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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보는 마음

  • 작성일 2020-04-03
  • 조회수 6,833

[단편소설]



돌보는 마음



김유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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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미연이 손에 든 머그잔을 내려놓는 순간 식탁 상판에서 둔탁한 소리가 났다. 일부러 세게 내려놓은 것도 아니었는데, 코스터라도 받쳤어야 하나. 미연은 맞은편에 앉은 여자의 눈치를 봤다.
"아기 엄마가 잘못 알고 있는 거예요. 내가 듣고 온 조건은 그게 아니었거든."
여자가 우아하게 웃으며 찻잔을 조용히 집어 올렸다. 얇은 손잡이가 달린 장미 문양 찻잔이 여자의 스카프와 퍽 어울렸다. 구직자인 상대방은 오히려 여유가 있었고, 미연 혼자 안절부절못하는 모양새였다. 시터 면접에서는 기 싸움이 중요하다던데, 내가 너무 만만하게 보인 걸까. 미연은 이미 커피가 바닥을 드러낸 머그잔을 매만지면서 말을 고르는 중이었다.
처음부터 여자의 복장과 태도가 시터 면접을 보러 온 사람 같지 않았다. 베이지색 트렌치코트에 붉은색 실크 스카프를 걸치고 현관에 들어선 여자는 교양 있는 미소를 짓는 척하면서 미연과 집 안 살림을 빠른 속도로 훑어보았다. 미연은 불시에 찾아온 집주인을 만난 것처럼 주눅이 들었다. 단정하게 드라이를 만 머리에 옅게 화장을 한 여자와는 달리, 머리도 감지 못한 채 목 늘어진 티셔츠를 입고 서 있는 자신이 초라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미연은 여자에게 식탁으로 와서 앉으라고 권한 다음, 찬장 맨 위 선반에 손을 뻗어 혼수로 장만해 왔던 고급 커피 잔을 꺼냈다.
"잔이 하나밖에 없는데요?"
잔을 먼저 꺼내 놓고 티포트에 물을 끓이려는 미연에게 여자가 물었다.
"아, 제 컵은 여기 있어요."
미연은 개수대에 담겨 있던 머그컵을 빠르게 물에 헹군 다음 표면을 행주로 닦았다.


여자의 이름은 임화숙, 나이는 올해 58세였다. 임화숙은 구청에서 운영하는 시니어 인력 개발 지원 센터에서 8주간의 베이비시터 교육을 수료했다. 일자리를 필요로 하는 노년층에게 교육과 취업을 주선해 주는 지자체의 사업이었다. 임화숙을 추천한 구청 담당자는 그녀가 세 자녀를 모두 명문대에 보낸 보기 드문 이력의 소유자라는 말까지 덧붙였다. 그런 건 갓 8개월이 된 아기를 돌보는 데 하나도 중요하지 않은 이력이었지만, 그래도 신분은 확실한 사람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구청 담당자는 시터의 업무 범위와 급여 및 처우에 관한 권고사항을 문서로 정리해 미연에게 이메일로 보내왔다. 구청 측의 권고에 따르면 가사 도움 없이 아이만 돌볼 경우 월급은 180만 원이었고, 가사 업무도 병행할 경우 200만 원이었다. 미연은 이왕이면 가사까지 같이 도움을 받고 싶다고 생각하다가도, 집안일을 하는 동안 아이가 방치되지 않을까 걱정되었다. 아이는 최근 들어 집 안 곳곳을 빠르게 기어 다니기 시작해 위험한 것을 입에 넣거나 만지지 못하도록 항상 주의 깊게 지켜봐야 했다. 어떤 타입의 시터를 원하는지 명확하게 말하지 못하고 우물쭈물하는 미연에게 구청 담당자는 업무 범위는 서로 협의를 통해 조정 가능하니 우선 면접부터 진행해 보라고 권했다. 미연은 화숙을 만나 보기로 했다. 복직을 한 달 앞둔 시점이었다. 서둘러 사람을 구해 아이가 엄마 없이 지낼 수 있도록 적응시켜야 했다.
화숙은 가사 업무는 어렵고 아기만 돌보는 조건으로 월급 200만 원을 요구했다.
"구청에서 보낸 서류에는 가사 포함이 200만 원이고, 아기만 돌볼 경우에는 180만 원이라고, 안내는 그렇게 되어 있는데요."
미연이 조심스러운 말투로 말했다. 초면의 연장자를 앞에 두고 돈 얘기를 꺼낸다는 게 민망하기 짝이 없었다.
"그건 그냥 서류인 거고, 나는 지금 시세를 말하는 거예요. 아기 엄마가 잘못 알고 있는 거라니까."
화숙은 조금도 물러서지 않은 채 방금 했던 말을 반복했다. 미연은 그 자리에서 핸드폰으로 이메일에 첨부된 문서를 찾아보기까지 했다. 소개업체를 통하면 시터와 구인 가정 양쪽 모두 수수료를 부담해야 했지만 구청 시니어 인력 개발 지원 센터에서는 따로 소개비를 요구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수수료를 내지 않는다는 사실을 감안한다면, 급여 조건이 그리 나쁜 것도 아니었는데 화숙은 미연이 뭘 몰라도 한참 모른다며 혀를 끌끌 차기까지 했다. 진심으로 아이를 잘 보살펴 줄 수 있다면, 한 달에 20만 원 더 쓰는 것도 충분히 재고해 볼 수 있었다. 하지만 계속 미연이 잘못 알고 있다는 식으로 말하는 건 곤란했다.
"사실 나는 돈 일이십만 원 더 받고 말고가 크게 중요하지가 않아요. 돈보다는 소일거리 삼아 하려는 거라서. 내가 워낙 아기를 좋아하기도 하고요. 근데 내가 월급을 제대로 받지 않으면 시세가 엉망이 되는 거라…… 그러면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가 가거든. 같이 교육 받았던 다른 시터 동료들한테 말이에요."
방 안에서 울음소리가 들렸다. 낮잠을 자던 아기가 깬 모양이었다. 미연이 아이를 안고 나와 적당한 핑계를 대며 자리를 마무리하려는데 화숙은 아이에게 눈을 맞추고 알은체를 했다.
"아유, 귀여워라. 엄마를 쏙 빼닮았네. 8개월이면 우리 손자랑 딱 넉 달 차이겠어요. 우리 손자는 지난달에 백일이었거든."
"손자가 있으세요?"
"실은 내가 며느리 대신 손자 봐주려고 베이비시터 교육도 받은 건데 며느리가 회사 그만두고 본인 손으로 키우겠다고 해서…… 요즘 세상에 한 명만 벌어서 사는 게 쉽지 않잖아요? 내 마음 같아선 아이는 나한테 맡기고 복직했으면 하는데, 며느리가 한사코 고집을 부리더라고. 아기는 엄마 손에 커야 한다나. 그 말도 듣고 보니 맞아요. 내가 결혼하자마자 직장 그만두고 집에서 살림하면서 아이들만 키웠거든. 엄마가 옆에서 끼고 키워서 그런지 애들이 다 잘 됐어요. 큰 아이는 지금 K은행에 근무하고, 둘째는……."
"저, 지금 아이 이유식 먹일 시간이라서요. 제가 급여 조건을 잘못 알고 있다고 하시니, 그럼 다시 알아보고 연락드려도 될까요?"
미연이 화숙의 말을 억지로 막아서며 어색하게 웃었다. 화숙을 배웅하며 다시 연락하겠다고 했지만 거짓말이었다. 인사를 하고 돌아섰던 화숙이 현관문 앞에서 다시 몸을 돌려 미연을 바라보며 말했다.
"참, 아기 엄마 아까 내가 말하려다 깜빡했는데 찻잔 바닥에 스티커 그대로 붙어 있는 거 알아요? 설마 그거 떼고 써야 되는 줄 모르는 건 아니겠지."
순간 미연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그 찻잔 세트는 결혼 후 한 번도 쓴 적이 없었다. 며느리가 화숙에게 아이를 맡기지 않으려고 한 이유를 알 것 같았다.



2.
미연은 신도시에 새로 개원한 대학병원에서 고객 서비스 만족 부서 팀장으로 일했다. 본원 사회 공헌팀에서 지원 업무를 하다가 재작년 분원이 생기면서 팀장으로 승진했다. 남편 기훈은 제약회사 영업부 차장이었고, 부부는 결혼 후 10년 가까이 아이 없이 지내 왔다. 임신을 하려고 갖가지 노력을 했지만 쉽지 않았고, 자식 없이 살 운명이라고 생각했는데 마흔이 넘어 기적적으로 딸 지우를 얻게 됐다. 기훈은 육아휴직 6개월만 쓰고 복직하겠다는 미연을 이해하지 못했다. 대학 교직원 신분이라 최대 2년까지 육아휴직을 눈치 보지 않고 쓸 수 있는데 왜 굳이 아이를 남의 손에 맡기려고 하느냐고 비난 투로 말해 크게 싸우기도 했다.
"당신은 대한민국에 눈치 안 보고 육아휴직 2년 쓸 수 있는 조직이 얼마나 있다고 생각해? 출산휴가 3개월에 육아휴직 6개월, 도합 9개월밖에 못 쉬었지만 다른 직원들 눈치가 얼마나 많이 보이는 줄 알아? 기훈 씨 말대로 2년 쉬다 오면 기존 팀으로 복귀는 절대 불가능하다고. 그렇게까지 못마땅하면 당신이 육아휴직 해."
미연은 기훈을 바라보며 날선 말들을 쏟아내고도 화가 풀리지 않았다. 가뜩이나 시터 구인 문제로 하루 종일 편두통에 시달렸는데, 복직을 하려는 것 자체가 잘못이라는 식으로 말하는 기훈 때문에 서러운 감정마저 들었다. 잠깐 바깥바람 좀 쐬고 올게, 미연은 점퍼를 걸치고 집 밖으로 나와 고등학교 동창 혜정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이 없던 시절에는 혜정과 소원하게 지내다가 출산 후 그녀와 부쩍 가까워지게 됐다.
"야-! 그냥 업체에 연락해서 구해. 그게 깔끔해. 업체 담당자한테 마음에 드는 사람 나올 때까지 보여 달라고, 아주 까탈스럽게 굴어. 알겠니? 까탈스럽다는 인상을 주는 게 중요하단 말이야. 아무나 들이밀지 못하게."
혜정은 유능한 회계사였고, 아들 셋을 키우는 워킹맘이기도 했다. 학창 시절부터 시원시원한 성격이긴 해도 이 정도까지는 아니었는데 혜정은 무슨 말을 할 때마다 첫마디에 야- 하고 소리부터 질렀다. 그녀는 딸을 낳고 싶어서 셋째 출산까지 도전했지만 또 아들을 낳은 후 나날이 목소리 데시벨만 높아진다고 푸념하듯 말하기도 했다.
"야-! 내가 시터라면 산전수전 공중전까지 다 겪어 본 사람이야. 나처럼 아들 셋 키우는 집은 시터들의 기피 1순위 가정이라고. 처음부터 마음에 드는 시터를 하늘에서 내려주는 일 따위는 없어. 우선 마음에 드는 사람 나타날 때까지 계속 면접을 봐야 해. 100프로 흡족할 수는 없겠지만 이 정도면 괜찮겠다는 느낌이 오는 순간이 있어. 신중하게 뽑은 후에 내 사람 될 때까지 손발을 맞춰 가는 거야. 그렇다고 긴장을 풀어서는 안 되고 여차하면 교체하겠다는 마음으로 살펴야지. 야-! 너무 겁먹지는 말고. 잘 찾아보면 괜찮은 사람 만날 수 있어. 너희 집은 여자 아이 하나 보는 조건이라 나보다 훨씬 나으니까."
혜정은 가사와 시터 업무를 전담하는 입주도우미를 고용해 같이 생활하면서 낮 시간에는 첫째와 둘째의 하원을 돕고 숙제를 봐주는 하원 시터도 따로 두고 있었다. 그녀는 월급 대부분을 돌봄 비용으로 쓰고 있지만 일을 포기할 수 없다고 단호하게 말했다. 출산 후 아이를 키우며 작은 일에도 신경을 곤두세우고 마음 졸이게 된 미연과는 달리 혜정은 예전보다 더 용감하고 씩씩해진 것처럼 보였다. 미연은 혜정을 보면서 저렇게 강단이 있으니 대형 회계법인에서 버티는 거겠지, 하고 생각하다가도 하루 중 아이들을 돌보는 시간이 과연 몇 시간이 되겠느냐며 오히려 제 손으로 키우지 않으니 겁 없이 셋이나 낳은 거라는 생각에 은근히 심통이 나기도 했다.



3.
다음날 아침, 미연은 혜정이 알려준 시터 소개 업체에 전화를 걸었다. 전화를 받은 김 실장은 혜정의 이름을 대자마자 반색했다.
"어머, 여의도 회계사 사모님 친구분이면 특별히 신경 써 드려야죠. 마침 좋은 분이 지금 계세요. 경력 15년의 베테랑이시고요, 이전 집에서 3년 동안 쌍둥이를 보신 분이세요. 아주 잘하시는 분이랍니다. 믿고 맡기셔도 돼요."
가사 업무까지 깔끔하게 가능한 15년 경력의 베이비시터 월급으로 한 달에 220만 원은 많은 걸까, 적은 걸까. 미연은 그것을 제대로 가늠할 수 없었다. 하지만 자신의 월급 절반 이상을 시터 비용으로 지출해야 한다는 것만은 확실했다. 김 실장은 소개 수수료로 첫 달 급여의 20%를 별도로 업체에 지불해야 한다고 말했다. 미연은 급여 조건보다도 연세가 마음에 걸린다고, 62세면 너무 많으신 거 아니냐고 물었다. 김 실장의 목소리가 한 톤 더 높아졌다.
"그건 사모님이 모르고 하시는 말씀이세요. 그 나이면 아직 청춘이죠. 시터 중에서 60대 초반이면 젊은 축에 드는 거라니까요."
최대한 까다롭게 굴어야 한다는 혜정의 충고를 뒤로 하고 미연은 알겠다고 항복하듯 대답해 버렸다. 첫 번째 면접 대상자였던 화숙도 미연에게 뭘 모른다고 타박했던 게 떠올랐다. 나는 왜 이렇게 모르는 게 많은가. 미연은 꾸지람을 들은 기분이 들었다.
"안녕하세요, 사모님. 오늘부터 일하게 된 이정순입니다."
이정순은 집에 들어서자마자 허리를 90도보다 더 낮게 숙여 인사를 했다. "아, 네. 잘 부탁드립니다." 미연이 몸 둘 바를 모르며 같이 고개를 숙였다. 가뜩이나 키가 작은 정순의 눈높이에 맞춰 인사를 하느라 미연은 거의 절을 하다시피 했다. 정순은 서둘러 옷을 갈아입고 나와 집 안 곳곳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새로운 사람을 맞느라 미리 청소를 해두었다고 생각했는데, 정순의 손이 닿은 곳과 닿지 않은 곳이 확연하게 달랐다. 듣던 대로 베테랑다웠다.
미연은 복직 전 보름간 정순과 아이를 함께 돌보며 지냈다. 괜찮은 사람인지 지켜보고 채용을 결정하기 위해서였다. 정순은 미연과 거의 눈을 마주치지 않고 필요한 말 외에는 하지 않았다. 어쩌다 미연에게 말을 붙일 때는 지나치게 존대해 사람을 불편하게 만들었다. 사모님, 이라는 호칭이 불편하다고 편하게 불러 달라고 해도 정순은 대답 없이 씨익 웃을 뿐이었다. 혜정은 미연에게 정순이 하는 대로 그냥 두라고 말했다.
"본인이 먼저 그렇게 불러 주는 거면 토 달지 말고 사모님 소리 들어. 말 놓고 하대하라고 하다가 오히려 책잡히기 십상이라니까."
"그, 그런 거니? 그래도 사모님은 너무 민망한데. 근데 나는 뭐라고 불러야 해? 선생님? 이모님? 시터님?"
"야! 그냥 아줌마라 불러. 처음부터 명확히 해야 해. 니가 고용인이고 그쪽이 피고용인이라는 걸 말이야. 괜히 만만하게 굴었다가는 시어머니 한 명 더 모시게 되는 거야."
이전 집에서 정순을 이모라고 불렀다는 이야기를 듣고, 미연도 '이모님'이라고 부르기로 했다. 정순은 150cm를 밑도는 키에 체구가 작은 편이었지만, 움직임이 조용하면서도 손이 빨랐다. 육아 경험도 풍부해 아이를 잘 다뤘다. 아기의 표정만 보고도 기저귀 상태를 바로 알아챌 정도였다. 아이에게 분유를 먹인 직후 트림도 능숙하게 잘 시켰고, 이유식도 요령 있게 잘 먹였다. 미연과 있을 때는 자주 울고 보채던 지우의 표정이 예전보다 더 편안해 보였다. 하지만 정순은 말수가 적고 무뚝뚝한 편이었다. 아이에게 환하게 웃어 주거나 아이의 행동에 살갑게 반응해 주는 일이 거의 없었다. 좀 더 재미있게 놀아 주면 좋을 텐데, 라고 미연은 생각했지만 정순은 장난감을 갖고 노는 아이를 곁에서 지켜보면서 가끔 옅은 미소를 짓는 게 다였다. 그런 면이 아쉽긴 했지만 결격 사유는 아니었다. 그녀는 복직 이틀 전 거실과 아이 방에 CCTV를 설치했고, 핸드폰에 실시간으로 CCTV를 확인할 수 있는 어플을 깔았다.
복직 첫날 미연은 아이와 시터만 남겨 두고 집 밖을 나서는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아서 현관에 선 채로 아이에게 작별 인사를 여러 번 반복했다. 겨우 뒤돌아서 차에 시동을 건 순간 눈물이 터져 나왔다. 엄마와 이렇게 하루 종일 떨어져 있는 건 처음인데 괜찮을까. 미연은 운전을 하면서도 계속 아이가 눈에 밟혔다.
미연은 출근 후에도 수시로 CCTV를 확인했다. 다행히 지우는 엄마를 찾아 딱히 보채는 것 같지는 않았다. 정순은 아이가 낮잠을 자는 동안에도 쉬지 않고 일했다. 아이의 젖병과 이유식기를 삶았고, 세탁기와 건조기를 차례대로 돌린 후 세탁물을 개켰다. 아이가 자는 동안 점심을 드시라고 여러 번 이야기했지만 끼니도 거르고 하루 종일 일만 하는 것 같았다. 복직 전 미연은 정순의 점심 식사를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했다. 미연이 회사를 다니면서 정순의 점심밥까지 준비해 주기는 어려울 듯했다. 미연과 기훈은 평소에도 집에서 요리를 거의 하지 않았다. 아이가 태어나고 외식이 힘들어진 후로 그들은 주로 레토르트 반조리 식품이나 배달 음식으로 끼니를 해결했다.
미연이 사정을 말하자 정순은 본인이 먹을 점심 도시락을 싸오겠다며, 대신 식대를 하루 5천 원씩 추가로 계산해 달라고 말했다. 주5일 근무 기준으로 월 10만 원 정도 더 지출이 예상됐지만 미연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문제는 정순이 약속과는 달리 도시락을 싸오지 않고 점심을 굶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미연은 퇴근 후 개수대 주변과 음식물쓰레기통까지 샅샅이 살폈지만 정순이 무언가를 먹은 흔적이 없었다. 점심은 어떻게 드셨냐고 묻자 정순은 대충 먹었어요, 라고 말하며 얼버무렸다. 미연이 준 식대로 점심을 어떻게 해결하든 그것은 정순의 자유였다. 하지만 아이를 돌보는 일은 체력 소모가 컸고, 잘 먹어야 했다. 아이와 지내면서 끼니를 챙겨먹는 게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은 미연도 알고 있었다. 복직 전 미연 역시 지우와 씨름하다 보면 하루 종일 한 끼도 제대로 먹지 못하는 날도 있었다. 그런 날은 저도 모르게 아이에게 짜증을 냈고, 퇴근 후 집에 온 기훈에게도 말이 곱게 나가지 않았다.
미연은 집 앞 빵집에서 부부가 아침 대용으로 먹는 발효빵을 평소보다 넉넉히 샀다. '간식으로 드시라고 올려놨어요. 출출하실 때 드세요. 냉장고에 사과와 우유도 있습니다.' 미연은 식탁에 빵과 함께 쪽지를 써두고 출근했다. 그 후로 정순은 미연이 준비해 둔 빵과 과일을 먹었다. 쓰레기통에 빵 봉지가 있는 것을 보고 미연은 안도감을 느꼈다. 아이를 돌보는 사람이 굶고 있다는 건 아무래도 신경이 쓰이는 일이었다. 미연은 매일 퇴근길에 장을 보면서 식구들이 먹을 것 외에 정순이 좋아하는 빵과 과일을 추가로 샀다. 따지고 보면 정순의 빵값만 해도 하루 5천 원이 넘었다. 그렇다고 해도 정순에게 이미 주기로 한 식대를 다시 깎기도 난감했다.
"미연 씨, 복직하고 정신없지? 지금이 제일 힘들 때야. 내가 맛있는 거 사줄게."
전산팀 황희수 선배가 미연에게 메신저를 보내왔다. 복직 기념으로 점심을 사겠다고 했다. 미연은 오랜만에 분위기 좋은 이탈리안 레스토랑에 자리를 잡고 앉아 선배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시간이 낯설면서도 감격스러웠다.
"이런 데 와서 밥 먹어 보는 게 얼마만인지 모르겠어요."
미연이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초등학교에 다니는 쌍둥이 남매를 키우고 있는 황이 새삼 존경스러워 보였다. 황은 워킹맘에게 가장 큰 복이 시터 복이라며, 전생에 나라를 구해야 좋은 시터를 만난다는 말까지 하면서 웃었다.
"미연 씨, 힘들어도 어쩔 수 없으니까 그냥 버텨야 해. 난 쌍둥이라 시터 월급 빼면 진짜 남는 게 없었어. 회사 다니면서 내가 쓰는 돈까지 생각하면 마이너스였다니까. 그래도 버티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어. 미연 씨도 아이 키우는 동안 생각 너무 많이 하지 말고 그냥 버티면서 커리어 지켜. 아이 보는 분은 어때?"
"일을 잘해요. 이모님 오신 후로 집 안이 반짝반짝할 정도예요."
"응, 그렇구나. 근데 좋은 사람이야? 아이를 진심으로 예뻐해?"
미연은 선뜻 대답을 하지 못했다. 정순은 살림을 잘하고 아이를 잘 다뤘지만 그녀를 좋은 사람이라고 말하기에는 망설여졌다. 좋게 말하면 침착했고, 나쁘게 말하면 무뚝뚝하고 감정 표현이 서툰 사람처럼 보였다. 미연과 기훈 부부는 과하다 싶을 정도로 아이의 행동에 감탄하고, 칭찬을 해주곤 했다. 아이를 쳐다보기만 해도 자연스럽게 나오는 반응이었다. 정순 눈에 지우가 그만큼 예뻐 보이지는 않는 모양이었다. 정순은 아이를 울리지 않았지만, 아이와 눈을 맞추고 크게 웃어 주지도 않았다. 그래서 그런지 정순과 있을 때면 지우가 왠지 풀이 죽어 지내는 것 같았다. 갑자기 입맛이 싹 가셨다. 미연의 굳은 표정을 읽은 황이 재빠르게 화제를 돌렸다.
"꼭 대답하라고 물어본 말은 아니야. 그건 그렇고, 그 빨간 머리 여자애, 미연 씨네 팀 맞지? 매일 짧은 치마 입고 다니는 애 말이야."
"전승주 씨요?"
"걔 이름이 승주야?"
"네, 갑자기 승주 씨는 왜?"
"그 친구, 나랑 거의 매일 같은 버스를 타고 오거든. 같은 층에서 근무하니까 엘리베이터까지 같이 타고 오는 날이 많은데, 어떻게 인사 한번을 안 해? 지켜보다가 안 되겠다 싶어서 하루는 내가 먼저 인사를 했어. 안녕하세요, 전산팀 황희수예요. 아침마다 자주 뵙네요. 그랬더니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냥 쳐다만 보더라? 귀에 꽂은 이어폰은 빼지도 않은 채로 말이야."
승주는 병원 예약과 고객 상담 전화 업무를 하는 계약직 사원으로, 미연이 육아휴직 간 사이 입사한 신입이었다. 똑 부러지는 성격이긴 했지만 말투가 사근사근한 편이 아니라서 전화상담 업무를 하기에는 조금 적절치 않아 보이기도 했다. 본인이 직접 면접을 봤더라면 뽑지 않았을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면서 미연 역시 승주에게 별로 정이 가지 않았다.
"그렇지 않아도 고객 만족도 설문 조사에서 연속 최하점을 받고 있는 직원이라 조만간 따로 불러서 면담해 보려고요. 저도 그 친구 때문에 골치가 조금 아프네요."
"내가 그럴 줄 알았어.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고 인사성 없는 애들이 일도 잘 못한다니까. 회사에 옷 입고 오는 꼴도 참 가관이더라. 병원에 오는 건지, 클럽에 오는 건지 구분도 못 하고. 요즘 애들 참 무서워, 그치?"
황은 미연의 말에 신이 난 듯 더 크게 떠들어댔다. 미연의 복직을 축하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승주의 험담을 하기 위해 따로 자리를 만든 사람처럼 보일 정도였다.
미연은 그날 오후 승주를 회의실로 따로 불렀다. 고객 만족 설문 조사에서 승주와 통화를 한 고객들의 불만 지수가 유난히 높았다. 대다수가 승주에게 별 다섯 개 만점에 1~2개의 평점을 매겼고, 말투가 무뚝뚝하다, 쌀쌀맞다, 사무적이다, 와 같은 의견을 남겼다.
"팀장님, 저는 제가 전화로 사무를 보는 거라고 생각하거든요? 근데 사무적이라고 지적을 받으면 어떻게 해야 하는 건가요?"
승주는 초라한 평점표를 보고도 기가 죽기는커녕 오히려 따지듯 물었다. 미연은 승주를 차분하게 타이르려 애썼다.
"승주 씨, 나는 승주 씨가 단순히 사무를 보는 일을 한다고 생각하지 말고 사람들의 마음을 살피는 일을 하는 거라고 생각해 줬으면 좋겠어요. 우리 병원에 전화를 거는 분들은 모두 환자이거나 환자의 가족인 사람들이에요. 더군다나 이런 3차 병원까지 문을 두드리는 건 병세가 심각한 경우가 대부분이지. 그런 사람들에게 조금만 더 따뜻하게 대해 주면 안 될까? 진심으로 상대를 위하는 마음을 느끼게 해주는 게 나는 중요하다고 보거든요. 한 번 더 환하게 웃으면서 이야기하고, 불편한 건 없는지 마음으로 세심하게 살펴 주는 거, 그런 게 진짜 고객 만족 서비스지. 전화라서 웃는 얼굴이 보이지도 않는다고? 진심은 다 느껴지게 마련이라니까. 그러니까 기계적으로, 실수 없이, 감정 없이 주어진 일만 하는 게 일을 잘하는 게 아니라는 소리예요."
미연은 승주를 앉혀 놓고 잔소리를 길게 늘어놓다가, 실은 정순에게 하고 싶은 말을 승주에게 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놀랐다.



4.
미연이 정순의 이상한 낌새를 눈치 챈 것은 복직 후 3개월이 지난 때였다. 아이는 아침잠이 없는 편이라 매일 오전 6시가 되기도 전에 깼다. 미연은 아이가 일어나면 한 시간 정도 같이 놀아 주다가 출근 준비를 하곤 했다. 그날도 평소와 다름없이 일찍 일어나 지우와 거실에서 놀다가 먼저 샤워를 하고 나온 기훈에게 아이를 넘겨준 다음 욕실로 들어갔다. 생리대를 꺼내려고 욕실 수납장을 열었는데 치약이 두 개밖에 없었다. 미연은 생필품을 꼭 세 개 이상 쟁여 놓는 버릇이 있었다. 세제나 비누, 치약은 물론 통조림이나 라면도 세 개 이하로 떨어지면 꼭 미리 사다가 채워 놓았다. 기훈에게 혹시 집에 있는 치약을 회사에 가져다 썼느냐고 묻자, 그 용량 큰 치약을 회사에 어떻게 갖다 놓느냐며 고개를 저었다. 그러고 보니 빨래비누도 한 장 비었다. 분명히 이틀 전에 다섯 장을 사서 한 장은 뜯어서 비누곽에 넣고, 나머지 넉 장은 욕실 선반에 넣어 두었던 거였다. 이틀 만에 빨래비누 한 장을 다 쓰지는 못했을 텐데, 아무래도 정순이 의심스러웠다.
"확실해? 진짜 치약이랑 비누 개수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는 게 맞느냐고?"
기훈이 다그치듯 묻자 미연은 자신이 없어졌다. 확실한 증거는 없었다. 미연의 기억이 정확하지 않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이상하게 기분이 찜찜해진 미연은 그 후로 퇴근하고 집에 돌아오면 집 안 곳곳의 물건을 살피느라 신경이 곤두섰다. 귀중품을 숨겨 두는 장소도 바꾸었다. 2+1으로 산 주방세제 한 통이 없어진 것을 알아챈 것은 비누 사건이 있고 나서 열흘이 지난 시점이었다.
"이번에는 정말 확실해. 새로 사놓은 주방 세제 한 통이 사라졌어. 지난번 비누랑 치약도 이모 소행이 분명해."
미연은 엄한 사람을 의심한다고 자신을 비난했던 기훈에게 사과 받고 싶었다. 그러나 기훈은 오히려 "그게 뭐 어때서?"라고 반문했다.
기훈은 비싼 물건에 손을 대는 것도 아닌데, 그냥 모른 척하는 게 낫겠다고 말했다. 미연도 사라진 물건이 아깝다는 생각은 크게 들지 않았다. 그냥 하나쯤 나눠달라고 대놓고 말해도 대수롭지 않게 나눠줄 수 있는 물품이었고, 의식하지 않으면 한두 개쯤 없어졌는지도 모를 물건들이었다. 하지만 부도덕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훈은 정순이 마음에 드는 눈치였다. 정순이 온 이후로 기훈의 가사와 육아 부담이 훨씬 줄어든 것도 사실이었다. 기훈은 퇴근 후 아이 목욕을 시키고 주말마다 욕실 청소를 담당해 오다가 자신의 일을 정순이 대신해 주면서 한결 편해졌다는 말을 대놓고 하기도 했다.
"자기도 회사에서 플러스 펜이랑 수정테이프 가져와서 쓴 적 있잖아. 탕비실에서 믹스커피도 몇 개 슬쩍 갖고 와 집에서 마시기도 했고……. 귀중품에 손을 댄 것도 아닌데 뭘, 그 아주머니 비누 한 장 사다 쓰는 것조차 형편이 어려우신 모양인데 그 정도는 봐드려."
미연은 정순의 행동을 자신이 회사에서 쓰던 사무용품 몇 가지를 집에 가지고 온 것과 다를 바 없다고 하는 기훈의 말에 기분이 상했다. 아무래도 손버릇이 나쁜 사람에게 말 못 하는 아이를 맡겨서는 안 될 것 같았다. 기훈은 도리어 미연이 너무 예민하게 군다고 말했다.
"지우 엄마, 우린 지금 우리가 해결하기 힘든 업무에 대해 아웃소싱을 준 거라고. 그러니까 지엽적인 문제는 덮고 총체적인 퍼포먼스로 평가를 해야지. 이 일로 그 아주머니 해고하면, 갑자기 사람은 어디서 어떻게 구할 건데? 감정적으로 판단할 문제가 아니라고."
지난 3개월간 정순의 모든 말과 행동을 곱씹어 보면서 의심과 불안에 사로잡힌 미연과는 달리 기훈은 시종일관 차분한 말투였다.



5.
미연은 아이를 재우고 밤 10시가 넘어 혼자 집 밖으로 나왔다. 답답한 마음에 아파트 단지 주변을 뱅뱅 돌면서 걸었다. 기훈의 말대로 내가 너무 감정만 앞세우는 걸까. 하지만 딸아이 문제인데 감정이 앞서는 게 당연하지 않나. 미연은 제 자식이 걸린 문제인데도 계속 강 건너 불구경하듯 이야기하는 기훈이 더 이상해 보였다. 하지만 정순을 해고하고 다른 시터를 구하는 것 또한 쉬운 일은 아니었다. 처음 정순이 집에 왔을 때 기어 다니던 지우는 석 달 사이에 훌쩍 자라, 이제 짚고 일어서 한 발씩 발걸음을 떼며 걸음마를 하려 했다. 정순이 곰살 맞고 살가운 성격은 아니었지만 실수 없이 무탈하게 아이를 돌봐 주고 있는 점은 고마웠다. 미연은 인적이 끊긴 놀이터를 한참 서성거리다가 미끄럼틀 끄트머리에 쪼그려 앉아 혜정에게 전화를 걸었다.
"자니? 통화 가능해?"
"자기는, 이제 퇴근하는 길이다. 운전 중이긴 한데 통화해도 돼. 무슨 일 있어?"
미연은 전화로 심란한 마음을 토로하면서 혜정 역시 기훈과 비슷한 충고를 하리라고 생각했다. 그만한 사람 구하기가 쉬운 줄 아느냐고, 감정에 휘둘리지 말고 상황을 냉정하게 바라보라고, 평소 혜정이라면 그런 조언을 건넬 거라고 기대했다. 하지만 혜정은 의외의 대답을 내놓았다.
"아니 왜, 감정적으로 판단하는 게 어때서? 난 감정 문제 중요하다고 생각하는데? 시터를 고용하는 목적은 내 체력과 감정 소모를 아끼기 위해서야. 찝찝하면 바꿔. 애들은 생각보다 적응이 빨라. 사람 바뀌는 걸 겁내다가 오히려 나중에 더 큰 일 당할 수도 있다니까. 느낌이 쌔-하면 나중에 결국 문제가 생기더라고."
"하아, 아무래도 그래야 할까. 이제 와서 새로운 사람은 어디서 구하지? 김 실장한테 다시 전화해도 될까?"
혜정은 미연이 출퇴근을 해야 하는 상황이니 정순을 바로 그만두게 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 주말을 이용해 면접을 보면서 후임자를 천천히 알아보라며 몇 가지 팁을 알려줬다. 혜정의 이야기를 들으며 새로운 숙제를 받은 기분이었다. 미연은 전화를 끊자마자 머리카락을 양손으로 흐트러뜨리며 길게 한숨을 쉬었다. 다시 면접을 봐서 믿을 만한 사람을 만날 거라는 보장도 없었다. 급격한 편두통이 몰려왔다. 뒤통수 전체를 세게 죄여 오는 것 같은 두통이었다. 미연은 저도 모르게 앓는 소리를 냈다.
"저기…… 어디 아프세요? 괜찮으신가요?"
그 순간 나무 그늘 밑에 있는 벤치에서 갑자기 검은 머리통이 솟아올라 다가왔다. 미연은 깜짝 놀라 뒷걸음질을 쳤다.
"놀라셨다면 죄송해요. 저 기억 안 나세요? 지우 엄마 맞으시죠?"
검은 실루엣이 천천히 다가오면서 형체가 선명해졌다. 가로등 불빛 아래 비친 얼굴이 눈에 익었다. 지난 주말 아침 놀이터에서 만났던 102동 할머니 - 그녀는 지우에게 자신을 그렇게 소개했다 - 였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밖으로 나가자고 보채는 지우의 등쌀에 새벽 6시에 놀이터로 나왔을 때 벤치에 혼자 앉아 있던 초로의 여자였다. 여자가 먼저 지우에게 말을 붙이며 다가왔고, 졸린 눈을 부비며 비몽사몽하고 있던 미연 대신 아이와 놀아 주느라 땀을 뻘뻘 흘리기까지 했다. 아이의 장난을 스스럼없이 받아 주고 온몸으로 놀아 주어 고맙다는 인사를 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아, 네. 안녕하세요…… 딸아이 이름을 기억하시네요. 그런데 이 시간에 여기는 무슨 일로?"
"잠도 안 오고 너무 답답해서 나와 앉아 있었어요. 나 지난 주말에도 새벽에 여기 나와 앉아 있었잖아요. 바로 이 자리요."
"아, 네."
"제가 일부러 들으려고 들은 건 아닌데 어쩌다 보니…… 혹시 아이 돌볼 사람 구하시는 거면 제가 봐드리면 안 될까요? 지우가 너무 예뻐서. 그날 하루 봤는데도 계속 눈에 밟히더라고요."
새로운 시터를 구하는 일이 너무 막막해서였을까. 경력도 베이비시터 자격증도 없는 사람이었지만 미연은 이상하게 그녀에게 마음이 갔다. 주변이 깜깜한 가운데 가로등 불빛을 받고 서서 미연의 아이를 돌봐 주고 싶다고 말하는 여자에게서 설명하기 어려운 호소력이 느껴졌다.



6.
이튿날은 마침 토요일이었고, 놀이터에서 만난 102동 여자는 남편이 토요일마다 골프를 치러 가서 심심하다며 미연과 지우를 자신의 집에 초대하고 싶다고 했다. 미연은 면접을 보는 심정으로 아이를 유모차에 태워 102동으로 건너갔다. 102동 906호에 사는 정남희는 올해 환갑을 맞았으며, 식구는 경찰 공무원을 퇴직한 남편뿐이라고 했다. 남편은 퇴직 후에도 사설 경비업체에서 고문직을 맡아 바빴고, 서른이 넘은 아들은 해외 파견 근무 중이었다. 남희는 하루가 너무 무료해서 시터 일을 하려는 거라고, 월급도 액수 상관없이 주는 대로 받겠다고 했다. 대신 집을 하루 종일 비울 수 없어서 지우를 102동 자기 집에서 돌보고 싶다는 게 그녀의 요구사항이었다. 그 외 모든 조건은 미연이 원하는 대로 맞추겠다고 했다. 불안하면 자신의 집 거실에 CCTV를 설치해도 좋다고까지 했다. 그 말을 듣자마자 미연은 집 안 곳곳을 다시 둘러봤다. 장판 바닥은 얼굴이 비칠 정도로 반짝거렸고, 간소하게 정리된 가구나 가전제품에서도 먼지 한 톨 보이지 않았다. 집 안 전체에 은은한 향기가 감돌았다. 예상 밖의 제안이 당황스러우면서도, 미연은 왠지 남희를 놓치기 싫었다. 미연과 근무 조건에 대해 이야기를 하는 와중에도 남희는 계속 눈으로 아이를 좇았고 종종 눈을 맞추며 웃었다. 고민 끝에 미연은 매일 아침 남희의 집에 아이를 맡기고 퇴근하면서 찾아오기로 합의했다. 남희가 미연의 집에 드나들 일 자체가 없으니 가사에 대한 도움은 기대할 수 없었고, 아이 목욕도 집에 데려와 직접 시키기로 했다. 미연 부부가 회사에 가 있는 동안 아이만 돌봐 주는 조건으로 미연이 월급 160만 원을 제시하자, 남희는 1초의 망설임도 없이 좋다고 말했다.
기훈은 미연의 결정을 이해할 수 없다고 투덜대면서도 크게 문제 삼지는 않았다. 시터를 바꾸기로 한 미연의 판단에 찬성했다기보다는 그 판단에 대한 책임이 미연에게 있다는 식이었다. 정순이 있을 때보다 부부가 해야 할 일이 늘어난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낮 시간에 집이 비어 있긴 했지만, 세 식구가 생활하는 공간을 관리하기 위해서 드는 기본적인 품이 있었다. 매일 저녁 퇴근 후 한 사람이 아이를 씻기는 동안 나머지 한 명이 청소기와 세탁기를 돌려야 했다. 주말마다 기훈이 변기를 닦고 욕실 바닥 청소를 했고, 미연은 평일에 미처 치우지 못한 집 안 곳곳의 묵은 먼지를 치웠다. 미연은 회사와 육아 및 가사노동으로 쳇바퀴처럼 돌아가는 일상이 고단하면서도 보람차다고 느꼈다.
아이는 새로운 시터와 기대 이상으로 잘 지냈다. 남희가 사는 102동은 남동향에 미연의 집보다 두 배가 넓은 48평형이었다. 미연은 남희의 동의를 얻어 널따란 놀이매트를 주문해 그 집 거실에 깔았고, 지우 방에 있던 CCTV 카메라도 옮겨달았다. 지우가 그곳에서 쓸 아기 의자와 장난감도 추가로 주문했다. CCTV 화면 속에서 지우는 깨끗하고 넓은 거실을 누비며 환하게 웃고 있었다. 남희는 지우의 머리를 곱게 빗겨 주고 팔다리를 주물러 주었다. 남희가 간지럼을 태우며 장난을 치자 아이는 거의 넘어갈 듯이 깔깔 웃었다. 남희는 아이의 이마에 하루에도 몇 번씩 입을 맞췄고, 노래를 불러 주면서 아이와 함께 춤을 췄다. 이제 걸음이 제법 똘똘해진 지우는 종일 남희 뒤만 졸졸 쫓아다녔다.
남희는 미연을 미연 씨, 라고 불렀다. 미연은 아기 엄마도, 사모님도 아닌 그 호칭이 좋았다.
"미연 씨는 나가서 본인 이름으로 자기 일 하니까 얼마나 좋아. 나 때는 그런 거 상상도 못 했는데 지금 생각하면 참 바보같이 굴었던 거지."
남희는 지나가듯 과거의 이야기를 하곤 했는데, 그때마다 말투나 표정에서 묘한 회한이 묻어났다.
미연은 남희를 부를 적절한 말을 찾지 못해 되도록 호칭을 생략했다. 102동 할머니라고 부를 때도 있었다. 남희에게 직접 말하는 게 아니라 아이를 중간에 두고 "102동 할머니께 인사드려야지."라고 말하는 식이었다. 그런 미연에게 남희는 자신을 엄마라고 불러 달라고 했다. 자신은 딸이 없어서 정말 미연을 딸처럼 생각한다고, 친정 엄마라 생각하고 편하게 여겨 달라는 요구가 처음에는 마냥 부담스러웠다. 하지만 재차 조르듯 이야기하는 남희의 청을 거절하기가 어려웠다. 병원을 찾는 어르신들에게 곧잘 어머님, 아버님이라고 불렀던 것을 떠올리면서 그렇게 부르지 못할 이유도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연은 남희를 차마 엄마라고는 부르지 못하고 102동 어머님이라고 불렀다. 정말 이상하게도 어머님이라고 부르기 시작하면서 남희에게 마음 한편을 의지하게 됐다.
남희도 단점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말이 많은 편이었고, 남희가 늘어놓는 이야기의 절반 이상은 신세한탄이었다. 어쩌면 그것은 남희 또래 여성들이 가지는 공통적인 특징일지도 몰랐다. 미연은 아이를 이렇게까지 예뻐하고 아껴 주시니 신세한탄쯤은 얼마든지 들어줄 수 있다고 생각하다가도, 이야기가 길어질 때마다 급격한 피로를 느끼곤 했다.
"미연 씨는 나한테 고맙다고 하지만 내가 더 고마워. 나는 정말 지우를 만나서 사람답게 살게 됐어. 실은 내가 지난해 연말부터 마음이 너무 황폐했거든. 밤에 잠도 잘 못 자고, 자다 깨서 밤이든 새벽이든 밖에 나가 놀이터 벤치에 멍하니 앉아 있고 그랬다고요, 내가. 근데 지우를 만난 후로 그런 게 싹 사라졌어. 지우를 보면 불안한 마음도 사라지고, 내가 이 아기에게 뭘 해줄까 고민하면서 시간을 보내게 돼서 너무 행복해. 이런 말하면 이상하게 보일 줄 아는데, 미연 씨 난 지우를 너무 사랑해. 아들 키울 때도 이런 감정은 느껴 보지 못했는데 말이에요. 그때는 너무 힘들기만 했어. 시부모에 시할머니, 시동생, 시누이들까지 대식구와 같이 살면서 밥하고 빨래하느라…… 내가 낳은 내 새끼는 제대로 안아 보지도 못하고 키웠어. 시어머니와 시할머니가 끼고 있는 통에 나는 가까이 갈 시간도 없었지. 하루 종일 식모처럼 일만 했다니까. 미연 씨는 그게 어떤 건지 상상도 못 할 거야…… 하루 종일 허리 한 번 펴기가 힘들었지. 지금처럼 뜨거운 물이 펑펑 쏟아지지도 않고, 지금처럼 드럼세탁기나 건조기가 있기나 했나. 그러고도 시어머니는 나 고생한 거 알아주기는커녕 당신이 손주 대신 키워 줬다고 생색만 냈지. 우리 시어머니는 정말 독한 사람이었어…… 지금도 치가 떨릴 지경이야."
어느 늦은 밤 미연의 핸드폰에 깔린 CCTV 어플이 자동 업데이트 됐다가 저절로 실행된 일이 있었다. 미연이 지우를 데리고 가면 거실 CCTV를 껐는데 그날은 남희가 깜빡한 모양이었다. 자정이 넘은 시각 102동 906호 거실 광경이 미연의 핸드폰 화면에 떴다. 거실 불은 꺼져 있었고, 텔레비전에서 나오는 옅은 불빛만 소파에 앉은 남희를 푸르스름하게 비추고 있었다. 남편은 안방으로 들어갔는지 보이지 않았고, 혼자 거실을 지키고 앉아 있는 남희의 어깨가 축 처져 보였다. 주변이 어두워 표정이 제대로 보이지도 않았는데 실루엣만으로도 음산하고 울적한 기운이 전해졌다. 지우가 노닐 때에만 여기가 사람 사는 집처럼 느껴진다며 아이를 꼭 끌어안던 남희의 얼굴이 떠올랐다.



7.
미연은 사무실에서 일을 하다가도 틈틈이 핸드폰으로 CCTV를 들여다봤다. 남희가 못 미더워서 감시를 하려는 게 아니라 지금 두 사람이 뭘 하고 있는지 궁금해서, 아이가 보고 싶은 마음에 CCTV 어플을 열어 보곤 했다. 남희가 지우를 아기 의자에 앉혀 놓고 밥을 먹이는 중이었다. 지우는 아기 새처럼 입을 크게 벌려 음식을 받아먹고 있었다. 아이는 음식을 먹다 말고 뭐라 뭐라 소리쳤다. 미연은 아이의 목소리를 듣고 싶어 이어폰을 끼고 볼륨을 높였다. "함미, 함미, 무! 무!" 물을 달라는 뜻이었다. "응, 할미가 물 갖다 줄게." 남희가 부엌으로 잠깐 사라졌다. CCTV 카메라가 거실에서 기역자로 꺾이는 구조의 부엌 내부까지 비춰 주지는 않았다. 부엌과 부엌 쪽으로 붙어 있는 창고방, 그리고 나머지 방들이 CCTV의 사각지대인 셈이었다. 하지만 아이는 주로 거실에 머물렀고 부엌으로는 거의 가지 않았다. 그리고 미연은 남희의 성품을 믿었다. 카메라가 없는 곳에서 아이에게 해코지를 할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때로는 남희가 미연보다 아이를 더 끔찍하게 위한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미연은 아이 밥으로 진밥 형태의 이유식을 주문해 먹였는데, 남희는 배달 이유식이 믿음이 가지 않는다며 얼굴을 찌푸렸다. 남희는 아침마다 아이와 함께 맡긴 이유식을 돌려보내고 아이가 먹을 것을 직접 만들어주기 시작했다. 아이 보는 일만으로도 힘든 와중에 음식까지 부탁하기는 미안했기에, 지우가 먹을 것은 준비해 보내겠다고 해도 남희는 고개를 저었다. 자신이 만든 것을 더 잘 먹는 지우를 보면 힘들기는커녕 신이 난다고 했다. 이유식 조리는 계약 조건에 없던 일이었다. 미연은 이유식을 구입하는 돈만큼 추가로 남희의 계좌에 입금했다. 남희는 괜한 짓을 한다며 미연을 타박했고, 그 돈으로 지우 옷과 장난감을 사줬다. 미연은 그런 남희가 부담스러우면서도 고마웠다. 내가 정말 전생에 나라를 구해서 좋은 시터를 만났나,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남희 덕에 미연은 걱정 없이 업무 시간에 일에 전념할 수 있었다. 지난 분기에는 서비스 품질 평가 점수 부문에서 처음으로 본원을 추월했다. 자신은 운이 좋은 편이라고, 도움을 주는 주변 사람들 덕에 출산과 육아 문제로 인한 여러 가지 고비들을 그나마 수월하게 넘을 수 있었다고 안도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승주가 문제를 일으키면서 미연은 복직 이후 최대 위기를 맞게 됐다.
팀장인 미연이 직접 민원인과 통화를 할 일은 극히 드물었다. 하지만 약이 오를 대로 오른 노인을 진정시키기 위해서는 결국 미연이 직접 통화를 하는 수밖에 없었다. 승주와 전화로 다툰 노인은 자신이 만족할 만한 수준의 사과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자신이 갖고 있는 녹음 파일을 언론에 공개하겠다며 길길이 날뛰었다. 언론에 알리겠다, 고소 고발하겠다는 협박은 악성 민원인들이 가장 자주 쓰는 협박이었지만, 노인의 말이 시시한 협박으로만 느껴지지 않았다. 노인은 보수 신문에서 활약하고 있는 유명 칼럼니스트였다.
노인은 다른 병원에서 대장암 3기 진단을 받았고, 보름 전 미연이 근무하는 병원의 C교수에게 수술을 받으려 전원 했다. C교수는 우리나라에서 손꼽히는 외과의로, 분원을 개원하면서 이곳 암센터로 옮겨 수술을 집도하고 있었다. 본원을 마다하고 신도시에 있는 분원 암센터를 찾는 환자의 대부분이 C교수에게 수술을 받으려는 사람들이었다. 노인은 C교수에게 수술을 받으려면 3개월 이상 기다려야 한다는 안내에 버럭 화를 냈다. 내가 누군지 아느냐, 로 시작해 대답하는 족족 말꼬리를 잡으며 시비를 거는 노인을 장장 40여 분에 걸쳐 응대한 통화 녹음을 듣다 보면 오히려 승주가 안쓰러울 지경이었다. 노인이 문제 삼은 것은 43분 30초경의 발언이었다. 예정된 수술 날짜를 당겨 주는 것은 원칙적으로 불가하다는 말만 반복하던 승주에게 노인이 화를 내면서 "그럼 그사이에 내가 죽기라도 하면 어쩔 거냐, 전이가 되어서 온몸에 암이 퍼지면 네가 책임을 질 거냐?" 하고 소리를 질렀다. 승주는 싸늘한 말투로 말했다. "그렇다 하더라도 어쩔 수 없습니다. 현재 상황에서 제가 도와드릴 수 있는 부분은 없습니다." 그 말을 들은 노인은 이성을 잃고 승주에게 온갖 욕설을 퍼부었다. 75세의 암 환자에게 "죽어도 어쩔 수 없다"고 한 것은 승주의 말실수가 맞았다. 그리고 노인이 언론에 공개하겠다고 한 것은 그 문제의 발언이 담긴 1분짜리 녹음 파일이었다.
승주는 노인의 요구를 받아들일 수 없다고 말했다. 오히려 노인이 승주에게 퍼부은 모욕적인 발언에 대해 사과 받고 싶다고, 자신은 감정노동자 보호법에 의거해 보호받을 권리가 있다고 주장했다. 승주의 말이 맞았다. 하지만 70대 노인이 전화상담 업무를 하는 20대 여성에게 이 정도 폭언을 하는 일은 너무도 흔해 뉴스거리조차 되지 않았다. 반대로 "A대학 병원 직원, 말기 암 환자에게 막말. 수술 못 받아 죽더라도 어쩔 수 없어…"와 같은 타이틀로 기사가 나간다면 그날부터 병원 고객센터는 빗발치는 항의 전화로 업무가 마비될 것이 분명했다.



8.
그런 날이 있다. 아침에 눈 뜬 순간부터 잠자리에 들기까지 불운과 악재가 연속으로 목을 죄여 오는 날, 미연이 그날 하루가 악몽처럼 느껴졌다. 퇴근길 운전석에 앉은 미연은 하루 종일 소득 없는 일로 몸과 마음이 너덜너덜해진 기분이었다. 미연은 오전 내내 외부 행사로 바쁘게 뛰어다니다가 오후에 사무실에 들어오자마자 전화로 욕을 해대는 노인을 상대해야 했다. 승주와 노인의 한 시간에 달하는 통화 녹음 내용을 듣고 나서, 승주를 불러 30분 넘게 면담했다. 하지만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고 아마 노인은 다음날 다시 전화를 걸어올 게 뻔했다.
아파트에 도착해 주차를 하고 난 후 미연은 바로 내리지 않고 룸미러에 얼굴을 비춰 억지웃음을 지으며 얼굴 근육을 이리저리 움직였다. 남희와 지우에게 속상한 기색을 보이고 싶지 않아서였다. 그날따라 아이도 속을 썩였다. 아이는 미연을 따라 집에 가지 않겠다며 떼를 썼다. 겨우 달래 신발을 신겼지만 현관에 서서 밖으로 나오려 하지 않아 미연은 말굽 모양의 도어스토퍼로 문을 고정시켜 놓은 채 아이와 한참을 실랑이를 벌였다. 가뜩이나 피곤한 가운데 아이까지 떼를 쓰자 미연의 심기는 점점 불편해졌다. 결국 아이를 억지로 들어 올려 데리고 나왔다. 아이는 집에 도착할 때까지 미연의 품에 안겨 버둥거리며 울었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미연이 집에 도착하고 몇 분 지나지 않아 기훈이 들어왔다. "왜 이렇게 연락이 안 돼? 오면서 전화 여러 번 했는데." 기훈이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미연은 그때서야 남희의 집 현관 신발장 위에 핸드폰을 두고 온 것을 알아차렸다.
항상 잠겨 있던 906호의 창고방 안을 그날 미연이 들여다보게 된 것은 우연이었다. 핸드폰을 찾으러 간 미연은 906호 앞에서 벨을 누르려다가 좀 전에 자신이 발로 내려놓은 스토퍼가 땅에 닿은 채로 현관문이 한 뼘쯤 열려 있는 것을 보고 그냥 안으로 들어갔다.
"어머님, 저 미연이에요. 핸드폰을 놓고 가서요."
미연은 현관에서 목을 길게 빼고 말했다. 남희는 대답이 없었고, 대신 부엌 쪽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다. "어머님, 저 잠깐 들어갈게요." 미연은 어디서 나는 소리인지 두리번거리며 찾았다. 부엌과 붙어 있는 작은 방 쪽에서 누군가 흐느끼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방은 창고 용도였고, 항상 잠겨 있는 방이었다. 창고 방 문이 열린 것을 보고 미연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쪽으로 다가갔다. 방 안에서 앙상하게 마른 노파와 남희를 발견한 순간 미연은 다리가 후들거렸다. 거의 백 살은 되어 보이는 늙은 여자가 방바닥에 엎드려 있었고, 남희는 선 채로 그 노파를 노려보고 있었다. 열린 문 사이로 퀴퀴한 냄새가 새어 나왔다. 남희는 미연이 문 뒤에 서 있는 줄도 모르고 거의 이성을 잃은 것처럼 노파에게 소리를 질렀다.
"이 노인네야 미치려면 곱게 미쳐! 먹기 싫으면 처먹지를 말든가."
머리카락에 밥풀을 잔뜩 붙인 노인이 네 발 짐승처럼 엎드려 손으로 땅바닥에 죽을 짓이겼다가 그것을 다시 주워 먹었다. 아까 낮에 지우가 먹은 것과 똑같은 쇠고기버섯죽이었다. 그 광경을 보고 놀란 미연이 자신의 입을 틀어막으며 뒷걸음질을 쳤다. 그 순간 미연을 발견한 남희가 더 놀라 소리를 질렀다. 노파는 밥풀을 잔뜩 묻힌 손으로 이불을 잡아당겼다가 손바닥을 펴서 그 위에 비벼대기 시작했다. 미연은 눈앞에 보이는 광경을 믿을 수 없었다. 남희는 낮 시간에 지우와 둘이서만 집에 있다고 말했다. 우연한 계기가 아니었더라면 미연은 이 창고방에 있는 노파의 존재를 영원히 알지 못했을 것이다. 아마 이 노인이 죽어 나갈 때까지도.
"미연 씨, 놀라지 마. 내가 다 설명할게. 제발, 내 말 좀 들어줘요."
남희는 집 밖으로 나가려는 미연을 억지로 붙잡았다.
"시어머니인데 지금 치매가 심하셔. 지난 연말까지 요양병원에 계시다가 죽어도 병원은 싫다는 바람에 이렇게 집에 모셔오게 됐어. 나야말로 저 노인네 이 집에 데리고 오는 거 죽기보다 싫었어. 내가 저 노인네한테 당하고 산 세월이 어떤 건지 미연 씨는 모를 거야. 그거 알면 미연 씨도 나 이해할 텐데…… 내가 당한 거에 비하면 저 노인네는 말년에도 나한테 효도 받고 사는 거라고. 미연 씨가 오해할까 봐 말하는 건데 식사를 밥상에 차려 줘도 저렇게 밥그릇을 땅바닥에 놓고 손으로 먹으려고 들어. 내가 저렇게 먹으라고 한 거 아니야. 매일 차려 주는 밥도 저렇게 방바닥이며 이불에 다 쏟아 놓아서 내가 저거 치우느라…… 미연 씨는 내 속 몰라. 미리 말 못 해서 정말 미안한데, 그동안 시어머니랑 지우는 한 번도 마주친 적 없어. 지우가 있는 동안은 이 방에서 나온 적이 없거든. 어차피 기저귀를 차니까, 화장실까지 이 방에서 모든 것을 해결하는 거나 마찬가지야. 정말 걱정 안 해도 돼."
미연은 아무런 대꾸도 없이 소파에 그대로 앉아 있었다. 남희가 다가와 달래듯 말하며 손을 잡으려 했고, 미연은 그 손을 매몰차게 뿌리쳤다. 남희의 설명을 듣고도 미연은 그녀를 향한 경멸의 눈빛을 거둘 수가 없었다. 미연은 저 방의 진실을 알게 된 것을 다행으로 여겨야 할지 불행으로 여겨야 할지 혼란스러웠다. 남희는 마음씨가 비단결 같은 사람이라고, 누구에게도 모질게 굴 수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노인의 밥그릇을 발로 툭툭 차는 광경을 직접 눈으로 보게 되니 충격이 가시질 않았다. 미연은 남희에게 눈물이 날 정도로 배신감을 느꼈다.
그날 밤 미연은 잠자리에 누웠다가 이불을 걷어차고 나와 거실을 한참 서성였다.
- 미연 씨 화 풀어요. 달라진 건 아무것도 없어요. 나 나쁜 사람 아닌 거 미연 씨도 잘 알잖아요
남희가 보낸 메시지를 읽으니 더 화가 났다.
혜정에게 어떻게 해야 할지 묻자, "어렵다, 어려워."라는 말만 돌아왔다.
"애한테는 너무 잘하는데, 시모를 학대하는 사람인 거잖아. 근데 사람이니까, 그럴 수도 있지 않나? 그 아줌마 입장도 아예 이해가 안 되는 건 아니야."
문제는 미연은 그 광경을 봐버렸다는 것이다. 불과 몇 미터 거리에 죽음을 기다리는 노인이 하루 종일 갇혀 있는데,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가 그 집 안 곳곳을 천진난만하게 뛰어다닐 생각을 하면 소름이 끼쳤다.
"그건 그렇다. 야, 진짜 어렵네."
"아무래도 새로운 사람을 구해야겠지? 이제 지우도 좀 컸으니 어린이집에 보내는 게 나을까. 그냥 솔직하게 말해 줘. 너라면? 너라면 어떻게 할 거 같아?"
"나라면, 내 아이를 처음부터 그런 집에 보내지 않지."
그 순간 미연은 기분이 확 상했다. 더 이상 혜정과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았다.



9.
다음날 아침, 미연은 평소보다 일찍 집을 나섰다. 아이의 간식과 기저귀, 옷가지를 챙긴 가방을 기훈에게 건네주며 지우를 102동에 대신 데려다 달라고 말했다. 영문을 모르는 기훈은 무슨 일이 있느냐고 물었다. 미연은 아침 일찍 본부장의 호출이 있다고 짧게 답했다. 전날 밤 미연은 남희의 일을 기훈에게 말할까 고민하다가 하지 않았다. 제대로 알아보지 않고 아이를 맡겼다고 자신을 탓할 것만 같았다.
본부장의 호출이 있다는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승주 문제가 본부장 귀에까지 들어간 것이다. 이 일만 아니었다면 우선 오늘 하루라도 휴가를 냈을 것이다. 미연은 아이를 102동에 보내는 것이 정말 내키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본부장은 미연을 불러 앉혀 놓고 승주나 진상 고객에 대해서는 별 말을 하지 않은 채 미연의 신상에 대한 이야기만 한참 물었다.
"백 팀장, 아이는 잘 크나요? 육아휴직에서 복직한 지 얼마나 됐죠? 한 일 년 쉬었더랬죠?"
"아닙니다. 출산휴가 3개월, 육아휴직 6개월, 총 9개월 쉬었고 복직한 지는 5개월 됐습니다."
"그랬군요.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됐나. 5개월이면 업무 파악은 충분히 됐겠네요."
업무 파악이 끝난 지가 언젠데, 복직한 당일부터 발바닥에 땀나도록 병원 곳곳을 누비며 일하고 있는 사람에게 할 소리는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미연은 잠자코 듣고 있었다.
"백 팀장. 본원에 있을 때 말이에요. 내가 가족계획 물어봤을 때, 아이 없이 살 생각이라고 하지 않았나? 물론 출산 정말 축하하고 너무 잘 된 일이에요. 그런데 내 입장에서는 서운한 것도 사실이었어요. 계획이 있으면 있다고 그때 말을 해줬으면 좋지 않았을까. 아니면 신변에 변화가 생겼을 때 그때 바로 이야기해 줬더라면 좋았겠다, 개원하자마자 팀장이 육아휴직으로 자리를 비우니까 내 입장에서는 참 곤란한 부분이 있더라고요. 분원 개원하면서 내가 백 팀장 일부러 이쪽으로 데리고 온 건 알고 있죠? 내가 정말 백 팀장한테 기대가 컸거든. 아니, 지금도 기대가 커요."
미연은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재작년 인사 시즌 때 면담 자리는 미연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정말 그때까지도 아이를 낳을 계획이 없었다. 미연이 팀장 승진 명단에 올랐다는 소문이 돌 무렵, 아이를 임신했다는 것을 알게 됐다. 미연은 혹시 인사상 불이익을 당하게 될까 봐 팀장으로 승진해 분원으로 자리를 옮기고 나서도 배가 불러올 때까지 회사 사람들에게 임신 사실을 숨겼다.


노인은 승주가 자신을 찾아와 무릎을 꿇고 사과할 것을 요구했다. 말이 되지 않는 요구였지만 일이 더 커지는 걸 막으려면 승주를 설득해야 했다.
"도저히 못 하겠어요. 마음에서 우러나오지 않는 사과가 무슨 의미가 있다고, 저렇게까지 집요하게 구는 걸까요. 왜 죄 없는 사람한테 무릎을 꿇어라 마라 하는 건데요?"
승주가 분하다는 듯 주먹을 쥐고 씩씩거렸다. 미연은 승주를 달래며 말했다.
"승주 씨, 세상에는 우리가 이해하기 힘든 종류의 사람들이 있어. 승주 씨 속상한 마음 모르는 바 아니지만, 마음은 그냥 오늘 하루만 회사 캐비닛에 넣어 두고 가자. 나도 같이 갈게. 승주 씨가 못 하겠다면 그냥 내가 대신 꿇을게. 승주 씨가 나랑 같이 가주는 것까진 할 수 있지? 이따 6시에 출발하자."
"팀장님이 가서 무릎을 꿇으신다고요?"
승주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응, 못 할 것도 없지. 난 병원과 우리 팀을 위해서라면 그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해."
승주는 아무 대답이 없었다. 미연이 이렇게까지 나오면 승주도 거절할 수 없으리란 걸 알았다. 승주가 더 이상 토를 달지 않는 건 본인도 따르겠다는 뜻이라고, 미연은 그렇게 이해했다.



10.
노인의 집은 구도심에 위치한 전원주택 단지였다. 그중에서도 정원수가 가장 아름다운 집이었다. 막상 과일바구니를 들고 집에 찾아가자 노인은 젠틀한 미소를 지으며 미연과 승주를 집 안으로 들였다. 무릎을 꿇으라고 하지도 않았다. 대신 미연과 승주는 노인의 아내가 내놓은 다과를 앞에 두고 무릎을 모으고 앉아 노인이 늘어놓는 일장 연설을 한 시간 넘게 들어야 했다. 직업윤리란 무엇인가, 젊은이들은 인생을 어떤 자세로 대해야 하는가에 대한 진지한 연설이 길게 이어졌다. 노인은 정말 암 환자가 맞긴 한 건가 의심스러울 정도로 기력이 좋았다. 미연은 저녁도 먹지 못한 채 하염없이 이어지는 노인의 잔소리를 들으면서 차라리 깔끔하게 무릎이나 한번 꿇고 집에 가는 게 낫겠다고 생각했다.
미연은 노인의 집을 나서면서 죄송하다는 말과 사과를 받아 주셔서 감사하다는 말을 여러 번 반복하며 고개를 숙였다. 노인은 오만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차에 타자마자 긴장이 풀린 미연은 길게 한숨을 쉬었다. 조수석에 앉은 승주도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우울하네요. 배도 고프고. 팀장님, 저 입맛 없어서 아까 점심도 굶었어요."
"응, 그랬구나."
미연은 건성으로 대답하며 내비게이션 목적지를 우리 집으로 설정했다. 하필이면 기훈도 야근이라 아직 아이가 102동에 있었다. 서둘러 시동을 걸어 전원주택 단지를 빠져나오면서 미연이 물었다.
"승주 씨 집이 어디라고? 가다가 요 앞 지하철역에 내려 주면 될까?"
"팀장님, 저 저녁 좀 사주시면 안 돼요? 우리 배고픈데 어디 가서 밥 먹고 가요. 이대로 집에 들어가려니까 너무 우울해서요."
미연은 미간을 찌푸렸다. 끝까지 문제를 일으켜서 미안하다는 말 한 마디 없었다. 승주 때문에 저녁 8시가 넘은 시간까지 아이를 남의 손에 맡겨 두고, 저녁도 먹지 못한 채 미친 노인네의 지청구를 들어야 했다. 심지어 과일바구니도 법인카드가 아닌 미연의 신용카드로 구입한 것이었다. 그런 것은 아랑곳하지 않은 채 우울하다고 징징대기나 하는 승주에게 미연은 분노를 느꼈다. 감정을 애써 억누르며 미연이 말했다.
"내가 맛있는 저녁이라도 사주고 싶은데 어쩌지? 나도 지금 이웃집에 아이를 맡겨 놓고 나온 상황이라 빨리 들어가 봐야 하거든."
"어쩔 수 없죠. 근데 팀장님, 팀장님은 누구 편이세요?"
"응? 그게 무슨 소리야?"
"전 팀장님은 제 편이 되어 주셔야 한다고 생각해요. 아시잖아요, 저 잘못 없는 거."
이 아이는 여기가 동아리인 줄 아는 건가. 미연은 다시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 네 편 내 편이 어디 있니, 이건 그냥 일일 뿐이야. 어린애처럼 굴지 마. 미연은 승주를 싸늘하게 쳐다보며 이런 충고를 해주고 싶었다. 하지만 하고 싶은 말을 삼킨 채 지하철 역 방향으로 차를 몰았다. 승주 같은 아이에게 앙심을 품게 해봤자 좋을 게 없었다. 어차피 서비스 품질 평가에서 최하위 점수를 기록하고 있는 직원이라 내년에 계약 갱신은 힘들어 보였다. 차 안은 침묵이 감돌았다.
"기분 나쁘셨다면 죄송해요. 저도 너무 억울해서 그래요."
"아니야, 승주 씨. 승주 씨 입장에서는 억울하지. 내가 왜 모르겠어. 난 당연히 승주 씨 편이야. 저녁 같이 못 먹어서 미안해. 내가 내일 점심 맛있는 거 사줄게."
"네, 고맙습니다. 저는 저 앞에 세워 주세요. 여기서 내려서 지하철 탈게요."
승주가 짧게 목례를 하고 조수석에서 내렸다.
비상등을 켜놓고 잠깐 갓길에 차를 댔던 미연은 승주가 내리고 나서도 한동안 출발하지 못하고 핸들에 얼굴을 파묻고 있었다. 또다시 편두통이 몰려왔다. 어서 지우를 데리러 가야 하는데…… 심호흡을 하며 다시 고개를 들어 보려 했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미연은 운전석에 비스듬히 몸을 기댄 채 핸드폰을 들어 CCTV 어플을 켰다. 102동 906호 거실이 화면에 떴다. 빈 거실만 덩그러니 나타났을 뿐 아이와 남희는 보이지 않았다. 매일 보던 거실 풍경이 낯설고 무섭게 느껴졌다. 미연은 소리라도 들어 보려고 허겁지겁 볼륨을 최대한으로 키웠다. 핸드폰에서 치익 하는 잡음이 비어져 나왔다. 아이의 가늘고 약한 목소리쯤은 모두 덮어버릴 정도로 크고 불쾌한 기계음이 귓전을 때렸다. 미연은 초조한 손길로 카메라 각도를 이리저리 움직이면서 줌 기능을 실행시켰다. 아이의 모습을 도통 찾을 수 없었다. 거실 너머 보이지 않는 화면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확인하려고 미연은 두 눈을 부릅뜬 채 핸드폰을 들여다보았다.


















김유담

작가소개 / 김유담

1983년 부산에서 태어나 경남 밀양에서 성장했다. 2016년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핀 캐리」가 당선되어 작품 활동 시작. 소설집 『탬버린』이 있다.


《문장웹진 2020년 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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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하는 마음 없이

좋아하는 마음 없이 김지연 안지는 이른 결혼을 했는데 실패로 끝났다. 아니, 그걸 실패라고 할 수 있을까? 이혼을 한 건 사실이었지만 안지는 자신의 인생 여정에서 그때 이혼한 일을 실패라고 단정 지을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 뒤로 더 행복해졌다고 할 수는 없을지언정 조금 더 자기 자신에 가까운 삶을 살게 된 것은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혼이라는 단어를 떠올릴 때면 늘 그에 대해 변호하고 싶은 여러 말들이 떠오르곤 했기 때문에 처음부터 결혼 같은 건 하지 않는 편이 더 나았을 거라는 생각을 하곤 했다. 때문에 이혼했다는 사실은 안지의 비밀은 아니었지만 먼저 나서서 밝히지도 않았다. 어릴 때 안지는 무척 전형적인 사람이 되고 싶었다. 구체적으로 그런 표현을 떠올리지는 않았다. 그저 자신이 속해야 하는 집단에서 튀지 않는 사람, 아주 평균적인 사람이고 싶었고 그런 사람이기 위해서 부단히 노력을 했다. 찬반투표를 할 때면 눈치를 보다가 다수의 의견에 따라 슬그머니 손을 들었다. 친구가 좋아하는 가수를 따라서 좋아하고 친구의 것과 비슷한 브랜드의 신발을 사서 신었다. 친구들이 싫어하는 선생을 따라서 싫어했다. 사실 안지는 그 선생에게 남몰래 호감을 갖고 있었지만 친구들과 함께 떡볶이를 먹다가 술술 흘러나온 그 선생에 대한 욕을 듣고 재빨리 노선을 바꿔 함께 욕을 했다. 한동안 안지는 수학 시간마다 왜 애들은 저 선생을 싫어할까? 에 대한 답을 알고 싶어서 더 열심히 선생의 행동거지를 살폈다. 수학을 가르친다는 점만 빼면 딱히 나무랄 데 없는 사람이었다. 학생이 쉽게 답할 수 없는 내용을 골리듯 물어보지 않았고 무엇보다 학생들한테 사과를 할 줄 알았다. 뭔가 잘못 알고 섣불리 화를 냈을 때, 그러다 결국 진실을 알게 되었을 때, 다른 선생들은 그러게 헷갈릴 만한 짓을 왜 하고 다니느냐고 도리어 짜증을 부렸는데 그 선생은 재빨리 미안하다고 말했다. 미안하다. 내가 잘못 알았어. 미안해. 가끔 안지는 머릿속으로 그 목소리를 재생해 보곤 했다. 그 때문에 선생이 더 좋아졌지만 여전히 싫어하기 위해 애썼다. 누구나 다 그런 식으로 청소년기를 보내지 않나? 내가 아닌 사람이 되어 보려고 노력하면서? 안지는 대학에 갔고 연애를 했고 졸업을 했고 취직을 했다. 결혼도 했다. 아주 평균적인 삶이었다. 조금씩 빠르기도 했다. 조바심이 나 있었으므로. 자신도 남들처럼 지극히 평범하게 살 수 있다는 것을 빨리 증명해 보이고 싶었으므로. 어느 정도 성공적인 것 같기도 했다. 남편이 바람이 나기 전까지는 그랬다. 식도 올리기 전 임신을 해 낳은 아이가 막 돌을 지난 참이었다. 임신이 아니었으면 결혼까지는 이어지지 않았을지도 몰랐다. 남편은 계속 후회하는 것 같았다. 그때 낙태를 밀어붙이지 않은 것을, 시간을 끌다가 영영 타이밍을 놓쳐버리고 만 것을, 어떤 결단력을 가지지 못한 자신을 자책했을지도 모른다. 그때 뼈저리게 깨달은 바가 있었는지 새로운 여자가 생겼을 때는 안지가 알아차리기도 전에 이혼을 해달라고 요구했다. 겨우 육 개월을 만났을 뿐

  • 관리자
  • 2024-07-01
소금 샹들리에

소금 샹들리에 정한아 호주에 사는 김이 오랜만에 귀국해서 친구들이 다 같이 모이기로 했다. 4명이 만나는 건 대략 7년여 만이었다. 방을 잡고 밤새 보자고 해서 오기 직전까지 망설였는데, 남편이 등을 밀었다. 정민이와 자신에게도 내가 없는 날이 필요하다고 큰소리를 치더니 정말 밤새 전화 한 통 없었다. 친구들과는 대학 동기였다. 전공은 문예 창작이었는데, 나는 2학년까지 다니고 학교를 그만뒀다. 그렇지만 정작 작가가 된 사람은 나뿐이라고 친구들이 투덜거렸다. 나는 작가가 아니라고 아무리 말해도 소용없었다. 그들은 십 수 년 전 내가 낸 단 한 권의 책을 기억하는 몇 안 되는 사람들이었다. 세 명 모두 미혼이었고, 아이를 가지지 않았다. 놀라울 정도로 예전 그대로인 친구들 사이에서 나만 철 지난 옷차림에 좀처럼 대화에도 섞이지 못했지만, 그런 것 때문에 마음이 상하지는 않았다. 오랜만의 서울 나들이에 술자리도 즐거웠다. 좋은 친구들이었다. 7년 전 정민이 자폐 스펙트럼 장애 판정을 받았을 때 그들은 자신의 일처럼 울어 줬고, 이후에도 종종 아이의 간식과 선물을 집으로 보내 줬다. 서서히 연락을 거둔 것은 내 쪽이었다. 애써 관계를 유지하는 일이 힘에 부쳤을 뿐, 그들에게 섭섭한 마음은 조금도 없었다. 지난 몇 년 동안 나는 집이 아닌 곳에서 밤을 보낸 적이 없었다. 다들 술에 취해서 침대로 간 뒤에도 좀처럼 잠이 오지 않아 휴대폰만 들여다보았다. cctv 속 거실은 엉망이었다. 엎어진 식판, 사방에 흩어진 블록 조각, 길게 늘어진 옷가지들. 남편은 불도 끄지 않고 아이를 재우러 방에 들어간 모양이었다. 나는 정지화면 같은 그 풍경을 한참 바라보다가 해 뜰 무렵에야 겨우 잠이 들었다. 다음날 우리는 점심을 먹고 헤어지기로 했다. 맛집마다 대기가 길어 종로의 좁은 골목을 돌고 또 돌았다. 앞장서 구글 맵을 보며 걷던 김이 갑자기 작은 서점 앞에서 멈춰 서더니 책을 사야겠다고 말했다. 지난 이사 때 내 책을 분실했다는 것이었다. 나는 집에 돌아가서 책을 다시 보내 주겠다고 김을 달랬다. 다섯 평도 안 되어 보이는 그 작은 서점에 내 책이 있을 리는 만무했기 때문이다. 김은 막무가내로 서점에 들어갔다. 할 수 없이 그녀를 따라 들어갔다가 전면 책장에 전시된 내 책을 발견했다. 죽은 친구를 만났다고 해도 그처럼 놀라지는 않았을 것이다. “미애 씨!” 그곳에서 누군가 나를 불렀다. 우아한 노부인이었다. 린넨 바지에 화이트 셔츠, 큼지막한 호른 목걸이를 한 여자는 환하게 웃으면서 나를 바라봤다. “반장님?” 나는 말끝을 흐리며 물었다. 여자는 성큼성큼 내 앞에 다가와서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나를 와락 끌어안았다. 누군가 나를 그렇게 안은 것이 너무 오랜만이라 온몸에 힘이 풀리는 것 같았다. 그녀는 오래전 나와 함께 공부했던 문우였다. H 백화점 문화센터 소설 창작 교실의 반장. 친구들이 책을 구경하는 사이 나는 그녀와 짧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ldqu

  • 관리자
  • 2024-07-01
그동안의 정의

그동안의 정의 최예솔 작정하고 사라진 사람은 작정하고 찾아야만 한다. 나는 윤정수를 작정하고 찾지 않았다. 보통의 남매 사이라는 게 정확히 어떤 건지는 모르겠지만 윤정수와 나를 그냥 보통 남매, 라고 하기에는 좀 어렵지 않을까. 윤정수는 나보다 4년 먼저 태어났다. 그리 적지도, 그리 많지도 않은 애매한 나이 차이 덕분에 윤정수와 나는 딱히 친해지지 못했다. 내가 초등학교에 입학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윤정수는 중학교에 갔고, 내가 중학생이 되었을 때 윤정수는 고등학교에 갔다. 물론 윤정수와 내가 영 친해지지 못한 건 우리의 나이 차이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윤정수는 내게 없는 사람에 가까웠다. 말수도 없고 센스도 없고 자존심도 없고 공부머리도 없고 돈도 없고······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나? 아무튼 남매 사이에 정이라도 있었다면 걱정이라도 했을 텐데 그럴 이유조차 없었다. 쥐뿔도 없는 윤정수니까. 특이사항이라곤 개그맨 윤정수와 동명이인이라는 것 정도밖에 없는. 그러니 윤정수가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집을 나갔다고 해도 이상할 것 하나 없었지. 뭐 내가 찾는다고 윤정수가 나타났을 거라는 보장도 없지만 나는 막연히, 어련히 때 되면 나타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했다. 하지만 윤정수는 죽을 때까지 나타나지 않았다. 물론 내가 죽은 것은 아니다. 윤정수가 죽었다. 내 나이가 이제 서른이니까, 윤정수는 서른넷에 죽었다. 이제 내게 남은 혈육은 없다······ 아닌가? 고모. 그렇게 부르지 마. 왜요. 낯설어. 저도 고모가 낯설어요. 윤현수는 맹랑하다. 윤정수와 장현아의 딸이라고 해서 윤현수. 그거 좀 유치하지 않니? 물었을 때 윤현수는 뭐 어때요 엄마아빠말곤 모르는데, 하고 대답했다. 이제 나도 아는데? 하니까 이젠 고모도 모르는 척해 달라고 했다. 참 나 어디서 이런 게 굴러왔는지. 현수야. 네. 네 엄마 입국 날이 언제라고 했지? 다음 주 토요일이요. 아직 한참 남았네. 고모도 고모 할일을 해요. 시간 금방 갈걸요. 알겠다 그래. 윤현수를 데리고 온 사람은 장현아다. 이제는 나흘쯤 됐으려나. 아침부터 현관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하도 시끄러워서 나가 봤더니 장현아가 윤현수의 손을 붙잡고 서 있었다. 장현아는 다짜고짜 윤정수를 아느냐고 물었고 나는 오랜만에 듣는 윤정수의 이름에 잠깐 벙쪘다가 네, 저희 오빠네요, 하고 대답했다. 조카입니다. 그날 장현아의 대사를 나는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그건 도저히 내가 아는 사람이 뱉을 만한 말이 아니어서 대사라고밖에는 표현할 수 없겠다. 아직도 문득 의심스러울 때가 있다. 윤현수가 정말 나의 조카가 맞고 장현아가 정말 나의 새언니가 맞을까. 가족관계라는 게 그렇게 단순하게 정리되는 거라면 이제까지 윤정수와 나는, 또 윤정수와 나와 우리의 부모는, 왜 이렇게 흩어지거나 죽거나 혼자 남을

  • 관리자
  • 2024-0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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