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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편’의 정치학과 ‘환상’이라는 전략

  • 작성일 2005-08-26
  • 조회수 3,482

 

고봉준(문학평론가)


최근 일간지들에 <시힘> 동인과 <21세기 전망> 동인들이 함께 찍은 기념사진이 동시에 실렸다. ‘동인’이라는 단어 자체가 매우 낯설게 느껴지는 지금, 흑백사진 속의 정물 같은 그들의 어색한 웃음은 확실히 지나간 시간의 흔적들을 불러내고 있었다. 84년에 결성된 <시힘> 동인은 <시운동> 동인과 더불어 80년대 시단의 한가운데에서 열정적으로 활동했었고 또 지금도 열심히 활동 중이다. 89년에 결성된 <21세기 전망> 동인 역시 차창룡, 함민복, 허수경 등의 스타급 시인들을 배출하면서 90년대 초반의 시단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었다. 그러나 뉴 밀레니엄으로 접어들면서 그들의 활동은 눈에 띄게 줄어들었고, 급기야 ‘동인’의 정체성 역시 서서히 잊혀져 갔다. 

 

뉴 밀레니엄을 목전에 두었던 지난 세기의 마지막 몇 년 동안 우리 시단은 ‘죽음’과 ‘공포’를 통해 낯선 시간대로의 진입을 준비했었다. 그러나 예상과는 달리 새 세기의 초입에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리고 2005년, 최근 우리 시단에는 극도로 낯선 상상력과 소통/해석을 거부하는 언어로 무장한 일군의 시인들이 뉴 밀레니엄의 후폭풍처럼 쏟아져 나오고 있다. 생태주의적 상상력이 윤리적 정당성을 근거로 시단의 주도적 담론으로 자리 잡고 있지만, 도시적 감수성과 그로테스크한 이미지의 파편들을 쏟아 냄으로써 ‘서정’의 새로운 영토를 개척하려는 젊은 세대들의 반격 역시 만만치 않다. 흥미로운 사실은 그 젊은 세대의 시적 모색이, 전부는 아닐지언정, ‘동인’의 형태를 띠고 있다는 점이다. <불편> 동인(김근, 안현미, 이영주, 하재연, 김민정, 장이지, 김경주, 김중일)과 웹진 <이스끄라> 편집 동인(김언, 진은영, 박진성, 오은, 황병승, 이근화)이 그들이다. 이들 동인 외에도 김행숙, 정재학, 조연호, 김이듬, 박연준, 임혜신, 이형선, 김성호, 이민하, 고현정, 이장욱, 서영처, 유형진 등이 주목할 만한 젊은 시인들이라고 할 수 있다.


이른바 젊은 시인들의 작품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불편함의 정서가 따라다닌다. 이러한 불편함이 이 세대의 특징이라고 말하기는 쉽지만, 애써 공통성의 멍에를 들씌우려는 그런 평가가 그들의 작품에 대해 말해 줄 수 있는 진리란 거의 없다. 그들은 비슷한 연배에 속하는 시인들, 가령 손택수, 박성우, 문태준, 배용제 등과는 확연히 다른 언어 코드와 감수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위에서 말한 시인들을 대상으로 문예지들을 살펴보자.


먼저 《문학동네》 2005년 여름호의 “젊은 시인 10인 특집” 기획이 눈에 띈다. 손택수, 박성우, 박지웅 등 전통 서정과 신서정의 경향을 띤 시인들이 포함되어 있지만 기획의 전체적인 무게 중심은 아무래도 김민정, 안현미, 김언, 김행숙, 정재학 등에 집중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착란에 휩싸인 봄이 그리워요, 비애도 회한도 없는 얼굴로 당신들은 너무나 말짱하잖아요, 착란이 나를 엎질러요, 엎질러진 나는 반성할까 뻔뻔할까, 나의 죄는 가난도 가면도 아니에요, 파란 아침이고 시구문 밖으로 나가면 끝날 이 고통도 아직은 내 거예요 친절하지 않을래요 종합선물세트처럼 주어지는 생을 사는 건 당신들이지 나는 아니에요, 나는 착란의 운명을 타고난 빛나지 않는 별, 빛나지 않는 별도 언젠가는 늙고 죽어요 우리 모두는 그런 운명을 갖고 태어나지만 영원을 살 것처럼 착란 속에서 살며 비애도 회한도 모르는 얼굴로 우리들은 너무나 말짱해요 착란에 휩싸인 봄이에요, 사랑받을 수 있다면 조국을 배신하겠어요, 친구도 부정할 거예요, 전 세계가 어떻게 되든 내 알 바가 아니죠, 에디트 피아프의 말이지만 그녀는 조국을 배신하지도 친구를 부정하지도 않았어요 같은 이유로 나는 착란에 휩싸여요 죽은 사람들만 불러모아 사망자 주식회사를 만들고 영원히 죽고 싶은 나는. 시구문 밖, 봄 활짝 핀 착란이 그리워요,

                                                - 안현미, 「屍口門밖, 봄」 전문


안현미의 시에 등장하는 ‘착란’에는 어떤 불편함이 내재되어 있다. “착란에 휩싸인 봄이 그리워요”라는 도발적 진술로 시작되는 이 시에는 타자에 대해서 “친절하지 않”겠다는 개인성, 사랑을 위해서라면 “조국”과 “친구”마저 부정하겠다는 근대적 개인주의의 윤리, 그리고 “사망자 주식회사”를 만들겠다는 죽음에 대한 희구의 감정 등이 복합적으로 드러나고 있다. 주체의 바깥에서 주어지는 도덕과는 무관하게 근대적 개인으로서의 삶을 살겠다는 이러한 생에 대한 의지의 과잉이야말로 이들 젊은 시인들의 시적 세계관을 관통하는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안현미의 ‘착란’이 세계에 대한 모종의 저항과 냉소를 담고 있다면, 김민정의 「복수와 악수」는 한 걸음 나아가 세상에 대한 혐오가 지배적 정서를 형성하고 있다.


김민정의 시가 보여 주는 당혹스러움은 비단 노골적인 성적 표현이나 은어, 비속어의 남발에서만 찾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좌충우돌하는, 요설에 가까운 언어적 연쇄는 그의 시가 소통의 가능성마저 부정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라는 혐의를 갖게 만든다. 복수와 악수, 이처럼 그의 시에서 한 끝 차이의 언어를 매개로 하는 언어유희가 빈번하게 등장한다. 뿐만 아니라 그의 시는 표면적으로 하나의 인과적 이야기를 바탕으로 전개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그 이야기라는 것이 이미지의 유사성이나 언어유희, 그리고 상상력의 연관이라는 복수의 계열을 따라 진행된다. 따라서 시의 의미나 궁극적인 시의 주제 의식을 강조하기보다는 매순간 미끄러지고 언어적 계열을 통해 특정한 이미지들을 반복적으로 생산한다. 그의 시가 보여 주는 엽기적인 상상력이야말로 이들 젊은 시인들의 시 세계에 나타나는 한 극단이라고 할 수 있다. 정재학의 「Psychedelic Eclipse」가 보여 주는 “불투명한 유리”와 “낡은 도시의 폐쇄로”는 자본주의적 도시가 갖고 있는 의사소통의 불가능성을 상징적으로 드러내고 있으며, 그것은 “‘사실’은 ‘진실’과 다른 계단에 있다”는 진술을 통해 이 세계의 허구성에 대한 문제 제기로 확장되고 있다. 김언의 「판다」에 등장하는 언어적 감각은 김민정의 그것과는 다른 전략이지만, 동음이의어의 변주를 통해 ‘언어’로 상징되는 확정적인 질서/법을 전복/저항하려 한다는 점에서는 대략적인 일치점을 보이고 있다.


편집진의 교체되면서 젊음 시인들의 상상력의 거점으로 부상하고 있는 《문예중앙》 2005년 여름호에는 앞서 언급했던 시인들 중에서 조연호, 김이듬, 황병승, 박연준의 시가 발표되었다. 특히 등단 이후, 현존하는 시?공간을 낯설게 만듦으로써 “질환적 몽환의 세계”를 그려 보이는 황병승의 시를 주목해 보자.


……나는 페르나에 가요……페르나?……페르나, 시계도 달력도 없고 아름다운 오빠들의 춤과 음악이 계속되는……저기 쌍둥이 빌딩 사이 주름치마 같은 돌계단을 따라 올라가본 적 있나요?……커다란 빌딩들이 쬐그만 벌레 정도로 보일 때쯤 거기 페르나가 있어요……그곳에 도착하면 아저씨께 근사한 엽서를 보내 드리지요……페르나, 처음 듣는 얘기로군 헌데 그곳엔 왜 가려는 게냐?……울기 싫어서요……울기 싫어서?……잠꼬대하기 싫어서요……잠꼬대?……잠꼬대, 밤마다 검은 노트를 펼치는 일 잊을 수 없는 페이지를 열고……붉게 번진 입술의 오빠를 오빠 곁에서 들끓는 개들을 개들을 때려잡는 아버지를……나무 위에서 덤불 속에서 뜨문뜨문 읽어내는 일 싫어요 페르나에선 잠들지 않고 아무도 울지 않죠……아저씨도 함께 갈래요?……페르나?……페르나……나는 아파서 못 가……어디가 아픈데요?……이곳을 떠나는 게……아파……아프죠 그러니 두려워하지 말아요……. 두려워하면 느려지고 눈치 빠른 아버지가 금방 알아채고 말죠……싱거운 소리 너는 페르나 따위가 정말 있을 거라고 생각하니?……페르나 따위가 왜 없을 거라고 생각하죠?……관두자……그래요 그만두죠……그런데 넌 원래 그렇게 울보였니?……아뇨……아님 뭐가 그렇게 널 슬프게 하는 게냐?……당신이……내가?……빠가……빠가라……

                                       - 황병승, 「시코쿠 만자이-페르나편」 부분


화자가 지향하는 세계인 “페르나”는 “세계도 달력도 없고 아름다운 오빠들의 춤과 음악이 계속되는” 곳이다. 커다란 빌딩이 벌레 정도의 크기로 보인다는 점에서 그곳은 지금-여기와는 동떨어진 어떤 초월적이고 외부적인 세계라고 할 수 있다. 「시코쿠 만자이-페르나편」은 여자 아이와 성인 남성이 주고받는, 혹은 묻고 답하는 방식을 취하는 만담 형식이다. 화자인 여자 아이가 페르나에 가려는 이유는 “울기 싫어서”, “잠꼬대하기 싫어서”, 그리고 “밤마다 검은 노트를 펼치는 일 잊을 수 없는 페이지를 열고……붉게 번진 입술의 오빠를 오빠 곁에서 들끓는 개들을 개들을 때려잡는 아버지를” 읽어 내는 일이 싫어서이다. 시인은 ‘아버지’로 상징되는 남성적 세계에서의 탈주를 정신분석학적 메타포를 통해 몽환적으로 그려 낸다. 화자가 제시하는 “울기”와 “잠꼬대하기”는 무의식적 억압이 ‘잠’을 통해 재생되는 경험을 의미한다. 그것은 “페르나”라는 상상의 세계가 “페르나에선 잠들지 않고 아무도 울지 않죠”라는 진술에서 확인된다. 개를 때려잡는 아버지에 대한 거부 역시 정신분석학적 요소를 환기하고 있다. 두 사람의 대화에서 “아저씨”는 끊임없이 페르나의 현존 가능성을 의심한다. 그에게는 “이곳을 떠나는” 것 자체가 심각한 고통이다. 왜? 지금-여기가 바로 남성적 세계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화자는 슬픔의 근원에 대해 “……당신이……”, “……빠가”라고 대답한다. 화자는 남성 화자 역시 남성-아버지에 불과하다는 것, 그런 한에서 그 또한 자신에게 고통을 가하는 근원이라는 것을 숨기지 않는다. “……빠가”라는 마지막 진술에는 무의식의 억압 혹은 검열에 의해 한 글자가 지워져 있다. 그것의 정상적인 형태는 아마도 “오빠” 내지는 “아빠”가 될 것이다. 이처럼 젊은 시인들의 시에서 드러나는 세계에 대한 혐오와 불편의 이면에는 대개 억압되어 있는 무의식의 복권이라는 문제의식이 개입되고 있다.


《현대시》6월호에 발표된 이민하의 「녹색 원피스의 여자를 바라보는 옷걸이에 걸린 도마뱀 꼬리들」 역시 새로운 상상력의 등장을 예고하고 있다. 감각적인 은유 체계를 시적 로직으로 삼는 그의 시는 현실과 비현실이라는 낡은 경계를 돌파하려는 의지를 보여 준다. 특히, 그 경계의 돌파가 여성과 여성의 육체에 대한 사유를 바탕으로 한다.


그녀는 사과를 깎구요 칼을 꽂구요

사과를 찢는 칼끝에 묻어나는 메마른 흰 피

성대가 돌출된 남자가 베어 무는 사과의 속살

그녀의 귀가 두부같이 으깨져요

수돗물을 종일 틀어놓은 욕조엔 철철철 넘쳐흐르는 더운 피

서랍 속에서 잠을 자던 늙은 고양이가 창문으로 뛰어내려요

창 아래 질주하는 덤프트럭 위로

가볍게 떨어지는 깃털 하나


그녀는 몸에서 꽃무늬 껍질을 뜯어내구요

몸에서 떨어져 나간 녹색 꼬리가 잠시 나풀거리구요

그녀는 하얀 속살을 둥글게 말아

바닥에 봉분 하나를 만들지요 씨앗들이 검게

타오를 때까지 웅크리지요

물렁하던 칼날을 빳빳하게 일으켜 세운 채

거대한 남자는 무릎을 꿇지요

- 이민하, 「녹색 원피스의 여자를 바라보는 옷걸이에 걸린 도마뱀 꼬리들」 부분


환상을 비현실이라고 말하지 말자. 환상은 어떤 면에서는 현실보다 더 리얼한 현실이다. 다만, 그것은 객관적으로 설명하거나 드러내 보여 줄 수 없는, 따라서 소통의 가능성이 희박한 개체의 진실일 뿐이다. 우리는 종종 환상이라는 개념을 부정적인 어법으로 사용하지만, 환상이 유일한 현실인 사람도 얼마든지 존재할 수 있다. 문제는 그 환상이 소통의 문을 허락하지 않을 때 나르시시즘으로 전락하고 만다는 사실이다. 이민하의 「녹색 원피스……」는 언어의 감각적 병치가 시 전체를 관통하고 있다. “깎구요”에서 “깎구요/켜구요”의 대립으로, 다시 “깎구요/꽂구요”의 대립으로 전개되는 언어의 변주가 바로 그것이다. 「녹색 원피스……」라는 제목도 도발적이지만 그로테스크한 이미지들의 분산 역시 세계와의 불화를 암시하고 있다. 사과를 깎는 행위에서 연상되는 몇 가지 장면들, 가령 칼끝에 묻어나는 흰 피나, 남자가 사과의 속살을 베어 물어서 여자의 귀가 으깨지는 장면들은 특정한 상황에 대한 낯설게 하기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욕조에서 넘쳐흐르는 더운 피와 창문으로 뛰어내리는 고양이, 그리고 창밖으로 질주하는 덤프트럭 위로 떨어지는 깃털은 특정한 정서를 불러일으키기는 하지만 실감의 영역으로는 다가오지 않는다. 나는 ‘환상’이나 ‘몽환’이라는 시적 전략은 항상 이러한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앞서도 말했듯이, 그것들이 철저하게 개인의 내적 경험에 좌우되기 때문이다.


몽환적 이미지의 관점에서 보면, 이장욱과 이민하의 시적 거리는 그다지 멀지 않은 듯하다. 다만, 이민하의 시가 여성성과 육체를 보다 적극적으로 사고한다면, 이장욱은 세계의 불가해성을 아이러니의 방식으로 표현하고 있다. 《문학과 사회》 2005년 여름호에 실린 「만남의 광장」이 단적인 예다. 이상(李箱)의 비대칭적 상상력과 비극적 운명을 물려받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이 시는 “만남의 광장”이라는 제목을 달고 있지만, 실제로는 마지막 순간까지 만남이 불가능한 상황을 제시한다. “내가 오른손을 들자 당신의 왼손이 마술처럼” 올라가고, “내가 오른손을 천천히 내리는 순간/당신의 왼손”이 아지랑이 속으로 사라지는 아이러니. 《시작》2005년 여름호에 발표된 배용제의 「불쾌한 나뭇잎」이 보여 주는 불쾌한 세계상은 안현미의 ‘착란’이나 이민하? 배용제의 ‘환상’과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일까.


젊은 시인들의 시가 보여 주는 불편하고 당혹스러운 정서, 그리고 ‘죽음’과 ‘엽기’와 ‘환상’의 내러티브들은 우리의 삶이 뿌리 내리고 있는 ‘지금-이곳’에 대한 모종의 시적 대응이 시작되고 있음을 알려 주는 징후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의 시적 로직과 윤리가 반드시 긍정적인 것인지, 혹은 그것이 우리 시대의 시가 선택한 ‘자살택’은 아닌지는, 그래서 서정시가 마침내 극점에 도달한 것은 아닌가에 대해서는 좀 더 면밀히 따져볼 필요가 있다. 그들이 그려내는 이미지의 세계는 너무나 선명하고 새롭지만, 그 이면의 풍경을 들여다보지 못한다면 그것은 또한 비평의 ‘자살택’이 될 수도 있다. 이런 점에서 젊은 시인들의 상상력에 대한 평가는 일단 유보해 둔다. 그러나 독자와의 교감을 스스로 끊어 버린 이들의 글쓰기 방식이 세계와의, 타자와의 관계를 의식적으로 단절시키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음은 분명하다.《문장 웹진/2005.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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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0-07-30
시 쓰고 자빠졌네

시 쓰고 자빠졌네. 이런 말 자주 들었다. 누군가에게 자주 두들겨 맞았고, 누군가에게 가끔 린치를 가하던 시절이었다. 이웃 여고 문예부 아이들이 어쩐지 예쁠 거 같아서 문예부실을 전전했다. 그리고 백일장에 나가곤 했다. 물론 남달리 예쁜 아이는 없었지만, 어쨌든 17세 남녀가 교복을 입은 채로 노래방에서 듀스나 룰라, 혹은 투투의 노래를 함께 부르는 모습은 남달리 아름다웠다. 되도록 빨리 노래방으로 가기 위해서 우리는 사바사바, 시를 썼다. 빨리 써야 했다. 시는 최초의 노래였으므로. 엉덩이를 두드리듯, 천사를 찾아. 발라드를 부르며 감정 과잉에 빠지는 철수에게 영희는 이렇게 말한다. 시 쓰냐? 그때 우리는 원고지를 눕히던 누런 잔디에서, 어두운 노래방에서, 혹은 밀도가 높은 교실에서 어떤 감정 속에 놓여 있었을까. 난 누군지 또 여기는 어딘지 아무도 알려 주지 않았기에 우리는 분노에 가득 차 교복을 줄이고 담배를 숨기고 몰래 술을 마시기도 했다. 수채화 대신에 야간 자율 학습 감독을 주로 하던 미술 선생은 또 말했다. 또, 또 시 쓰냐? 시화전 제출 작품에서 피 흘리는 고등어를 그려 놓고 ?어느 고딩의 죽음?이라 제목을 붙이며 나는 전위를 담당한 듯 당당했다. 부끄러움이 없는 남자였다. 미술 선생에게 욕을 먹을 때에도, 맞을 때에도 나는 부끄러움을 몰랐다. 대한민국 학교 다 족구하라 그래. 시 쓰고 자빠졌다, 정말. 정말이란 말에 대해 오래 생각해 본다. 오래 생각하는 버릇은 이 시대에 어울리지 않는다. 최대한 짧고 단순하게 사고한 것으로 보이는 일들이 생각보다 빠르고 무식하게 벌어지고 있다. 정말? 시집을 묶어내던 중에 바위에서 사람이 떨어져 죽었다. 그 부엉이는 정말 새였을까. 도심에서 사람이 불에 타 죽었다. 그 망루는 정말 구름이었을까. 모두 정말이냐고 정색하며 물어 볼 만한 일들이었다. 분노가 치민다. 지금 나와 싸우자는 건가? 그런데 싸우는 법을 배운 적이 없다. 아니다. 싸움은 끝났다고, 이제 싸움이 아닌 경쟁의 시대라고 배웠다. 나는 그저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잘 모르겠어서, 화가 났다. 사실 싸움보다 훨씬 경쟁이 무서웠다. 사건은 이미지가 되는 순간 거짓말이 된다. 이 모든 게 차라리 멋진 거짓말이었으면 좋겠지만, 이것은 너무나 끔찍한 거짓말. 난삽한 이미지. 이미지가 아닌 이미지. 그러므로 차라리 보이는 게 진실이라고 믿어 본다. 이 지긋지긋하고 끔찍한 진실이 시의 배후가 되어 시에 맘껏 개입해도 나는 좋다. 시가 그렇게 하지 못하겠다면 기꺼이 네가 그렇게 하라. 가져간 나의 반쪽! 때문인가. 이제 둘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그래, 리얼리스트 되자. 모던한 리얼리스트가 되자. 모더니스트가 되자. 리얼한 모더니스트가 되자. 장난하느냐고? 그렇다면, 불길한 장나니스트라고 해 두지 뭐. 꼴에 시랍시고 자빠졌네. 이런 말 자주 들었다. 하지만 누가 뭐래도 나는 시가 좋다. 그리고 시가 밉다. 사랑하고 미워하며 안절부절못하고 있다. 처음 증상을 보일 때는 이렇게 데뷔를 하고 시를 쓰리라 짐작하지 못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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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0-07-15
일본 소설, 한국 시

일본 소설, 한국 시 한성례 한국에서 일본소설의 베스트셀러 현상 한류바람이 뜨겁게 일본 열도를 달구기 시작한 2000년 이후부터 한국에서 일본소설은 폭발적인 인기를 구가해왔다. 일본보다 한국에서 더 인기가 많은 작가가 나올 정도로 한국은 일본소설 홍수 시대이다. 이 같은 현상에 대해 일본인들은 물론이고 일본소설가들조차도 왜 일본소설이 한국에서 그렇게나 많이 팔리는지 몹시 궁금해 한다. 이에 대한 일본 신문의 인터뷰나 원고의뢰가 있을 적마다 나는 현재 한국에서의 한국시에 비유해서 설명을 한다. 이전에도 한국에서 일본소설은 종종 많이 팔렸다. 70년대 중반에 첫 출간된 무라카미 류(村上龍)의 『한없이 투명에 가까운 블루』는 해적판이 끊임없이 이어졌고 출판금지서임에도 안 읽은 사람이 없을 만큼, 문학이나 예술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의 필독서이고 바이블이었다. 1999년 정식으로 저작권 계약을 맺어 커버에 비닐을 씌워 19세 미만 구독불가로서 출간된 후에도 쇄를 거듭하며 읽히는 소설이다. 또한 1989년 원제인 『노르웨이의 숲』이 『상실의 시대』란 이름으로 출간된 무라카미 하루키(村上春樹)의 소설은 당시 크게 각광을 받았고 지금도 계속해서 읽힌다. 당시 한국은 민주화 쟁취와 맞물려 자의식이 집단에서 개인으로 향하던 시기였다. 민주주의가 아직 성숙하지 못한 상태여서 사회, 정치적으로 안정되지 못했고, 급변하는 사회적 환경 속에서 개인이 느끼는 소외감, 고독, 상실감 등이 당시 한국 젊은이들이 처한 현실과 겹쳐지면서 이 소설에 크게 공감했다. 더욱이 하루키의 가독성 높은 문장은 금방 젊은이들을 사로잡았다. 한편으로 문학의 구도자 같은 마루야마 겐지(丸山健二)의 소설도 여러 편 번역 소개되었는데, 이는 주로 문학 창작자들이 마니아였다. 하지만 일본소설의 인기는 단편적일 뿐 전반적인 경향은 아니었다. 오히려 서구소설이 중심을 이뤘다.그러던 것이 에쿠니 가오리, 요시모토 바나나, 쓰지 히토나리, 히라노 게이치로, 요시다 슈이치 등 젊은 작가와 미야베 미유키, 스즈키 코지, 히가시노 게이고 등의 미스터리 소설과 나오키 상을 비롯한 여러 문학상 수상작이 2000년 이후에 대거 한국에 번역 소개되었고, 대형서점에는 코너가 별도로 마련될 만큼 일본소설은 인기를 끌고 있다. 왜 일본 소설을 좋아하는 것일까 무엇보다도 일본소설은 재미있다. 독자를 의식하고 소설을 썼다는 게 금방 느껴진다. 말하자면 자신의 상품을 사줄 소비자의 위치에서 창작을 한다는 것이다. 젊은이들은 일본소설을 읽으면서 비현실적인 주인공을 통해 현실에서 실제로 행동에 옮기지 못하는 자신의 일탈을 꿈꾸고, 대리만족을 느낀다. 일본소설의 주인공 젊은이들은 특별한 목표도 없고, 무기력하며 수동적이고, 나약하기 짝이 없다. 그들은 시대의 흐름과 기존 질서에 따르지도 않고, 세상을 약간은 냉소적이고 관조적인 눈으로 바라보면서, 보편적인 부와 명예, 사회적인 안정 등과는 거리가 멀다. 이에 독특한 상상력과 가독성 높은 문장도 한 몫 한다. 최근 일본과 한국에서 밀리언셀러 판매 기록을 갱신하는 무

  • wikisoft
  • 2010-0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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