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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의 미래보다 현실의 우리를

  • 작성일 2017-08-10
  • 조회수 7,495

rㅣ[비평in문학]


문장웹진 비평 기획

2017년 3월부터 [비평in문학]에서는 비평적 글쓰기 형식의 다양한 방법을 비평가 자신의 실험을 통해 직접 만들어보고자 합니다. 자유로운 주제로 비평 양식에 대한 이론을 실제 비평으로 실천하는 글들이 이어질 것입니다. 비평의 효용과 기능에 대한 회의를 멈추기 어렵지만, 비평을 읽지 않고 쓰지 않는 문화가 더 낫다 생각할 수 없습니다. 비평의 새로운 정동과 문제의식을 스스로 요청하지만, 그것이 기존의 모든 비평을 폐허로 만든 자리에서만 가능하리라 판단하지는 않습니다. 한국문학 비평의 고답성 혹은 무용함에 대한 비판에 귀 기울이겠습니다. 앞으로 [비평in문학]은 ‘비평가’로서 어떤 글쓰기를 창안하고 실천할 수 있을까 하는 비평가의 고민을 구체화하는 장이 될 것입니다.




문학의 미래보다 현실의 우리를

– 문학의 정치적 올바름에 대하여



조연정





1.
최근 한 산문에서 작가 윤이형은 자신을 “페미니즘에 입문한 여성 창작자”로 칭하며, 앞으로 어떤 서사를 써야 할 것인가에 관해 무거운 고민들을 털어놓은 바 있다. 그 중 몇 가지 질문들을 다시 써보면 다음과 같다.


- 나는 앞으로 남성보다 여성이 서사의 중심이 되는 소설을 많이 ‘써야만’ 할까?
- 앞으로 쓸 내 소설에서는 남성 중심적인 사회에 순응하거나 가부장적 질서를 강화하는 여성이 나와서는 ‘안 되는’ 것일까?
- 나는 페미니즘에 입문한 여성 창작자이기 때문에 앞으로 여성에 대한 어떤 멸시나 비하도 ‘현실 그대로’ 작품 속에 재현하면 안 되는 것일까? 꼭 필요해서 그런 식의 재현을 해야 하는 경우도 있지 않나? 그럴 경우, 반드시 거기에 내가 작가로서 ‘비판적인’ 시각을 갖고 있음을 명시해주어야만 하는 것일까?
- 이런 고민들을 하는 일은 자연스러운 것일까, 혹은 각성된 지 얼마 되지 않은 ‘여성’으로서의 내가 과잉 반영되어 있는 것일까? 혹은 나는 그저 여성 트위터리안-독자들의 눈치를 보고 있는 것일까? 그녀들을 ‘타인’으로 여길 만큼 나는 그녀들에게서 먼가?1)

1) 윤이형, 「여성에 대해 쓰기: 너무 많은 질문들과 약간의 대답」, 『문예중앙』 2017년 여름호, p. 30.


이 중 세 번째 질문, “앞으로 여성에 대한 어떤 멸시나 비하도 ‘현실 그대로’ 작품 속에 재현하면 안 되는 것일까? 꼭 필요해서 그런 식의 재현을 해야 하는 경우 (…) 내가 작가로서 ‘비판적인’ 시각을 갖고 있음을 명시해주어야만 하는 것일까?”라는 질문이 현 시점의 나에게는 가장 의미심장하고도 중요한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니까 이 질문은 자신의 신념이나 이상과는 맞지 않는 부정적 현실을 작품에 재현할 경우, 이제는 그 서사적 당위성에 대한 보다 엄격한 고려가 필요해졌음을 환기하는 것이다. 이는 물론 ‘페미니즘에 입문한 여성 창작자로서’의 당연한 고민이겠으나, 나아가 2017년 현재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존재하게 된 문학의 사정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문학과 삶이 관계 맺는 방식은 물론이거니와, 문학작품은 물론, 작가를 대하는 우리의 ‘시선’이 많은 부분 달라졌다는 생각을 하게 하는 질문인 것이다. 우리는 이제 작품도, 그것의 생산자인 작가도, 그들과 공모하는 비평도 물론, 전적으로 신뢰할 수는 없게 되었다.
문학 안에서 어떤 부정적이고 폭력적인 현실이 재현될 경우, 우리는 쉽게 그것을 부정한 현실에 대한 ‘고발’의 서사로 읽어내며 그러한 ‘고발’의 의도를, 그러니까 작가가 지닌 현실에 대한 비판적 인식을 믿어 의심치 않아 왔다. ‘재현’의 장치를 통과한 현실은 날 것 그대로의 현실과는 다른 맥락에서 읽혀왔던 것이다. 가령, 여성을 비롯한 약자에 대한 끔찍한 폭력과 착취가 자행되는 소설을 읽으면서도 우리는 그러한 폭력적 현실을 그려내는 작가의 의도를 해로운 것으로 지적할 필요까지는 없다고, 불가피하게 그러한 장면을 그려내는 작가에게는 당연히 ‘정치적으로 올바른’ 의도가 전제되어 있을 것이라고 믿고자 했다. 그 올바른 의도란 부당한 현실에 대한 적극적 고발이거나, 폭력을 저지르는 인간의 허약한 본성에 관한 발견이라는 식으로 해석되었다. 작가의 성별을 불문하고서 말이다. 그뿐일까. 무중력, 환상, 탈주 등의 키워드로 정리된 2000년대 문학이 결국 경직된 현실, 억압적 현실에 대한 대항 서사로서 기능하고자 했다는 사실도 의심 없이 받아들여졌다. 이러한 서사들이 실제의 현실에서 어떤 작용을 할 수 있을지가 고민의 주제였을 뿐, 현실이 올바른 방향으로 바뀌기를 바라는 선의에서 그러한 서사들이 고안되었을 것이라는 점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불과 몇 년 사이에, 이른바 표절 사태와 “문단_내_성폭력” 해시태그 운동을 거치며, 우리는 자연스럽게 문학을 이전과는 다른 방식으로 읽게 되었다. 문학적 재현의 ‘선한/올바른’ 의도라는 오래된 믿음이 깨어진 셈이다. 이렇게 된 데에는 물론 ‘문학의 자율성’ 신화를 등에 업고 실상의 관계에서 파렴치한 폭력의 가해자가 되기도 한 소수 문인들의 위선적 악행 탓이 크다. 그렇다면 그러한 소수의 문인들이 문단에서 삭제되거나 스스로 각성한다면 모든 문제는 해결될까. 물론 아니다.


2.
‘문학은 억압하지 않는다’라는 명제는 1970년대 이래로 한국 문단에서 언제나 문학에 대한 절대적 알리바이처럼 소환되어 왔다. 현실 정치에 큰 힘을 발휘할 수 없는 문학이, 공동체 안에서 어떤 가시적인 힘을 발휘하기는커녕 점점 공동체의 관심 영역 밖으로 밀려나는 문학이, 과연 무엇을 할 수 있고 무엇을 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처할 때마다 문학 종사자들이 입버릇처럼 꺼내드는 명제가 바로 ‘억압하지 않는’ 문학의 선한 의지에 관한 것이었다. 가까운 예로 ‘문학과 정치’에 관한 논쟁이 한창이던 2000년대 후반의 평단만 생각해보더라도, 문학이 어떻게 정치적일 수 있을까라는 난제는 ‘무용한 문학은 애초에 정치적이다’ 혹은 ‘억압하지 않는 문학이 정치를 등지지 않는다’라는 식의 동어반복에 가까운 결론으로써 해결된 듯한 착각에 빠지곤 했던 것이다. 사실 해결된 것은 아무것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때의 우리는 ‘억압하지 않는 문학’이라는 명제와 더불어 문학의 ‘선한/올바른’ 의도만을 재차 강조하는 방식으로 자위했던 것은 아닌가 반성하게 된다.
무용성에 대한 믿음이 이처럼 애초에 문학이 현실적으로 큰 힘을 발휘할 수 없다는 사정에 대한 알리바이처럼 작용한 것도 사실이지만, 불행하게도 이러한 명제로 인해 문학의 사회적 책임이나 정치적 올바름에 대한 감각이 오히려 무뎌졌던 것은 아닌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문학은 자율적인 것이므로 문학이라는 이름으로는 무엇이든 용인될 것이라는 생각, 문학은 무용한 것이므로 문학하는 행위 자체가 세속적 가치를 추구하는 일과는 전혀 무관할 것이라는 생각, 결론적으로 이러한 문학에 종사하는 자신이 절대적으로 선량한 시민일 것이라는 어떤 생각들이 오히려 문단을 우리 사회의 가장 고인 물로 만든 것은 아닌지 따져야 하는 것이다. 최근 삶과 문학이 관계하는 방식이 이전과는 전혀 달라져야 한다고 주장하는 논의들은 문학의 자율성 혹은 문학의 무용성 신화에 대한 문단의 오랜 지지를 철회하려는 움직임으로 읽힌다. “문학이 삶과 자율적 관계를 맺고 있다거나 삶이 문학이 되기 위해서는 문학적 원리로 재편되어야 한다는 논리는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2)며 소영현이 문학의 새로운 존재 방식에 대한 시대적 요청을 확인할 때, “억압하지 않는 것만으로는 공모의 혐의에서 벗어날 수 없다”3)며 하재연이 우리 시대 문학 행위의 정치적 책임을 적극적으로 끌어안고자 할 때, 허구적 재현이라는 이유로 언제나 현실로부터 한 발짝쯤은 떨어져 있었던 문학의 존재방식이 더 이상 고수될 수 없다는 점이 극명해진다.

2) 소영현, 「목격하는 증인, 기록하는 증언」, 『문예중앙』, 2017년 봄호, p. 27.
3) 하재연, 「이것이 내가 상상한 문학은 아니었으나」, 같은 책, p. 41.


3.
윤이형의 고민의 목록들을 따라가자면, 각성된 자신의 신념에 의해서든, 독자들의 기대에 의해서든, 앞으로의 창작이 어떤 외부의 ‘시선’에 더욱 엄격히 노출될 수밖에 없다는 짐작을 하게 된다. 누군가는 작가들의 이러한 고민들을 마주하며 최근의 문단 분위기가 창작의 자유를, 나아가 창작에의 의지 자체를 크게 위축시키고 있다고 염려할지 모른다. 어떤 경우에라도 문학의 자율성과 언어의 자유는 훼손되어서는 안 될 절대적 가치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물론 있을 것이다. 문학의 정치적 책임을 그 어느 때보다도 적극적으로 묻고 문학과 삶이 이전과는 달리 훨씬 더 직접적으로 연동돼야 한다고 주장하는 목소리들이 모이는 한편, “문학은 정치적으로 올바라야 하는가”4)라고 회의하며 문단이 “특정한 신념의 공동체를 자처하는 모습이 자못 우려스럽다”라고 비판하는 목소리가 경청되고 있기도 하다.
이처럼 서로 결이 다른 목소리들이 공존하며 문학에 관한 다양한 고민들을 풀어놓고 있는 장면을 보고 있자면 한국 문단이 완벽히 고인 물은 아닐 것이라는 반가운 기대를 하게 된다. 하지만 보다 솔직한 심경을 고백하자면, 한국 문단이 정말로 ‘특정한 신념의 공동체’가 될 만큼이나 어떤 신념에 대해서든 오랫동안 충분히 숙고하고 실천한 적이 있었던가 라는 생각이 들면서 조금 씁쓸해지기도 한다. “문단_내_성폭력” 해시태그 운동이 짧은 시간 동안 특정 문인들의 악행을 낱낱이 고발하며 많은 문제들을 공론화하고, 나아가 그간 문학의 자율성을 온전히 지지해온 평단의 논의들을 다시 읽게끔 만든 성과도 있지만, 그러한 반성적 시각들이 가시적인 성과를 축적하기도 전에, 이를 테면 문학과 여성혐오의 문제를 어떻게 사유할 것인지, 2000년대 문학을 읽으며 우리가 놓친 것이 무엇인지 등을 찬찬히 되짚어보기도 전에, 젠더 이슈가 벌써부터 문학을 억압하는 부당한 ‘신념’으로 취급되려는 것은 아닌가 하는 우려도 생긴다.
정리된 입장은 아니지만, 최근 삶과 문학의 관계를 새롭게 정의하려는 논의들에 의견을 보태자면, 지금의 우리가 물어야 할 것은 “문학은 정치적으로 올발라야 하는가”가 아니라 왜 이제껏 우리는 손쉽게 문학은 어떤 형태를 띠든 궁극적으로는 정치적으로 올바른 의도를 지닌 것이라는, 즉 문학하는 행위 자체가 공동체에 선한 의지를 보태는 의도의 산물이라는 믿음을 의심해볼 생각이 없었는가에 관한 것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먼저, 문학이라는 이름 안에서의 모든 행위가 궁극적으로는 선하고 올바른 것이라는 생각 자체가 해체될 필요가 있다. 그러한 믿음이 해체되어야만, 즉 관성적 믿음으로서가 아니라 사실로서 문학이 정치적으로 올바른 신념의 공동체가 되었을 때에라야, 문학의 정치적 올바름이 당위적일 필요가 있는가라는 질문도 유효해질 수 있겠다. 아직까지 문학은, 특히나 페미니즘이라는 신념에 관해서라면, 좀 더 올발라야 할 필요가 있다. 문학 안에서 자신의 신념을 훨씬 더 훌륭한 방식으로 실천할 수 있는 방법을 애써 궁리하고, 문학과 삶의 관련을 이전과는 다른 방식으로 치열하게 고민하게 될 때, 문학과 더불어 우리의 삶이 진정 삶다운 것이 될 수 있다. 양경언의 말처럼 “보다 잘 쓰려는 것, 보다 잘 읽으려는 것, 이는 단순히 미학적인 측면으로 삶을 세공하려는 방식이 아니라 그 자체가 ‘삶다운 삶’을 살아보고자 하는 궁리에 가깝다”5)는 당연한 사실을 인정한다면 말이다.

4) 이은지, 「문학은 정치적으로 올발라야 하는가」, 『문학3』, 2017. 3. 7.
5) 양경언, 「싸움과 희망」, 『문학3』, 2017년 1호, p. 36.


4.
이 글이 놓인 지면에 앞서 실린 조강석의 글은 최근 문단에 정치적 올바름 혹은 윤리적 올바름에 대한 요청이 다급해지는 사정 속에서 결과적으로 작품의 미학적 측면에 대한 고려가 어떻게 포기 혹은 간과되고 있는지를 비판적 시각에서 진단하고 있다. 이러한 장면들은 전언적 가치와 미학적 가치 사이의 불일치라는 문학사의 오랜 아포리아를 떠올리게 한다. 주로 조남주의 『82년생 김지영』을 분석해보는 그는 이 작품이 “디테일의 풍부함을 통해 ‘사실의 힘’을 발휘하는 작품”이며 이 소설 환기하는 ‘사실의 힘’이 묵중하다는 사실이 충분히 인정된다고 말한다. 우리가 이미 알고 있다고 생각한, 대한민국의 평균적 여성이 겪는 불평등하며 불안정한 삶을 모습을, ‘아는 것’으로부터 ‘보는 것’으로 전환시키려는 것이 이 작품의 목적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이 소설의 극사실적 디테일들이 꽤 훌륭하게 작동하고 있다는 점도 그는 인정하고 있다. 그러나, 작품의 성과를 폄하할 생각도 없으며 이 작품의 미덕을 충분히 인정한다는 단서들이 붙고 있기는 하지만, 결국 조강석의 글이 확인하려는 것은 메시지가 실천적으로 강조된 작품이 미학적으로는 해이해질 수밖에 없다는 문학사의 오랜 편견, 그리고 그러한 작품에서는 결국 그 전언적 가치조차 반감될 수밖에 없다는 한계에 관한 것이 아닌가 싶다. 그의 글이 대체로 그렇듯 탄탄한 이론을 토대로 진행되는 이 글에서 결정적 오류가 될 만한 부분을 찾기는 어렵다. 그리고 그가 지적한 『82년생 김지영』의 성과와 한계는 대체로 수긍할 만한 것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문이 드는 지점들이 있기는 하다.
조강석이 『82년생 김지영』을 읽기 위해 참조한 것은 ‘정치적 올바름’이라는 메시지에 집중한 노먼 록웰의 회화와, 도덕적으로 유해할 수 있지만 미학적으로 뛰어난 프랜시스 베이컨의 회화를 비교하며 읽은 매튜 키이란의 논의이다. 이러한 논의를 참조한 조강석의 입장은 다음의 문장들을 통해 확인된다.


메시지에 집중된 의지가 회화적 중심을 테마적 중심에 수렴시키는 과장된 몸짓에 의해 작품의 총체적 ‘실효성’을 훼손할 여지는 언제나 있는 것이다. 또한 당대의 공통 감각을 뒤흔들고 감상자를 불편과 고통에 직면하게 하는 베이컨의 그림이 정치적 올바름을 가시적 형상으로 직역한 노먼 록웰의 그림보다 오래 시선을 붙잡으며 실효성을 높일 수도 있는 것이다. 미학적 논리에 따른 실효성이 재현적 논리에 따른 실효성보다 효과적으로 정동적 수행성을 높이고, 따라서 수용자로 하여금 ‘인간이라는 사태’에 보다 더 가까이 육박하게 만들면서 가치를 드높이기도 하는 것을 베이컨의 그림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6)

6) 조강석, 「메시지의 전경화와 소설의 ‘실효성’-정치적·윤리적 올바름과 문학의 관계에 대한 단상」, 『문장 웹진』, 2017. 4. 1.


그것이 어떤 신념에 관한 것이든 전언이 과도하게 앞서면 작품의 전체적 실효성이 훼손될 수 있다는 점이나, 전언을 노골적으로 드러내지 않아도 미학적 가치가 뛰어나다면 훨씬 더 전면적인 방식으로 작품의 “정동적 수행성”을 높일 수 있다는 말은 이론적으로는 반론의 여지가 없다. 이런 논리를 따르자면 『82년생 김지영』에서 발견되는 스타일의 어색한 병치, 즉 “관찰자의 스타일과 해석의 스타일과 재연의 스타일이 매개없이 병치”되는 사태는 메시지의 전경화를 위해 플롯을 희생시키는 결과를 낳고, 플롯의 희생은 결국 소설 자체의 실효성을 약화시킨다고 결론 내릴 수밖에 없다.
이러한 결론은 매끄럽지만 두 가지 문제가 좀더 해명될 필요가 있다. 첫째, 『82년생 김지영』이 ‘아는 것’을 ‘보는 것’으로 전환시키는 소설이라고 할 때, 즉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사실을 재확인시키는 것이 이 소설의 목적이라고 할 때, 조강석이 지적한 플롯의 맹점으로 인해 이러한 기능은 얼마나 어떻게 축소되는지를 따져볼 필요가 있다. 둘째, 베이컨의 회화가 그렇듯 문학사에서도 “미학적 논리에 따른 실효성이 재현적 논리에 따른 실효성보다 효과적으로 정동적 수행성을 높이고, 따라서 수용자로 하여금 ‘인간이라는 사태’에 보다 더 가까이 육박하게 만들면서 가치를 드높이기도 하는 것”이 훨씬 더 근사한 일로 기억되기는 하지만, 문학과 삶이 관계하는 방식이 이전과는 판이하게 달라진 현 시점에서 그러한 근사한 일을 기대하는 것이 과연 얼마나 적절한가라는 점을 생각해볼 필요도 있다. 미학적으로 훌륭한 작품이 나타나 현실을 변화시키는 데에도 결정적인 힘을 발휘해주기를 천천히 기다리는 일이, 평범한 사람들의 삶이 이유없이 위협받는 이 곤란한 세계 속에서 얼마나 용인되고 지지될 수 있을지, 솔직히 회의적이다. 그러니까 대체 이 시대에 문학을 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 것일까. 우리는 문학과 더불어 무엇을 해야 하는 것일까.


5.
우선 첫 번째 문제에 대해 생각해보자. “플롯이 물러나고 메시지가 전경화 되는 방식으로는 결국 소설의 ‘실효성’을 지탱하는 세 축에서 재현의 축의 효력조차 감당하기 버겁게 만드는 것으로 귀결될 수 있다”고 그가 말할 때, 쉽게 말해 이 말은 메시지의 중요성과 그 효과는 인정하지만 결국 이 소설의 미학적 완성도는 아쉽다는 말로 이해된다. 플롯의 완성도가 떨어짐으로써 소설의 서사는 결국 ‘그럴 듯한 것’ 혹은 ‘믿을 만한 것’으로 받아들여지기 힘들게 되고 나아가 이 소설이 지닌 ‘사실의 힘’마저도 반감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가 이 소설의 플롯의 결함을 지적하기에 앞서 단서처럼 달고 있는 “작품의 성과를 폄하할 생각이 없다”는 말은 사실이 아닌 것이 된다. 조강석은 사실 이 소설이 미학적으로 부족하기 때문에 ‘메시지의 전경화’라는 그 의도조차도 효과적으로 성취할 수 없는 소설이 되고 말았다는 부정적 평가를 내리고 있는 셈이다.
그런데 정말 그럴까. 그러니까 이 소설이 사실을 그럴 듯하게 재현하는 일과 통계 자료 같은 것을 어색하게 노출시키는 일을 함께 함으로서 플롯의 완성도를 의심하게 하고, 김지영의 이상 증세를 소설의 앞뒤로 삽입함으로써 작품 자체를 어색하게 만드는 일이, 이 소설이 목적하고자 한 대한민국의 평균적 여성의 삶을 재확인하는 일을 얼마나 방해하는 것일까. 나아가 김지영의 관찰자로서 대한민국 여성의 삶에 대해 각성한 “평범한 40대 남자” 의사가 육아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여직원을 고용하지 않겠다고 결심하는 아이러니한 결말이 전언을 강화하기보다는 작품의 ‘실효성’과 더불어 전언의 효과까지 약화시킬 것이라는 예측은 정말 맞는 것일까. 조남주는 한 인터넷 매체의 인터뷰 방송에서, 작품에 여러 통계 자료들이 뒤섞이는 것에 대해, 소설 같지 않다는 평가를 받더라도 그러한 자료들을 포기하고 싶지는 않았다고 말한 적이 있다. 공통의 기억을 떠올리게 할 수 있는 평범한 에피소드를 선별하기 위해 SNS나 다양한 인터넷 까페에서 소통되는 이야기들을 관찰하기도 했다고 말했다. 그러니까 대한민국의 (특정한 세대의) 평범한 여성의 삶을 보고서처럼 그려보고자 했다는 말이다. 이러한 목적을 고려할 때 이 작품의 여러 미학적 오류들이 얼마나 치명적인가라는 평가는 달라질 수 있다. 디테일과 전언이 앞서는 소설, 작가가 그것을 전적으로 목적했다고 말하는 소설을 평가할 때 우리는 무엇을 고려해야 할지 좀 더 생각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그러한 전언의 가치가 절대적으로 중요한 현실적 맥락을 고려한다면 말이다.
개인적으로는 조남주의 『82년생 김지영』이 제공하는 다양한 디테일들이 독자에게 현실을 전혀 새롭게 인식할 만한 통찰력을 안겨 준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세대에 따라 이 작품을 읽는 감상도 다를 것이라고 생각된다. 누군가는 82년생 김지영이 겪는 에피소드들이 더 전 세대의 경험에 가깝다고 말할지도 모르며, 반대로 한국 사회 여성의 삶이 이렇게나 변하지 않는구나라는 탄식과 함께 이 소설을 씁쓸히 읽어 내려가는 독자들도 있을 것이다. 물론 이 소설의 마지막에 등장하는 “평범한 40대 남자” 의사처럼 “대한민국에서 여자로, 특히 아이가 있는 여자로 산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알게 되었다”라고 말하는 독자들도 없지는 않을 것이다. 『82년생 김지영』이 현실에 대한 새로운 통찰을 안겨주거나 두고두고 음미할 만한 미학적 새로움을 장착한 것도 아니지만, 나아가 페미니즘적 신념에 관해 이 소설이 최전선의 급진적 인식을 보여주는 것도 아닐 테지만, 이러한 점들이 이 소설의 성과를 반감시키지는 않는다고 말하고 싶다. 현실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가능하게 하거나 언어를 세공하는 일이 물론 문학의 보편적 과제이겠으나 우리가 문학에 무엇을 요청할 것인가는 어떤 현실에 놓여 있는가에 따라 당연히 달라져야 하기 때문이다.
미학적으로는 어쩌면 태만하게 여겨질 수 있는 이 소설이 왜 이토록 화제가 될 수밖에 없는지, 우리는 소설의 태만을 지적하는 일보다 태만한 현실에 분노하는 일을 먼저 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여러모로 시의적절한 주제를 다루고 있으며 유명 정치인의 선택으로 입소문을 타기도 해 작품 자체의 성과보다 더 많이 읽힌 작품일 수는 있겠지만, 이러한 사정이 불편하거나 부당하다고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이 작품의 전언적 가치가 정말로 막중하지 않는가. 『82년생 김지영』에 그려지는 디테일들은 너무나 평범하지만 그러한 디테일에 대다수의 여성들이 공감할 수밖에 없다는 그 당연한 사실이 정말 심각한 문제인 것은 아닌가. 이러한 점을 재차 각성시킨다는 점에서 이 소설은 그 자체로 의미있는 정치적 텍스트가 되는 것이 아닌가. 현실은 달라진 것이 하나도 없는데, 아니 오히려 지난 30여년간의 여성운동이 수포로 돌아갈 만큼 여성의 생존과 실존은 다양한 방식의 위협에 노출되게 되었는데, 그러한 여성의 삶을 재현하고 고발하는 문학만은 언제나 절대적으로 진보한 모습을 보여줘야 하는 것일까. 이러한 질문들 역시 미학적으로 태만한 비평가의 그것으로 비춰질지 모르겠지만, 지금의 나에게는 문학의 위축을 염려하는 일보다 나의 신념과 맞지 않는 현실에 분노하는 일이, 즉 여성의 부당한 삶의 조건을 고발하고 공유하는 일이 더 시급한 것으로 여겨진다.


6.
이제 마지막으로 앞서 제기한 두 번째 질문을 다시 물으며 두서없는 글을 마무리해보기로 하자. 미학적 논리에 따른 실효성이 재현적 논리에 따른 실효성보다 훨씬 더 효과적으로 “정동적 수행성”을 높일 수도 있다는 원론적 논의에 대해서 말이다. 회화에서의 베이컨의 업적에 육박하는 문학적 사례를 찾는 일이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닐 것임에도 불구하고, 현재 한국문학이 놓인 사정과 관련해서는 보다 실증적인 진단이 필요하다. 무엇을 재현할 것인가와 어떻게 재현할 것인가의 문제 중 지금 우리에게 더 시급히 요청되는 것은 무엇일까. 이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의견을 음미해보고 싶다.


어쩌면 재현 너머를 의식하는 언어와 상상이 역으로 재현을 불신하게 만드는 역효과를 냈다고 해야 할 것이다. (…) 다시 말해, 낡은 인식을 부정하고자 할 때 그 인식을 재현/표상하는 낡은 말들의 더미를 거부하면 인식에 대한 입장만 겨우 그려지고 말 것이다. 따라서 이 시대 ‘한국문학’의 부진이 (무능한) 재현 능력에 있다고 한다면, 어떤 퇴행적 인식을 다룬 것(통용되는 인식의 재현)이 무능한 게 아니라 어떤 인식이 재현(불)가능성으로만 표현되어 전달되었다는 게 무능한 측면이 된다.
‘재현 너머’ 혹은 ‘재현 아닌’ 재현은, 서사를 주로 시각적 상상력에 의지해 수용해 온 대중적 감수성과 특히 멀어지는 결과에 이르기도 했을 것이다. 바로 그, ‘서사성의 결핍’, ‘난해시의 불통’ 등을 문제 삼았던 대중-독자들의 불만이, 오늘날 대중-독자들이 문학에서 자기 얘기를 못 찾겠다든가, 문학이 대중-독자를 교양의 대상으로 여기는태도가 싫다든가 하는 불평에까지 이어진 것으로 보인다. 아이러니하게도, 재현에 대한 탐구가 재현의 실패를 가져왔다고 해야 할까. 오늘날 대중-독자들의 불신과 냉담을 부른 문학의 무능도 이 지점이 아닐까 생각해보게 된다. 요컨대 재현의 임계/한계/경계에 대한 문학의 첨예한 고민은 ‘대중적인 것’의 형질 변화를 유도하는 데로 나아가지 못했다.7)

7) 백지은, 「‘K문학/비평의 종말’에 대한 단상(들)」, 『문장 웹진』, 2017. 2. 1.


“K문학”이라는 조롱조의 명명과 함께 한국문학의 퇴행적 인식을 문제 삼는 비난들에 대해 백지은은 한국문학의 무능은 인식의 퇴행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재현장치’로서의 어떤 실패에 있다고 말해본다. “어떤 ‘문학’을 낡은 인식의 체현이라고 할 때, 문제는 변화하는 시대의 요청에 맞지 않는 낡은 의제가 아니라 어떤 의제를 표출하는 언어의 (문학적이라고 여겼던) 사용 방식이 변화하는 시대에 더 이상 효과적이지 않다는 데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그녀가 문제삼는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새롭고 낯선, 이질적인 감각을 드러냈다고 평가된 2000년대 문학에 관한 것이다. 위의 긴 인용을 단순히 요약해보자면, 대중들에게 익숙한 “시각적 상상력”보다는 “말들의 연결과 흐름으로 생성되는 ‘언어적 상상력’”에 천착한 문학은, 그러니까 직설적 방식으로 낡은 현실을 부정하기보다는 ‘재현(불)가능성’을 경유해 낡은 현실 또는 낡은 인식에 대한 비판적 메시지를 희미하게 드러낼 뿐이었던 그간의 문학은 ‘대중적인 것’과 쉽게 접속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재현에 대한 탐구가 재현에 대한 실패를 가져왔”으며 나아가 “‘대중적인 것’의 형질 변화를 유도”하지 못했다는 백지은의 결론은 현 시점의 문학이 무엇을 고민해야 하는가와 관련하여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물론 백지은이 말하는 “재현 너머”를 의식하는 문학, “언어적 상상력”에 천착해 대중과의 접점을 상실한 문학을, 조강석이 말하는 ‘재현적 논리’보다 ‘미학적 논리’에 더 집중하는 문학으로 곧장 등치시킬 수는 없다. 그러나 2000년대 이후의 한국 문단이라는 특수한 맥락 안에서라면 이는 반드시 불가능한 등식도 아니다. 그러니 백지은의 글을 경유해 조강석의 입장에 다시 한 번 의문을 표해보자면, 문학의 위상과 문학의 역할이 이전과는 많이 달라진, 그러니까 문학의 자율성이 온전히 지지될 수 없으며 문학과 삶이 무매개적으로 맞닿아 있는 사정 속에서, 미학적 논리에 따른 실효성이 재현적 논리에 따른 실효성보다 훨씬 더 효과적으로 “정동적 수행성”을 높일 수 있다고 기대하는 것은 그저 문학의 가능성에 대한 근본적인 믿음 그 자체를 재확인하는 것에 그치지 않을까. 물론 그 기대를 나 역시 철회하고 싶지는 않다. 미학적으로 근사한 문학이 더 많은 사람들에게 읽히고 대중들을 윤리적으로나 정치적으로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어 결국에는 엉망진창이 되어버린 우리의 삶을 드라마틱하게 구원해주기를 바라고 또 바란다. 그러나 그러한 기대만을 품고 있기에는 현실의 비참이 너무나 심각하고 우리의 분노는 너무나 크다.


7.
만약 최근의 여러 사정들을 겪지 않은 문단이었다면, 조강석의 글은 문학과 정치의 관련을, 즉 작품의 재현적 가치와 미학적 가치 사이의 관계를 랑시에르의 논의에 기대 섬세한 방식으로 질문하는 역시나 유려한 글로 읽혔을 것이다. 아니 좀 더 실랄하게 말해본다면, 문학 밖의 현실에 대해 새로운 통찰을 보여주지는 못하며 조강석의 말처럼 ‘아는 것’을 ‘보는 것’으로 전환시키는 효과만을 지녔을지 모르는 『82년생 김지영』 같은 소설이 지금처럼 활발하게 비평의 대상이 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이 소설을 경유해 우리가 2017년 현재 한국 사회에 어떤 신념이 더 강요될 필요가 있는지, 그리고 문학이 무엇을 해야 할지 더 열심히 고민하게 되었다는 것은, 그만큼 지금의 문단이 미학의 최전선에 대해서보다는 삶과 밀착한 재현의 적실성에 대해, 나아가 정치적 올바름에 대해 더 심각하게 생각해야 한다는 점을 입증하는 것이다. 그러니, 문제의식이 한정돼 있다는 우려에도 불구하고 박민정 같은 작가가 계속해서 여성혐오적인 현실을 각성시키는 작품을 계속 써주었으면 좋겠고, 윤이형의 고민도 많은 사람들이 공유하며 페미니즘이라는 신념을 문학적으로 재현하는 다양한 작업들이 더 활발해지면 좋겠다.
메시지의 전경화가 작품을 미학적으로 누추하게 만들고, 오히려 미학적 가치에 헌신한 작품이 의외의 효과를 발휘할 수 있다는 원론적인 말을 반복하기에는 문학을 대하는 우리의 방식이 많이 달라져있다. 문학의 누추화를 걱정하기에 앞서 삶의 비참을 더 심각하게 여겨야 하는 불행한 시절을 우리가 살아내고 있기도 하다. 우리의 삶이 삶다운 것이 되어 문학이 다시 자율성을 되찾고 언어를 세공하는 그 자신의 사명에만 행복하게 몰두하게 될 날이 올 때까지, 문학은 언어보다는 현실의 삶을, 그리고 인간을 좀 더 돌보아야 할 필요가 있다. 문학의 미래를 걱정하는 일보다 현실의 우리를 걱정하는 일이 더 시급하기 때문이다. 미학과 정치가 양자택일의 것은 아니지만, 미학적 감식안을 단련시키는 일이 훨씬 더 근사한 일로 보이지만, 그런 근사한 작업을 잠시 포기할 생각까지도 하게 될 만큼 현실의 사정이 참을 수 없는 것이 되었기 때문이다.















정은경
작가소개 / 조연정

문학평론가, 현 『문학과사회』 편집동인, 저서 『만짐의 시간』이 있다.


《문장웹진 2017년 08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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