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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라는 질문 혹은 대답

  • 작성일 2019-04-01
  • 조회수 1,961

[문학리뷰(시)]



'시'라는 질문 혹은 대답



이진경




시는 질문이다. 리쾨르가 지적한 바처럼 일상 언어의 사용법에서 벗어나 지시대상과 의미를 분리시키고 고유의 문법 속에서 다른 의미를 찾도록 유도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시의 특성은 읽는 이에게 아름답고 낯선 미적 경험을 선사하기도 하고 시 읽기를 정복하기 어려운 도전으로 만들기도 한다. 그러한 시도 끝에 실패의 부스러기만 남아 있다 해도 좋다. 시는 심미적 차원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발휘하므로 현실과 주체의 분리를 유도하는 측면이 있기에 '질문'만으로도 남을 수 있는 까닭이다. 그렇다면 생존과 결부된 삶에 천착해 살아가는 '주체'에게 삶이 무엇인지를 묻고, 답해 주는 시-순간은 언제인가.
나의 시-순간은 대형서점에서 한 시인의 시집을 처음 보았을 때와 닮아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때 나는 제목에 이끌려 그 시집을 한참이나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제목이 모든 것을 다 말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서다. 삶을 내 것으로 존치하려는 시도를 무화하는 그(들) 때문에 더 이상 아파하지도 외로워하지도, 울지도 말라고. 그건 단지 그(들)와 네가 서로를 모르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라는 시(인)의 말. 그것은 삶이라는 억압 체계를 자신의 방향으로 이끌기 위해 내내 아파야만 하는 내게 위안이 되어 줄 언어로 다가왔다. 그 시집을 통해 이를 얻을 수 있었던 까닭에 나는 지금도 시의 곁에서 여전히 삶을 갱신하려 애쓰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우리가 아파서 신체를 당연시하지 않게 될 때 신체를 새롭게 경험하는 반갑지 않은 기회를 갖는 것"(테리 이글턴)이라면, 삶이라는 경계의 바깥으로 내몰린 순간 우연히 접하게 된 시는 새로운 나를 발견하는 또 다른 기회일 것이다. 바로 여기서 시의 쓸모가 가시적 형태로 드러난다. 그곳은 언제나 위기와 동요의 한복판이다. 시의 언어가 반짝이며 떨어지기 때문이다. 떨어진 곳은 대개 아픔이 비롯된 곳이며, 그즈음 시는 우리에게 '대답'인 듯 안겨 온다.



너를 죽일 거라고 말하면


나를 끌어안았던 어깨와
좀 더 길어질 것만 같았던 팔
안쪽의 따뜻함이 내 눈을 덮고
들리지 않았던 걸 들리게 만들어


개미 떼가 늘어납니다
굴속에서 사람들은 바쁘게 고개를 돌립니다
이리저리 몰려다니며
랜턴을 켭니다 주름이 많습니다
나는 주름이 많아요(그래요
나는 주먹을 쥐고 이를 꽉 깨물었습니다
긁으면 안 된다고
누가 내 손을 가져갔습니다)


안전모를 썼다면 불빛에 속지 않았을 겁니다
모기가 윙윙거립니다


중간까지밖에 안 왔는데 목을 축이는 다른
사람이 있습니다
사슴 같아요


방해받고 싶지 않아요 소리 없이 다가간다고
뭐가 달라지겠습니까?
나는 가끔 움직이지 않는데도


움직이고 있다고 느껴요
지저분하게
웅덩이에 빠지면 빠진 대로
물을 흘리면서 발자국을 남기고
어디로 가는지 모르는 채
어디로든 가게 될 겁니다
알고 있습니다


뭐가 그렇게 중요하냐고 물으면
안전모를 쓰게 될 겁니다
아주 혼나게 될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오은경, 「묶인 사람」전문 (릿터, 2018 12/2019 01, 15호)



'시'의 가치가 존재의 방황과 절망, 실패 등 부정적인 것의 심연을 응시했을 때 현현되는 것이라면, 이를 형상화한 작품은 역설적으로 '시'에 내재된 역량의 증거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오은경의 시에서 '구속과 자유'에 관한 물음은 생의 여정 중 '무엇'인가에 '묶'여 있는 화자의 모습으로 표상된다. 여기서 '무엇'은 그의 시에서 '너' 혹은 '개미 떼', 수많은 '주름', '굴속 사람들' 등으로 형상화된다. 이 시에서 화자는 "누군가 내 손을 가져"가 버린 듯한 자신을 속박하는 상황 속에서도 "어디로든 가"려는 시도 ― 벗어남에 대한 의지 ― 질문을 드러낸다. 아직 무엇이 "중요"한 것인지 정확히 인지하지 못하는 한계에 봉착한 탓이다. 그러나 이러한 한계 상황 가운데서도 그는 끝내 자신이 "어디로든 가게 될" 것을 (사실은 그곳-목적지에 도착할 것임을) "알고" 있다. 이러한 자기 확신은 오은경의 시에서 예비 된 이정표처럼 단호하고 항구적인 것처럼 묘사된다.
그러던 중, 여정의 "중간" 지점에 다다랐을 때 화자는 여유롭게 "목을 축이"고 있는 "사슴" 같은 "사람"을 만나게 된다. 화자가 보기에 "중간" 지점밖에 오지 않았음에도 여유롭게 물을 마시는 그는, 아름답지만 유약한 존재에 가깝다. 그에게 있어 이 "사슴" 같은 "사람"은 "방해받고 싶지 않"은 존재이면서도 한편으로는 "소리 없이 다가"가고 싶기도 한, 신비로움을 내재한 대상이다. 오은경의 시에서 신기루처럼 나타났다 사라지는 "사슴" 같은 "사람"은 "어디로 가는지 모르는 채/어디로든 가게 될" 인생의 여정에서 한 번쯤은 우연히 만나(게 되)는 '한 편의 시'처럼 느껴지는 것은 왜일까. 시 읽기가 구속과 자유, 억압과 해방, 멸시와 갈망이라는 깜깜한 하늘 아래에서 우리가 유일하게 "안전모"를 쓰지 않은 채로 즐길 수 있는 것이 허락된 시간이기 때문은 아닐는지, 생각해 본다.



머리를 물속에 담그고
몸을 띄워
발을 움직이지 말고
손으로 헤엄치지 않고
물 위에 그저


(…)


반짝이기만 하는 저편이
눈 앞에 펼쳐지고
햇볕이 가닿기도 했지만
이제는 간신히 어둠 속에
순간들을 붙잡으려 하고 있어


깨지기 쉬운 보석들처럼
수중에 머무는 불빛들은
지하의 광물을 의심케 하지만
광물 아닌 보석이 있다면
보석 아닌 광물이란 없는 걸까


낮은 숨으로 이어지는 잠이
깊은 밤을 만들어나가듯
내려가는 길에 꿈이 생겨나
물길이 마를 수도 있겠지


짚으려는 바닥은 가늠할 수 없고
휘젓는 손은 늘 허공과 같지만


머리를 물속에 담그고
몸을 띄워
발을 움직이지 말고
손으로 헤엄치지 않고
물 위에 그저


-신두호, 「연습」부분 (현대시 2월호)



속지 않는 자가 속는다(라캉). 상징적 질서 내에 던져진 존재가 자신이 보는 것만을 믿으려 한다면 (즉 세계의 허구를 믿지 않으려 한다면) 그는 속절없이 속게 될 것이라는 말이다. 이 세계는 벽으로 꾸며진 인간들의 공동체이므로, 진리(진실)는 언제나 오인의 구조를 통해 나타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우리가 "짚으려는 바닥은 가늠할 수 없고/휘젓는 손은 늘 허공과 같"을 뿐이라고 해도, 수많은 오해 속에서 우리는 끊임없이 속으려는 '연습'을 해야만 한다. 이것을 신두호식으로 말해 보자면 이렇다. "머리를 물속에 담그고/몸을 띄워/발을 움직이지 말고/손으로 헤엄치지 않고/물 위에 그저" 떠 있어야 한다. "물 위"에서 물밑의 상황을 파악하기란 쉽지 않다. 나의 기대와는 달리 "보이는 것"은 "일렁이는 타일뿐"에 그친다. "매 순간 물결친다고 해서/바닥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듯 풀리지 않는 의문-질문 속에서도, "내려가는 길" 가운데서도 "꿈"은 "생겨"날 수 있다. 그러므로 "낮은 숨으로 이어지는 잠이/깊은 밤을 만들어 나가듯" 우리는 삶의 목적지에 다다르기 위해 끝없이 '연습'해야만(속아야만) 한다. 이것이야말로 불완전한 생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소박하지만 진정한 삶의 의미에 다다를 수 있는 길이 될 테니 말이다.



사람들은 왜 나무를 떠나지 못할까
깊은 바닥에 가라앉아 일렁이는 나무 그늘
나무는 누가 이곳으로 던진 그물일까
대낮에 나는 나무에 기대 의문에 싸여 있는데,


세상의 가장 깊은 바닥은 우주고
우주에 자갈처럼 깔린 별들을 아작아작 밟으며,
바닥을 훑으며 심해어처럼 유영하는 새들
별들 아래 가라앉아 있던 구름이 뿌옇게 피어오르고
스치듯 난기류, 잠깐 흔들리는 여객기
그 밖에도 아무도 눈치채지 못한,
문득 발생했다가 세상에 아무런 흔적도 못 내고
금세 사라진 온갖 소용돌이들


그런 찰나의 소용돌이 같은 아이들이
죽자마자 하나씩
지하에서 지상으로 던진 그물들이 자라고,
그런 나무들이 어느 도시 어디든 무수히 널려 있다
오늘도 그물 속에는 잎들 꽃들 새들 바람들 사람들


바람은 철썩철썩 매 순간 밀려온다
일렁이는 나무에 바람이 솜사탕처럼 감긴다
모두 슬프고 달콤한 바람 냄새에 이끌려
울면서 나무로 모여든다


지상 깊은 곳에 드리워진 세상의 나무들은
지금껏 죽어간 아이들의 수와 일치한다
나는 이런 근거 없는 확신에 싸여 있는데,


나무가 나무를 떠나지 못하는 건 사람들 때문일까
사람들은, 왜 나무를 떠나지 못할까
대낮에 나무에 기대 울면서 나는 의문에 싸여 있는데,


죽은 아이들이 지하에서 지상으로 던진 나무에,
살아가는 세상 모든 것들은 왜 스스로 붙잡힐까
오늘도 어디선가는 산 채로 불타고 있을 나무들을
왜 아이들은 대낮이 잿빛이 되도록 거두지 않을까
어떤 의문은 유일한 답이 된다


-김중일, 「깊은 곳에 나무를」전문 (현대문학, 2월호)



어떤 질문은 길이 되기도 한다. 그것이 삶의 의미에 관한 질문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위의 시에서 "나무"는 세계에 존재하는 것들이 서로를 붙잡고, 껴안고 살아가는 삶의 형식이다. "바닥"과 "우주"가 "찰나의 소용돌이 같은 아이들이", "지하에서 지상으로 던진 그물들"에 매달려 있으며 사람들 또한 "슬프고 달콤한 바람 냄새에 이끌려" 나무 곁으로 모인다. 화자는 그 이유를 명시하면서 명시하지 않는다. "어떤 의문의 유일한 답"은 반복된 질문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에 따르면 "지금껏 죽어간 아이들"은 우리가 이 세계에 그려 본 길이다. "어느 도시든 무수히 널려 있"으며 "세상에 아무런 흔적도 못 내고" 사라진 것들. 그럼에도 끊이지 않는 이러한 시도들이 "바닥"과 "우주"를 연결하고 있고 그런 이유로 그치지 않는 화자의 의문-성찰-시는 길이 된다. "대낮에 나무에 기대" 길을 닦는 울음이 알려준 귀의 입구. 삶의 의미가 "가라앉은" 곳도 그즈음 아닐까. 이 시는 개인과 세계의 변화를 이끌어내는 성찰과 재고의 시도를 "대낮이 잿빛이 되도록 거두지 않"는다. 그 안에 머문 각자의 시간을 물리적으로 측정할 이유는 없다. 일 초이든 영원이든 다르지 않다. "바람은 철썩철썩 매 순간 밀려"들어 "나무"에 "스스로 붙잡"힐 이유가 되어 줄 것이기 때문이다.



바로 오늘이야


라고 읊조리며 가느다란 눈매로 먼 데를 한참 보았을
사무라이의 표정을 떠올려 본다


(…)


이제 막 사람들과 헤어져 혼자가 되었다


준비해 간 말들은 입술로부터 발생되지 않았다
식은땀이 되어 방울방울 흘러내렸다
머리통을 덮고 있던 머리카락의 가장자리가 젖어갔을 때


눈앞에 있는
냅킨을 접었다


접고 다시 접었다


모서리에 모서리를 대고 또 접었다


내가 어쩌다 여기 서 있는 걸까
오늘은 무슨 요일일까
생각하지 않으면 생각나지 않는다


기도하는 소리가 저 멀리서
스프링클러의 물방울처럼 번지고 있다
빛이 퍼지는 각도로 비둘기가 날고 있다
검은 연인이 그늘 속에서 어깨를 기대고 낮잠을 잔다


여긴 어디에요? 공손하게 질문을 던진다


바디랭귀지를 하니
춤을 추는 기분이 든다
다 왔구나 싶어진다 여기가 어디든 간에


-김소연, 「가장자리」부분 (현대시 2월호)


기술의 비약적 발전, 인간과 자본의 공모는 인간에게 다양한 의사소통 수단과 방법을 내놓았다. 그것은 언어 속에 감춘 자신을 안전하게 내보일 수 있다는 확신이 되어 우리를 이 세계에 풀어 둔다. 어디에서도 너와 내가 아닌, 너의 이야기와 나의 이야기를 읽을 수 있다. 그렇게 완성된 우리의 이야기는 비껴가려 해도 그럴 수 없는 욕망으로 각자의 몸에 묶인다. '관계망'은 관계성에 앞선다. 불가해한 타자로 살아가는 개인이 가상의 다정함이 된 우리의 지금은 어디이며, 무엇으로 불러야 할 것인지.
화자는 "오늘" 어쩌면 "이제 막 사람들과 헤어져" 구체적인 질문이 된다. "모서리에 모서리를 대고 또 접"으며 "생각하지 않으면 생각나지 않는" 삶에 대해 묻는다. 내뱉지 못한 "말들은" "머리카락의 가장자리가 젖어 갔을 때"를 지나 "냅킨"과 냅킨의 "모서리"로 간다. 본래의 모양으로 돌아간다는 사전적 의미를 따르는 것인지, "접고 다시 접"는 행위 속에서 화자는 '나'를 인식한다. 가만히 살피면 '내'가 있고 "기도하는 소리", 그 안에서 "비둘기가 날고", "검은 연인이… 낮잠을" 자는 '나'를 둘러싼 세계가 있다. 있는 듯 없는 듯, 바라는 듯 바라지 않는 듯 "질문"하지 못하고, '질문'인지 모르고 스치는 세계와 화자의 관계는 타인과 접촉하기 위해 요구받는 가학적 언어 사용과 언어 자체의 불투명성에서 비롯했다. 그러나 화자는 멈추지 않는다. 두려움을 벽처럼 세운 그가 "젖어", "접고", "대고" 또 "접고", 움직이며 생각하자, "입술" 밖으로 나온 그의 말은 "바디랭귀지"가 된다. 스스로 던진 질문을 대답으로 바꾸는 동적 행위가 된다. 행위는 선험적 조건을 전제한다. 공간과 시간뿐만 아니라 '나'가 있어야 한다. 모든 것이 갖춰지면 그때부터는 "여기가 어디든 간에" 상관없고, "다 왔구나 싶"은 마음을 가질 수 있다. 동사로 행동을 규정하면 그것은 한계일까. 관계 속에서 살아가야 하는 숙명을 지닌 인간에게 우리가 사용할 수 있는 무사한 '동사'에 대한 환기는 그처럼 움직일 수 있는 우리 '몸'에 대한 '환기'이다.
시는 불특정다수에 대한 대답이다. 말해야 하고 또 한편으로는 침묵해야 하는, 갇힌 육체를 위한 입이다. 우리가 명징하게 이해하는 말이 강압복처럼 삶을 구속하고 파고들어, 통증이 될 때. 나(우리)는 어떤 시인이 만든 언어 사용법-시를 따라간다. 언제 '주체'가 되는가, 무한히 떠도는 시-순간이 곳곳에서 숨은 나(우리)를 찾아낸다.
















작가소개 / 이진경

문학평론가. 2017년 《문화일보》 신춘문예 「'나선의 숲'에서 부유하는 시어들-이제니론」을 발표하며 등단.


《문장웹진 2019년 0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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