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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염, 오류, 오독

  • 작성일 2024-07-01
  • 조회수 157

   오염, 오류, 오독

   - 소설이 수행하는 ‘다시’


황유지


   마들렌을 먹으며 과자 부스러기와 차 한 모금이 어우러진 달콤한 환기 속에서 잃어버린 과거를 되찾는 일은 마르셀에게 행복을 준다. 그러나 발벡의 호텔방에서 신발을 벗으려다 문득, 할머니가 신을 벗겨 주었던 일을 떠올리는 것은 그에게 행복감을 주지 않는다. 죽은 할머니를 떠올리는 일, 그것은 “고통스러운 소멸”을 확인시킬 뿐이다.1)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 등장하는 이 일화는 과거를 부르는 일이 각기 다른 정서를 환기함에 대한 예시로 내밀어지며 ‘기억’에 착종되는 다양한 감정이 주체를 어떻게 흔들 수 있는지 넌지시 묻는다. 소멸의 확인도 그렇지만 미완, 불완전, 불만족인 채로 내버려둔 사건에 대한 기억의 소환 역시 난감하기는 매한가지인데, 그건 엄연히 그 일을 ‘다시’ 경험하는 것이라 모종의 감정적 자원을 요청하기 때문이다. 

   대중문화에서 이런 ‘다시’는 레트로로 나타난다. Retrospect, ‘추억’에 뿌리를 둔 이 말은 패션, 음악, 영상부터 먹거리, 금융상품에 이르기까지 그 반경을 확대하며 과거로 우리의 기억을 끌고 간다. 과거의 소환은 이 사회에 대한 일종의 환각제이자 자본주의라는 무한한 기계적 힘에 대한 제동, 그 중단의 본능적 발현이다. 이런 레트로는 과거에 대한 향수, 노스탤지어의 맥락으로 파악할 수 있는데, 고대인들에게 노스탤지어란 ‘되돌아가는 일(nostos)’을 하지 못하는 데서 생기는 ‘아픔(algos)’으로 이해된다. 그러니까 레트로는 돌아갈 수 없는(가본 적도 없는) 시절을 향한 자본주의적 환각제이다. 

   프루스트의 위대한 주제가 사물들을 처음 경험할 때의 무능력이라 파악하는 프레드릭 제임슨은 진정한 경험이 우리가 의식적으로 다른 것을 의도하는 동안, ‘눈가’를 통해 온다면서 그 가능성을 글쓰기에서 찾는다. 기어이 돈을 주고라도 사겠다는 환각성 추억과는 달리 기억을 통한 글쓰기는 상실한 것을 복원하려는 고도의 정신 작업이랄 수 있다. At the corner of eye, 거기가 바로 진정한 경험이 되돌아오는 자리로 가장 의도적인 두 번째 경험, 글쓰기는 그 형식이 된다. 2)

   글쓰기는 행해짐과 동시에 복수의 행위자를 탄생시킨다. 쓰는 자와 읽는 자,3) 이는 시차(時差)와 함께 탄생하며 텍스트가 현실과 맞닿은(혹은 결별한) 그 부위에 필연적으로 틈을 만든다. 대체로 모든 문제는 이 ‘틈’에서 태어나는 것처럼도 보인다. 틈은 이미 분리, 분절된 것으로 존재하면서 거기에 무엇을 메우든 결코 원본의 형태를 완벽히 구현할 수 없다. 원본처럼 복원한 것조차 복사본일 따름이라 틈은 그 자체 오류가 되는 것이다(가령 원본이 틀린 것이라 할 때도 제대로 수정된 본은 오류가 된다. 틀린 원본에 대해 기어이 맞추어진 진실이란 오류일 것이기 때문이다). 쓰여지면서 과거가 되며 그것이 쓰기로써 현재가 된다는 점에서 글은 그것이 가진 필연적 시간 ‘차이’와 함께 태어나고 그럼으로써 텍스트는 그 자체 현실을 오염시킨다고 할 수 있다. 흐르는 시간의 역행, 엉클기라는 오염 행위로의 텍스트가 내내 까슬거리던 과거, 그 무능의 시간을 폐기한다는 점에서 아브젝시옹(abjection)으로 이야기할 수 있을까? 그러니까 고통스러운 기억의 호출로서 글쓰기는 주체가 오염을 버림으로써 정제된 힘을 회복하게 되는 생존의 본능이자 조건 이기도 한 것처럼 보인다. 이때 과거는 역시 오염된 것이며 폐기의 수행 역시 오염물의 투척이라는 행위일 수 있다. 이럴 때 말해질 수 있는 글쓰기는 과거의 소환, ‘기억’을 동반하는 글쓰기이다.


   『빛의 과거』(은희경, 문학과지성사, 2019)에서 과거의 소환은 유경의 회고처럼 여겨지지만 내부에는 또 하나의 기억, ‘희진의 소설’이 놓이며 이 기억들은 충돌한다. 희진의 소설을 읽은 유경은 소설 속 자신의 모습이 유독 왜곡돼 있다고 느낀다. 



   “그녀가 본 나와 내가 본 그녀가 마치 자석의 두 극처럼 서로를 밀어내고 있었으므로 실제의 간격은 훨씬 더 벌어져 있었다.”(22쪽)



   “실제의 간격”이란 무엇일까? 독자는 이들의 기억 중 어느 것이 진실인지 추적해야 하는 것일까? 과거란 그 이름처럼 이미 지나간 것으로 기억하는 사람에 의해 ‘개인화’된 것이다. 기억이 오류를 포함할 가능성을 가리키는 이 말은 존재론적으로 독립적인 온전한 과거란 불가능함을 함축하기도 한다. 손상된 것으로서의 오류, 어쩌면 이것이야말로 기억의 속성일 것이다. 그런데 이 오류는 유독 기억의 주체인 당사자에게만은 보이지 않는데 더 꼬집어 볼 것은 이렇게 되살려진 기억, 특히 자발적으로 돌이킨 기억은 과거의 현재, 지금의 현재와 관련하는 ‘현재’에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이다.4) 정리해서, 과거란 기억이라는 회로를 통해 시간을 옮겨 앉으면서 현재에 끊임없이 작용한다는 것이다. 

   소설-내-소설은 유경을 “사유하게끔 강요하는 것과 맞닥뜨리는 우연성”,5) 즉 비자발적 소환을 유도하면서 소설 자체를 삽시간에 유경의 알리바이, 변명으로 바꾸어 놓는 장치로 기능한다. 주인공이 절름발이라는 이유로 『인간의 굴레』만은 읽지 않았으며 시를 쓸 때도 발음하기 어려운 단어는 쓰지 않는다는 데서 엿보듯 유경은 자신의 약점과 마주하는 것을 극도로 두려워하는 인물이다. 그녀는 말더듬증이 있었던 것인데 세계의 조각인 시어들을 한정하는 행위, 이 호명의 제한은 유경이 세계를 대하는 태도를 은유한다. 호명되지 않은 세계는 결코 내게 오지 않을 것이라, 그녀의 이런 소극성은 소설이 내부에 또 다른 소설을 내밂으로써만 한 인물의 과거를 수동적으로 추어올릴 수밖에 없는 이유로 성립한다. 희진은 유경에 대비해 보다 적극적으로 그 시절을 소환하며 ‘다시’를 욕망하는 인물인 것이다. 그럴 때 유경이 호출‘당하는’ 희진의 소설 『지금은 없는 공주들을 위하여』는 소설 내부의 현실 어디까지 끌고 들어갈 수 있나? ‘소설’이란 장치는 그만한 권리가 있을까?

 


   “ 『지금은 없는 공주들을 위하여』에는 내가 도무지 기억할 수 없는 에피소드가 하나 등장한다. (중략)

   나는 그것이 그 소설에서 거의 유일한 김희진의 픽션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녀는 그런 내 생각을 반박했다. 실제로 우리가 결혼식에 갔었다며 스무 살 무렵에 또래의 첫 결혼식인데 어떻게 그걸 기억 못 하냐고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 말을 듣고 집에 돌아와 책을 다시 읽어 봤지만 그 장면 어디에도 내 모습은 등장하지 않았다. 그 자리에 내가 없었다는 사실을 또 한 번 확인했을 뿐이었다.”(337쪽, 강조는 인용자)



   인용은 희진의 소설 한 부분에 대한 유경의 서술이다. 흥미로운 점은 유경이 소설을 온전히 소설로 수령하지 않고 실재의 재현처럼 받아들이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면서 그는 특정 에피소드만 콕 집어 ‘거의 유일한 픽션’이라 판별하고는 다시 그 픽션 속에서 ‘사실’을 또 한 번 확인하려 한다. 유경의 이런 태도는 우선 독자로 하여금 유경으로부터 거리를 벌리게끔 한다. 1인칭 주인공 화자에 대한 의심은 곧장 신뢰의 파기로 이어지고, 희진의 소설을 확인하는(읽는다기보다) 내내 진땀을 흘리는 것처럼 보이는 유경의 태도는 희진의 소설에 대한 질문에 닿는다. 그건 사실에 얼마나 더 근접해 있는가의 문제가 아닌, 과연 희진의 소설은 소설 쓰기의 윤리에 합당한 것일까? 와 같은 것이다. 소설이라는 장치만으로 희진은 유경의 과거를 소환하고 그를 과거 앞에 강제로 꿇어앉힐 수 있는 것인가? 각자가 바라보는 방향성, ‘시차(視差)’는 희진의 소설과 함께 내내 유경의 머릿속을 헤집는 “나는 나를 누구라고 알고 살아왔던 걸까”(300쪽)라는 질문과 “진실이 어디 있어. 각자의 기억은 그 사람의 사적인 문학이란”(334쪽) 희진의 말을 질문과 대답처럼 나란히 놓는다. 그럴 때 희진의 소설은 혹시 또 다른 형태의 폭력은 아닐까? 희진에게 소설은 교묘한 발설의 도구로 사실과 허구 사이를 미끄러지며 타인에게 겨누는 칼끝이라는 수단이 되고 있지는 않은가? 와 같은 질문은 파생된다. 이 문제적 텍스트는 우리에게 소설의 윤리, 자전 소설, 오토 픽션과 같은 질문을 전면화하고 있지는 않지만 묘한 기시감을 드리우며 기억을 다시금 불러내는 일과 그리하여 변형되고 말 ‘현재’에 대한 책임, 그 숙고를 요청하는 것처럼도 보인다. 


   한편 『미스 플라이트』(박민정, 민음사, 2018)가 소환하는 기억은 일기이자 편지 형식을 취한다. 정근이 딸 유나의 사인(死因)을 추적하는 플롯에 기댄 이 소설은 그러니까 멈춘 과거가 유나가 기록함으로써 한 번, 정근이 읽음으로써 또 한 번 현재로 돌아온다. 죽은 유나의 시간이 그렇게 정근 앞에 ‘존재’하게 된다.6)

   유나가 기억하는 군인 아버지, 정근의 세계는 부조리와 비리의 일상화로 압축된다. 그것은 일명 ‘납치사건’에 어린 유나가 적극 가담했다는 사실과 함께 정근 앞에 불쑥 그 실체를 드러낸다. 만삭의 몸으로 대령 댁의 김장을 돕다가 유산한 아내 앞에 망연하던 운전병이 하교하는 유나를 자신의 집에 데리고 와서 상심한 아내를 위로하려 했던 ‘납치극’에 대해 유나는 그것이 자발적 의지였다고 말했던 것. 납치에 공모함으로써 아버지의 세계를 부정하고 동시에 아버지의 ‘속죄양’으로서 그 세계를 건너가고자 했던 유나는 자라서 항공사 승무원이 되지만, 그 세계는 퇴역한 공군들과 감정노동자이자 성적 소비 대상으로의 여성 승무원이 있을 뿐인 거대한 판옵티콘이다. 그럼에도 기어이 폭력으로부터 놓여난 온전한 세계를 구축하고자 한 유나가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은 거대한 오류, ‘miss flight’뿐이었던 듯하다. 노조 활동으로 인한 X맨 제도의 희생양이 되어 온갖 음해와 오명이 달라붙은 유나의 죽음 뒤에 남겨진 “아빠, 여기서 실패하면 군말 없이 삶으로 돌아갈게요”(16쪽)라는 마지막 일기가 함의하는 바는 올바름이 삶 쪽에 서 있지 않다는 것일 테며, 세계의 회복 불능을 수긍해야만 했을 때 택한 죽음만이 삶의 연장이라는 뜻이기도 할 것이다. 그런 죽음은 실패의 모양새로서 불합리의 구조 속에 몸을 던진 한 인간을 되레 비합리적인 존재로 만들고 마는 ‘무능력’으로 닫힐 뻔한 사건이었으나, ‘다시’ 돌아옴으로써 무능의 오명을 벗을 기회를 기어이 확보한다.

   이들의 과거는 시차(時差)로 존재한다. 유나의 기록이 아버지를 부를 때, 아버지는 부재한다. 그리고 그 부름을 아버지가 확인할 때 유나는 부재한다. 그러니 이 서사가 아무런 답을 주지 않고 있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유나의 생은 끝났지만 그녀의 과거는 남겨진 정근 앞에 육중한 실체로 귀환한다. 이때 소환되는 과거는 정근이 알았던 과거도, 유나의 과거도 아니다. 그것은 전혀 새로운 얼굴의 과거, 정근과 유나가 각자의 방향에서만 바라본 과거와 다른 방향에 놓인 또 하나의 진실 가능성일 것이다. 이제 시시포스의 돌처럼 영원히 굴러 떨어지는 그 시간을, 정근의 현재는 피할 수 없고 그 육중함을 온몸으로 밀어 올리며 해독해야 할 과거의 암호들은 그의 삶으로 이제야 들어오기 시작한다. 현재의 정근이 그 암호를 푸는 데 얼마의 시간이 걸릴지 아무도 모르지만, 그것만이 정근이 살아내야 할 ‘다시’라는 시간처럼 보인다.  

 

   18세기 영국 새뮤얼 리처드슨의 『파멜라』, 『클래리사』와 같은 소설이 당대 영국 독자들을 열광케 한 동인의 중심에는 편지라는 양식의 차용이 한몫했다. 그것은 무엇보다 ‘사적인 감정’을 드러내는 데 적합했기 때문인데, 행동보다 감정을 먼저 상정하는 서간문 형식은 내러티브의 양식으로서 더 큰 전망의 변화를 반영하는 것으로 간주될 수 있었다.7) 기실 소설이야말로 고대라는 세계와 결별하며 개인주의적이고 사적인 지향이라는 방향의 정립을 가장 온전하게 반영한 문학 형식이다.8) 그러니까 이는 전에 없이 탄생한 개인주의 선호의 독자 인류의 탄생이 소설의 내러티브 체계를 변화시키는 동시에 그러한 소설이 현실과 조응하는 접합부를 잔뜩 융기시키며 전혀 새로운 ‘관계’를 만들어내기도 했다는 말로 풀이된다. 즉 편지라는 형식이 함의하는 은밀함, 그 ‘사적’인 것이 개인주의에서 태어난 당대의 독자들을 만족시켰다는 말이다. “다른 사람의 개인적 경험에 대해서는 완전히 동떨어진 것일 수밖에 없는 삶의 방식”9)을 소설은 담아내야 했는데, 리처드슨 전에는 인물들의 내면의 삶에 그처럼 거리낌 없는 참여의 기회가 없었다는 것이다. 여기서 내가 주목하고 싶은 바는 그러한 만남의 지점, 현실과 글쓰기의 접속 부위이다. 이 접속 부위가 어떻게 맞물리냐에 따라 ‘틈’의 모양새는 달라질 것일 텐데, 이는 다시 어떤 ‘관계’로 접속할 것인가의 문제로 말할 수 있겠다. 그러니 이 관계가 ‘지금’이라는 세계의 특질을 구분하는바, 이 글에서 들여오는 소설의 내적 형식은 세계와 접속하는 개인의 다발이라는 관계가 당사자성을 요청하는 한편으로 더욱 조밀하게 ‘나’의 진실성에 대한 담보를 요청하는 쓰는 자(말하는 자)의 욕구로 보인다.

 

   어떤 역사의 총체성으로 도저히 기입되지도 않는 ‘나’만의 과거라는 1인 역사 체계가 요청하는 이런 형식의 문제에 대해서라면 우리는 『계절은 짧고 기억은 영영』(이주혜, 창비, 2023)에서 또 다른 형태를 발견할 수 있다. 소설은 그 내부에서 ‘일기’를 쓰는데, 특이점은 이 작업이 여럿에게 공유되는 공동의 수행이라는 것이다. 어둠이 가장 깊은 육신을 드리우는 때, ‘자기만의 방’에서 홀로 반성적으로 쓰곤 하는 일기는 ‘연희방글스튜디오’에서 배우고 읽고 공유된다. ‘시옷’은 화자의 일기 속 주인공, 어린 ‘나’이다10). 일기 속에는 시옷이 열 살 무렵이던 1980년대의 삽화가 찬찬히 펼쳐진다. 시가지에 총 든 군인들이 흔히 눈에 띄고, 장학사가 시찰을 온다 하면 학부모들이 환경미화에 쓰일 물품을 할당받아 마련하고, 어린 학생들은 마룻바닥을 박박 문질러야 했던 시절 속에서 어린 소녀 시옷은 사내아이처럼 입고 사내아이의 머리 모양을 하고 자란다. 그것이 “시옷을 사내아이처럼 보이게 하려는 의도였”는지 “계집아이처럼 보이지 않게 하려는 의도였는지”(70쪽)는 모르지만 고학년 사내아이들은 소녀의 드레스를 들추고 팬티를 쥐어뜯는 추행을 장난으로 여기고, 남동생이 태어나자 “고추한테 터를 팔고, 우리 누나 장하다”(293쪽)는 칭찬을 듣는 그런 시절. 그 시절의 한복판에서 시옷은 차라리 사내아이로 오인될 때 하얀 낯빛과 아름다운 미성을 가진 소년일 수 있다. 시옷을 사내아이로 여긴 합창단 지휘자 선생님에게 시옷은 기대주가 된다. 그렇게 시옷은 사내아이로 그 시절을 통과하는 중이다.11) 그러나 방송국 특집 녹화를 앞두고 합창단 솔로로 뽑힌 시옷은 단복을 구입할 수 없는 사정이다. 우여곡절 끝에 옆집 애니의 옷, 그러니까 여자 아이의 옷을 입고 간 소녀 시옷은 선생님을 기만한 거짓말쟁이가 되어 무대에 서지 못한다. 그날의 수모와 오욕은 어린 소녀의 노래 주머니를 영영 잠가버린다.

   남자아이가 되고 싶어서가 아니라 남자아이여야만 자신의 자원이 빛나는 것일 수 있도록 바라고 바라보던 어른들의 시선이 지배하던 그날들은 지금까지도 화자의 노래 주머니를 열게 하지 못한 채 멈추어 있는 무능의 순간들이다. 한편 과거가 일기 속에서 돌이켜진다면 일기를 쓰는 ‘현재’의 ‘나’는 남편이 성폭행 가해자, 스토킹범으로 고발된 뒤 사과도 없이 당당하게 그녀를 사랑했고 운운하며 떠난 자리에 오도카니 남아 딸에게 그 진실을 터놓지 못한 채 불화하는 공황장애에 시달리는 사정에 놓여 있다. 소설은 현재에 일기 형식으로 과거를 ‘다시’ 불러와 나란히 놓는다. 그런 주인공의 일기 낭독에는 ‘소설 같다’는 평이 따르는데, 소설은 일기 쓰기 교실의 지도자인 소설가의 입을 빌려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일기는 자신의 경험을 진술하는 것이지만, 경험을 진술하기 위해서 반드시 기억이라는 회로를 통과해야 하는데 그 과정에서 완벽한 재현은 불가능하니까요. 그 아슬아슬한 경계에서 일기가 소설이 되기도 하고 소설이 사실의 진술이 되기도 하는 게 글쓰기의 연금술이 아닐까 생각합니다.”(129쪽)



   “소설을 따라가는 일기”12)라는 한 작가의 파일 폴더명에서도 엿보듯, 소설과 일기는 왜 서로를 넘나들고 있을까? 인용부에서 보듯 그것은 재현의 불가능성과 나아가 아슬아슬한 경계에 대한 검열 즉 쓰기 윤리의 작동에 대한 정도라는 것이 결코 정량화할 수 없는 성질로, 이 엄격하고도 모호한 경계에서 소설은 내부 장치로써 일기, 소설, 편지와 같은 양식을 도입하고 있다. 이 소설 내부에서 소설과 일기는 그 자체의 통약불가능성은커녕 쓰기라는 ‘다시’의 수행이 과거의 모양 그대로는 결코 현재에 기입될 수 없음을 확인시킨다. 달라진 모양새, 즉 당사자성의 무게를 덜어주는 ‘소설같음’과 더불어 일기를 주관성으로부터 놓여나게 하는 공유라는 형식은 서로를 넘나들며 개인의 이야기를 ‘이야기 바깥’ 즉 현장과 실제 속으로 나오게 한다. 이야기를 들려주고 듣는 ’관계의 시간‘을 통해 대화의 상대, 실재, 타당성에 대한 신념을 공유가능한 새로운 과거-현재를 탄생시키고 있는 것이다.13)


   자, 이제 이 소설들이 그 내부에 불러일으킨 ‘다시’라는 과거가 현재와의 완전무결한 접합 불가능성과 지금 세계와 개인들의 관계가 요청하는 당사자성을 이유로 소설 내부에 다른 글쓰기의 형태로 놓여 있다는 이 글의 견해에 더해, 왜 하필 그토록 오래 묵은 기억을 고통을 무릅쓰면서까지 현실 쪽으로 돌려세우느냐 하는 것을 물어야 할 것 같다. 그리고 이 작품들에서 과거 주체의 무능이라는 배후에 폭력이 있었다는 사실은 그 답으로 제출된다. 『빛의 과거』에서 그것은 “다름이라기보다 수직적인 위계와 시비(是非)” “일관성 없는 규율이 있었고, 없으면 교사나 반장이나 힘센 애들이 만들었”고, “남과 다른 것이 그대로 결격사유가 되는” 동일성, 전체성의 폭력으로, “내가 누군지 따위를 고민할 기회는 아무에게도 주어지지 않”(27쪽)는 시절이다. 『미스 플라이트』는 폭력이 군대와 민간항공사라는 땅과 하늘, 즉 세계에 대한 은유를 배경으로 교정 불가의 비리와 부조리로 켜켜이 쌓인 것임을 소묘하고, 『계절은 짧고 기억은 영영』의 경우 1980년 전후의 일상화된 군사문화, 남아선호의 잔재들을 비롯한 남성 상위 시대의 폭력과 현재에 놓인 남편의 폭력성을 간신히 버티고 서 있는 ‘시옷’의 과거와 현재라는 양다리를 각각 붙들고 늘어지는 인력으로 지목한다. 그럼으로써 소설 내부의 화자들은 시절을 재구성할 각오로써 과거의 기억, 그 소환 앞에 선다. 얼핏 정치 사회적 폭력이 개인의 독자성과 함께 불완전함을, 수정의 욕망을, 여성이란 존재의 부정의 동인처럼 보이는 이 과거 속에서 개인의 기억 소환, 발화는 그것이 또 한 번 문화 구조적으로 개인을 억압하는 폭력의 재생산이기도 했음을 폭로하는 것이다. 그리고 지금의 돌이킴은 새로운 과거로서 현재와의 사이에 가만히 배치되는 ‘쓰기’라는 주체의 적극적 실천으로 가능해진다. 그리고 그러한 쓰기는 얼핏 매끈해 보이는 현재에 대한 오염으로 제출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소설-내-소설의 제목이 『지금은 없는 공주들을 위하여』라는 사실이 지금이라는 시간성이 과거를 새롭게 배치함을, 『복수의 자서전』이라는 공동 일기 쓰기의 결과물이 단수의 다발일 ‘복수(the plural)’임을 가리키며 1인칭, 개인화된 서사의 묶음이라는 점도 더듬어 보자. “사회 세계에 대한 개인의 표상이 어떻게 전통적인 표상 비판으로부터 빠져나가는지를 이해하는”14) 인식적 매핑 작업의 일환이기도 할 이 ‘다시-쓰기’들은 첫 번째의 직접적 경험에 대한 무능력을 ‘능력’으로 돌리려는 시도, ‘다시-욕망’하는 일에 다름 아니다. 이에 기억이라는 과거로부터 길어 올리는 회고의 글쓰기는 전통적인 표상 내지는 전체성 속에서 억압되거나 흘러가 버린 개인적 서사라는 상처를 복구하는 일이며, 이는 미래를 향한 밀어붙임 속에서 망실되었던 주체의 능력이 탄생하는 가능성의 자리이기도 하다. 그래서 지금 이 ‘다시’쓰기의 작업들은 불완전한 각자의 과거를 짊어진 채 그 틈들을 자꾸만 돌이키는 중이다. 그것은 결코 통일성, 전체성, 동일성을 요청하지 않는다. 그런 면에서 이런 개인 서사의 다발은 ‘복수의 시간’이라는 다발이기도 할 것이다.

   되살아오는 소설 속의 기억들은 우연한 부름이 아닌 현재 삶에 대한 어떤 강력한 요청으로 보인다. 그런 ‘다시’는 개인의 서사를 인식의 지도 위에 좌표로 안착시킴으로써 세계의 균열들 사이에 존재하는 말더듬이를 꺼내 보는 중이다. 그것이 욕망되는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자꾸만 멈칫거리게 하는 ‘다시’쓰기는 매끈해 보이는 현재를 오염시키러 자꾸만 온다. 그 기만을 오류로 만들기 위해서. 모든 오해와 결별하는 또 하나의 오독으로. 어떤 것의 상실, 무능, 실패를 추적하는 ‘다시’는 기억 주체의 범주를 재조정하여 표면화하는 작업이기도 한 바, 그런 범주화가 가리키는 화살은 억제돼야만 했던 개인의 입장 표명, 전체에 포섭되지 않을 권리, 세계에 대한 오염이라는 형식으로 실천되며 현재로 돌아오려는 안간힘이다. 그것은 버려지기 위해 ‘다시’ 기입되는 중이다. ‘다시’ 살아내는 중이다.


1) 서동욱, 「노스탤지어, 외국인의 정서」, 『일상의 모험』, 민음사, 2005, 323~324쪽. 서동욱은 프루스트의 글을 가져와, 마들렌 체험은 과거를 되찾는 행복을 주지만, 할머니의 회상은 영원한 상실의 확인이라는 고통의 정서를 안겨 주는 것으로 기억이 주는 경험이 각기 다른 형태로 다가옴을 지적한다. 후자의 정서를 그는 노스탤지어로 해석한다.

2) 프레드릭 제임슨은 직접적인 경험을 어떠한 매개 없이 단번에 파악하려는 의지를 가지고 주시한다면, 우리는 그것을 놓치고 말 것이라며, 진정한 것은 눈가(at the corner of the eye)에서, 우리가 의식적으로 무언가 다른 것을 의도하는 동안에 온다고 말한다. 프레드릭 제임슨, 『지정학적 미학』, 조성훈 옮김, 현대미학사, 2007, 141쪽.

3) 거기에 비평의 행위는 또 한 겹의 글쓰기로서 수행을 얹는다. 그런 면에서 비평은 글쓰기에 대한 글쓰기랄 수도 있는데, 비평가는 읽는 자에서 글쓰기 행위자로 원작(자)과 대화하는 존재이면서 원작으로부터 원작자를 떼어 놓는 행위자이기도 하다. 글쓰기-읽기/독해-글쓰기, 그러니까 읽기/독해 행위를 사이에 둔 양쪽의 글쓰기는 대화의 조건이지만, 전혀 다른 글쓰기, 즉 a a’가 아닌 a와 b이다. 이때 비평은 텍스트를 벌려 세계를 들여놓거나, 텍스트를 세계로 끌고 나오는 방식으로 b를 행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 비평은 그 자체 텍스트와 세계에 대한 오염과 오독이랄 수도 있다.

4) 질 들뢰즈, 『프루스트와 기호들』, 서동욱‧이충민 옮김, 민음사, 2019, 93쪽.

5) 서동욱, 앞의 책, 331쪽.

6) 들뢰즈는 회상 혹은 기억이 심리적인 것이 아니라 존재론적이라고 본다. 현재는 변화하는 것이지만 과거는 존재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과거는 ‘있었다’라고 표현하면 안 된다고 말한다. 현재는 움직이며 과거는 존재한다. 질 들뢰즈, 앞의 책, 97쪽.

7) 이언 와트, 『소설의 발생』, 강유나·고정하 옮김, 도서출판 강, 2009, 262쪽.

8) 이언 와트, 위의 책, 19쪽.

9) 이언 와트, 위의 책, 266쪽.

10) 그러나 ‘시옷’은 과거에 단절된 채 놓여있는 인물은 아니다. 지금의 내가 다시 불러오는 과거의 나는 현재와 작용 속에서 새롭게 돋아나는 ‘나’다. 일기의 형식에서 ‘시옷’이라는 익명의 사용은 과거의 ‘나’가 단절 속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반증으로 볼 수 있다.

11) 이런 개인이 기술하는 삶의 ‘디테일’은 당시 개인이 어떤 사회적 범주에 포섭되고 그러한 상호작용을 통해 개인이란 존재가 이룩되었는지 역사적 사실의 일부를 구성하고 있기 때문에 개인의 기록, 기억은 역사적이다. 기시 마사히코, 『망고와 수류탄-생활사 이론』, 정세경 옮김, 131쪽 참고.

12) 『빛의 과거』, 작가의 말 중에서

13) 기시 마사히코 앞의 책, 참고.

14) 프레드릭 제임슨, 앞의 책, 1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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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 이후를 살아간다는 것

혁명 이후를 살아간다는 것 ―386세대와 패배하지 못한 혁명들의 시차 임세화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퇴근 후에 넥타이를 존나 풀고 찾아와 옛 추억에 잠겨 노래 한 곡 워어어어 케케묵은 노래들을 불러대며 울어대네 아름다운 젊음이여 흘러간 내 청춘이여 너희들이 정녕 민주화를 아느냐 이 손으로 일군 민주주의 대한민국 요즘 어린 것들은 몰라도 한참 몰라 서러움 모두 버리고 나 이제 가노라 투쟁도 혁명도 이제는 모두 봄날의 꿈 그리웠던 혁명동지 돈을 꾸러 찾아왔네 골프채로 쫓아내니 마음속이 허전해 내일은 미스 김의 보지 냄새 맡아야지 밤섬해적단, 〈386 Sucks〉, 《서울불바다》, 2010. 1. 중단된 혁명 이제는 진부한 제재처럼 감각되는 ‘후일담’의 환멸과 자조 이후 한국 문학에서의 386세대 재현은 익숙하지만 낯선 ‘진정성’의 풍광들을 펼쳐 보인다. 이른바 ‘포스트-진정성 체제’1)에서의 속물들의 세계상은 기실 그 문제적 주체로 호명되었던 386세대뿐만 아니라, 386세대에 의해 다시 지목당한 ‘20대 개새끼론’의 대상이었던 ‘88만원 세대’에게도 벗어내기 힘든 혐의였다. IMF 이후 가속화된 신자유주의의 흐름 속에서 20대 빈곤의 원인이 세대 간 착취에 있다는 통찰 가운데 던져진 “토플책을 덮고 바리게이트를 치고 짱돌을 들어라”2)라는 조언을 (귓등으로) ‘학습’했던 새 세대의 시대정신은 무엇이었고, 어디로 향하였는가. 타 세대에 의한 명명 대신 “나는 씨발 존나 멋진 이십대 청춘”3)이라며 타락한 386의 ‘흘러간 청춘’을 조소하던 20대는 어느덧 MZ세대의 선봉으로 싸잡아 묶여진 채 40대의 문턱을 넘고 있다. ‘민주화’라는 ‘명분’ 위에서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모두 쟁취한 것처럼 조롱되는 386세대에 대한 냉소는 오늘날 “운동권 특권 정치를 청산하라는 강력한 시대정신”4)을 따르겠다는 한동훈 전 국민의 힘 비대위원장의 취임사로 구현되며 동세대 정치인들의 반발과 분노를 유발하기도 했다.5) 그러나 기억을 더듬어 본다면 386세대가 이룩한 ‘민주화/민주주의’라는 개념이 오염되고 폄훼의 대상이 된 것은 이미 오래전 일이다. ‘민주화 시키다’라는 표현은 386세대에 대한 비판이 본격화되었던 2010년을 전후한 시기부터 ‘강제로 억압하다’는 조소의 뜻을 지닌 채 활용되었다. 입으로는 ‘케케묵은’ 투쟁의 추억을 타령하며 실제 삶에서는 동지를 배신하고 돈과 섹스의 욕망을 좇는 운동권 세대를 저격한 〈386 Sucks〉의 면면은 새로울 것도 없는 386의 전형(stereotype)을 노래한다. 그런데 이 오래된 냉소의 역학 속에서 눈

  • 관리자
  • 2024-07-01
어른들의 벤다이어그램

어른들의 벤다이어그램 이소 1. 스무 살을 훌쩍 넘어 성인이 되어도 자신을 어른으로 여기지 못하는 사람들은 얼마든지 있다. 내가 그런 사람이었다. 뉴스를 보면 언제나 피해자의 억울함에 몰입하고, 많은 경우 나를 포함하지 않은 채 ‘어른들’에게 분노를 터트리는 사람. 2014년 4월 16일, 이 날 나는 처음으로 어른의 자리에서 사건을 경험했다. 아이의 자리가 아닌 해운회사의 직원이나 공무원이나 인솔 교사의 자리에 서 있었다. 항해사나 해경보다 교사인 나를 떠올리기가 더 쉬웠다. 누구나 교사라는 직업에 대해서는 동원할 수 있는 충분한 양의 기억이 있으니까. 나는 전문가를 깊이 신뢰하는 사람이었으므로, 내가 그 배에 탔다면 안내 방송을 충실히 따르며 어른들과 시스템을 믿으라고 아이들을 다독였으리라는 걸 알았다. 누가 보아도 나는 완벽히 어른이었다. 굳이 괴로웠다는 말을 덧붙일 필요도 없이 그때는 모두가 괴로웠다. 공부를 해야겠다고 생각했고, 다음해 문학을 전공하러 대학원에 들어갔다. 누군가 공부라는 게 어떤 실천이 될 수 있느냐고 묻는다면 아무런 답변도 떠올릴 수 없다. 나부터가 그런 희망 같은 건 없었다. 그저 전처럼 살 수 없을 뿐이었다. 나는 어른이었고, 내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수습될 수 있는 사고가 아니라 소화할 수 없는 사건이었으며, 내게는 더 정확한 언어가 필요했다. 딱 거기까지 생각할 수 있었다. 2. 지금도 교사인 나를 상상해 본다. 항해사나 해경에 대해 잘 알지 못해서가 아니라, 교사라는 직업과 위치가 내게 어른이란 무엇인지 사고실험을 하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다른 직업과 달리 미성년인 학생들을 상대하는 교사는 흔히 이중적인 이미지로 재현된다. 전교조와 교총을 교대로 인터뷰하는 기사의 관례처럼, 전통을 수호하는 보수적인 교사와 변화를 추동하는 진보적인 교사가 대립하는 양상으로 그려지는 건 흔한 일이다. 제도가 부여한 의무와 규범을 학생들에게 어디까지 얼마만큼 요구해야 하는지 고민하는 한 명의 교사를 그리는 경우도 드물지 않지만, 이 경우에도 그의 심리적 갈등은 그의 교육방식에 딴지를 걸 더 완고한 교사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라는 점을 떠올려 보면 전자와 크게 다르지 않다고 할 수 있다. 결코 전위적인 존재에 도달할 순 없지만, 마땅히 후위의 역할은 초과해야 하는 사람. 그러나 생각해 보면 교사만 그럴 리는 없다. 모든 직업은 사회가 요구하는 허용범위 안에서 가까스로 변주를 시도하고, 모든 부모는 자녀를 양육하며 유사한 딜레마에 빠진다. 교사는 자신의 의무를 익히 아는 어른의 상징이고, 불행인지 다행인지 나는 점점 학생보다 교사에게 더 쉽게 이입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니 문제는 오래되고 흔한 방식의 재현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재현이 더는 설득력을 갖지 못하는 데 있을 것이다. 어차피 시대가 변한 줄 모르는 늙은 교사들은 두려운 존재가 될 수 없다. 보수적인 교사와 진보적인 교사의 대립은 기성세대와 새로운 세대가 갈등을 통해 사회를 혁신하는 재생산 메커니즘

  • 관리자
  • 2024-07-01
세계의 끝을 넘는 법

세계의 끝을 넘는 법 박인성 왜 시간을 이야기해야 하는가 시간이란 모든 것이며, 동시에 아무것도 아니다. 시간은 물질세계의 변화를 파악하는 우리의 인식에 불과하지만, 언제나 실제적인 힘으로 우리 삶에 개입한다. 시간을 단위로 파악하는 것은 인간 사회의 편의적인 메커니즘일 뿐이지만, 그러한 메커니즘이 다시금 인간의 모든 삶에 작동하면서 우리의 모든 사유와 행위를 시간이라는 틀에 맞추어 운영하게 만든다. 인간이 만들어낸 사변적 도구가 다시 우리의 삶을 조직하고 운영하는 내재적 체제가 된다는 흥미로운 생각이다. 우리는 실시간으로 시간을 측정하지만 모든 시간에 대한 경험은 순간적이며 지속되지 않는다. 하지만 놀랍게도 시간에 의해서 변화하는 그 모든 것들의 누적된 결과는 지속적이며 실체적인 방식으로 우리 삶에 개입한다. 이것이 시간을 이야기해야 하는 첫 번째 이유다. 시간은 순간으로 경험하는 것이 아니라, 지속된 결과로서 주관적 경험에 그칠 수도 있는 인간 삶에 대한 근사치의 이해를 제공한다. 어디까지나 근사치 말이다. 인간이 처음으로 자연의 운행을 파악하는 시계를 만들고, 달력을 통해서 시간의 흐름을 정례화한 순간부터 인간의 삶은 본질적으로 변화한 것이나 다름이 없다. 인간은 오랜 세월 시간이라는 운영체제(OS)에 의해서 작동하는 시간-사이보그로서 살아왔으며, 이러한 운영체제에서 벗어날 수 없어 보인다. 시간이라는 개념의 재귀적 성격은 시간을 다루는 모든 확장된 논리를 발견하고 활용하는 데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기억과 회상, 약속과 지연, 예언과 예지는 모두 인간이 시간이라는 틀을 활용해서 세계와 타인에 개입하기 위한 조작적인 수단에 불과하다. 시간은 허상이지만 동시에 실존하며, 인간은 시간에 대한 조작적인 사유를 통해서 의미를 조직해 낸다. 이것이 우리가 시간을 이야기해야 하는 두 번째 이유다. 시간은 결코 분절되지도 정지할 수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것을 끊임없이 멈추거나 지연시킨다고 생각하면서 시간에 대한 경험적 이해를 형성하는 것이다. 따라서 ‘의미’란 바로 시간을 사유하는 조작적 시간(정지와 지연)에서만 발견되고 생성된다. 사실 시간을 정지시키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삶의 의미를 떠올릴 때, 우리는 삶을 바라보는 외부의 시공간이 존재하는 것처럼, 일종의 ‘시간의 바깥’을 상연한다.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영화 〈인터스텔라(Interstellar, 2014)〉에서 블랙홀을 통해 진입한 5차원 공간에서 과거 지구를 떠나기 전 딸 머피와의 만남을 다시 바라보게 되는 조셉의 모습은 비유적이지만 정교하다. 우리는 과거에서 미래로 이어지는 시간의 흐름을 벗어날 수 없지만, 마치 다른 중력의 영향을 받듯이 느려진 시간의 흐름 속에서 지나간 삶에 대한 예외적인 의미화를 수행할 수 있게 된다. 이미 흘러가 버렸으며 다시는 돌이킬 수 없는 순간들이 마치 구조화된 순서처럼 배열되고 우리는 거기에 그럴듯한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다. SF 장르로서 〈인터스텔라〉가 물리 법칙에 주어진

  • 관리자
  • 2024-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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