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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앵희랑~ 콕길희랑~

  • 작성일 2008-08-29
  • 조회수 2,960

 

홀앵희랑~ 콕길희랑~




김이은




벌써 일 년이 훌쩍 넘은 일이군요. 이른 저녁을 먹고 소파에 흐늘어져 누워서는 뉴스데스크를 보고 난 뒤, ‘올 들어 첫 번째 폭염 주의보가 발효되었습니다. 어린이와 노약자는 가급적 외출을 삼가는 게 좋겠습니다.’라는 일기 예보를 까딱까딱 졸면서 듣는 둥 마는 둥 하고 있는데 휴대폰 문자 메시지가 떴습니다.

‘홀앵희랑 콕길희랑 보러 가자. ^^;’

 

 

친구가 보낸 문자 메시지에는 다짜고짜, 덜렁, 이 한 줄만 찍혀 있었더랬습니다. 앵희랑 길희? 나는 내가 모르는 누군가를 만나는 자리에 나더러 나오라는 줄로만 생각하다가 아차! 무릎을 탁, 쳤지요. 한국을 떠날 날을 얼마 남기지 않은 친구 박형서에게 그 며칠 전 “가기 전에 하고 싶은 거 없어?”라고 물은 기억이 났습니다. 그리고 그 친구가 보낸 답인 즉, 홀앵희랑 콕길희를 세 번이나 입으로 소리 내서 읽은 다음에야, 내가 친구의 재치 있는 표현을 단박에 이해하지 못했단 걸 알았으니, 바로 호랑이, 코끼리란 걸 깨닫고는, 동물원에 가잔 말이란 걸 알아챈 것이지요. 이 땅을 뜨기 전에 꼭 하고 싶은 일이 동물원에 가는 거란 말이지? 큭큭 웃음이 나기도 했고, 박형서답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친구는 작년 가을 학기부터 일 년 동안 중국의 주하이 대학 한국어과의 강사로 일하기로 되어 있어서 곧 한국을 떠날 예정이었거든요. 언젠가 내가 “거긴 왜 가?”라고 묻자, 박형서가 하는 말,

“이은아, 잘 들어봐. 내가 지금 아주 재밌는 장편소설을 구상하고 있거든. 그 주 무대가 태국이야. 지난봄에 태국에 세 달 동안 있다 온 건 알지?”

“알지. 온다 간다 말도 없이 사라졌잖아. 한참이나 지나서 메일 한 통 보냈었구. ‘여기 태국이야. 칸차나부리라고 석양이 정말 죽이는 데야. 너 와라.’ 이랬잖아.”

“그래. 너 거기 석양 보면 진짜 죽는다. 칸차나부리 언덕에서 맥주 한 병 마시면서 석양을 보고 있으면 만사가 다 오케이지. 그런데…….”

그러고는 또 혼자 한참을 깊은 생각에 빠져 있더니, “거기 가서 소설을 쓰고 싶었거든. 하지만 너도 알다시피 내가 무일푼이잖냐. 그런데 주하이에서 태국은 지척이고 비용도 거의 안 들거든. 월급 받으면서 소설도 쓸 수 있는 거지. 너 같으면 안 가겠냐?” 이랬습니다. 나 같아도 가지요. 아닙니다. 나 같으면 아무리 석양이 죽인대도 그 먼 곳에 가서 창녀촌을 헤집고 다니면서 소설을 쓸 엄두를 내지 못했겠지요. 그치만 박형서는 나와는 아주 다른 종류의 사람이니까요. 어디서 저런 용기가 나는 걸까, 싶게 그는 늘 내키면 떠나고 오고 싶으면 다시 돌아오고……, 그야말로 동에 번쩍, 서에 번쩍해서 그의 상상 공간은 무제한이거든요. 그의 소설이 늘 매혹적이고 생기 넘치고 재치 있는 까닭 중 하나가 그런 거겠구나, 싶었지요.

아무튼 그렇게 해서 나와 박형서는 한여름에, 남들 다 바닷가로 계곡으로 떠나는 때에 즈음해서, 동물원에 가게 되었습니다. 오랜만에 동물원 가는 길이라 그런지 나 또한 마음이 한없이 넓어지고 즐거워지더군요. 하지만, 정말 더웠지요. 아니나 다를까. 그야말로 땡볕이 쏟아지는 과천의 동물원은 조용하고 한산했습니다. 폭염을 피해 일부 동물들은 실내에 들어가 있었구요. 우리는 아이스바를 쭉쭉 빨면서 기린이랑 사슴이랑 표범을 보면서, 마치 모든 것에서 놓여난  듯한 기분이 되었습니다. 동물원을 그렇게 꼼꼼히 둘러본 건 내 나이 십삼 세 이후로 처음이었더랬습니다. 이상하더군요. 나로서는 동물원에 간 것도 아주 오랜만의 일이지만, 동물원에 가서 자유를 느낀 건 생전 처음 겪은 감정이었으니까요. 새삼 친구의 옆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습니다. 친구는 맑은 표정으로 미소 짓고 있었지요. 친구를 보고 있자니, 뭐랄까, 내 마음 안의 공간이 넓어지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끝간데없이 확장되고 있는 내 안의 넓이가 느껴지니까 힘이 불끈 나면서 내 얼굴에도 감출 수 없는 미소가 번지더군요. 박형서의 힘! 그렇게밖에는 설명할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홀앵희!’ 저는 호랑이 우리 앞에서 그렇게 꾸밈없는 표정을 지을 수 있는 어른은 처음 보았더랬지요. 야생성과 힘, 그리고 에너지 등등 호랑이에게서 느낄 수 있는 모든 것들을 온전히 느끼고, 고스란히 받아들이는 표정이었습니다. ‘콕길희’ 또한 내 친구에게 더없는 감동을 주는 듯 보였습니다. 사람들 사는 세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허울과 가식이 걷힌 표정으로 푹 빠져 있었으니까요. 말하자면, 박형서는 그 순간 어떤 울타리를 훌쩍 뛰어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자연의 원시성에 대한 근원적인 그리움이 누구보다 더했던 건지도 모를 일이지요. 박형서가 이곳을 떠나고 난 뒤, 슬픈 일이 있거나 힘이 들 때면 가끔 코끼리랑 호랑이를 바라보던 박형서의 표정이 떠올랐습니다. 저절로 웃게 되더라구요.

그리고 얼마 전, 박형서가 돌아왔습니다. 일 년 만에 만나 맥주 한 잔 하면서 박형서의 모험담을 재미나게 들었지요. 월 육십만 원의 월급을 받으면서 지냈던 주하이는 박형서에게 꽤나 인상적이었던 모양입니다. 꼭 한 번 같이 가보면 좋겠다는 말끝에 이러더군요. 볼에는 발그레 홍조가 떠올랐구요.

“주하이에서 진짜 이쁜 여잘 만났어. 학생이었는데, 나 그 애랑 결혼하고 싶어.”

이건 또 무슨 ‘선언’인가 놀라서 물었더니, 박형서 왈,

“진짜야. 정말 이뻐. 그 애 생각만 하면 숨도 못 쉴 지경이라니까.”

친구는 정말 사랑에 빠진 표정이었지요. 박형서를 만난 지 오 년째. 나는 박형서가 그렇게 진지한 표정으로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말을 한 적 있었던가, 문득 기억을 되짚어 보았습니다. 잘 떠오르지 않더군요. 그래서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데리고 와. 결혼해. 여기가 낯설 테니까, 내가 언니 노릇 해줄게.”

용기가 나는 듯한 친구의 표정을 보고 있자니, 나도 뭔가 친구에게 줄 수 있는 게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내가 더 기쁘더군요. 

그로부터 며칠 후, 그는 다시 떠났습니다. 역시나 온다 간다 말 한마디 없었습니다. 어제야 메일이 한 통 왔구요.

‘여기는 칸차나부리야. 내 컴퓨터가 벼락을 맞아서 지금 방콕의 서비스 센터에 안치되어 있어. 그래서 요새는 그냥 놀고 있지. 아마 일주일은 더 놀아야 될 거야. 오늘은 아는 사람 레몬 농장에 가서 죽도록 일하고 왔어. 뭐 그렇게 살아. 여기 와서 오토바이 새 걸로 하나 장만했고, 열심히 타고 다니지만 아직 사고는 안 냈어. 심심하긴 하지만 뭐 어디 있든 심심한 건 마찬가지고, 곧 본격적으로 소설의 전개부로 넘어가면 심심함을 느낄 정신도 없겠지. 그리고 여기 칸차나부리의 하늘은, 정말 예뻐. 특히 선셋. 너에게 보여 주고 싶지만 사진을 찍어도 제대로 나오지가 않네. 이은아, 원래 진정한 남자는 온다 간다 말없이 무작정 흘러가는 법이지. 으허허;;

난 지금 여기서 가장 싼 집을 하나 구해서 집 정리도 하고 소설 쓸 생각도 하면서 아주 잘 지내고 있어. 너도 잘 지냈으면 좋겠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나 정도만.’

박형서가 어떤 인물인지 한눈에 알 수 있는 내용이었지요. 내 입가에 따뜻한 웃음이 번지더군요. 엉뚱하고, 생기 넘치고, 자유롭고, 괴팍하고, 지혜로운 내 친구는 내게도 힘을 줍니다. 그의 소설과 똑 닮아 있는 모습이지요. 그는 지금 쓰고 있는 ‘대작’을 마친 후에 그야말로 ‘초’ 대작을 쓸 생각이랍니다. 지구의 근원적인 탄생과 인간의 모습을 다룰 세 권 분량의 SF 소설이라는데 그의 말에 따르면 그 소설이 나오자마자 세상이 발칵 뒤집힐 거라 합니다. 기대됩니다. 내 친구는 늘 새로운 기대를 하게 만드니까요.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내 친구처럼 삶을 향유할 수 있다면 좋을 겁니다. 언젠가 꼭 한 번 칸차나부리의 석양을 보고 싶네요.《문장 웹진/2008년 9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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