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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의 몸을 말하는, 21세기형 사회소설

  • 작성일 2011-11-28
  • 조회수 1,259

 

[기획특집]

시와 소설로 보는 2011년 명장면

 

 

여성의 몸을 말하는, 21세기형 사회소설

─ 김이설, 『환영』(자음과모음, 2011)

 

소영현

 

 

 

 

  지되지 않을 정도의 속도로 이루어진 일이지만, 여성의 지위는 점차 높아져 왔다. 시민으로서의 권리인 투표권을 얻게 되었고 허드렛일로 치부되었던 집안일을 노동으로 인정받게도 되었다. 가부장제 전체를 부인할 수는 없다 해도 호주제의 폐지로 아내이자 어미가 한 가정의 주인일 수 있는 권리도 법적으로 보장받게 되었다. 긴 호흡에서 보자면 여성의 삶은 점차 내실을 갖춰 왔다고 해야 한다. 그러나 과연 그러한가. 앞으로 더 나아질 수 있다고 확신할 수 있는가.

  남편을 잃고 아이와 함께 야반도주를 하고 나면 생계를 도모할 능력이 없는 여자는 이후의 삶을 어떻게 꾸려 갈 수 있을까. 그녀들에게 삶이란 가능한 것일까. 역사에서 노숙하는 모녀의 삶을 들여다보았던 등단작인 「열세 살」(《서울신문》, 2006)에서 최근작인 『환영』(2011)에 이르기까지 작가 김이설이 반복해서 던지는 질문 가운데 하나가 이것이다. 과연 그녀들의 삶은 나아졌는가, 아니 나아질 수 있는가. 『환영』은 원하지 않는 임신을 하고 혹이 되어버린 아이를 낳고 내다버리고 싶은 가족들을 건사하기 위해 다리를 벌릴 수밖에 없는 여성들의 삶을 들여다본다. 작가는 화려한 소비사회의 이면에서 몸을 밑천으로 살아야 하는 여성들의 내몰린 삶이 형식과 내용에서 유사 이래 조금도 바뀌지 않았음에 주목한다.

  식민지 시기까지 거슬러 올라가지 않는다 해도 한국문학은 아이를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내던진 많은 어미들을 만나 왔다. 박완서의 ‘억척’ 어미들이 아이들의 신분상승을 위해 세상과 타협하고 속물이 되는 일을 서슴지 않았음을 알고 있다. 전쟁이 파괴한 가정을 지키기 위해 아이를 혼자 키우며 생계에 허덕여야 했던 어미들이 ‘어미다운’ 어미가 되기 위해 ‘도둑질하는 엄마, 구걸하는 엄마, 몸 파는 엄마’가 되어야 하기도 했다. 전쟁의 상흔이 물질적 풍요에 의해 흔적 없이 휘발되어 버린 후에 과연 그녀들의 삶도 그만큼 나아졌다고 단언할 수 있는가. 근대화 바람을 타고 도시화가 급물살을 타던 1970년대는 어떠했는가. 무너져 내리는 농촌사회에서 유일한 희망인 장남을 위해 도시빈민으로 유입되어 가정부, 여공, 차장이 되어야 했던 딸들의 수난사를 떠올려 보아도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다. 몸을 거미처럼 파 먹혀야 하는 어미의 운명이 고스란히 딸에게로 전가되고 있었다.

  그러니까 김이설의 『환영』이 그간 한국문학이 돌보지 않았던 현실의 일면을 새롭게 발견한 것은 분명 아니다. 하류계층 여성이 자본의 이중적 착취 구조에 무방비로 노출되어 있다는 사실이 새삼스럽지도 않다. 여성의 몸을 둘러싼 상상력이 예기치 못했던 지점에까지 가닿은 것도 아니다. 차라리 『환영』이 환기하는 바는 몸을 팔아 가정을 지키고 아이를 지킬 수밖에 없는 어미들의 삶이 지금 이곳에서도 구원이나 출구 없이 여전히 반복되고 있다는 사실 자체다. 따지자면 각오를 다져야 하는 굳은 결심 끝에 어미의 구걸이나 매춘이 시작되는 것도 아니다. 가령, 배운 것 없이 기술도 없는 애 딸린 여자인 ‘윤영’이 “죽을 게 아니라면 살아야 했”“살 것이라면 제대로 살아야 했”(155쪽)으며, “제대로 살 수 있다면, 사람처럼 살 수만 있다면야”(159쪽) 도둑질이든 구걸이든 뭐든 해야만 했던 사정에는 참혹함 말고 더 보탤 말이 없다. 엄마와 다르게 살기를 다짐하지만 ‘윤영’이 평생 몸을 팔아 남편과 아이를 건사하는 운명의 굴레에서 벗어날 가능성은 많지 않아 보인다. 그렇다고 누구보다 총명했으며 사람들의 기대처럼 잘 자랐던 ‘민영’의 경우라고 사정이 달라지지는 않는다. 가족을 구원하고자 하는 각고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결국 그녀조차 가족이 뿔뿔이 흩어진 채 고시원을 전전하게 했고 신용불량자로 만들었으며 급기야 스스로 빚에 겨워 몸을 팔다 죽음을 맞이하는 운명 외에 다른 길을 발견하지 못했다. 그녀들의 사연을 겹쳐 놓고 보면 사회의 빈곤층 여성이 겪어야 하는 비극적 운명의 강고함에 새삼 절망하게 된다. 그들의 운명은 개인의 죽음을 담보한 노력으로도 쉽게 극복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러니 돈도 없는 주제에 아프기까지 한 아버지를 인정사정없이 구박했던 엄마와 아픈 아이와 다친 남편을 두고 다시 몸을 팔아야 할 처지에 놓인 딸이 옥탑방에 나란히 눕는다 해도 나눠야 할 말보다 참아야 할 말들이 더 많게 된다. “애가 어쩌다가 이렇게 되었냐”는 엄마의 질문에도 ‘같이 살기 시작했던 아저씨와는 어쩌다 결별하게 되었느냐’의 딸의 질문에도 서로 나눌 수 있는 게 침묵밖에 없다. ‘얘기하자면 긴’, ‘하지 말아야 할 말들’의 침묵 속에는 돌이킬 수도 극복할 수도 없는 그녀들의 비극적 운명이 똬리를 틀고 있는 것이다.

  물론 『환영』이 몸 파는 어미들의 비극적 삶에 대한 보고에만 머물러 있는 것은 아니다. 연민과 동정 없는 김이설의 냉정한 서술은 무능한 남편들과 기생하는 남성들에게 퍼부어지는 그녀들의 폭력적인 감정분출을 통해 뒤틀린 모성-가부장의 기이한 면모를 잡아챈다. 어미이기 이전에 여자임을 강변함으로써 모성의 신성성에 균열을 일으킨 바 있는 공선옥의 어미들과는 다른 방식으로, 밥상을 뒤엎고 물건을 부수면서 원망의 주먹질과 화풀이를 반복하는 어미들을 통해 김이설은 내면화된 가부장제 이데올로기와 강요된 모성의 부조리를 만천하에 까발리고 있다고 해도 좋다. 말하자면 여성의 몸을 훼손시키는 근저에 놓인 힘이 임신과 출산 그리고 양육을 자연의 섭리이자 거부할 수 없는 숙명으로 받아들이게 하는 바로 그 이데올로기임을 폭로한다.

  무엇보다 『환영』은 가부장제 이데올로기와 자본주의의 뗄 수 없는 결합지점에 시선을 둔다. 몸 파는 어미들의 비극이 병든 아버지와 무능한 남편에서 연원한 것만은 아님을, 자본주의 사회가 내장하고 있는 보다 근원적 모순에서 연원한 것임을 말한다. 1970년대에 도시빈민이 되어 가정부에서 여차장으로 창녀로 전전했던 ‘영자들’의 몸이 그러했듯이, 자살한 백숙집 ‘사모님’이 젖도 떼지 않은 채 몸을 팔아야 했던 것이 오래 기다리다 얻은 아들이나 왕사장의 탓만은 아니듯이, 『환영』에 등장하는 빈곤층 여성의 몸은 보다 근본적인 차원에서 자본의 논리 자체에 의해 착취되고 있다고 해야 한다.

  『환영』은 몸 파는 어미들에 대한 동정을 거둔 자리에서, 그녀들의 몸이 가족 단위로 구조화되어 있는 이 사회의 시스템을 유지하기 위한 연료로 소모되고 있음을 말한다. 이렇게 본다면, 돈이 없고는 인간다운 삶은커녕 생존조차 불가능한 세상에서 분출되는 그녀들의 제어할 수 없는 폭력적 감정이야말로 가부장제 이데올로기의 부조리이자 임계치에 다다른 시스템의 부조리의 현현이 아닐 수 없다. 요컨대, 김이설의 『환영』은 모성이라는 불편한 신성을 건드리면서 이 사회 모순의 핵으로 파고들어 소비사회 이면에 은폐되어 있는 자본의 논리에 깊은 성찰을 요청한 21세기형 사회소설의 한 가능성이다.

 

《문장웹진 12월호》

 

 

소영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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