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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시단의 결산과 전망

  • 작성일 2006-12-01
  • 조회수 3,992

 

2006년 시단의 결산과 전망



문혜원 




1. 시집 출간의 활성화

 

근래 들어 시집 출간이 호황을 맞고 있다. 시집이나 출판사에 대한 지원이 이루어지면서, 문예지의 숫자가 급증하고 시집을 간행하는 출판사 또한 수가 늘었기 때문이다. 특히 올 한 해는 중진시인들의 굵직한 시집들이 속속 출간되어 시단의 무게중심을 잡고 있다. 강은교의 『초록 거미의 사랑』을 비롯해서 고은 『만인보』21~23, 황동규 『꽃의 고요』, 마종기 『우리는 서로 부르고 있는 것일까』, 김지하 『새벽강』, 『비단길』, 오세영 『문 열어라 하늘아』, 이하석 『것들』, 나태주 『물고기와 만나다』, 문인수 『쉬』, 이기철 『정오의 순례』, 김승희 『냄비는 둥둥』, 송기원 『단 한번 보지 못한 내 꽃들』, 한영옥 『아늑한 얼굴』, 고형렬 『밤 미시령』, 하종오 『지옥처럼 낯선』, 김사인 『가만히 좋아하는』, 강세환 『상계동 11월 은행나무』, 김용택 『그래서 당신』, 도종환 『해인으로 가는 길』, 『사람의 마을에 꽃이 진다』, 김정환 『레닌의 노래』 등이 눈에 띄는 시집들이다.

그 중에서도 특기할 만한 것은 그동안 소강상태에 있던 80년대의 중요한 리얼리즘 시인들이 시집을 발간했다는 점이다. 김사인은 『밤에 쓰는 편지』 이후 실로 오랜만에 두 번째 시집 『가만히 좋아하는』을 발간했고, 강세환 역시 『바닷가 사람들』 이후 십여 년 만에 『상계동 11월 은행나무』를 발간했다.

오랜만에 시집을 낸 김사인 시의 가장 큰 특징은 여림과 섬세함이다. 대부분의 그의 시들은 작고 초라한 대상들을 소재로 하고 있고, 그것을 눈여겨보는 시인의 감성 역시 그에 어울리게 수수하고 여리다. 그가 이처럼 순박하고 세련되지 못한 것들과 함께 하는 것은 이념이나 양심에 앞서 선천적인 기질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그는 자신의 나약하고 여린 측면을 스스럼없이 드러냄으로써 인간적인 이해와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이 공감은 비단 내용에서만 오는 것이 아니라, 섬세한 언어들로부터 만들어진다. 덧붙이거나 모자란 부분이 없는 간결한 언어들 덕분에 시 한 편 한 편이 군더더기 없이 잘 정제되어 있다.

강세환의 시는 짙은 서정성을 바탕으로 하면서도 사회적인 현실에 대한 관심을 놓치지 않는다. 이번 시집에서는 시의 어조가 한결 낮아졌다. 공감을 호소하는 독백과 다짐, 청유형의 목소리 대신 중얼거림과도 같은 화자의 독백이 자주 등장한다. 중요 소재인 민중은 ‘헐벗고 빼앗기고 억압당하는’ 고정된 성격의 민중이 아니라 실생활에서 마주치는 거지, 외국인 노동자, 러시아 댄서 등 복합적인 계층으로 확대되어 있다. 그들을 바라보는 시인의 위치는 그들의 상처를 치유하고 문제를 해결하는 해결사가 아니라, 그들이 무사히 살아가기를 가슴 졸이며 바라보는, 자신 역시 가진 것 없는 선량한 이웃에 가깝다. 이처럼 시적인 소재가 당위적인 ‘민중’에서 일상적인 삶으로 옮겨오면서, 그의 시는 조금 더 구체성을 확보하고 있다.

시단의 중간층을 형성하고 있는 중견시인들의 시집 발간도 이어졌다. 최정례 『레바논 감정』, 남진우 『새벽 세 시의 사자 한 마리』, 『세상 모든 길은 집으로 간다』, 이정록 『의자』, 박찬일 『모자나무』, 최서림 『구멍』, 박라연 『우주 돌아가셨다』, 송종규 『녹슨 방』, 김영남 『푸른 밤의 여로』, 조말선 『둥근 발작』, 성미정 『상상 한 상자』 등이 그 예이다.

다른 시집들이 세계 속에 살고 있음을 전제로 하고 있음에 비해, 박찬일의 시는 세계 속에서 살아감 자체에 대해 회의를 표시한다. 그는 삶의 곳곳에서 죽음의 표지들을 포착해낸다. 살아 있되 오히려 죽음이 친숙한 아이러니한 상황, 주체와 세계의 돌이킬 수 없는 불화와 단절이 그의 시의 바탕을 이룬다.  

정반대로, 남진우의 시에서 세계는 오직 주체를 위해 존재한다. 사자나 곰 같은 동물의 형상으로 오는 ‘어떤 것’은 잠든 ‘나’를 흔들어 깨우고, 말을 걸어오고, 내 속에 머물다가 사라진다. 그것(들)이 방문하는 시간은 잠, 밤, 꿈처럼 일상의 시간이 잠시 정지한 때이고, 그 전언을 알아듣는 것은 오직 ‘나’ 뿐이다. 다른 일상의 시간은 없다. 주체는 ‘그것(들)’에 의해 불리어진 시간만을 살므로, 주체와 외부 세계 사이의 단절은 없다.

새로운 시인들이 연달아 시집을 출간함으로써 시단에 활력을 불어넣은 것도 기억할 만한 일이다. 이은림 『태양중독자』, 안현미 『곰곰』, 여태천 『국외자들』 김병호 『과속방지턱을 베고 눕다』, 박해람 『낡은 침대의 배후가 되어가는 사내』, 이희정 『너를 사랑하게 되다』, 조동범 『심야 배스킨라빈스 살인 사건』, 김경주 『나는 이 세상에 없는 계절이다』, 서상영 『꽃과 숨기장난』, 이준규 『흑백』, 신기섭 『분홍색 흐느낌』, 김홍성 『나팔꽃 피는 창가에서』, 이용한 『안녕 후두둑씨』, 조향미 『그 나무가 나에게 팔을 벌렸다』, 이승희 『저녁을 굶은 달을 본 적이 있다』, 윤성학 『당랑권 전성시대』, 전성호 『캄캄한 날개를 위하여』, 정영 『평일의 고해』, 김금용 『넘치는 그늘』, 김진완 『기찬 딸』, 권현형 『밥이나 먹자 꽃아』, 박서영 『붉은 태양이 거미를 문다』, 김나영 『왼손의 쓸모』, 유지소 『제4번 방』, 김은정 『너를 어떻게 읽어야 할까』, 최규승 『무중력 스웨터』, 문숙 『단추』 등 다수의 시집이 출간되었다. 각각의 특징을 따로 말하기에는 아직 이르지만, 이들이 우리 시단을 이끌어나갈 다음 세대 주자들임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특별히 인상적인 것은 김경주의 시집이다. 그의 시는 영혼의 부름에 답하며 헤매는 날들의 기록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 헤맴은 낭만적인 가객의 것이 아니라 저주받은 사제의 것이다. 우리가 발을 디디고 서 있는 현실은 애초부터 그의 눈 속에 없다. 전혀 다른 세계를 놀랍도록 투명하게 보고 있는 그의 시는 허황하거나 오만하지 않고 독자의 잊혀진 고통까지를 깨워 일으킨다. 이것이 고통의 깊이로 발전될지 화려한 포즈로 변질될지 관심을 가지고 지켜볼 만한 일이다.



2. 새로운 감수성의 시인들과 ‘미래파’ 논쟁

 

근래 시단의 특징 중 하나는, 반서정적이고 개인적이며 실험적인 성향이 강한 시집들이 쏟아지고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경향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는, 이장욱 『정오의 희망곡』, 이승원 『어둠과 설탕』, 김참 『그림자들』, 강정 『들려주려니 말이라 했건만』, 박상수 『후르츠 캔디 버스』, 김현서 『코르셋을 입은 겨울』, 이근화 『칸트의 동물원』, 서영처 『피아노 악어』, 김지혜 『오 그 자가 입을 벌리면』 등을 들 수 있다.

이들의 실험의 내용은 다양하고 진폭 역시 큰 편이다. 이장욱의 시는 형태상으로는 기존의 시와 크게 다르지 않지만 외부와는 단절된 자신만의 어법으로 이루어져 있다. 외양상 언어의 배열은 전통적인 방식을 따르고 있지만, 그 배열 속에서 의미를 가지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이와 비교한다면, 강정의 시는 기존의 문법을 따라 의미를 이해하는 데는 별다른 문제가 없다. 그러나 포인트는 의미에 있지 않고 의미의 뒤편에서 느껴지는 ‘강렬함’에 주어져 있다. 고정된 의미의 망을 벗어나고자 하는 욕망은 같지만 방법은 정반대인 것이다. 이장욱의 시가 이성의 힘에 기댄 자기 조절로 이루어져 있다면, 강정의 시는 분출되는 감성을 자유롭게 풀어놓음으로써 성립된다. 그런가 하면 긴 줄글의 형태로 씌어진 김참의 시는 몇 겹의 환상을 넘나들며 전개되고, 이승원의 시는 현실의 대상에서 출발해서 상상과 기억을 통해 일탈의 공간으로 넘어간다. 

이처럼 개성 있는 시세계를 보여주는 신진 시인들이 등장하면서 이러한 현상을 이론적으로 설명하려는 시도도 같이 이루어졌다. 2006년의 시단을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미래파’ 논쟁이 대표적인 예이다. ‘미래파’라는 말은 권혁웅의 「미래파-2005년, 젊은 시인들」(《문예중앙》2005년 봄호)에서부터 비롯된 것으로서, 1980년대 시인들의 역사에 대한 채무의식과 1990년대 시인들의 서정성과는 분리되는, 독특한 발성법을 가진 최근의 젊은 시인들을 지칭한다. 장석원, 황병승, 김민정, 유형진, 이민하, 김근, 김행숙 등이 이에 속하는데, 이들의 특징은 다성성(多聲性)의 주체, 무의식의 세계에서 끌어올린 개인의 은어, 엽기와 그로테스크한 유머, 모니터킨트적인 감수성, 환상성 등으로 요약되어 있다. 거론된 시인들은 공동의 사회적인 관심사보다는 개인의 내면 심리 혹은 무의식을 표출하는 데 치중하며, 그 방편으로 기성의 언어 질서로는 설명될 수 없는 자신만의 독특한 언어를 사용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그들은 자신들의 시가 시대 사회적인 연관에서 읽히기보다 개개인의 방언으로 남아 있기를 고집한다. 이런 면에서 그들의 시는 모더니즘적인 세계관을 보여주는 가장 최근의 시에 해당한다.

그러나 이 같은 특징만을 들어 말한다면, 우리는 쉽게 비슷한 특징을 공유하고 있는 시인들을 열거할 수 있다. 예컨대 선배격인 박상순과 이수명의 비소통적인 시들 혹은 또래인 정재학, 김참, 강정 등의 탈현실적이고 개인적인 시들은 이상에서 거론한 특징들을 모두 내포하고 있다. ‘미래파’라는 명명에 대해 비판적인 비평가들 역시, ‘미래파’로 호명된 시인들 스스로 유파임을 선언한 적이 없고, 유파라고 부를 만한 동질성을 가지고 있지 않으며, 유사한 경향을 보여 온 선배 시인들과의 변별력 또한 없다고 지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강조하는 것은 이에 포함되지 않은 대다수의 시인들을 소외시키고(이경수, 「‘다른’ 미래에 관한 몽상」, 《현대시학》 2006년 2월호), 종국에는 또 다른 문학세대론을 부추김으로써 문단을 파벌화 할 수 있다는 것이다(이명원, 「내력, 來歷, 耐力」, 《시작》 2006년 여름호). 명명된 시인들을 시사적으로 변별해낼 만한 공통된 특질들을 추출할 수 없다면, ‘미래파’는 현란한 수사와 말장난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이 논쟁이 시단에 불러온 파장이다. 결과론적으로 볼 때, 이 논쟁은 문단의 또 다른 패거리 현상을 만들어냈다. ‘미래파’라는 용어에 동의하든 동의하지 않든, 논쟁이 계속되는 동안 ‘미래파’는 우리 시단에서 가장 재능 있고 새로운 시인들을 지칭하는 영예로운 호칭으로 둔갑했고, 호명되지 못한 대다수의 젊은 시인들을 위축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또한 그것은 경향 상으로 모더니즘의 득세와 서정시의 소외를, 세대론적인 관점에서는 선택된 소수의 젊은 시인들의 득세와 기성으로 분류된 중장년층 시인들의 소외를 불러왔다. 한 비평가의 수사적 표현이 몇몇 문예지와 일간신문의 한건주의에 이용되면서 왜곡되어 확대?재생산되는 악순환을 낳은 것이다. 이것은 비평이 작품 평가에 미치는 파장이 얼마나 크며, 어떻게 권력화 되는지를 보여주는 본보기이다. 



3. ‘서정(시)’에 대한 논의와 서정시의 위축 현상


‘미래파’ 선풍은 서정시를 문단의 관심에서 소외시키는 결과를 초래했지만, 한편으로는 ‘서정시’ 자체의 존재 의의와 의미를 재규정하게 하는 계기를 제공했다. 《시작》과 《문예중앙》은 각각 2006년 여름호 특집으로 ‘서정’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김선태(「민중적 서사의 새로운 가능성」, 《시작》), 이명원(앞의 글) 등이 ‘미래파’라는 용어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취하면서 서정성의 복귀를 강조하고 있는 데 비해, 권혁웅(「행복한 서정시, 불행한 서정시」, 《문예중앙》과 김수이(「시, 서정이 진화하는 현장」, 《문예중앙》)는 ‘미래파’를 ‘서정시’의 범주 안에 포함시켜 설명하고 있다. 양자의 차이는 ‘서정시’의 개념 자체에 대한 생각의 차이에서 온다. 전자가 서정시와 모더니즘 시(혹은 실험시)가 대척되는 개념이라고 전제하는 데 반해, 후자는 서정시가 실험시적인 경향 즉 미래파의 시들까지를 포함하는 광범위한 개념임을 강조한다. 그들은 서정시가 주체(자아)와 세계 사이의 동일성을 특징으로 한다는 전제 자체를 부정하고, ‘분열의 주체, 비동일성의 미학에 의한 반서정’까지도 우리 시대가 지닌 서정의 특수한 한 유형이라고 주장한다(김수이). 서정시에는 주체와 세계가 조화를 이루고 있는 ‘행복한 서정시’가 있는가 하면, 양자가 끊임없이 어긋나며 불화하는 ‘불행한 서정시’도 있다는 것이다(권혁웅). 그러나 이 때 전제가 되는 ‘서정시’의 개념은 ‘시’라는 일반적인 개념과 크게 다르지 않다. 가령 “‘서정(抒情)’의 ‘서(抒)’자가 펴다, 떠내다, 토로하다라는 뜻임을 환기할 때도, 정(情) 즉 뜻과 본성을 토로하는 서정시의 내용물이 인간 내면의 모든 것을 지칭하는 것임은 재론의 여지가 없다”(김수이, 『서정은 진화한다』)는 말에서, ‘서정시’는 곧 시 일반을 가리키는 개념이다. 다시 말해서, ‘시’는 ‘인간 내면의 모든 것’을 대상으로, 소재로 혹은 주제로 하는 것이다. 우리의 시사를 돌아볼 때 주체와 세계의 비동일성에 바탕한 ‘불행한 서정시’가 많다는 이들의 고찰은 ‘서정시=시’라는 전제 위에 성립한다. 

그러나 ‘동일성의 주체와 미학에 기반한 시’와 ‘비동일성의 미학에 의한 반서정’의 구별은 근본적으로 세계관의 차이를 반영하는 것이다. 자아와 세계의 관계를 유비(아날로지)로 보는 동일성의 시학이 서정시의 근간이라면, 모더니즘 시에서 자아와 세계는 역설의 관계에 놓여 있다. 여기서 발생하는 아이러니가 모더니즘 시의 기본적인 태도를 형성한다. 따라서 어떠한 시가 주체와 세계 사이의 불화를 내용으로 할 때, 그것은 세계관의 차원에서 설명되어야 할 것이다. 주체와 세계의 비동일성을 보여주는 서정시를 ‘불행한 서정시’라고 한다면, 그 ‘불행’은 자아와 세계의 동일성을 전제하면서도 세계와 동일시될 수 없는 자아의 상황에서 유래한 것이다. 그러나 모더니즘 시는 전제 자체가 이와 다르다. 주체와 세계는 애초부터 분리되어 있으므로, 그 단절이 새삼스럽게 불행을 초래하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단절된 양상을 그대로 재현하려고 할 뿐이다. 이들의 시를 서정시의 한 유형으로 보는 것은, 세계관의 문제와 시적 화자의 정황을 착종시킨 데서 오는 오류인 것이다.

이 글에서 말하고자 하는 서정시는 세계관의 차원에서 모더니즘 시와 상대되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이해하는 바로 그 ‘서정시’ 이다. ‘미래파’의 유행에 밀려 서정시가 다소 주춤한 양상을 보였던 것 또한 2006년 한 해의 특징이다. 서정시의 위축 현상은 새로운 시인들이 수적으로 적고, 새로운 이슈나 경향 또한 발견되지 않음으로써 답보 상태에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일차적으로 서정시가 가지고 있는 전통적이고 보수적인 속성에 기인한다. 파격적인 실험을 거듭하는 모더니즘 시와 달리, 서정시는 유사한 주제와 태도를 반복한다. 따라서 새로움이나 놀라움으로 독자들을 흡인할 수 없다는 것은 서정시의 태생적인 운명이다. 다만 최근 모더니즘 시가 엇비슷하게 쏟아져 나오는 젊은 시인들을 다수 확보하고 있는 데 반해, 서정시는 상대적으로 새로운 얼굴을 찾기가 어려워졌다는 사실은 짚어둘 만하다. 

젊은 서정시인들 중에 단연 돋보이는 것은 문태준이다. 올해 『가재미』를 출간한 그의 시는 한결 안정되고 단단해졌다. 앞서 발표한 시집 『맨발』이 관념적인 일면을 담고 있었던 데 반해, 『가재미』는 풍경에 인간의 삶을 적절히 결합시켜서 인생의 단면을 그려내는 데 성공함으로써 대중적인 인기까지 확보하고 있다. 그의 시는 농촌의 정서와 생활을 소재로 하고 있다는 면에서 김용택의 서정성을 연상시키지만 그보다는 소재와의 거리를 유지하고 있고, 가난을 심정적인 바탕으로 한다는 면에서 함민복의 시와 유사하지만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의 의지는 덜한 편이다. 때로 관념적이고 동어반복적이라는 한계를 가지고 있기는 하지만, 문태준이라는 시인을 확보한 것은 서정시단으로서 큰 수확이 아닐 수 없다.

손택수의 『목련전차』 역시 주목할 만한 시집이다. 문태준의 시가 생활환경으로서의 자연과 거기서 살아가는 인간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면, 손택수의 시에서 자연은 옛날이야기를 담고 있는 서사적인 공간이다. 자연의 대상물과 유년의 이야기를 결합시키는 방식은 백석의 시를 연상시킨다. 또한 ‘할머니’로 대표되는 여성들이 대모신이나 무당 같은 영험한 존재로 표현되는 것은 여성영웅의 이미지와 연결시켜 해석할 수 있다. 시집 전체의 시들이 고른 수준을 유지하고 있어서 시인의 기본적인 자질을 확인할 수 있는 것도 장점이다.

 


4. 시단의 전망


이처럼 올 한 해의 시단은 ‘미래파’ 논쟁의 열기 속에 서정시가 다소 위축된 양상을 보인 것이 특징이다. 그러나 논쟁이 이어지는 동안 ‘미래파’로 명명된 시인들은 오히려 한정된 용어 속에 갇혀 고정되어버렸다. 그들의 시의 개성과 참신성은 사라지고, 뒤틀린 화법과 자기 분열, 환상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지는 엽기의 상상력 등 표면적인 특징들만이 복제 생산되고 있다(이에 대해서는 졸고, 「1990년대 이후 모더니즘시의 특징과 한계」, 《시와반시》 2006년 가을호에서 이미 언급한 바 있다).

이런 맥락에서, 시대의 유행과는 별개로 자신의 길을 걷고 있는 시인들의 시집이 신선하고 인상적이었다. 박후기 『종이는 나무의 유전자를 가지고 있다』, 이영식 『희망온도』, 김승강 『흑백다방』 등이 그 예이다. 이 시집들은 실험적이고 자기 파괴적인 시가 대세를 이루는 가운데에서도, 사회적인 관심에서 눈을 돌리지 않고 공동체 속에서의 개인의 삶에 주목한다는 특징이 있다.

박후기의 시는 젊은 시인다운 약간의 낭만성과 사회적 관심이 결합되어 있다. 그의 시의 바탕을 이루는 것은 가족사를 중심으로 한 경험에서 오는 비극성이다. 수사와 장식이 없는 그의 시는 시적 진실이 개인적 진실과 다르지 않은, 불행하지만 행복한 경험에 뿌리를 두고 있다. 사회적인 관심은 이러한 경험에서 오는 자연스럽고 당연한 귀결인 것으로 보인다. 이영식의 시는 어느 샌가 잊혀져버린 ‘노동’과 소외된 사람들의 삶을 소재로 하고 있다. 인력시장에 나온 날품팔이 인부들, 청량리에서 몸을 파는 아가씨에서부터 죽음만을 남겨놓은 노인들까지, 모두가 쓸쓸하고 가난한 사람들이다. 그들을 바라보는 시선은 따뜻하지만 감정이 과다 노출되지 않아서 균형을 이루고 있다. 김승강의 시는 당당하고 거침이 없는 것이 특징이다. 일상의 흔한 대상이나 사건을 소재로 하는 그의 시는 잘 조탁되어 있거나 세련되지는 않지만, 거침이 없는 만큼 힘이 있다. 절정과 쇠락, 죽음을 보는 시선 역시 슬픔이나 허무와는 거리가 멀다.

이들의 시는 요설과 현란한 수사, 엽기와 이미지의 과잉에 지친 현재의 시단에, 신선한 충격을 줄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최근 젊은 시인들의 시는 소통되지 않는 언어, 환상의 나열, 뒤틀리고 파괴된 서사의 남발로 가득 차 있다. 이러한 특징들은 반복 재생산되면서 엇비슷한 시들을 양산해내고 있다. 이제 막 새롭게 등장하는 시인들이 하나의 경향에 쏠려 있는 것은 걱정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자신의 길을 묵묵히 가고 있는 젊은 시인들은 그래서 더욱 소중한 존재들이다. 그들의 시가 시단에 균형을 가져다 줄 것을 기대한다. 《문장 웹진/ 200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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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0-07-30
시 쓰고 자빠졌네

시 쓰고 자빠졌네. 이런 말 자주 들었다. 누군가에게 자주 두들겨 맞았고, 누군가에게 가끔 린치를 가하던 시절이었다. 이웃 여고 문예부 아이들이 어쩐지 예쁠 거 같아서 문예부실을 전전했다. 그리고 백일장에 나가곤 했다. 물론 남달리 예쁜 아이는 없었지만, 어쨌든 17세 남녀가 교복을 입은 채로 노래방에서 듀스나 룰라, 혹은 투투의 노래를 함께 부르는 모습은 남달리 아름다웠다. 되도록 빨리 노래방으로 가기 위해서 우리는 사바사바, 시를 썼다. 빨리 써야 했다. 시는 최초의 노래였으므로. 엉덩이를 두드리듯, 천사를 찾아. 발라드를 부르며 감정 과잉에 빠지는 철수에게 영희는 이렇게 말한다. 시 쓰냐? 그때 우리는 원고지를 눕히던 누런 잔디에서, 어두운 노래방에서, 혹은 밀도가 높은 교실에서 어떤 감정 속에 놓여 있었을까. 난 누군지 또 여기는 어딘지 아무도 알려 주지 않았기에 우리는 분노에 가득 차 교복을 줄이고 담배를 숨기고 몰래 술을 마시기도 했다. 수채화 대신에 야간 자율 학습 감독을 주로 하던 미술 선생은 또 말했다. 또, 또 시 쓰냐? 시화전 제출 작품에서 피 흘리는 고등어를 그려 놓고 ?어느 고딩의 죽음?이라 제목을 붙이며 나는 전위를 담당한 듯 당당했다. 부끄러움이 없는 남자였다. 미술 선생에게 욕을 먹을 때에도, 맞을 때에도 나는 부끄러움을 몰랐다. 대한민국 학교 다 족구하라 그래. 시 쓰고 자빠졌다, 정말. 정말이란 말에 대해 오래 생각해 본다. 오래 생각하는 버릇은 이 시대에 어울리지 않는다. 최대한 짧고 단순하게 사고한 것으로 보이는 일들이 생각보다 빠르고 무식하게 벌어지고 있다. 정말? 시집을 묶어내던 중에 바위에서 사람이 떨어져 죽었다. 그 부엉이는 정말 새였을까. 도심에서 사람이 불에 타 죽었다. 그 망루는 정말 구름이었을까. 모두 정말이냐고 정색하며 물어 볼 만한 일들이었다. 분노가 치민다. 지금 나와 싸우자는 건가? 그런데 싸우는 법을 배운 적이 없다. 아니다. 싸움은 끝났다고, 이제 싸움이 아닌 경쟁의 시대라고 배웠다. 나는 그저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잘 모르겠어서, 화가 났다. 사실 싸움보다 훨씬 경쟁이 무서웠다. 사건은 이미지가 되는 순간 거짓말이 된다. 이 모든 게 차라리 멋진 거짓말이었으면 좋겠지만, 이것은 너무나 끔찍한 거짓말. 난삽한 이미지. 이미지가 아닌 이미지. 그러므로 차라리 보이는 게 진실이라고 믿어 본다. 이 지긋지긋하고 끔찍한 진실이 시의 배후가 되어 시에 맘껏 개입해도 나는 좋다. 시가 그렇게 하지 못하겠다면 기꺼이 네가 그렇게 하라. 가져간 나의 반쪽! 때문인가. 이제 둘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그래, 리얼리스트 되자. 모던한 리얼리스트가 되자. 모더니스트가 되자. 리얼한 모더니스트가 되자. 장난하느냐고? 그렇다면, 불길한 장나니스트라고 해 두지 뭐. 꼴에 시랍시고 자빠졌네. 이런 말 자주 들었다. 하지만 누가 뭐래도 나는 시가 좋다. 그리고 시가 밉다. 사랑하고 미워하며 안절부절못하고 있다. 처음 증상을 보일 때는 이렇게 데뷔를 하고 시를 쓰리라 짐작하지 못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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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0-07-15
일본 소설, 한국 시

일본 소설, 한국 시 한성례 한국에서 일본소설의 베스트셀러 현상 한류바람이 뜨겁게 일본 열도를 달구기 시작한 2000년 이후부터 한국에서 일본소설은 폭발적인 인기를 구가해왔다. 일본보다 한국에서 더 인기가 많은 작가가 나올 정도로 한국은 일본소설 홍수 시대이다. 이 같은 현상에 대해 일본인들은 물론이고 일본소설가들조차도 왜 일본소설이 한국에서 그렇게나 많이 팔리는지 몹시 궁금해 한다. 이에 대한 일본 신문의 인터뷰나 원고의뢰가 있을 적마다 나는 현재 한국에서의 한국시에 비유해서 설명을 한다. 이전에도 한국에서 일본소설은 종종 많이 팔렸다. 70년대 중반에 첫 출간된 무라카미 류(村上龍)의 『한없이 투명에 가까운 블루』는 해적판이 끊임없이 이어졌고 출판금지서임에도 안 읽은 사람이 없을 만큼, 문학이나 예술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의 필독서이고 바이블이었다. 1999년 정식으로 저작권 계약을 맺어 커버에 비닐을 씌워 19세 미만 구독불가로서 출간된 후에도 쇄를 거듭하며 읽히는 소설이다. 또한 1989년 원제인 『노르웨이의 숲』이 『상실의 시대』란 이름으로 출간된 무라카미 하루키(村上春樹)의 소설은 당시 크게 각광을 받았고 지금도 계속해서 읽힌다. 당시 한국은 민주화 쟁취와 맞물려 자의식이 집단에서 개인으로 향하던 시기였다. 민주주의가 아직 성숙하지 못한 상태여서 사회, 정치적으로 안정되지 못했고, 급변하는 사회적 환경 속에서 개인이 느끼는 소외감, 고독, 상실감 등이 당시 한국 젊은이들이 처한 현실과 겹쳐지면서 이 소설에 크게 공감했다. 더욱이 하루키의 가독성 높은 문장은 금방 젊은이들을 사로잡았다. 한편으로 문학의 구도자 같은 마루야마 겐지(丸山健二)의 소설도 여러 편 번역 소개되었는데, 이는 주로 문학 창작자들이 마니아였다. 하지만 일본소설의 인기는 단편적일 뿐 전반적인 경향은 아니었다. 오히려 서구소설이 중심을 이뤘다.그러던 것이 에쿠니 가오리, 요시모토 바나나, 쓰지 히토나리, 히라노 게이치로, 요시다 슈이치 등 젊은 작가와 미야베 미유키, 스즈키 코지, 히가시노 게이고 등의 미스터리 소설과 나오키 상을 비롯한 여러 문학상 수상작이 2000년 이후에 대거 한국에 번역 소개되었고, 대형서점에는 코너가 별도로 마련될 만큼 일본소설은 인기를 끌고 있다. 왜 일본 소설을 좋아하는 것일까 무엇보다도 일본소설은 재미있다. 독자를 의식하고 소설을 썼다는 게 금방 느껴진다. 말하자면 자신의 상품을 사줄 소비자의 위치에서 창작을 한다는 것이다. 젊은이들은 일본소설을 읽으면서 비현실적인 주인공을 통해 현실에서 실제로 행동에 옮기지 못하는 자신의 일탈을 꿈꾸고, 대리만족을 느낀다. 일본소설의 주인공 젊은이들은 특별한 목표도 없고, 무기력하며 수동적이고, 나약하기 짝이 없다. 그들은 시대의 흐름과 기존 질서에 따르지도 않고, 세상을 약간은 냉소적이고 관조적인 눈으로 바라보면서, 보편적인 부와 명예, 사회적인 안정 등과는 거리가 멀다. 이에 독특한 상상력과 가독성 높은 문장도 한 몫 한다. 최근 일본과 한국에서 밀리언셀러 판매 기록을 갱신하는 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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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0-0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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