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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에게 물었다

  • 작성일 2014-09-15
  • 조회수 2,216

 

 

엄마에게 물었다

 

 

 

엄창석

 

 

삽화-엄마에게-물었다

 


 

 

 

 

    돌풍이 불면서 햇볕이 내리쬐던 변덕스런 8월의 한낮이었다고 기억한다. 거리에 낙엽과 비닐 조각이 휩쓸려 다니는 밤이었던 것도 같다. 낮인지 밤인지 아리송하지만, 아무래도 상관없다. 하여간 그날 나는 무흥에 가 있었다. 도로변에 차를 세워 두고 좁은 비탈길을 내려갔다. 돼지국밥집과 방앗간과 차양막이 휘어진 과일가게가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비바람에 날려 온 가로수 잎사귀가 손바닥처럼 붙은 의상실 유리창 안으로 펠트 모자를 쓰고 담홍색 스커트를 입은 플라스틱 여자 모델이 서 있는 게 보였다.
    거리가 낯설었다. 내가 무흥의 그 동네에 갈 거라고 한 번도 생각하지 않아서겠지만, 사실 처음 와본 것 같았다. 이곳으로 올 의향은 전혀 없었다. 청송에 있는 한 계곡에서 휴가를 보내다가 갑자기 폭우가 쏟아져 급히 텐트를 걷고 돌아오는 길에 35번 국도로 내처 달리지 않고 무흥시로 핸들을 꺾고 말았다. 마치 길을 잘못 든 양 돌아 나가야겠다고 망설이다 이 동네까지 이른 것이다. 휴가 때는 길을 자주 벗어나게 되지, 하는 묘한 방심에 의탁했던 것일까.
    가지를 크게 뻗은 은행나무 가로수도 어릴 때 보지 못하던 거였다. 벽을 노란색으로 칠한 어린이집이 있었고, 5층짜리 빌라들과 지붕 위에 태양열 집열판이 펼쳐진 2층집들이 나타났다. 나는 비탈길이 끝나는 곳에 있는 작은 사거리에 서서, 기억 속에 담긴 방향을 떠올리며, 그것이 주변의 지형과 겹쳐지는 감각을 짚으면서, 내가 살았던 곳이라 짐작되는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오른쪽 길로 얼마 안 나가자 시장 초입일 게 분명한 자질구레한 노점들이 나왔다. 내가 잘못 온 게 아닌가. 당시에 시장은 좀 멀리 떨어져 있었다. 한두 사람이 겨우 다녔던 골목조차 휑하니 넓어졌지만 이발소가 그대로 있어서 정말 이곳이 내가 열세 살까지 살았던 동네임을 알려주었다. 여전히 봉명이발소는 단층 건물이었다. 허연 새시로 된 출입문과 문 상단에 끼워 놓은 간유리창과 붉은 벽돌도 내 기억에서 동일한 영상을 불러왔다. 세로로 된 아크릴 간판에 ‘봉’ 자가 깨어져 파란 테이프로 간신히 붙여 놓은 것까지 예전 그대로여서 오히려 기이하게 여겨졌다. 난 늘 이 이발소를 이용했다. 엄마가 미용실을 놔두고 왜 여길 다니게 했는지 모른다. 키가 작은 나는 의자 손잡이에 걸쳐 놓은 빨래판 위에 앉아 머리를 깎았다. 이발소에 불이 켜져 있었다. 나는 창문으로 들여다보았다. 우리가 ‘복어’라고 불렀던 노인 이발사가 조금도 더 늙지 않고 그때와 똑같이 머리가 다 벗겨지고 볼 살이 처진 불그레한 얼굴을 한 채 긴 의자에 앉아 졸고 있어서 시간적인 혼란이 일어났다.
    이발소에서 둔각으로 난 골목을 따라갔다. 양쪽으로 늘어선 2층집들을 보면서 단층집을 찾았다. 내가 살았던 집이 어딘지 전혀 알 수 없었다.
    사람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간 뒤로 워터파크는 텅 비었다. 산 아래여서 붉은 노을이 빠르게 어둠으로 바뀌었다. 어슴푸레하게 보이던 물놀이 시설인 부메랑과 공중으로 비틀며 솟아 있는 뱀슬라이드가 이제 검은 윤곽만 남았다. 이용객이 없는 놀이시설은 괴괴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건축물의 형태와 너무 동떨어져, 언뜻 폐기물을 쌓아올려 놓았거나 철 구조물을 흩트려 놓은 듯한 비현실감이 드는 것이다. 내 숙소는 워터파크 내에 있었다. 언제부턴가 나는 밤이 깊으면 숙소에서 나와 텅 빈 파크 안을 슬슬 돌아다니며 그런 을씨년스러움을 즐기고는 했다.
    휴가를 갔다가 무흥에 들렀던 게 아마 십 년은 된 것 같았다. 다짜고짜 방문한 그때가 왜 갑자기 생각났을까. 봉명이발소에서 왼쪽으로 이십 미터쯤 지나면 분명히 내가 살았던 집이 나와야 하는데, 보이지 않았다. 아니면 방향을 놓친 건지 모른다. 개량 기와지붕에다 파란색 대문이었던가. 바로 뒤에 큰 대나무가 미풍에도 흔들리곤 했던 점집이 있었던가. 주변은 흐릿하지만 집의 내부는 뚜렷이 기억났다. 마당에서 낮은 계단을 오르면 현관이 나왔고, 현관 입구는 아주 맑은 선홍색 타일로 장식되어 있고 아치형을 그렸다. 시멘트로 포장된 마당에는 앞집 벽과 붙어 있는 화단이 있었다. 화단은 누워 있는 붕어 모양으로 길고 가운데가 두툼했다. (엄마와 나는 화단을 ‘붕어’라 부르곤 했다) 붕어의 아가미에는 석류나무 한 그루가 있었다.
    “형, 오거리에 있는 호프예요. 형도 오지 않을래요?”
    K의 전화였다. 조금 전 놀이객들이 나가고 주변 정리가 끝났을 때 K가 한잔 하겠다면서 아르바이트생들을 데리고 나갔다. 입장객들이 들끓진 않았어도 여름 내내 정신이 없었다. 이제 한 주만 더 있으면 폐장을 할 거였다. 도로와 면해 있는 커피숍을 제외한 워터파크의 모든 시설물들은 긴 휴식에 들어간다. 아르바이트 대학생들에겐 이번 주가 마지막이었다. K는 헤어지는 게 아쉽다며 이별 파티를 하겠다는 것이다.
    “청소는 언제 하고? 다음 주도 문을 열어야 해.”
    “한잔 걸치고요, 몇 명 데려가서 청소할게요. 야, 너희들 도와준댔지? 형, 좀 기다릴래요? 아니면 먼저 들어가 쉬세요.”
    “대충 마시고 와.”
    K의 집은 파크 바로 건너편에 있었다. 결혼 전인 지난해까지 나와 같이 파크 안에서 숙식을 했다. 이곳 직원은 몇 되지 않았다. 전기나 설비, 청소는 모두 외주를 주었고 필요할 때면 이벤트회사를 불렀다. 그러니까 소수의 직원들이 일용직들을 관리하는 것 외에 수시로 현장을 돌며 시설물의 가동 상태를 점검했다. 시설물에 손상이 있거나 장애가 발생하면 외주업체를 투입했다.
    나는 긴 ㄴ자 수레를 끌고 다니며 간략히 바닥 청소를 했다. 어차피 제대로 된 청소는 다음 주에 용역회사에 맡길 터였다. 눈에 띄는 쓰레기만 빗자루로 쓸어 담았다. 워터파크는 크지 않은 규모였다. 보도를 따라 걸어도 30분이면 충분했다. 이용객들은 대부분 20대였다. 파도풀이나 부메랑 등이 초등학생과 더 어린 소아에게 맞춰 구성된 것이지만 아이들은 별로 오지 않았다. 영업을 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이용자의 연령층이 정해진다. 연령층의 폭이 좁아질수록 다른 연령대에는 배타적이 된다. 처음부터 틈새시장을 노려선지 모르나 대규모 시설을 구비하지 않았는데도 제법 타산이 맞았다. 요즘 여름철에는 동해안 해수욕장이 썰렁하고 도시에 있는 워터파크는 미어터진다. 젊은이들이 워터파크로 이동한 탓이었다. 단순히 유행에 그칠 것 같지는 않았다. 젊은이들은 저들끼리만 어울리고 싶어 하니까.
    나는 구석구석을 돌며 찾으러 올지 모를 팔찌나 물안경, 손가방 따위의 분실물을 구분하여 비닐봉지에 담았다. 수레에는 입장권, 립스틱, 풍선조각, 선크림 같은 자질구레한 쓰레기가 꽤나 쌓였다. 파크의 맨 우측인 대나무 숲에는 샌들과 브래지어와 팬티까지 떨어져 있었다. 이 새끼들, 여기서 뭘 했는지. 나와 K는 청소를 할 때마다 욕설을 내뱉곤 했다. 사진을 찍어서 분실물 게시판에 올려야 돼. 우리는 침을 튀기며 낄낄 웃었다. 수레를 세우고 파크를 휘둘러보았다. 조명등으로 환한 파크 안은 지독히 고요했다. 15미터 높이의 물 미끄럼틀인 뱀슬라이드가 용수철을 구겨 놓은 것처럼 배배 꼬인 채 서 있었다. 큼직한 밤새 한 마리가 탁탁, 날개를 치며 파크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산으로 날아갔다.
    아주 오래전이었다. 화창한 봄날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엄마는 헐렁한 원피스를 입고 화단에 서 있었다. 엄마 뒤로 석류나무가 보였고 화단가로 철쭉이나 영산홍 같은 키 작은 관목들이 자랐다. 삽을 든 엄마가 화단에서 나올 때 나는 장난감 차를 끌고 현관으로 나왔던 것 같았다. 내가 엄마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화단 밖으로 내딛던 엄마의 발에서 샌들이 벗겨지는 것을 보았다. 어머! 엄마가 가는 소리를 질렀던가. 그때 대문이 열렸다. 앞집 아주머니가 얼굴을 들이밀었다. 엄마와 비슷한 나이인 아주머니가 양푼에 무와 양파를 담아 왔다. 채소를 나눠주려고 했던 것 같다. 아주 오래전이다.
    대문 안으로 엉거주춤하니 들어선 아주머니가 삽을 든 엄마에게 말했다.
    “뭘 묻었어요?”
    엄마가 뭐라고 대답했던가. 잠시 머뭇거렸고 삽을 든 손과 샌들이 벗겨진 발을 내려다보았던 것 같다. 엄마가 고개를 들었다.
    “고양이를 묻었어요.”
    엄마는 나와 십여 미터 떨어져 있었고 대문도 그 정도의 거리에 있었다. 그러니까 현관 앞에서 장난감 지프를 잡고 바퀴를 쌩쌩 굴려서 태엽을 감고 있던 나와 화단에 있던 엄마와 대문으로 들어서던 앞집 아주머니가 거의 정삼각형을 이루고 있었다. 집 나온 고양이들이 많이 돌아다녔을 것이다. 담벼락을 타고 다니기도 했고 대문 밑으로 기어 들어오기도 했다. 마당에서 고양이가 죽어 있었을 거다. 병이 들었거나 개에게 물렸거나 해서 죽었을 것이다.
    난 다섯 살 아니면 여섯 살이었다. 마당에 봄볕이 가득했다. 긴 머리카락을 뒤로 묶은 엄마가 고개를 돌릴 때의 표정을 기억한다. 갸름하고 창백한 얼굴, 약간 벌어진 입술, 물기가 담긴 듯한 눈. 슬리퍼가 벗겨진 맨발과, 벌어진 두 무릎을 감싸느라 팽팽하던 점 무늬 원피스 실내복을 기억한다. 그리고 갑자기 뛰어든 목소리. 아줌마 뭘 묻었어요? 아주 오래전 이야기다. 내가 엄마의 대답을 잘못 기억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앞집 여자가 ‘아줌마 뭘 묻었어요?’ 하는 약간 고음의 목소리가 오랫동안 내 귀에서 방울소리처럼 딸랑딸랑 울렸다.
    “형, 미안해요. 자리가 길어져요. 얘들이 집에 안 가려고 해. 형, 먼저 들어가 쉬세요. 내일 새벽에 나 혼자서 대충 청소할게요. 뭐 어차피 다음 주에 청소업체를 부를 거잖아요. 참, 풀의 물이나 좀 빼줘요.”
    꽤 취한 목소리였다. 그럴 거라 싶었다. K에게는 묘한 고독감 같은 것이 풍겼다. 평소에는 그렇지 않았으나 술을 마시면 밤새도록 떠들거나 한 마디도 입을 떼지 않았다. 풀의 물을 빼는 게 급하긴 했다. 다 빠지는 데 두 시간이 걸렸다. 풀은 모두 네 곳이었다. 영업 중에는 바닥을 유리처럼 닦기는 힘들었다. 오염된 물을 빼고 새 물을 채우는 게 더 중요했다.
    나는 배수구를 열지 않고 단자함으로 갔다. 배선용 차단기를 내렸다. 검은 벼락을 치듯 불이 하나씩 꺼졌다. 시설물 꼭대기에 달린 표식등과 인도 블록 안에 장치된 비상등만 켜져 위치를 애매하게 가르쳐주었다. 나는 옷을 다 벗고 풀로 내려갔다. 안전대원 노릇을 했던 수년 전 이후로는 한 차례도 직접 물에 들어가 본 적이 없었다. ‘물의 동굴’은 물이 배꼽쯤 오는 깊이였다. 나는 걷지 않고 가볍게 몸을 띄웠다. 동굴은 에스 자로 휘어져 있었다. 캄캄한 수면과 협소한 공간으로 마치 서해의 바다 동굴처럼 느껴졌다. 나는 힘을 들이지 않는 능숙한 자세로 양팔을 휘저으며 헤엄을 쳤다. 모터가 작동되면 물의 흐름에 의해 몸이 동굴 속으로 빨려 들어가 한 바퀴 돌고는 넓은 파도 풀로 뱉어낸다. 지금은 물이 흐르지 않았다. 수면을 가르고 물이 튀는 소리가 동굴에 부딪쳐 메아리처럼 울렸다. 동굴은 꽤나 깊었다. 연인들이 여기서 껴안고 키스를 한다. 동굴은, 마치 도로상에서 졸리는 운전자를 위해서 만든 정차 공간처럼 넓어지기도 하고, 귀 모양으로 은밀하게 파인 곳도 있었다. 이런 것들이 아이들보다 성인들의 놀이터가 되게 했을 것이다. 동굴의 폭은 2미터가 되지 않았다. 내 몸이 밀어낸 물이 동굴 벽에 부딪쳐서 가볍게 역류를 했다. 이따금 내 머리가 동굴 벽에 닿았다.
    형, 다른 사람에게 할 수 없는 얘기를 해본 적이 있나요? K가 말했다.
    무슨 소리야? 할 수 없는 얘기를 했다면 그건 결국 할 수 없는 얘기가 아니잖아. 내가 논리의 틀림을 지적했다.
    형, 그게 그렇지가 않아요. K가 손사래를 쳤다. 내게 여동생이 있었어요. 새엄마가 데려온 애니까 배다른 동생인 거죠. 그 애를 좋아했거든요. 얼굴이나 옷맵시, 동작까지 아주 사랑스러웠죠. 한번은 걔가 과제물이 있다고 4시에 꼭 깨워 달래요. 새벽 4시요. 직장을 다니는 새엄마가 출장을 간 날이었죠. 그날 동생 방 문을 열고 형광등 스위치를 올렸는데 침대 옆에 아빠가 서 있는 거예요. 나를 획 돌아보는 아빠의 눈빛이 모든 걸 일러주고 있었죠. 그 뒤로 집을 나와 버렸어요.
    아, 네 아버지가 그런 사람이구나. 내가 그의 어깨를 치며 침통하게 중얼거리자 K가 낄낄 웃었다. 어디서 읽은 소설이에요. 뭐야? 어처구니가 없었다. 근데요, 소설가는 자신이 겪은 사건을 교묘한 방식으로 털어놓는 작자란 생각이 들어요. 고백을 해놓고 자신의 얘기가 아닌 양 능청을 떠는 거죠. 형, 사실은 누구나 자신의 입에서 내뱉을 수 없는 얘기를 동떨어진 방법으로 털어놓지 않을까요? 말이 아니라, 다른 방식으로 말을 하는 거죠. 말로 할 수 없는 거니까요. 엉뚱한 행동에다 그걸 감추는 거죠. 아니면 농담이나 거짓말로 흘리기도 하겠죠. 드러내면서 숨긴다고나 할까요?
    동굴 안에는 비상등이 켜져 있었다. 희미한 불빛이 비쳐 물결이 더 검어 보였다. 비상등 아래에 동그란 버튼이 있었고, 버튼을 누르세요, 라는 글자가 적혔다. 버튼에 손을 대자 울퉁불퉁한 천장에서 물이 폭포처럼 쏟아졌다. 이용해 보지 않았지만 동굴의 내부 구조는 훤히 알았다. 그 폭포는 은밀하게 조성된 동굴의 안쪽을 차단하는 역할을 하는 거였다. 나는 커튼을 젖히듯 폭포를 뚫고 들어서며 아르바이트생 중의 하나를 급히 골랐다. 보라라고 했지. 수영복 대여 코너에서 일하는 여자. 얼굴이 희고 젖가슴이 풍만한 보라의 허리를 손으로 싸안는 시늉을 하며 동굴 안쪽으로 들어갔다. 거기는 물이 얕은 데다 긴 의자까지 놓여 있었다. 나는 팬티를 벗었다. 불끈, 몸의 한쪽이 일어섰다. 물속으로 기어가 의자 위에 드러누웠다. 갑자기 몸의 한쪽이 오그라들었다. 보라와 뒹구는 상상을 하려는데 다른 이미지가 끼어들었다. 어린 내가 노트를 가지고 엄마에게 기어가고 있었다. 학교에서 받아쓰기를 한 노트에는 절반 정도에 동그라미가 쳐져 있고 나머지는 줄이 그어져 있었다. 엄마는 틀린 부분을 가리키며 다시 쓰라고 재촉했다.
    ‘묻다’, ‘물었다’, ‘묻었다’.
    엄마가 물었다와 묻었다의 차이를 설명했다. 개가 뼈다귀를 물었어. 손을 이불 속에 묻었지. 헷갈리니? 이게 둘 다 ‘묻다’에서 나온 말이야. 글자는 같지만 다른 뜻이 숨어 있는 거지. 그래서 묻다를 과거로 쓰면 물었다가 되기도 하고 묻었다가 되기도 해. 알겠니? 나는 뭔 말인지 알 수 없었다. 내가 졸린 눈을 비비며 엄마를 보았다.
    “엄마, 땅에 묻은 게 뭐였어?”
    쓸 수는 없지만 발음은 할 수 있었다. 엄마는 연필을 놓고 콧등을 찌푸렸다. 나를 무섭게 바라보더니 와락 껴안았다. 젖가슴에 코가 묻혀 숨을 쉴 수 없었지만 난 가만히 있었다. 그 상태로 엄마가 내 귀에 대고 속삭였다.
    “뭘 말이니?”
    “앞집 아줌마가 우리 집에 와서 엄마보고 물었잖아.”
    엄마가 내 눈을 똑바로 보았다.
    “언제?”
    “몰라 언젠지. 엄마가 화단에 있을 때 아줌마가 물었는데?”
    “아, 그거? 꽃씨를 묻었지.” 꽃, 씨. 꽃씨.
    나는 그 글자를 잘 못 쓴 적이 없었다. 물론 그 뒤로였다.
    나는 기억한다. 화단에 흐드러지게 피어 있던 꽃들을. 화단가로 보라색 잔디꽃이 자잘했고, 가운데가 넓고 양쪽이 좁은 붕어 모양의 화단에는 노랗고 푸른 꽃들이 가득 피어 있었다. 정말 붕어 같아. 난 그토록 아름다운 붕어를 본 적이 없다고 회상한다. 화단가로도 등지느러미처럼 둘러놓은 돌들이 보이지 않을 만큼 꽃이 넘쳤다. 나는 안으로 파인 공간을 빠져나왔다. 샤워 버튼을 눌렀다. 순식간에 폭포수가 거둬지고 다시 동굴이 적막에 휩싸였다. 몇 차례 헤엄을 치자 동굴이 구비 돌면서 불빛도 사라졌다. 비상등이 없는 곳에는 천장 위로 유리창을 달아 놓아 자연 채광이 되었다. 지금은 밤이었다. 앞뒤를 분간할 수 없는 지독한 칠흑이었다. 나는 내 몸에서 밀려 나가 벽으로부터 되돌아오는 물결을 느끼면서 벽에 닿지 않고 물 가운데로 천천히 헤엄을 쳤다. 철퍽, 철퍽, 칠흑 속에서 물소리만 울렸다. 나조차 사라진 것 같았다……. 캄캄한 시야로 밝은 색조가 쏟아진다. 연분홍색 패랭이와 팬지의 노랑 꽃잎이 드넓게 펼쳐졌다. 봉오리가 맺힌 장미도 있었다. 담장 아래에 핀 붉은 꽃은 목단이 아니었을까. 색종이를 만 듯한 튤립도 있었다. 햇살에도 색조가 풀려 있었다. 담홍빛 햇살과 진노랑 햇살이 꽃밭을 어지럽혔다. 화단 위에서, 일정한 높이로 허공에 떠 서로 부딪히고 엇갈리는 것이다. 햇살은 나비 떼와 같았다.
    뭘 묻었어요? 꽃씨를 묻었지요. 대문을 들어선 앞집 아줌마에게 엄마가 그렇게 대답했는지 모른다. 아주 오래전이니까. 엄마의 대답은 내 머릿속에서 가볍게 수정이 되었다. 그렇지만 모든 게 바뀐 건 아니었다. 책가방을 메고 집으로 돌아온 내가 곧장 현관으로 들어가지 않고 화단 앞에 서서 꽃밭을 뚫어지게 바라보곤 했다. 어딘가 알 수 없는 느낌에 젖어 있었다. 그것은 엄마의 대답과 다른 쪽이었다. 꽃밭은 여전히 눈부시게 아름다웠지만, 난 한 번도 친구들에게 우리 집에 멋진 꽃밭이 있다는 것을 알려주지 않았다. 소년도 늙은이처럼 감정의 빈틈을 포착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엄마는 그해 내내 꽃씨나 모종을 더 얻어와 화단을 풍성히 가꾸었다. 키 큰 재래종 코스모스와 해바라기도 자랐다. 비바람에 긴 줄기들이 꺾일 것 같으면 엄마는 화단으로 가서 우산대 같은 아주 가느다란 철사를 세워 코스모스 줄기와 동여매고 있는 것을, 소년이 창밖으로 내다보았다.
    꽃은 해마다 수가 줄었다. 엄마는 더 이상 화단을 가꾸지 않았다. 자연 상태에서 씨가 떨어진 것이 이듬해 꽃을 피웠다. 석류가 익어서 화단에 뚝뚝 떨어졌다.
    동굴 밖은 파도풀과 이어졌다. 파도풀은 아늑한 해변처럼 탁 트여 있었다. 동굴 안에서 음침하게 놀았거나 겁에 질렸던 이용객들에게 일종의 안도감을 주기 위해서였다. 바닥을 에메랄드 색으로 칠해 놓아 물이 아주 맑게 보였다. 물론 지금은 밤이어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모터를 꺼놓아 파도도 치지 않았다. 낙엽이 수면에 떠 있는 게 어렴풋이 보였다. 나는 가장자리로 나와 타일 위로 올라섰다. 그제야 내가 알몸인 걸 깨달았다. 팬티를 동굴 속에 두고 왔다. 물을 뺄 때, 팬티가 동굴 어느 구석에 걸려서 다음 이용객들이 보게 된다면 좀 낭패겠지만 그냥 내버려두었다. 나는 조정실로 가서 네 개의 배수구 핸들을 돌렸다.
    피곤했다. 숙소로 가서 자야겠다 싶었다. 숙소는 대로변과 붙은 사무실 3층에 있었다. 오피스텔처럼 꾸며 놓아 요리도 할 수 있었다. 그 건물 1층에 커피숍이 있었다. 배가 출출했다. 커피숍에 가서 샌드위치라도 몇 조각 얻어먹고 자야지 생각하고 뒷문으로 들어서다가, 유리문에 비친 내 모습을 보았다.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맨몸이었다. 아무렴 어때. 문을 열고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난 현실감을 잃고 있었다. 화장실이 보였고 그 옆으로 커피숍의 불빛이 흘러나왔다. 사람들이 와글와글 떠드는 소리가 들렸다. 바리스타인 최 양이, 뒷문으로 알몸을 하고 들어오는 나를 보고 깜짝 놀란다. 커피 라떼를 만들려고 들고 있던 우유 곽을 떨어뜨린다. 자전거 라이더 복장을 한 손님들이 돌아보며 입을 딱 벌린다. 몇 명은 웃음을 터트렸고 여자들은 비명을 질렀다. 아니다. 난 문을 열다 유리에 비친 내 모습을 보았고 그래서 주춤거렸고, 뒤로 나 있는 계단을 밟고 3층 숙소로 올라갔다.
    난 그때 3층 숙소로 올라갔다고 생각했다. 문에 있는 잠금 장치를 풀고 들어가 곧장 침대에 몸을 던졌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내가 올라간 것은 숙소로 가는 계단이 아니라 다이빙대 사다리였다. 있을 수 없는 일이잖아? 사무실 계단으로 올라갔는데 보니까 내가 다이빙대에 서 있더라고. 며칠 뒤, K에게 그 얘기를 했다. K는, 에이, 형이 옷을 가지러 풀로 나왔다가 그 옆에 있는 다이빙대에 올라간 거예요, 하고 제 이마를 치며 웃었다. 다이빙대는 높지 않았지만 쌀쌀한 바람이 불었다. 거기서 발끝을 모으고 풀쩍 뛰어내렸다. 풀은 5.5미터 깊이였다. 그동안 물이 제법 빠진 탓인지 발이 바닥에 닿았다가 수면으로 부상했다. 하늘에 별도 보이지 않았다. 사무실 건물 옆으로 커피숍의 불빛이 번지고 있는 것을 빼면 어디든 캄캄했다. 나는 어깨 뒤로 귀찮은 듯 손을 움직이며 몸을 수면에 띄웠다. 배영 자세를 유지한 채 눈을 감았다. 난 잠을 자면서도 배영을 할 수 있을 정도로 수영에 능숙했다. 잠을 자면서 걸을 수 있는 것과 비슷했다.
    풀의 물이 조금씩 빠지고 있는 것이, 누군가 누워 있는 내 등을 간질이는 것처럼 등으로 미미하게 느껴졌다. 좀 기이한 기분이었다. 나는 어릴 때 일을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도 자꾸 그때가 떠올랐다. 아버지는 한 번씩 집에 왔다가 슬그머니 사라지는 사람인 것 같았다. 그러다 지워졌다. 난 아빠를 불러 본 적이 없었다. 이상한 말이지만 너무 어릴 때여서 아빠가 없다는 것을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내 몸은 물의 흐름에 따라 조금씩 돌고 있었다. 높이 솟은 뱀슬라이드 쪽으로 머리를 두고 있었는데 어느새 다리가 그리로 가 있었다. 마치 시계의 분침처럼 몸이 제자리에서 회전했다. 엄마, 나이키 신발 사줘. 수학여행을 앞두고서였던가. 엄마는 값싼 범표 신발을 사왔다. 엄마가 가난해서겠지만 난 화가 났다. 가난한 것을 알았기 때문에 화가 치밀었다. 화단으로 가서 삽을 흙에 꽂았다. 흙을 떠내고 범표 운동화 한 짝을 묻었다. 엄마, 신발을 잃어버렸어. 어디에 감춰 놓아도 엄마가 찾아낼 것 같아서 흙 속에 묻은 것이다. 엄마는 내 등짝을 세게 때리고 나이키를 사다 주었다.
    물이 빠져 내려가는 느낌이 등 뒤로 닿았다. 나는 좀 더 자주 팔을 움직였다.
    열세 살 때였다. 엄마가 무슨 병을 앓았다. 머리를 빡빡 깎아 아기처럼 된 엄마가 병실에 누워 있었다. 엄마, 힘내. 꽃다발을 엄마에게 내밀었다. 화단에는 꽃이 별로 남지 않았다. 왜 화단에 핀 하얀 구절초를 꺾어왔을까? 아마 돈이 없었거나 화원을 찾지 못해서일 거다. 하지만 그것이 잔혹한 선물이라는 생각을 조금도 하지 않았다. 간호사들이 우르르 달려와 수술실로 옮기려고 고정된 침대 고리를 풀었다. 엄마는 간호사들을 보지도 않고 손으로 꽃을 쓸며 웃었다. 네가 다 컸네. 붕어 한 마리를 들고 오지 그랬어? 하고 농담을 했다. 난 얼굴을 젖히고 웃었고 간호사들에게 붕어가 뭘 뜻하는지 설명해 주려고 했다. 너, 뭘 묻었냐고 물었지? 엄마가 덧붙였다. 붕어 몸에 네 동생을 묻었어. 네 동생이 네 신발을 신고 있더라. 네가 잃었다는 범표 신발 말이야. 콸콸콸콸. 귀 뒤로 물이 빠지는 소리가 거세게 들렸다. 내 몸이 빠르게 돌았다. 아래에서 엄청나게 큰 흡반이 나를 끌어당겼다. 마치 지구 속으로 빨려드는 것 같았다. 배수구에 내 머리가 턱, 걸렸다.

 

    워터파크는 폐장했다.
    사장은 파크 안에 사우나와 찜질방을 짓겠다고 했다. 비수기 동안에도 영업을 해야 성수기에 사람들이 더 몰린다는 것이다. 커피숍 하나로는 광고 효과가 모자랐다. 사장은 어떻게든 워터파크를 성인 전용으로 만들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곳곳에 세워지는 대형 워터파크의 틈을 파고들려면 좀 더 전략적인 운영이 필요했다. 사우나를 지으면 그 옥상에 누드 일광욕장을 설치하는 게 어떠냐고 내 의견을 물었다.
    비수기에도 나와 K는 실직할 염려가 없어졌다. 폐장을 한 뒤, 난 사장의 운전기사가 되어 사우나 시설 허가를 내고 설계사무실로 뛰어다니는 둥 바쁜 나날을 보냈다.
    내가 무흥으로 간 것은 시월 중순이었다. 무흥은 청송과 영천 사이에 있는 소도시였다. 차로 고작 한 시간밖에 걸리지 않았다. 이토록 가까이에 무흥이 있다는 것이 당황스러웠다.
    십여 년 전, 무흥에 갔을 때 그 집을 찾지 못했다는 것을 잘 기억하고 있었다. 동네가 변하기도 했지만 내 기억이 애매했다. 열세 살까지 살았던 그 집의 내부는 방과 창문의 모양, 계단의 수까지 세세히 떠올랐지만 주변 건물들이 희미한 것은 어떻게 이해할까. 보다 강한 기억의 중심이 주변의 사소한 것을 기억 바깥으로 추방한 건지 알 수 없다.
    시장 옆 공용주차장에 차를 세웠다. 재래시장인데도 요즘 보기 드물게 활기가 있는 편이었다. 재래시장에서만 볼 수 있는 이빨이 드문드문 빠진 듯한 가게의 빈자리가 눈에 띄지 않았다. 오후 3시쯤이라 사람들로 붐비지 않았다. 나는 실패한 기억에 다시 의존하지 않고 정확한 번지를 알아서 집을 찾겠다고 작정했다. 주민센터는 시장 인근에 있었다. 정말 화단에 그것을 묻었을까. 엄마의 말이 사실인지 두렵지만 알고 싶었다. 주민센터는 아주 새 건물이었다. 주민등록 등본에 내가 열세 살까지 살았던 무흥의 집 주소가 나왔다. 무흥시 지범로 4길 27. 흔히 예상할 수 있는 것인데도 이 땅에 없는 숫자처럼 보여서 한참 아뜩했다.
    시장 입구부터 작은 가게들이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시장이 확장된 거라고 수월하게 이해했다. 도로를 거슬러 올라갔다. 그 길을 따라가면 가게들이 줄어들고 주택들이 등장할 즈음에 《 봉명이발소 》가 있을 것이다.
    “여기 이발소가 없었니?”
    이발소가 보이지 않았다. 문구점 앞에서 인형 뽑기 기계에 들러붙어 있는 아이들에게 물었다.
    “이발소가 뭐예요?”
    한 애가 되물었다. 내가 대답을 하기 전에 다른 애가 외쳤다.
    “할아버지들이 머리를 깎는 곳이야.”
    또 다른 애가 내 앞으로 와서 팔을 벌리며 말했다.
    “아저씨는 친척인가요? 이발소는 저기에 있었어요.(아이는 이십 미터쯤 떨어진 건축설비집을 가리켰다) 할아버지가 혼자서 돌아가시고 난 뒤에 이발소도 없어졌어요.”
    나는 아이들에게 뽑기 기계에 투입할 동전을 나눠주고 완만하게 경사진 길을 올라갔다. 이발소는 나와 아무런 상관이 없는데도 마치 이발소가 사라진 것이 내게 중요한 사건처럼 느껴졌다. 나는 옛 이발소 앞에서 멈춰 서서 설비집을 기웃거렸다. ‘건축’ ‘설비’라는 글자가 적혀 있었고 건재상도 겸하고 있었다. 안에 주인이 보였지만 전혀 모르는 얼굴이었다. 이발사 노인을 안다고 설비집 주인까지 알 거라고 여겼던가. 주인이 나를 보고 물건을 사가라는 듯 문을 열고는 한쪽으로 비켜섰다. 나는 대뜸 가게로 들어갔다. 물건을 둘러보다가 텐트를 칠 때 사용하는 야전삽을 하나 샀다. 정말 야전삽이 필요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야전삽이 든 비닐봉지를 들고 비스듬히 난 골목으로 들어섰다. 이곳에도 지붕에 태양열 집열판이 설치된 2층집이 여럿 있었다. 지붕을 인테리어한 것처럼 무척 깔끔했다. 근래 지은 아담한 2층집들이 이어 나타났다. 나는 비닐봉지를 벌려 야전삽을 만져 보았다. 차갑고 딱딱한 느낌이 내 목덜미에서 일어나는 것 같았다. 나는 꽤 긴장하고 있었다.
    형, 대답할 수 없는 것을 물었던 적이 있어요?
    K가 말했다.
아니다. K가 그렇게 말하지는 않았다. K는 자기 여동생 얘기를 꺼내고는(소설을 빙자해서), 다른 사람에게 할 수 없는 말을 해본 적이 있느냐고 물었다. 그것은 대답할 수 없는 것을 물은 것과 같은 의미가 아닌가. 동일한 대상을 두고 하는 말이다. 다만 발설자와 청자(聽者)의 위치가 다를 뿐이다. 두 개의 물음이 마주 보고 있는 셈이다. 한쪽에서는 대답할 수 없는 것을 묻고, 다른 쪽에서는 말로 할 수 없던 어떤 사실을 실토해야 하는 것이다. 나는, 두 뼘 크기의 번들거리는 야전삽을 꺼내 보다가 소스라쳤다. 나는 단 한 번도 꽃이 질문이라고 생각해 본 적 없었다. 침상에 누운 엄마에게 가져간 꽃이. 마당에 핀 구절초가 질문이 되리라곤. 하지만 그것을 질문이라고 여겼기 때문에 엄마가 그 일을 고백하지 않았을까. 아니면 나조차 깨닫지 못했지만 내가 그 꽃을 그녀의 눈앞에서 흔들며 엄마가 대답할 수 없는 사실을 잔혹하게 물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정말 화단에 묻었던 게 꽃씨가 맞느냐고!
    그 집은 이발소에서 비스듬히 난 골목을 가다가 한 차례 모퉁이를 돈 뒤에 나타났다. 저번에 왔을 때는 첫 번째 골목에서 돌아 나왔다는 것을 알았다. 놀랍게도 대나무가 있는 점집도 그대로 있었다. 그때는 시퍼런 왕대였지만 지금은 잎사귀가 다 떨어진 죽은 대나무였다. 내가 살았던 집은, 언뜻 보면 새로 지은 것 같지만 리모델링을 했다는 표시가 담장과 지붕 밑 곳곳에 남아 있었다. 나는 대문 옆에 붙은 주소판의 숫자와 손에 든 등본의 과거 주소가 일치하는 것을 확인했다. 주인을 적당히 구슬릴 말을 입속으로 되뇌었고, 잠시 후 화단에서 야전삽으로 흙을 파고 있는 내 모습을 상상했다.
한 번 크게 숨을 쉬고, 벨을 눌렀다.

 

 

 

 

   《문장웹진 9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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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겐 낮술이 필요한 것 같은데 전하영 R과 나는 바닷가의 한 도시로 가는 기차를 타고 있었다. 우리는 그 도시에 있는 어느 서점의 초청으로 북토크에 참석할 예정이었다. 처음에는 서점이라고 해서 작은 가게인 줄 알았는데 꽤 규모가 있었고 로컬에서는 인지도도 높은 곳이었다. 사례비가 두둑해서 나는 바쁜 R을 설득해 초청 인사로 함께 행사에 참석하기로 했다. 이럴 때는 그가 야근을 밥 먹듯 하고 시도 때도 없이 불려 다니는 일을 한다는 게 도움이 됐다. 주말에 집에 들어가지 못할 이유를 손쉽게 만들어낼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북토크는 공식적으로도 그의 일의 연장이었다. 북토크에서 이야기할 책은 내가 이십 년 전에 쓴 소설로 처음에 출간됐을 때만 해도 거의 팔리지 않았는데, 영화화되면서 다시 읽히기 시작했다. R은 그 영화의 제작자였다. 그가 우연히 들른 카페에서 책을 발견했고 영화화를 제의해 왔다. 안 될 게 뭐람? 그 책은 세상에서 잊힌 것이나 다름없었으므로 나는 반갑게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 솔직히 말하자면 적지 않은 이차 저작권료에 더 관심이 많이 갔는데 알고 보니 그쪽에서는 내가 당연히 그보다 큰 금액을 부르리라 예상하고 미리 낮춰서 제시한 금액이라고 했다. 그런 사정을 파악하게 된 것은 R과의 관계가 좀 더 사적인 성격으로 진전된 이후의 일이었다. 그 후로 많은 것들이 변했다. 책이 영화화되자 죽은 사람이 돌아온 것처럼 책에 쓰인 시절도 내게 함께 돌아왔다. 이십 년 정도가 지나면 당시의 나를 더 이상 나라고 부를 수 없을 정도로 상황과 감정이 바뀐다. 인간의 몸은 7년마다 세포 전체를 모조리 갈아치운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책이 처음 출간된 이후 대략 세 번쯤은 완전히 다른 나로 거듭나 있는 셈이나 마찬가지였다. 가장 잘 아는 타인을 덕질하듯이 나는 과거의 나에게 향수를 느끼며 그때 그 시절의 장소를 방문하며 추억에 잠기곤 했고, 그때마다 함께하는 상대에게는 숨은 의도를 밝히지 않고 다른 볼일이 있는 것처럼 둘러댔다. 그것은 최근 들어 생긴 나만의 비밀이자 즐거움이었다. 북토크를 위해 우리가 방문하는 도시는 한때 유명한 관광지였지만 오랫동안 쇠락의 길을 걷다가 최근 들어 다시 각광 받기 시작한 지역이었다. 모든 것이 너무 비싸고 조밀한 서울에 진력이 난 젊은 사람들이 조금씩 모여들었고 사람들이 모이니 인터넷 매체들이 관심을 보였다. 이제 조만간 영화나 드라마의 촬영지로 물망에 오를 테고 그렇다면 이 도시도 많은 다른 곳들과 마찬가지로 프랜차이즈 카페와 플라스틱 상징물로 가득 찬 어느 평범한 한국의 소도시 중 하나로 거듭날 것이었다. 다름 아닌 영화제작자를 데려가는 셈이니 어쩌면 내가 그 도시를 망가뜨리는 하나의 중요한 계기를 마련하고 있는 건지도 몰랐다. 망상에 불과하겠지만 그런 생각이 들었다. 온 세상이 나를 쳐다보고 있다는 느낌. 내가 하는 작은 행동이 불러일으키는 더 큰 효과에 대한 전망. 책이 영화화된 뒤로 줄곧 내가 느끼는 감정이었다. 기차가 출발하기를 기다리는 동안 R에게 그 도시에 가본 적이

  • 관리자
  • 2024-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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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1건

  • 익명

    어린 시절의 두려운 기억을 섬세한 필치로 불러내는 상황설정, 놀랍네요. 누구에게 말할 수 없는 진실은 ' 소설을 빙자해서 '나타날 수 있고, 꽃밭에 영영 갇혀 엄마의 병문안에 가져간 구절초로도 피어날 수 있군요. 무서운 내막이 깔려 있지만 담담하게 드러낸 소설, 잘 읽었습니다.

    • 2014-09-24 12:07:02
    익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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