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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인간 증후군

  • 작성일 2019-06-01
  • 조회수 5,065

[단편소설]



나무인간 증후군



변미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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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내 Y시에서 일어나게 된 그 일을 처음으로 목격한 사람은 쉰 살의 남자였다. 그날 저녁, 남자는 일주일째 지속된 장마가 끝나 미뤄 뒀던 운동을 하기 위해 중앙공원을 찾았다. 남자는 여느 때보다 상쾌한 공기를 흠뻑 들이마시며 평소보다 빠른 걸음으로 공원을 향해 걸었다. 비는 다음날 정오까지 내리지 않을 전망이라고 했지만 남자는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우산을 가지고 집을 나섰다. 그렇게 십여 분쯤 걸어 공원에 도착한 남자는 공원 입구에 있는 벤치에 웅크린 자세로 누워 있는 여자를 발견했다. 어디가 아픈 건지, 아니면 술에 취하기라도 한 건지 희미하게 앓는 소리를 내고 있었다. 가로등이 밝지 않아 인상착의를 정확하게 파악하기 어려웠지만 얼핏 보이는 옷차림새로 추정해 보건대, 남자보다 스무 살 이상 차이 나는, 많게 보면 그의 어머니와 같은 또래의 사람일 거라 짐작했다. 어머니, 라는 단어를 떠올리자 괜히 지나치기 어려워진 그였지만 그렇다고 선뜻 나설 마음도 들지 않았다. 남자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운동을 시작했고 열 바퀴쯤 천천히 공원 안을 걸었다. 남자는 공원을 걷는 내내 개운하지 못한 기분에 사로잡혔고 그 이유가 벤치에 누워 있는 여자 때문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하여 결국 남자는 벤치에 누워 있는 여자를 향해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남자는 그 순간에도 스스로 오지랖이 넓은 거라고 여겼다. 그냥 쉬고 있는 사람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여자의 입에서는 계속해서 예사롭지 않은 신음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남자는 조심스럽고 예의바른 말투로 아주머니, 일어나세요, 라고 말했다. 여자는 아무런 대꾸가 없었고 남자는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갔다. 흔들어 깨울까 했지만 괜한 오해를 받을까 걱정스러웠던 남자는 들고 있던 우산으로 여자의 어깨를 슬며시 찔렀다. 그러자 여자가 움찔하며 몸을 돌렸고 어둠 속에 가려져 있던 얼굴 일부가 드러났다. 눈앞에 나타난 여자의 모습을 본 남자는 자신이 헛것을 보고 있는 건 아닐까 싶었다. 얼굴을 포함한, 여자의 드러난 피부 표면에는 회갈색의 나무껍질 같은 것이 덕지덕지 붙어 있었던 터였다. 여자가 걸치고 있던 옷가지와 신발, 묶어 올린 머리카락이 아니었다면 사람이라 보기 어려울 지경이었다. 여자의 얼굴이라 짐작할 수 있는 자리는 하얀 가루로 뒤덮여 있었다.


중앙공원에서 발견된 여자의 소식은, 이를 목격한 또 다른 이들이 지역 커뮤니티에 게재한 글에 의해서 퍼져 나갔다. 여자의 얼굴이 하얀 가루로 뒤덮여 있었다는 대목에서 사람들은 나무를 떠올렸다. 그 나무는 높이 8미터, 둘레 1.5미터 가량으로 여자가 발견된 중앙공원 중심에 있었다. 중앙공원을 방문하는 사람들 중에, 나무나 꽃에 관심 있는 이들은 그것을 백합나무라고 추정했다. 흔히 플라타너스라고 부르는 버즘나무와 비슷한 생김새였는데, 버즘나무 역시 이 백합나무의 일종이었다. 차이가 있다면 백합나무가 버즘나무보다 두 배 이상 크고, 잎은 버즘나무의 절반 크기로 짙은 녹색을 띠고 있는 점이었다. 나뭇잎은 여러 갈래로 뻗은 가지마다 빽빽하고 무성하게 자리했다. 그 나무는 처음부터 중앙공원에 있던 게 아니었다. 어느 날 갑자기 그곳에 모습을 드러냈다. 본격적인 무더위가 시작되는 6월 말 즈음부터 인근 주민들을 중심으로 많은 사람들이 매년 중앙공원에 모여 더위를 식혔다. 그 나무가 정확히 언제부터 그곳에 있었는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저 어렴풋이 최근에 생겨났다는 사실만 알 뿐이었다. 몇몇 사람들이 나무가 눈에 띄게 된 시기에 대해 이야기하기도 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그건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중요한 건 큰 나무가, 잎이 무성한 나무가 중앙공원에 생겼다는 사실이었다. 여름이었기 때문이다. 날은 갈수록 더워지고 사람들은 보다 큰 그늘이 필요했다. 공원에 다른 나무들이 심어져 있긴 했지만, 구색 맞추기에 지나지 않았다. 사람들은 나무다운 나무가 생겼다며 좋아했다. 그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무성한 나뭇잎을 보며 탄성을 질렀다. 밤이 되면 낮보다 많은 사람들이 중앙공원에 모여들었다. 사람들은 그곳에 돗자리를 펴놓고 쉬거나 맥주를 마셨다. 그곳은 작은 도시였고 사실 공원이라고 부를 만한 것은 그 중앙공원이 유일했다. 그로 인해 Y시에 사는 사람이면 누구나 한 번쯤은 그곳을 방문한 경험이 있었다. Y시의 새로운 주택개발계획으로 이곳과 거리가 약간 떨어진 곳에 신도심이 구성되었다. 중앙공원 인근은 자연스럽게 구도심이 되었고, 이제는 이곳의 주 방문객들은 인근 주민들이 되었다. 그 나무가 생기면서 중앙공원 인근 주민들은 실로 오랜만에 만족스러운 여름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나 한 가지 불편한 점이 있었다. 그것은 나무에서 하얀 가루가 날려 몸과 얼굴에 들러붙는 점이었다. 피부가 간지럽거나 트러블이 일어나지는 않았지만, 쉽게 털어내기 힘들었다. 한번 몸에 붙은 하얀 가루는 오랫동안 씻어내야지만 사라졌다. 가루의 일부는 입안과 귓속, 콧속으로 들어가기도 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것을 꽃가루로 여기며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여름이 끝나 갈 무렵, 혹시 이 가루가 건강에 좋지 않은 건 아닐까, 싶은 생각을 하게 된 한 남자가 이 문제로 시청에 문의를 하게 되었다. 그에게 돌아온 건 예상 밖의 대답이었다.
나무라뇨? 나무 심은 적 없는데요.


지역 커뮤니티 자유게시판에는 중앙공원에서 발견된 여자에 관한 기사와 함께 무슨 의도로 누가 그 나무를 심은 걸까요, 라는 글이 올라왔다. 글쓴이가 직접 찍은 사진도 함께 첨부되어 있었다. 사진에는 나무 뒤편을 막 지나가는 한 중년 남자가 같이 찍혀 있었다. 아기를 가진 부모들이 중심이 되는 그 커뮤니티에 올라온 그 글에는 고작해야 네 개의 댓글이 달렸다.
첫 번째 댓글은 그러게요, 그렇게 큰 나무를 아무도 모르게 심을 수가 있나요. 라는 댓글이었다.
두 번째 댓글에서는 그래도 그 나무 덕분에 여름 잘 보냈는데, 얼굴 없는 천사가 한 일 아닐까요, 라고 달렸다.
세 번째 댓글은 괜히 불안감 조장하지 마시죠.
네 번째 댓글은 뒤에 아저씨 초상권은 어쩔, 이었다.
그 뒤로는 중고 아기용품을 사고파는 글과 몇몇 일상 글 그리고 저녁에 있을 콜롬비아와의 축구대표팀 평가전을 예측하는 글들에 의해 순식간에 밀려났다. 그날 우리 팀은 콜롬비아를 상대로 이례적인 대승을 거두게 되었다. 무려 5:0이었다. 다음날 새벽에는 일 년이나 쓰러져 있던 네모 기업의 회장이 뇌사상태에서 깨어난 기적이 일어났다. 사람들은 이 사실에 다소 놀라워했으나 별다른 호응은 없었다. 사람들은 승리의 기쁨을 핑계 삼아 만든 술자리의 후유증으로 몸살을 앓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지역 뉴스에 짧게 그 여자에 대한 소식이 나왔다. 수도권 소식을 전하는 메인 뉴스가 끝난 다음이었다. 여자의 치료를 담당하게 된 의사가 출연했는데, 그 2분 남짓한 영상 속에서 사람들은 여자의 개인적인 정보들을 얻을 수 있었다. 여든두 살, 혼자 살고 있으며, 근근이 폐품을 팔아 사는 여자였다. 의사는 처음에는 여자가 앓고 있는 병을 나무인간증후군으로 봤다고 했다. 이 병은 인유두종 바이러스에 의해 발병하며 손과 발을 중심으로 산호껍데기, 조개껍데기나 나무껍질 같은 사마귀가 자라는 병이라고 했다. 이 병이 보고된 사례는 전 세계에 대여섯 건이 고작이라고 덧붙였다. 그러나 여자의 증상이 나무인간증후군과 다른 점은 바로 나무껍질 형태의 사마귀만 발병한다는 점과, 이것이 손과 발뿐 아니라 온몸으로 퍼져 나간다는 점이라고 했다. 또한, 기존 인유두종 바이러스가 강력한 전염력을 가지고 있는 것과 달리, 이것은 전염성이 거의 없는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의사는 이것이 나무인간증후군과 유사하지만 결국은 다른 병, 기존 인유두종 바이러스와 다른 변종으로 보고 치료를 진행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의사는 이런 바이러스성 질병 대부분이 면역력이 떨어져 생기는 것으로 과로나 스트레스에 주의하면 충분히 예방할 수 있다고 했다. 설명을 이어 가는 의사의 어깨 너머로 모자이크 처리된 여자의 작고 굽은 등이 보였다.
밥도 못 먹고, 기운도 없어요, 하루 종일 돌아다녀 봐야 만 원 벌까 말까인데…….
인터뷰에 응한 여자는 힘없이 말했다. 그 뒤에는 힘겹게 살아가는 독거노인들의 이야기가 나왔다. 다 무너져 가는 집과 오래되어 쉬어터진 반찬들이 화면에 클로즈업 되었다. 그러고 나서 면역력을 키울 수 있는 방법에 대해 나왔다. 가장 좋은 방법은 면역력에 도움이 되는 음식들을 섭취하는 것이라고 했다. 홍삼과 흑마늘이 나왔다. Y시 사람들은 서둘러 홍삼과 흑마늘을 구입했다.


방송이 나간 후 그 여자를 가리켜 사람들은 나무인간으로 부르기 시작했다. 그렇게 되자 어쩐지 여자는 사람이라기보다 나무에 더 가깝게 여겨지게 되었다. 나무인간에 대해 말할 때면 사람들은 딱딱하게 굳어 갈라져 있던 나무껍질과도 같은 피부를 가장 먼저 떠올렸는데, 그럴 때면 누구나 예외 없이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누군가는 나무인간을 가리켜 징그럽다, 고 표현하기도 했다. 사람들 사이에서 나무인간에 대해 이야기하는 일은 점점 줄어들었고, 특히나 다른 도시 사람들 앞에서는 더욱 그랬다. Y시에는 얼마 지나지 않아 공항이 생길 예정이었다. 그러나 최근 들어 Y시가 아닌 타 도시에 공항이 지어져야 한다는 여론이 스멀스멀 일고 있었다. 그곳은 두 번째 수도나 다름없다는 평가를 받는 곳으로 굴지의 기업들과 특급열차 역 그리고 무려 세 개의 터미널을 (그것도 최신의) 가지고 있었다. 인구가 많은 곳에 공항을 세워야 이용률이 높지 않겠냐는 주장은 꽤 설득력이 있었다. 그에 반해 이곳은 오래된 기차역 하나, 노후 된 터미널 하나가 전부였다. 그런 이곳에 공항이 생길지도 모른다는 소식은 사람들을 기대에 차게 만들었다. 이제 어디에 붙어 있는지도 모르는 이 도시에 사람들이 찾아오고 새로운 일자리가 생겨날 거라는 그런 기대감이 있었다. 그런 와중에 갑작스레 일어난 나무인간의 일은 사람들의 마음속에 오랜만에 찾아온 기회가 무산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을 만들었다. 남자들은 그 사건에 대해 말할 때, 나무인간을 다른 식으로 부르기도 했는데, 이를테면 나무 여자라고 부르는 것이었다. 그건 여자들도 마찬가지였는데, 다른 점이 있다면 '그 여자'라고 강조해 지칭한다는 점이었다.


사람들은 그들에게 알려진 여자에 관한 정보를 바탕으로, 그 여자가 왜 나무인간이 되었는지에 대해 가늠해 보게 되었다. 이런 과정에서 사람들은 그 여자와 자신들의 공통점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되었고, 이것은 스스로가 그 여자 즉 나무인간이 될 가능성이 터무니없이 희박하다는 것을 확인하는 계기가 되었다. 아이들은 너 자꾸 그러면 커서 나무인간 된다, 라는 말에 울며 떼쓰는 일을 멈추기도 했다. 물론 몇몇 아이들은 그 말에 도리어 화를 내며 더 크게 울기도 했는데, 그럼에도 그 말은 대부분 아이들의 훈육에 (협박에 가까웠지만) 도움이 되었다. 특정 계층을 비하하는 말로 사용될 소지에 대해서 우려하는 목소리도 있었지만 이미 그 말은 일파만파로 퍼졌다. 아이들은 서로를 가리키며 나무인간, 나무인간, 놀리기도 했고 급기야 나무로 된 의자에 앉기만 해도 나무인간이라는 소리를 듣게 되었다. 어린아이들 사이에서는 서서 수업을 듣겠다며 자발적으로 일어나는 부류도 생겼다. 급기야 아이들의 성화에 바닥에 앉아 수업을 듣게 하기도 했는데, 집중력이 쉽게 떨어지는 저학년 아이들은 교실 바닥을 굴러다니며 장난을 치거나 잠을 자기도 했다. 이런 문제점이 생기자 학교에서는 나무인간이라는 말을 사용하면 벌점을 주고, 가정통신문을 보내 아이들이 이 말을 사용하지 않게 지도해 달라고 당부했다.


며칠이 더 지난 시점에 출근 중이던 사십대 중반의 남자가 도시의 중심가에서 쓰러지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를 목격한 사람들이 다가가 그를 부축하려고 했지만 그는 이상할 정도로 격한 반응을 보이며 거절했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바지춤을 제대로 여미지 못한 모습이었다. 그는 흘러 내려가는 바지춤을 한 손으로 붙잡고 있었다. 한여름임에도 손에는 하얀 면장갑을 끼고 있었는데, 그의 움직임은 몹시 불편해 보였다. 그를 돕기 위해 사람들이 하나 둘 다가왔다. 그는 그들을 향해 소리를 지르며 다 됐고, 어서 저 지팡이나 달라고 했고, 이를 지켜보던 한 고등학생이 지팡이를 주워서 건네줬다. 지팡이를 짚고 일어서던 그는 다시 쓰러지고 말았는데, 결국 이를 보다 못한 행인들 중 한 명이 119에 신고를 했다. 제발 잠깐만 계세요, 라는 사람들의 만류에도 그는 출근해야 한다며 고집을 부렸다. 나이가 지긋한 노인 하나가 가장은 아파도 회사를 나가야 되는 거라우, 라고 했고 (그가 가장인지 아닌지 확인된 사실이 없음에도) 몇몇 사람들이 이에 동조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가까스로 자리에서 일어나 걸음을 옮기던 그는 그만 손에 쥐고 있던 바지춤을 놓치게 되었다. 이를 바라보던 사람들의 입에서 비명이 흘러나왔는데, 그의 하반신 엉덩이 바로 아래까지의 피부가 딱딱한 나무껍질처럼 변해 있던 탓이었다.


앞선 남자의 사례를 통해 사람들은 병에 걸리게 되면 단순히 피부가 나무껍질처럼 변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움직임까지 둔해지고 불편해진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사람들은 혹시 자신이 병에 걸리지는 않을지, 결국 언젠가는 병에 걸려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되는 건 아닌지 걱정스러웠다. 그러면서도 마음 한편에는 다른 사람은 몰라도 자신만은 병을 피해 갈 수 있을 거라는 은근한 자신이 있었다. 또한, 전염력이 거의 없다, 고 말한 의사의 말을 신뢰했다. 병에 걸리지 않은 사람들은 병에 걸린 사람들에게는 어떤 문제가 있을 거라고 짐작했다. 점점 물건을 놓치거나 넘어지는 사람들이 늘어 갔다. Y시의 파손보험 및 실비보험 가입률은 폭증했다. 며칠이 더 지난 시점에는 횡단보도를 건너던 사람이 앞사람과의 보폭을 유지 못해 도미노처럼 넘어지는 일이 발생하기도 했다. 이 일은 맞은편에서 오던 차량들의 8중 추돌로 이어지며 큰 사건이 되었다.


병에 대해 여러 가지 말이 돌았다. Y시가 분지인 점이 병의 원인이란 이야기도 있었다. 여름내 평균 온도가 높은 점이 몸을 말라붙게 만든 건 아닐까 하는 의견이었다. 이에 따라 사람들은 전보다 자주 물을 마셨다. 로션과 선크림을 듬뿍 바르고 모자와 선글라스, 마스크를 쓰고 다니기도 했다. 그러나 이런 의견은 하나의 가설에 불과할 뿐이었으며 항간에 유행하던 예방법 역시 소용이 없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피부 여기저기가 딱딱하게 굳어 가는 사람들은 줄어들지 않고 늘어날 뿐이었다. 시에서는 시민들에게 증상이 의심되면 바로 병원을 찾으라고 안내 문자를 보냈다. 환부가 넓어지면 치료도 쉽지 않고 어쩌면 치료가 불가능해질 수도 있다고 했다. 불가능이라는 말은 사람들을 병원에 찾아가게 만들었다. 병이 꽤 진행된 상태에서 병원을 찾게 된 이들이 적지 않았는데, 그것의 가장 큰 이유로는 실직에 대한 불안감, 구직에 대한 부담감과 소외당할지도 모른다는 걱정 때문인 것으로 알려졌다. 하반신을 드러낸 남자의 일은 회사에서 특히 크게 회자되었다. 이 일에 대해 각 회사의 관리자급 이상의 사람들은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자기 관리도 회사 생활의 중요한 덕목이라고. 사람이 병에 걸릴 수 있지만 사실 병에 걸렸다는 것 자체가 이미 자기 관리를 소홀히 했다는 증거라고 했다. 회사는 거대한 조직이며 이 조직이 제 기능을 하기 위해서는 직원들 모두가 각자 맡은 역할에 최선을 다해야만 한다고 했다. 누구 하나가 빠져버리면 조직이 제 기능을 하기 어려운 게 사실이지 않으냐고 되물었다. 주로 이십대 중후반부터 삼십대 중반의 직장인들은 상사로부터 이 말을 한 번 이상 들은 것으로 나타났다. 그로 인해 몸이 아파도 누구 하나 섣불리 말하기 힘든 분위기가 조성되었고, 사람들은 병원에 가는 등의 적극적인 치료를 포기하게 되었다고 했다. 대신 늦은 시간까지 회사에 남아 있다가 자정까지 하는 당번 약국에 들러 피부를 부드럽게 만드는 크림을 바르고 환부를 가리고 다녔다고 했다. 실제로 크림을 바르는 즉시 피부가 얼마간 부드러워졌고 그것이 사람들에게 나을 수 있다는 희망을 줬다. 그러나 그것은 일시적인 효과에 불과했고 피부는 점점 더 딱딱하게 굳어 가기만 했다. 불편함을 정신력으로 극복하며 그렇게 하루하루 버틴 것이 병을 키우는 꼴이 되고 만 것이다.
직장에서의 문제와 다르게 소외당할지도 모르는 걱정은 아이들 사이에서 더욱 크게 나타났다. 아이들에게는 학교가 생활의 전부나 다름없었다. 특히나 친구들과의 관계는 아이들에게 중요했다. 아이들이 자신들의 문제를 부모에게 털어놓는 일은 드물었다. 병에 걸린 아이들은 신뢰할 수 있는 소수의 친구들과 (그래 봤자 같은 아이들에게) 이 문제를 논의하며 방법을 찾았다. 그리하여 아이들은 몸을 부드럽게 만들기 위해 식초나 식용유를 마시거나 바르기도 했고, 뜨거운 물속에 오랫동안 들어가 있기도 했다. 아이들은 부모의 손에 이끌려 병원에 오게 되었는데, 그 이유는 피부병이 아닌 배탈이나 호흡곤란에 의한 것이었다.


환자들이 속출하자 시에서는 뒤늦게 병의 발생 원인에 대해 역학조사에 들어갔다. 병이 발현된 환자들이 공통적으로 중앙공원을 방문한 적이 있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그 과정에서 국유지인 공원에 누군가 무단으로 나무를 심었다는 사실이 본격적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해당 나무에서 하얀 꽃가루가 나왔다는 시민들의 증언을 바탕으로 조사가 진행됐다. 중앙공원은 한시적으로 접근 금지 조치가 내려졌다. 평소 중앙공원을 가로질러 다니던 인근 주민들이 바깥쪽으로 멀리 돌아가야 한다며 불편을 호소하기도 했다. 한편 시에서는 나무가 과연 질병을 일으킬 수 있는 원인의 소지가 있는지에 대해 연구기관에 의뢰했다. 또한, 나무가 언제, 무슨 목적으로 누구에 의해서 심어진 것인지에 대해서 기관의 수사가 이루어졌다. 시는 처음 시민의 제보를 받고도 미온적인 태도를 취한 관련 공무원에게 책임을 물었다. 9급 공무원인 그에게는 3개월 감봉 처분이 내려졌다.


보름이 지난 시점에 연구기관은 보고서를 통해 해당 나무가 지금까지 확인되지 않은 새로운 종이라고 밝혔다. 생김새만 백합나무와 비슷한 것뿐이었다. 사람들이 막연하게 꽃가루라 여겼던 하얀 가루는 정체불명의 분진으로 밝혀졌다. 분진 샘플을 채취한 결과 미생물이 발견되었으며, 이것이 바로 병을 일으키는 주요한 원인은 아닌지에 대한 실험이 이루어졌다. 쥐를 대상으로 이루어진 이 실험의 내용은, 실험체를 직사각형 아크릴 우리에 넣고 하루 3시간씩 일정량의 분진에 노출시키며 경과를 지켜보는 것이었다. 이틀째까지 별다른 변화가 없던 쥐는 사흘째 되자 탈모가 일어났으며 닷새째 되자 피부 표면이 나무처럼 딱딱하게 변했다. 변이가 일어난 부분들, 특히 그곳이 손이나 발인 경우에는 확연하게 둔한 움직임을 보였다. 그 뒤 감염된 쥐를 분진에 노출되지 않은 건강한 쥐의 우리로 옮겼는데, 서로간의 감염은 일어나지 않았다고 했다. 일주일이 되자 감염된 쥐는 뻣뻣하게 말라 가며 흡사 작은 나무 조각처럼 변해 갔다. 실험 팀은 몸이 나무처럼 변한 쥐의 피부 조직 일부를 잘라내어 과연 이 조직의 세포들이 어떤 상태인지 확인에 들어갔다. 그 결과 놀랍게도 피부 조직에서 증산 작용이 제대로 일어나지 않는 나무와 같은 움직임을 목격할 수 있었다. 증산 작용이란 나무의 뿌리가 물을 빨아들이는 동시에 잎 뒷면에서는 수분을 증발시키는 과정이다. 이 과정은 나무의 광합성 및 일정량의 열기를 빼앗아 가는 역할을 해 한여름에도 잘 견딜 수 있게 만들어주는 것이다. 증산 작용이 제대로 일어나지 않으면 나무가 말라 죽는데, 이것과 마찬가지로 나무인간으로 변한 사람들이 적절한 치료를 받지 않는다면 결국 몸에 수분이 돌지 않게 되고, 마침내 뻣뻣하게 말라 죽어갈 수도 있다고 했다. 실험 샘플이었던 쥐의 피부는 환부를 도려내도 이미 바이러스가 혈관을 타고 퍼진 상태라 계속 번져 나갈 뿐이었다. 근본적인 치료를 위해서는 바이러스를 치료할 수 있는 치료제가 있어야 하는데, 효과적인 치료제를 찾고 있는 중이라고 했다. 현재로서는 소염제나 연고 처방, 수액과 같은 방법으로 병의 증상을 완화시키고 있다고 했다. 또한 수사기관은 이 나무를 누가 심었는지에 대해 조사했지만 아무런 단서도 발견할 수 없었다.


중앙공원의 나무는 소각 처리하기로 결정했다. 방진복을 입은 공무원들이 나무를 절단해 방사성 폐기물을 다룰 때 사용하는 특수 용기에 담았다. 이렇게 담긴 나무 조각은 도심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위험폐기물 전용 소각장으로 이동됐다. 중앙공원은 폐쇄 조치가 내려졌다. 공무용 차량이 돌아다니며 도시 곳곳을 방역했다. 매캐한 소독약 냄새가 구석구석 스며들었다. 이로 인해 도시는 곳곳에 희붐한 안개가 끼었다. 시에서는 가정마다 방문하여 혹시 병을 앓고 있는 사람은 없는지 확인했다. 그 결과 짐작했던 것보다 훨씬 많은 수의 나무인간들이 있었다. 그들은 감염 사실을 숨기며 살아가고 있었으며, 환부를 가리기 위해 무더운 날씨에도 긴 옷을 입고 다니는 경우가 많았다. 그들은 자가 치료를 한 것으로 알려져 있었는데, 이것은 병의 악화를 불러왔다. 고보습 로션이나 스테로이드 연고, 바셀린을 바르는 것이 예사였다. 심하게는 그들은 화분에 심어지기도 했다. 볕도 들지 않는, 집 안 구석진 곳에 놓이게 된 그들은 영락없이 나무처럼 보였다.
시에서는 나무인간들을 병원으로 옮겼다. 금세 규모가 큰 병원들의 입원실이 가득 찼다. 급기야 시의 가장 외곽에 자리한, 부실운영으로 폐교된 한 종합대학의 건물을 한시적으로 치료소로 이용하기로 결정했다. 하루가 멀다 하고 많은 나무인간들이 시 외곽으로 실려 나갔다. 치료소로 이송된 나무인간들은 가족들의 면회가 허락되지 않았다. 전화나 문자를 통해 안부 묻는 것만 가능했다. 환자 이송용 차량이 부족해 시에서는 사람들을 버스에 실어 나르기로 결정했다. 이에 시내버스와 관광버스 회사에서는 거절 의사를 밝혔다. 시에서는 방역 및 소독을 철저히 해서 돌려주겠다고 했지만 미덥지 않다는 반응이었다. 결국 시는 공무용 차량을 이용해 사람들을 날랐다. 주로 공무용 일 톤 트럭이 사용됐다. 나무인간들은 트럭 짐칸에 태워졌다. 여러 번 운행하기가 여의치 않아 불가피하게 한 번 태울 때 최대한 가득 태워 옮겼다. 길을 지나가다 보면 나무인간들을 태운 트럭을 쉽게 발견할 수 있었는데, 짐칸에 실린 그들의 눈빛은 몇 해 전 살처분 처리를 위해 어디론가 향하던 돼지를 떠올리게 했다.


수도를 중심으로 흐르는 강변 가까이 지어진, 가장 호화로운 고층 아파트가 부실공사의 위험이 있다고 밝혀진 날 저녁, Y시의 소식이 전국으로 알려졌다. 타 도시 사람들은 벌써 몇 달 전부터 이런 상황이 일어나고 있었다는 사실에 놀랐다. 친인척 방문이나 업무상의 일로 Y시에 왔던 사람들은 자발적으로 병원을 찾았다. 줄지어 병원을 찾는 사람들의 모습이 연일 방송에 나왔다. 또한, Y시의 모습을 담은 동영상이 인터넷에 돌아다녔다. 나무인간들이 거리를 활보하는 모습이었다. 무슨 일인지 그들은 몹시 화가 난 것처럼 보였고 이따금 괴성을 지르는 이들도 있었다. 나무인간들이 빠른 속도로 뛰어다니면서 감염되지 않은 이들을 공격하는 모습이 이어졌다. 이것을 본 타 도시 사람들은 하나같이 끔찍하다고 여겼다. 동시에, 자신들의 도시에서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음을 감사히 여겼다. 수도에서 일어난 대규모 부실공사는 Y시의 상황에 비하면 별일 아닌 것처럼 여겨질 지경이었다. 네모 그룹 계열 건설사의 프리미엄 아파트에 대한 대대적인 검열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한 내부고발자의 인터뷰가 모자이크 처리로 방영되었지만 순식간에 묻혔다. 사람들은 연일 Y시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어딜 가나 Y시의 일이 화제로 올랐다. 해당 건설사가 정계 인사들에게 접근해 무리하게 공사허가를 받으려고 했던 정황에 대한 후속 보도가 이어졌지만 그것은 금세 사그라지고 말았다. 사람들은 매일같이 이곳의 영상을 찾아봤다. 버스나 지하철에서 이곳의 상황을 실시간으로 보고 있는 사람들이 많았다. 재난영화의 한 장면을 떠올리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그 영상 속에서는 작고 낙후된 도시의 모습이 적나라하게 보였다. 이런 도시가 있는 줄 몰랐다는 반응이 지배적이었다. 영상에 코멘트를 달 수 있는 곳에 익명의 누군가가, 이것이 Y시에서 촬영된 것이 아님을 지적했다. 영상 속에는 머스크라는 이름의 카페가 등장하는데, 이곳은 Y시에서 80킬로미터나 떨어진 곳에 위치한 카페였다. 해당 영상은 곧바로 삭제됐다.


많은 사람들이 감염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감염되지 않은 사람들의 수도 절반 이상이었다. 중앙공원이 있는 구도심 주변에는 연식이 오래된 아파트가 많았다. 감염자의 대다수가 이곳의 거주민이었다. 반면 감염되지 않은 이들은 주로 공원과 먼 거리에 떨어져 있는 신시가지에 지어진 주상복합 아파트에 살고 있었다. 이들은 아파트 안에 편의시설과 여가시설이 있어 구도심까지 올 일이 없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더위를 식히기 위해 멀리 갈 필요 없이, 아파트 옥상에 있는 수영장에서 피서를 즐긴 것으로 알려졌다. 또한 상당수의 주민들은 정반대 날씨의 먼 나라로 여행을 간 것으로 밝혀졌다. 이들은 자신들이 Y시에 살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잠재적인 병자 취급을 받는다는 것에 무척이나 불쾌한 입장이라고 했다. 이들 중 일부는 이미 다른 곳으로 이주할 예정이었다.


Y시의 상황이라며 올라온 무수히 많은 영상들은 시간이 지나자 대부분 거짓으로 판명되었다. 실제로 나무인간들은 빠르게 뛸 수 없었다. 그들은 병이 진행됨에 따라 움직임이 느려지고 둔해졌고, 신진대사 기능도 느려졌다. 그럼에도 이미 타 도시 사람들은 나무인간들을 무자비한 괴물과 같은 존재로 여기게 되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이상한 오해가 늘어났고 그것은 기정사실화 되었다. 이를테면, 나무인간과 스치기만 해도 병에 걸린다는 거였다. 대화를 하거나 마주 봐도 걸릴 위험이 있다고 했다. 이런 소문들과 함께 지역 굴지의 기업이었던 한 타이어 회사는, 매출이 급감하게 되었다. 대기업이 시장을 독식하던 과정에 후발주자로 빛나는 성과를 내던 이 기업은 존폐 위기까지 거론되면서 내부에서는 회사를 이전해야 하는 거 아니냐는 이야기까지 나오고 있다고 했다. 실제로 지역 내 기업들은 이미 하나 둘 이곳을 떠나고 있었다. 빈 상가와 건물들이 생겨났고 도시의 땅값은 터무니없이 내려갔다. 일부 지역은 한 구획이 거의 통째로 비어버리기도 했다.


도시는 폐허나 다름없이 변했다. 시장은 막대한 책임을 통감한다며 물러났다. 부시장이 시장의 대리인 역할을 하게 되었다. 사람들은 부시장이라는 것이 존재하는지도 몰랐고, 그가 과연 누구인지도 몰랐다. 이곳 사람들에게는 그가 유령이나 다름없이 여겨졌다. 그에 대해 알려진 거라고는 곧 은퇴를 앞둔, 공직 사회에 오랫동안 몸을 담은 정통 관료 출신이라는 거였다. 누군가는 그가 정석대로 일을 하는 스타일이라고 했고, 또 누군가는 그를 가리켜 독단적이라고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믿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는데, 그것은 바로 네모 그룹이 새로운 공장 부지로 이곳을 점찍었다는 거였다. 네모 그룹이 새롭게 도전하는 바이오 제약회사로 백신과 같은 의약품을 개발하고 생산할 거라고 했다. 사업 내용 발표를 위해 네모 그룹 회장이 오랜만에 카메라 앞에 모습을 드러냈을 때, 사람들은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죽은 거나 다름없다고 했던 네모 그룹 회장은, 그의 아들인 부회장보다 건강하고 생기가 도는 모습으로 나타났다. 휠체어에 타고 있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그는 단상에 서서 말하기를, 바이오 계열 사업은 네모 그룹의 염원사업이라고 말했다. 또한 이것은 인류를 위한 사회환원 사업의 일환으로 본다고 했다. 그런 취지로 인해 공장 부지를 Y시로 정한 거라고 덧붙였다. 그는, 이곳 시민들의 아픔을 통감하며, 앞서 말한 목적에 맞게 자신들이 개발한 치료제를 무상으로 나눠 줄 것이라고 이야기했다. 또한 시와 협력해 Y시를 근사하게 탈바꿈할 계획이라고 덧붙였다. 그의 말투는 어딘지 모르게 전혀 다른 사람이 말하는 것같이 들렸다. 차분하고 냉철했던 평소와 다르게 그는 다소 흥분한 듯 보였다. 그는 몇 번인가 할 말을 잊어 옆에 있는 비서관이 귓속말로 그 다음 말을 알려주기도 했다. 겨우 말을 끝낸 그가 단상으로 내려갈 때, 한 기자가 다시 젊음을 찾은 비결을 물었다. 그는 준비라도 한 듯이 주머니에서 손바닥 반 사이즈의 원형 약통을 보여줬다. 그것은 곧 네모 그룹에서 출시한 '혈청'이라는 이름의 혈압 조절 보조제라고 했다.


이틀 뒤, 네모 그룹은 약속대로 Y시에 치료제를 무상으로 공급했다. 몇몇 사람들은 과연 네모 그룹이 어떤 이유로 치료제를 개발하고 있었는지 의문을 품기도 했지만, 선의를 선의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태도라며 비난받았다. 치료제는 열두 시간 간격으로 하루 두 번 주사기를 통해 투약되었다. 처치 후 삼일쯤 지나자 환부의 크기가 손바닥만 하게 줄어들었고, 일주일쯤 지나자 주먹 크기로 줄어들게 되었다. 사람들의 몸은 평소와 같은 상태로 돌아갔다. 놀라운 성과였다. 그러나 사람들의 사고력이 다소 떨어지는 부작용도 발견됐다. 이 문제에 대해 의사들은 치료제의 부작용이라기보다 병의 후유증으로 보는 것이 맞는다는 견해를 밝혔다. 사실 일상생활을 지속하기 어려운 수준까지 사고력이 떨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시장을 보거나 간단한 계산, 사람들 간의 일상적인 대화에서는 드러나지 않았다. 문제가 생긴 건 토론과 논쟁이 이루어지는 경우였다. 상황에 맞는 적절한 단어를 사용하거나 자신의 입장을 대변할 수 있는 조리 있는 말을 하는 데 곤란함을 겪었다. 처음 사람들은 이런 상황에 대해 적잖이 당황했고, 어른이나 아이 할 것 없이 눈물을 터트리기도 했다. 시간이 지나자 그들은 의식적으로 논쟁을 피했고, 더 이상의 논쟁이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그러한 점을 도리어 기쁘게 여기기까지 했다. 그렇게 되자 아무도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


대부분 치료가 가능했지만 그렇지 않은 이들도 있었다. 치료제로도 치료가 쉽지 않은 중증의 나무인간들. 이 부류의 사람들은 네모 그룹 산하의 메디컬 센터로 이송되었다. 이들의 수는 전체 환자 비율의 일 프로도 되지 않는 수준이었다. 조사 결과 이들에게는 공통점이 있었는데, 그것은 다름 아닌 병의 진행상황을 보며 염려해 줄 만한 가족이나 친지가 없다는 점이었다. 이들은 개인적인 가정사나 사고, 지병으로 가족과 일찍이 헤어졌거나,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대부분 오랫동안 혼자 생활해 온 것으로 알려졌다. 이들은 이미 어떤 의미에서는 세상을 등지고 사는 것과 다름없었으므로 살아가는 것에 큰 의미를 두지 않았다. 그리하여 대다수가 치료 거부 의사를 밝혔음에도 시와 네모 그룹에서는 이들의 치료를 강행했다. 이들은 최신 의료장비를 갖춘 최고의 의료진에게 극진한 치료를 받게 되었다. 의료진은 이들에게 환자분, 선생님이란 호칭을 사용하며 진료했다고 한다. 이곳에 입원한 이들은 스스로도 포기해 버린 자신의 존재 가치를 다시 되돌아보기도 했다. 그것에 한 몫 한 것은 이곳에 있는 넓고 쾌적한, 호텔 객실과 견주어 봐도 손색없는 입원실이었다. 이 중증 환자들은 모두 일인실을 사용했다. 간호사와 직원들 역시 이들의 말 한 마디 한 마디를 귀 기울여 들었다. 이들 모두에게는 개인 간병인이 있었다. 센터는 몸이 굳어 제대로 이동하지 못하는 이들을 위해 맞춤형 휠체어를 특수 제작했다. 이 휠체어는 L자형 카트로, 흔히 마트 창고에서 매장으로 물건을 옮길 때 사용하는 L카라는 것과 비슷한 생김새였다. 안전성을 고려해서 막대기 형태의 지지대와 허리벨트를 추가로 설치했다. 점심시간 이후에는 산책 시간이 주어졌는데, 센터의 중심에 있는 센트럴 파크라는 이름의 중앙공원은 이 시간이면 특수 휠체어에 실려 나온 환자들로 붐볐다. 뻣뻣하게 실려 있는 환자들은 이들이 입고 있는 환자복만 아니라면 영락없는 나무로 보일 지경이었다. 극진한 대접 속에서 이들은 점점 센터를 신뢰하게 되었다. 이들은 치료 목적으로 센터에서 시행하는 다양한 임상실험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약물과 방사선 치료와 같이 익숙한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중증 환자들은 어느 정도 치료가 되었다. 평균 한 달간의 입원 치료를 마친 뒤에는 일괄적으로 센터의 깊숙한 곳에 자리 잡은 집중관리실로 이송되었다. 그것이 최종 치료 단계였다. 이곳에서 어떤 형태의 치료가 이루어지는지 알려지진 않았다. 센터에서도 기밀사항이라며 함구했다. 치료를 받은 환자들을 수소문해 알아보려 했지만 어느 누구와도 연락이 닿지 않았다. 이 점에 대해서 센터 측은 이들이 모두 사회로 돌아갔으며, 이전의 생활을 청산하여 새 사람으로 살고 있다고 했다. 이 부분에 대해 끈질기게 취재를 하는 몇몇 기자들에게만 특별히 센터 측의 허락 하에 유선상으로 인터뷰가 가능하게 했다. 그것뿐이었다. 어느 누구도 이들을 직접 만날 수 없었다.


도시의 쇠락과 장기간 치료로 직장을 잃은 이곳 Y시 사람들에게는 산책이 유일한 일과였다. 태양빛이 절정에 달하는 정오가 지날 즈음에 사람들은 약속이나 한 듯이 느릿느릿 산책을 나왔다. 도시 곳곳에는 새로운 건물들이 속속 생기기 시작했다. 모두 네모 그룹의 건물들이었다. 수도에만 있는 대형마트와 백화점 건물들도 들어설 예정이라고 했다. 길을 걸으며 사람들은 건물들이 지어지며 서서히 윤곽을 드러내는 모습에 시선을 빼앗겼다. 그들은 이러한 광경을 몇 분이고 멈춰 서서 바라봤다. 그들이 뭔가에 집중해 있을 때면 입이 벌어졌는데, 그로 인해 이상하리만치 얼이 빠져 보였다. 산발된 머리카락과 너저분한 옷을 입은 사람들의 그림자가 인도를 가득 메웠다. 그들의 그림자는 한 무리의 나무 떼처럼 보였다. 특히 바람이 나부낄 때마다 제멋대로 기른 머리카락이 흔들릴 때는 더 그렇게 보였다.


모든 일이 마무리되어 갈 즈음 수도에 있는, 진보적 색채의 일간지에 몸담고 있는 기자는 한 통의 전화를 받게 된다. 기자는 나무인간의 발생과 네모 그룹의 관계를 미심쩍어하며 이와 관련된 기사를 수차례 낸 인물이었다. 몇 번인가 누구세요, 라고 물어도 대답이 없어 그가 전화를 끊으려는 찰나 수화기 너머로 가쁜 숨소리와 함께 공중전화의 동전 떨어지는 소리가 함께 들려왔다고 했다. 그는 다급한 목소리로 자신이 센터에 입원해 있던 중증 환자임을 밝혔다. 그는 현재 센터 직원들을 피해 도망치고 있다고 했다. 전화는 도중에 끊어질 수 있으며 그는 기자와의 만남을 희망한다고 했다. 그는 센터에서 중증 환자들의 각 신체 부위를 (어쩌면 장기들까지도) 부속품으로 가공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하루에도 몇 번씩 거짓 제보를 받는 기자였기에 그의 말을 신뢰할 수 있는 증거가 뭐냐고 물었고 그는 놀랍게도 (한편으로는 어이없게도) 그것은 자기 자신이라고 했다. 자신이 바로 센터의 마지막 치료를 받은 사람이며 가공되기 직전에 도망쳤다는 것이다. 오랜 기자 생활을 통해 사람의 목소리로 진정성 여부를 알아차리게 된 기자는, 그의 말을 신뢰하기로 했다. 그는 그와의 만남을 약속하고 전화를 끊었다. 그는 이 사실을 곧바로 편집국장에게 알렸다. 함께 녹음파일을 듣던 편집국장은 다른 기자 하나를 더 불렀다. 그 기자 역시 하나의 제보를 받았는데, 그것은 다름 아닌 처음 나무인간으로 발견된 그 여자가 실종되었다는 것이다. 그 여자의 실종과 네모 그룹 회장이 혼수상태에서 깨어난 것 사이에 깊은 관련이 있다고 했다. 세 사람은 모여 두 개의 녹음 파일을 들으며 센터에서 자신들이 상상하는 것 이상의 일이 벌어졌음을 확신하고 기사화를 시작했다.


다음날, 이곳과 비슷한 규모의 또 다른 도시에서 허가 없이 나무를 심으려던 일당이 적발되었다. 두 명의 삼십대 남자였는데, 그들이 심으려던 것은 놀랍게도 이곳에서 발견된 것과 같은 것이었다. 두 사람은 관할 경찰서에 입건되어 조사를 받게 되었는데, 조사 결과 그들은 심부름센터 직원으로 밝혀졌다. 그들은 한 낯선 사내로부터 각각의 도시에 있는 공원에 나무를 심어 달라는 의뢰를 받게 되었다고 말했다. 그들은 Y시의 나무만큼은 자신들이 심은 것이 아니라고 강력하게 부인했다. 조사 결과 그들에게 의뢰한 사내 역시 또 다른 사내에게서 의뢰를 받은 것으로 확인되었다. 그렇게 의뢰에 의뢰를 거듭해 여섯 명쯤 올라가니 어느 정도 가닥이 잡혔다. 범인으로 추정되는 마지막 의뢰인은 놀랍게도 이제는 거의 망해 가기 직전에 이른 타이어 회사의 상무였다. 사람들은 네모 그룹 관계자가 아닌 타이어 회사의 관계자가 이런 일을 벌였다는 것을 믿기 어려워했다. 이곳 사람들은 막대한 배신감을 느꼈다. 타이어 회사의 상무는 죄송하다는 말만 할 뿐 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타이어 회사는 문을 닫게 되었다. 그곳에서 일하던 사람들은 한순간에 갈 곳을 잃게 되었는데, 이때 그 회사를 네모 그룹이 인수했다. 이렇게 되자 네모그룹에 관한 의혹 기사를 써낸 신문사는 사람들의 비난을 받게 되었다. 사람들은 제보자의 말만 믿고 써낸 기사가 네이트판 판춘문예와 다를 게 뭐냐고 비판했다. 이후 기자가 진실을 주장하며 해당 제보자를 찾았지만 제보자는 종적을 감춘 뒤였다. 약간의 판매부수와 광고 수익 그리고 후원금으로 운영되던 신문사는 후원 중단 의사를 밝히는 전화가 끊이지 않게 되었다. 이로 인해 해당 신문사가 다소 공격적인 기사를 쓰는 일은 잠정적으로 중단되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공항 건설이 시작되었다. 시와 네모 그룹의 합작으로 이루어진 도시 계획은 성공적으로 마무리되었다. 모두가 죽어버린 도시라고 말하던 Y시는 전보다 근사해졌다. 더 넓어진 도로와 빌딩들이 생겼고, 곳곳에는 일자리가 넘쳐났다. 네모 그룹은 Y시 사람들을 우선 채용한다는 결정을 전했다. 이곳 사람들은 원하는 곳을 골라 취직할 수 있었다. 그들이 전보다 빠르고 꼼꼼하지 않았지만 이런 점들은 어떤 문제도 되지 않았다. 많은 사람들이 같은 처지였기 때문이다. 그들은 뭐든지 쉽게 잊고 쉽게 용서했다. 그러자 모두가 웃게 되었다. 심각한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심각한 이야기는 할 수 없었던 탓이다. 해당 질병이 종식됐다는 공식 발표가 이루어졌다. 발표와 함께 네모 그룹의 홈페이지를 비롯한 인터넷을 통해 한껏 달라진 이곳의 모습이 널리 퍼졌다. 타 도시 사람들이 하나 둘 이곳을 찾았다. 그들은 이곳 사람들을 정말이지 단단히 오해하고 있었다는 사실에 놀랐다. 이곳 사람들은 놀랍도록 온순했고 예의가 발랐다. 네모 그룹의 건물들이 들어와서 전보다 땅값이 올랐지만 그럼에도 아직까지는 다른 곳보다 저렴했다. 타 도시 사람들은 이곳으로의 이주를 슬며시 꿈꿨다. 그들은 이곳의 노천카페에 앉아 뉘엿뉘엿 해가 지며 네모 그룹의 빌딩 사이로 붉은 빛이 부서지며 반사되는 것을 바라봤다. 그 모습을 본 사람들은 누구나 감탄했다.


어느 때보다 뜨거웠던 여름이 지나고 제법 쌀쌀한 바람이 불어오기 시작했다. 가을의 풍경이 도시 곳곳에 스며들어 있던 여름의 흔적을 지워 나갔다. 그럼에도 이곳 사람들의 기억에 여름에 있었던 일들이 남아 있었다. 시간이 더 지나더라도, 희미해질지언정 잊기는 어려울 거였다. 그들의 몸 어딘가에, 그들만이 볼 수 있는 곳에 아직 사라지지 않은 나무껍질과 같은 피부 일부가 남아 있었던 터였다. 이것은 쉬이 없어지지 않았다. 이들의 몸 어딘가에 남아 있는 그것이 언제 다시 커질지 모를 일이었다. 사람들을 위해 센터에서는 정기적으로 약을 공급했다. 이들은 다른 걸 제쳐 두고라도 약을 먹는 건 잊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환부는 더 이상 줄어들지도 않았지만 그렇다고 커지지도 않았다. 이들은 대부분 그것이 같은 크기로 유지되고 있다는 사실에 만족했다. 중앙공원은 재건축 조치가 내려졌다. 시민들에게 보다 안전하고 편리한 공원으로 변화할 예정이라고 했다.


이즈음 다른 도시에서 나무인간을 봤다는 소문이 돌았지만 확인된 사실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많은 사람들이 크게 걱정했다. 그 무렵, 네모 그룹의 백신도 완성되었다. 백신은 사람들의 적극적인 요청에 따라 전국의 의료기관에 신속하게 납품되었다. 센터에서는 백신접종을 통해 감염 확률을 10%대 이하로 낮출 수 있다고 했다. 어린아이부터 노인 할 것 없이 모두가 백신을 맞기 위해 줄을 섰다. 백신을 맞은 후, 사람들의 움직임은 어딘지 모르게 둔하게 변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그저 기분 탓이라 여겼다. 자신뿐 아니라 모든 사람들의 움직임이 비슷해서였다. 그렇다면 그것은 큰 문제가 아니었다. 진짜 문제는 따로 있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게 무엇인지 기억해 내지 못했다. 그런 이유로 다 같이 모여서 이 부분에 대해 이야기를 하다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크게 웃었다. 마치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그것이 전부라는 듯이.
















변미나

작가소개 / 변미나

2018년 문학사상 신인문학상 수상.


《문장웹진 2019년 06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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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관리자
  • 2024-07-01
소금 샹들리에

소금 샹들리에 정한아 호주에 사는 김이 오랜만에 귀국해서 친구들이 다 같이 모이기로 했다. 4명이 만나는 건 대략 7년여 만이었다. 방을 잡고 밤새 보자고 해서 오기 직전까지 망설였는데, 남편이 등을 밀었다. 정민이와 자신에게도 내가 없는 날이 필요하다고 큰소리를 치더니 정말 밤새 전화 한 통 없었다. 친구들과는 대학 동기였다. 전공은 문예 창작이었는데, 나는 2학년까지 다니고 학교를 그만뒀다. 그렇지만 정작 작가가 된 사람은 나뿐이라고 친구들이 투덜거렸다. 나는 작가가 아니라고 아무리 말해도 소용없었다. 그들은 십 수 년 전 내가 낸 단 한 권의 책을 기억하는 몇 안 되는 사람들이었다. 세 명 모두 미혼이었고, 아이를 가지지 않았다. 놀라울 정도로 예전 그대로인 친구들 사이에서 나만 철 지난 옷차림에 좀처럼 대화에도 섞이지 못했지만, 그런 것 때문에 마음이 상하지는 않았다. 오랜만의 서울 나들이에 술자리도 즐거웠다. 좋은 친구들이었다. 7년 전 정민이 자폐 스펙트럼 장애 판정을 받았을 때 그들은 자신의 일처럼 울어 줬고, 이후에도 종종 아이의 간식과 선물을 집으로 보내 줬다. 서서히 연락을 거둔 것은 내 쪽이었다. 애써 관계를 유지하는 일이 힘에 부쳤을 뿐, 그들에게 섭섭한 마음은 조금도 없었다. 지난 몇 년 동안 나는 집이 아닌 곳에서 밤을 보낸 적이 없었다. 다들 술에 취해서 침대로 간 뒤에도 좀처럼 잠이 오지 않아 휴대폰만 들여다보았다. cctv 속 거실은 엉망이었다. 엎어진 식판, 사방에 흩어진 블록 조각, 길게 늘어진 옷가지들. 남편은 불도 끄지 않고 아이를 재우러 방에 들어간 모양이었다. 나는 정지화면 같은 그 풍경을 한참 바라보다가 해 뜰 무렵에야 겨우 잠이 들었다. 다음날 우리는 점심을 먹고 헤어지기로 했다. 맛집마다 대기가 길어 종로의 좁은 골목을 돌고 또 돌았다. 앞장서 구글 맵을 보며 걷던 김이 갑자기 작은 서점 앞에서 멈춰 서더니 책을 사야겠다고 말했다. 지난 이사 때 내 책을 분실했다는 것이었다. 나는 집에 돌아가서 책을 다시 보내 주겠다고 김을 달랬다. 다섯 평도 안 되어 보이는 그 작은 서점에 내 책이 있을 리는 만무했기 때문이다. 김은 막무가내로 서점에 들어갔다. 할 수 없이 그녀를 따라 들어갔다가 전면 책장에 전시된 내 책을 발견했다. 죽은 친구를 만났다고 해도 그처럼 놀라지는 않았을 것이다. “미애 씨!” 그곳에서 누군가 나를 불렀다. 우아한 노부인이었다. 린넨 바지에 화이트 셔츠, 큼지막한 호른 목걸이를 한 여자는 환하게 웃으면서 나를 바라봤다. “반장님?” 나는 말끝을 흐리며 물었다. 여자는 성큼성큼 내 앞에 다가와서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나를 와락 끌어안았다. 누군가 나를 그렇게 안은 것이 너무 오랜만이라 온몸에 힘이 풀리는 것 같았다. 그녀는 오래전 나와 함께 공부했던 문우였다. H 백화점 문화센터 소설 창작 교실의 반장. 친구들이 책을 구경하는 사이 나는 그녀와 짧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ldqu

  • 관리자
  • 2024-07-01
그동안의 정의

그동안의 정의 최예솔 작정하고 사라진 사람은 작정하고 찾아야만 한다. 나는 윤정수를 작정하고 찾지 않았다. 보통의 남매 사이라는 게 정확히 어떤 건지는 모르겠지만 윤정수와 나를 그냥 보통 남매, 라고 하기에는 좀 어렵지 않을까. 윤정수는 나보다 4년 먼저 태어났다. 그리 적지도, 그리 많지도 않은 애매한 나이 차이 덕분에 윤정수와 나는 딱히 친해지지 못했다. 내가 초등학교에 입학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윤정수는 중학교에 갔고, 내가 중학생이 되었을 때 윤정수는 고등학교에 갔다. 물론 윤정수와 내가 영 친해지지 못한 건 우리의 나이 차이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윤정수는 내게 없는 사람에 가까웠다. 말수도 없고 센스도 없고 자존심도 없고 공부머리도 없고 돈도 없고······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나? 아무튼 남매 사이에 정이라도 있었다면 걱정이라도 했을 텐데 그럴 이유조차 없었다. 쥐뿔도 없는 윤정수니까. 특이사항이라곤 개그맨 윤정수와 동명이인이라는 것 정도밖에 없는. 그러니 윤정수가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집을 나갔다고 해도 이상할 것 하나 없었지. 뭐 내가 찾는다고 윤정수가 나타났을 거라는 보장도 없지만 나는 막연히, 어련히 때 되면 나타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했다. 하지만 윤정수는 죽을 때까지 나타나지 않았다. 물론 내가 죽은 것은 아니다. 윤정수가 죽었다. 내 나이가 이제 서른이니까, 윤정수는 서른넷에 죽었다. 이제 내게 남은 혈육은 없다······ 아닌가? 고모. 그렇게 부르지 마. 왜요. 낯설어. 저도 고모가 낯설어요. 윤현수는 맹랑하다. 윤정수와 장현아의 딸이라고 해서 윤현수. 그거 좀 유치하지 않니? 물었을 때 윤현수는 뭐 어때요 엄마아빠말곤 모르는데, 하고 대답했다. 이제 나도 아는데? 하니까 이젠 고모도 모르는 척해 달라고 했다. 참 나 어디서 이런 게 굴러왔는지. 현수야. 네. 네 엄마 입국 날이 언제라고 했지? 다음 주 토요일이요. 아직 한참 남았네. 고모도 고모 할일을 해요. 시간 금방 갈걸요. 알겠다 그래. 윤현수를 데리고 온 사람은 장현아다. 이제는 나흘쯤 됐으려나. 아침부터 현관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하도 시끄러워서 나가 봤더니 장현아가 윤현수의 손을 붙잡고 서 있었다. 장현아는 다짜고짜 윤정수를 아느냐고 물었고 나는 오랜만에 듣는 윤정수의 이름에 잠깐 벙쪘다가 네, 저희 오빠네요, 하고 대답했다. 조카입니다. 그날 장현아의 대사를 나는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그건 도저히 내가 아는 사람이 뱉을 만한 말이 아니어서 대사라고밖에는 표현할 수 없겠다. 아직도 문득 의심스러울 때가 있다. 윤현수가 정말 나의 조카가 맞고 장현아가 정말 나의 새언니가 맞을까. 가족관계라는 게 그렇게 단순하게 정리되는 거라면 이제까지 윤정수와 나는, 또 윤정수와 나와 우리의 부모는, 왜 이렇게 흩어지거나 죽거나 혼자 남을

  • 관리자
  • 2024-0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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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1건

  • 하얀머리

    무섭네요..

    • 2024-05-05 16:30:41
    하얀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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