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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위학력, 그 세 가지 이야기

  • 작성일 2007-09-28
  • 조회수 2,622

 

허위학력, 그 3가지 이야기




김종휘




신정아 씨의 허위 학력 사건. 요즘 이 이야기를 꺼내면 적잖은 사람들이 진저리를 치거나 짜증을 부린다. 그만 하자고 지겹다고. 어쩌면 신정아 씨 사건은 이렇게 막을 내렸어도 족했을지 모른다. 자기 통제력을 상실한 한 개인의 허망한 출세욕이 빚어낸 미술계 내부의 씁쓸한 해프닝쯤으로. 해서 우리 모두 얻을 교훈은 이런 것이어도 과한 것이겠다는 생각이 든다. 당신이 목말라한 그것이 너무나 매력적인 거짓의 유혹으로 다가와도, 그것을 취하는 일이 의외로 손쉽다 하더라도, 너와 나의 인격은 각자 그것을 감당할 수 있어야 한다는 차원의, 성직자나 윤리학 교수님이 들려 주실 법한 잔잔한 성찰의 손거울 정도로 우리 각자의 손에 쥐여졌다면 그나마 조금은 개운했을지 모를 일이다.  

하나 불행인지 다행인지 사건은 그렇게 단아하게 마무리되지를 못했다. 신정아 씨의 허위 학력 사건은 대학 사회의 교수직 임용을 둘러싼 온갖 추문의 한복판을 가볍게 관통했다. 나아가 종교계 커넥션의 꼬리와 연결되어 있다는 의혹이 불거졌다. 이제는 정치 스캔들로 방향을 바꾸어 끝 모를 가십성 기사를 양산하고 있다. 이런 뉴스를 더 듣고 싶지 않은 적잖은 이들에게 신정아 씨의 허위 학력 사건은 예술-대학-종교-정치계가 상호 자발적으로 결합한, 한마디로 ‘허위 사회’ 대한민국의 기념탑이 되어 날마다 우리의 일상을 파고 드는 자화상이 되어 가고 있다. 이런 기세면 훗날 아이들이 현대사 교과서에서 ‘2007 신정아 사건’을 외우고 시험 문제로 풀어야 하는 것은 당연지사지 싶다. 

이에 비하면 대중예술과 순수예술을 불문하고 범 문화예술계의 유명 인사들에게 잇따르고 있는, 금주의 주식 정보처럼 한 주도 거르지 않고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허위 학력을 둘러싼 눈물 어린 고백과 진정성 공방의 세트 플레이는 차라리 아기자기한 에피소드처럼 다가온다. 알다시피 에피소드의 당사자들은 그 분야의 ‘중견’이라 불리는 40대 이상의 연륜을 갖고 있고, 대중매체를 통해 얼굴을 널리 알려 ‘스타’의 유명세를 누려 왔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이들의 허위 학력에 대한 의혹의 초점은 신정아 씨 사건과 달리 단발성으로 여기저기로 흩어지며 명멸하는 경향을 보인다. 신정아 씨 사건의 학습 효과가 워낙 컸던 탓인지 또는 덕분에 관람하는 대중이 금세 질린 것인지는 구분 못하겠다. 

이들 에피소드의 화제는 이런 식이다. 문제의 당사자와 언론 방송은 ‘선빵 고백’과 ‘특종 고발’의 시간 차를 두고 입씨름을 하는 것 같고, 연예인처럼 ‘씹기 좋은’ 분야의 유명인들만 집중적으로 희생양을 삼고 있다는 하소연이나 동정론도 고개를 들고 있으며, 대학가의 순수 음악계로 파고 들면 엄청난 허위 학력이 드러날 것이라는 등의 공공연한 괴담도 나돌고 있다. 전문가들은 개인의 도덕성 측면과 사회 구조적 측면으로 나누어 갑론을박을 벌이고 있고, 경찰과 검찰은 대대적으로 허위 학력 여부를 조사한다고 바람을 잡고 있으며, 일부 대학에서는 자체 검증 시스템을 정비하겠다는 성명을 발표하고 있지만, 에피소드는 에피소드의 운명대로 철철 흘러 가고 있다.

해서 신정아 씨 사건과 범 문화예술계 중견 유명 인사들의 연이은 고백은 그 ‘격’과 ‘질’이 꽤나 달라 보인다. 전자는 만연했으나 여유만만했던 ‘허위 학력 사회’에 최초의 강력한 일격을 가한 ‘공로’가 있고 두고두고 파헤쳐야 할 ‘허위 사회’의 곳곳을 오늘도 들춰내는 ‘닫히기 힘든’ 블랙홀 기능을 하고 있다. 반면 후자는 주간지의 표지 인물처럼 한때 눈요기를 충족하면 폐기되는 짧은 유통 기한에 편승해 서로 단죄하고 속죄하며 면죄하는, 등장하는 얼굴과 이름만 다를 뿐, 똑같은 이야기의 반복적인 시청각 소비를 통해, ‘뭐 다 그렇지’ 하는 무감각의 마취제 효능만 더하는 것 같다.

허위 학력 또는 허위 자체에 친숙해진 이러한 풍경은 결국 두 가지를 말해 준다. 하나는 ‘공범 아닌 자 없으니 누가 돌을 던지랴?’ 하는 망연자실과 무기력. 다른 하나는 그럼에도 공식적 액션을 취해야 하니 난리법석을 떠는 데 뒤따르는 ‘꼴깝 떠네!’ 같은 더욱 강한 경멸과 무관심. 때문에 나는 신정아 씨가 모자를 푹 눌러 쓰고 총총걸음으로 공항을 빠져나가는 뒷모습을 남긴 채 미국으로 잠적한 것이 잘 된 일이라고 엉뚱한 생각을 한다. 그가 이 땅에 남아 속죄하거나 항변했다면 신정아 씨 사건도 에피소드로 끝났을 것이다. 그는 ‘허위 학력’의 대표 사례를 넘어 ‘허위 사회’ 대한민국의 아이콘이 되어 가고 있다. 


좀 다른 이야기를 하자. 허위 학력 파문이 오늘의 날씨 같은 뉴스가 되었을 무렵 조선일보에 2년제 방송대를 졸업한 연출가 이윤택 씨가 대학 교수가 되었다는 소식이 실렸다. 신문은 그가 “학벌은 내 오랜 콤플렉스였고 그것에 저항하기 위해 지식인을 조롱하는 연극을 하기도 했다”면서 “이제 예술가들이 능력만으로도 교수가 돼 현장과 대학이 좋은 의미의 화학반응을 일으켰으면 한다”고 말했다고 전했다. 나름대로 업적을 남겼고 유명세를 가지고 있는 중견의 문화예술인 중에서 학력-학연-학벌 콤플렉스를 느꼈을 이들에게 이윤택 씨의 사례는 작지만 신선한 대안이 될 수도 있을 것 같다.   

특히 대학들이 문화예술 관련 학과의 비즈니스 때문에 예술 창작의 현장에서 성장한 중견의 문화예술인들을 교수로 초빙할 때, 4년제 학부 졸업장이나 기존의 논문 형태를 따지는 것이 아니라, 이제껏 그런 격식을 차리느라 모두가 허위 학력의 늪에 빠져 허우적댔으니, 현장에서 쌓은 실력을 그대로 가지고 대학 교수로 올 수 있도록 초빙하는 새로운 기준과 문화가 확산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하나 이런 결정은 우선 대학 사회의 권한에 속한 것이고, 동시에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기회라기보다는 이윤택 씨처럼 연륜과 실력과 인지도를 두루 갖춘 예외적 인물에 한정된 것이라는 생각도 지울 수 없다.


아주 다른 이야기를 하자. 최근 중앙일보는 현대자동차가 고졸로 허위 서류를 꾸며 입사한 대졸 출신의 생산직 사원 5명의 취업을 취소했다고 전했다. “4년제 대학을 졸업한 김모(29)씨는 일자리를 얻으려고 2년간 기업체 수십 곳에 지원서를 냈지만 취업을 하지 못했다. 할인점, 건설공사 현장 임시직,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던 김씨는 올 초 현대자동차 고졸 생산직 채용시험에 합격했다”고 전한다. 사회의 중추를 장악한 40대 이상의 기성세대가 허위 학력 소동을 겪는 동안 대량 생산된 고학력 20대 젊은이들은 자신들을 대량 소비하지 않는 고실업 사회에서 전혀 다른 의미의 허위 학력에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이다.  

문화예술계로 시야를 좁혀도 세대 간에는 허위 학력에 대한 극명한 성격 차이가 가로놓여 있다. 딴따라 소리를 듣던 시절에 ‘학사 가수’를 선망의 대상으로 바라보다가 지금은 중견이 된 기성 문화예술인들과, 대학가요제 이후 고학력이 넘쳐난 시대에 급기야 서태지 이후에는 고졸 딴따라 스타를 대졸자보다 더한 존경의 눈길로 바라보는 젊은 문화예술인들, 그 사이에는 전혀 다른 의미의 허위 학력이 있다. 전자는 학벌 위주로 돌아가는 사회에서 그 학벌을 갖추지 못한 ‘개인의 허위’에 따른 고통이고, 후자는 그 학벌을 갖췄다 해도 이제는 해 줄 것이 바닥난 학벌주의 ‘사회의 허위’에 따른 고통이다.

대학원까지 졸업하고도 밤마다 대리운전을 겸하며 극단에서 무급에 가까운 배우로 사는 20대 젊은이들은 중견의 유명 문화예술인들이 겪는 허위 학력 파문이나 이윤택 씨 같은 예외적인 미담을 어찌 느낄지 모르겠다. 신간 『88만원 세대』의 공동 저자는 박정희 세대(4~50대)와 전두환 세대(386)가 지금의 20대 몫을 가로채고 높은 진입 장벽을 쌓아 20대의 생존을 위협하는 세대 간 착취를 벌이고 있다고 말하는데, 허위 학력 파문을 보면서도 같은 생각이 든다. 학력 하나면 모든 것을 성취했던 기성세대와 학력을 쌓고 쌓아도 성취할 것이 점점 없어지는 지금의 젊은 세대는 결코 같을 수가 없을 것이다.

해서 또 엉뚱한 생각을 한다. 2년제 방송대를 졸업한 이윤택 교수님에게, 이런 미담이 꼬리를 물어 고졸 출신의 교수님도 생긴다 치고, 그들 4~50대 교수님들에게 배울 4년제 대학의 20대 젊은이들에겐 과연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지 하는. 그들은 4년제 대학에서 그런 교수님을 만난 덕분에 제2의 이윤택이 되며 제2의 고졸 출신 교수가 될 수 있을지 하는. “현장과 대학이 좋은 의미의 화학반응”을 일으키려면 이윤택 씨가 대학 교수로 가지 말고 창작 현장을 지키면서 2년제 방송대의 20대 젊은이들을 포스트 이윤택으로 기르고, 그런 현장을 대학이 우러러봐야 되는 게 아닌가 하는…….《문장 웹진/2007년 10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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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쓰고 자빠졌네

시 쓰고 자빠졌네. 이런 말 자주 들었다. 누군가에게 자주 두들겨 맞았고, 누군가에게 가끔 린치를 가하던 시절이었다. 이웃 여고 문예부 아이들이 어쩐지 예쁠 거 같아서 문예부실을 전전했다. 그리고 백일장에 나가곤 했다. 물론 남달리 예쁜 아이는 없었지만, 어쨌든 17세 남녀가 교복을 입은 채로 노래방에서 듀스나 룰라, 혹은 투투의 노래를 함께 부르는 모습은 남달리 아름다웠다. 되도록 빨리 노래방으로 가기 위해서 우리는 사바사바, 시를 썼다. 빨리 써야 했다. 시는 최초의 노래였으므로. 엉덩이를 두드리듯, 천사를 찾아. 발라드를 부르며 감정 과잉에 빠지는 철수에게 영희는 이렇게 말한다. 시 쓰냐? 그때 우리는 원고지를 눕히던 누런 잔디에서, 어두운 노래방에서, 혹은 밀도가 높은 교실에서 어떤 감정 속에 놓여 있었을까. 난 누군지 또 여기는 어딘지 아무도 알려 주지 않았기에 우리는 분노에 가득 차 교복을 줄이고 담배를 숨기고 몰래 술을 마시기도 했다. 수채화 대신에 야간 자율 학습 감독을 주로 하던 미술 선생은 또 말했다. 또, 또 시 쓰냐? 시화전 제출 작품에서 피 흘리는 고등어를 그려 놓고 ?어느 고딩의 죽음?이라 제목을 붙이며 나는 전위를 담당한 듯 당당했다. 부끄러움이 없는 남자였다. 미술 선생에게 욕을 먹을 때에도, 맞을 때에도 나는 부끄러움을 몰랐다. 대한민국 학교 다 족구하라 그래. 시 쓰고 자빠졌다, 정말. 정말이란 말에 대해 오래 생각해 본다. 오래 생각하는 버릇은 이 시대에 어울리지 않는다. 최대한 짧고 단순하게 사고한 것으로 보이는 일들이 생각보다 빠르고 무식하게 벌어지고 있다. 정말? 시집을 묶어내던 중에 바위에서 사람이 떨어져 죽었다. 그 부엉이는 정말 새였을까. 도심에서 사람이 불에 타 죽었다. 그 망루는 정말 구름이었을까. 모두 정말이냐고 정색하며 물어 볼 만한 일들이었다. 분노가 치민다. 지금 나와 싸우자는 건가? 그런데 싸우는 법을 배운 적이 없다. 아니다. 싸움은 끝났다고, 이제 싸움이 아닌 경쟁의 시대라고 배웠다. 나는 그저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잘 모르겠어서, 화가 났다. 사실 싸움보다 훨씬 경쟁이 무서웠다. 사건은 이미지가 되는 순간 거짓말이 된다. 이 모든 게 차라리 멋진 거짓말이었으면 좋겠지만, 이것은 너무나 끔찍한 거짓말. 난삽한 이미지. 이미지가 아닌 이미지. 그러므로 차라리 보이는 게 진실이라고 믿어 본다. 이 지긋지긋하고 끔찍한 진실이 시의 배후가 되어 시에 맘껏 개입해도 나는 좋다. 시가 그렇게 하지 못하겠다면 기꺼이 네가 그렇게 하라. 가져간 나의 반쪽! 때문인가. 이제 둘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그래, 리얼리스트 되자. 모던한 리얼리스트가 되자. 모더니스트가 되자. 리얼한 모더니스트가 되자. 장난하느냐고? 그렇다면, 불길한 장나니스트라고 해 두지 뭐. 꼴에 시랍시고 자빠졌네. 이런 말 자주 들었다. 하지만 누가 뭐래도 나는 시가 좋다. 그리고 시가 밉다. 사랑하고 미워하며 안절부절못하고 있다. 처음 증상을 보일 때는 이렇게 데뷔를 하고 시를 쓰리라 짐작하지 못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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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0-07-15
일본 소설, 한국 시

일본 소설, 한국 시 한성례 한국에서 일본소설의 베스트셀러 현상 한류바람이 뜨겁게 일본 열도를 달구기 시작한 2000년 이후부터 한국에서 일본소설은 폭발적인 인기를 구가해왔다. 일본보다 한국에서 더 인기가 많은 작가가 나올 정도로 한국은 일본소설 홍수 시대이다. 이 같은 현상에 대해 일본인들은 물론이고 일본소설가들조차도 왜 일본소설이 한국에서 그렇게나 많이 팔리는지 몹시 궁금해 한다. 이에 대한 일본 신문의 인터뷰나 원고의뢰가 있을 적마다 나는 현재 한국에서의 한국시에 비유해서 설명을 한다. 이전에도 한국에서 일본소설은 종종 많이 팔렸다. 70년대 중반에 첫 출간된 무라카미 류(村上龍)의 『한없이 투명에 가까운 블루』는 해적판이 끊임없이 이어졌고 출판금지서임에도 안 읽은 사람이 없을 만큼, 문학이나 예술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의 필독서이고 바이블이었다. 1999년 정식으로 저작권 계약을 맺어 커버에 비닐을 씌워 19세 미만 구독불가로서 출간된 후에도 쇄를 거듭하며 읽히는 소설이다. 또한 1989년 원제인 『노르웨이의 숲』이 『상실의 시대』란 이름으로 출간된 무라카미 하루키(村上春樹)의 소설은 당시 크게 각광을 받았고 지금도 계속해서 읽힌다. 당시 한국은 민주화 쟁취와 맞물려 자의식이 집단에서 개인으로 향하던 시기였다. 민주주의가 아직 성숙하지 못한 상태여서 사회, 정치적으로 안정되지 못했고, 급변하는 사회적 환경 속에서 개인이 느끼는 소외감, 고독, 상실감 등이 당시 한국 젊은이들이 처한 현실과 겹쳐지면서 이 소설에 크게 공감했다. 더욱이 하루키의 가독성 높은 문장은 금방 젊은이들을 사로잡았다. 한편으로 문학의 구도자 같은 마루야마 겐지(丸山健二)의 소설도 여러 편 번역 소개되었는데, 이는 주로 문학 창작자들이 마니아였다. 하지만 일본소설의 인기는 단편적일 뿐 전반적인 경향은 아니었다. 오히려 서구소설이 중심을 이뤘다.그러던 것이 에쿠니 가오리, 요시모토 바나나, 쓰지 히토나리, 히라노 게이치로, 요시다 슈이치 등 젊은 작가와 미야베 미유키, 스즈키 코지, 히가시노 게이고 등의 미스터리 소설과 나오키 상을 비롯한 여러 문학상 수상작이 2000년 이후에 대거 한국에 번역 소개되었고, 대형서점에는 코너가 별도로 마련될 만큼 일본소설은 인기를 끌고 있다. 왜 일본 소설을 좋아하는 것일까 무엇보다도 일본소설은 재미있다. 독자를 의식하고 소설을 썼다는 게 금방 느껴진다. 말하자면 자신의 상품을 사줄 소비자의 위치에서 창작을 한다는 것이다. 젊은이들은 일본소설을 읽으면서 비현실적인 주인공을 통해 현실에서 실제로 행동에 옮기지 못하는 자신의 일탈을 꿈꾸고, 대리만족을 느낀다. 일본소설의 주인공 젊은이들은 특별한 목표도 없고, 무기력하며 수동적이고, 나약하기 짝이 없다. 그들은 시대의 흐름과 기존 질서에 따르지도 않고, 세상을 약간은 냉소적이고 관조적인 눈으로 바라보면서, 보편적인 부와 명예, 사회적인 안정 등과는 거리가 멀다. 이에 독특한 상상력과 가독성 높은 문장도 한 몫 한다. 최근 일본과 한국에서 밀리언셀러 판매 기록을 갱신하는 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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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0-0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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