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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환

  • 작성일 2019-11-01
  • 조회수 1,736

[단편소설]



우환



김이설




*


자궁경부 세포검사상 반응성세포 변화가 있습니다.


근주는 검진 결과통보서를 한참 동안 들여다보았다. 반응성 소견 및 감염성 질환, 여러 가지 자극에 의한 세포 모양의 변화가 생긴 것입니다, 의료기관을 방문하여 진료를……. 문장들이 현실성 없게 느껴졌다. 그래도 권고사항까지 꼼꼼히 읽은 후에 검사를 했던 병원에 전화를 걸었다. 보름 전에나 전화예약이 가능한 병원이라는 걸 알았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이었다. 예상대로 이미 예약은 꽉 차 있으니 내원해서 직접 접수 후에 진료 받는 방법밖에는 없다고 했다. 자궁경부암 검사 결과 때문이라고 하니, 접수할 때 다시 말해 달라고 했다. 그렇다고 빨리 진료를 볼 수 있다는 확신은 못 드리고요. 담당자의 덤덤한 어조에 근주는 어쩐지 마음이 놓이는 것 같기도 했다.
학원 설명회에 갔다가 막 돌아온 참이었던 근주는 그제야 싱크대 개수대에서 손을 씻었다. 옷을 갈아입고 곧바로 쌀을 씻어 안쳤다. 곧 아이들이 하교할 시간이었다. 멸치육수를 내는 동안 냉동실의 새우감자전을 꺼내 놓고, 양배추와 깻잎을 씻었다. 저녁은 강된장을 끓이고 양배추와 깻잎을 쪄낼 생각이었다. 새우감자전은 해동 후 기름에 살짝만 부치면 되었다. 우엉조림과 멸치볶음, 어제 먹다 남은 김치볶음까지 내면 얼추 저녁상이 차려질 것 같았다. 식탁 위에는 아파트 관리비 고지서와 몇 가지 우편물, 그리고 결과통보서가 펼쳐져 있었다. 근주는 결과통보서만 따로 챙겨 싱크대 맨 아래 서랍에 넣어 두었다.
6시부터 두 아이와 남편이 30분 간격으로 귀가했다. 저녁 식사와 설거지, 과일 챙기기, 빨래 개기, 작은아이 학원 숙제 봐주기, 큰아이 학원 라이딩을 했고, 집 안 정리를 마치고 아이들 잠자리까지 봐주고서 침대에 누우니 자정이 다 되어 있었다. 남편은 핸드폰을 손에 쥔 채로 잠들어 있었다. 남편의 핸드폰을 빼주는데 환하게 화면이 켜지면서 잠들기까지 보던 화면이 드러났다. 검색창에 자궁암 반응성세포라고 적혀 있고, 의료 관련 블로그가 줄지어 이어지고 있었다.
매일 재활용 쓰레기 버리는 건 남편의 일과였다. 그 길로 담배 한 개비를 피고 들어오는 것이 남편의 오랜 습관이기도 했다. 재활용 쓰레기가 많지 않았지만 근주는 남편을 따라 나가 아파트 흡연 벤치에 같이 앉았다. 거기에서 검사 결과를 전했다. 이야기를 듣자마자 남편은 근주의 어깨를 감싸 안으며 별일 아닐 거라고 첫 마디를 뗐다. 다른 날과 달리 한 개비를 더 피운 남편은 집으로 올라오는 엘리베이터 안에서 병원에 같이 가줄까? 라고 물었다. 남편의 입에서 심한 구취가 났고, 근주는 고개를 저으며 괜찮다고 대답했다.
"큰일 아닐 테니까 미리 걱정은 말자."
그러더니 우리 인생이 그렇게 스펙터클할 리가 없어, 라는 말을 덧붙이며 기어이 웃음을 지었다. 근주는 따라 웃지 않았다.


건강검진을 받은 건 일주일 전 목요일이었다. 아이들의 개학에 맞춰 미리 예약을 해놓은 날이었다. 8월 말이면 늦더위가 기승을 부려야 하는데 이상하게 아침저녁으로 선선했다. 올 해 건강검진 대상자는 홀수 년도 출생자였다. 근주는 1973년생이었고 결혼 20년차였다. 결혼 5년 만에 큰아이를, 3년 터울로 작은아이를 낳았다. 두 아이 모두 딸이었고, 둘 다 자연분만이었다. 초경은 초등학교 6학년 겨울방학 때였고, 생리 주기는 32일쯤 되었다. 자궁경부암을 앓았던 친정엄마 때문에 다른 건 몰라도 자궁암 검사는 2년마다 꼬박꼬박 받아 왔다.
사실 문제라면 다른 데에 있었다. 지방 신도시로 이사를 온 건 작년 여름이었고, 이사 이후에 급격하게 살이 찌기 시작했다. 석 달 동안 약 15킬로그램이 불었다. 몸이 편해서가 아니었다. 생전 발 디뎌 본 적 없는 곳으로의 이사는 근주에게 엄청난 스트레스였다. 한창 예민할 나이의 두 아이를 전학시키고, 잘 적응하는지 살피는 것이 제일 힘들었다. 매일 살얼음판처럼 초조하고 불안했다. 아는 사람 하나 없는 곳에서 새롭게 학원을 알아보고, 낯선 마트에 다니고, 새로운 도로를 익혔다. 몸은 물론이고 마음이 느긋한 날이 없었는데도 살이 올랐다. 한 계절 동안 급작스러운 체중 증가는 분명 몸이 보내는 이상 신호일 터였다. 갑상선과 당뇨 검사를 했지만 이상 소견은 없었다.
이상 신호는 예상치 못한 곳에서 시작되었다. 겨울 초입부터 극심한 두통에 시달린 것이다. 매달 PMS 증상으로 편두통은 있어 왔지만, 일상생활이 불가능할 정도의 두통은 처음이었다. 시중에서 구할 수 있는 진통제로 해결되지 않았다. 근주는 딱 일주일 앓고서 병원에 갔다.
혈압이 문제였다. 수축기에 165, 이완기는 100에 다다르고 있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시티 촬영을 해보자는 제의에 근주는 동의했고, 검사를 마쳤으나 머리에 문제는 없다고 했다. 의사는 한번 확인해 볼 게 있다면서 뒷목 부근과 어깨 근육을 만지더니, 아무래도 목 디스크가 아닌가 싶다고 했다. 디스크면 디스크여야지, 그런 것 같다는 건 무언가. 되묻고 싶었지만 근주는 입을 열지 않았다. 원체 질문에 대답을 시원하게 해주는 의사가 아니었다. 엑스레이를 찍었지만 정형외과에서도 딱 부러지게 목 디스크라고 명명하진 않았다.
근주는 혈압약을 처방받고, 그날부터 물리치료를 시작했다. 50여 분 동안 누워서 전기 마사지를 받고 있으면 저절로 신음소리가 나왔다. 일주일간 물리치료를 받고, 혈압약을 복용하니 전고혈압 단계로 떨어졌고 두통도 말끔히 사라졌다. 보름마다 병원에서 혈압약을 처방받기로 했고, 근주는 그렇게 고혈압 환자가 되었다.
보름에서 한 달로 간격을 늘려 약을 처방받게 된 건 연초였다. 혈압약은 처음 양보다 1/3이 줄었다. 대신 고지혈증약과 우루사가 추가되었다. 3개월 만에 다시 한 혈액검사에서 간 수치가 정상이 아니라고 나온 것이었다.
"이 정도면 매일 소주 한 병은 마시는 사람이어야 하는데, 술 먹어요?"
의사는 모니터에서 시선을 떼지 않고 말을 던졌다. 석 달 동안 달라진 건 몸무게가 조금 더 는 것밖에는 없었다. 의사는 마우스를 탈칵거리며 화면을 위아래로 움직이길 반복했다. 근주는 말끔하게 면도가 안 된 의사의 턱을 바라보며 작은 목소리로 2년째 항우울제를 먹고 있다고 말했다. 간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일이라고는 오래 먹어 온 약밖에는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 이유 때문은 아닐 텐데……. 의사는 또 말끝을 흐렸다. 그럼 왜 그런 걸까요? 석 달 전 혈액검사 때는 문제없었잖아요, 라고 물었지만 의사는 대답하지 않았다.
병원은 내과, 이비인후과, 소아과, 정형외과, 소아과, 응급의학과가 있는 2차 진료 기관이었다. 비염 때문에 계절마다 온 식구가 이비인후과를 다녔고, 작은아이 성장통 때문에 정형외과 진료도 받은 적이 있었다. 이비인후과와 정형외과 의사는 친절한 편이었다. 내과의만 유독 무뚝뚝한 편이었는데, 근주는 불필요한 사담을 건네지 않는 점을 좋아했다. 특히 항우울제를 먹는다는 말에 아무런 감흥 없이 대꾸해 준 것에 안도가 되었다. 근주는 아무에게도 정신과에 다니는 걸 말하지 않았다. 남편도 모르는 사실이었다.
자주 피곤하세요? 의사가 처음으로 근주와 눈을 마주치고 물었다. 근주가 그렇다고 했다. 운동은 하세요? 근주는 아니라고 대답했다.
"아이들 있죠?"
뜻밖의 질문이었다. 근주는 네, 라고 짧게 대답했다.
"몇 살이에요?"
"저요?"
"아니, 애들."
"올해 중3, 초등학교 6학년 되는데요."
"10년 뒤여도 엄마가 필요할 나인데. 애들한테 걱정 끼치는 엄마 되고 싶어요?"
근주는 질문의 뜻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 의사가 다시 모니터로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운동하세요, 운동. 10년 뒤에도 애들 보고 살아야 할 거 아녜요."
얼결에 네, 라고 대답을 하고 나오긴 했는데 근주는 의사가 무례한 것인지 무뚝뚝한 것인지 잘 구분이 되지 않았다. 종종 그랬다. 순간적인 판단이 서지 않아 시간이 지난 뒤에서야 깨닫고 나중에 후회를 하거나, 나중에 화가 나거나, 나중에 분노에 차거나, 나중에 슬퍼지곤 했다. 상황에 대해 즉각적인 반응이 느려지기 시작한 건 항우울제를 먹고 나서부터였다. 미친년 머리칼 같은 마음은 고요해졌으나 종이 한 장 자르지 못하는 무뎌진 칼처럼 둔탁해진 것도 그 탓이었다. 문제라면 자궁이 아니라 정신이어야 했다. 차라리 간이었으면 납득이 갔을지도 모른다.
연초부터 3개월 간격으로 소변검사와 피검사를 해왔다. 간 수치는 정상으로 돌아왔고, 혈압약은 가장 작은 조각으로 줄어들었다. 매일 한 시간씩 걷고, 저녁 한 끼를 샐러드로 바꾼 결과였다. 외관으로는 표가 나지 않았지만 체중도 약 3kg 정도 준 상태였다. 위와 대장 내시경 검사 결과 깨끗하다고 했다. 근주는 사뭇 건강해진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 연말까지 미룰 것 없이 건강검진을 받았던 것이다. 산부인과에서 자궁암과 유방암 검사까지 마치자 마치 올해 할 일을 다 끝낸 기분마저 들었다.
유방암 검사는 가슴을 쥐어짜는 통증에 짜증이 치솟았다. 자궁암 검사는 진료 의자 때문에 시작도 하기 전에 불편했다. 여하튼 검사를 한 김에 진료도 받았다. 얼마 전부터 아랫도리가 가려웠는데, 역시나 질염이라고 했다. 균 검사가 추가되었고, 항생제와 소염제, 연고를 처방받았다.
근주는 자신의 배 위에 올린 남편의 다리를 밀어내며 몸을 돌려 웅크렸다. 반복적인 칸디다 질염 때문일까. 몇 해 전에 아이를 지운 것이 문제였을까. 설마 이십대 초반에 아무렇게나 어울렸던 몇몇 남자애들 때문은 아니겠지. 인터넷에는 너무 많은 정보가 있었다. 근주는 그 중에서 마음에 드는 걸 골라 믿기로 했다. 반응성세포 변화가 있다는 말은 아직 뭔지 모른다는 의미로 받아들이라는 것이었다. 단순한 관찰 결과라는 것. 불안이 사라지진 않았지만 적어도 지레 괜한 추측은 말자고 마음먹을 수 있었다. 남편이 뒤척이며 근주를 등 뒤에서 안았다. 잠결에 남편의 손이 근주의 파자마 바지 속으로 들어왔다. 근주는 남편의 팔을 잡아 뺐다. 좀처럼 잠이 올 것 같지 않아 내친김에 침실을 나섰다. 근주는 소파에 누워 밤새 텔레비전을 보았다. 새벽녘에 잠깐 잠이 들었다가 작은아이가 화장실에 가는 소리에 깼다. 다른 때보다 이른 시간이었지만 일어난 김에 아침밥을 안치고 샤워를 했다.


*


진료 시작인 9시에 도착했는데도 대기 번호가 11번이었다. 세 개의 진료실 중에 근주는 여자 의사에게 진찰받고 있었다. 대기실에는 임신한 여자들과 임신했는지 아닌지 표가 나지 않는 여자들이 있었다. 근주 또래의 여자들도 제법 되었다. 근주는 너무 심난한 표정을 짓고 있는 건 아닌지 자꾸 거울을 꺼내 자기 얼굴과 표정을 확인했다.
의사는 간략하게 설명했다.
"반응성세포라고 나왔는데, 이게 세포 변이가 있다는 뜻이에요. 그런데 근주 씨는 염증이 있었잖아요. 염증 때문에 이런 결과가 나올 수도 있거든요. 좀 더 정확도가 높은 검사가 필요해요. 그래서 오늘은 사진을 찍을 겁니다. 경부를 확대 촬영해서 대학병원에 의뢰하는 방법인데요. 사진 판독을 해보면 문제가 있는지, 아닌지 더 정확히 알 수 있을 거니까. 그렇게 해보는 걸로 합시다."
의사의 산뜻한 말투가 마치 별일 아니라는 듯이 들려 근주의 마음이 조금 가벼워졌다. 바지와 속옷을 벗고, 병원에 준비된 긴 치마를 입은 후에 진료 의자에 누웠다. 다리를 벌리고 누우면 간호사가 의사에 맞춰 높이를 조절했다. 의사의 눈높이에 맞게 다리를 벌리고 누운 자세란 언제나 불편하고 모멸스러웠다. 결혼하기 전에도, 아이를 낳을 때에도, 아이를 낳은 지 십 년이 훌쩍 넘었는데도 마찬가지였다.
질이나 자궁경부를 검사하거나 진료 받을 때에 삽입되는 기구의 이물감은 더 말할 것도 없었다. 산부인과 진료 의자에 누울 때마다 근주는 오래전 남편이 했던 질문이 떠오르곤 했다. 산부인과 진료를 받을 때 혹시 성적인 흥분을 느끼느냐는 것이었다. 무지는 얼마나 폭력적일 수 있는지. 공감력이 없다는 건 얼마나 이기적인지. 근주는 퉁명스럽게 쏘아붙였다. 삽입만 되면 흥분된다고 알고 있었어? 남편의 표정은 애매했다. 얼마간 절망스러운 기분이 든 근주는 되물었다. 그럼 탐폰은? 생리 기간 내내 끼고 있는데 일주일간 내내 흥분되어 있을 거 같아? 남편은 대답을 못 했다. 하, 근주는 한숨을 쉬고 말을 이었다. 성폭력 당할 때도 흥분된다고 하겠다? 남편이 말간 표정으로 되물었다.
"흥분된다는 거야, 아니라는 거야. 정확히 좀 알려줘 봐."
좀 불편할 거예요. 의사의 말이 끝나자마자 아랫도리가 뻑지근했다. 여자 의사였고 진료 도구일 뿐인데도 근주는 부끄러운 느낌이 들었다. 두 눈을 질끈 감았다.
큰아이가 태어난 시간은 오후 4시 54분. 양수가 터진 건 새벽 5시였고, 첫 진통은 6시 반쯤이었다. 예정일을 사흘 앞둔, 임신 기간 내내 진료를 보았던 담당의가 휴무였던 일요일이었다. 그날 당직인 의사는 처음 본 남자 의사였다.
아이는 근 열 시간의 산통 후에야 태어났다. 옆에서 벌벌 떨던 남편은 간신히 탯줄을 잘라 근주로부터 아이를 분리시켰다. 첫 목욕 의식도 치러야 했는데, 아이의 몸에 물을 묻히며 생애 첫 축원을 하는 일이었다. 남편이 그때 무어라 말했는지 근주는 이제 기억나지 않는다. 사실 산통의 끔찍함도 잊힌 지 오래였다. 그러나 생생히 기억나는 건 아이를 받은 의사에게 당한 추행이었다.
분만대기실에서 진통과 휴지기를 반복하는 동안 시간마다 내려온 의사는 자궁이 몇 퍼센트 열렸는지 확인하곤 했다. 그때마다 근주는 선뜩한 불쾌함을 느꼈다. 의사는 허벅지 안쪽을 쓰다듬거나, 샅굴 부위를 매만지거나, 엉덩이를 쓸어 올리곤 했다. 근주 옆에는 남편과 엄마가 의사를 쳐다보고 있었다. 의사 옆에는 버젓이 간호사가 서 있었다. 그러니 근주는 자신이 정신이 없어서 착각을 한 거라고 여길 수밖에 없었다.
분만복으로 갈아입는 순간 근주의 몸은 근주의 몸이 아니었다. 자궁을 보겠다며 아랫도리는 무시로 아무렇게나 들쳐 올려졌고, 모유 수유를 위해서라며 아무나 와서 가슴을 주무르고 갔다. 물론 무시로도 아니었고 아무나도 아니었을 것이다. 시간을 확인하며 자궁 문이 열린 정도를 확인했을 것이고, 모유 수유를 세심히 준비하는 담당 간호사의 마사지였을 것이다. 그러나 출산은 세상이 모두 자신을 향해 적의를 드러내고 있다고 여기게 하는 과정이었다. 하는 일도 없이 말만 보태는 남편에게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안 와도 된다는데 굳이 찾아와 눈물을 찍어대는 엄마한테도 울화가 솟구쳤다. 무엇보다도 아이를 낳겠다고 결심하고 정말 낳으러 와 있는 자기 자신에게 가장 화가 났다. 생각이나 판단은 물론이고 논리적으로 납득이 되지 않는 감정까지 마구 엉킨 열 시간이었으나 아이를 낳고 나서는 금세 잊힌 감정들이었다. 그러나 착각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의사의 추행은 16년이 지난 지금도 생생했다. 얼굴이나 이름, 목소리는 전혀 기억나지 않는데 다리 안쪽을 제 마음대로 주무르던 의사의 소름끼치는 접촉만큼은 잊히지 않았다.
그때 낳은 큰아이가 내년이면 고등학생이 된다. 올해 부쩍 자라더니 어느새 근주의 키를 한 뼘이나 역전한 요즘이었다. 큰아이는 며칠 전부터 근주와 냉전 중이었다. 무선 이어폰 때문이었다. 근 20만 원짜리 이어폰이라니. 근주는 아직 중학생에게는 고가의 물건이라 안 된다고 일축했다. 그러자 제 아빠를 조르기 시작했다. 남편은 애가 바라면 사주라고 했다. 늘 그런 식이었다. 애가 저렇게 바라는데 해줘라, 사줘라, 들어줘라, 가줘라, 허락해 줘라. 그럴수록 근주는 더 고집스럽게 안 된다고 말했다. 말로 인심을 얻는 건 아빠고 자신은 살림에 허덕이면서도 매정한 짠순이라는 소리를 듣는 게 근주라고 좋을 리 없었다. 그래도 남편이 하자는 대로 하지 않았기 때문에 전세 아파트라도 살 수 있었다.
냉전이 시작된 건 눈이 마주칠 때마다 사달라고 조르던 큰아이가 급기야 제 풀에 고집을 꺾으며 근주의 속을 긁은 탓이었다.
"아이 씨, 정말 거지같아!"
큰아이가 뱉은 말에 저녁상을 차리던 근주는 고등어구이 접시를 집어던지듯 식탁 위에 내려놓고 눈을 치켜떴다.
"너, 다시 말해 봐. 뭐라고?"
"아, 됐어! 사주지 마! 그깟 거 얼마 한다고!"
수저를 놓던 작은아이가 슬그머니 제 방으로 들어갔다. 근주는 큰아이의 팔뚝을 세게 잡아당겼다.
"뭐, 거지같아? 이게 정말 보자보자 하니까. 너 진짜 거지처럼 한번 살아 볼래!"
"이거 놔! 아파, 놓으라고!"
근주는 손에 더 힘을 주며 큰아이를 노려봤다. 큰아이도 근주의 눈을 피하지 않았다. 큰아이의 얼굴은 점점 벌게지고 턱을 치켜세웠다. 그때 전화벨이 울렸다. 작은아이가 달려 나와 전화기를 확인하더니 근주에게 내밀었다. 엄마, 아빤데. 그 틈에 큰아이가 근주를 밀치고는 제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집 앞인데 사갈 거 없느냐 묻는 전화였다. 근주는 확 짜증이 일었다. 만날 뭘 그리 못 사서 안달인지. 근주는 작은아이가 보는데도 참지 못하고 한숨을 푹 내쉬고 말았다.
진료실을 나와 수납 순서를 기다리는데 아이 울음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출입구 부근에서 서너 살쯤 되는 아이가 엄마에게 팔을 벌려 떼를 쓰고, 기미가 잔뜩 낀 배부른 엄마는 입을 꾹 다물고 아이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이 엄마는 우는 아이를 안아 주거나 달래 줄 여력이 없어 보였다. 간호사가 다가가 아이에게 캐릭터 비타민제를 내밀며 달래자, 아이는 기겁을 하고 제 엄마 다리에 매달려 더 자지러지게 울기 시작했다. 아이 엄마가 끙, 소리를 내며 아이를 들어 안았다. 그러자 울음을 뚝 그친 아이가 그제야 간호사에게 비타민제를 달라고 손을 내밀었다. 대기실 여기저기에서 작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근주는 어쩐지 웃음이 나오지 않았다. 마침 근주를 호명했다.
지난번에는 건강검진이었는데도 예상 못 한 초진 비용에 염증 검사비가 들었는데 이번에도 촬영 검사비가 들었다. 어쩔 수 없이 몇 해 전 실비보험을 해지한 것이 아쉬웠다. 살면서 이렇게 병원에 다니게 될 줄 알았으면 무리해서라도 보험을 유지했을 것이었다. 인생에 가정법은 소용없다는 걸 알았지만 근주는 작년부터 이상 신호를 보내는 몸 때문에 자주 울적해졌다. 이렇게 아프게 될 줄, 이런 검사를 하게 될 줄, 이런 일이 생길 줄 누가 알았겠나, 라는 생각 자체가 얼마나 바보 같은지 근주도 잘 알았다.
남편의 첫 번째 실직은 작은아이를 낳은 무렵이었다. 말단부터 다닌 의류 회사였으나 유명 브랜드 기업에 합병되면서 정리해고가 되었다. 광고 대행업체에서 몇 년, 학습지 회사에서 또 몇 년을 버텼으나 마흔세 살에 다시 실업자가 되었다. 그사이 서울 외곽 20평대 아파트 전세에서 수도권의 전세로 밀려났다. 근주의 남편은 마지막 실직 이후엔 자의 반, 타의 반 근 일 년여 간 방에서 나오지 못했다. 보다 못한 세무사인 남편의 친형이 자기 사무실로 불러들여 일을 시켰다. 한 2년 정도 친형과 일하면서, 사무실에서 알게 된 세무사를 따라 사무실을 차린 것이 바로 작년이었다. 아무 연고 없는 지방 신도시로 이사를 오게 된 것이 그 이유였다.
아끼고 산다고 살았는데 저축은 꿈도 못 꿨다. 2년마다 전세금 맞추는 것에도 허덕여 평수를 줄여 가고, 서울에서도 멀어졌다. 월급만 빼고 세상 모든 게 비쌌다. 보험을 해지했던 건 일 년여 동안 남편의 벌이가 없던 시절이었다. 실직과 재취업 사이마다 수입 공백이 생겼고, 부채는 계속 늘어났다.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줄여도 두 아이의 영어, 수학 학원비를 줄일 수는 없었다. 작은아이가 초등학교에 입학한 해부터 고등학교 급식실의 조리종사자로 일을 시작했지만 근주의 벌이는 네 식구의 생계를 책임질 수 있는 금액이 아니었다. 돈이 들어가는 델 어떻게든 줄이고 없애던 때였다. 매달 들어가는 보험료 몇 만 원이 아쉬운, 볼품없는 환급금보다도 매달 들어갈 돈을 줄이는 것이 시급할 때였다.
그 당시 근주가 제일 힘들었던 건 사실 빠듯한 살림살이가 아니었다. 종종 친구들에게 받은 동남아 국가 이름이 박힌 조악한 열쇠고리나 마그넷, 엽서를 내밀며 우리는 왜 해외여행을 가지 않느냐고 물어보는 아이들의 검은 동공을 마주할 때, 아이의 같은 반 친구가 다닌다는 학원의 수를 세보며 자기도 모르게 학원비의 총액을 계산하는 스스로를 깨달았을 때, 학부모 모임에서 만난 엄마들이 아무렇지 않게 들고 다니던 명품백과 그들이 타고 다니는 자동차와 그들이 살고 있는 아파트 평수를 헤아릴 때마다 근주는 서글펐다. 자신의 곤궁보다 타인의 부유가 근주를 자꾸 쓸쓸하게 만들었다.
그래도 보험은 그대로 둘걸. 부질없는 후회를 쉽게 떨치지 못했다. 큰 병이든 아니든 근주가 가장 걱정하는 건 병명이나 식구들이 아니라 결국 돈이었다. 없으면 아프지 말아야 한다는데. 사십대는 삼십대와 다르다고, 마흔 넘어가면서는 몸이 자기 마음대로 안 된다는 말도 들어왔지만 역시나 남의 일이라고만 여겼던 자신이 얼마나 무지했는지, 얼마나 오만했는지 깨달아 봤자 소용없었다. 이미 늦은 건 아주 늦은 걸까. 근주는 사거리 신호등 앞에서 초록불이 세 번이나 바뀌는 것도 모른 채 우두커니 서 있었다.


*


문자가 도착한 건 추석 연휴 이틀 전이었다.


자궁경부 확대 촬영술 결과 이상 소견이 있으니 내원 부탁드립니다.


명절 장을 보러 막 집을 나가려던 근주는 현관에서 문자를 받았다. 검사한 지 일주일 만이었다. 뭔가 참 안 쉽다는 생각이 들었다. 근주는 마트가 아니라 병원으로 갔다. 대기 인원이 열여덟 명이나 있었다. 근주는 지난번처럼 표정을 가다듬지 않았다. 근심에 가득 찬 표정으로 다급함을 알렸다. 그래도 순번은 줄어들지 않았다. 근주는 기다리다 지쳐 결과가 어떻게 나왔든 빨리 집으로 돌아가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화장실에 네 번 다녀오고, 병원에 비치된 믹스 커피와 둥굴레차, 현미녹차를 마신 후에야 이름이 불렸다. 근 두어 시간 만이었다.
"촬영 결과 세포 변화가 보이네요. 결과 정확도가 높은 조직 검사를 해봅시다."
의사는 이번에도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말했다. 근주는 짐짓 목소리를 높여 물었다.
"그전에 했던 것도 암 검사 아니었어요?"
"맞아요. 그런데요."
의사는 그제야 차근차근 설명을 시작했다.
처음 건강검진 할 때는 면봉에 세포를 묻혀서 검사한 거예요. 위음성률이 높아요. 그래서 지난번에 자궁경부확대촬영, 즉 질을 확대한 사진을 찍었잖아요. 잘 보시는 대학병원 선생님에게 판독 의뢰를 했고, 그 결과 이상 세포가 보인다고 나온 거고요. 오늘은 그 부위의 세포를 떼어내는 거예요. 생검을 하는 거죠. 훨씬 더 정확한 결과를 얻을 수 있으니까. 오늘 검사를 하고 나면 한동안 분비물이 많을 거예요. 아, 오늘 조직을 떼어내면 출혈도 있을 수 있어요. 거즈를 넣어 둘 거니까, 내일 한 번 더 와서 거즈 빼고 소독합시다.
뭐든 빨리 결정이 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근주는 더 이상 질문 없이 진료 의자에 누웠다. 일주일 간격으로 오고 있는데도 적응이 안 되는 자세였다. 의사는 욕조 목욕을 하지 말 것과 성관계도 하지 말라고 했다. 근주는 그냥 혼자 고개를 끄덕였다. 감정 상태가 나락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검사 과정이 다른 때보다 더 불편하고 아파서가 아니라, 병원을 나가면 마트에 들러 장을 보고 시가에 내려갈 생각 때문인지도 몰랐다.
출혈이 멈추지 않은 건 그날부터였다. 출혈이 있을지도 모른다와 출혈을 할 것이다는 다른 의미여야 했다. 처음엔 투명한 분비물이 나오더니, 저녁때부터 피가 비치기 시작했다. 팬티라이너에서 생리대로 바꾼 건 세 시간 만이었다. 생리 혈과 다를 바 없는 양이었다. 남편은 병원에 다시 가야 하는 것 아니냐고 걱정했고, 작은아이는 아프냐고 물었다. 아니, 아프지는 않아. 화장실을 들락거릴 때마다 근주에게 시선을 떼지 못하는 두 아이의 표정이 밝지 않았다. 큰아이의 표정이 많이 누그러져서 근주는 아플 만하다는 생각을 잠시 하려다가 말았다. 말이 씨가 된다는데. 대신 몇 년 고민하던 문제를 해결했다. 두 아이 모두 자궁경부암 예방 접종을 하기로 결정한 것이었다. 12세가 되면 무료로 인유두종 예방 접종을 받을 수 있었는데, 부작용이 있다고 해서 그동안 계속 망설여 왔던 것이다. 차마 입 밖으로 꺼내기 싫었던 가족력이라는 단어가 자꾸 머릿속에 맴돌았다.
근주의 엄마가 자궁경부암이었다. 근주가 갓 대학을 졸업하던 해였으니 근 20여 년 전의 일이었다. 생각해 보니 그 당시의 엄마의 나이와 지금 근주의 나이가 엇비슷했다. 엄마는 자궁적출을 했고, 열세 번의 항암 치료를 받았다. 그러나 결국 난소와 직장으로 전이가 되었고, 예순이 되기 전에 세상을 떠났다. 복학생이던 오빠, 군복무 중인 동생, 가전제품 대리점을 하던 아버지를 대신해 근주가 간병인이 되었다. 항암 치료를 하는 엄마 곁에서 근주는 큰 병이 어떻게 한 가족을 무너뜨리는지 누구보다도 잘 알게 되었다. 병원비로 빚더미에 오르게 된 건 예고된 순서였다. 무엇보다도 다른 식구들이 외면한 간병을 근주 혼자 감당해야 했다. 근주는 3년간의 병수발에서 도망치는 방법에 대해서 골몰했고, 고등학교 동창이었던 남편과 결혼을 하는 것으로 종합병원과 암 환자인 엄마와 다른 식구들의 이기심에서 벗어났다. 회피성 결혼이었다. 근주가 결혼을 한 그 다음해 엄마와 아버지는 이혼을 했다. 근주는 아픈 엄마를 내친 아버지와 연을 끊었지만 오빠와 남동생은 각자 자기 와이프에게 자기들이 할 일들을 맡겼다. 큰올케는 병든 홀시어머니의 임종을 지켰고, 작은올케는 홀시아버지를 모시고 있었다.
"아무래도 자궁암 예방주사를 맞아야겠다."
근주는 오랜만에 큰아이에게 말을 걸었다. 큰아이가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날 밤도 근주는 좀처럼 잠들지 못했다. 엄마가 처음 산부인과를 간 이유가 생리가 멈추지 않았기 때문이었다는 것이 퍼뜩 떠올랐던 것이다. 그러자 옷과 이불, 엄마가 앉았던 자리마다 생리혈이 묻었던 것도 생각나고, 수건을 겹쳐 깔아서 누워 있던 모습이며, 그 수건에 죽은 나비 모양의 빨간 얼룩이며…… 이십여 년 전의 일이, 까마득히 잊고 있던 일이 순식간에 너무 선명하게 떠올랐다. 근주는 생리대를 갈 때마다 엄마에게 괜한 원망이 들었다가도, 한편으로는 끝까지 엄마를 간병하지 못한 벌을 받는 기분이 들기도 했다. 어떤 마음이든지 자기에게조차도 숨기고 싶어 비상용으로 처방받은 안정제를 먹었다.
근주는 다음날 아침 일찍 병원에 갔다. 출혈 중이라고 밝히고 대기 없이 제일 먼저 진료를 받았다. 명절 연휴를 앞두고 있어서 레이저로 지혈 처치를 받았다. 의사 말로는 간단하다고 했지만 세 명의 간호사가 들어가 있는 수술실로 옮겨서 받은 시술이었다. 간간이 타는 냄새가 났고 시간은 10여 분 정도 걸렸다. 아프지 않을 것이라 했는데 온몸에 힘을 준 탓인지, 수술 침대에서 내려오는 데 휘청거렸다. 근주는 수술대기실에서 30분가량 누워 있다가 병원을 나섰다. 사흘 치 지혈제도 처방받았다. 그러나 시술 받은 당일만 좀 진전을 보이더니, 다음날부터 다시 출혈이 시작되었다. 의사가 그럴 수도 있다, 그런 사람들도 있다, 라고 말했으니 그저 멈추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레이저 시술을 마치고 집으로 가는 길에 근주는 지혜의 전화를 받았다. 초등학교 동창이자 근주의 유일한 친구인데 사는 곳이 멀어 일 년에 두어 번 보기도 힘들었다. 근래 산부인과를 들락거리느라 전화 통화도 오랜만이었다.
― 왜 이렇게 연락이 없었어? 어디 아파?
뭘 알고 전화한 사람처럼 아프냐고 물어봐서, 그만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근주는 길 가장자리로 비켜서서 마저 눈물을 닦고, 큰 숨을 쉬었다. 지혜는 말없이 근주가 말할 때까지 기다렸다. 다시 걷기 시작한 근주가 천천히 그동안의 이야기를 했다.
― 네 마음 내가 다 알지. 딱 3년 전에 내가 그랬잖아. 두 달 가까이 피 질질.
― 네가? 그런 적이 있었어? 나한테 말 안 한 일이지?
― 응, 말 안 했었지. 왜, 그쪽 이야기는 괜히 하기 싫잖아.
― 뭐야, 얘기 다 한 나는? 아니, 그래서?
― 너처럼 사진 찍고, 조직검사 하고, 다 했지.
― 별일 없었던 거지?
― 이형성증이라고 하더라. 정상과 종양의 중간 단계 정도? 세포가 종양으로 진행할 위험도 있는 상태라는데 그냥 둔다고 해서 모두 암이 되는 건 또 아니라고 하고. 아무튼 원추절제술이라는 걸 받았어. 레이저 시술도 있다는데 나는 그냥 도려냈지. 맞다! 자궁경부암 예방주사도 맞았어. 더럽게 비싼 주사.
― 그럼 이제는 괜찮은 거야?
― 6개월마다 검사 받지 뭐. 야, 근데.
아파트 입구에 막 들어선 근주가 우뚝 멈췄다.
― 우리 나이쯤 되면 다들 한 번쯤 겪는 일이야. 주변에 자궁에 탈 안 난 엄마들 없고. 그런데 그럴 때 됐어. 30년이 넘도록 생리를 했는데 고장 나야 정상 아니냐? 사는 데 지장도 없고 이제는 쓸모도 없어진 게 아주 진상이야. 이대로 쭈그러들 수 없다! 뭐 이런 발악 같다니까.
근주는 그제야 슬쩍 웃었다. 근주야. 지혜가 근주의 이름을 나직이 불렀다.
― 무슨 일이 생겨도 그거 일 아니야. 괜찮아.
괜찮을 게 하나 없는데. 이미 괜찮지 않은데도 근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다고 대답도 했다. 지혜는 촌스럽게 몸살 같은 거 걸리지 말고 적당히 농땡이 피우다 올라오라는 명절 인사로 전화를 끊었다.
추석 연휴 마지막 날에 큰아이가 생리를 시작했다. 3년째인데도 매번 생리통이 심해 끙끙 앓았다. 그 주 주말엔 안 그래도 곧 할 것 같은 조짐이 보이던 작은아이가 초경을 시작했다. 엄마와 언니 하는 걸 보아 온 작은아이는 예사롭게 받아들였다. 그래도 케이크와 작은 꽃다발로 조촐하게 축하 자리를 가졌다. 남편은 두 아이가 안쓰럽다며 절절맸지만 아이들은 그런 아빠를 귀찮아했다. 그날 밤, 근주는 인터넷으로 생리대를 주문했다. 십여 만 원이 넘었다.
옆에 누워서 근주의 핸드폰을 넘겨보던 남편이 슬그머니 물었다.
"생리대 가격이 참 천차만별이네. 이건 그냥 궁금해서 묻는 건데……."
예의 그 말간 표정이 되더니 급기야, 싼 건 나쁜 거야? 라고 물어 왔다. 침대에 비스듬히 앉아 있던 근주는 정색을 하고 고쳐 앉았다.
"지금 생리대 값 비싸다고 하는 소리지? 작년에 홈쇼핑에 싸게 파는 거 써보면 어떠냐고 해서 한번 사봤다가 나랑 애랑 아래 다 뒤집어졌던 거 잊었어? 그래도 아깝다고 그걸 꾸역꾸역 다 쓴 게 나야. 당신이랑 할 때마다 아프다고 했던 게 왜 그런 줄은 알아? 생리대 때문에 발진에 염증에, 안이 다 헐어서라고 내가 수십 번은 말했다. 사람마다 맞는 게 따로 있다고, 몇 번을 말해야 알아들을래! 아끼고 싶으면 딴 데서 아껴! 쓸데없이 이어폰 사주라 마라 그딴 소리나 하지 말고!"
근주가 목소리를 높이는 동안 슬그머니 일어나 앉은 남편이 근주의 말이 끝나자 지그시 손을 잡았다. 미안해. 근주는 그 손을 확 뿌리쳤다. 미안하다고만 하면 이야기가 끝난 줄 아는 남편이었다. 근주는 남편의 악의 없는 무신경이 배려 없는 무지만큼이나 싫었다. 차라리 착하지나 말지. 악의가 없다는 이유로 모든 것을 받아들여 줘야 하는 근주만 속이 탔다. 남편은 무안하기는 한지 혼자 허허거리면서 한 마디 덧붙였다.
"아이고, 세 여자 생리대 값 벌려면 열심히 일해야겠다!"
근주는 남편에게 등을 돌려 누웠다. 남편이 근주를 뒤에서 안더니 근주의 손을 잡아끌어 자기 바지 속으로 넣었다. 눈치 없기로는 한국 최고 남자였다. 근주는 신경질적으로 남편의 손을 뿌리치고서 베개와 이불을 챙겨 거실로 나갔다. 근주를 바라보기만 하던 남편은 추울지 모르니까 두꺼운 이불 꺼내 줄까? 라고 물었다. 근주의 대답을 기다리던 남편은 잠시 뒤에야 잘 자라고 인사를 했다.
조직검사 결과가 나오기까지 근주는 최대한 생각이라는 걸 하지 않으려고 애썼다. 항우울제로도 잘 해결이 안 되던 이불 밖을 나서는 일을 이를 악물고 해내기 시작했다. 커튼과 이불을 빨아 널었고, 미루고 있던 드라이를 맡기고, 신발장의 운동화도 모조리 빨았다. 옷장 정리도 했다. 특히 속옷 정리에 신경을 썼다. 오래 입어 얇게 닳고 누렇게 된 팬티들, 와이어가 부러지거나 어깨끈이 늘어난 브래지어들, 엉덩이 부분이 허옇게 해진 팬티스타킹이나 보풀이 잔뜩 생긴 레깅스 모두 검은 비닐봉지에 한 번 더 넣어 버렸다. 다음엔 찬장을 뒤집어엎었고, 다용도실과 싱크대와 냉장고 청소를 했다. 작년에 이사하면서 묵은 살림을 다 버렸다고 생각했는데 일 년 만에 또 버릴 것들이 수두룩했다. 마음 떠난 그릇들과 물려줄 사람이 있을까 하고 쌓아 두었던 책 묶음을 과감하게 재활용 쓰레기장에 내놨다. 그도 아니면 작은아이의 슬라임을 주물거리며 재방송되는 예능 프로그램을 찾아보았다.
그래도 상념은 자기 의지대로 막을 수 있는 것이 아니어서 근주는 예능 프로그램 앞에서 웃질 못했고, 말끔해진 주방 앞에서도 기쁘지 않았으며, 깨끗한 커튼을 다시 걸면서도 개운하지 않았다.
산부인과를 다녀왔다는 엄마는 그날 저녁 배추김치를 담그고 곰탕을 끓였다. 대여섯 가지 밑반찬을 해놓고도 밥상 위에는 불고기와 김치찌개를 푸짐하게 올렸다. 진료 의자에 누울 것도 없이 증상을 듣자마자 당장 큰 병원으로 가라 했다는 말을, 엄마는 저녁 밥상 앞에서 심심하게 말했다. 같이 가줄 거 없으니까, 늦으면 저녁이나 알아서들 먹어. 온 집 안에 무겁게 내려앉은 습기와 한데 섞인 음식 냄새의 정체를 그제야 어렴풋이 깨닫고선 근주는 엄마가 참 미련한 여자라고 생각했다. 헌신하고 희생하는 사람이 되어야 안심을 하는 엄마가 부담스러웠다. 다른 식구들에게 죄책감을 느끼게 하려는 건 아닐까, 라는 의심도 들었다. 잊었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분명히 잊었던 일들이, 망각했던 감정들이 곰팡이꽃을 피우듯이 서서히, 그러나 선명하게 피어올랐다. 그럴 때마다 근주는 신경안정제를 먹었으나 좀처럼 잠을 이루진 못했다. 그나저나 밥상 앞에 근주만 있지 않았을 텐데, 아픈 엄마 옆의 다른 식구들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다들 어디에 있었던 걸까.
그런 밤에는 도리 없이 검색을 해보곤 했다. 자궁암, 자궁경부확대촬영법 등의 검색어를 돌리고 블로그나 카페 글을 읽고 또 읽었다. 환우 카페에 가입해 그들의 투병기를 읽고 읽었다. 어느 밤에는 한숨을 푹푹 내쉬었고, 어떤 밤에는 이를 악물고 눈을 부릅뜨며 내일을 다짐하기도 했다. 그러나 대부분은 슬픈 감정에 휩싸였고, 그럴 때면 어쩔 수 없이 턱을 덜덜 떨며 눈물을 흘렸다.


*


조직검사결과가 완료되었습니다. 가능한 시간에 내원 상담 부탁드립니다.


문자를 확인한 근주는 오히려 마음이 고요해졌다. 내원이나 상담이라는 단어가 심상치 않게 느껴졌지만 결과는 알기 전까지는 아무 일이 없는 것이었다. 근주는 병원으로 가기 전 집 안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안방 침대 모서리에 구겨진 시트를 손으로 잡아당겨 반듯하게 폈다. 작은아이 방에서는 입을 열고 있던 서랍을 조용히 닫았고, 큰아이 방에선 비딱하게 붙어 있던 아이돌 사진의 위치를 바로 고쳐 주었다. 신발장에 붙어 있는 거울 앞에서 근주는 옷매무새를 살폈다. 허리 부분이 조금 불편했던 페이즐리 무늬 원피스가 하나도 조이지 않았다. 그래도 살진 목덜미는 미련해 보였고, 귓가에 아무렇게나 구불거리는 흰머리로 추레해 보이기도 했다. 들뜬 화장 위로 선명하게 드러난 주름들은 나이를 고스란히 드러냈다. 근주는 가만히 아랫배에 손을 가져다댔다. 불룩하게 살이 오른 아랫배는 아무 느낌이 없었다.
남편은 현관을 나서면서까지 계속 병원에 다녀오자마자 연락을 달라고 했다. 큰아이는 뭔가 할 말이 있는 듯했지만 결국 다녀오겠다는 말만 했고, 작은아이는 근주를 한 번 안아 준 것으로 인사를 대신했다. 현관을 나서는 식구들의 뒷모습을 보며 저녁엔 남편이 좋아하는 청국장과 큰아이가 좋아하는 갈치구이와 작은아이가 좋아하는 김치볶음밥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집을 나선 근주는 병원 맞은편의 상가 화장품 로드 숍에서 무광 틴트를 하나 사고, 그 옆의 브런치 카페에서 로제파스타를 먹었다. 청포도에이드를 마시며 카페 유리창에 얼비친 자신을 보고 조만간 미용실에서 파마라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식사를 다 마쳤지만 근주는 좀처럼 일어서질 못했다. 아주 잠깐 엄마와 두 아이를 생각하며 길 건너의 산부인과 건물을 올려다봤다. 반짝이는 창문이 참 무람없이 눈부셨다.
















김솔

작가소개 / 김이설

2006년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열세 살」로 등단. 소설집 『아무도 말하지 않는 것들』, 『오늘처럼 고요히』와 장편소설 『나쁜 피』, 『환영』, 『선화』가 있다.


《문장웹진 2019년 1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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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하는 마음 없이

좋아하는 마음 없이 김지연 안지는 이른 결혼을 했는데 실패로 끝났다. 아니, 그걸 실패라고 할 수 있을까? 이혼을 한 건 사실이었지만 안지는 자신의 인생 여정에서 그때 이혼한 일을 실패라고 단정 지을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 뒤로 더 행복해졌다고 할 수는 없을지언정 조금 더 자기 자신에 가까운 삶을 살게 된 것은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혼이라는 단어를 떠올릴 때면 늘 그에 대해 변호하고 싶은 여러 말들이 떠오르곤 했기 때문에 처음부터 결혼 같은 건 하지 않는 편이 더 나았을 거라는 생각을 하곤 했다. 때문에 이혼했다는 사실은 안지의 비밀은 아니었지만 먼저 나서서 밝히지도 않았다. 어릴 때 안지는 무척 전형적인 사람이 되고 싶었다. 구체적으로 그런 표현을 떠올리지는 않았다. 그저 자신이 속해야 하는 집단에서 튀지 않는 사람, 아주 평균적인 사람이고 싶었고 그런 사람이기 위해서 부단히 노력을 했다. 찬반투표를 할 때면 눈치를 보다가 다수의 의견에 따라 슬그머니 손을 들었다. 친구가 좋아하는 가수를 따라서 좋아하고 친구의 것과 비슷한 브랜드의 신발을 사서 신었다. 친구들이 싫어하는 선생을 따라서 싫어했다. 사실 안지는 그 선생에게 남몰래 호감을 갖고 있었지만 친구들과 함께 떡볶이를 먹다가 술술 흘러나온 그 선생에 대한 욕을 듣고 재빨리 노선을 바꿔 함께 욕을 했다. 한동안 안지는 수학 시간마다 왜 애들은 저 선생을 싫어할까? 에 대한 답을 알고 싶어서 더 열심히 선생의 행동거지를 살폈다. 수학을 가르친다는 점만 빼면 딱히 나무랄 데 없는 사람이었다. 학생이 쉽게 답할 수 없는 내용을 골리듯 물어보지 않았고 무엇보다 학생들한테 사과를 할 줄 알았다. 뭔가 잘못 알고 섣불리 화를 냈을 때, 그러다 결국 진실을 알게 되었을 때, 다른 선생들은 그러게 헷갈릴 만한 짓을 왜 하고 다니느냐고 도리어 짜증을 부렸는데 그 선생은 재빨리 미안하다고 말했다. 미안하다. 내가 잘못 알았어. 미안해. 가끔 안지는 머릿속으로 그 목소리를 재생해 보곤 했다. 그 때문에 선생이 더 좋아졌지만 여전히 싫어하기 위해 애썼다. 누구나 다 그런 식으로 청소년기를 보내지 않나? 내가 아닌 사람이 되어 보려고 노력하면서? 안지는 대학에 갔고 연애를 했고 졸업을 했고 취직을 했다. 결혼도 했다. 아주 평균적인 삶이었다. 조금씩 빠르기도 했다. 조바심이 나 있었으므로. 자신도 남들처럼 지극히 평범하게 살 수 있다는 것을 빨리 증명해 보이고 싶었으므로. 어느 정도 성공적인 것 같기도 했다. 남편이 바람이 나기 전까지는 그랬다. 식도 올리기 전 임신을 해 낳은 아이가 막 돌을 지난 참이었다. 임신이 아니었으면 결혼까지는 이어지지 않았을지도 몰랐다. 남편은 계속 후회하는 것 같았다. 그때 낙태를 밀어붙이지 않은 것을, 시간을 끌다가 영영 타이밍을 놓쳐버리고 만 것을, 어떤 결단력을 가지지 못한 자신을 자책했을지도 모른다. 그때 뼈저리게 깨달은 바가 있었는지 새로운 여자가 생겼을 때는 안지가 알아차리기도 전에 이혼을 해달라고 요구했다. 겨우 육 개월을 만났을 뿐

  • 관리자
  • 2024-07-01
소금 샹들리에

소금 샹들리에 정한아 호주에 사는 김이 오랜만에 귀국해서 친구들이 다 같이 모이기로 했다. 4명이 만나는 건 대략 7년여 만이었다. 방을 잡고 밤새 보자고 해서 오기 직전까지 망설였는데, 남편이 등을 밀었다. 정민이와 자신에게도 내가 없는 날이 필요하다고 큰소리를 치더니 정말 밤새 전화 한 통 없었다. 친구들과는 대학 동기였다. 전공은 문예 창작이었는데, 나는 2학년까지 다니고 학교를 그만뒀다. 그렇지만 정작 작가가 된 사람은 나뿐이라고 친구들이 투덜거렸다. 나는 작가가 아니라고 아무리 말해도 소용없었다. 그들은 십 수 년 전 내가 낸 단 한 권의 책을 기억하는 몇 안 되는 사람들이었다. 세 명 모두 미혼이었고, 아이를 가지지 않았다. 놀라울 정도로 예전 그대로인 친구들 사이에서 나만 철 지난 옷차림에 좀처럼 대화에도 섞이지 못했지만, 그런 것 때문에 마음이 상하지는 않았다. 오랜만의 서울 나들이에 술자리도 즐거웠다. 좋은 친구들이었다. 7년 전 정민이 자폐 스펙트럼 장애 판정을 받았을 때 그들은 자신의 일처럼 울어 줬고, 이후에도 종종 아이의 간식과 선물을 집으로 보내 줬다. 서서히 연락을 거둔 것은 내 쪽이었다. 애써 관계를 유지하는 일이 힘에 부쳤을 뿐, 그들에게 섭섭한 마음은 조금도 없었다. 지난 몇 년 동안 나는 집이 아닌 곳에서 밤을 보낸 적이 없었다. 다들 술에 취해서 침대로 간 뒤에도 좀처럼 잠이 오지 않아 휴대폰만 들여다보았다. cctv 속 거실은 엉망이었다. 엎어진 식판, 사방에 흩어진 블록 조각, 길게 늘어진 옷가지들. 남편은 불도 끄지 않고 아이를 재우러 방에 들어간 모양이었다. 나는 정지화면 같은 그 풍경을 한참 바라보다가 해 뜰 무렵에야 겨우 잠이 들었다. 다음날 우리는 점심을 먹고 헤어지기로 했다. 맛집마다 대기가 길어 종로의 좁은 골목을 돌고 또 돌았다. 앞장서 구글 맵을 보며 걷던 김이 갑자기 작은 서점 앞에서 멈춰 서더니 책을 사야겠다고 말했다. 지난 이사 때 내 책을 분실했다는 것이었다. 나는 집에 돌아가서 책을 다시 보내 주겠다고 김을 달랬다. 다섯 평도 안 되어 보이는 그 작은 서점에 내 책이 있을 리는 만무했기 때문이다. 김은 막무가내로 서점에 들어갔다. 할 수 없이 그녀를 따라 들어갔다가 전면 책장에 전시된 내 책을 발견했다. 죽은 친구를 만났다고 해도 그처럼 놀라지는 않았을 것이다. “미애 씨!” 그곳에서 누군가 나를 불렀다. 우아한 노부인이었다. 린넨 바지에 화이트 셔츠, 큼지막한 호른 목걸이를 한 여자는 환하게 웃으면서 나를 바라봤다. “반장님?” 나는 말끝을 흐리며 물었다. 여자는 성큼성큼 내 앞에 다가와서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나를 와락 끌어안았다. 누군가 나를 그렇게 안은 것이 너무 오랜만이라 온몸에 힘이 풀리는 것 같았다. 그녀는 오래전 나와 함께 공부했던 문우였다. H 백화점 문화센터 소설 창작 교실의 반장. 친구들이 책을 구경하는 사이 나는 그녀와 짧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ldqu

  • 관리자
  • 2024-07-01
그동안의 정의

그동안의 정의 최예솔 작정하고 사라진 사람은 작정하고 찾아야만 한다. 나는 윤정수를 작정하고 찾지 않았다. 보통의 남매 사이라는 게 정확히 어떤 건지는 모르겠지만 윤정수와 나를 그냥 보통 남매, 라고 하기에는 좀 어렵지 않을까. 윤정수는 나보다 4년 먼저 태어났다. 그리 적지도, 그리 많지도 않은 애매한 나이 차이 덕분에 윤정수와 나는 딱히 친해지지 못했다. 내가 초등학교에 입학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윤정수는 중학교에 갔고, 내가 중학생이 되었을 때 윤정수는 고등학교에 갔다. 물론 윤정수와 내가 영 친해지지 못한 건 우리의 나이 차이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윤정수는 내게 없는 사람에 가까웠다. 말수도 없고 센스도 없고 자존심도 없고 공부머리도 없고 돈도 없고······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나? 아무튼 남매 사이에 정이라도 있었다면 걱정이라도 했을 텐데 그럴 이유조차 없었다. 쥐뿔도 없는 윤정수니까. 특이사항이라곤 개그맨 윤정수와 동명이인이라는 것 정도밖에 없는. 그러니 윤정수가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집을 나갔다고 해도 이상할 것 하나 없었지. 뭐 내가 찾는다고 윤정수가 나타났을 거라는 보장도 없지만 나는 막연히, 어련히 때 되면 나타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했다. 하지만 윤정수는 죽을 때까지 나타나지 않았다. 물론 내가 죽은 것은 아니다. 윤정수가 죽었다. 내 나이가 이제 서른이니까, 윤정수는 서른넷에 죽었다. 이제 내게 남은 혈육은 없다······ 아닌가? 고모. 그렇게 부르지 마. 왜요. 낯설어. 저도 고모가 낯설어요. 윤현수는 맹랑하다. 윤정수와 장현아의 딸이라고 해서 윤현수. 그거 좀 유치하지 않니? 물었을 때 윤현수는 뭐 어때요 엄마아빠말곤 모르는데, 하고 대답했다. 이제 나도 아는데? 하니까 이젠 고모도 모르는 척해 달라고 했다. 참 나 어디서 이런 게 굴러왔는지. 현수야. 네. 네 엄마 입국 날이 언제라고 했지? 다음 주 토요일이요. 아직 한참 남았네. 고모도 고모 할일을 해요. 시간 금방 갈걸요. 알겠다 그래. 윤현수를 데리고 온 사람은 장현아다. 이제는 나흘쯤 됐으려나. 아침부터 현관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하도 시끄러워서 나가 봤더니 장현아가 윤현수의 손을 붙잡고 서 있었다. 장현아는 다짜고짜 윤정수를 아느냐고 물었고 나는 오랜만에 듣는 윤정수의 이름에 잠깐 벙쪘다가 네, 저희 오빠네요, 하고 대답했다. 조카입니다. 그날 장현아의 대사를 나는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그건 도저히 내가 아는 사람이 뱉을 만한 말이 아니어서 대사라고밖에는 표현할 수 없겠다. 아직도 문득 의심스러울 때가 있다. 윤현수가 정말 나의 조카가 맞고 장현아가 정말 나의 새언니가 맞을까. 가족관계라는 게 그렇게 단순하게 정리되는 거라면 이제까지 윤정수와 나는, 또 윤정수와 나와 우리의 부모는, 왜 이렇게 흩어지거나 죽거나 혼자 남을

  • 관리자
  • 2024-0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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