다. 야, 내가 이집트의 후손이면 사막으로 가지 이 좆만 한 섬에는 왜 와. 바다가 보이는 절벽 위에 잠시 골프카를 세우고 녀석은 강을 바라보았다.

 니미, 어쩐지 목소리에 술냄새가 쩔었더만.

 강이 어느 새벽 전화를 걸었다고 했다. 횡성수설하던 말끝에 솜사탕 기계를 구해 줄 수 없겠느냐고 했다. 이왕이면 좀 오래된 기계였으면 한다는 말을 덧붙였다고 했다. 그제야 강은 한치가 붙었던 날, 술 취해 엉금엉금 온 방 안을 헤집었던 일들이 불쑥불쑥 떠올랐다.

 자리덕 선착장에서 마을을 오르는 계단은 높고 험했다. 낚싯대를 들고 오르내리며 한 번도 힘들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던 계단이었다. 그런데도 강은 몇 번이나 상자를 계단 한쪽에 위태위태 세워 놓고 헉헉거리며 숨을 골라야 했다. 그때마다 녀석은 담배를 피우며 바깥 소식들을 들려 주었다. 고만고만하고 뻔한 이야기들이었다. 그런데도 강에게는 할머니의 이야기처럼 아련하기만 했다. 바다 저편의 아련한 이야기들은, 그러나 막상 그 속에 들어온 사람들에게는 성난 파도로 몰아칠 터였다. 그 파도에 밀려왔을까, 작은 쪽배를 타고 동동. 여객선이 긴 기적을 울리며 섬으로 다가왔다.

 서울을 벗어나 남쪽으로 남쪽으로 흐르다 보니 어느새 발걸음이 모슬포에 머물러 있었다. 어느 여행가는 마라도를 한반도의 마침표라고 했다. 그곳에 가면 마침표를 찍을 수 있을까, 강은 알고 싶었다. 그러나 높은 파도에 배가 뜨지 못한다고 했다. 발길을 돌려 한라산에 올랐다. 비바람이 거세 산은 금세 어두워졌다. 손전등 하나 없이 무작정 올랐던 길이었다. 더는 오르지 못하고 작은 동굴에 웅크리고 앉아 라면을 끓여 소주를 마시며 날이 밝아 오기를 기다리다 잠이 들었다. 참으로 오랜만에 꿈 없는 잠이었다. 아침이 되고 사람들 몇이 동굴틈에 움크린 강을 보고 수런거리며 지나갔다. 그 가운데 몇이 119에 전화를 걸어 산에 죽은 시체가 있노라고 했다. 이봐요, 거기서 그렇게 자면. 구급대원의 지청구에 쿡쿡 웃음이 흘러나왔다. 내 참. 뭐, 이런 사람이 다 있어? 산에 죽은 사람 있다고 신고가 몇 번이나 들어온 지 알아요? 예? 구급대원에 쫓겨 강은 정상에 오르지 못하고 산을 내려왔다.  

 시체와 다를 바 없는 몸을 이끌고 다시 남쪽으로 흘렀다. 파도가 높지 않은 것 같은데도 여전히 남쪽 끝 섬에 갈 수 없다고 했다. 가까운 해수욕장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지난 여름철에나 쓰였을 가건물에 들어가 강은 배가 뜨기를 기다렸다. 근처 밭에서 양배추를 하루, 양파를 하루, 당근을 하루, 그렇게 며칠을 서리질로 보내고 나서야 마침내 배를 탈 수 있었다. 여전히 파도는 높았다. 속엣것들을 세 번째 게워냈을 때 강은 매표소 직원의 말을 듣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 거, 웬만하면 들어가지 말죠! 물걸레로 바닥을 닦다 말고 어린 여자는 껌을 짝짝 씹으며 말했다. 더 큰 태풍이 온다니까요. 섬에 묶인 사람들이나 데려오려고 띄우는 건데. 어린 여자는 기어이 표를 끊는 강을 보며 끌끌 혀끝을 말았다.

 어차피 시체 취급을 받았던 몸, 무서울 것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네 번째 토악질을 하고 나서 제발 살려달라고 강은 선실 기둥을 붙잡고 애원했다. 자신이 살아 온 모든 세월처럼 긴 한 시간이 흐르고 나서야 겨우 배가 섬에 닿았다. 오래도록 일어날 수가 없었다.

 무릎을 세우고 일어나 남은 계단 몇 개를 위태롭게 올라 겨우 상자를 골프카에 실었다. 골프카가 덜컹거릴 때마다 뒷자리에 실린 상자가 이리저리 마구 흔들렸다.

 들어왔던 배가 긴 기적을 울리며 멀어졌다.

 

 손톱 끝을 물들이던 작은 달이 자라 보름으로 떠올랐다. 머릿결을 흔드는 바람에 가을이 제법 담겨 있었다. 강은 양말을 뒤집다 말고 손에 묻은 물기를 털어냈다. 녀석이 아무렇게나 던져 놓은 양말이었다. 이틀이 지났을 때 녀석은 말도 없이 서랍을 열어 양말을 찾아 신거나 속옷을 챙겨 입었다. 기분이 나빴지만 강은 아무렇지도 않은 척 녀석이 내어놓은 것들을 빨았다. 어차피 며칠 머무르다 떠날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심심해, 따분해, 지루해, 그런 말들을 입에 달고 지내면서도 녀석은 도무지 섬을 떠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에이, 진짜, 씨. 휴우. 강이 한숨을 토하며 깡통맥주를 들고 나와 솜사탕 기계를 돌렸다.  

 처음 며칠은 녀석도 강을 따라 낚시를 다니곤 했다. 강이 벵에돔 몇 마리를 낚아올렸다. 아따, 이거 재미지다이, 진짜 재미져. 회를 뜨기도 전에 녀석은 손가락 끝에 찍은 초장을 쪽쪽 빨며 소주를 마셨다. 그러나 그뿐이었다. 밑밥을 뿌리고 미끼를 끼우고 끊어진 낚싯줄을 갈아 주는 소소한 일들을 녀석은 귀찮게 생각했다. 낚시는 뒷전이고 강이 잡아들이는 고기에 소주만 탐내던 녀석은 사나흘이 지나면서 그나마 재미를 잃은 표정이었다.

 아따, 쓰발. 뭔 놈으 데가 이렇게 할 게 없냐, 응. 따분해 죽겠어요, 따분.

 녀석의 말대로 참으로 할 게 없는 섬이었다. 아주 작은 섬. 천천히 걸음을 옮겨도 사오십 분이면 섬을 한 바퀴 돌 수 있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너나 없이 한 사람당 삼천 원짜리 골프카에 몸을 실었다. 더러는 이만 원이나 삼만 원에 골프카를 통째로 빌리는 이들도 있었다.

 강이 처음 왔을 때는 결코 볼 수 없는 풍경이었다. 비틀거리는 걸음걸이로 강은 겨우 계단에 올랐다. 그리고 거기 펼쳐진 푸른 세상을 바라보았다. 푸른 잔디와 억새가 드넓었고 풀을 뜯는 염소가 유난히도 검게 보였다. 마라도는 홀로 솟아오른 섬이었다. 모래와 자갈도 없이 온통 검은 먹빛의 현무암들. 땅 속에 뜨거운 용 한 마리가 하늘로 승천하다가 그만 차가운 바다를 만나 더는 오르지 못하고 섬이 되었다고 했다. 어느 바람이 그 위로 먼지를 끌어와 생명을 키웠을까. 억겁의 세월이 흐르고 또 흘러서야 섬은 사람들을 받아들였을 터였다. 바람이 말울음으로 몰아치며 강을 최남단비가 서 있는 곳으로 내몰았다.

 선착장 아래서 강은 옷을 다 벗어던지고 아직 차가운 오월의 바닷물에 몸을 담갔다. 그리고 올려다본 하늘, 세상에서 가장 멀고 넓고 깊은 하늘. 그것은 바다를 닮아 있었다.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강은 배를 하늘에 두고 거친 물결이 흐르는 대로 몸을 맡겼다. 아랫도리가 파도에 쓸려 이리저리 흔들렸다. 까닭도 없이 불끈 솟아오른 아랫도리에 구름이 걸렸다. 겨우 대여섯 해 전이었다. 어느 순간 유람선이 생기더니 국토의 최남단을 팔아 가며 사람들을 실어 날랐다. 여객선도 이에 질세라 크기를 키우고 횟수를 늘려 사람들을 실어 날랐다. 사람들이 북적거렸고 장사치들이 모여들었다. 나쁠 것이 없었다. 모두들 여전히 너나들이하며 서로 한식구처럼 살아갔다.

 강도 어느 순간 관광객을 상대로 말품을 팔고 있었다. 섬을 오가는 수천 명의 사람 가운데 하루에 삼사십 명이 강에게 와 앞일을 물었다. 그때마다 강은 타로카드를 펼쳐 사람들에게 불확실한 미래에 대해서 들려 주었다. 당신이 걷고 있는 길이 옳은 길이에요, 그렇게 끝을 맺으면 사람들은 기꺼이 만 원짜리 한 장을 내밀었다.

 누군가 골프카를 들여와 관광객을 상대로 영업을 시작했다. 하나, 둘, 셋, 넷. 다른 누군가와 또 다른 누군가가 골프카를 들여와 영업을 시작했다. 다섯, 여섯, 그리고 백. 골프카가 온 섬을 뒤덮었다. 사람들이 골프카를 타고 휘휘 섬을 돌면서 음식이 팔리지 않는다고 음식점에서 불평을 늘어놓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골프카를 운행하는 사람들과 골프카 운행을 반대하는 사람들이 편을 갈라 싸움을 시작했다. 함께 밥을 먹다가 싸웠고 회의를 하다가 싸웠고 심심풀이 화투를 치다가 싸웠다.

 녀석은 또 어느 자리를 기웃거리고 있을까? 어느 날 마을 사람들이 벌이는 노름판에 끼어들면서부터 녀석의 얼굴에는 가뭄철 물 만난 미꾸라지마냥 활기가 돌았다. 몇 번을 말려보았지만 쇠귀에 읽는 경이었다. 솜사탕 기계값으로 녀석은 백오십만 원을 달라고 했다. 이백만 원이 넘는 것을 어렵게 깎았노라고 엉너리를 놓았다. 고작해야 칠십만 원이나 할 기계라는 걸 강은 알고 있었다. 여자가 떠나기 전에 강은 솜사탕 기계를 찾아 인터넷을 떠돌았다. 녀석의 말마따나 운반비에 인권비도 안 빠질지도 몰랐다. 그 돈으로 녀석이 노름에 손을 대기 시작했다는 것이 걱정이었다.   

 

 고양이 눈처럼 떠 있던 낮달이 갑자기 어두워진 하늘 속으로 감겨들었다. 태풍은 아직 멀리 있다고 했다. 그런데도 갑작스레 바람이 불고 먹구름이 몰려오더니 기어이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하나둘, 쿠르릉. 아주 가까운 곳에서 내리치는 번개였다. 강은 서둘러 낚싯대를 갯바위에 내려놓고 가까운 해안동굴로 몸을 피했다. 아따, 니미, 이거 뭔 재미로 허는지 몰라. 긍게 그만 하고 회부터 먹자야, 응. 오랜만에 낚시를 따라나선 녀석은 강이 작은 따치 한 마리를 잡았을 때부터 회타령이더니 기어이 홀로 동굴에 들어와 모닥불을 피워 놓고 깡통맥주를 홀짝거렸다.

 니미 빗소리 무쟈게 좋다, 이. 근디 뭐 좀 잡았어?

 녀석이 깡통맥주 하나를 던지며 물었다. 그냥, 이것저것. 강이 미처 대답을 끝내기도 전에 녀석이 진둥한둥 갯바위로 걸음을 옮겼다. 오매, 맛나겄다야. 아따, 이 고등어 진짜로 크다응. 오매, 맛나것다. 바닷물에 담가 뒀던 살림망을 가져오며 녀석이 입맛을 쩝쩝 다셨다.

 얌마. 그거 고등어 아녀, 부시리여, 부시리. 이리 가져와 회 떠줄게.

 니미 뻐기기는. 이게 부시리야. 어찌 크더라이. 잠깐만, 어어.

 살림망에서 고기를 빼던 녀석이 부시리 한 마리를 놓치고 그걸 잡겠다며 이리저리 몸을 옮기다가 넘어져 손바닥이 까지고 말았다.

 어, 어. 나 죽네, 나 죽어. 엄마, 니미, 씨벌 피난다이. 피여, 피랑게!

 죽네사네 엄살을 떨던 녀석은 어슷비슷 강이 회를 썰어내 놓고 나서야 엄살을 멈췄다.

 니미, 졸라 맛있다, 응. 너는 맨날 이런 것만 먹고 씨발, 졸라 좋겠다. 한 잔 혀.

 녀석이 소주를 따라 강에게 내밀었다. 빗소리가 토독토독 소주잔 속으로 스며들었다. 여기서 들으니까 빗소리 참 좋다. 여자의 목소리가 메아리로 윙윙거렸다. 잡지 않았고 잡을 수 없었던 여자. 비를 피해 들어온 동굴에서 스르르 강의 어깨에 기대어 두 눈을 감고 콧노래를 흥얼거리던 여자. 여자가 떠나고 나서 강은 문득문득 나비와 마주쳤다. 소주 한 병이 다 떨어지기도 전에 녀석은 부시리 한 마리를 뚝딱 해치웠다. 강은 다시 벵에돔 한 마리를 잡아 비늘을 벗기다 말고 녀석이 피워 놓은 불을 뒤적였다. 그 사이 손가락으로 쪽쪽 초장을 빨던 녀석이 강을 채근했다.

 어, 씨발, 고기 썰다 말고 뭐혀? 안주 없잖여. 빨랑 좀 썰어 봐. 니미, 너만 맨날 이런 것 먹고.

 쫌. 쫌. 기달려라, 씨발 놈아. 너 맛있게 해 줄라고 그런다. 왜?

 니미, 졸라 고귀한 척하더만 술 몇 잔 먹으니까 옛날 버릇 나오냐. 씨발, 한 잔 더혀라.

 술잔을 건네고 나서 녀석은 또 이런저런 쓸데 없는 말들을 늘어놓았다. 녀석의 말이 옳았다. 섬에 들어온 뒤로 어쩌면 강은 고귀한 척 살았는지도 몰랐다.

 처음 소설을 쓰겠다고 마음먹었을 때 강은 무슨 거대한 사명이 운명처럼 놓여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런 모든 것들이 살아가는 일에 지나지 않음을 강은 어느 순간 알게 되었다. 그럼에도 잔뜩 힘이 들어간 어깨는 좀처럼 풀리지 않았다. 사람들과 잘 어울리지 않았으면서도 괜시리 외롭다는 생각을 품고 살았다.

 벵에돔이 숙성되기를 기다리며 강은 따치를 손질해 내밀었다. 녀석은 또 소주 서너 잔에 금세 회를 해치웠다.

 천천히 먹어라, 갯바위서 취하면 큰일난다.

 니미, 씨발, 맛나서그려. 겁나게 맛있잖여. 글고 취해서 쓰러져 봐야…… 근디 솜사탕은 안 팔텨, 그거 장사하면 돈 되겠더만.

 으음, 팔, 팔아야지. 근데 쉽지가 않네. 잠깐만, 나 낚싯대 좀 거둬올게.

 빗줄기가 많이 약해졌다. 강은 쉽사리 솜사탕을 하늘에 걸지 못했다. 관광객이 많아지고 몰려든 장사치들 가운데 이장에게 허락을 얻어 선착장 한쪽에서 핫도그를 팔던 이가 있었다. 천 원짜리 핫도그를 팔아 하루 오륙십만 원은 거뜬하다고 했다. 제법 쏠쏠한 벌이였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핫도그 장수는 섬을 떠났다. 다들 쉬쉬했지만 토박이 몇이 그이를 마을 뒷산으로 데려갔다는 걸 알고 있었다. 싸가지없는 육지것이 마을 어른들에게 인사를 하지 않는다는 까닭이었다. 전치 6주, 그이는 기계값을 포함해 합의금 오백만 원을 받고 섬을 떠나야 했다. 며칠 뒤, 선착장 가까운 짜장면 집에서 핫도그가 다시 팔리기 시작했다.

 섬에 들어온 지 대여섯 해가 지났지만 강은 여전히 육지것들 가운데 하나였다. 벌어들이는 돈이 타로카드가 아니고 먹거리였다면 강도 그이처럼 마을 뒷산에 끌려갔을지도 몰랐다. 솜사탕을 팔고 싶다고 찾아갔을 때 뜨악해하던 이장의 얼굴이 떠올랐다. 강은 그저 술안주가 마땅찮을 때마다 솜사탕 기계를 돌릴 뿐이었다.

 낚싯대를 접고 돌아오니 녀석은 또 소주 한 병을 비운 뒤였다. 천천히 먹으래도, 타박을 놓으며 강이 불속에서 숯을 골라 한쪽에 놓고 숙성된 벵에돔 살을 껍질 쪽으로 올려놓았다. 벵에돔 살이 살짝 오그려들기를 기다렸다가 꺼내 재를 털고 그대로 썰어 놓았다.

 오매 오매 씨발. 니미, 오오매. 맛나다, 맛나. 이게 이게 뭐냐? 씨발. 이게 뭔디 이렇게 맛있어, 이. 아따, 회도 아니고 구이도 아니고. 선우야, 이거 또 만들어 주라, 응.

 맛있게 먹어 주는 녀석이 고마워서라도 더 만들어 주고 싶었지만 벵에돔은 그것뿐이었다. 다시 낚시를 하면 두어 마리 더 잡을 수 있으려나. 그러나 벵에돔이 잘 잡히는 어스름은 아직 멀었고 물때는 이미 지나 있었다.

 얌마, 있는 거나 먹자. 낚시하기 귀찮다. 근데 너는 안 가냐? 그렇게 오래 비워도 돼?

 어디? 고물상? 하여간 씨발놈. 취해서는. 니미, 그거 진즉에 그만뒀다니까. 잘 됐지, 뭐. 시 쓴답시고 컨테이너 박스 들여놨다가 거서 노름꾼만 모아 놓고. 니미 쓰발, 뭐하자는 건지. 암튼, 나, 여기서 시나 몇 편 써서 나갈란다. 괜찮지?

 녀석이 어떤 상태라는 것은 강도 진작에 짐작할 수 있었다. 어이 동생. 그 친구, 노름 좀 말려, 전에 보니까 폰뱅킹으로 몇 백씩 입금하면서 노름하더라니까. 거 걔들이랑 노름해서 끝 좋은 사람 없는데, 쯧쯧. 어쩌다가 마라도가 이 모양이 되었는지, 원 참. 바람이 심해 배가 뜨지 않던 어느 날, 녀석이 돈을 꾸어달라고 했다며 누군가 그런 말을 귀띔해 주었다.

 얌마, 니가 여기 들어온 지가 벌써 한 달이 넘었다. 근데 이제 와서 괜찮고 말고가 어딨어. 니 말대로 니미 시나 쓰고 제발 노름이나 그만 해라, 쓰볼놈아.

 거, 쓰발, 좆나게 틱틱거리네…… 참, 윤이는 요즘 잘나가더라.

 말끝을 흐리던 녀석이 쯧쯧 혀끝을 몇 번 차고 나서 말을 이었다.

 니미. 잘나가던 어떤 놈은 포르노나 쓰고, 또 어떤 놈은 도망이나 다니고. 니미. 씨봉. 그나저나 선우 넌 글 쓰면서 아직도 우주의 사명입네 지랄입네 그러냐?

 에이, 씨발, 글 안 쓴다니까?

 강이 까닭도 없이 신경질을 부리며 말을 받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녀석은 손가락에 묻은 초장을 쪽쪽 빨아 가며 소주잔만 홀짝거렸다. 세상사에 무심한 척 섬 안에 박혀 살았지만 여전히 강은 섬 바깥을 기웃거렸다. 윤의 소식이 인터넷을 통해 날아들었다. 늦깎이로 등단한 윤은 주목을 받으며 이런저런 상을 휩쓸었다. 부러웠다. 그러나 강은 부러 자신과는 상관없는 먼 옛날의 일이라고 생각했다. 술에 취해 늘어놓는 녀석의 말휘갑에 과거가 끌려 나왔다. 그곳에 강의 원고지가 바다처럼 넓게 펼쳐져 있었다.

 저기, 선우야.

 무사?

 녀석이 니미, 씨발을 섞지 않고 가만히 이름을 불러 오는 것이 생경스러워 강은 저도 모르게 사투리를 토해 놓았다. 어설픈 사투리 몇 마디가 강을 섬사람으로 만들지는 못했다. 그럼에도 강은 그들과 섞여야 할 일이 생길 때나 경계해야 할 일들이 생길 때면 겨우 몇 마디의 사투리를 토해 놓았다.

 니미, 무사는 미야모토 무사시가 무사고 임마. 선우야, 임마, 내 친구 선우야!

 왜, 왜?

 아니, 니미, 씨발 나도 여기서 그 골프카 장사나 할까? 니미 가만히 봉게, 그게 벌이가 쏠찮여. 가봐야 딱히 할 일도 없고이. 근데, 니미, 쥐뿔이 뭐가 있어야지. 니미, 긍게이, 긍게, 니가 다리 좀 놔주라.

 내가? 내가 어떻게?  

 너는 그래도 사람들 많이 알잖여. 그냥, 난중에 말여, 내가 그거 한 대 사면, 니미, 씨발. 글고이. 글고, 니미, 선우야, 돈 좀 있냐?

 마시던 소주에 사레들렸는지 강이 콜록콜록 밭은기침을 토해냈다. 니미, 씨발, 없다고 하면 되지. 알았어, 알았엄마. 니미 씨발, 돈 필요없어. 녀석이 궁시렁거리며 다가와 등을 두드렸다. 기침이 멈추지 않았다. 콧물과 눈물이 흘러나왔다. 그리고 기어이 속엣것들이 쏟아져나왔다. 토닥토닥, 등 다스려 주는 손길이 따뜻했다.

 

 눈이 내렸다. 눈길을 걸어 사람들이 삼삼오오 마을회관으로 걸어갔다. 더러 골프카를 타고 가는 이도 있었다. 벌써 몇 번째 녀석은 골프카에 사람들을 싣고 마을회관과 마을을 오갔다. 작은 섬의 이장 선거였지만 그 어느 선거보다 치열했다. 한쪽은 골프카를 자유롭게 운행하자고 했고, 다른 쪽은 골프카를 섬 밖으로 몰아내야 한다고 했다. 두 쪽 모두 먹고사는 문제가 걸려 있었다.

 겨울이 들어서면서 섬을 떠났던 녀석은 유세가 시작될 무렵 돌아왔다. 니미 씨발, 고물상 정리하고, 컨테이너 팔고, 차도 팔고, 글믄, 니미 씨발 골프카는 한 대 사겄지. 긍게 나도 여서 골프카나 몰면서 시도 다시 좀 쓰고. 니미 씨발, 긍게, 응, 긍게, 선우야, 딱 오십만 원만 줘봐. 결국 강은 녀석을 말리지 못하고 돈을 빌려줬다. 그리고 한동안 돌아오지 않는 녀석을 기다리는 까닭이 돈 때문이라고 강은 생각했다. 돌아와서도 여전히 노름판을 기웃거리던 녀석은 유세가 격해질 무렵 낚시터로 강을 찾아왔다.

 뭐 좀 잡았냐?

 고개를 흔드는 강에게 녀석이 손가락을 들어 무엇인가를 가리켰다. 야, 야, 동진이 너 진짜? 갯바위로 들어서는 길 옆에 골프카 한 대가 세워져 있었다. 가자, 씨발, 니미이. 내, 내가 오늘은 쏜다. 긍게 지겨운 생선은 씨발 그만 잡고 등심으로 콜? 녀석이 강을 이끌었다. 누군가 노름 끝에 싸게 내어놓은 골프카라고 했다.

 음음, 니미 씨발, 아니 니미 씨발은 빼고이. 선우야, 들어 봐봐, 이. 여기는 장군바위인데 마시, 하늘의 천신이 장군이 되어서 땅의 선녀를 만나로 내려오는 길목이쿠당. 니미, 씨발, 잘 안 된다이. 암튼, 암튼 마시, 에이 니미 씨발. 사투리는 안하는 게 낫겠지? 암튼, 일제시대에는 이곳이 일본으로 향했다고 해서 신사를 지어 놓고 있었다고 하는데마시. 에에, 그러나 우리 마라도 주민들이 그걸 그대로 두, 둘 수 없어수다. 경해서 민족 정기를 살리기 위해서 신사를 부수고……

 녀석은 제법 그럴싸하게 마라도를 읊조렸다. 찬바람을 가르며 달리는 녀석의 골프카에 햇살이 떨어졌다. 골프카를 사들이고 그러나 녀석이 처음 시작한 것은 장사가 아니고 이장 선거 자원봉사였다. 녀석은 골프카 운행 쪽 후보를 자신의 골프카에 몰고 다니며 잔심부름을 거들었다. 유세를 벌이는 며칠 사이에 녀석은 강보다 더 많은 사람들과 친분을 만들었다. 그리고 어느 날, 녀석은 강에게 와서 삼십만 원을 내밀고 솜사탕 기계를 빌려갔다.

 마침내 선거가 열렸다. 눈 속이었다. 지난밤에 솜사탕 기계를 돌려주고 녀석은 눈 속에 골프카를 몰고 사라졌다. 문 밖 풍경을 바라보며 강이 솜사탕 기계를 돌렸다. 스스 아리게 스며드는 찬바람 사이로 위위윙 기계가 달궈지는 소리가 들려 왔다. 버저가 울리고 노즐 사이로 강이 설탕을 집어넣었다.

 와, 와, 와, 구름이 경 생겨난, 달콤한 구름사탕이 되었시니.

 그 모습을 바라보던 막산이 좋아라 소리쳤다. 회오리로 몰아치는 구름. 솜사탕 기계가 생기고서 가장 신이 난 사람은 막산이었다. 하루에도 몇 번씩 강의 허름한 집을 찾아오던 막산은 녀석의 골프카를 졸졸 따르며 사람들에게 김성일 만세를 외쳤다.

 따로야. 간다. 근데 무사 니는 안 가 마시? 이거 비밀인데 마시, 인제 따로가 다시 솜사탕 주인이니까 난 김성일 안 찍어 주난. 김성일이는 아무리 경해도 바봅쥬.

 마을 향약은 섬에 3년 이상 거주한 사람에게 선거권이 주어진다고 되어 있었다. 다섯 해를 넘어 살아 왔으므로 강에게도 막산의 말처럼 선거권이 주어졌다. 그러나 강은 주소지가 아니라며 선거권을 포기했다. 이쪽에도 저쪽에도 강은 휘말리고 싶지 않았다. 양손에 솜사탕을 하나씩 든 막산이 한쪽 발을 들어 문을 열었다. 찬바람이 와락 달려들었다.

 살얼음 위를 달리는 승부였다. 마흔두 명 가운데 열아홉이 골프카 운영 반대쪽에 표를 주었다. 두 명이 기권했고 스무 명이 골프카 운영 쪽에 표를 주었다. 마지막 한 표가 무효 처리됐을 때 녀석은 이장 후보와 얼싸안고 만세를 불렀다고 했다.

 아, 니미 씨발, 있잖아, 선우야. 마지막 표가 나올 때까지 손에 땀이 주르르 흘르더라니까. 니미, 이월이잖아. 겨울이잖아. 근데, 땀이 나더라니까.

 술에 취해 혀가 꼬부라지는 줄도 모르고 녀석은 무용담을 강에게 들려주었다. 이제 마음껏 골프카 장사를 할 수 있게 되었다고 녀석은 좋아했다. 니미, 씨발, 선우 이 개새끼야. 씨발, 인제 내가 마라도 실세여, 니미. 실세라구, 실세마시. 니미, 씨발. 꼬꾸라지듯 쓰러져 잠들면서도 녀석은 그렇게 되뇌었다. 잘 닦인 새길을 달리는 꿈을 꾸는 것일까, 새근새근 잠든 녀석의 얼굴에 웃음이 가득했다. 잠든 녀석을 바라보며 솜사탕을 안주 삼아 강은 맥주를 마셨다. 뒷꿈치가 저려 왔다.

 

 녀석의 꿈은 자칫 술 취한 한겨울밤의 꿈으로 끝날 뻔했다. 골프카 운행 반대쪽에서 소송을 걸었다. 선거무효 확인소송과 이장 직무정지 가처분 신청이었다. 마흔두 명이 넘는 투표인 가운데 상당수가 자격이 없는 이들이었으며, 무효로 처리된 표는 자신의 표라는 주장이었다. 제주도에서 나서 양쪽을 설득했지만 역부족이었다. 법원은 유월에 재선거를 하라고 조정안을 내어놓았지만 양쪽 모두 받아들일 수 없다고 했다.

 한동안 장사를 할 수 없었지만 관광객이 많지 않은 겨울이어서 사람들은 그다지 아쉬워하지 않았다. 그러나 입춘 지나고 우수 경칩 지나도록 사람들 사이에 언 얼음은 녹지 않았다. 봄이 되고 관광객이 많아지면서 토박이 하나가 보이지 않는 얼음 위로 골프카를 몰았다. 뒤에서 쉬쉬 손가락질을 할 뿐 아무도 그를 말리지 못했다. 눈치를 보며 사람들이 하나둘 골프카 영업을 다시 시작했다. 녀석도 그 사이에 끼어 골프카를 몰았다.

 골프카를 몰면서 녀석은 더 이상 노름판을 기웃거리지 않았다. 강의 타로 자판에 손님을 끌어다 주기도 했고, 일이 끝나면 편의점에 들러 깡통맥주 몇 개와 오징어를 사오기도 했다. 입에 붙었던 '니미, 씨발'도 어딘가로 달아났다.  

 선우야, 그래도 니가 명색이 소설가 아니야, 그니까 이. 그니까 니미, 아니, 니미는 빼고 그니까 마라도를 좀 폼나게 소개 좀 해 봐.

 술을 마시지 않는 날이면 녀석은 마라도에 얽힌 일들을 찾아 정리하거나 각색하곤 했다. 작지끝에서 송곳바위로, 장군바위에서 남대문으로, 최남단에서 마라도 등대로 녀석은 이야기를 타고 돌아다녔다. 이야기는 다시 골프카에 실려 동서로 오백 미터, 남북으로 천이백 미터, 십만 평의 작은 섬을 떠돌았다.

 뭐, 뭐. 니가 마라도에 십 년을 살아? 너, 좀. 뻥도 좀.

 골프카를 얻어 탄 저녁, 술을 마시다 말고 강은 그렇게 말했다. 관광객들에게 마라도를 안내하는 녀석의 이야기는 엉터리가 많았다. 그래도 사람들은 머리를 끄덕이며 웃음을 지었다. 날 데려갑쥬, 날랑 버리지 말고 제발 날 데려갑쥬. 애기업당의 슬픈 사연에 골프카를 탄 몇몇은 슬며시 젖은 눈시울을 감추기도 했다. 마라도에는 뱀이 한 마리도 없어요. 기운이 하도 좋으니까 모두 용으로 승천을 했다 이 말마시. 자자, 그러니까 여러분도 이 좋은 기운 받으셔서 댁에 돌아가거든 용꿈 꾸시고 로또도 맞고. 자 안녕히 갑써. 모두들 행복합써. 가발을 활짝 열어젖히며 다음에 또 대머리 총각을 찾아달라는 말도 녀석은 빼먹지 않았다. 사람들이 다시 한번 놀란 얼굴로 웃음을 토해 놓고 종종 멀어졌다.

 야, 그게. 먹힌다니까. 뻥이든 뻥튀기든 뭔 상관이여. 즐겁고 유쾌하면 좋은 거지. 너는 아직도. 백 년이 지났다. 백 년이. 근데 아직도 리얼이냐? 글고, 니미, 너는, 너는 진실로 먹고 사는구만?

 녀석이 끌끌 혀끝을 말았다. 따지고 보니 그랬다. 섬에 들어와 강을 먹여 살린 것이 바로 거짓말이었다. 거짓말이 많으면 벌이가 쏠쏠했고 거짓말이 적으면 벌이가 시원찮았다. 녀석도 거짓말이 많아지면서 벌이가 늘어간다고 했다. 그러나 한계가 있었다. 녀석이 거짓말로 사람들을 끌어모을 때 다른 골프카는 짜장면 값을 깎아 주었고 또 다른 골프카는 기념품을 나눠 주었다. 모두 가게와 골프카 영업을 같이하는 토박이들이었다. 집도 절도 없었으므로 녀석은 깎아 줄 짜장면도 내어놓을 기념품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잘 쓰지 않던 '니미, 씨발'이 다시 녀석의 입에서 살아났다. 그냥, 파악, 죽어 버릴까? 니미, 씨발. 나, 저거에 올인했다 이 말이야. 씨발놈아. 고향서 노름빚에 도망 다니다가. 밤 고양이처럼 슬그머니 부모님 찾아가서. 겨우 저거 하나 마련했는데, 씨발. 니미. 팍 그냥 죽어 버릴까. 선우야, 이 씨발놈아, 나 죽어 버릴까? 늦은 밤 술 취해 고래고래 고함을 치는 녀석의 목소리는 그러나 파도에 묻혀 가뭇없이 사라졌다. 강은 녀석의 고함에 보탤 말이 떠오르지 않아 묵묵히 깡통맥주를 홀짝거렸다. 강이 보기에 녀석은 그래도 잘 풀려 가고 있는 경우였다. 장사를 하거나 골프카를 몰아 보겠다고 들어왔던 많은 사람들이 몇 달을 버티지 못하고 섬을 떠났다. 강도 한 해를 섬에서 보내고 나서야 겨우 타로카드를 펼 수 있었다. 그나마 녀석은 이장 선거에 나온 토박이를 도우며 쉽게 섬에 뿌리 내릴 수 있었다. 그래, 이장. 강은 문득 이장 선거가 떠올라 녀석에게 이장집 짜장면을 깎아 주면 어떻겠냐고 넌지시 이야기를 건넸다.

 니미, 씨발. 그 개새끼가 선거할 때는 간이라도 빼줄 것처럼 그러더만 니미, 소송이 나 때문이냐고. 이 씨발놈아. 진짜. 이 씹새끼야. 선우야, 그 씨발놈이. 나보고 쿠폰을 사래. 니미, 천 원 깎아 주는 쿠폰을 천 원에. 니미 씨발.

 녀석의 목소리가 파도에 젖어 스르르 물속 깊은 곳으로 가라앉았다. 솜사탕 기계를 골프카 뒤에 싣고서야 녀석의 발걸음도 솜사탕처럼 가벼워졌다. 얌마, 선우야, 중고잖아. 중고. 그냥 백만 원에 넘겨라 응. 아무리 생각해도 밑지는 장사였다. 강이 고개를 흔들었다. 한 달에 십만 원씩 받고 임대를 하라는 말에 강이 고개를 끄덕였다.

 에이, 씨발놈아. 하하. 잘 먹고 잘살아라. 옜다, 십만 원.

 오래지 않아 녀석의 거짓말이 다시 살아났다. 솜사탕 서너 개씩을 양손에 들고 녀석은 꼬마가 있는 가족에게 다가갔다. 공짜마시. 공짜. 성급한 아이가 솜사탕을 받아들면 그걸로 끝이었다. 녀석은 마술을 하듯 가발을 벗어 인사를 했다. 경 미안허그네 대머리랑 머리 좀 심게 우리 골프카나 경 타줍서. 그걸로 끝이었다. 가족들은 녀석의 골프카를 타고 마라도를 돌았다.

 

 천국에서 발을 뻗는다. 어항 속에 고래 한 마리, 파도가 칠 때마다 커다란 몸을 뒤척인다. 바람이 불면 당신은. 거기까지 읽었을 때 막산이 큰 소리로 강을 외쳐 부르며 문을 두드렸다. 마라도에 대한 거짓말이 바닥이 날 즈음부터 틈틈이 다른 무언가를 끄적거리던 녀석은 가끔씩 시랍시고 강에게 내밀었다. 바람이 불면 당신은, 오지 않는다, 고 강은 녀석의 시에 자신의 구절을 만들어 붙였다. 당신은 오지 않고 막산만 소리쳐 달려왔다.

 따로야, 따, 따로야. 하, 한저 날 따라옵셔.

 무사?

 니, 니 친구 말입주. 저기 김 사장 패거리가 뒷산으로 끌고 갑주.

 경, 무사?

 모, 몰라마씨. 진짜로 몰라마씨. 마, 막, 몽둥이로 때리면서.

 서둘러 방문을 열던 강이 무춤히 방문턱에 걸터앉아 신발끈을 만지작거렸다.

 창문을 어른거리는 등대불빛에 실려 김 사장의 그림자가 밀려왔다가는 멀어졌다.

 횟집을 하던 어느 여자가 다른 사람의 이름을 빌려 인터넷에 글을 올렸다. 골프카 운행이 마라도를 얼마나 망치는지, 그 호객이 얼마나 시끄러운지에 대한 글이었다. 백 대가 넘는 골프카의 주인들이 마라도를 들어서는 사람들을 막아섰다. 매일 싸움이 붙었고 매일 크고작은 사고들이 잇달았다. 차가 없는 섬, 청정자연지구가 무색할 지경이었다. 오래지 않아 여자가 사는 방에 남자 서넛이 몰려들었다. 여자의 온몸에 피멍이 들었다. 무릎을 꿇고 두 손을 싹싹 빌던 여자가 쓰러졌다. 119 구급대에 실려 섬을 떠나는 여자를 김 사장이 멀리서 바라보며 입꼬리를 말아올렸다. 그가 입꼬리를 쓰윽 말아올리며 신경질적으로 웃을 때면 사람들이 그렇게 어느 한 곳을 크게 다치곤 했다. 핫도그 장사치와 새롭게 문을 연 짜장면집 남자와 민박집을 하던 여자가 그 때문에 섬을 떠났다. 심지어 자신의 형수조차 그는 아무렇지도 않게 쌍욕을 퍼부으며 손찌검을 하곤 했다. 똑똑, 깨진 현관 유리창 저편에서 김 사장이 강을 바라보며 슬며시 입꼬리를 말아올렸다.

 무사 그러고만 앉아시니?

 막산이 강을 채근했다. 바람이 덜컹거리며 현관문을 흔들었다.

 어, 어. 나 화장실 좀. 근데, 막산아. 소, 솜사탕 줄까?

 솜사탕? 구름사탕 마시? 으음, 먹자. 구름사탕 먹고 가자.

 강이 마당 한쪽에서 잘 나오지도 않는 오줌을 누고 난 뒤에 솜사탕 여닫개를 눌렀다. 위위윙, 노즐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버저가 울리고 강이 설탕을 넣고 솜사탕을 말았다. 달처럼 동그랗게 말린 솜사탕을 막산에게 하나 내밀었다. 차가웠던 손바닥이 아주 조금 따뜻해졌다. 강도 반달 같은 솜사탕을 하나 만들어 들고서야 두 사람은 길을 나섰다. 우우우, 낮은 목소리로 우는 키 작은 갈대밭을 지나 숲에 이르는 길목에 접어들었다. 멀리서, 가까이서, 개 짖는 소리들이 컹컹컹 앞다투어 달려들었다. 개 짖는 소리 사이로 그림자 하나 불쑥 달려나왔다. 강과 막산을 보며 잠시 몸을 움츠렸던 녀석이 숲속을 향해 고래고래 욕을 뱉어냈다. 이 씨발, 좆판구리들아, 이 씨발 허헉, 개 잡놈들아, 내가 허헉, 니그들 좆몽둥이를 뽑아서 고기들 밥을 줄판여, 이 씨발, 헉헉. 이 니닐리. 허헉. 씨발. 씨발. 좆팡구리 개 씨발놈들아. 녀석이 잠시 숨을 고르는 사이 숲속에서 그림자 몇이 엉그적거리며 걸어나왔다. 욕을 멈추고 녀석이 주춤주춤 큰길로 뒷걸음을 쳤다. 서너 걸음을 옮기다 무릎에 손을 얹고 녀석이 숨을 크게 한 번 들이마시더니 다시 욕이었다. 니미, 이 씹봉구리들아, 잡어. 잡아 봐. 왜, 왜? 잡아서 아까처럼 또 지랄혀 봐. 이 좆에 낀 때만도 못헌 놈들아. 숲속에서 나온 그림자 가운데 하나가 저, 개, 씨발놈이, 소리치며 갑자기 달리기 시작했다. 녀석도 다시 달려갔다. 나머지 그림자들이 강과 막산을 지나 녀석을 쫓았다.

 날이 훤하게 밝고 나서야 녀석이 비칠배칠 방문을 열었다. 이불 속에서 뭉그적거리던 강이 일어나 녀석을 빤히 바라보았다. 이런저런 생각들이 찬바람처럼 이불 속을 파고들어 도무지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어이, 친구. 일 안 나갈텨? 녀석이 옷을 갈아입으며 물었다. 마치 지난밤 일들이 한바탕 꿈결인 양 태연스러웠다. 에이 씨, 진짜. 야, 너 그냥 가라 가. 제발, 응. 이불 속으로 다시 몸을 숨기며 강이 뜬개말을 뱉어냈다.  

 이리저리 뒤척였지만 쉽사리 잠이 오지 않았다. 스스로 만든 유배지에서 유배보다 더 독한 외로움들을 견디며 살아 왔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은 거짓이었다. 강이 견딘 것은 외로움이 아니라 질투였다. 멀리 있으니 세상이 그립지 않았고 그립지 않으니 질투를 느끼지 못했다. 아무도 다가오지 않는 위리안치, 탱자나무 울타리 안으로 녀석이 불쑥 들어왔다. 가시를 피해 탱자나무 밖으로 나왔으나 사방이 안개였다. 녀석이 오고 나서 모든 것이 뒤죽박죽이었다.

 강이 한숨을 내쉬고 밥상을 밀었다. 입 안이 소태처럼 쓰기만 했다. 맥주나 마실까, 냉장고를 뒤져 보니 반쯤 먹다 남은 맥주뿐이었다. 끌신을 질질 끌고 강이 뒤듬바리 걸음을 나섰다. 편의점에서 깡통맥주 몇 개 검은 봉지에 담아 들고 돌아서는 강 앞에 골프카가 멈춰 섰다. 밥? 녀석이 손숟가락질을 하며 물었고 강도 손도리질로 말을 받았다. 타, 짜장면이나 먹자. 언능, 손님들 기다리시잖여. 녀석이 싫다는 강을 기어이 골프카에 태웠다. 그새 화해를 했나, 강이 골프카 뒷자리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솜사탕 하나를 뜯어먹으며 생각했다. 그러나 녀석이 멈춰 선 곳은 김 사장의 짜장면집을 마주 보고 있는 마라원짜장이었다. 야, 너? 강이 고개를 까닥 틀어 김 사장을 가리켰다. 감수광 감수광 날 어떡할렝 감수광, 콧노래를 부르며 돈을 다 세고 나서야 녀석이 대답을 내어놓았다. 야, 씨바, 솔직히 저게 짜장이냐? 삼분 짜장도 저것보담 낫다, 니미. 내가 그동안 의리 때문에 저리 갔는데…… 아니, 니미, 사람들이 소문 듣고 굳이 여길 찾는데 어째? 거 몇 번 이리로 손님 데리고 온 것 보고 생지랄을 니미 부르스로 추고. 아휴, 그냥, 성질 같아서는. 저 개새끼를, 아주 진짜. 잔뜩 욕을 섞었지만 녀석의 목소리는 점점 줄어들었다. 강은 그제야 지난밤 일을 아퀴지을 수 있었다. 감수광 감수광 나 어떡할렝 감수광 설릉사랑 보낸시엥 가거들랑 한저옵서예, 다시 녀석의 콧노래가 이어졌다. 짜장면이 나오고 강이 반주 삼아 소주를 반 병쯤 마셨을 때, 김 사장이 다가와 툭툭 녀석의 어깨를 건드렸다.

 동생, 나한테 서운한 거 있어마시? 동생 좋아하는 따치찜 해놨는디 무사 여서 짜장을 먹언?

 니미, 개밥 먹이고 또 개처럼 끌고 갈려고…… 가세요. 저 이제 사장님하고 동생 안할랍니다.

 아이구 진짜. 많이 서운했는가 벼. 지난밤에 진짜 난 몰라잖여. 그놈들이 진짜 다른 사람도 아니고 동생한테마시. 나도 아침에야 얘기 들언. 사람들이 괜히 오해를 해가지고, 쯧. 내가 미안혀, 진짜 내가 미안혀.

 일업수다. 언제는 뭐 사장님이 그런 일들을 아시기나 하셨나요? 그 잘난 동생분이 괜히 그냥. 암튼, 이제 저랑은 제발 형님 동생 그만 하죠. 예?

 아이구, 자꾸 왜 그래. 경해도 나하고 동생하고 쌓은 정이 얼만디. 내가 사람들한테 단단히 타일러 놨으니까 이제 다시는 그런 일 없을 거마시. 나도 간밤에 그 소리 듣고 동생 걱정돼서 맨발로 달려간. 암튼, 저 가멍 동생 좋아하는 따치찜 해놨다니까. 한저 갑셔.

 말하는 내내 싱글벙글 웃는 김 사장의 얼굴이 무섭게 느껴졌다. 말이 몇 번 더 오가고 나서 녀석이 김 사장을 따라나섰다. 강이 탁자 밑으로 손을 넣어 녀석을 잡아 보았지만 허사였다. 얼마지 않아 녀석과 김 사장은 서로 어울려 웃고 떠들며 술잔을 기울였다. 무슨 말을 나누는지 알 수 없지만 녀석이 김 사장을 두고 형님 어쩌고 저쩌고 지껄이는 말들이 간간이날아들었다. 강만 혼자 남아 소주잔을 훌쩍거렸다.

 

 햇살이 얼굴을 살짝살짝 간지럽혔다. 파란 잔디에 누워 해바라기를 즐기던 강이 솜사탕을 살짝 베어물었다. 설탕 냄새를 맡고 나비 몇 마리 날아와 동무 해 주었다. 지나가는 사람들만 문득문득 따가운 시선을 보낼 뿐 강을 방해할 아무것도 없었다. 따뜻한 봄날 며칠이었다.

 걱정했던 것과는 달리 싸움 뒤에 녀석과 김 사장은 한결 가까운 사이가 되었다. 두 사람이 술에 취해 어깨동무를 하고 비틀거리며 노래를 부르거나, 절벽 위에 서서 오줌을 누는 모습을 자주 볼 수 있었다. 저녁이면 돌아와 콧노래를 부르며 돈을 세는 녀석의 얼굴에 콩꽃들이 피웠다 지곤 했다. 가끔 날을 새고 돌아오는 날에는 머리를 긁적이며 깡통맥주를 내밀기도 했다. 녀석은 강보다 더 오랜 시간을 섬에서 보낸 사람 같았다. 나쁘지 않은 일일 터인데도 강의 마음 한곳에서 파도가 몰아치곤 했다. 그래서일까, 녀석이 어머니가 아프다며 며칠 뭍에 다녀온다고 했을 때 강은 오히려 반가운 생각마저 들었다.  

 녀석이 없는 며칠, 강은 골프카를 타고 섬 이곳저곳을 돌아다녔다. 골프카를 타는 재미가 생각보다 야무졌다. 그래도 처음 이틀은 낚시를 갈 때만 녀석의 골프카를 몰았었다. 무거운 밑밥통을 들지 않아도 좋았고 잡은 고기를 살리기 위해 헐레벌떡 물통을 들고 뛰지 않아도 좋았다. 녀석이 뭍에 나가고 이틀이 되었을 때 강은 마라도에 들어와 처음으로 다섯 자 벵에돔을 잡았다. 그걸 살려 보겠다고 강은 녀석의 골프카를 타고 몇 번이나 바다와 집을 오갔다. 여자가 만들어 놓은 수족관은 오래 전에 썩어 검게 죽어 있었다. 물을 비우고 이끼들을 닦아내고 강은 바닷물을 길어다 부었다. 여자와 함께 하루종일 만들었던 수족관이 녀석의 골프카를 타고 한 시간 만에 다시 살아났다. 벵에돔이 좁은 수족관을 이리저리 헤엄치는 모습을 바라보며 강은 솜사탕을 만들었다. 버저가 울리고 솜사탕이 나무젓가락에 돌돌 말리는 사이, 어느새 막산이 수족관 앞에 앉아 있었다.

 고기야. 고기야. 무사 잡혔시니? 고기야. 고기야. 너도 구름이 먹고 싶었시니?

 막산이 일어나 강에게 다가오며 말을 이었다. 나도, 구름사탕줍써. 솜사탕을 뺏다시피 받아들고 막산이 다시 수족관 앞에 앉았다. 맛있니? 맛있니? 막산이 솜사탕을 송송 찢어 수족관에 넣었다. 둥실둥실, 둥둥둥, 좁은 수족관을 솜사탕이 구름으로 흘렀다. 흐르다가 녹아 스르르 사라졌다. 그 날 이후, 강은 아무런 일도 없이 무담시 골프카에 올랐다. 때때로 등대 밑이나 절벽 위에서 막산이 들려 주는 이야기를 들었다. 때때로 팔각정에 앉아 지나가는 사람들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바람을 가르며 섬을 달리는 기분이 참 좋았다. 그리고 가끔 솜사탕 하나 들고 잔디 위에 누워 먼 하늘을 바라보다가는 햇살에 취해 잠이 들곤 했다.

 불쑥 다가선 검은 그림자가 햇살을 막아섰다. 실눈을 뜨고 바라보니 막산이 웃고 있었다. 무사? 솜사탕을 달라고 왔다는 걸 뻔히 알면서도 강이 여린 웃음을 흘리며 물었다. 나, 구름사탕줍써. 막산의 대답을 다 듣기도 전에 강이 일어나 솜사탕 여닫개를 눌렀다. 위위윙, 노즐이 붉게 달아오르고 버저가 울릴 즈음에 막산이 웃으며 말을 이었다.

 가짜 이장 안 완? 아까부터 따로 니 찾고 그랬시니?

 무사?

 몰라마시. 그냥 너 자꾸만 찾았시니 등대 아님 여 있을 거라고만 햅쥬.

 강이 설탕을 넣고 솜사탕을 말아 막산에게 내밀었다. 막산이 노란 이를 히죽 드러내고 웃으며 마을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강이 다시 설탕을 넣고 솜사탕을 말고 있을 때 골프카 한대가 스스르 다가와 멈춰 섰다. 김 사장이 처음 보는 낯선 얼굴과 함께 내려 강에게 다가섰다.

 여기 있었구만. 나도 그거 하나 만들어줘 봐. 그나저나 가만 보믄 이 섬에서 자네 팔자가 최고여, 이. 근데 그건 어떻게 하는 거여?

 김 사장이 낯선 얼굴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어이 동생, 잘 배워 둬. 지난번 저 차 사장이 그걸로 애들 꼬셔 가지고 장사를 아주 톡톡히 잘했다니까. 근데 열쇠는 어딨어?

 까닭을 몰라 눈만 크게 뜨고 두리번거리고 있는 강을 보며 김 사장이 말을 걸어 왔다. 네에? 강은 여전히 뜻모를 이야기들이었다.

 이거어. 임자가 나섰으니 이제 가져가야지. 거 열쇠 어딨어?

 김 사장이 녀석의 골프카를 발로 툭툭 차며 말했다.

 예에?

 어, 무사 몽니를 부려? 동생이 다 말했다고 하더만 왜 자꾸 이래. 임자가 이렇게 들어왔잖아. 거 진짜.

 어머니가 아프다던 녀석은 그러나 골프카를 팔고 섬을 떠났다고 했다. 뭍에 나가 새로운 임자에게 골프카 값을 받고 강의 솜사탕 기계까지 함께 넘겼다고 했다. 처음 듣는 이야기라고 맞서 보았지만 낯선 얼굴이 녀석의 글씨로 된 계약서를 내밀었다. 야, 서, 선우야. 니미 씨발, 씨발이. 졸라리 미안혀. 진짜로 졸라리 미안혀. 녀석이 섬을 떠나며 했던 말이 떠올랐다.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강은 주머니에서 골프카 열쇠를 꺼내 낯선 얼굴에게 내밀었다.

 근데, 요. 이, 이건 제 꺼거든요.

 강이 골프카 뒤에 솜사탕 기계를 묶어 두었던 줄을 풀었다.

 무슨 소리예요. 백만 원이나 더 줬는데.

 낯선 얼굴이 강을 말렸다.

 어어, 이, 이건. 진짜 제 꺼라니까요!

 자네 왜 그려, 사람 무안하게.

 사장님. 이건 진짜. 아, 진짜 이건 제 꺼라니까요. 진짜, 아, 진짜.

 잔소리 말고 저리 안 가. 사람 그렇게 안 봤더니.

 김 사장이 강을 밀어냈다. 강이 뿌리 뽑힌 허수아비처럼 힘없이 쓰러졌다. 아무리 생각해도 답이 나오지 않았다. 녀석은 이미 어딘가로 사라졌다. 씨발 개새끼. 강이 누구에게랄 것도 없이 하늘을 향해 욕을 내뱉고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뭐, 뭐, 개새끼? 인제 개나 소나 날 졸로 보는구만. 이 씨발 새끼가.

 김 사장이 쓰러진 강에게 발길질을 날렸다.

 아, 아니, 제, 제 친구한테, 그, 그, 씨발 새끼한테.

 강이 옆구리를 잡으며 힘들게 말을 토해 놓았다. 김 사장이 다시 발을 들어 강에게 차는 시늉을 하다가 내려놓았다.

 팍, 그냥, 씨발놈이, 그래도 계속 욕이네. 야, 이 씨발놈아. 사람들이 너 장사 못하게 하자는 것도 내가 그냥 너 불쌍하다고 냅두라고 했어. 근데, 뭐 개새끼. 보자보자 하니까 니미 좆만 한 것들이 다 날 졸로 보고. 팍 진짜 이 씨발 새끼를. 아휴, 이 씨발 새끼를 진짜 장사고 뭐고 없게 해 볼까 보네, 씨발 진짜.

 김 사장이 다시 한번 발을 들었다가 내려놓았다. 강이 옆구리를 붙잡고 낑낑 신음을 토해 놓는 사이 김 사장이 타고 온 골프카를 타고 멀어졌다. 낯선 얼굴이 그 뒤를 따라 녀석의 골프카를 몰고 멀어졌다. 쓰러진 하늘에 구름이 흘렀다.

 니미, 씨발. 내 꺼라고.

 강이 벌떡 일어나 멀어진 골프카를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야, 서. 씨발, 내, 내 꺼라고. 서, 서라니까. 있는 힘을 다해 달려 보아도 골프카는 점점 멀어질 뿐이었다. 더 이상 쫓지 못하고 강이 멈춰 서서 무릎 위에 손을 얹고 숨을 골랐다. 골프카 뒤에서 아직 뭉쳐지지 않은 솜사탕이 풀려 나왔다. 솜사탕이 바람 속으로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문장웹진 3월호》

 

 

 

조헌용

추천 콘텐츠

좋아하는 마음 없이

좋아하는 마음 없이 김지연 안지는 이른 결혼을 했는데 실패로 끝났다. 아니, 그걸 실패라고 할 수 있을까? 이혼을 한 건 사실이었지만 안지는 자신의 인생 여정에서 그때 이혼한 일을 실패라고 단정 지을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 뒤로 더 행복해졌다고 할 수는 없을지언정 조금 더 자기 자신에 가까운 삶을 살게 된 것은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혼이라는 단어를 떠올릴 때면 늘 그에 대해 변호하고 싶은 여러 말들이 떠오르곤 했기 때문에 처음부터 결혼 같은 건 하지 않는 편이 더 나았을 거라는 생각을 하곤 했다. 때문에 이혼했다는 사실은 안지의 비밀은 아니었지만 먼저 나서서 밝히지도 않았다. 어릴 때 안지는 무척 전형적인 사람이 되고 싶었다. 구체적으로 그런 표현을 떠올리지는 않았다. 그저 자신이 속해야 하는 집단에서 튀지 않는 사람, 아주 평균적인 사람이고 싶었고 그런 사람이기 위해서 부단히 노력을 했다. 찬반투표를 할 때면 눈치를 보다가 다수의 의견에 따라 슬그머니 손을 들었다. 친구가 좋아하는 가수를 따라서 좋아하고 친구의 것과 비슷한 브랜드의 신발을 사서 신었다. 친구들이 싫어하는 선생을 따라서 싫어했다. 사실 안지는 그 선생에게 남몰래 호감을 갖고 있었지만 친구들과 함께 떡볶이를 먹다가 술술 흘러나온 그 선생에 대한 욕을 듣고 재빨리 노선을 바꿔 함께 욕을 했다. 한동안 안지는 수학 시간마다 왜 애들은 저 선생을 싫어할까? 에 대한 답을 알고 싶어서 더 열심히 선생의 행동거지를 살폈다. 수학을 가르친다는 점만 빼면 딱히 나무랄 데 없는 사람이었다. 학생이 쉽게 답할 수 없는 내용을 골리듯 물어보지 않았고 무엇보다 학생들한테 사과를 할 줄 알았다. 뭔가 잘못 알고 섣불리 화를 냈을 때, 그러다 결국 진실을 알게 되었을 때, 다른 선생들은 그러게 헷갈릴 만한 짓을 왜 하고 다니느냐고 도리어 짜증을 부렸는데 그 선생은 재빨리 미안하다고 말했다. 미안하다. 내가 잘못 알았어. 미안해. 가끔 안지는 머릿속으로 그 목소리를 재생해 보곤 했다. 그 때문에 선생이 더 좋아졌지만 여전히 싫어하기 위해 애썼다. 누구나 다 그런 식으로 청소년기를 보내지 않나? 내가 아닌 사람이 되어 보려고 노력하면서? 안지는 대학에 갔고 연애를 했고 졸업을 했고 취직을 했다. 결혼도 했다. 아주 평균적인 삶이었다. 조금씩 빠르기도 했다. 조바심이 나 있었으므로. 자신도 남들처럼 지극히 평범하게 살 수 있다는 것을 빨리 증명해 보이고 싶었으므로. 어느 정도 성공적인 것 같기도 했다. 남편이 바람이 나기 전까지는 그랬다. 식도 올리기 전 임신을 해 낳은 아이가 막 돌을 지난 참이었다. 임신이 아니었으면 결혼까지는 이어지지 않았을지도 몰랐다. 남편은 계속 후회하는 것 같았다. 그때 낙태를 밀어붙이지 않은 것을, 시간을 끌다가 영영 타이밍을 놓쳐버리고 만 것을, 어떤 결단력을 가지지 못한 자신을 자책했을지도 모른다. 그때 뼈저리게 깨달은 바가 있었는지 새로운 여자가 생겼을 때는 안지가 알아차리기도 전에 이혼을 해달라고 요구했다. 겨우 육 개월을 만났을 뿐

  • 관리자
  • 2024-07-01
소금 샹들리에

소금 샹들리에 정한아 호주에 사는 김이 오랜만에 귀국해서 친구들이 다 같이 모이기로 했다. 4명이 만나는 건 대략 7년여 만이었다. 방을 잡고 밤새 보자고 해서 오기 직전까지 망설였는데, 남편이 등을 밀었다. 정민이와 자신에게도 내가 없는 날이 필요하다고 큰소리를 치더니 정말 밤새 전화 한 통 없었다. 친구들과는 대학 동기였다. 전공은 문예 창작이었는데, 나는 2학년까지 다니고 학교를 그만뒀다. 그렇지만 정작 작가가 된 사람은 나뿐이라고 친구들이 투덜거렸다. 나는 작가가 아니라고 아무리 말해도 소용없었다. 그들은 십 수 년 전 내가 낸 단 한 권의 책을 기억하는 몇 안 되는 사람들이었다. 세 명 모두 미혼이었고, 아이를 가지지 않았다. 놀라울 정도로 예전 그대로인 친구들 사이에서 나만 철 지난 옷차림에 좀처럼 대화에도 섞이지 못했지만, 그런 것 때문에 마음이 상하지는 않았다. 오랜만의 서울 나들이에 술자리도 즐거웠다. 좋은 친구들이었다. 7년 전 정민이 자폐 스펙트럼 장애 판정을 받았을 때 그들은 자신의 일처럼 울어 줬고, 이후에도 종종 아이의 간식과 선물을 집으로 보내 줬다. 서서히 연락을 거둔 것은 내 쪽이었다. 애써 관계를 유지하는 일이 힘에 부쳤을 뿐, 그들에게 섭섭한 마음은 조금도 없었다. 지난 몇 년 동안 나는 집이 아닌 곳에서 밤을 보낸 적이 없었다. 다들 술에 취해서 침대로 간 뒤에도 좀처럼 잠이 오지 않아 휴대폰만 들여다보았다. cctv 속 거실은 엉망이었다. 엎어진 식판, 사방에 흩어진 블록 조각, 길게 늘어진 옷가지들. 남편은 불도 끄지 않고 아이를 재우러 방에 들어간 모양이었다. 나는 정지화면 같은 그 풍경을 한참 바라보다가 해 뜰 무렵에야 겨우 잠이 들었다. 다음날 우리는 점심을 먹고 헤어지기로 했다. 맛집마다 대기가 길어 종로의 좁은 골목을 돌고 또 돌았다. 앞장서 구글 맵을 보며 걷던 김이 갑자기 작은 서점 앞에서 멈춰 서더니 책을 사야겠다고 말했다. 지난 이사 때 내 책을 분실했다는 것이었다. 나는 집에 돌아가서 책을 다시 보내 주겠다고 김을 달랬다. 다섯 평도 안 되어 보이는 그 작은 서점에 내 책이 있을 리는 만무했기 때문이다. 김은 막무가내로 서점에 들어갔다. 할 수 없이 그녀를 따라 들어갔다가 전면 책장에 전시된 내 책을 발견했다. 죽은 친구를 만났다고 해도 그처럼 놀라지는 않았을 것이다. “미애 씨!” 그곳에서 누군가 나를 불렀다. 우아한 노부인이었다. 린넨 바지에 화이트 셔츠, 큼지막한 호른 목걸이를 한 여자는 환하게 웃으면서 나를 바라봤다. “반장님?” 나는 말끝을 흐리며 물었다. 여자는 성큼성큼 내 앞에 다가와서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나를 와락 끌어안았다. 누군가 나를 그렇게 안은 것이 너무 오랜만이라 온몸에 힘이 풀리는 것 같았다. 그녀는 오래전 나와 함께 공부했던 문우였다. H 백화점 문화센터 소설 창작 교실의 반장. 친구들이 책을 구경하는 사이 나는 그녀와 짧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ldqu

  • 관리자
  • 2024-07-01
그동안의 정의

그동안의 정의 최예솔 작정하고 사라진 사람은 작정하고 찾아야만 한다. 나는 윤정수를 작정하고 찾지 않았다. 보통의 남매 사이라는 게 정확히 어떤 건지는 모르겠지만 윤정수와 나를 그냥 보통 남매, 라고 하기에는 좀 어렵지 않을까. 윤정수는 나보다 4년 먼저 태어났다. 그리 적지도, 그리 많지도 않은 애매한 나이 차이 덕분에 윤정수와 나는 딱히 친해지지 못했다. 내가 초등학교에 입학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윤정수는 중학교에 갔고, 내가 중학생이 되었을 때 윤정수는 고등학교에 갔다. 물론 윤정수와 내가 영 친해지지 못한 건 우리의 나이 차이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윤정수는 내게 없는 사람에 가까웠다. 말수도 없고 센스도 없고 자존심도 없고 공부머리도 없고 돈도 없고······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나? 아무튼 남매 사이에 정이라도 있었다면 걱정이라도 했을 텐데 그럴 이유조차 없었다. 쥐뿔도 없는 윤정수니까. 특이사항이라곤 개그맨 윤정수와 동명이인이라는 것 정도밖에 없는. 그러니 윤정수가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집을 나갔다고 해도 이상할 것 하나 없었지. 뭐 내가 찾는다고 윤정수가 나타났을 거라는 보장도 없지만 나는 막연히, 어련히 때 되면 나타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했다. 하지만 윤정수는 죽을 때까지 나타나지 않았다. 물론 내가 죽은 것은 아니다. 윤정수가 죽었다. 내 나이가 이제 서른이니까, 윤정수는 서른넷에 죽었다. 이제 내게 남은 혈육은 없다······ 아닌가? 고모. 그렇게 부르지 마. 왜요. 낯설어. 저도 고모가 낯설어요. 윤현수는 맹랑하다. 윤정수와 장현아의 딸이라고 해서 윤현수. 그거 좀 유치하지 않니? 물었을 때 윤현수는 뭐 어때요 엄마아빠말곤 모르는데, 하고 대답했다. 이제 나도 아는데? 하니까 이젠 고모도 모르는 척해 달라고 했다. 참 나 어디서 이런 게 굴러왔는지. 현수야. 네. 네 엄마 입국 날이 언제라고 했지? 다음 주 토요일이요. 아직 한참 남았네. 고모도 고모 할일을 해요. 시간 금방 갈걸요. 알겠다 그래. 윤현수를 데리고 온 사람은 장현아다. 이제는 나흘쯤 됐으려나. 아침부터 현관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하도 시끄러워서 나가 봤더니 장현아가 윤현수의 손을 붙잡고 서 있었다. 장현아는 다짜고짜 윤정수를 아느냐고 물었고 나는 오랜만에 듣는 윤정수의 이름에 잠깐 벙쪘다가 네, 저희 오빠네요, 하고 대답했다. 조카입니다. 그날 장현아의 대사를 나는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그건 도저히 내가 아는 사람이 뱉을 만한 말이 아니어서 대사라고밖에는 표현할 수 없겠다. 아직도 문득 의심스러울 때가 있다. 윤현수가 정말 나의 조카가 맞고 장현아가 정말 나의 새언니가 맞을까. 가족관계라는 게 그렇게 단순하게 정리되는 거라면 이제까지 윤정수와 나는, 또 윤정수와 나와 우리의 부모는, 왜 이렇게 흩어지거나 죽거나 혼자 남을

  • 관리자
  • 2024-07-01

댓글 남기기

로그인후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생각을 남겨 주세요!

댓글남기기 작성 가이드

  • 타인에게 불쾌감을 주는 욕설, 비방 등은 삼가주시기 바랍니다.
  • 주제와 관련 없거나 부적절한 홍보 내용은 삼가주시기 바랍니다.
  • 기타 운영 정책에 어긋나는 내용이 포함될 경우, 사전 고지 없이 노출 제한될 수 있습니다.
0 / 1500

댓글0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