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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시지의 전경화와 소설의 ‘실효성’

  • 작성일 2017-04-01
  • 조회수 5,492

[비평in문학]


문장웹진 비평 기획


2017년 3월부터 [비평in문학]에서는 비평적 글쓰기 형식의 다양한 방법을 비평가 자신의 실험을 통해 직접 만들어보고자 합니다. 자유로운 주제로 비평 양식에 대한 이론을 실제 비평으로 실천하는 글들이 이어질 것입니다. 비평의 효용과 기능에 대한 회의를 멈추기 어렵지만, 비평을 읽지 않고 쓰지 않는 문화가 더 낫다 생각할 수 없습니다. 비평의 새로운 정동과 문제의식을 스스로 요청하지만, 그것이 기존의 모든 비평을 폐허로 만든 자리에서만 가능하리라 판단하지는 않습니다. 한국문학 비평의 고답성 혹은 무용함에 대한 비판에 귀 기울이겠습니다. 앞으로 [비평in문학]은 ‘비평가’로서 어떤 글쓰기를 창안하고 실천할 수 있을까 하는 비평가의 고민을 구체화하는 장이 될 것입니다.




메시지의 전경화와 소설의 ‘실효성’

– 정치적·윤리적 올바름과 문학의 관계에 대한 단상



조강석



1.
1-1.
장 바티스트 그뢰즈(Jean Baptiste Greuze, 1725-1805)는 고전주의자 디드로가 좋아했던 화가 중 한 명이다. 그는 어떤 극적인 장면을 설정하고 이를 사실적으로 묘사하여 심리적 효과를 극대화하는 데 탁월했고 관객들은 그의 그림을 보면서 스스로 그런 상황에 처했을 경우 어떻게 행동할 것인지에 대해 명료하게 판단할 수 있었다. 예컨대, 「벌 받는 아들」 같은 그림은 윤리적 올바름에 대한 화가의 의지와 태도가 어떤 식으로 감상자에게 인계될 수 있는지를 충분히 짐작할 수 있게 한다. 젊은 날의 방탕에 대한 대가는 크고 후회는 언제나 너무 늦게 찾아온다는 메시지가 일종의 상황극과 같은 생생한 재현적 그림을 통해 동시대 감상자들에게 자연스럽게 전달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림1]



그런데 흥미롭게도 디드로는 그뢰즈의 그림이 지니는 교훈적 효과를 강조하면서도 이 그림에서 어머니와 부인이 취하는 지나치게 과장된 몸짓이 그림의 전언을 전달하는 데 오히려 방해가 될 수도 있음을 지적한 바 있다.1) 만약 츠베탕 토도로프의 표현을 빌려 이를 패러프레이즈해본다면 아마도 테마적 중심과 회화적 중심의 불일치가 양자 모두를 곤경에 빠트릴 수도 있음을, 그 결과 감상자에 대한 작용과 효과의 측면에서도 비효율적 오류를 범할 수 있음을 생각해 보게 한다.2)

1) 이에 대해서는 볼프강 울리히 지음, 조이한·김정근 옮김, 「즐거움과 유익함」, 『예술이란 무엇인가?』, 2013, pp.150-158. 참조.
2) 테마적 중심과 회화적 중심에 대해서는 츠베탕 토도로프 지음, 이은진 옮김, 『일상예찬』, 뿌리와 이파리, 2003, 참조.


1-2.
매튜 키이란은 예술과 도덕의 관계에 대해 논하면서 도덕적 선의 때문에 작품의 가치가 낮아지는 경우와 작품의 비도덕적 특성이 오히려 작품의 가치를 높이게 된 경우에 대해 각기 예를 들고 있다. 그는 이를 통해 예술과 ‘도덕적 올바름’의 태도가 지니는 관계에서 나타나는 역설을 설명하고 있는데 눈여겨볼 만하다.3) 그가 전자의 예로 들고 있는 것은 1930년대 미국화가로서 당대에 유명세를 탔던 노먼 록웰(Norman Rockwell)의 「네 개의 자유」이다. 이 연작은 프랭클린 루스벨트의 연설에서 받은 감동을 인간이라면 누구나 누려야 할 기본적 자유를 형상화하여 표현한 것으로 각기 「발언의 자유(Freedom of Speech, 언론의 자유)」, 「종교의 자유(Freedom to worship)」, 「빈곤으로부터의 자유(Freedom from Want」, 「공포로부터의 자유(Freedom from Fear)」 라는 제목의 그림들로 구성돼 있다.


[그림2]
[그림3]
[그림4]
[그림5]


매튜 키이란은 예컨대, 자고 있는 아이들의 이불을 덮어주는 아내와, 아이들을 바라보고 있는 남편의 모습을 그린 「공포로부터의 자유」에 대해 “물론 우리는 우리의 아이들이 안전하기를 바랄 것이고 전쟁의 파괴적이고 맹목적인 난폭함에 노출되지 않기를 원할 것이다. 하지만 이런 종류의 도덕적으로 건전한 그림을 봄으로써 우리가 얻거나 배울 수 있는 어떠한 흥미로운 점도 없다. 이 작품의 도덕적인 성격은 바람직한 것일지는 모르나 그것은 예술로서의 가치를 높이기보다는 깎아내린다”4)고 평가하고 있다. 「네 개의 자유」는 당대의 ‘정치적 올바름’이라는 테마적 가치를 상당히 극적으로 표현하고 있지만 회화적 가치에 있어서 그에 상응하는 가치를 지닌다고 말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프란시스 베이컨의 「십자가 책형 습작(Three Studies for Figures at the Base of a Crucifixion)」(1944)은 이와 정반대되는 사례로 꼽힌다.


[그림6]



이 연작이 격렬한 찬반 논쟁을 낳았으리라는 것은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그림에 있는 피조물들은 기형적인 형상으로 자신이 처한 상황에서의 고통을 극한에 가깝게 표현하고 있다. 매튜 키이란은 이 그림이 인간은 고차적 정서나 절제된 감정 등과는 거리가 멀고 오히려 분노와 고통에 의해 움직이는 부패한 고기 덩어리에 불과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고 설명한다. 나아가 그는 메시지의 차원에서 베이컨의 인간성에 대한 인식을 우리가 고스란히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고 전제한다.
조금 다른 각도에서 들뢰즈는 감각의 논리로 베이컨의 그림에 대해 설명한 바도 있지만5), 매튜 키이란은 도덕적 전언의 가치와 예술 작품의 가치를 중심으로 이렇게 말한다. “인간의 모습은 아름다울 수도 있지만 우리는 또한 그것을 인간적인 의지가 결핍된 채 충동과 욕망에 의해서 움직이는 고깃덩어리로 또는 흉하게 변형된 살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인간성에 대한 일반적인 생각으로서 이것은 단지 거짓일 뿐만이 아니라 도덕적으로 유해한 것이다. 그러나 이점 때문에 베이컨의 작품에 우리가 깨달아야 될 우리 자신에 대한 중요한 어떤 사실이 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또한 우리가 베이컨의 작품이 원하는 대로 반응할 수도 있고 또 그래야 한다는 사실을 부정해서도 안 된다. 왜냐하면 그 작품이 주는 영상의 강렬함과 진정함, 그리고 작품이 불러일으키는 독특한 효과의 원인인 완전히 숙달된 물감 다루는 솜씨 등은 이 작품을 정말로 훌륭한 예술로 만들기 때문이다.”6)
말하자면 매튜 키이란에 의하면 베이컨의 그림의 ‘실효성’은 재현적 전언-전언의 가치-기술적 숙련도-미학적 가치의 순으로 정렬되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미학적 숙련과 정동적 강도가 결과적으로 전언을 생성하는 방식으로 발휘된다는 것이다.

3) 매튜 키이란 지음, 이해완 옮김, 「예술과 도덕」, 『예술과 그 가치 Revealing Art』, 북코리아, 2010. 참조.
4) 매튜 키이란, 같은 책, p.227
5) 이에 대해서는 질 들뢰즈 지음, 하태환 옮김, 『감각의 논리』, 1995(2008년에 재출간되었다). 참조.
6) 매튜 키이란, 같은 책, p.237


1-3.
자크 랑시에르는 「정치적 예술의 역설」에서 “모더니즘 패러다임에 대한 고발과 예술의 전복적 힘에 관한 지배적 회의주의의 시대가 가고, 예술이 경제적·국가적·이데올로기적 지배 형태에 답해야 한다는 사명이 곳곳에서 다시 주장되고 있다”7)고 동시대 예술의 경향에 대해 진단한 바 있다. 그런데 이와 같은 경향은 2010년대 한국 문단에서도 두드러지고 있다. 여기에는 악화일로인 삶의 조건과 시민의 일원인 작가 개인의 사회적 실존의 양태, ‘나쁜 신체변용’(스피노자)에 지속적으로 노출됨으로써 끊임없이 일련의 ‘정동적 동요’(affectual fluctuations)에 휩싸이게 만드는 정치적 상황, 그리고 경제적인 관점에서나 젠더적 관점에서 최근 다양한 맥락에서 대두되는, 타자에 대한 폭력성 등이 모두 결부되어 있다. 달리 말해보자면 최근 한국 문학은 다시 ‘정치적 올바름’과 ‘윤리적 올바름’이라는 당위의 문학적 수용이라는 강력한 요청에 직면해 있다고 할 수 있겠다. 이 요청은 삶 자체의 지속이 끊임없이 위협받고 계속해서 부정적인 물리적·심리적 자극들에 노출될 수밖에 없는 제반 환경(Umbelt)’에서 기인한 것이며, 그렇기 때문에 충분하고 타당한 이유가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필연성과 타당성에도 불구하고 이 요청은 문학의 오래된 아포리아를 다시금 떠올리게 할 수밖에 없다. 특정한 국면에 강하게 결박된 당위와 요청은 어느 국면에서는 그 구체적 양상보다는 크기와 방향으로만 가늠되려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 이때 ‘정치적 올바름’이나 ‘윤리적 올바름’은 의지의 차원에서는 보편적 당위의 차원과 자발적 검열의 무의식을 넘나들고 미적 실효성의 차원에서는 재현적 논리와 윤리적 논리 그리고 미학적 논리 사이의 장벽을 강화하는 동시에 이를 동일한 논리로 통합시키는 역설의 토대를 제공한다. 이와 관련하여 다시 랑시에르의 말에 귀를 기울여 보자. 이해를 위해 조금 길게 인용한다.


(1)
‘예술의 정치’는 세 가지 논리-미학적 경험 형태의 논리, 허구 작업의 논리, 메타정치적 전략의 논리-의 교착으로 이루어진다. 이 교착은 또한 내가 정의하려고 시도했던 세 가지 실효성의 형태-재현을 통해 효과를 산출하길 바라는 재현적 논리, 재현적 목적을 중지시킴으로써 효과를 산출하는 미학적 논리, 예술의 형태와 정치의 형태가 서로 직접 동일시되길 바라는 윤리적 논리-사이의 독특하고 모순적인 엮임을 함축한다.
비판적 예술의 전통은 이 세 논리를 하나의 동일한 정식으로 절합하길 원했다. 그 전통은 미학적 거리의 효과를 재현적 관계의 연속성 안에 가둠으로써 에너지들을 동원하는 윤리적 효과를 보장하려고 시도했다.8)


(2)
예술과 정치는 불일치의 형태로, 감각적인 것의 공통 경험을 재편성하는 조작으로 서로 맞붙어 있다. (중략) 말을 유통하고 가시적인 것을 전시하며 정서를 생산하는 새로운 형태들이 이전 가능태의 짜임새와 단절하고 새로운 능력을 규정한다는 의미에서 미학의 정치가 존재한다. 그리하여 예술가들의 정치에 선행하는 예술의 정치가 존재한다. 예술의 정치란 이런저런 대의에 봉사하려는 예술가들의 소망과 무관하게, 그 자체로 작동하는 공통 경험의 대상들에 대한 독특한 마름질이다. 미술관, 책, 극장의 효과는 이런 저런 작품의 내용에 기인하기에 앞서 그것들(미술관, 극장, 책)이 수립하는 시공간의 나눔과 감각적 제시 방식에 기인한다. 그러나 이 효과는 예술 자체의 정치적 전략을 정의하지도 않고 예술이 정치적 행위에 계산 가능하게 기여하는 것을 정의하지도 않는다.9)


랑시에르는 바로 이런 맥락에서 예술의 실효성을 “불일치의 실효성”10)으로 설명한다. 이는 재현적 매개를 통한 교육적 실효성이나, ‘삶과 예술의 화해와 통합’이라는 아방가르드적 명분이 결국 예술의 소멸이나 무매개적 실천으로 귀결되는 “윤리적 무매개의 교육법”11)과는 다른 방식으로 예술의 실효성이 작동함을 의미한다. 그렇게 보자면, 어쩌면 결국 이 문제는 다시 시민적 윤리와 미적 자율성의 문제라는 오래된 아포리아를 소환하는 것일 수도 있다. 물론 랑시에르라면 미적 자율성이라는 표현을 거부하고 미학적 체제의 문제로 풀어가겠지만 최근의 한국문학과 관련해서 아직 미학적 체제의 관점에서 이를 설명하기에는 연역의 위험을 무마할 예시적 사건들이 충분하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근 정치적 올바름과 윤리적 올바름 테제를 통해 “예술을 재정치화하려는 의지”12)가 드높아지는 문단 안팎의 상황에서 랑시에르가 언급한 예술적 실효성의 세 형태를 새삼 상기하는 것에 실익이 없지는 않을 것이다. 기우일지 모르나 한 마디 덧붙이자면, 이는 성과를 폄하하거나 재현적 실효성을 비난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다시금 문제를 정식화하기 위해서이다.

7) 자크 랑시에르 지음, 양창렬 옮김, 「정치적 예술의 역설」, 『해방된 관객』, 현실문화, 2016, p.73
8) 자크 랑시에르, 같은 책, p.98
9) 자크 랑시에르, 같은 책, p.91
10) 자크 랑시에르, 같은 책, p.84
11) 자크 랑시에르, 같은 책, p.80
12) 자크 랑시에르, 같은 책, p.74


2.
2-1.
조남주의 소설 『82년생 김지영』(민음사, 2016)의 미덕에 대해 충분히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의도적으로 르포르타지에 가까운 양식으로 전개되는 이 소설은 인식의 지형 전체를 흔드는 결정적 디테일을 활용하면서, 우리가 익숙하게 알고 있다고 여기며 묵과한 문제들을 환기시키는 데 성공하고 있다. 1982년생 여성이 출생과 성장 과정에서, 그리고 대학생활과 사회생활을 하면서 겪게 되는 ‘자연화된’ 차별과 그로부터 기인한 사태의 불합리한 귀결에 대한 생생한 보고는 우리가 ‘아는 것’으로 간주하고 기지(旣知)의 영역에 무의식적으로 이송해놓은 문제를 다시 정면으로 마주하게 만든다. 다시 말해 이 소설은 ‘아는 것’으로부터 ‘보는 것’으로의 전환13)을 도모하고, 나아가 의지의 가시적 외화와 실천을 촉구하는 작품이다. 특히 대표단수격인 한 평범한 여성의 삶에서 끊임없이 나타나는 차별과 불합리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치명적 디테일’들은 작품의 메시지 전달을 더욱 효과적으로 만든다. 예컨대, 초등학교 시절 김지영씨를 짓궂게 괴롭히는 남학생에 대해 담임선생님이 “남자애들은 원래 좋아하는 여자한테 더 못되게 굴고, 괴롭히고 그래. 선생님이 잘 얘기할 테니까 이렇게 오해한 채로 짝 바꾸지 말고, 이번 기회에 둘이 더 친해지면 좋겠는게”라고 말하는 장면이나 대학시절, 복학한 남학생들에게만 취업 관련 추천이 집중되는 상황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김지영씨에게 학과장이 “여자가 너무 똑똑하면 회사에서도 부담스러워해. 지금도 봐. 학생이 얼마나 부담스러운 줄 알아” 하고 되묻는 장면은 적실한 디테일이 전언의 차원에서 얼마나 효율적으로 작동할 수 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그리고 이 소설에는 이런 디테일들이 풍부하다. 따라서 이 디테일들은 전체적으로 단조롭거나 생경해질 수도 있는 이 소설의 메시지를 가장 효과적으로 부감시키는 중요한 장치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이 소설은 디테일의 풍부함을 통해 ‘사실의 힘’을 발휘하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사실의 힘은 묵중하다.

13) 이 표현은 미술사가 다니엘 아라스가 그림에 대해 사용한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다니엘 아라스 지음, 이윤영 옮김, 『디테일』 , 숲, 2007. 참조.


2-2
이처럼 이 소설에서 발휘되고 있는 ‘사실의 힘’은 예술의 실효성 차원에서 볼 때 재현적 논리에 상당 부분 귀속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전언의 층위에서 그 효율과 성취는 여러 번 높이 평가되어도 좋을 것이다. 그런데 ‘사실의 힘’에 기반한 소설의 성취는 아쉽게도 그 ‘사실의 힘’이, 전언이, 재현적 논리가 때때로 예기치 않게 불거지고 전경화되면서 약화된다. 차별과 불합리성으로 점철된 타자와의 관계라는 문제틀(problematic)을 기지의 무의식에서 미지의 의식의 수면 위로 길어 올린 디테일의 힘은 그 디테일의 과함 때문에 소설의 성취를 약화시킨다. 디테일 덕분에 독자들로 하여금 쉽게 묘사된 정황에 심리적으로 결부되고 전언에 어렵지 않게 동의하게 만들었던 그 ‘사실의 힘’은 ‘더 많은 디테일’에 의해 잠식된다. 예컨대 이런 대목의 실효성이 그렇다.


어느날 문득 사무실을 둘러보았는데 부장급 이상으로는 여자가 거의 없더란다. 구내식당에서 점심을 먹다가 임신부가 보이기에 이 회사는 육아휴직이 몇 년이냐고 물었더니 같은 테이블에서 밥을 먹던 과장부터 사원까지 다섯 명 모두 본 적이 없어서 모르겠다고 대답했단다. 10년 후 자신의 모습이 그려지지 않았고, 고민 끝에 사직서를 냈고, 이래서 여자를 자꾸 안 되게 만드니까 이러는 거라고 대답했다.
출산한 여성 근로자가 육아휴직을 사용하는 비율은 2003년에 20퍼센트를, 2009년에야 절반을 넘었고, 여전히 열 명 중 네 명은 육아휴직 없이 일하고 있다. 물론 그 이전, 결혼과 임신과 출산 과정에서 이미 직장을 그만두어 육아휴직 통계 표본에도 들어가지 못한 여성들도 많다. 또 2006년에 10.22퍼센트던 여성 관리자의 비율은 꾸준히 그러나 근소하게 증가해 2014년에 18.37퍼센트가 되었다. 아직 열 명 중 두 명도 되지 않는다.
“그래서 그 선배 지금은 뭐해?”
“작년에 사시 패스했어. 몇 년 만에 사시 합격자 나왔다고 난리였잖아. 현수막도 붙었는데 봤어?”


인용된 대목에 세 개의 스타일이 뒤섞여 있음을 확인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상황을 개괄하는 관점이 부여된 스타일, 이 상황을 해석하는 통계의 스타일-이 대목들에는 통계자료의 출처가 명시된 각주가 달려있다-그리고 다시 상황을 재연하는 스타일이 그것이다. 세 개의 스타일의 병치가 전체적으로 이 소설의 메시지 전달에 기여함은 물론이다. 그러나 플롯의 논리 차원에서 이 병치는 오히려 치명적인 것으로 보인다. 어떻게 관찰자의 스타일과 해석의 스타일과 재연의 스타일이 매개 없이 병치될 수 있을까? 이에 대해서서는 두 가지 대답이 가능할 것이다. 첫째, 전언과 사실 자체의 묵중함이 플롯보다 갈급하다. 둘째, 플롯의 측면에서도 안전장치가 없는 것은 아니다. 다시 말해 해석의 스타일은 이 소설 전체가 실은 김지영씨의 정신과 상담을 담당한 의사의 보고서 형식을 취하고 있다는 점에서 정당화될 여지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도 의사가 통계자료를 보충해서 기입할 까닭까지 납득하기는 어렵다. 대번 그뢰즈의 그림에 대한 디드로의 조언이 떠오른다. 메시지에 집중된 예술의지가 오히려 전언의 효율성을 저해한다는 것이다. 이 점은 ‘정치적 올바름’에 대한 요청을 잠시 보류할 때의 심리적 부담과 더불어 이 소설의 플롯에 의문을 제기하게 만든다. 이 소설은 디테일과 사실의 힘을 통해 르포르타지와 같은 강도의 전언을 독자의 편에 비교적 용이하게 인계하는 소설이지만 르포르타지의 플롯을 취하지는 않는다. 이를 방증하는 두 가지 소설적 장치에 대해 말해보자.
우선 마지막 장에서, 소설 전체가 김지영씨의 정신과 상담을 담당한 의사의 기록임을 밝히는 것과 마지막 장면에서 이 의사 역시 전언 전달의 맥락에 어긋나지 않는 모순된 행동을 보이게 된다는 사실을 주목해보자. 디테일을 강화하기 위해 사용된, 각주가 달린 통계는 위에서 살펴본 것처럼 소설 전개의 맥락에서 생경하게 도입된다. 만약 이것이 작가 자신의 개입이라면 이 소설은 포스트모던해지거나 프리모던(premodern)해진다. 물론 이때에도 브레히트나 우디 알렌의 시도처럼 작품 자체와의 거리를 갑자기 부각시키는 방식으로 독자나 관객을 놀래키고 다시 사실의 세계에 집중할 것을 요청하는 것으로 해석할 여지가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 소설 전체의 플롯을 눈여겨볼 때 이는 과도한 정당화가 될 것이다. 그러니 마지막 장에서 소설 전체가 김지영씨의 정신과 상담을 맡은 의사의 기록이었음을 밝히는 것은 근대 소설의 해체를 방지하기 위한 장치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때에도 스타일의 무매개적 혼합과 병치는 플롯의 논리를 위배하면서 오히려 전언 전달의 실효성을 약화시키기는 마찬가지다. 전언이 전경화됨으로써 플롯이 약화되는 이 아이러니한 상황은 전언 전달의 효율성을 오히려 저해한다. 더욱이 마지막 장면으로, 플롯의 자연스러운 논리에 따르자면, 김지영씨를 이해하기 위해 피상담자가 겪은 일들이나 상황과 관련된 통계자료들을 찾아 기입하는 공을 들인 의사가 사직한 동료의 후임자를 채용할 때 육아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여직원은 곤란하겠다고 생각하는 에피소드를 넣은 것은 이미 여러 방식으로 전경화된 전언을 아이러니를 통해 더욱 강화시키기 위한 것이었겠으나 그뢰즈의 경우에서처럼 과한 몸짓과 손짓은 오히려 효과를 반감시키기 마련이다. 일종의 반전과도 같은 이 마지막 장면은 메시지의 강화 차원에서는 기여하는 바가 없지 않겠으나 소설의 ‘실효성’과 관련해서는 아쉬움을 남긴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소설의 발단부에서 제시된 김지영씨의 이상 징후 역시 플롯에 자연스럽게 녹아 있다고 말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김지영씨에게 나타난 이상 징후는 때때로 자신이 아니라 다른 여성들의 목소리를 내게 된 것인데 상담의는 처음엔 우울증의 일환으로 진단했다가 자신의 진단이 성급했다고 판단한다. 하지만 끝내 그것이 어떤 예후를 지닌 증상인지를 확정짓지 못한다. 문제는, 남편과 그의 첫사랑이었던 김지영씨의 선배, 둘 사이에서만 공유된 비밀조차 김지영씨의 입을 통해 발언되는 식으로 초자연적으로 설정된 이 증상이 설득력 있게 분석되거나 설명되지 않으며, 그보다 더 중요하게는 이 예사롭지 않은 설정이 소설 전개에서, 플롯으로부터 비롯되거나 플롯을 통해 전개됨으로써 소설의 주제의식과 관련된 중요한 키가 되기보다는, 몫이 없는 것으로 간주된 채 목소리를 내지 못하던 사람들을 대신해 말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메시지를 전달하는 하나의 부수적 기능으로만 사용된다는 것이다. 초자연적 현상에 대해 자연과학의 인과론적 설명을 요청하는 것이 아니다. 이 증상이 소설의 시작과 끝에서 중요한 기능을 담당하는 일종의 파레르곤과 같은 설정이라면 에르곤이 되는 메시지와의 적절한 교섭방식이 플롯을 통해 설득력 있게 제시되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한 채, 전경화 된 외재적 메시지를 담는 봉투나 포장지와 같은 기능에 그치고 있기에 아쉬움을 남긴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는 이 소설의 ‘실효성’을 심각하게 침해한다.


2-3.
이 글의 취지는 『82년생 김지영』이 환기시키는 메시지나 문제의식을 폄하하려는 것이 전혀 아니다. 오히려 앞서 설명했듯이 이 전언은 현재 한국 사회의 구성원들이 직면한 ‘정동적 동요’의 양상들을 고려할 때 충분히 시의적절한 요청에 응답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정치적 올바름이나 윤리적 올바름에 대한 요청에 부응하는 것이 소설의 실효성의 전부일 수는 없다. 그뢰즈의 그림이 당대 사회 구성원의 합의에 부응하는 윤리적 올바름을 실천하고 노먼 록웰의 그림이 정치적 올바름에 응답하는 한 형식일 수는 있다. 그러나 메시지에 집중된 의지가 회화적 중심을 테마적 중심에 수렴시키는 과장된 몸짓에 의해 작품의 총체적 ‘실효성’을 훼손할 여지는 언제나 있는 것이다. 또한 당대의 공통 감각을 뒤흔들고 감상자를 불편과 고통에 직면하게 하는 베이컨의 그림이 정치적 올바름을 가시적 형상으로 직역한 노먼 록웰의 그림보다 오래 시선을 붙잡으며 실효성을 높일 수도 있는 것이다. 미학적 논리에 따른 실효성이 재현적 논리에 따른 실효성보다 효과적으로 정동적 수행성을 높이고, 따라서 수용자로 하여금 ‘인간이라는 사태’에 보다 더 가까이 육박하게 만들면서 가치를 드높이기도 하는 것을 베이컨의 그림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전언의 가치는 플롯과의 비교우위 차원에서 교환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물론 메시지의 전경화는 긴급한 요청에 부응하는 즉각적 효용을 발휘할 수 있게 하기도 한다. 그리고 때에 따라 그것이 다른 무엇보다 중요한 국면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에르곤과 파레르곤이 분리 불가능한 수준에서 녹아들며 뒤섞이는 것이 아니라 플롯이 물러나고 메시지가 전경화 되는 방식으로는 결국 소설의 ‘실효성’을 지탱하는 세 축에서 재현의 축의 효력조차 감당하기 버겁게 만드는 것으로 귀결될 수도 있다. 그리고 이는 스타일이 전경화됨으로써 전언과 플롯을 모두 잃는 것과 같은 또 다른 비효율만큼이나 문제적 상황인 것이다.14)

14) 본래 이 글의 기획은 정유정의 『종의 기원』과 한강의 『채식주의자』의 2부 「몽고반점」을 함께 검토하면서 조금 더 다채로운 각도에서 소설의 ‘실효성’을 논하는 것이었으나 사정상 이 작업은 후일로 미룰 수밖에 없게 되었다.




그림 출처


[그림1]
Le Fils puni
Greuze Jean-Baptiste
프랑스국립박물고나연합(RMN) http://www.photo.rmn.fr


[그림2]
Freedom of Speech
Norman Rockwell
노먼 록월 뮤지엄 https://www.nrm.org/


[그림3]
Freedom of Worship
Norman Rockwell
노먼 록월 뮤지엄 https://www.nrm.org/


[그림4]
Freedom of Want
Norman Rockwell
노먼 록월 뮤지엄 https://www.nrm.org/


[그림5]
Freedom of Fear
Norman Rockwell
노먼 록월 뮤지엄 https://www.nrm.org/


[그림6]
Three Studies for Figures at the Base of a Crucifixion
Francis Bacon
© Tate. Photo credit: Tate https://artuk.org/
















조강석
작가소개 / 조강석

2005년 동아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저서로 『이미지 모티폴로지』, 『경험주의자의 시계』, 『아포리아의 별자리들』, 『비화해적 가상의 두 양태』등이 있음. 현재 인하대 한국학연구소 교수


《문장웹진 2017년 0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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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 이후를 살아간다는 것

혁명 이후를 살아간다는 것 ―386세대와 패배하지 못한 혁명들의 시차 임세화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퇴근 후에 넥타이를 존나 풀고 찾아와 옛 추억에 잠겨 노래 한 곡 워어어어 케케묵은 노래들을 불러대며 울어대네 아름다운 젊음이여 흘러간 내 청춘이여 너희들이 정녕 민주화를 아느냐 이 손으로 일군 민주주의 대한민국 요즘 어린 것들은 몰라도 한참 몰라 서러움 모두 버리고 나 이제 가노라 투쟁도 혁명도 이제는 모두 봄날의 꿈 그리웠던 혁명동지 돈을 꾸러 찾아왔네 골프채로 쫓아내니 마음속이 허전해 내일은 미스 김의 보지 냄새 맡아야지 밤섬해적단, 〈386 Sucks〉, 《서울불바다》, 2010. 1. 중단된 혁명 이제는 진부한 제재처럼 감각되는 ‘후일담’의 환멸과 자조 이후 한국 문학에서의 386세대 재현은 익숙하지만 낯선 ‘진정성’의 풍광들을 펼쳐 보인다. 이른바 ‘포스트-진정성 체제’1)에서의 속물들의 세계상은 기실 그 문제적 주체로 호명되었던 386세대뿐만 아니라, 386세대에 의해 다시 지목당한 ‘20대 개새끼론’의 대상이었던 ‘88만원 세대’에게도 벗어내기 힘든 혐의였다. IMF 이후 가속화된 신자유주의의 흐름 속에서 20대 빈곤의 원인이 세대 간 착취에 있다는 통찰 가운데 던져진 “토플책을 덮고 바리게이트를 치고 짱돌을 들어라”2)라는 조언을 (귓등으로) ‘학습’했던 새 세대의 시대정신은 무엇이었고, 어디로 향하였는가. 타 세대에 의한 명명 대신 “나는 씨발 존나 멋진 이십대 청춘”3)이라며 타락한 386의 ‘흘러간 청춘’을 조소하던 20대는 어느덧 MZ세대의 선봉으로 싸잡아 묶여진 채 40대의 문턱을 넘고 있다. ‘민주화’라는 ‘명분’ 위에서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모두 쟁취한 것처럼 조롱되는 386세대에 대한 냉소는 오늘날 “운동권 특권 정치를 청산하라는 강력한 시대정신”4)을 따르겠다는 한동훈 전 국민의 힘 비대위원장의 취임사로 구현되며 동세대 정치인들의 반발과 분노를 유발하기도 했다.5) 그러나 기억을 더듬어 본다면 386세대가 이룩한 ‘민주화/민주주의’라는 개념이 오염되고 폄훼의 대상이 된 것은 이미 오래전 일이다. ‘민주화 시키다’라는 표현은 386세대에 대한 비판이 본격화되었던 2010년을 전후한 시기부터 ‘강제로 억압하다’는 조소의 뜻을 지닌 채 활용되었다. 입으로는 ‘케케묵은’ 투쟁의 추억을 타령하며 실제 삶에서는 동지를 배신하고 돈과 섹스의 욕망을 좇는 운동권 세대를 저격한 〈386 Sucks〉의 면면은 새로울 것도 없는 386의 전형(stereotype)을 노래한다. 그런데 이 오래된 냉소의 역학 속에서 눈

  • 관리자
  • 2024-07-01
오염, 오류, 오독

오염, 오류, 오독 - 소설이 수행하는 ‘다시’ 황유지 마들렌을 먹으며 과자 부스러기와 차 한 모금이 어우러진 달콤한 환기 속에서 잃어버린 과거를 되찾는 일은 마르셀에게 행복을 준다. 그러나 발벡의 호텔방에서 신발을 벗으려다 문득, 할머니가 신을 벗겨 주었던 일을 떠올리는 것은 그에게 행복감을 주지 않는다. 죽은 할머니를 떠올리는 일, 그것은 “고통스러운 소멸”을 확인시킬 뿐이다.1)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 등장하는 이 일화는 과거를 부르는 일이 각기 다른 정서를 환기함에 대한 예시로 내밀어지며 ‘기억’에 착종되는 다양한 감정이 주체를 어떻게 흔들 수 있는지 넌지시 묻는다. 소멸의 확인도 그렇지만 미완, 불완전, 불만족인 채로 내버려둔 사건에 대한 기억의 소환 역시 난감하기는 매한가지인데, 그건 엄연히 그 일을 ‘다시’ 경험하는 것이라 모종의 감정적 자원을 요청하기 때문이다. 대중문화에서 이런 ‘다시’는 레트로로 나타난다. Retrospect, ‘추억’에 뿌리를 둔 이 말은 패션, 음악, 영상부터 먹거리, 금융상품에 이르기까지 그 반경을 확대하며 과거로 우리의 기억을 끌고 간다. 과거의 소환은 이 사회에 대한 일종의 환각제이자 자본주의라는 무한한 기계적 힘에 대한 제동, 그 중단의 본능적 발현이다. 이런 레트로는 과거에 대한 향수, 노스탤지어의 맥락으로 파악할 수 있는데, 고대인들에게 노스탤지어란 ‘되돌아가는 일(nostos)’을 하지 못하는 데서 생기는 ‘아픔(algos)’으로 이해된다. 그러니까 레트로는 돌아갈 수 없는(가본 적도 없는) 시절을 향한 자본주의적 환각제이다. 프루스트의 위대한 주제가 사물들을 처음 경험할 때의 무능력이라 파악하는 프레드릭 제임슨은 진정한 경험이 우리가 의식적으로 다른 것을 의도하는 동안, ‘눈가’를 통해 온다면서 그 가능성을 글쓰기에서 찾는다. 기어이 돈을 주고라도 사겠다는 환각성 추억과는 달리 기억을 통한 글쓰기는 상실한 것을 복원하려는 고도의 정신 작업이랄 수 있다. At the corner of eye, 거기가 바로 진정한 경험이 되돌아오는 자리로 가장 의도적인 두 번째 경험, 글쓰기는 그 형식이 된다. 2) 글쓰기는 행해짐과 동시에 복수의 행위자를 탄생시킨다. 쓰는 자와 읽는 자,3) 이는 시차(時差)와 함께 탄생하며 텍스트가 현실과 맞닿은(혹은 결별한) 그 부위에 필연적으로 틈을 만든다. 대체로 모든 문제는 이 ‘틈’에서 태어나는 것처럼도 보인다. 틈은 이미 분리, 분절된 것으로 존재하면서 거기에 무엇을 메우든 결코 원본의 형태를 완벽히 구현할 수 없다. 원본처럼 복원한 것조차 복사본일 따름이라 틈은 그 자체 오류가 되는 것이다(가령 원본이 틀린 것이라 할 때도 제대로 수정된 본은 오류가 된다. 틀린 원본에 대해 기어이 맞추어진 진실

  •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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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들의 벤다이어그램 이소 1. 스무 살을 훌쩍 넘어 성인이 되어도 자신을 어른으로 여기지 못하는 사람들은 얼마든지 있다. 내가 그런 사람이었다. 뉴스를 보면 언제나 피해자의 억울함에 몰입하고, 많은 경우 나를 포함하지 않은 채 ‘어른들’에게 분노를 터트리는 사람. 2014년 4월 16일, 이 날 나는 처음으로 어른의 자리에서 사건을 경험했다. 아이의 자리가 아닌 해운회사의 직원이나 공무원이나 인솔 교사의 자리에 서 있었다. 항해사나 해경보다 교사인 나를 떠올리기가 더 쉬웠다. 누구나 교사라는 직업에 대해서는 동원할 수 있는 충분한 양의 기억이 있으니까. 나는 전문가를 깊이 신뢰하는 사람이었으므로, 내가 그 배에 탔다면 안내 방송을 충실히 따르며 어른들과 시스템을 믿으라고 아이들을 다독였으리라는 걸 알았다. 누가 보아도 나는 완벽히 어른이었다. 굳이 괴로웠다는 말을 덧붙일 필요도 없이 그때는 모두가 괴로웠다. 공부를 해야겠다고 생각했고, 다음해 문학을 전공하러 대학원에 들어갔다. 누군가 공부라는 게 어떤 실천이 될 수 있느냐고 묻는다면 아무런 답변도 떠올릴 수 없다. 나부터가 그런 희망 같은 건 없었다. 그저 전처럼 살 수 없을 뿐이었다. 나는 어른이었고, 내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수습될 수 있는 사고가 아니라 소화할 수 없는 사건이었으며, 내게는 더 정확한 언어가 필요했다. 딱 거기까지 생각할 수 있었다. 2. 지금도 교사인 나를 상상해 본다. 항해사나 해경에 대해 잘 알지 못해서가 아니라, 교사라는 직업과 위치가 내게 어른이란 무엇인지 사고실험을 하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다른 직업과 달리 미성년인 학생들을 상대하는 교사는 흔히 이중적인 이미지로 재현된다. 전교조와 교총을 교대로 인터뷰하는 기사의 관례처럼, 전통을 수호하는 보수적인 교사와 변화를 추동하는 진보적인 교사가 대립하는 양상으로 그려지는 건 흔한 일이다. 제도가 부여한 의무와 규범을 학생들에게 어디까지 얼마만큼 요구해야 하는지 고민하는 한 명의 교사를 그리는 경우도 드물지 않지만, 이 경우에도 그의 심리적 갈등은 그의 교육방식에 딴지를 걸 더 완고한 교사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라는 점을 떠올려 보면 전자와 크게 다르지 않다고 할 수 있다. 결코 전위적인 존재에 도달할 순 없지만, 마땅히 후위의 역할은 초과해야 하는 사람. 그러나 생각해 보면 교사만 그럴 리는 없다. 모든 직업은 사회가 요구하는 허용범위 안에서 가까스로 변주를 시도하고, 모든 부모는 자녀를 양육하며 유사한 딜레마에 빠진다. 교사는 자신의 의무를 익히 아는 어른의 상징이고, 불행인지 다행인지 나는 점점 학생보다 교사에게 더 쉽게 이입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니 문제는 오래되고 흔한 방식의 재현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재현이 더는 설득력을 갖지 못하는 데 있을 것이다. 어차피 시대가 변한 줄 모르는 늙은 교사들은 두려운 존재가 될 수 없다. 보수적인 교사와 진보적인 교사의 대립은 기성세대와 새로운 세대가 갈등을 통해 사회를 혁신하는 재생산 메커니즘

  • 관리자
  • 2024-0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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