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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시와 평화문학의 현황과 전망

  • 작성일 2006-07-11
  • 조회수 2,571

 

한국시와 평화문학의 현황과 전망



강경희




1. 평화문학의 역할은 무엇인가?


역사적으로 문학의 임무 중 하나는 현실의 제문제를 명확히 제기하고, 부조리하고 부당한 현실에 대해 엄중한 비판을 가하는 것이다. 특히 동시대를 살아가는 작가의 책무는 시대가 요청하는 문제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고 그 속에서 모순된 현실을 개선하고 극복할 수 있는 대안을 모색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작가는 그 어떤 존재보다도 이 세계의 문제에 대해 민감하게 반응한다. 즉 작가는 근본적으로 세계의 외적 형상에 대해 인지하는 동시에, 이 세계를 움직이는 내적 구조에 대한 반성적 성찰을 하는 자이다.

오늘날 우리의 삶은 어떠한가? 천박한 자본주의의 가공할 만한 위력은 물질주의의 노예로 인간을 전락시키고, 폭력적 기계주의에 의해 인간은 도구화된 존재로 변형되었다. 또한 질병과 가난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으며, 세계 곳곳에서는 전쟁과 폭력, 고문과 범죄, 수탈과 억압의 끔찍한 만행이 서슴없이 자행되고 있다. 첨단 문명사회라는 2000년대에도 우리는 여전히 ‘세계의 평화’와 ‘인간의 행복’이 실현되지 못하는 비극적 삶을 목격하고 있다. 특히 세계 유일의 분단국가인 한국은 국토와 민족이 하나 되지 못한 채 이산(離散)의 아픔, 체제의 대결, 이념의 차이로 인해 고통 받고 있다. 오늘날 한국의 문학은 이처럼 전지구적 자본주의의 위협과 더불어 민족의 분단체제를 극복해야 하는 이중의 고민에 봉착해 있다. 

급격한 시대의 변화는 1990년대 이후 2000년에 이르기까지 우리의 환경을 급속도로 변모시켰다. 1990년대 이후 문화 산업의 급속한 팽창, 자본주의의 가속화, 경제력과 군사력을 앞세운 미국 패권주의의 노골화는 물질적 환경의 파괴와 더불어 정신적 환경의 파괴를 초래하였다. 이러한 사회?문화?정치적 지각 변동은 한국 작가들의 작품에도 그대로 영향을 끼쳤다.

1990년대부터 2000년대에 이르기까지 우리 시문학에서는 크게 포스트모더니즘의 열풍과 더불어 창작된 해체주의, 실험주의적 작품의 저변 확대, 억압된 성의 문제를 담론화한 여성성과 여성주의, 환경과 생태주의에 대한 접근, 본격문학과 대중문학의 접속, 사회 역사적 상상력을 바탕으로 한 민족문학과 세계문학에 대한 새로운 모색 등이 시도되었다. 이렇듯 오늘의 문학은 끊임없이 새로운 형식과 내용을 탐구함으로써 당시대가 요청하는 현안을 고민하고 그 속에서 진정한 삶의 진실이 무엇인지를 밝혀내고자 한다. 

‘평화 문학’은 그 명제가 지칭하는 것처럼 문학 작품의 소재와 내용이 광범위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평화’의 의미는 ‘평화’와 반대되는 그 모든 것들에 대한 ‘반성’ ‘투쟁’ ‘비판’의 성격을 지향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평화 문학은 리얼리즘, 모더니즘, 민족주의, 민중주의, 자연주의 등의 이념을 초월한 휴머니즘에 기초해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점은 ‘평화 문학’이 뚜렷한 목적성을 지닌다는 것이다. 그것은 평화 문학이 이론적 담론을 뛰어넘어 ‘실천’의 장에서 체험되고, 이로써 인간 정신의 평화, 인류사의 평화, 숭고한 삶의 가치의 회복을 위해 적극적인 실천을 수행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그 동안 평화 문학이 탁상공론의 장에서 탈피하여 ‘현장 속으로’ 들어가 부조리한 삶과 위선에 찬 세계의 잔인성을 폭로하고, 또한 이를 통해 진정한 평화를 위한 실천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증언해 왔다는 점에서도 뚜렷이 알 수 있다.

지구화시대에 평화 문학은 민족문학이라는 협소한 울타리에서만 논의될 수 없다. 평화 문학이 지향하는 것은 전지구적 자본주의의 보편적 체제의 획일성에 대한 비판과 더불어, 다양한 종족적, 민족적, 인종적 편견과 정치적 억압성을 폭로하고, 이를 통해 궁극적으로 인간 해방을 꿈꾸어야 한다.  

수잔 손택의 말처럼 “문학은 우리 아닌 다른 사람들이나 우리의 문제 아닌 다른 문제들을 위해서 눈물을 흘릴 줄 아는 능력을 길러주고, 발휘하도록 해주는” 것이다. 이는 ‘나’와 ‘타자’의 진정한 상호 소통을 통해 우리 시대의 차별과 차이가 무엇이며 이를 극복하는 길이 어떠해야 하는지 진지하게 되묻게 한다.

문학은 궁극적으로 그 무엇도 억압하지 않는 완전한 ‘자유’를 꿈꾼다. 진정한 자유를 쟁취하기 위해 우리 시대의 작가는 언어를 통해 타락한 권력이 만들어 놓은 거짓된 우상을 파괴하여야 한다. 그럼으로써 이 시대의 올바른 가치와 삶의 철학의 기준이 무엇인지를 제시해야 한다. ‘평화 문학’의 역할과 위상은 바로 이 지점에서 그 존재 의의를 갖는다고 할 수 있다.

 


2. 한국시와 평화문학의 현황


근대 이후 한국문학은 사회?정치적 문제와 밀접한 관련성을 지니며 전개되어 왔다. 1950년 한국전쟁으로 인한 남북분단, 1970년대의 박정희 군사독재 정치, 뒤를 이은 전두환, 노태우 군사독재정권의 폭압적 정치구조는 우리의 삶을 파행적으로 이끌었다. 그러나 이러한 한국사회의 이념적 갈등과 공포 정치는 민주와 평화에 대한 갈망을 자극하게 만들었으며, 분단을 넘어 민족화해와 상생의 평화체제를 구축해야 한다는 염원을 촉구토록 했다.

1970년대의 김지하나 고은, 신경림 그리고 1980년대의 박노해, 김남주의 시는 시대정신의 정점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1987년 6월 항쟁으로 인한 민주화의 초석이 마련되고, 뒤를 이은 동구권의 몰락, 경제성장으로 인한 물질의 풍요, 문화적인 것의 팽배, 다원화된 사회 변화는  민족문학, 민중문학, 노동문학의 퇴조 현상을 가져왔다. 특히 1980년대의 노동문학과 민중문학은 낡은 문학이며 미학적 저열함을 지녔다는 다소 과격한 발언이 쏟아지기도 했다. 이는 한때 위세를 떨쳤던 운동론의 퇴장을 가속화했으며, 민족문학의 위기론, 심지어 민족문학 패기론 등이 거론되기도 했다. 1990년대는 세계화 담론의 위력, 전지구적 자본주의의 상업화 전략, 개인주의 확산, 언론 권력의 팽창, 미디어 산업의 부각으로 인해 문학 환경이 급속도로 위축되고 있다.

2000년대 한국문학의 모습은 어떠한가? 오늘의 한국문학은 그 어느 때보다도 자유분방한 개성이 활개를 치고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 한국문학의 현실을 살펴보면 작가들이 왕성하게 작품을 써내는 것에 비해 문학작품은 독자로부터 외면당하고 있다. 이는 문학이 영화나 인터넷 콘텐츠와 같은 직접적이며 감각적인 문화들에 의해 주변부로 밀려나고 있으며, 또한 더 이상 문학이 세계 개진의 역할을 담당하고 있지 못한다는 인식과도 관련된다. 즉 오늘의 문학은 대안적 비전을 제시하지 못한다는 심각한 난관에 봉착해 있는 것이다.

이러한 문학 환경 속에서 2000년 이후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는 ‘평화 문학’의 움직임은 우리 문학의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특히 2000년 6월의 남북정상회담, 6?15 공동선언은 한반도에 통일의 초석을 마련하는 일대 사건이었다. 또한 이라크 파병으로 인한 반전?반미 의식의 고취는 역사적 개인으로서 민족의 운명과 미래를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가능하게 했다.

본 논고에서는 그간 이루어진 평화 문학의 현황과 현주소에 대해 논의하고자 한다. 평화 문학의 소재와 내용은 주로 반전, 반핵, 비폭력, 환경과 생명 존중, 인본주의에 대한 탐구라 할 수 있다. 특히 분단체제라는 한국 사회의 특수성 속에서 이질화된 문화를 극복하고 민족화해와 상생공존의 평화체제를 구축하려는 작품들이 대거 창작되었다.

평화문학의 내용은 크게 ① 분단 극복과 통일문학 ② 반전?반핵 운동으로서의 문학 ③ 환경과 생명 존중의 생태문학 ④ 소외계급과 비인간화의 휴머니즘 문학을 중심으로 전개되고 있다. 본 논고에서는 분단과 통일문학, 반전?반핵의 정신을 담은 시작품을 중심으로 평화문학의 현주소를 살펴보고자 한다. 



3. 분단 체제의 비극성과 통일 국가에 대한 염원 


오늘도 해가 진다

입 다문 능선들

골짜기들

빈 가슴만 커지며

휴전선 155마일 해가 진다


벙어리같이

벙어리같이 

소리치고 싶어라

살얼음 깔린 임진강 머리

무슨 말이 남아 있으랴

저 백마고지에도

대성산에도

향로봉 아래 녹슨 철모에도 무엇이 남아 있으랴

이토록 이 강산의 막힌 허리에

휴전선 50년이 훌쩍 갔다

애타던 사랑보다 더 날개쳐 갔다


…(중략)…


오늘도 155마일 철조망에 해가 진다

여기 올 어느 날 없다면


내 어이 각혈같이 노래하겠느냐고

탓하지 말라

오늘도 묵묵히 해가 진다 차라리 기다림도 없이 어둠이 온다

- 고은, 「휴전선」부분


‘휴전선’은 분단된 조국을 상징한다. 남과 북의 경계를 나누는 휴전선은 50년 동안 하나의 민족을 둘로 나누었던 비극의 원천이다. 시인은 ‘휴전선’으로 대표되는 비극적 현장을 응시하면서 민족의 설움과 비애를 확인하고 있다. 특히 이 시는 기울어져 가는 ‘일몰’의 순간과  교차되는 개인의 서러운 감정을 투영함으로써 어두운 현실을 설득력 있게 그리고 있다. “입 다문 능선들”과 “골짜기들”의 침묵, “벙어리같이/ 벙어리같이/ 소리치고 싶어”하는 말없는 절규, “살얼음 깔린 임진강”으로 비유되는 차디찬 현실, “애타던 사랑”과 “각혈” 같은 “노래”를 부르는 피맺힌 울음은 개인적 슬픔을 넘어 보편적 아픔을 형상화한다.

고은의 「휴전선」은 조국의 분단을 온몸으로 체득하면서 살아야 하는 인간의 내면의식을 그림으로써 역사적 존재이자 민족의 운명을 감내해야 하는 한 개인의 서글픈 자기 인식을 드러내고 있다.


나어린 초병은 한사코 길을 막는다

처음 보는 저 마을은 나 살던 옛 마을

꼭 그렇게 빼어 닮았다

중국 초병에게도 돈 몇 푼 쥐어주고 비애 몇 장 박는다

국경에 오니 나라의 경계가 이토록 허무하다

아이들 장난 같은 국경이여, 거짓말이여,

큰 걸음 서너 번이며 건널 수 있는 저곳이

동포가 사는 회령이란다

새삼 이념이 무엇이냐고 묻지 말자

허용된 시간이 지나면 우리는 왔던 길

되돌아가야만 한다 통통 살이 오른

여름강물이여 너도

슬픔으로 노여워 저토록 시퍼런 물빛이구나

- 이재무, 「두만강 초소에서」 부분


고은의 「휴전선」이 분열된 우리 땅에 대한 비극적 인식을 드러내고 있다면, 이재무의 「두만강 초소에서」는 이국의 땅에서 분단의 모순을 직시하는 방랑자의 시선을 담고 있다. “나어린 초병은 한사코 길을 막는다”라는 첫 구절이 암시하듯이 화자는 지금 더 이상 갈 수 없는 지점에 있다. 여기서 ‘국경’은 단절의 선을 의미한다.

그는 이러한 ‘국경’이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이냐고 되묻는다. “국경에 오니 나라의 경계가 이토록 허무하다/ 아이들 장난 같은 국경이여, 거짓말이여,”라고 말하듯 그는 산과 강을 이념과 체제에 의해 마음대로 갈라놓은 현실의 모순을 고발한다. “큰 걸음 서너 번이며 건널 수 있는 저곳이/ 동포가 사는 회령이란다”에서처럼 눈앞에 보이는 고향 같은 마을을 마음 놓고 갈 수 없다는 사실이야말로 이념이 초래한 절망스러운 현실이다. 오직 허용된 시간을 통해서, 제한된 영역에서만 그저 바라볼 수밖에 없는 북녘 땅을 그리워하며 이재무는 분단의 아픔과 단절의 고통이 얼마나 심각한가를 실감 있게 그리고 있다.


끝없는 들판에 점점이 숨은 집들

창문에 하나 둘 불이 켜졌다.

외양간처럼 초라한 집 속의 어둠이 밝혀지자

거기 아직 六畜의 눈빛을 가진 사람들이

칠십 년 전처럼 살고 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들에서 돌아온 식구들이

침침한 전등 아래서 감자를 쪼개고 있을

저녁, 나는 낯선 고향을 지나며

그 불 켜진 창을 향해 걸어 들러가고 싶었다


…(중략)…


연길 지나 만주로, 간도로 흩어졌던 식구들

가난을 있는 대로 다 살고도 남은 가난이 있어

六畜처럼 도란도란 살고 있는데,

깜박거리는 불빛이 새삼 서러운 것은

누추한 지붕 때문이 아니다

그 불빛 아래 내가 살고 있는 줄도 모르고

너무 멀리 떠돌다 여기에 이른 까닭이다

- 나희덕, 「낯선 고향」 부분


나희덕의 「낯선 고향」은 타향에서 흩어져 살고 있는 가난하고 남루한 우리 민족의 삶을 형상화하고 있다. “외양간처럼 초라한 집” “침침한 전등 아래서 감자를 쪼개고 있을” 식구들의 모습에서 연상되듯이 비루한 삶을 연명하며 살아가는 “六畜”과 같은 가족들의 삶은 비애로운 현실을 그대로 보여준다. 그런데 화자는 이러한 궁핍과 시련을 감내하는 가족들을 통해 인간적인 친화성을 발견한다. “나는 낯선 고향을 지나며/ 그 불 켜진 창을 향해 걸어 들러가고 싶었다”라는 말처럼 시인은 이국의 낯선 땅에서 우리 고향에 대한 연민과 향수를 떠올리는 것이다.

“연길 지나 만주로, 간도로 흩어졌던 식구들”은 다름 아닌 한 겨레이며 한 민족이다. 전쟁과 분단의 비극은 단지 한반도의 문제로만 국한되지 않는다. 그것은 고향을 잃고 방랑하는 이주민들의 애환 속에서도 그대로 점철되어 나타난다. 나희덕은 이러한 민족의 모순을 낯선 이국에서 유배되어 살아가는 고향의 사람들을 통해 다시금 확인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분단의 아픔은 어떻게 해결될 수 있을까? 임동확은 「눈물 통일론」에서 무엇보다 가슴으로 하나되는 인간적 통일이 이루어져야 함을 역설한다.

 

저 웃녘에서나 아랫녘에서나 똑같이

아버지, 어머니 한 번 제대로 불러보지 못한

후레자식들의 슬픔이 산을 이루고

억새풀 자욱한 무덤에서 우뚝 솟아 있겠구나

늙고 병든 그리움만 노을 붉은 임진강을 넘쳐흐르고

갈 곳 모르는 기다림만 서해의 파도에 이리저리 휩쓸리고 있겠구나

그렇구나, 다급하면 쥐구멍을 들락거리듯

눈물의 카드를 꺼내왔던 남북의 적십자여, 인도주의여

지옥의 날들처럼 길고 오랜 세월 동안을

소득 없이 말찬지의 협상이나 벌이며 헛되어 보내야 했구나

단 한 번도 제 혓바닥 속의 가시 철조망을 철거하지 않은 채

웃음과 악수를 나누고 평화를 말하며 서로를 죽여왔겠구나

그러니 뼛속 깊숙이까지 정신분열을 앓는 한반도여,

이제 눈물처럼 논리가 아니라 감동으로 말하자

필경 양보할 수 없는 대립의 불씨일 뿐인

힘센 이면보다 늘 가난하고 정직한 눈물의 힘을 믿자

- 임동확, 「눈물 통일론」 부분


임동확의 「눈물 통일론」은 통일을 가로막는 보다 직접적 문제에 대해 구체적으로 진술하고 있다. 정치적 입지와 견해에 대한 줄다리기, 권력과 정치의 기만적 술책을 반복하는 내실 없는 남북 협상의 허구성을 그는 예리하게 포착하고 있다. “소득 없이 말찬지의 협상이나 벌이며 헛되어 보내야 했구나”, “웃음과 악수를 나누고 평화를 말하며 서로를 죽여왔겠구나”라는 구절이 환기하듯이 그는 허울뿐인 ‘협상’, 가식적 웃음과 악수를 나누며 거짓된 ‘평화’를 약속하는 정치인의 위선 의식을 고발한다.

임동확이 말하는 진정한 통일이란 “혓바닥”으로 외치는 허황된 외침이 아니라, 뜨거운 가슴과 가슴이 만나서 이루어내는 ‘눈물’의 통일이다. 흔히 통일은 계산적이고 합리적이며 정치적이고 외교적인 상황을 통해 해결될 수 있다는 믿음을 유포한다. 때문에 우리에게 통일은 아직 성숙되지 않는 여건과 조건들로 인해 요원한 것으로 인식된다. 이는 통일에 대한 문제의 핵심을 흐려놓는 경우라 할 수 있다. 진정한 통일은 이성적 타협과 협상의 산물이 기 이전에, 하나된 조국을 꿈꾸는 정서의 교류를 통해 획득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임동확의 「눈물 통일론」은 조국의 통일을 가로막는 핵심이 정치적 이해관계에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그의 말처럼 진정한 통일을 이루기 위한 선결 조건은 “힘센 이면보다 늘 가난하고 정직한 눈물의 힘”을 믿는 것이 아닐까.


금강산에 가고 싶어도 돈이 없어 못 간다

나도 백두산 천지 한번 보고

눈감고 싶구나


아버지의 말을 듣고

내 무능한 경제를

한탄하는 밤


삼팔선아, 너를 지우려면 이제

더 많은 삼팔선을 나는

그어야겠구나

- 손택수, 「삼팔선」 전문


임동확의 「눈물 통일론」이 정서적 화합의 문제를 보편적이며 정치적 관점에서 다루고 있다면 손택수의 「삼팜선」은 분단의 문제를 자신의 가족 내부로 옮겨온다. “금강산에 가고 싶어도 돈이 없어 못간다” “나도 백두산 천지 한번 보고/ 눈감고 싶구나”라는 아버지의 말은 가난의 장애가 한 개인을 얼마나 왜소하고 무능하게 만드는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아버지의 소박한 소망조차 이루어 줄 수 없는 “내 무능한 경제”를 “한탄”하며 화자는 우리 내부에 존재하는 “삼팔선”의 경계야말로 심각한 문제임을 드러낸다.

손택수는 자본주의의 사회의 가진 자와 가지지 못한 자의 차별, 소외된 계층의 전망 없는 현실, 물질 만능주의의 비인간화 등을 우회적으로 이야기하면서 우리 안의 분열과 단절이야말로 또 다시 넘어야 할 “삼팔선”임을 강조한다.

이상에서 살펴본 것처럼 분단의 현실은 이산의 아픔, 이념의 갈등, 남?북간의 정서적 괴리, 이주민의 고통, 우리 사회의 내부의 차이와 대립의 문제들로 다양하게 나타난다. 이밖에도 분단의 아픔과 통일에 대한 염원을 담은 작품은 2000년 이후 오늘에 이르기 다양하게 창작되었다. 그런데 주로 분단 체제의 극복과 통일, 평화를 갈구하는 시작품은 거의 사회적 이슈화, 문학 행사의 형식, 특집으로 기획된 주제 하에 발표되고 있는 경우가 많았다. 이러한 문제는 앞으로 보다 자연발생적 창작 조건들에 의해 개선되어야 될 필요성을 느끼게 한다.



4. 반전?반핵을 위한 평화의 메시지


달이 무릎을 꿇어

희고 푸른빛 한송이 섬에 심으셨다.

달은 섬을 지키는 것이 사람이 아니라

한 그루 나무라는 것을 알았지만

나무의 운명은 어찌 할 수는 없었으리라.

그날 매향리는 부끄러움뿐이어서 치욕뿐이어서

어머니 아랫도리 다 드러내놓고 살아야 해서

갓난아기들만이

세상 겨우 바로 볼 수 있었을 것이다.

설해목 죽은 매화꽃이

삼형제섬 농섬 규비섬 윗섬 이름 불러도

제 이름을 잊고 산 섬들은

괌이나 오키나와에서 날아온

미군 F16폭격기 숫자나 세다가 늙어갔을 것이다

- 홍일선, 「매향리」 부분


‘매향리’는 주한 미 공군의 전력을 유지?보강할 목적으로 사격훈련장으로 사용되어 왔었다. 매향리 주민들은 전쟁을 대비한 미군의 훈련장으로 자신들의 삶의 터전이 쑥대밭이 되어 가는 것은 끔찍한 현장을 지켜보았던 것이다. 산하가 온통 “미군 F16폭격기”에 의해 난사될 때 그곳에는 존엄한 인간도 아름다운 자연도 온전히 지켜질 수 없었던 것이다.

홍일선은 이러한 참상을 “부끄러움”과 “치욕”이라고 말한다. 순수한 인간의 영혼이 짓밟히고, 죽은 꽃들과 “제 이름을 잊고 산 섬들”만이 존재하는 매향리는 전쟁의 위협이 인간의 삶을 얼마나 비참하게 만드는가를 여실히 보여준다.


그 이름 매향리에

매화나무가 없다

탄피와 파편과 파헤쳐진 황토와

낯선 포대 험상궂은 아가리만 즐비했다

그 이름 매향리에

매화 향기가 없다

고약한 화약 냄새만 코를 찔러

누가 매화 그루턱을 뽑아갔나

누가 무시무시한 저 폭격장을 꾸렸나

마구잡이 폭격질에 대포질에

생사람이 죽어가고 병신됐건만

울 수도 하소연할 곳도 없었다

빨갱이라 잡아갔으니까

쉬 쉬 야밤 남몰래 혼자만 운 피세월

농섬은 허구한 날 연일 난타 폭탄을 맞아

아름다운 옛 모습은 간데온데없다

- 이시형, 「매향리-폭격장이 웬말이냐」 부분


이시형의 「매향리」는 매향리의 현실을 보다 직접적이며 사실적으로 재현하고 있다. “탄피와 파편과 파헤쳐진 황토” “낯선 포대 험상궂은 아가리” “고약한 화약 냄새” “무시무시한 저 폭격장” “마구잡이 폭격질에 대포질”에서 연상되듯이 무기로 인해 황폐해진 국토의 모습을 보여준다. 탄피와 파편으로 얼룩진 땅, 무시무시하고 가공할 만한 위력을 지닌 군사 무기는 전쟁이 자연과 인간의 삶을 잔혹하게 파괴한다는 사실을 예고한다.

그런데 이 시에서 주목해야 될 부분은 타자에 의해 강압적으로 수탈된 자신들의 땅에 대해 정작 주민들은 숨죽인 세월을 살아갈 수밖에 없었다는 점이다. 즉 “생사람이 죽어가고 병신됐건만/ 울 수도 하소연할 곳도 없었다/ 빨갱이라 잡아갔으니까”라는 말처럼 전쟁을 대비하는 명분이 정당화되고, 이데올로기를 강화하려는 술책에 의해 순진한 주민들은 피해자로서 살아갈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이시형은 「매향리」를 통해 정치적 맥락이 인간성을 우선하는 세계, 자국의 국민들보다 미국의 강권이 더 크게 작용하는 한국 사회의 모순을 지적함으로써 진정한 평화를 위해 우리가 척결해야 될 문제가 무엇인지 심각하게 문제제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매향리에 이어 ‘대추리’ 또한 미군기지의 확장과 농민의 생존권 위협, 생태계의 파괴의 심각성을 보여주는 예이다.


팽성 사람들은

깊은 밤 대추리 숲에 들어

솔부엉이가 되는구나

부엉 부엉 울면서

어머니를 찾고

아버지도 부르는구나

저지선에 부딪혀 넘어질 때 떠오르던

자식들의 얼굴도 그리는구나

지난 낮

시시각각 문전옥답을 갈아엎고

문간방을 허물고 오는

미제 철조망을

팽성 사람들은 맨손으로 잡고

맨등으로 쳐냈구나

그래서 온몸에 흐르는,

배추씨를 뿌리는 마음에

가을 나락을 거두는 얼굴에

흐르는, 이것들을

우리는 무엇이라 불러야 하는가

사람들아 눈물이라 말하지 말자

눈물이라 하지 말자

 - 나해철, 「대추리 솔부엉이」 부분


나해철의 「대추리 솔부엉이」는 농민들의 삶의 터전을 군화발로 짓이기는 잔인한 현장에 대해 고발하고 있다. “대추리” 사람들에게 미군기지의 확장은 자신의 땅을 빼앗기는 것이며, 이는 그들의 의지와 무관하게 지극히 전략적이며 정치적 맥락이 작용한 결과이다. 대추리에서 진행되었던 주민 철거 사건은 생존의 터전을 야만적 폭력으로 짓밟는 일인 것이다.

나해철은 대추리 사람들이 자신의 “문전옥답을 갈아엎고” “문간방을 허물고 오는” 권력자들의 만행이 인간의 존엄성과 평화를 파괴하는 것임을 말하고 있다. 시인은 대추리 주민들이 항거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그들의 몸으로 싸우는 것이라 말한다. “미제 철조망을/ 팽성 사람들은 맨손으로 잡고/ 맨등으로 쳐냈구나”라는 표현에서 알 수 있듯이 힘없고 나약한 자들이 할 수 있는 최대의 항거는 온몸의 저항인 것이다.

저항의 핵심은 평화로운 고향을 지키는 것이며, 자신과 후손들에게 그 땅을 물려주고자 하는 농부들의 마음이다. 또한 그들의 저항은 타자에 의해 관장되고 전쟁의 위협을 안고 살아가야 하는 민족의 문제를 스스로 극복하고자 하는 의지의 표현이라 할 수 있다.   

전쟁의 문제를 보다 구체적으로 형상화한 작품은 ‘이라크 파병’을 주제로 한 작품들을 통해 보다 직접적으로 드러난다. 이는 국제적 현안과 상관해 반전?반핵 의식을 고취하게 만들었다.


아침 창가에 앉아

조간신문에 실린 너의 사진을 본다


소녀야, 두 발이 잘린 채

피투성이가 되어 아빠의 팔에 안겨 있는

어린 이라크 소녀야


여는 아침이며

잠자리에서 막 일어난 너는 샬롬, 하고 인사하며

가족들의 뺨에 차례로 볼을 부볐겠지

장밋빛 한없이 사랑스러웠던 너의 얼굴은

온통 화약 연기에 그을리고


세상의 신비한 풍경들을

하나씩 익혀나가던 너의 총명한 두 눈은

숯덩이처럼 굳게 잠겨

아무런 희망의 빛도 되쏘일 수 없구나

- 곽재구, 「어린 이라크 소녀에게」 부분


곽재구는 이라크 전쟁의 참상을 조간신문에 실린 “어린 소녀”의 모습을 통해 확인한다. 전쟁은 순수한 어린 영혼과 육체를 파멸시켰다. “두 발이 잘린 채/ 피투성이가 되어”있는 소녀의 모습은 더 이상 정상적인 삶이 불가능하며, 소녀가 꿈꾸었던 미래가 사라졌음을 보여준다. 순결한 영혼을 짓밟고 간 포화, 더 이상 세상을 아름답다라고 말할 수 없는 현실은 광기와 폭력의 역사가 인간의 생존과 자유, 평화의 희망마저 뿌리뽑았음을 보여준다.

곽재구의 「어린 이라크 소녀에게」는 이라크 전쟁이 결코 먼 타국의 이야기가 아님을 역설한다. 전쟁이란 전지구적 재앙이며, 우리 시대의 치욕이며, 자본의 광기가 빚어낸 비극의 역사임을 상기시키는 것이다. 특히 그의 시는 구어체의 어법으로 전개됨으로써 전쟁이 결코 낯설고 먼 나라의 이야기가 아님을 설득력 있게 그리고 있다. 

전쟁의 문제는 반핵의 문제와도 밀접하게 연관된다. 이은봉의 「아메리카여」는 천의 얼굴을 지닌 미국의 위선과 핵무기의 위협에 대해 노래하고 있다.


오고야 말 날을 더욱

빨리 오게 하는, 그리하여

세상 앞장서 끝나게 하는

아메리카여 천의 얼굴이여

오오, 아이스크림처럼 녹아 흐르는

촛대가리여 욕정의 찌꺼기여

방글라데시에서도 니카라과에서도

눈물, 구두 굽으로 짓이기는 슬픔을

혼자서 혼자서 다 껴안고도 낙진을

자유를 평화를 뜨거운 자본주의를

벅찬 한숨을 가래를 만만한 인디언을

뺨에 입술에 젖가슴에


…(중략)…


꿈을 통일을 한반도를

핵폭탄을 솟아오르는 내일을

마구 걷어차는 엎어치는

아메리카여 가엾은 미합중국이여

오오, 미칠 것 같은

돌덩이여 니기미 쑥떡이여

- 이은봉, 「아메리카여」 부분


미국의 역사는 전쟁의 역사이다. 이은봉은 전쟁광인 미국이 어떻게 타민족을 학살하고, 타국을 점령하고, 인권을 유린하고, 전지구를 전쟁의 소용돌이에 휩싸이게 만들었는지를 역설하고 있다. 이은봉은 미국이 일으킨 전쟁의 원인을 “욕정”과 ‘탐욕’에 의한 것이라 말한다. “오오, 아이스크림처럼 녹아 흐르는/ 촛대가리여 욕정의 찌꺼기여”라는 말속에서 우리는 인간의 더러운 욕망이 온 인류를 재앙의 소용돌이에 빠지게 했음을 잘 알 수 있다. 그는 “낙진” “핵폭탄”과 같은 용어를 적극적으로 사용하면서, 강탈과 유린의 역사를 반복하는 아메리카의 잔혹성의 중심에 놓인 ‘핵무기’가 초래할 인류의 파멸에 대해 시사하고 있다. 미친 전쟁놀이에 혈안이 되어 있는 미국을 향해 그는 한마디 통쾌한 말을 날린다. “돌덩이여 니기미 쑥떡이여”라고. 그의 이 같은 욕설이 어쩌면 우리가 내뱉을 수 있는 가장 신랄한 언어일지도 모른다.

이승철의 「핵 폐기장 그 후, 위도 팔경」은 핵의 위험이 자연을 어떻게 파괴했는지를 간명하게 보여주는 시편이다.


내원암의 툭사리 깨지는 저녁 종소리

정금마을의 밥 타는 연기

식도에서 들려오는 어부들의 신음

망월봉에 걸린 찢어진 달

진리 뒷산에 떠오른 짙은 먹구름

벌금 앞바다에 난파한 돛단배

왕등도의 피고름으로 깔린 낙조

진리마을 포구를 비켜 달아나는 해조음

- 이승철, 「핵 폐기장 그후, 위도 팔경」 부분


이승철의 “위도 팔경”은 위도의 풍경을 하나씩 묘사하고 있다. “내원암의 툭사리 깨지는 저녁 종소리” “정금마을의 밥 타는 연기” “식도에서 들려오는 어부들의 신음” “망월봉에 걸린 찢어진 달”의 이미지는 전경화와 후경화를 반복하고, 청각적 이미지와 시각적 이미지가 교차되어 나타난다. 마치 한 폭의 살아 있는 그림을 보든 듯한 풍경이다. 그러나 이 풍경 속에는 세계에 대한 비극적 인식이 깔려 있다. 거기에는 다름 아닌 ‘핵’으로 인해 파괴된 자연과 인간의 삶이 녹아 있기 때문이다. 핵폐기물로 인해 황폐해진 바다가 어부들의 생존 터전마저 빼앗았기 때문에 “어부들의 신음”은 깊어질 수밖에 없다. “피고름으로 깔린 낙조”에는 자연의 아름다움을 결코 아름답게만 바라볼 수 없는 현실 인식이 내재되어 있다. 그의 시는 핵의 문제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지만 직접적이고 사실적으로 핵의 심각성을 고발하고 있지는 않다. 그런 점에서 이 시는 현실에 문제에 대한 미학적 거리를 확보하고 있다고 할 수 있겠다.

반전, 반핵을 주제로 한 평화 문학 작품은 국내외의 정치적 현안에 대해 민감하게 반응한다. 그것은 그 사안의 특수성과도 밀접한 관련성을 지닐 것이다. 시의적 적절성, 고발 문학의 직접성 등이 이러한 현상을 초래하는 원인이 될 것이다.

이밖에도 평화 문학은 환경과 생명 존중의 생태문학, 소외계급과 비인간화를 노래한 휴머니즘 문학의 양상을 지닌다. 90년대 이후 활발하게 진행된 생태시와 환경주의는 주로 ‘생명성’에 대한 논의로 집중되어 왔다. 김지하, 정현종, 도종환, 최승호, 최두석, 배한봉 등의 작품은 자연과 인간의 생명에 대한 관심을 통해 생명 존중 사상을 담고 있다.

소외계급과 비인간화의 문제는 평화 문학의 중심과제이다. 동시에 이 문제는 오늘날 많은 작가들의 작품 속에서 광범위하게 드러나는 문제이기도 하다. 전통 서정시, 포스트모더니즘 시에 이르기까지 이 계열의 작품은 다종 다양한 형태로 창작되고 있다.



5. 평화 문학의 미래를 위해 


인류의 역사에서 전쟁이 없었던 적은 불과 200―300년밖에 되지 않는다고 한다. 인류는 언제나 전쟁의 공포와 학살의 위협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따라서 지구상의 평화는 아직 요원하다. 여전히 남북은 대결하고 있으며, 우리의 자유는 우리 스스로의 판단과 실천에 의해서만 쟁취될 수 없는 국제적 역학관계에 놓여 있다.

정치적 자유가 보장되지 않을 때 결코 개인의 자유 또한 보장될 수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끊임없이 우리는 부정과 모순이 가득한 현실과 싸워야 한다. 문학은 문학으로써 실천하는 것이다. 자유와 평화를 위한 실천은 결코 쉬운 길이 아니다. 평화 문학은 이처럼 개척자의 정신으로 정진할 때 그 성과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한반도 평화와 상생을 위한 문학 축전”이 각 지역에서 일어나고 시인들의 적극적 참여와 대중과의 만남이 끊임없이 시도되는 한 평화 문학 운동은 결코 지엽적이고 제한적이며 특수한 문학 운동으로만 인식되지 않을 것이다.

앞서 이야기했듯이 ‘평화’는 포괄적인 개념이다. 때문에 그것은 민족주의, 민중주의, 노동해방과 같은 지난 세기의 문학 운동과는 차별성을 지닌다. 그런 점에서 좀더 다양한 스타일과 성향을 지닌 작가들에 의해 개성적이며 새로운 상상력을 보여주는 작품들이 창작되어야 평화 문학의 지평이 넓혀질 것이다.

최근 우리 문학의 작가층은 그 어느 때보다도 두텁다. 그것은 작가들의 시야가 넓어지고, 세계에 대한 접근 방식 또한 다양해졌음을 의미한다. 이러한 작가들의 역량이 ‘평화 문학’에 보다 집중 될 때 보다 넓은 시대적 공감대를 얻을 수 있으리라 기대된다. 

오늘의 시인들은 끊임없는 자기 쇄신을 통해 이 죽음의 시대, 폭력과 광기의 시대를 넘어서는 자유와 평화의 미래를 꿈꾸어야 할 것이다. 그 중심에 평화 문학이 있기를 바란다. 《문장 웹진/ 2006년 7월》

 

 

※ 이 원고는 한국문학평화포럼이 주최한 <국내외 평화문학의 현황과 전망> 세미나에서 발표한 내용을 정리한 것임을 밝혀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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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0-07-30
시 쓰고 자빠졌네

시 쓰고 자빠졌네. 이런 말 자주 들었다. 누군가에게 자주 두들겨 맞았고, 누군가에게 가끔 린치를 가하던 시절이었다. 이웃 여고 문예부 아이들이 어쩐지 예쁠 거 같아서 문예부실을 전전했다. 그리고 백일장에 나가곤 했다. 물론 남달리 예쁜 아이는 없었지만, 어쨌든 17세 남녀가 교복을 입은 채로 노래방에서 듀스나 룰라, 혹은 투투의 노래를 함께 부르는 모습은 남달리 아름다웠다. 되도록 빨리 노래방으로 가기 위해서 우리는 사바사바, 시를 썼다. 빨리 써야 했다. 시는 최초의 노래였으므로. 엉덩이를 두드리듯, 천사를 찾아. 발라드를 부르며 감정 과잉에 빠지는 철수에게 영희는 이렇게 말한다. 시 쓰냐? 그때 우리는 원고지를 눕히던 누런 잔디에서, 어두운 노래방에서, 혹은 밀도가 높은 교실에서 어떤 감정 속에 놓여 있었을까. 난 누군지 또 여기는 어딘지 아무도 알려 주지 않았기에 우리는 분노에 가득 차 교복을 줄이고 담배를 숨기고 몰래 술을 마시기도 했다. 수채화 대신에 야간 자율 학습 감독을 주로 하던 미술 선생은 또 말했다. 또, 또 시 쓰냐? 시화전 제출 작품에서 피 흘리는 고등어를 그려 놓고 ?어느 고딩의 죽음?이라 제목을 붙이며 나는 전위를 담당한 듯 당당했다. 부끄러움이 없는 남자였다. 미술 선생에게 욕을 먹을 때에도, 맞을 때에도 나는 부끄러움을 몰랐다. 대한민국 학교 다 족구하라 그래. 시 쓰고 자빠졌다, 정말. 정말이란 말에 대해 오래 생각해 본다. 오래 생각하는 버릇은 이 시대에 어울리지 않는다. 최대한 짧고 단순하게 사고한 것으로 보이는 일들이 생각보다 빠르고 무식하게 벌어지고 있다. 정말? 시집을 묶어내던 중에 바위에서 사람이 떨어져 죽었다. 그 부엉이는 정말 새였을까. 도심에서 사람이 불에 타 죽었다. 그 망루는 정말 구름이었을까. 모두 정말이냐고 정색하며 물어 볼 만한 일들이었다. 분노가 치민다. 지금 나와 싸우자는 건가? 그런데 싸우는 법을 배운 적이 없다. 아니다. 싸움은 끝났다고, 이제 싸움이 아닌 경쟁의 시대라고 배웠다. 나는 그저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잘 모르겠어서, 화가 났다. 사실 싸움보다 훨씬 경쟁이 무서웠다. 사건은 이미지가 되는 순간 거짓말이 된다. 이 모든 게 차라리 멋진 거짓말이었으면 좋겠지만, 이것은 너무나 끔찍한 거짓말. 난삽한 이미지. 이미지가 아닌 이미지. 그러므로 차라리 보이는 게 진실이라고 믿어 본다. 이 지긋지긋하고 끔찍한 진실이 시의 배후가 되어 시에 맘껏 개입해도 나는 좋다. 시가 그렇게 하지 못하겠다면 기꺼이 네가 그렇게 하라. 가져간 나의 반쪽! 때문인가. 이제 둘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그래, 리얼리스트 되자. 모던한 리얼리스트가 되자. 모더니스트가 되자. 리얼한 모더니스트가 되자. 장난하느냐고? 그렇다면, 불길한 장나니스트라고 해 두지 뭐. 꼴에 시랍시고 자빠졌네. 이런 말 자주 들었다. 하지만 누가 뭐래도 나는 시가 좋다. 그리고 시가 밉다. 사랑하고 미워하며 안절부절못하고 있다. 처음 증상을 보일 때는 이렇게 데뷔를 하고 시를 쓰리라 짐작하지 못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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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0-07-15
일본 소설, 한국 시

일본 소설, 한국 시 한성례 한국에서 일본소설의 베스트셀러 현상 한류바람이 뜨겁게 일본 열도를 달구기 시작한 2000년 이후부터 한국에서 일본소설은 폭발적인 인기를 구가해왔다. 일본보다 한국에서 더 인기가 많은 작가가 나올 정도로 한국은 일본소설 홍수 시대이다. 이 같은 현상에 대해 일본인들은 물론이고 일본소설가들조차도 왜 일본소설이 한국에서 그렇게나 많이 팔리는지 몹시 궁금해 한다. 이에 대한 일본 신문의 인터뷰나 원고의뢰가 있을 적마다 나는 현재 한국에서의 한국시에 비유해서 설명을 한다. 이전에도 한국에서 일본소설은 종종 많이 팔렸다. 70년대 중반에 첫 출간된 무라카미 류(村上龍)의 『한없이 투명에 가까운 블루』는 해적판이 끊임없이 이어졌고 출판금지서임에도 안 읽은 사람이 없을 만큼, 문학이나 예술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의 필독서이고 바이블이었다. 1999년 정식으로 저작권 계약을 맺어 커버에 비닐을 씌워 19세 미만 구독불가로서 출간된 후에도 쇄를 거듭하며 읽히는 소설이다. 또한 1989년 원제인 『노르웨이의 숲』이 『상실의 시대』란 이름으로 출간된 무라카미 하루키(村上春樹)의 소설은 당시 크게 각광을 받았고 지금도 계속해서 읽힌다. 당시 한국은 민주화 쟁취와 맞물려 자의식이 집단에서 개인으로 향하던 시기였다. 민주주의가 아직 성숙하지 못한 상태여서 사회, 정치적으로 안정되지 못했고, 급변하는 사회적 환경 속에서 개인이 느끼는 소외감, 고독, 상실감 등이 당시 한국 젊은이들이 처한 현실과 겹쳐지면서 이 소설에 크게 공감했다. 더욱이 하루키의 가독성 높은 문장은 금방 젊은이들을 사로잡았다. 한편으로 문학의 구도자 같은 마루야마 겐지(丸山健二)의 소설도 여러 편 번역 소개되었는데, 이는 주로 문학 창작자들이 마니아였다. 하지만 일본소설의 인기는 단편적일 뿐 전반적인 경향은 아니었다. 오히려 서구소설이 중심을 이뤘다.그러던 것이 에쿠니 가오리, 요시모토 바나나, 쓰지 히토나리, 히라노 게이치로, 요시다 슈이치 등 젊은 작가와 미야베 미유키, 스즈키 코지, 히가시노 게이고 등의 미스터리 소설과 나오키 상을 비롯한 여러 문학상 수상작이 2000년 이후에 대거 한국에 번역 소개되었고, 대형서점에는 코너가 별도로 마련될 만큼 일본소설은 인기를 끌고 있다. 왜 일본 소설을 좋아하는 것일까 무엇보다도 일본소설은 재미있다. 독자를 의식하고 소설을 썼다는 게 금방 느껴진다. 말하자면 자신의 상품을 사줄 소비자의 위치에서 창작을 한다는 것이다. 젊은이들은 일본소설을 읽으면서 비현실적인 주인공을 통해 현실에서 실제로 행동에 옮기지 못하는 자신의 일탈을 꿈꾸고, 대리만족을 느낀다. 일본소설의 주인공 젊은이들은 특별한 목표도 없고, 무기력하며 수동적이고, 나약하기 짝이 없다. 그들은 시대의 흐름과 기존 질서에 따르지도 않고, 세상을 약간은 냉소적이고 관조적인 눈으로 바라보면서, 보편적인 부와 명예, 사회적인 안정 등과는 거리가 멀다. 이에 독특한 상상력과 가독성 높은 문장도 한 몫 한다. 최근 일본과 한국에서 밀리언셀러 판매 기록을 갱신하는 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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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0-0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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