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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소설] 정점 관측

  • 작성일 2016-07-01
  • 조회수 2,967

[단편소설]



정점 관측



민병훈



정문 앞에 모였어. 다 같이 박물관에 들어갔지. 우리는 초면이었고 누군가 탁의 가방을 대신 들었는데 무게가 꽤 나가는 탓에 낑낑 소리를 냈다. 유물들 앞에서 각자 시간을 보냈고 사진이나 찍자는 탁의 부탁을 딱히 거절할 이유가 없어 거대한 비석 앞에서 포즈를 취했다. 사진을 찍고 나서 누군가 비석에 적힌 문장들을 큰 소리로 읽었다. “이곳에 묻힌 것을 다시는 꺼내지 말아야 할 것이며 돌아가려는 이들은 이보다 더한 숨과 땀과 기억의 국물을 삼켜라. 제가 해석한 뜻이 맞나요.” 모두 고개를 저었다. 학회가 시작하기까지는 한 시간이 남아 있었다. 경비원이 다가와 주의를 줬고 나는 그들과 동행이 아닌 척 자리를 벗어났던가.


조깅에도 규칙이 있다.
그는 커피를 마신다. “규칙이 있어. 알고 있나.” 나는 후드 부분만 하얀 윈드브레이커를 벗는다. 창밖으로 자전거와 차들이 우르르 지나가고 그는 별다른 말을 하지 않은 채 멀거니 나를 바라보고 있다.
박물관에서 봤던 유물 중에는 청동으로 만들어진 자기들과 마구잡이로 엉킨 전선 그리고 이음새가 엉성한 석상들이 많았는데, 천변을 따라 나란히 뛰면서 그는 나에게 인상 깊었던 물건이 있었느냐고 물었지만 딱히 떠오르는 게 없었다. 오리 한 마리가 뒤뚱뒤뚱 쫓아오는 바람에 피식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나는 거짓말을 하고 있다. 사실 오리를 본 적은 없고 오리가 박물관 옥상에서 날아올랐던 것을 기억해 냈는데 오리의 똥이 탁의 가방으로 떨어져 다 같이 웃었다. 탁의 장례식에서 누군가 그 얘기를 했을 때 탁의 아내는 꽥꽥 소리를 질렀다.
탁의 연구를 이어받기로 한 나는 연구실을 정리하다가 아침까지 잠이 들었고 눈을 떴을 때는 운동복 차림의 그가 신발 끈을 고쳐 매고 있었다. “깜짝 놀랐지. 탁이 살아난 줄 알았어. 엎드려 자는 자세가 아주 똑같더군.” 그는 할 말이 있다고 했는데 자꾸 딴말만 늘어놓는다. 카페 가까이에 자전거를 세운 여자가 아까부터 나를 쳐다본다. “땅만 보고 뛰다 보면 주변을 바라보기 힘든 법이지. 특히나 자네는 이 동네가 처음이야.” 탁의 장례식은 일주일 동안 치러졌는데 어마어마한 액수의 조의금을 가방에 넣던 그의 아내가 나에게 봉투를 내밀었다. “타지라서 힘들 거예요.” 나는 그 자리에서 돈을 셌다. 수중에 있는 돈은 얼마 되지 않았는데, 그러고 보니 창밖의 여자를 장례식에서 본 것 같기도 하다. “아무튼 어려운 점이 있으면 날 찾아오게. 필요한 자료가 있으면 전화를 해도 좋고.”
거리는 이제 한산하다. 광장을 돌며 바닥을 확인하던 미화원들이 도로를 건너고 있다.


우리를 구해 주십시오. 이 칠흑 같은 구렁텅이에서 제 발로 기어 나가게끔 사다리를 내려 주시길. 전쟁은 끝났지만 전쟁은 끝없이 지속 중이고 거부할 수 없는 재난들이 앞을 다투며 차례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우리는 덩어리입니다. 조각난 유리컵이고, 우기에 길을 잃어 정처 없이 헤매는 중입니다. 우리의 속셈은 들통 난 적이 없지만 시간을 내왕하는 이들에게 우리는 항상 떼어내야 할 증상으로 묘사되고, 언제부턴가는 숲을 나와 또 다른 숲을 향해 가고 있습니다. 천막이 바람에 펄럭인다. 평원을 가로지르던 소떼가 재빨리 방향을 틀어 물가로 향한다. 천막에서 새어 나오는 소리들로 대기가 찢어질 것 같다. 어림없는 말이다. 그들은 옆 사람만 겨우 들릴 만큼 소곤거리는 중이다. 몇 달째 해가 보이지 않는다. 소를 바칩시다. 우리가 가진 걸 바칩시다. 우리를 바칩시다. 그들은 어제를 기다린다. 어제는 오해가 만들었다. 다시 소떼가 달린다. 막연하게 달린다. 소떼가 물가에 몸을 처박는다.


탁이 수집한 연구 자료들을 들춰 보다 하루가 지났다. 안개가 낀 것처럼 하늘이 흐리다. 제공받은 숙소는 혼자 지내기에는 지나치게 넓었는데 침대보다는 소파에서 지내는 시간이 많았고 끼니를 거르는 일이 잦았다. 가끔 발코니 난간에 새가 날아와 앉거나 고양이가 어슬렁거렸다. 탁이 남겨 놓은 유서를 훔쳐보는 마음으로 그의 메모장을 들춰 봤는데 단서가 될 만한 것들을 찾아보기 어려웠다.
초인종이 울린다. 조수였던 사내가 찾아온 모양이다. 이곳에 도착하자마자 그에게 여러 가지 자잘한 부탁을 했는데 손이 느린 건지 의욕이 없는 건지 항상 일이 늦었다. 문을 열자 검은 가죽으로 덧댄 큰 가방이 먼저 보인다. 조수는 어깨에 쌓인 눈을 털고 있다. “말씀하신 도면들입니다.” 그는 자연스럽게 안으로 들어와 주전자 뚜껑을 열어 보더니 고개를 가로저었고 거실 이곳저곳을 어슬렁거린다. 내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자 문을 닫고 나간다.
가방에서 도면들을 꺼내 책상에 펼친다. 완성된 형체가 가늠이 되지 않는다. 생각보다 규모가 큰 것 같기도 하고, 아마도 이 건물보다는 높지 않을까 얼추 상상할 수 있는데, 그렇다고 도면 자체가 조악한 건 아니지만, 도면마다의 용도를 알아내기가 어렵다. 나는 의자에 기대 잠깐 눈을 감고 탁의 동료들을 떠올린다. 그들의 탐탁지 않은 표정과 술에 찌든 목소리, 바닥에 깨진 화분 따위가 생각나고, 밖이 소란스럽다. 하루도 싸움을 거르지 않는 부부가 오늘은 복도에서 일을 벌이는 것 같다. 나는 여태 아무런 주의를 주지 않았지. 곧 있으면 관리인이 쿵쿵거리며 올라올 것이다.


광장 중앙에 하얀 제단이 놓여 있다. 사람들이 몰려온다. 타원형 광장을 둘러싼 숲에선 새들이 날아오르고, 새들이 날아오른 둥지에는 빈 알껍데기만 바람에 뒹구는 중이다.
제단이 갈라지면서, 아니 열리면서 뭔가가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는데 아직은 그 정체에 대해 딱히 이렇다 할 설명이 떠오르지 않고, 제단 앞에서 가부좌를 튼 사내 몇몇이 머리를 까닥거린다. 광장 가까이 날아간 새 한 마리가 공기총에 맞아 땅으로 떨어질 즈음 비가 내리기 시작하고, 살짝 맛을 보니, 기름 냄새가 혀에 퍼져 퉤퉤 마른침을 뱉게 되는데, 믿을 건 이제 저것밖에 없어, 그 말은 어떻게 믿지, 지령을 받았습니다. 제단 자체를 날려버리라고. 광장으로 쏟아진 사람들, 저들 중 누구에게 초점을 맞춰야 할지, 누구의 눈을 빌려야 할지, 잘 모르겠지만, 제단이 초점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이 모든 일들이 눈에 선한 미래를 요구할 것만 같다. 사람들은 점점 더 많아지고, 숲이 일정한 간격으로 물러난다.


관리인과 대화를 나누면 바보가 되는 기분이다. 분명 탁과 가까운 사이라고 했다가도 어떤 날엔 안면만 있는 사이라고 한다거나 말을 자주 바꾼다. “그가 진행한 연구에 대해서 나도 많이 알고 있죠. 종종 의견을 물었으니까.” 관리실에서는 향긋한 냄새가 난다. 관리인은 주로 팔짱을 끼고 벽에 기대 말을 쏟아낸다. “사실 나는 그 분야에 대해선 아는 게 없어요. 하지만 익히 들었어요. 그 제단과 관련된 사람들을 이제는 찾기가 어렵다고. 당신도 알지 않나요.” 매일 비슷한 얘기를 꺼낸다. 지금도. 앞뒤만 다를 뿐 맥락이 비슷하다. 탁을 알기는 하는 걸까. 인사를 하고 관리실을 나선다. 탁이 이해가 가지 않는 건 아니다. 밤새 내린 눈이 녹고 있다. 자동차 타이어에 엉겨 붙은 눈덩이들이 먼지에 섞여 거리를 더럽히고 있다. 어디선가 휘파람 소리가 들려온다. 사거리로 삼륜차 무리가 쏟아진다.
“그런 게 정말 있었을까.” “가능성만 있으면 돼.” 탁은 등을 돌리고 누워 말했다. 듬성듬성한 새치들이 스탠드 불빛에 간간이 반짝였고 날개 뼈 주위로 얼룩덜룩 무늬를 만든 정체 모를 흉터가 몇 세기 전의 지도처럼 느껴졌는데 가을장마가 시작되는 시기에는 하루 종일 창밖 나뭇가지에서 진을 치던 새들도 사라지고 가끔 낙엽 더미가 노크하듯 창을 두드리면 탁은 알몸으로 가랑이 사이 물건을 덜렁거리며 책상에 앉아 책을 펼치면서 나를 바라보거나 갱지를 빼곡하게 적어 내려갔다. 새끼를 깐 고양이가 천장을 자주 지나다녔다. “이런 게 적혀 있어. 당시 전선에서 부상을 입고 군병원으로 이송된 병사의 수첩에서 발견된 건데. 화재가 진압되고 나서 겨우 찾았나 봐. ‘제단이 곤두박질친다.’ 이거 한 줄이야.” 나는 잿더미가 된 병원에서 꼬챙이를 들고 바닥을 쑤시는 사람들을 떠올렸고, 탁에게 생활비를 언제 줬는지 곰곰이 생각해 봤지만 언제부턴가 기억이 나지 않았고, 적어 두면 편하지 않겠냐는 말을 한 귀로 흘려들으며 소파에서 일어났다. 옷을 챙겨 입으며 당분간은 오지 않겠다고 하자 탁은 마침 잘 됐다고, 누군가 자기를 쫓고 있는 것 같다고 했다. 이건 무슨 수작인가, 그런 생각을 하며 탁의 집을 나왔다.


*


그는 반쯤 무너져 내린 건물 옥상에서 망원경을 들여다본다. 엎드린 채로 삼일 동안 물만 마셨고, 마신 물의 양보다 더 많은 오줌을 흘려보냈다. 위장(僞裝)을 해볼까. 벽돌 가루에 침을 묻혀 얼굴에 바른다. 피부가 찢어질 것 같다. 사실 그를 예의주시하는 사람들이 있는 건 아니다. 그럼에도 그는 건물을 포위당한 상황처럼 움직임 하나하나에 주의를 기울이고 있다. 숨도 거의 쉬지 않고 있는데, 간혹 혼잣말을 하다가 흠칫 놀라 사방을 둘러본다. 제단이 막 열리기 시작할 즈음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자세를 고쳐 앉았다. 이제 그의 망원경을 들여다보면, 렌즈 안에선 지금 거대한 암석들이 빠르게 휘몰아치는 중인데 속도가 빨라질수록 손에 잡힐 듯한 소용돌이가 그의 눈을 어지럽히고 있다. 망원경에서 눈을 떼면 광장에 모여든 인파 속에서 탁을 찾을 수 있을 것 같기도 하고 그보다는 오히려 탁이 먼저 자신을 찾게 되는 건 아닌지 막연한 두려움이 생기면서 따듯한 욕조가 간절해진다.
연방에서는 아직 별다른 연락이 없다. 그에게 탁을 추적하는 일을 맡겼을 때부터 성패에 대한 잡음이 많았지만 그는 별다른 사고 없이 착실히 지령을 이행 중이다. 사실 일이 너무 쉽게 풀렸고, 누군가 나를 도와주고 있군, 그렇게 받아들이면서 알게 모르게 놓친 정보들과 의도적으로 누락시킨 과정의 일부에 대해서는 깊게 생각하지 않았다. 매뉴얼의 어떤 항목에서도 융통성을 찾아볼 수가 없어. 그리고 폭탄. 제단 안쪽에 설치해 놓은 폭탄들이 떠오른다. 나에겐 스위치가 있고, 이걸 누르는 일은 지금껏 맡았던 그 어떤 일들보다 쉬운 일이지. 제단을 쌓을 때 사용된 벽돌을 빼는 일보다. 집중하자. 그는 망원경을 고쳐 쥐곤 상황을 주시한다. 저 사람들 어제부터 절을 했던 것 같은데. 돌을 던질 수도 있다. 모두 나를 바라보겠지. 반대로 건물이 무너질 수도 있다. 광장 뒤에 자리한 진지에서는 이미 요격을 준비했지만 아직은 대기 중이다. 우리에게도 스위치가 있지. 좀 더 상황을 지켜보기로 하고 결정을 미룬다.
이런 일촉즉발의 대치 상황 중에서도 유일하게 태평한 인물이 있는데, 탁은 지금 거실에 자리한 흔들의자에 앉아 잡지를 들여다보고 있다. 기사로 접하는 연방의 입장이 흥미롭고 편집장을 만나면 술을 사야겠다고 생각 중이다. 이렇게 사람들이 몰려온 날은 언제나 무료하다. 어쩐지 괜히 나선 것 같고 모든 일이 귀찮아진다. 남쪽으로 세 블록 떨어진 건물 옥상에 그가 잠복 중이라는 사실도 알고 있다. 한둘이 아니다. 모두들 뭔가를 기다리지만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바라보는 일이 고작이다.
다시 광장을 바라보면, 아니 시간을 거슬러, 지금보다 훨씬 이전의 광장을 들여다보면, 시간의 불모지 혹은 끝없이 펼쳐진 지평선이 떠오르고 지하에 묻힌, 묻혔다가 다시 묻힌, 기억들, 누가 나의 오토바이를 끌고 사라졌나, 조개껍데기를 모아 짐칸에 싣고, 이곳은 테니스장이 반쯤 지어졌다가 뭉개졌지, 이 많은 화강암들은 어디서 구했으며, 그전에 화산이 터졌고 장마가 시작되면서 동시에 가뭄이 들었는데, 대체 왜 재난은 이 땅에만 지속되는지, 그동안 벼르고 있었는지, 모두 궁금했지만 다시, 광장으로 시선을 돌리면, 제단이 있던 자리에 뭔가가 나타났다. 아직은 이름을 붙이기가 난감한 형태의 물체처럼 모습을 드러낸 그것은 광장에 모여든 사람들을 내려다보는데, 그는 놀라 망원경을 떨어뜨리고, 잡지를 읽다 잠이 든 탁이 정신을 차리고 창문을 열었을 때, 기억 속의 진지에서 발사된 미사일이 광장으로 향한다.


그는 간판을 바라본다. 한동안 그렇게 서 있다가 걸음을 옮긴다. 자잘한 골목들이 뒤죽박죽 펼쳐져 있다. 평상에서 밥을 먹는 사람들이 그를 돌아봤다가 어디선가 풍겨오는 고기 굽는 냄새에 코를 벌렁거리며 모두들 그리로 달려가고, 암캐의 등에 올라탄 개에게 물을 끼얹은 아이는 집으로 들어가 다시 바가지에 물을 채운다. 대문 가운데에 빨간 부적을 붙인 집 앞에 서서 안을 기웃거리자 양복을 입은 여자가 울며 뛰쳐나온다. 대머리가 앉아 있다. 링 귀걸이를 한 대머리가. 그에게 용무를 물어보고 어깨에 앉은 앵무새를 바라본다. 대머리는 가르마를 정리하듯 정수리를 쓰다듬는다. “여긴 왜 왔냐니까.” 이 집에 살고 싶다. 그가 잠깐 그런 생각을 하는 와중에 대머리는 탁자를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아 손을 붙들고 있다. 왼쪽에는 창호지를 덧댄 커다란 문이 있고 오른쪽에는 네 개의 향로가 일정한 간격으로 놓여 있으며 천장에 달린 전등에서 촛농이 뚝뚝 떨어져 그들의 발 주변을 어지럽힌다. 식탁 밑 다리를 붙들고 앉아 있던 노인에게 그는 나가라고, 그렇게 계속 숨어 있다가는 못 볼꼴을 볼 거라고 말하지만 노인은 손가락들을 배배 꼬며 얼굴을 가린다. 날이 흐리다. “신자는 당신이 마지막이오.” 그가 묻는다. “그런 걸 신자라고 부르나.” 대머리가 대답한다.
그는 종이뭉치를 꺼내 대머리에게 들이민다. 앵무새가 언제부터 이 안에 있었는지 생각이 나지 않는다. 깃털이 자꾸 탁자로 떨어진다. 푸드득. 날개를 움직이지도 않는데 대머리는 화들짝 놀라 그의 어깨를 바라본다. 앵무새가 가짜라는 사실을, 혹시 그가 눈치 채는 건 아닌지 전전긍긍하고 있다. 하지만 그는 이미 그 사실을 알고 있으며 별다른 감흥을 느끼지 못한다. 앵무새라고 믿으면 그만이지. 주머니에서 녹음기를 꺼내 전원 버튼을 누른다. “당신이 도와주지 않으면 진행이 안 됩니다.” 이미 할 말은 다 했다고 대머리는 설명한다. “나를 찾아오는 건 시간낭비요. 탁을 빨리 찾는 게 더 도움이 될 것 같은데.” 처마 밑으로 물이 뚝뚝 떨어진다. 탁한 물줄기가 점점 거세지면서 집을 침범한다.
집을 나서자 골목이 끝나는 곳에서 누군가 그를 기다리고 있다. “연방에서 나를 보냈다. 당신은 지금 헛다리를 짚고 있는데 그 사실을 아는가.” 땅이 질척거린다. “당신에게 경고를 줄 생각이다.” “경고. 경고라고.” 그는 연방 요원을 무시하고 지나친다. 요원이 더 빠르게 움직인다. 요원이 들고 있던 우산이 바닥에 떨어지자마자 그는 바닥에 고꾸라지고 잠깐 누운 채로 상황을 파악하다가 뒤늦게 반응한다. 그가 하는 반응이란 목이 쉬도록 소리를 지르며 헤엄을 치듯 사지를 흔드는 것인데 요원이 다가오자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난다. “다시 일어나라.” 이 말을 어디서 들었더라. 사방이 막힌 곳에서, 뻥 뚫린 천장으로 목소리만 들렸는데, 이 낚시터에서 나가려면 다시 일어나라, 손바닥만 한 스피커에서는 그 소리가 규칙적으로 흘러나왔고, 지금 나의 꼴이 그때와 비슷하지 않은가. 요원은 그에게 바짝 다가가 말한다. “당신뿐만 아니라 당신들 전체를 지켜보고 있다. 당신들은 서로 모르지만 우리는 당신들을 알고 있지. 판에 박힌 이야기야. 이런 이야기일수록 더 심혈을 기울여야 하는 법이지. 모두가 알고 있고 모두가 익숙하다는 건 위험한 거라고.” 요원은 왔던 길을 돌아간다. 창문을 열고 밖을 구경하던 사람들이 문을 닫는다. 그는 거리에 남아 네온사인에 갇힌 침묵을 바라본다.


*


사이렌이 길게 세 번 울렸고, 나는 방공호를 향해 뛰고 있다. 거리로 쏟아진 사람들은 익숙한 모습으로 길고 긴 행렬을 만들었는데 육교 아래서 현을 켜던 남자는 자리를 떠나지 않고 계속해서 같은 노래를 반복한다. 그의 앞에 놓인 속이 빈 화분 속에는 동전이 수북하고 누군가는 걷고 누군가는 기다시피 서로의 등을 향하면서 도로를 건넌다. 방공호를 가리키는 표지판이 보이지 않아 잠깐 당황했는데 하얀 블라우스를 입은 여자들이 내게 손짓하며 이리로 오라고 소리를 지르는 중이다. 회색 빛깔의 운하에는 폐타이어를 줄줄이 엮은 통통배가 정박 중이고 교각 아래 몸을 숨긴 사람들이 있다.
방공호에 들어서자 문이 닫힌다. 언제 열릴지는 알 수 없다. 눈썹 언저리와 가슴팍에서 호흡이 느껴지는데 우리는 서로의 얼굴을 확인하기가 힘들고 온통 어둠뿐인 방공호 안에서 자꾸 머릿속에 떠오르는 건 유채꽃으로 가득한 초원과 듬성듬성 자리 잡은 주택들 그리고 빨랫줄에 매달린 고깃덩어리들. 그때의 냄새를 기억하는 일이 시간이 지날수록 힘들어졌고 탁이 소매를 걷고 만들었던 음식은 주로 아이들이 좋아했다. 아이들을 불러 모아 일을 주면 언제나 웃으면서 허리춤에 매달린 연장을 만지작거렸고 나사를 풀고 조이고 해체했다. 탁은 연구 기간 중반쯤 직접 도면을 만들어 뭔가를 설계하기 시작했다. 어른의 손으로는 조작이 힘든 좁고 세세한 설비들이 짜증날 만큼 많았다.
돔으로 만든 천장에서 흙부스러기들이 떨어진다. 사면이 흔들린다. 입으로 웅웅 소리를 내는 사람들, 방공호 전체에 소리가 퍼지고, 진흙이 바닥으로 떨어지는 것처럼 속을 게워내는 남자, “무사한 거죠.” “무사하지 않아.” 아무도 재난을 직접 두 눈으로 본 적이 없고, 다시 문이 열리길,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다시 줄을 맞춰 집으로 돌아가는 골목을 상상하며, 누군가 기도를 하자 기도는 순식간에 퍼져 마치 기도를 하기 위해 모인 사람들처럼 팔을 벌린다. 탁이 생각하던 건 어디에도 없다. 들어라. 들리지 않는다. 말하라. 말이 아니다. 탁은 송전탑 아래 낚시터에서 시간을 재고 있다. 시간이 지나간다. 시간이 지날수록 시간을 가늠하기가 힘들다. 시간이 걸어온다. 발이 달렸는가. 꼬리처럼 보인다. 시간의 꼬리를 물고 무는 꼬락서니다. 향이 타들어가고 밤낮이 기약 없이 사라질 때 제단의 소리 제단의 운동 제단의 추임새가 기억에 연류 되어, 다시 말해, 들린다고 다시 말해 봐, 낚싯바늘에 걸린 시간이 파닥거린다. 비가 내리고, 제단은 여유가 넘친다. 제단은 어디에나 있다. 탁은 믿는다. 믿지 않으면 아득해진다. 우리는 믿었습니다. 뛰고 걷고 날고 헤엄치고 먹고 입고 자고 일어나고 죽고 죽이고 잡고 잡히는 세계가 멀어진다.


탁은 눈을 뜬다. 꿈을 꾸고 나면 뭔가 돌이킬 수 없는 잘못을 저지른 것 같다. 고백을 하면 고백은 꿈을 향하는데 고백이 던져 주는 것을 언제까지 받아먹어야 하나, 문득 그런 생각이 들고 나를 처음 추적했던 그는 지금쯤 뭘 하고 있을까, 제단 안으로 들어갔던 것 같고 신자들에게 잡혔다가 도망을, 아닌가, 애초부터 없던 사람이었나, 아무래도 꿈자리가 흉흉했던 모양이야, 이상한 생각이 드는군. 탁은 이런 생각들이 왠지 낯설어 의자에서 일어나 천장을 바라본다. 누군가 나를 조종하고 있어, 내 머릿속까지 침투해서 자기 대신 움직이길 바라는 거지. 거짓말이야. 모두들 머리보다 위에 있다고 착각하지. 아니면 그보다 위, 더 위, 가늠할 수 없는 곳까지 고개를 치켜 올리면서 주문을 만든다. 광장 쪽에선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얼른 집 밖으로 나가야 한다. 탁은 알면서도 모르는 척 딴청을 피우지만 속으론 기회를 엿보고 있다. 아무도 눈치 채지 못하게 다른 곳으로 갈 계획이지만, 그것은 탁도 모르는 일이고 남일 같다. 하지만 탁이 의자를 돌려놓는 사이, 장소가 바뀌었고, 탁은 어정쩡한 자세로 잠깐 서 있다가 울화가 치민다.
모든 게 한눈에 들어온다. 까마득하게 높은 곳, 산맥들이 간간이 몸을 뒤집는다. 광장이 보인다. 광장 근처 까만 얼룩이 우왕좌왕하는 날파리 떼처럼 이리저리 움직이고 있다. 시시각각 흩어졌다가 다시 모이고 뾰족해졌다가 둥그렇게 바뀌는 중인데 면적이 점점 늘어난다. 아니, 수가 점점 늘어난다.


학회에서의 대화. 뜬구름을 잡는 그들의 대화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연구비를 분담하는 과정에서 고성이 오갔다. 나는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났다. 모두 나를 바라봤고 복도에서는 오줌 냄새가 진동했는데 게시판에 붙은 종이들이 펄럭이며 나를 부추겼고 연구실 칠판에 붙은 도표들과 익숙한 지명들이 아른거리기 시작했다. 진행 될 사항들을 발표해야 했지만 성과라고 부를 만한 실적이 없었다. 한계가 보이기 시작했고 연구에 관련된 사람들을 만나 보거나 자료를 찾는 일이 어둠뿐인 밀실에서 손을 더듬는 일처럼 막연해졌다.
통유리로 된 건물 바깥으로 갑작스럽게 돌풍이 불어 낙엽들이 사방으로 흩날린다. 쓰레기통을 붙들고 비틀거리는 사내. 구름들이 몰려온다. 나는 가방을 앞으로 메고 뛰기 시작했는데 어쩐 일인지 방향을 가늠하기가 힘들다. 시간이 꽤 지났을 무렵 급한 대로 눈에 보이는 집 앞으로 뛰었고 지붕과 창문이 낯설어 문을 두드리기가 난감할 때 그사이 누군가 문을 열고 나를 잡아끈다. “이런 날씨에 싸돌아다니는 건 미친 짓이야.” 둥그런 테이블에 둘러앉아 마작을 하던 남자들이 나를 향해 혀를 찬다. “누가 새로 왔다더니 당신이군.” 문을 열어 준 남자가 수건을 던지며 묻는다. 백 개가 넘는 패가 새로 섞일 때마다 새소리가 들린다.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는 잠을 불러오고 그들은 나를 보며 웃고 있다. “할 줄 알면 여기 앉지.” “머릿수도 모자라는데.” 패를 섞던 남자가 손짓한다. “그나저나 그 친구는 어디 갔지.” “누굴 더 데려온다고 했나.” 나는 어느새 그들 사이에 앉아 상아로 만든 패를 붙잡고 눈을 찌푸리고 있다. “이건 운이 아니야, 그러니 기도는 필요 없지, 짝짓기만 하면 돼.” “이렇게 하릴없이 아무도 믿지 않고 빌지 않은 채 시간이 가는지 오는지 신경을 끄고 서로의 돈에만 관심을 두는 게 광장으로 우르르 몰려가는 것보다 흥미 있는 일이지.” “몰라서 사단이 난 거야.” “탁도 여기 자주 왔어.” “와서 마작은 하지 않고 잡지만 얻어 갔지.” “나중엔 탁을 뒤쫓던 사람도 다녀갔어.” “탁을 추적한다는 사실을 숨기지 않더군.” “우리 돈을 다 땄어.” 그때 누군가 문을 부술 듯이 두드려 남자들은 입을 다문다. 창문 너머로 사람들이 보인다. 높낮이가 다른 머리들이 보인다. 열까지 세고 그만뒀는데, 경첩 하나가 바닥으로 떨어진다. 저 사람들은 누구냐고 묻자 다들 난감한 표정을 짓는다. “광장에서 돌아온 사람들.” 내가 문을 열려고 하자 그만두라는 소리가 들린다. “어차피 대화를 나누지도 못해.” 이층으로 향하는 계단 아래 문이 있고 모두들 그리로 몸을 숨긴다.


당시 사람들은 빨간 천에 흰 글씨로 뭔가를 적어 깃발처럼 흔들고 다녔다. 자기들만 알아볼 수 있는 기호와 그림이 많았고 측정해 둔 위치에 제일 먼저 다다른 자가 그곳을 지평선으로 정하자는 의견을 제시했는데 며칠 뒤 그는 사라졌다. 사라지면 발견되고 발견되면 다시 사라지는 모종의 단합이 반복됐다. 바다에 배를 띄워 파고계와 같은 장비를 바닷물에 우겨 넣던 선원들이 자꾸만 변해 가는 기상현상에 대한 대비책을 내놓았지만 읽는 사람이라곤 화장실에서 일을 보거나 손님을 기다리는 택시기사들이 전부였다. 몇 번의 포럼을 개최했다는 기록이 있지만 선상에서 이뤄지는 모임들이 대개 그렇듯 종합 의견이라는 것은 항상 해안선의 포말처럼 기약 없이 잊히곤 했다.
이제 알려지지 않은 정점이 필요했다. 이미 알려진 관측구역은 그들의 믿음과 상관이 없어졌는데 조사자로 편성된 자들은 이 세계를 두꺼운 해류라고 생각하자, 염분이 가득한 세계, 이런 문구를 적어 그래프 상단에 명시했다.


그는 인파를 헤치며 걷는다. 제단이 개방되자 고여 있던 소음들이 뒷걸음치듯 광장 너머로 사라졌다. 그는 주머니 속 스위치를 만지작거리며 눈으로는 탁을 찾고 있지만 사실 그에게 필요한 건 다음 지령이다. 두리번거리며 시간을 허비하기보다는 속히 일을 끝내야 한다. 초조한 그의 모습이 답답하고 한심하다. 그는 뭔가를 눈치 챈 사람처럼 제자리에 서서 제단을 노려본다. 그러곤 말한다. 귀찮아. 꿇어앉은 사람들이 그를 바라본다. 미친 짓이다. 교육이 허사로 돌아가고 있다.
그렇다. 스위치를 눌러야 한다. 하지만 그는 누르지 않을 것이고 연방에 전화를 걸어 자신의 실패에 대한 변명을 지어낼 것이다. 그렇지 않다. 매번 변명을 지어냈지만 씨알도 안 먹혔으니. 이렇게 가정해 보자. 폭탄을 터트려 제단을 날려버리고 광장을 유유히 벗어나면 간부들은 그를 소환해 그간의 행적과 성과를 보고 받은 뒤 노고를 치하하는 자리를 마련해 그를 격려해 주며 그를 교육한 사람들에게도 적당한 포상을 제공할 것이다. 다음 지령까지 휴가를 받은 그는 비행기에서 폐허가 된 광장 위를 바라보며 수면 안대를 가방에 넣어 두고 잠을 청할 것이다. 이런 상상을 그의 의식에 심어 두고 싶다. 하지만 그는 지금 멀어지는 기억의 변두리를 전전하며 아무에게나 책임을 떠넘기고 싶다는 욕구에 사로잡혀 있다.
무심코 걷던 그는 탁의 은신처를 발견한다. 아니, 탁이 머물렀던 곳이란 사실을 아직은 모르고 있다. 그는 문을 열고 들어간다. 사람이 사용한 흔적이 보인다. 누구의 집일까, 다른 요원이 잠복하던 곳인가, 아니면 이미 오래전에 도시를 떠난 사람일까, 내가 여기서 주인 행세를 할 순 없을까, 현관을 지나 거실에 놓인 흔들의자에 앉아 반쯤 펼쳐진 잡지를 읽으며 이대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으면 좋겠다, 따듯한 맥주, 욕조, 침대를 차지하고 음모, 혈통, 믿음을 저버린 채 잠이나 잤으면. 하지만 그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시간을 버는 일인데, 임의대로 탁을 방관하며 내가 아닌 다른 요원에게 발각되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이다. 그는 문득 궁금하다. 광장에 모인 저들은 대체 뭘 기대하고 있는 건가, 이런 세계에서 믿을 거라곤 사라지는 일뿐 아닌가, 이미 사라진 이들인가, 정말 사라질 수는 없나, 그는 꼭 누구에게 묻는 것 같다.


보일러가 돌아가고 탁은 눈을 떴다. 어떤 표식에 대한 생각을 꿈에서 본 것 같다고,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며 생각했다. 너무 많은 사람들과 너무 많은 날들이 지나갔는데. 보일러에서 웅웅거리는 소리가 들리자 허기가 일었다. 탁은 보일러실 구석에 널어 둔 마른 옷가지를 몸에 걸치고 문을 열었다. 눈이 부셨다. 눈물이 쏟아졌다. 울면서 계단을 올랐다. 사람들이 보이지 않았다. 왁자지껄 소리를 지르며 뛰어가던 아이들도 보이지 않았다. 문 닫은 상점들을 지나 계속 걸었다. 눈물이 마르지 않았다. 길가에 흙먼지가 일었다. 탁은 집으로 가는 길을 잠깐 헷갈렸다가 겨우 기억해 냈다. 집으로 가는 골목이 낯설었다. 항상 꼬리를 흔들던 개가 보이지 않았다. 문에 빨갛고 기다란 종이가 붙어 있었다. 아주머니, 탁은 낮게 말했다. 집이 엉망인데 아주머니는 보이지 않았다. 향로는 꺼졌고, 종이뭉치들이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다. 바닥에 주저앉았다. 모두들 무엇을 믿었나. 그 후에는 무엇이 남았나. 추호의 의심도 없었나. 이제 그 사람들은 남았다고 하지 않는데, 수집한 자료들은 모두 한 방향을 가리켰다. 제단을 만들고 제단 안에 믿음을 만들고 바라보고 무릎 꿇고 서로의 손바닥을 확인하며 집으로 돌아가는 그들의 모습이 눈에 선했다. 탁은 집을 정리했다. 다시 눈이 내리기 시작했고 사위는 금방 어둑해졌다.
새벽 중에 전화가 울렸다. “잠깐 나와서 바람이라도 쐬지.” 동료들은 술에 취해 소리를 질렀다. 갈색 코트를 두르고 문을 열자 어느덧 동이 트기 시작하는 하늘이 보였고 자주 모이는 술집 앞에서 동료 중 하나가 맨홀 뚜껑에 대고 토를 하고 있었다. 탁은 그의 등을 두드려 주다가 “저리 꺼져라, 샌님아.” 이런 말을 들었고, 발로 엉덩이를 밀어 그대로 바닥에 얼굴을 비비는 동료를 내버려둔 채 술집 안으로 향했다. 왁자지껄한 실내가 갑작스럽게 조용해졌다. 바텐더가 눈치를 보다가 조용히 주방으로 들어갔고 누군가 잔을 바닥에 던졌다. “뒤꽁무니나 빠는 새끼.” 탁은 다가갔다. “요즘은 추종하던 자들을 추종한다던데.” “오란다고 바로 나왔네요.” “염치불구한 날들이지.” 바텐더에게 술을 시켰지만 주방에서 나올 생각을 안 했다. 누군가 홀 뒤에 자리한 세션맨에게 손짓했고 그는 졸음을 가까스로 물리치며 건반을 연주했다. “지겹군.” 서로 말없이 술을 마셨다. 희미한 잔등 불빛 아래서 서로의 얼굴을 확인하며 술을 들이켜는 게 마치 유일하게 남은 일처럼. 화장실에 가서 토를 하고 다시 마시고 바닥에 토를 하고 그 위에서 춤을 추며 마시고 세션맨을 집으로 돌려보낸 뒤 직접 악기들을 연주하다 때려 부수고 동료들이 힘을 모아 탁을 때리고 탁도 탁을 때리고 겁에 질린 바텐더가 사람들을 부를 때까지. “그래서 너희가 믿는 건 뭐야.” 탁은 비틀거리는 동료들의 등에 대고 혼잣말을 했다.


*


그러나 멀리서 보려는 의지가 내게는 없다. 연구는 난관에 봉착했고 이를 해결할 돌파구가 보이지 않는다. 나는 탁이 짜놓은 결과물에 대한 근거들을 한데 모을 재주가 없어. 탁의 행적을 쫓는 일이 더 중요해 보이지. 거기서 어떤 실마리를 찾으려고 했다.
마작을 하던 남자들의 집을 뛰쳐나와 탁의 집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다. 그는 탁의 뒤를 캐던 사람이다. 벽 한쪽이 완전히 허물어졌고 그나마 있던 가구들도 노숙자들이 훔쳐갔는지 보이지 않는다. 연방에서 나를 보자고 한 용무는 뻔하지. 자료를 넘겨 봤자 그들이 알아낼 수 있는 건 없다. 나는 거의 확신한다. 의심받고 있다. 찬 기운이 든다. 의심받을 만한 일을 한 적이 있던가. 거리로 몰아치는 눈덩이들. 빼곡한 나뭇가지들이 허공을 휘갈긴다. 가로수를 뿌리째 뽑고 싶다. 그뿐이다. 잠이 오고, 뺨을 때려 가며 전방을 노려본다. 그곳을 빠져나와 탁이 자주 가던 송전탑 아래로 가는 상상을 한다. 상상을. 흙이 바삭거리며 튄다. 멀리 희미한 불빛이 보인다. 빛은 위아래로 조금씩 움직이는 중이다. 일렁이는 중이다. 나는 찌를 유심히 바라본다. 낚싯대가 쓰러져 있다. 텐트도 쓰러져 있다. 찢긴 천이 간헐적으로 흔들린다. 나는 인기척을 느끼고 싶다. 입질 좀 있습니까. 혼잣말을 하고 나니 정말 누군가 있는 것 같다. 옆으로 엎어진 동그란 통에서 뭔가가 꿈틀거린다. 지렁이들이 줄을 맞춰 물속으로 기어간다. 나는 물속에 있다. 지렁이들을 따라 상체를 필사적으로 꾸물거리며 물속으로 들어간다. 나는 탁의 집에 있다. 상상이 시간의 꼬리를 물고 늘어진다. 동이 트고 있다. 건물을 포위한 사람들이 보이고 그들에게서 어떤 적의가 느껴진다. 그들의 실루엣이 점점 더 가까워지고 실루엣 사이의 경계가 흐려질 때쯤 누군가 앞으로 나선다. 그는 대체로 심드렁한 얼굴이다. 심드렁하게 나를 내려다본다. 그가 가고 다른 사람이 온다. 한 명씩 교대로 나를 내려다본다. 그들에게 어떤 순서가 있는 것 같다. “우리를 구해 주십시오. 그는 갔지만 우리는 시간에 떠밀려…….” “듣기 싫다.” 내가 말했지만 다른 사람이 뱉은 말 같다. 나의 의지와는 다르게 혀가 움직인 꼴이다. 의지는 간혹 나와 상관없는 일 같다.
모두들 떠나가고, 이제 제단은 여유가 넘친다.


다시 광장으로 쏟아진 사람들, 저들 중 누구에게 초점을 맞춰야 할지, 누구의 눈을 빌려야할지, 이건 누구의 말인가, 누가 주장하나,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경비원은 새벽에 박물관을 순찰하다가, 제 혼자 꿈틀대는 비석을 마주하는데, 비석이 묻는다. 경비원은 들리지 않는다. 전시관마다 불이 들어온다. 놀란 경비원이 손전등을 바닥에 떨어뜨리고 그 소리에 맞춰, 아파트에서 잠을 청하던 관장이 벌떡 일어난다. 재빨리 경비실에 전화를 걸어 보지만 아무도 받지 않고, 꿈에 박물관이 불타고 있었는데 이 일을 어쩌면 좋나, 제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게 해주세요, 기도하고, 경비원을 믿고, 그런데 경비원은 언제 고용한 사람이었지, 어제 새로 출근했던 것 같은데, 서둘러 옷과 신발을 챙겨 차에 올라타지만 도로를 점령 중인 사람들. 이 많은 사람들이 어디서 쏟아져 나왔을까, 사람들이 우르르 밀려 나온다. 줄을 나란히 맞춘 사람들 사이로 차를 운전하는 일은 바다 한가운데서 노를 잃어버린 일과 같다고, 자책하며, 대체 왜 경비실은 전화 연결이 안 되는지, 다들 자고 있는지, 경적을 울려도 아무도 비켜서지 않는다. 그대로 밀고 가버릴까, 이 유령 같은 사람들을 전부 뭉개버리고 가고 싶지만, 마음만 앞설 뿐, 그때 앞 유리로 뭔가가 툭툭 떨어지는데, 창을 열고 하늘을 바라보자, 수를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오리 떼가 하늘을 가득 채운 채 제단 쪽으로 날아가고 있다. 아, 지금 꿈을 꾸는 중이구나, 관장은 모든 걸 체념한 얼굴로 창을 닫고 안전벨트를 고쳐 맨다. 다 밀어버리자, 관장은 눈을 질끈 감고 엑셀을 밟는다.
경비원은 전시관을 전부 돌며 다시 불을 끄고, 놀란 마음을 진정시키는데, 어디선가 찰칵 소리가 들려와, 그곳으로 가보지만, 삼면을 가득 채운 액자들, 사진 속 인물들이 모두 그를 바라본다. 별일이군, 이런 일은 없었는데,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건가, 경비원은 서둘러 경비실로 달려가 CCTV 화면을 바라본다. 온통 어둠뿐인 검은 화면은 미동이 없다. 역시 야간 근무는 건강에 안 좋아, 주간조로 바꿔 달라고 해야겠어, 경비원은 고개를 젓는다. 박물관으로 사람들이 몰려오고 있다.


탁은 숨을 몰아쉰다. 반대편의 그 역시 무릎에 손을 기대고 상체를 구부린 채로 헉헉거린다. 그의 입에서 누런 가래가 길게 바닥으로 떨어진다. “겨우 찾았네.” 둘은 꽤 긴 시간 말이 없었는데, 그가 먼저 몸을 쭉 펴며 탁을 내려다보고 말한다. “내게 이러는 이유가 뭐야.” 탁이 묻는다. “정말 궁금해서 묻는 건가.” 사실 궁금한 건 아니다. 그는 다른 사람들보다 먼저 탁을 발견하곤 속으로 쾌재를 불렀지만 티를 내고 싶진 않다. ‘연방에 체면치레를 할 수 있게 됐어.’ 빨리 모든 일을 마무리 짓고 이곳을 벗어나고 싶다. 저 멀리, 하얀 재가 휘몰아치는 광장이 보인다. 제단이 있던 곳에는 둥그렇게 파인 구멍이 점점 면적을 넓혀 가고 있다.
“내가 스위치를 눌렀어.” 그는 바지 주머니에서 스위치를 꺼내 탁에게 던진다. 힘이 없는 탁으로서는 날아오는 스위치가 이마에 부딪혀도 별다른 저항을 하지 못하고 있다.
“예전에도 한번 아작 난 적이 있다고 하던데. 당신도 그걸 아나.”
“아무래도 우린 지금 같은 장면을 바라보는 게 아닌 것 같군.” 그는 시선을 거둔다. 엎드려 있던 탁이 몸을 추스르고 앉는다. “방금 당신이 던진 건 여기에는 없는 물건인데.” 갑작스레 돌풍이 불고 그들은 잿더미에 휩싸인다. 돌풍은 일종의 예감을 부른다. 탁의 몸을 결박하던 밧줄이 어느 순간 분리됐지만 그는 신경 쓰지 않고 있다. “중요한 건 당신과 내가 마주 보고 있다는 사실이지.” 그는 한쪽 입 꼬리를 올리며 웃는다. 웃음이 새어 나와서 참을 수가 없다. 잠깐 뒤로 돌아 배를 붙잡곤 밀려드는 웃음을 겨우 참아내며 끅끅 소리를 낸다. 탁은 옷에 묻은 재를 털어내고 자리에서 일어난다. 다리에 힘이 없다. “조깅에도 규칙이 있어. 알고 있나.” 그는 뒤로 돌아선 채 말한다.
숨이 차다. 땀이 자꾸 흐른다. 오리 한 마리가 뒤뚱뒤뚱 그들 쪽으로 걸어온다. 탁은 눈을 비빈다. 그를 지나친 오리가 탁에게 가까이 다가서자 하얀 재로 변해 바람에 날아간다. 암석들 뒤에 각자 몸을 숨긴 연방 요원들이 둘의 대치 상황을 바라보고 있다. 모두들 뭔가를 기다리지만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바라보는 일이 고작이다. 평원. 그리고 암석들. 그는 지난날 망원경 안에서 휘몰아치던 암석들을 기억해 내고 흠칫 놀라 주위를 둘러본다. 그가 타고 온 오토바이가 바람에 흔들리고 있다. 그 뒤로 천막처럼 펼쳐진 산맥이 보이고, 능선이 너무 높아 고개가 젖혀질 지경이다. “모두들 저 산맥으로 몰려갔을 거야. 그렇지?” “산맥 아래로 들어갔을 수도 있지.” “그들이 믿는 건 시시각각 변하는 게 아닐 텐데.” “확신해?” “확신이 아니야. 그저 예전과 비교해서 예측해 보는 거지.” “너희는 과거가 없다.” “미련이 많군.” 잠복 중이던 요원들이 서로를 바라본다. 결정이 늦어지는 그에게 불만을 토로하고 싶다. 탁은 그에게 천천히 다가간다. “당신뿐만 아니라 당신들 전체를 지켜보고 있었지. 당신들은 서로 모르지만 나는 당신들을 알고 있다. 어쨌든 위험한 거라고.” 그는 뒷걸음을 치고 싶다. 실제로 점점 뒤로 물러서고 있는데 이러다 온 힘을 다해 달아날 것만 같아 입술을 지끈 깨문다. “그만 와.” 그는 고꾸라진다. “다시 일어나라.” 탁이 말한다. 어쩐지 전세(戰勢)가 역전된 것만 같다. 고개를 절레절레 젓던 요원들이 암석 뒤에서 모습을 드러낸다. 눈 깜짝할 사이에 탁을 포위한다. 다시 돌풍이 불어온다.


이 연구는 효력이 없다. 본 연구의 목적은 그들이 상정하고 스스로 설계한 임의의 건축물 혹은 물체에 대한 의미를 해결하고 재건하려는 것이었지만 그것은 형상화될 수 없는 상상 속의 위치다. 수많은 관측도구들이 시장에서 판을 쳤고 관측이 행해진 장소들이 해상이든 육상이든 천상이든 간에 위․경도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고 중요한 것은 국지적으로 움직인 무리가 지금도 어딘가 또 다른 광장을 만들었을 거라는 가정이다. 연구를 지원한 측에서는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지만 어차피 연구비라는 건 숫자로만 존재하고 다른 의미로 잘 활용했으니 추후 금액에 대한 추궁은 없을 거라 여겨진다. 이 연구를 나의 조수이자 친구 그리고 내 뒤를 뒤쫓던 그에게 넘긴다. 간혹 과학적이거나 종교적인 지식을 앞세워 이 연구에 숟가락을 얹으려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런 족속들은 무시하길 바라며 자료 수집에 정진하길 바란다.


나는 우리가 처음 봤던 날 탁이 들고 있던 검은 가방, 그 안주머니에서 이 글이 적힌 종이를 발견했다. 그날 탁 대신 가방을 들어준 사람은 도주를 계획했던 것 같은데, 생각해 보니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탁이 종종 얘기했던 사람이었겠지. 누군가 자기를 쫓고 있다고 했는데, 아무튼 그는 가방을 얻지 못했고 지금은 내게 흘러 들어왔다. 가방에서 흙냄새가 난다. 재에 뒤덮였던 것처럼 먼지가 많다.
다시 밖이 소란스럽다. 부부는 정말 하루도 거르지 않고 싸운다. 당신은 왜 나를 믿지 않는 거야, 남자는 매일 같은 말만 한다. 여자는 대답 대신 소리를 지른다. 눈이 그치지 않는다. 주전자가 팔팔 끓는다. 책상 위에는 생활비를 기록한 수첩이 있다. 탁은 생활비를 받을 때마다 머리를 긁적였다. 기록은 믿을 수 있는 법이지. 탁이 자주 했던 말도 이제는 믿을 수 없다. 며칠 전에는 관리인을 따라 광장에 다녀왔다. 관리인이 말하길 지금은 이렇게 허허벌판이지만 예전에는 지금과 많이 달랐다고. 나는 그곳을 수수밭이나 개척 직전의 평야로 생각했는데 그의 말을 듣고 보니 착각이었던 모양이다. 그는 손가락으로 하늘을 가리켰고 위에서 바라보면 더 장관이라고 했는데, 특히나 어떤 특수한 곳에서 보면 입이 떡 벌어질 만큼 경이로울 거라고 말했다. 경이. 게다가 모든 걸 이해하고 앞으로의 일을 알아낼 수 있을 거라고 말을 이었다. 경이와 예측. 나는 그가 나를 놀리는 것 같았다. 눈 덮인 산맥에서 간혹 눈사태가 일어나 산맥에 빗금을 만들었다.
심부름을 시킨 조수가 또 늦는다. 그는 정말 매일 늦는다. 매일 늦기 위해 조수 일을 하는 것 같다. 주전자를 바닥에 내리고 숙소를 나선다. 불을 끄자 숙소에는 한 점의 빛도 들어서지 않는다. 골목 가득 눈이 내린다. 시야에 온통 흰 점들뿐이다. 눈이 많이 내리지만 쌓이지 않는다. 눈이 흩날리지 않고 직선으로 내리는 광경이다. 거리가 한산하다. 아무도 보이지 않는다. 아니다. 골목 끝 가로등 아래서 누군가 우산을 들고 나를 바라보고 있다. 나도 제자리에 서서 그를 바라본다. 한동안 그렇게 서 있다가, 그는 우산을 접고 내게 다가온다. 눈길에 자국이 생긴다. 천천히, 믿을 수 없는 먼 미래처럼, 점점 가까워지고 있다. ■




민병훈 소설가

작가소개 / 민병훈 (소설가)

- 2015년 《문예중앙》 신인문학상으로 등단.


   《문장웹진 2016년 7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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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관리자
  • 2024-10-01
이것은 사랑 없이는 깰 수 없는 유일한 꿈이었다.

이것은 사랑 없이는 깰 수 없는 유일한 꿈이었다. - 춤추는 무당 당골 이심과 춤추지 않는 무당 오키나와 영매 유타의 사진에 대하여 한정현 기생 아니고 무녀예요. 무당이라고요, 아저씨. 이 여자한테 그랬다간 저주받는다고요. 어쩌려고요? 팔아먹게? 그런 말을 했던 이는 곧 어흥, 하는 표정을 짓는다. 얼굴을 잔뜩 구기면서 말하는데도 생생한 눈빛이 빛난다. 사내는 입을 반쯤 벌리고 그이의 얼굴을 바라보다 퍼뜩 정신이 들었는지 되레 큰소리다. 내, 내가 억지로 잡아끌었나! 누가 이 얼굴에 돈을 내겠어! 그 말을 하면서도 사내는 손목이 잡힌 이심이 아니라 그이의 얼굴을 힐끗거린다. 나도 그냥 기생은 아니죠. 아저씨 그렇게 내 얼굴 빤히 보면 돈 내야 돼. 알죠? 아닌 게 아니라 그이가 입고 있던 소맷자락이 그것을 알려준다. 잘 다린 소맷자락에 수가 놓여 있다. 초량권번. 사내는 돈이라는 이야기가 나오자 아까보다도 낮은 자세로 어느새 이심의 손목을 놓고 슬그머니 물러선다. 사내가 놓아 준 이심의 손목은 줄이 그어진 듯 붉다. 공창제도는 한참 전에 없어졌지만, 부산이든 서울이든 이젠 사창제도가 판을 쳐요. 미군들에게 매매 놓아 주는 곳도 많고요. 몰랐나요? 어느 누가 꿀이라도 한가득 따라 놓은 걸까. 남북이 서로 총을 겨누며 싸운 지 1년이 넘고 보니 거리마다 향기는커녕 악취가 진동했다. 그런데도 이 사람은 향을 품고 있구나. 이심은 공창이 뭔지도 사창이 뭔지도 몰랐다. 이 부산이라는 곳에 오기 전까지. 다만 저건 알았다. 그이가 들고 있는 소매 끝에 달린 초량권번이라는 이름. 이 사람은 북쪽이 밀고 내려올 때 군예대로 온 최승희의 제자일까, 아니면 호남 제일 이매방의 제자일까. 이심은 문득 건너의 그이가 자신과 비슷한 또래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심은 아마 저이가 권번에 들어갈 무렵 시집을 갔을 거다. 세습무라는 것은 보면 희한했다. 부모가 전라도 세습무인 당골이라 한들 그 자식이 당골이 될 수는 없었다. 신과 인간을 잇는 것이 그들의 업, 인간사 그 모든 번뇌 속에서 자신의 삶은 없는 한 맺힌 자리라 그런 것일까. 기이하게도 당골은 시어머니에게서 며느리로 이어지는 거였다. 그렇다면 이심은? 남원 가재골 3대 당골 이심은 어떠한가. 이심은 제 발로 그 집에 들어갔다. 이심은 신이 아닌 한 인간에게 모든 걸 걸고자 했다. 한여름 빨래터에서 땡볕을 지고 일하는 이심에게 다가와 부채로 가만히 빛을 막아 주던 그 소년에게 모든 것을 걸고자. 사라진 것이 네가 아니라서 다행이야······. 처음 해변에서 홀로 하얀 천을 두르고 기녀들이나 추던 입춤을 휘날리듯 추던 그 누군가. 어느 집 기녀가 저리 고울까. 종일 마른 볕에 앉아 빨래를 하던 이심에게는 꿈같은 광경이었다. 어지러움에 잠시 이심이 감았던 눈을 뜨고 보니 어느새 그 꿈이, 아니 그가 웃으며 부채로 빛을 가려 주고 있었다. 뜻하지 않게 빛나던 그것은, 윤슬이 아니었다. 그의 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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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10-01
우리에겐 낮술이 필요한 것 같은데

우리에겐 낮술이 필요한 것 같은데 전하영 R과 나는 바닷가의 한 도시로 가는 기차를 타고 있었다. 우리는 그 도시에 있는 어느 서점의 초청으로 북토크에 참석할 예정이었다. 처음에는 서점이라고 해서 작은 가게인 줄 알았는데 꽤 규모가 있었고 로컬에서는 인지도도 높은 곳이었다. 사례비가 두둑해서 나는 바쁜 R을 설득해 초청 인사로 함께 행사에 참석하기로 했다. 이럴 때는 그가 야근을 밥 먹듯 하고 시도 때도 없이 불려 다니는 일을 한다는 게 도움이 됐다. 주말에 집에 들어가지 못할 이유를 손쉽게 만들어낼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북토크는 공식적으로도 그의 일의 연장이었다. 북토크에서 이야기할 책은 내가 이십 년 전에 쓴 소설로 처음에 출간됐을 때만 해도 거의 팔리지 않았는데, 영화화되면서 다시 읽히기 시작했다. R은 그 영화의 제작자였다. 그가 우연히 들른 카페에서 책을 발견했고 영화화를 제의해 왔다. 안 될 게 뭐람? 그 책은 세상에서 잊힌 것이나 다름없었으므로 나는 반갑게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 솔직히 말하자면 적지 않은 이차 저작권료에 더 관심이 많이 갔는데 알고 보니 그쪽에서는 내가 당연히 그보다 큰 금액을 부르리라 예상하고 미리 낮춰서 제시한 금액이라고 했다. 그런 사정을 파악하게 된 것은 R과의 관계가 좀 더 사적인 성격으로 진전된 이후의 일이었다. 그 후로 많은 것들이 변했다. 책이 영화화되자 죽은 사람이 돌아온 것처럼 책에 쓰인 시절도 내게 함께 돌아왔다. 이십 년 정도가 지나면 당시의 나를 더 이상 나라고 부를 수 없을 정도로 상황과 감정이 바뀐다. 인간의 몸은 7년마다 세포 전체를 모조리 갈아치운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책이 처음 출간된 이후 대략 세 번쯤은 완전히 다른 나로 거듭나 있는 셈이나 마찬가지였다. 가장 잘 아는 타인을 덕질하듯이 나는 과거의 나에게 향수를 느끼며 그때 그 시절의 장소를 방문하며 추억에 잠기곤 했고, 그때마다 함께하는 상대에게는 숨은 의도를 밝히지 않고 다른 볼일이 있는 것처럼 둘러댔다. 그것은 최근 들어 생긴 나만의 비밀이자 즐거움이었다. 북토크를 위해 우리가 방문하는 도시는 한때 유명한 관광지였지만 오랫동안 쇠락의 길을 걷다가 최근 들어 다시 각광 받기 시작한 지역이었다. 모든 것이 너무 비싸고 조밀한 서울에 진력이 난 젊은 사람들이 조금씩 모여들었고 사람들이 모이니 인터넷 매체들이 관심을 보였다. 이제 조만간 영화나 드라마의 촬영지로 물망에 오를 테고 그렇다면 이 도시도 많은 다른 곳들과 마찬가지로 프랜차이즈 카페와 플라스틱 상징물로 가득 찬 어느 평범한 한국의 소도시 중 하나로 거듭날 것이었다. 다름 아닌 영화제작자를 데려가는 셈이니 어쩌면 내가 그 도시를 망가뜨리는 하나의 중요한 계기를 마련하고 있는 건지도 몰랐다. 망상에 불과하겠지만 그런 생각이 들었다. 온 세상이 나를 쳐다보고 있다는 느낌. 내가 하는 작은 행동이 불러일으키는 더 큰 효과에 대한 전망. 책이 영화화된 뒤로 줄곧 내가 느끼는 감정이었다. 기차가 출발하기를 기다리는 동안 R에게 그 도시에 가본 적이

  • 관리자
  • 2024-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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