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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편연재]당신의 사라진 미소는 어디에?!①

  • 작성일 2015-08-01
  • 조회수 1,629


[중편연재]



당신의 사라진 미소는 어디에?! (제1회) 1)



김태용




삽화-당신의사라진미소는어디에


오늘은 웃길 수 있을까.
웃길 필요가 없는데도 나는 틈만 나면 누군가를 웃기기 위해 살아가는 것만 같다. 오늘도 사람을, 사람이 아니라도 상관없다, 사람이 아닌 게 맞다, 사람이 어디 있는가, 사람다운 사람이 하나도 없다, 사람다우려 애쓰는 사람일수록 사람다움에서 멀어진 지 오래다, 사람다운 사람이라니 사람이란 정말 웃긴다. 웃기기 위해 집을 나섰다. 집을 나서면서 집을 나섰다고 분명하게 말했다. 나의 두 귀가 똑똑히 들었다. 두 귀가 멀쩡하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오른손으로 왼쪽 귓불을 한 번, 왼손으로 오른쪽 귓불을 한 번 만졌다. 한 번씩 더 만진다. 계속 만진다. 누가 보는 사람도 없지만, 보는 사람이 없으니, 잘할 수 있을 때까지 만진다. ‘왜 이러고 있지’에서 ‘이러고 있는 것 말고 달리 무엇을 할 수 있지’라고 생각을 진전시킨다. 만지면서. 몸과 함께. 두 손과 두 귓불과 함께. 만질 때마다 머리가 오른쪽으로, 머리가 왼쪽으로 조금씩 돌아간다. 당신도 지금 오른손으로 왼쪽 귓불을 아니면 왼손으로 오른쪽 귓불을 만지고 있을 것이다. 그 순간 눈 덮인 바야바르 숲 속에 수백 개의 작은 은종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다고 상상해 보라. 이보다 더 멋진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집을 나섰다, 라는 말을 하고 나면 웃어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생각처럼 웃음이 나오지 않았다. 그러면 미소라도?! 허공에 떠도는 물음표를 잡아 머리가 빠진 정수리에 갖다 붙여 놓고 미소를 지은 채 잠시 문 앞에 서 있었다. 나의 문. 나의 집. 집에 대해서는 언젠가 말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이 집으로 누군가를 초대해서 집 안의 집기들과 붙박이들, 도구들과 연장들, 있어야 될 것과 없어도 될 것들, 기억이 집중된 물건과 기억을 잡아먹어 버린 물건들을 그들의 시선 속에 담아 보여줄 수 있을 것이다.
“이건 뭔가?”
“손 치워!”
“이건 뭐야?”
“만지지 마!”
“이건 뭐예요?”
“제자리에 둬!”
결국 나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이 집에서 나가!”
왜 그런가? 왜 그러지 않으면 안 되는가! 아직 그런 적이 없다. 아직 그런 적이 없으니까 그럴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가능성?! 나의 눈에 비친 세계는 가능성으로 덮여 있다. 약간의 온기가 감도는 가능성은 계절이 바뀔 때마다 살갗을 비비는 열기 혹은 얼음처럼 차가운 접촉을 필요로 한다. ‘아직 덥다’에서 ‘이제 그럭저럭 시원하다’의 계절로 가능성이 이동 중이다. 나는 오줌을 참는 인디언 소년처럼 가능성을 따라간다. 어떤 돌부리도 나의 다리를 걸지 못할 것이다. 어떤 가시밭도 나의 발등을 찌르지 못할 것이다. 물러서라. 내가 간다. 말도 없이 총도 없이. 내가 간다.
돌아서서. 이 집. 이 문. 이렇게 서서. 미소를 지우고. 지웠지만 여전히 입가에 남아도는 미소의 잔주름을 구기며 문 앞을 떠난다. 등 뒤로 녹슨 철문이 소리를 내며 닫힌다. 돌쩌귀에 토마토머리시옷새의 날개가 끼인 듯한 비명이 들린다. 시오옷시오옷. 나의 귀를 쫀다. 오랫동안 그래 온 것처럼 쫀다. 넌 좀 쪼아야 돼, 라고 말하는 것처럼 쫀다. 시오옷시오옷. 터진 토마토가 흘러내린다. 구리스를 칠해야 할까. 언제 구리스를 칠했는지 모르겠다. 돌쩌귀를 애처롭게 쳐다본 뒤 문의 관절을 꺾으며 구리스를 칠한 적이 있던가. 1월 9일 머리에 눈모자를 쓰고 나라는 짐을 끌고 이사를 오기 전까지 이 집에서 살던 부부는 언제 돌쩌귀에 구리스를 칠했을까. 한 번도 칠한 적이 없을 것이다. 돌쩌귀라든가 구리스라든가 하는 말을 몰라 감히 엄두도 내지 못했을 것이다. 오늘 구리스를 사러 가야 할까. 구리스를 사는 것으로 오늘을 시작하거나 끝낼 수 있을까. 오늘이라는 얼굴을 구리스로 떡칠할 수 있을까. 내가 조금만 앞을 내다볼 수 있는 지성과 감각을 소유한, 지난 삶을 돌아보지 않는, 고귀한 인간이라면 오늘은 어쩌면 이렇게 시작되어야 했다.
나는 구리스를 사기 위해 집을 나섰다.
오늘은 구리스를 살 수 있을지도 모른다. 알 수 없다. 녹슨 철문의 돌쩌귀가 구리스를 얼마나 원하고 있는지 나로서는, 당신 역시 알 길이 없다. 다시. 녹슨 철문의 돌쩌귀가 구리스를 찾아 모험을 떠다는 하루가 될 수도 있다. 구리스, 하고 웃어 봐라! 당신 삶이 구겨지는 소리가 들린다.
몸의 8할이 구리스로 이뤄진 친구 한스를 만나기 좋은 날이기도 하다. 아주 오래전 그러니까 내가 비교적 제정신이었을 때, 언젠가 이런 날에 한스와 나는 강가로 가 옷을 벗고 팬티 차림으로 물속으로 뛰어들어 서로의 불알을 움켜쥔 채 어떤 말에도 미친 듯이 웃으며 우리 머리 위로 날아가는 전투기를 바라본 적이 있다. 타원형의 넙치 같은 모양을 한 전투기는 마치 공중에서 리듬체조를 하듯 천천히 날아가는 듯 보였지만, 그 속도와 굉음은 엄청났다. 엄청나다는 말이 좀 의심스럽지만 정말 그랬다. 마을 외곽에 공군비행장이 있어 전투기가 날아가는 모습을 지겹도록 보고 살았다. 보다 정확히 말하면 본다기보다는 전투기가 내뿜는 소리를 들은 것이다. 사람들은 넙치방귀라고 욕을 하곤 했지만 방귀소리는 갈수록 더 요란해졌다. 정말 지독한 냄새라도 날 것 같았는데, 우리의 귓구멍에 달라붙어 있는 요상한 모양의 누런 귀지들이 그것을 증명하고 있었다.
마을에서 가는귀가 먹은 노인들을 심심치 않게 만날 수 있었다. 대체로 그들은 느닷없이 하늘을 향해 고함을 치는 것 말고는 과묵한 편이었는데 약속이라도 한 듯 자신의 귀를 잡고 흔들며 걷곤 했다. 이제 그들은 어떤 역사책이나 지역편람에도 나오지 않은 저세상 사람들이 되었다. 한 줄로도 요약될 수 없는 인생을 살다 간 것이다. 전투기도 비행장도 사라진 지 오래다. 지금 그 자리에는 거대한 영화세트장이 있다. 한스와 언젠가 그곳에 가서 뭐라도 먹을 생각이다.
“지금 저게 우리 머리 위로 떨어지면 어떡하지?”
머리만 강물 밖으로 내민 채 나는 한스의 눈썹을 바라보며 말했다.
“납작해지겠지. 납작해질 거야. 돼지머리처럼 눌려터진 다음 케첩 같은 것이 우리의 똥구멍에서 끝없이 뿜어져 나올 거야. 결국 납작해질 거야.”
한스는 짙고 두터운 팔자 눈썹을 더 팔자로 만들었다.
“납작해지는 거구나.”
“두려워?”
“두렵다니?”
“넌 좀 납작하다. 푸하 푸하 푸하하.”
침을 튀겨 가며 웃던 한스는 나의 불알을 좀 더 세게 움켜잡았는데 그 순간 나는 정신을 잃고 물속으로 가라앉고 말았다. 왼쪽 눈썹 가장자리에 쥐눈만 한 점이 있어 왠지 말만 많고 실제로는 겁이 많아 보이는 한스는 나를 물속에 혼자 두고 옷가지를 챙겨 도망쳤다. 물속에 가라앉으면서 나는 앞으로 내 삶이 어떻게 될 것이라는 것을 알기 위해 끊임없이 머릿속으로 주사위를 던졌는데 매번 같은 숫자가 나왔다.
강물을 토해 내며 눈을 뜨자 바로 앞에 얼굴의 반이 수염으로 덮인 한 남자가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그 얼굴을 보고 다시 기절했다가 눈을 떴다. 남자는 군복을 개량한 작업복 같은 것을 입고 있었다. 그렇게 주머니가 많이 달린 옷은 처음 봤다. 짐작하기로 위에 다섯 개, 아래에 여섯 개였는데, 내가 모르는 곳에, 가령 안주머니 같은 것이 있는지도 몰랐다. 주머니마다 뭔가가 들어 있을 것 같기도 하고 아무것도 들어 있지 않을 것 같기도 했다. 오른쪽인지 왼쪽인지 윗주머니의 노란 안감이 혀를 내밀 듯 삐져나와 있었다.
나는 그를 ‘포켓맨’이라고 부르고 싶었는데 실제로 그렇게 부를 수는 없었다. 시간이 흘러 포켓맨으로 그를 다시 불러내서 그때 부르지 못한 아쉬움을 달래곤 할 뿐이다. 포켓맨을 떠올릴 때마다 그의 주머니 개수가 줄었다가 늘어났다 하면서 나의 기억력과 산수 능력을 테스트하곤 한다.
나의 팬티는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아마 물속에 녹아 사라져버렸는지 모른다. 포켓맨이 커다란 회색 가방에서 꺼내 덮어 준 전신 타월에서는 장마철 젖은 수건 냄새가 났다. 타월에서 수건 냄새가 난 것이다. 모두가 알 만한 냄새다. 머리가 반쯤 돈 상태로 헤매던 어느 여름날 나는 그 냄새를 어떤 여자의 몸에서 맡았는데, 헤어지고 나니까 그 여자의 몸은 사라지고 그 냄새만 남았다. 나에겐 타월 같은 여자였다. 아닌 수건 같은 여자였다. 샤워를 하고 나선 전신을 감쌀 수 있는 큰 타월이 있는데도 작은 수건의 양끝을 잡아 앞만 가리고 나왔다. 수건으로는 어림도 없는 몸이었다. 무슨 이유에서 살을 갑작스럽게 뺐는지 모르지만 엉덩이와 넓적다리 사이에 살이 터진 자국이 남아 있었다. 움직일 때마다 작은 실뱀처럼 꿈틀대는 가느다랗고 주름진 선들이 무엇인지 알고 싶어 입안에 침이 고였지만 종합병원 수술실 간호사인 여자에게 물어보면 우리 사이가 치명적인 거리로 떨어질 것 같아 입을 다물고 수건으로 주요 부위를 간신히 가림으로써 치부를 더 드러내는 불균형한 여자의 몸을 바라보기만 했다. 여자는 발뒤꿈치를 들고 바닥에 물을 뚝뚝 떨어뜨리며 살찐 고양이 같은 소리를 냈다. 미요오. 미요오. 입가에 걸린 미요오를 바라보며 미친년이군, 미친년이야, 대학 시절에 만난 여자만큼 미친년이야, 라는 말 대신 나는 입 꼬리가 과장되게 올라갈 정도로 미소를 지었다. 미소?! 그게 나의 실수라면 실수였다.
그 여자는 나의 집에 얼마간 머문 적이 있는데 내 물건을 허락도 없이 함부로 만지더니 결국 집을 떠날 때 나의 물건 하나를 자기 물건인 양 챙겨 도망치듯 가버렸다. 그 물건은 나의 수박무늬 우산이었다. 왜 하필 우산이었을까 생각하는데 그 여자가 떠난 후 정확히 칠십이일 동안 비가 내리지 않았다. 나는 지금도 주머니에 들어갈 만한 작은 수첩을 가지고 다니며 시시때때로 오늘의 날씨를 기록하고 있는데 그 수첩이 공개될 날이 멀지 않았다. 수첩이 공개되면 몇몇 사람들은 하던 일을 멈추고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거나 책상 아래로 기어 들어가 몸을 웅크리게 될 것이다. 그 자세 그대로 죽음이 서서히 자신의 목을 조르게 될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 여자에게 포켓맨 이야기를 했던가. 했을 것이다. 지금과 다른 이야기로 말이다. 수박씨를 뱉듯 도둑맞은 우산을 펼치며 그 여자 이야기를 다시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때 그 여자는 이름을 되찾게 될 것이다.
지독한 냄새 때문에 당장 벗어던지고 싶었지만 한스가 자기 옷 대신에 내 옷을 가져가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오그라든 불알을 다리를 모아 가리고 덜덜 떨고 있는 몸을 진정시키기 위해 타월을 그대로 걸친 채 한스의 작고 더러운 반바지를 노려볼 수밖에 없었다. 가만두지 않겠다. 불알을 터뜨리고 말 것이다. 불알을 납작하게 만들어 틈날 때마다 꺼내 보면서 납작한 표정을 짓게 만들 것이다. 복수를 꿈꾸며 몸에 돋아난 물방울이 녹아 사라지기를 기다렸다.
포켓맨은 물어보지도 않고 어떤 상표도 없는 은색의 베이컨 통조림을 따서 나에게 주었는데 호기심과 불안감이 들었지만 그가 자신의 통조림 베이컨을 먹는 것을 보고 따라서 손가락에 말아 입 속으로 집어넣었다. 마침 허기가 밀려오고 있었지만 하나만 먹어도 짜고 느끼하고 배가 부른 느낌이었다.
“나머진 집에 가져가서 먹어도 돼요?”
지능이 낮아 학업을 거부당한 아이의 심정을 떠올리며 묻자 포켓맨은 잠시 뭔가 생각에 빠진 듯 통조림 속을 바라보더니 안 돼, 라고 말했다.
“다 먹기 전에는 넌 집에 갈 수 없어.”
무섭다기보다는 그 말이 너무나 진지하고 권위적이어서, 어떤 선고를 받고 죗값을 치르듯 통조림 속에서 베이컨을 꺼내 손가락에 돌돌 말아 혀 위에 올려 침으로 녹이며 씹어 삼키기 시작했다. 우리는 노을이 지는 강물을 앞에 두고 천천히 각자의 베이컨 통조림을 비우고 있었다. 그러면 안 되지만 앞에 설치된 카메라를 갑자기 응시하는 배우처럼 시선이 텅 비곤 했는데 텅 빈 시선 안으로 후에 내가 토마토머리시옷새라고 부르게 되는 볼품없고 이기적인 새 한 마리가 날아들었다. 그 새를 잡기 위해 눈을 깜빡일 때마다 모래가루가 눈 속으로 떨어지는 것만 같았다. 혀가 타들어갈 듯한 침묵이 이어지자 어느 순간 뭐라도 말하지 않으면 그가 나를 다시 강물 속에 던져버릴 것 같아 입을 열었다.
“난 주사위만 던지면 5가 나와요.”
“그럴 수도 있지. 하지만 그 입 다물어라.”
나는 다시 입을 다물었고 얼마의 시간이 흘렀는지 모르게 베이컨을 다 먹어치웠다. 손과 입이 고기 기름으로 번들거렸다. 포켓맨의 입술 아래 수염에도 허연 기름덩이가 달라붙어 있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그가 강물에 녹색이 번져 가는 것처럼 외롭다고 말했던 것 같다. 그의 말은 강물에 천천히 녹아 녹색 빛을 띠면서 서서히 사라졌다.
“강물에 녹색이 번져 가는 것처럼 외롭다.”
꼭 한 번 이 말을 해보고 싶었는데, 가급적이면 어떤 여자 앞에서 말이다, 아직 그럴 기회가 오지 않았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명백한 불가능의 순간을 확신하고 있지만 이 불가능에 도전해 보고 싶은 것이 나의 유일한 삶의 목표가 될 수도 있겠다. 삶의 목표?! 흥, 그런 건 개나 주라지, 라고 말하고 싶은 것을 꾹 참고 나아가 보는 거다. 누군가 내 앞에서 동작 없는 춤을 추면서 나의 입이 벌어지게 만들어야 한다. 벌어진 입안으로 오염된 공기가 들어차면 나는 인간이 낼 수 있는 가장 탁한 목소리로 그 말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말하게 해다오. 말하게 해다오. 말하게 해다오. 그것이 나약하고 추악하고 어리석은 인류가 한 인간에게 베풀 수 있는 유일한 사랑의 방법이다. 모르겠고. 나는 말해야 한다.
“강물에 녹색이 번져 가는 것처럼 외롭다.”
헤어질 때 포켓맨은 나의 불알을 한번 움켜쥐었다가 놓았는데, 그즈음 남자들 사이에서 서로의 불알을 움켜잡아 주는 것이 하나의 인사법이나 친근함의 표시였는지는 모르겠다. 그렇다면 여자들, 여자들은 어떻게 했을까? 여자들 역시 뭐든 잡았다 놓았을 것이다. 아무튼 나 역시 감사의 뜻으로 그의 불알을 움켜잡지는 못하고 그의 불알이 있을 만한 곳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는데 오줌을 지린 것 같은 누런 얼룩이 져 있었다. 입안에 소금기가 감도는 것 같아 포켓맨은 자신의 불알을 잘 다루지 못하는 신중하지 못한 사람이다, 라고 속단하곤 고개를 돌려버렸다.
“나를 보았다고 말하지 마라. 말하고 나면 평생 너는 그러니까 너는…….”
베이컨 기름덩이가 목에 걸린 듯 포켓맨은 차마 말을 끝맺지 못했다. 눈에 눈물이 고여 있는 것이 얼핏 보였다. 면도를 하면 평생 억울한 누명을 뒤집어쓴 자의 마지막 미소가 떠오를 만한 인상일 것이다.
“어서 가라, 어서 가. 이 더러운 망아지 녀석아!”
내가 자꾸만 뒤를 돌아보며 망설이자 포켓맨은 나의 엉덩이를 걷어차는 시늉을 하면서 소리를 질렀다. 더럽고 냄새나는 한스의 옷을 입고 집으로 돌아가 어머니에게 욕을 바가지로 먹고 아버지에게 빗자루인지 총채인지 잡히는 대로 매질을 당한 그날 밤 악몽 같은 것은 꾸지 않았지만 엉덩이 사이에 모래가 껴 있는 듯 따끔거려서 좀체 잠을 이루지 못했다. 엎드려서 팔을 뒤로 해 엉덩이를 만지면 손에 꺼끌꺼끌한 감촉이 느껴졌다. 집어넣지도 않았는데 항문 속에서 손가락이 빠져나오는 것만 같았다. 그날 이후 엉덩이 사이에 남몰래 눈물을 흘리게 만드는 비밀이 감춰지게 되었다.
며칠 후 포켓맨은 강가 뒤편 야산에서 시체로 발견되었다. 가슴과 머리에 총상을 입었는데 아버지 말로는 스파이라는 것이었다.
“스파이? 간첩을 말하는 거야?”
주름치마를 입고 아빠다리를 한 채 과도로 사과를 깎던 어머니가 물었다.
“간첩이 아니라 스파이.”
“또 당신 아버지가 스파이였다고 말하고 싶은 거지? 스파이가 아니라 간첩이라고. 그래서 우리가 이렇게 개고생을 하는 거고.”
“당신이 뭘 알아!”
“요즘 간첩이 어디 있어요? 이건 다 음모예요, 음모!”
어머니가 지지 않고 과도를 든 손으로 허공을 찔러댔다. 허공의 속살을 바라보며 나는 여전히 따끔거리는 엉덩이 때문에 항문에 힘을 줬다 뺐다 하고 있었다.
“음모라니 가당치도 않아.”
“음모예요, 음모!”
“당신은 화가 나면 꼭 존댓말을 쓰더라. 근데 사과가 왜 이렇게 써?”
아버지가 굵고 짧은 손가락으로 푸른 사과 한쪽을 집어 먹으며 말했다.
“풋사과라 그래.”
“풋사과라고 다 그럴까. 요즘엔 뭘 먹어도 다 써.”
“난 달아요.”
“난 쓰다고. 입이 써서 죽겠어. 뭘 먹로도 쓸개야.”
“그러니까 진작 병원에 가보라고 했잖아요.”
“어머니가 만들어주던 아부라기를 먹어도 쓸까?”
“엄마가 보고 싶으면 엄마가 보고 싶다고 말해요.”
“너는 왜 사과 씨까지 먹냐?”
그렇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나는 과육이 발라진 사과의 뼈를 씹어 먹고 있었다. 그제야 사과 씨가 쓰다는 것을 알았지만 뱉지 않고 씹어 삼켰다.
“뱉어. 뱉어, 인마.”
아버지의 명령을 거역하기 위해서라도 사과 씨를 먹어야 했다. 그날 이후 나에게는 사과의 꼭지만 떼고 씨까지 다 먹는 남다른 식성이 생겼는데, 사과 씨에 혀가 닿거나 이가 닿는 순간 어떤 기억 속으로 나의 모든 것이 말려 들어가는 경험을 자주 했다. 사과벌레가, 그런 건 아직 한 번도 본 적이 없지만, 앞으로도 볼 일이 없을 테지만, 사과 속을 파고들면서 당분을 찔끔찔끔 삼키듯이 나 역시 기억의 단물을 찾아 한없이 헤매는 것만 같았다. 사과 맛이 다 다르듯 기억의 단물도 매번 다르게 나의 혀를 자극했다. 지금까지 내가 씹어 삼킨 사과 씨는 몇 개일까. 그 씨들이 뱃속에서 기형적으로 발아를 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면 다시금 엉덩이가 움찔거리게 된다. 할 수만 있다면 나는 어머니와 아버지가 나를 만드느라 땀을 뻘뻘 흘리며 애쓰던, 황홀함으로 위장한 귀찮은 순간으로 돌아가 그 말 같지도 않은 광경을 무심히 바라보면서 사과 씨까지 씹어 삼키고 싶다.
“음모라니, 음모라니.”
“음모야, 음모!”
둘의 음모 싸움은 이불을 펴고 불을 끈 뒤에도 계속됐는데 화장실 바닥에 보이는 음모가 어머니 것인지 아버지 것인지 궁금해 하던 나에게는 그들이야말로 음모 뭉치에 불과하다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내가 만약 포켓맨을 봤다고 얘기했다면 그의 운명은 달라졌을까 하는 생각과 더불어 그가 끝맺지 못하는 말은 무엇이었을까 하는 궁금증에 한동안 사로잡혀 지내는 사이 나의 성기 주변에도 털이 나기 시작했다. 포켓맨의 가방에서는 옷가지들과 일제 라디오 그리고 작은 칼과 더불어 여자 어린이 팬티가 나왔다는 소문이 돌아 마을 사람들을 경악하게 만들었다. 실종된 아이들 명단이 다시 공개되고 딸아이를 둔 부모가 아이의 서랍을 뒤져 없어진 팬티가 없나 확인하는 등 헛소동이 벌어졌다는데, 누구도 그것을 실제로 본 사람은 없었다. 내 팬티가 여자 팬티처럼 보였나. 한스에게 물어봐야 했지만 그럴 기회는 오지 않았다.
내가 물에 빠졌던 날 나를 버리고 미친 듯 뛰어가던 한스는 군용 트럭과 부딪히고 말았다. 트럭 바퀴에 왼쪽 다리가 끼인 채로 몇 미터는 더 끌려갔다고 했다. 납작해지고 만 것이다. 결국 다리를 절단하게 되어 한동안 병원을 오가다가 껌값 같은 보상금을 받고 집 안에 머물게 되었다. 유년 시절에 작별을 고하듯 한스를 찾아갔을 때 녀석은 대낮에도 두꺼운 커튼을 친 방 침대에 누워 있었다. 침대는 분홍색이었는데, 분홍색이라니, 분홍색이라니, 한스에게 누나가 있다는 말을 들어 본 적이 없는 나로서는 한스가 자기 집에 초대하지 않은 이유가 분홍색 침대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어 평소에 나를 계집애 취급했던 녀석을 마음껏 비웃어 주고 싶었지만 지금은 그럴 상황이 아니라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침대 옆에는 휠체어가 윤기를 뽐내며 어서 앉으라는 듯 놓여 있었다. 자연스럽게 왼쪽 다리에 먼저 시선이 갔는데 누런 이불 홑청 같은 것에 돌돌 말려 있어 어떤 상태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 커튼으로 스며든 엷은 햇살이 한스의 얼굴에 음영을 만들었고 음영 때문인지 표정이 미세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미소를 짓기에는 우리 사이의 거리가 좀 애매했다. 나는 머뭇거리며 천천히 침대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손에 들려 있는 비닐가방이 떨리고 있었다. 침대 머리맡에는 작은 책이 보였는데, 책 같은 것은 평생 거들떠도 보지 않을 것 같은 녀석에게 적지 않은 변화가 일어난 것인가 하고 의아해했다.
“뭐 하냐?”
“꺼져.”
“차가 생겼네.”
“꺼져.”
“니 옷 가져왔어.”
“꺼져.”
“내 옷 돌려줘.”
“꺼져.”
한스와 나 사이의 빈 공간이 점점 납작해지는 것만 같아 한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는 듯 한스는 옆에 있던 책을 집어 던졌다. 나는 아픈 척 가슴을 움켜쥐며 상체를 구부렸다. 바닥에 펼쳐진 책에는 추상적인 도형이 그려진 삽화와 함께 작은 글씨들이 적혀 있었다. 그 짧은 순간에 나는 ‘고귀한 인간은 삶을 돌아보지 않는다.’라는 문장을 읽었다. 너는 이렇게 미쳐 가는구나, 라고 생각하며 책을 발끝으로 살짝 밀어낸 뒤 한스의 방을 나왔다. 방 안쪽에서 뭔가 또 다른 것을 집어 던지는 소리가 들렸다.
긴 머리를 느슨하게 하나로 묶은 채 상체를 굽혀 마당 한편에 심어 놓은 꽃에 물을 주던 한스의 어머니는, 내 어머니보다 열 살은 어려 보이고 십 킬로그램은 더 말라 보였는데 목이 늘어난 셔츠 사이로 하얀 젖가슴이 출렁거리는 것이 보였다, 내가 건네준 한스의 옷을 받아 들고 눈물을 글썽였다.
“이제 우리 하순이에겐 이 반바지는 필요 없구나.”
“제 옷은 없나요?”
“무슨 옷 말이니?”
“아니에요.”
“자주 찾아오렴.”
“토요일날 이사 가요.”
“편지라는 게 있잖니.”
“좀 전에 물을 주던 꽃의 이름이 뭐예요?”
“글라디올러스.”
한스의 어머니가 준 메모지에 주소와 함께 글라디올러스라고 썼다. 손이 떨려 평소보다 글씨가 엉망이었다.
“우리 하순이만큼 못 쓰는구나.”
한스의 어머니가 한숨을 쉬듯 말했다. 나는 성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한스와 내가 저학년 시절 친해진 것은 받아쓰기 시험에서 낙제를 받아 나머지 공부 반에서 손바닥을 맞아 가며 글씨 연습과 받아쓰기 재시험을 주기적으로 봤기 때문이다. 서로 약속이라도 한 듯 우리 둘만 끝까지 남아 붉은 줄이 간 손바닥을 비비며 노을이 지는 서쪽 하늘을 등지고 집으로 돌아가곤 했다. 서로의 체형과 성격이 판이하게 달랐어도 자연스럽게 친해질 수밖에 없었는데 누구 하나라도 언어 실력이 좋아지면 멀어지게 될 사이였는지도 몰랐지만 생각보다 우리 사이는 오래 지속되었다. ‘왜 우리가 남의 글을 받아쓰고 있어야 하지.’ 우리 중 누구도 머리가 좋지 않아 그런 말을 할 수는 없었지만 선생의 바지 속에 개구리를 넣어 불알을 야금야금 갉아먹게 만들자, 라고 의기투합을 한 뒤에는 불알이라는 말을 버릇처럼 내뱉으며 미친 듯이 웃곤 했다. 그리고 우리는 받아쓰기를 불알쓰기라고 부르다가 텔레비전 서부극 ‘말도 없이 총도 없이’의 두 악당인 ‘한스’와 ‘조니’로 이름을 바꿔 부르고 서로의 불알을 움켜잡기 시작했다.
메모지를 접어 뒷주머니에 넣은 뒤 글라디올러스 여인이 다시 건네준 한스의 반바지를 들고 나왔다. 등 뒤에서 철문이 닫히고 빗장을 거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렸는데 그 순간 한스가 자신의 어머니가 진짜 어머니가 아니라고 했던 말을 기억해 냈다. 자기 앞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옷을 갈아입고 가슴을 드러내놓고 다닐 정도로 진짜 어머니보다 자기를 더 좋아하는 것 같다고 덧붙이기도 했다. 글라디올러스. 글라디올러스. 글 라 디 올 러 스, 라고 중얼거리며 집으로 걸어가다가 주머니의 메모지를 꺼내 찢어버렸다. 종잇조각들이 바람에 좀 멀리 날아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그대로 바닥에 떨어지고 말았다. 찢어진 글라디올러스를 다시금 발로 짓밟았다. 이사를 가서도 한스의 반바지는 한동안 내 옷장 서랍에 있다가 어느 순간 사라져버렸다. 어머니가 옷정리를 하면서 버렸을 것이다. 한스의 반바지는 색이 바랜 푸른색이었고, 뒷주머니에 불필요한 지퍼가 달려 있던 것으로 기억한다.
대학교 2학년 때 나는 ‘한스의 방’이라는 제목으로 소설을 써 대학신문의 문학상을 받았다. ‘대학생답지 않은 비관적인 세계관이 작품 전반을 지배하고 있지만 허무맹랑한 상상력으로 작품을 끝까지 밀고 가 삶에 대한 인식에 도달하게 만드는 작품이다. 또한 경영학도라고는 믿기 힘든 참신하고 풋풋한 문학적 소양이 담겨 있어 수상을 결정했다.’라는 앞뒤 논리가 어긋한 국문과 교수의 심사평을 이해할 수 없었지만, 당선이 되자 잠시나마 교내에서 주목을 받게 되었다. 결정적으로 그 소설을 읽은 독문과 여대생이 나를 찾아와 사귀자고 말했고, 마침 비가 내리고 있어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역시 미소가 문제였나?! 그러자고 했지만, 심장이 몹시 떨렸다. 처음 있는 일이었다. 독문학보다는 불문학이 어울릴 것 같은 눈 화장과 차림새였고 목소리는 또 허스키해서 묘한 매력이 있었다. 이차정, 이라는 이름의 그 여대생은 나보다 두 살 많았는데 이상하게도 나를 종희 씨라고 부르곤 했다. 이상한 일은 그것뿐만이 아니어서 처음 알몸이 되어 서로의 오줌소리를 들은 날에는 내가 쓴 소설의 마지막 문장을 들려달라고 했다. 나는 뻐근한 다리를 배 쪽으로 끌어당기며 그녀의 귀에다 대고 말했다.
“고귀한 인간이 되기 위해서는 삶을 돌아보지 말아야 한다.”
그날 이후 우리는 섹스도 문학적 행위의 일종이라는 듯이 미친 듯이 서로의 몸을 탐색했는데 그녀의 가족이 집을 비운 날이면 나는 기네스와 블루몬드를 사들고 그녀의 집에 가곤했다. 그녀는 기네스만 고집했는데 그것이 아일랜드 맥주라서 그렇다고 했다. 물론 아일랜드가 제임스 조이스와 사뮈엘 베케트의 고향이고 둘이 그 맥주를 즐겨 마셨다는 나로서는 잘 이해가 되지 않는 이야기도 빼놓지 않았다.
“종희 씨, 그리고 이 구슬소리가 좋지 않아?”
알몸에 자주색 카디건을 걸친 차정 씨는 기네스 병을 흔들어 보이며 말했다. 핀란드 밴드 ‘레오폴도레오폴도비치’의 음악을 틀어 놓고 여동생의 침대에서 그런 것이다. 물어보지도 않았는데 여동생의 방을 구경시켜 준다고 한 뒤부터 우리는 틈만 나면 여동생의 침대에서 섹스를 했다. 여동생의 침대는 분홍색이었는데, 침대를 처음 본 순간 분홍색이라니, 분홍색이라니, 이건 한스의 침대가 분명해, 나 자신을 설득시키기 위해, 확신의 메아리가 울려 퍼질 때까지, 한스의 침대, 한스의 침대, 속으로 중얼거리며 침대 시트에 얼굴을 비벼댔다. 내 얼굴을 만져 주는 손을 갖고 있던 그녀는 동생의 침대에서 할 때면 더 흥분된다고 했는데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동생의 서랍을 열어 자를 꺼내 발기된 나의 성기 길이를 재보곤 평소보다 1.4센티가 더 커졌다는 믿을 수 없는 사실을 확인하곤 열에 들떠 수첩에 기록까지 했다. 섹스 후에는 동생의 침대와 방 안을 원래대로 정리하는 것도 마치 행위의 연속 같아서 그 와중에 다시금 흥분되어 침대 아래서 서로의 방귀소리에 멍멍멍 야옹야옹 대면서 뒹굴기도 했다.
수영복 차림으로 골반을 살짝 옆으로 빼며 손으로 옆구리를 잡은 채 해변에 서 있는 동생의 사진을 보여주면서 예쁘냐고 물어봤는데, 내가 잠시 머뭇거리자 예쁘구나, 라고 대신 대답을 해준 뒤, 싸고 싶을 때 내 동생 얼굴을 생각해도 좋아. 걘 열여섯 살 이후 버진이었던 적이 없어, 라는 이상한 말로 다시금 나를 자극시키더니 헤어질 때까지 여동생을 보여주지 않을 거라고 말했다. 그 말을 들은 뒤로는 이차정의 매력이 점점 사그라지기 시작했고 이차정과 헤어지면 이차정의 여동생을 만날 수 있다, 라고 중얼거리며 집까지 걸어가기도 했다.
“동생 이름이 뭐야?”
“종희 씨, 그런 건 알려고 하지 마세요.”
“……….”
“동생과 나는 브론테 자매와 생일이 똑같아. 난 4월 21일이고, 걘 7월 30일이지. 기막힌 일이지. 난 3월 31일날 죽을 거고, 동생은 12월 19일에 죽어야 해.”
뭐가 기막히다는 걸까. 별다른 생각 없이 살던 나와 달리 그녀는 작가가 되기 위해 필사적이었다. 좋다는 문장들을 필사한 노트를 보여주곤 했는데 꾸준히 문장 연습을 하고, 소설 속에 나오는 인물들을 분석해 근거 없는 심리학적 유형으로 정리해 놓고 있었다. 또한 주변 사람들의 옷차림새와 말투, 걸음걸이, 표정 등을 심심할 때마다 메모하는 습관이 있었는데 주요 대상은 당연히 내가 되곤 했다.
“자세히 보면 사람들은 다 이상해. 세상에 같은 사람은 하나도 없어. 사람 하나하나가 다 소설이야.”
그녀는 한때의 유명세가 사라지자 마치 대단한 결심을 하게 된 것처럼 절필을 선언한 작가가 되어 말하곤 했는데 나에게도 새 소설을 써서 보여 달라고 졸라댔다.
“소설이 뭐라고.”
“소설이 뭐긴 뭐야.”
“소설은 풋사과 같은 거야.”
“풋사과가 뭐라고.”
“차정 씨, 다음에 내가 사과 씨까지 먹는 걸 보여줄게.”
“종희 씨, 소설이나 쓰세요. 안 그러면 다른 사람한테 갈지도 몰라.”
“여자라도?”
“유부녀라도!”
소설에 미친 여자다. 미친 짓이다. 소설을 쓰기 위해서는 물불을 가리지 않을 것이다. 아니다. 작가가 되기 위해서는 물속에 뛰어들고 불속에서 물을 마시려 들지도 모른다. 문장으로 얼룩진 어떤 추잡한 인간이 독어와 불어와 라틴어를 섞어 가며 작가가 되려면 내 손을 잡고 먼 길을 떠나 더 많은 것을 보고 더 많은 사람을 만나고 더 많은 음식을 먹고 더 많은 잠을 자야 해, 라고 말하면 뒤도 안 돌아보고 따라가고 말 여자다.
너는 소설을 쓰고 싶은 거라고 말하지만 작가가 되고 싶은 것이지 소설을 쓰고 싶은 것이 아니야. 무엇이 다른 거냐고 너는 묻겠지. 무엇이 다르지 않으냐고 나는 말할 수 있을까. 그것에 대해 네가 따져 물어 오면 나는 설명할 수 없어 쓰디쓴 미소를 지을 텐데 너는 나의 말 못 함을 머리부족으로 간주해 종희 씨, 당신은 당신도 모르는 말을 함부로 하는 버릇 좀 고쳐, 라고 나의 머리를 무시하는 말을 내뱉고는 미소마저 사라진 나를 위로한답시고 나의 바지를 어루만지다가 바지 지퍼를 내리고 민트색 매니큐어가 벗겨진 손톱을 반짝이며 안으로 불쑥 손을 집어넣어 나의 불알을 만지작거리다가 그것을 통째로 꺼내 입안에 담아 굴려 보다가 혀에 달라붙은 털을 잡아 빼서는 잠시 눈 가까이 들이댄 다음 이건 정말 거추장스러워, 라고 알아들을 수 없는 발음으로 말한 뒤 나의 바지에 손가락을 비벼 떼어내고 다시금 나의 연약하고 흔들리는 부위를 자근자근 씹어 먹다가 턱을 움직이며 숨을 고른 뒤 손바닥에 침을 뱉어 두 시 방향으로 음경을 세워 잡고 흔들 텐데 나는 이쯤에서 너의 머리채를 잡아 줘야 되나 말아야 되나 생각하다가 기회를 놓치고 기회를 놓친 것에 대한 아쉬움과 미련함을 달래기 위해 너의 탈색된 머리를 쓰다듬어 주겠지.
너는 나의 허연 구리스를 입안에 담아 굴린 뒤 나를 쳐다보며 넌 내가 이걸 삼키기를 바라지, 라고 우물거린 뒤 보란 듯이 바닥에 뱉곤 파란색 구두로 흙을 헤집어 덮어버린 뒤 그 위에 다시 침을 뱉을 거야. 어쩌면 우리가 언젠가 경험했지만 그것을 잊고 다시금 새로운 것처럼 반복적으로 경험하게 될 이 장면을 떠올리면 어떤 굴욕감이 내 머리를 뚫고 나오는 것 같은데 밤이라고 믿어야 할까. 밤이라고 믿으면 모든 게 잠시 용서가 되니까. 무엇을 용서하고 누구를 용서할지 알 수 없지만 밤이라고 믿자. 밤이 될 거야. 낮의 얼굴을 빌려 쓴 밤이 될 거야. 그리고 다시. 언젠가 밤의 얼굴을 뒤집어쓴 낮에 우리는 우리가 밤이라 믿었던 그날을 기억하다가 기억나지 않는 서로의 얼굴을 떠올리면서 구역질을 하고 말 거야.
우리는 녹색 페인트가 벗겨진 벤치에 앉아 있어야 하고 공원에는 나라를 세웠다고 믿고 있지만 실제로는 조국을 등진 인물의 동상이 있을 텐데 그 동상 위에 앉아서 끊임없이 똥을 지리고 있을 것만 같은 비둘기를 바라보며 눈물을 흘릴 까닭이 없는데도 나는 눈물을 찔끔 흘리고 조국을 등질 수 있는 사람의 등이라는 것은 실로 작고 둥글면서도 결코 평범하지 않은 등이고 누군가 그 등에 총알을 박아 넣었어야 하는데 하고 생각하다가 너에게 반바지 시절 물에 빠졌던 이야기를 들려주기 시작하자 너는 나에게 몸을 기대고 너의 머리에서는 머리 냄새 말고는 어떤 향기도 풍기지 않겠지.
물속에서 나를 건져낸 사람은 주머니가 많이 달린 옷을 입은 어딘가 모자란 어느 동네에나 한 명쯤 있을 법한 힘만 센 바보였는데 아직도 머릿속에서 물소리가 들려와 정신이 혼미한 나는 바보에게 끌려가 버려진 폐가에 내팽개쳐진 뒤 강제로 바지가 벗겨진 다음 어둠 속에서 그 바보가 내 엉덩이를 무언가 납작한 걸로 찰싹찰싹 때리자 나는 토마토머리시옷새가 되어 시오옷시오옷 소리를 내며 볼품없고 이기적인 몸부림으로 저항을 하지만 바보는 토마토가 으깨지는 것처럼 거친 숨소리를 내더니 너는 세상이 어떤 색깔로 물들기를 바라는가라고 말을 하기 시작하는데 그 목소리는 마치 연극배우의 독백 같기도 하고 관객을 향한 방백 같기도 하고 나를 향한 고백 같기도 해서 갈피를 못 잡고 있는데 다시금 너는 세상이 어떤 색깔로 물들기를 바라는가 하고 반복하면서 머리를 쓰지 못하는 바보에서 머리를 너무 쓴 광인으로 순식간에 돌변하면서 나의 시간을 지배하게 되어 나는 내가 감당할 수 없는 시간의 무게에 짓눌려 점점 납작해지고 지상의 유일한 구멍이라고 해도 좋을 어딘가로부터 들어온 가느다란 녹색 광선이 반짝이는 것이 보여 저것이 나의 구원일까 세상은 언젠가 녹색으로 물들게 될까 하면서 날 놔줘 이 병신아라고 목을 간질이는 외침을 고기 기름 먹듯 목구멍 안쪽으로 삼키며 앞으로 내 삶이 어떻게 될 것이라는 것을 알기 위해 끊임없이 머릿속으로 주사위를 던졌는데 매번 같은 숫자가 나오고 주사위를 던질수록 머릿속에서 무한히 늘어나는 주사위와 주사위에 새겨진 숫자들의 조합이 셀 수 없는 숫자를 만들어 놓고 있을 때 너는 세상이 어떤 색깔로 물들기를 바라는가라고 어둠 저편으로부터 또다시 메아리쳐 들려오는 목소리에 울음이 끼어 있다는 것을 뒤늦게 알아채고 광인이 된 바보 혹은 바보였던 광인에게 그만 집으로 돌아갈래요라고 토마토머리시옷새가 조심스럽게 날개를 털듯이 말하자 바보광인은 새의 깃털이 혀에 달라붙은 듯한 숨소리를 내며 초칠을 해야 될 것 같은 바지 지퍼 소리를 들려준 뒤 나의 엉덩이에 오줌을 싸는데 더운 오줌에서는 감자를 굽는 냄새가 나고 무사히, 도대체 이 상황에서 무사하다는 것은 무엇일까, 집으로 돌아가면 어머니에게 감자를 구워 달라고 해서 구운 감자를 껍질도 까지 않고 혀와 입술이 타들어가도록 먹어야지 하면서 그의 오줌이 나의 몸을 적시는 틈을 타 나 역시 오줌을 지리는데 그의 오줌은 태어나서 처음으로 오줌을 싸는 사람처럼 엄청난 양이었다라고 그날 이후 엄청나다는 말을 함부로 쓸 수가 없었다고 금방이라도 눈물이 뚝뚝 떨어질 것 같은 표정으로 사진 속 너의 여동생과 닮은 듯한 옆모습의 너를 바라보며 말을 이어 가게 될 거야.
여러 모로 호흡을 가다듬어야 할 타이밍이지만 너는 아랑곳하지 않고 이런 이야기는 소설이 될 수 없다는 듯 나의 엉덩이 사이에 감춰진 슬픈 과거사가 절정으로 치닫기도 전, 그러니까 눈 덮인 숲에서 녹색의 바야바르인이 육중한 몸을 흔들며 인간이 측정할 수 없는 속도로 등장하기도 전에, 나를 빤히 쳐다보면서 사람 눈 속에 사람 눈이 비치는 걸 보면 아주 신비롭지 않니라는 어디선가 읽어 본 듯한 말로 나의 말을 가로채곤 너의 이야기를 시작하게 되겠지. (계속)




작가소개 / 김태용(소설가)

- 2005년 《세계의문학》 봄호로 등단. 소설집 『풀밭위의 돼지』, 『포주 이야기』, 장편 『숨김없이 남김없이』, 『벌거숭이들』 출간. 한국일보문학상. 문지문학상 수상. 텍스트사운드 그룹 「A.Typist」멤버로 활동 중.



《문장웹진 8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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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겐 낮술이 필요한 것 같은데 전하영 R과 나는 바닷가의 한 도시로 가는 기차를 타고 있었다. 우리는 그 도시에 있는 어느 서점의 초청으로 북토크에 참석할 예정이었다. 처음에는 서점이라고 해서 작은 가게인 줄 알았는데 꽤 규모가 있었고 로컬에서는 인지도도 높은 곳이었다. 사례비가 두둑해서 나는 바쁜 R을 설득해 초청 인사로 함께 행사에 참석하기로 했다. 이럴 때는 그가 야근을 밥 먹듯 하고 시도 때도 없이 불려 다니는 일을 한다는 게 도움이 됐다. 주말에 집에 들어가지 못할 이유를 손쉽게 만들어낼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북토크는 공식적으로도 그의 일의 연장이었다. 북토크에서 이야기할 책은 내가 이십 년 전에 쓴 소설로 처음에 출간됐을 때만 해도 거의 팔리지 않았는데, 영화화되면서 다시 읽히기 시작했다. R은 그 영화의 제작자였다. 그가 우연히 들른 카페에서 책을 발견했고 영화화를 제의해 왔다. 안 될 게 뭐람? 그 책은 세상에서 잊힌 것이나 다름없었으므로 나는 반갑게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 솔직히 말하자면 적지 않은 이차 저작권료에 더 관심이 많이 갔는데 알고 보니 그쪽에서는 내가 당연히 그보다 큰 금액을 부르리라 예상하고 미리 낮춰서 제시한 금액이라고 했다. 그런 사정을 파악하게 된 것은 R과의 관계가 좀 더 사적인 성격으로 진전된 이후의 일이었다. 그 후로 많은 것들이 변했다. 책이 영화화되자 죽은 사람이 돌아온 것처럼 책에 쓰인 시절도 내게 함께 돌아왔다. 이십 년 정도가 지나면 당시의 나를 더 이상 나라고 부를 수 없을 정도로 상황과 감정이 바뀐다. 인간의 몸은 7년마다 세포 전체를 모조리 갈아치운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책이 처음 출간된 이후 대략 세 번쯤은 완전히 다른 나로 거듭나 있는 셈이나 마찬가지였다. 가장 잘 아는 타인을 덕질하듯이 나는 과거의 나에게 향수를 느끼며 그때 그 시절의 장소를 방문하며 추억에 잠기곤 했고, 그때마다 함께하는 상대에게는 숨은 의도를 밝히지 않고 다른 볼일이 있는 것처럼 둘러댔다. 그것은 최근 들어 생긴 나만의 비밀이자 즐거움이었다. 북토크를 위해 우리가 방문하는 도시는 한때 유명한 관광지였지만 오랫동안 쇠락의 길을 걷다가 최근 들어 다시 각광 받기 시작한 지역이었다. 모든 것이 너무 비싸고 조밀한 서울에 진력이 난 젊은 사람들이 조금씩 모여들었고 사람들이 모이니 인터넷 매체들이 관심을 보였다. 이제 조만간 영화나 드라마의 촬영지로 물망에 오를 테고 그렇다면 이 도시도 많은 다른 곳들과 마찬가지로 프랜차이즈 카페와 플라스틱 상징물로 가득 찬 어느 평범한 한국의 소도시 중 하나로 거듭날 것이었다. 다름 아닌 영화제작자를 데려가는 셈이니 어쩌면 내가 그 도시를 망가뜨리는 하나의 중요한 계기를 마련하고 있는 건지도 몰랐다. 망상에 불과하겠지만 그런 생각이 들었다. 온 세상이 나를 쳐다보고 있다는 느낌. 내가 하는 작은 행동이 불러일으키는 더 큰 효과에 대한 전망. 책이 영화화된 뒤로 줄곧 내가 느끼는 감정이었다. 기차가 출발하기를 기다리는 동안 R에게 그 도시에 가본 적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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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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