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긍정과 부정 사이, 파국적 삶

  • 작성일 2012-07-27
  • 조회수 1,806

 

고봉준의 젊은작가 인터뷰

 

 

긍정과 부정 사이, 파국적 삶

- 김이설 작가 인터뷰

 

고봉준

 

 

 

 

 

   현대의 소설은 도덕적 가치를 지향하지 않는다. 아니, 오늘날의 한국 문학은 당위적인 결론, 균열된 현실을 봉합하려는 도덕이라는 이데올로기보다는 ‘파국’으로 치닫는, 출구 없는 삶의 실재에 더 많은 시선을 던진다. 애써 외면하고 싶은 삶의 가파른 벼랑들을 독자들의 눈앞에 들이미는 이러한 소설적 악취미는 이제 하나의 경향으로 확고하게 자리를 잡았다. 그리하여 이러한 파국적 실재를 대면할 때마다 우리는 ‘이것도 삶인가?’라는 낮은 탄성을 내지르거나, 평온한 일상의 이면에 은폐되어 있는 비이성적?비상식적인 날것 그대로의 삶을 목격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것이 소설의 윤리임을 강조하려는 몇몇 작가들이 있다. 김이설은 바로 그런 작가의 한 사람이다. 물론 이러한 소설적 악취미가 그 자체로 훌륭한 문학적 성과라고 단정 지을 수는 없다. 최근에 읽은 평론집에 등장하는 인상적인 구절을 인용해서 말하자면 “사회적 약자가 당하는 모욕과 핍박의 장면을 반복적으로 상연하는 데서 건전한 형태의 민주적 정치주체가 생성된다고 말하기는 어렵”(황종연)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다시 그 평론집의 일부를 인용해서 말하면 이 시대가 소설가들에게 요구하는 것은 “나르시시즘적인 자기 확인 욕망에 빠진 정체성들을 대변하는 것이 아니라 개인들에게 일어나는 정체성 횡단의 경험 속에서 어떤 탈중심적인 사회적 관계에 대한 은유를 발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이러한 경향의 소설이 우리에게 제시하는 파국적인 삶, 또는 출구 없는 몰락의 서사가 우리 시대의 삶을 징후적인 방식으로 드러냄으로써 불안에 무방비로 노출된 일상의 조건을 양각한다는 사실을 부정하기는 어렵다.

   김이설은 꽤 부지런한 작가다. 2006년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단편 「열세 살」로 등단한 이후 경장편 『나쁜 피』(2009), 소설집 『아무도 말하지 않는 것들』(2010), 장편소설 『환영』(2011)까지 2009년 이후 매년 한 권의 책을 출간하고 있으니. 이 엄청난 생산력의 기원을 알 수는 없으나, 창작과 일상을 병행하면서도 문학적 긴장력을 놓치지 않는 그녀의 성실성이 시간과의 고투에서 비롯되었음은 쉽게 상상할 수 있다. 일상에 쫓기면서, 잠과 원고를 바꿔 가면서 그녀가 말하고 싶었던 것은 무엇일까? 김이설의 소설은 피투성이 삶에 관한 보고서다. 물론 그녀의 소설에 ‘피’가 중요한 소재로 등장하지는 않는다. 그렇지만 ‘피’가 등장하지 않는다고 안심할 수는 없다. 오히려 ‘피’ 없는 삶의 극단적인 파국이 더 끔찍하고 처절하게 다가오기 때문이다. 진짜 공포는 ‘피’라는 클리셰를 동반하지 않는 백색의 공포가 아닐까. 추측컨대 그녀의 소설이 우리에게 펼쳐 보이는 끔찍한 현실이란, 다소 극단적인 방식으로 표현되었다고는 할지라도, 그녀 자신이 감지하고 있는 현실의 추상일 것이다. 지난 6월 23일 서울국제도서전 ‘저자와의 대화’에 참석하기 위해 상경한 그녀를 홍대 근처의 한 카페에서 만났다. 이 감각의 정체를 확인하기 위해서.

 



   고봉준 : 등단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고 들었습니다. 등단 전후의 과정에 대해 들려주세요.

 

   김이설 : 제가 처음 소설을 쓴 건 스무 살 때였어요. 문예창작과를 다니지는 않았지만 소설을 쓰고 싶은 마음이 있었어요. 그때는 잘 몰랐으니까, ‘신춘문예라는 게 있다더라’ 해서 응모를 했던 게 스무 살이었던 거죠. 그때부터 시작해서 당선까지 십 년이 걸렸어요. 물론 십 년 내내 소설만 생각하거나 소설만 쓰지는 않았겠죠. 매년 응모하고 매년 떨어졌어요. 처음에는 발표를 기다리기도 하고 떨어지면 실망을 하기도 했는데, 어느 순간부터는 낙선에 길들여졌어요. 그래서 원고를 보내고 나면 그걸로 끝인 거예요. 보내고 나서는 다음 응모를 위해서 결과에 상관없이 다시 쓰기 시작했죠. 계간지와 신춘문예, 봄, 가을, 겨울마다 ‘시즌’이라고 하면서 그렇게 했었어요. 스무 살 때는 문헌정보학과를 다녔다가 그만두고 스물두 살 때 문창과에 들어갔어요. 거기서 만난 친구들이랑 같이 열심히 공부를 했죠. 속된 표현으로 무식하게 쓰고 읽고 쓰고 읽고를 많이 했어요. 여전히 그 친구들이랑 소설 공부를 같이 하고 있어요. 나중에는 낙선에 길들여지니까 도대체 ‘내가 뭘 하고 있는 건가’ 모르겠더라고요. 꿈이 소설가인지 소설을 쓰는 사람인 건지, 당선이 꿈인지조차 헷갈리게 되고. 그런데 끊임없이 그 행위는 계속했어요. 쓰고 읽고 쓰고 읽고. 문학적인 행위 자체는 훌륭하게 보냈던 십 년이었어요.

 

   고봉준 : 문예창작과로 옮긴 이유와 ‘소설’을 쓰기로 결심한 계기는 무엇이었나요?

 

   김이설 : 어렸을 때부터 끼적끼적 낙서나 편지쓰기, 책 읽기를 좋아하기는 했어요. 중고등학교 때는 창작을 해보거나 그러진 않았어요. 늘 책상 가까이 책이 있었고……. 보고 쓰고 읽고. 제 기질 자체가 문학 쪽에 가까이 있는 듯한 느낌의 사람이었는데, 입시 성적이 안 좋으니까 수능을 못 보고 점수에 맞춰서 문헌정보학과에 갔죠. 막상 대학에 가기는 갔는데, 문헌정보학과는 책 표지만 보는 학과잖아요? 책은 늘 가까이에 있는데 나는 도대체 뭘 하고 있는지 모르겠는 거예요. 만날 출석을 안 해서 에프 학점을 받고, 술 먹고…… 뭘 해야 하는지, 내가 어디서 뭘 해야 하는지, 뭘 하고 있는지 모르는 채 헤매었던 거죠. 그 시간 외에는 쓰고, 읽고, 그게 일상생활이어서 ‘아, 나는 소설가가 되고 싶어’라기보다는 ‘무언가를 쓰는 사람이면 좋겠다’라는 생각이 있었던 것 같아요. 그것이 영화평론이든 희곡이든. 그런데 운문 쪽은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내 구조는 산문 쪽이다’라고 생각을 했었어요. 그래서 영화평론 같은 것을 해보고 싶었어요. 구성작가라든지. 멋있어 보이잖아요? 그러다가 아는 언니가 ‘소설 한번 써볼래? 너 산문 쓰는 거 좋아하잖아?’ 해서 썼어요. 생각해 보면 소설도 아닌 거죠. 내 연애 실패담을 주인공의 이름들만 바꿔서, 또 내가 실연을 당했는데 내가 차버린 걸로, 거짓말을 산문으로 쓴 거죠. 그것이 소설이라고 하기는 그렇지만 제 생의 첫 번째 가상이라는 이유로 스무 살 겨울에 깜찍하게도 응모를 한 거죠. 그때부터 시작한 거예요. 문헌정보학과 일 년을 다녔는데 정말 허송세월을 보내서 이건 아니다 싶어 휴학계를 냈어요. 그리고는 수능공부를 다시 해서 입학을 했는데, 뭐 공부는 안 하고 만날 영화 보러 다니고 책 보고 그러니까 성적이 안 좋았죠. 좋지 않은 학교를 가긴 했지만, 어쨌든 문창과를 간 거예요. 가서는 정말 재미있게 즐겁게 보냈어요. 요즘 친구들은 어떤지 모르겠는데 저희 때는 ‘너 뭐하고 싶어?’, ‘너 무슨 직업 갖고 싶어?’ 하면 ‘나는 작가가 꿈이야’, ‘소설가가 꿈이야’라는 말이 되지 않은 표현이었거든요. 그런데 문창과에 입학을 했는데 ‘나는 소설 쓰는 사람이 되고 싶어’라는 말이 너무나도 자연스럽고 당당하고 좋은 세계인 거죠. 시키지 않은,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파고드는 공부들. 주구장창 쓰고, 합평 받으면서 계속 깨지고, 다시 쓰고……. 이런 시간들이 굉장히 좋았었어요. 그게 내 기질에 맞는 것을 처음으로 맘껏 했던 시간 같아요.

 

   고봉준 : 문창과를 다니실 때 이야기 좀 해주세요. 어떻게 보내셨어요?

 

   김이설 : 안 시키는 공부 열심히 하는 애들 있잖아요?

 

   고봉준 : 시키는 것은 안 하고요?

 

   김이설 : 시키는 것도 하고요. 안 시키는 것까지도 파고들어서 하고 그랬어요. 왜냐하면 물이 필요한 물고기가 건조하게 살다가 정말 물을 만난 거죠. 정말 내가 밤새 책을 읽든 쓰든 아무도 뭐라고 하지 않고. 그게 정말 내가 할 수 있는 일이었던 거니까. 그게 정말 즐거웠어요. 모임을 만들어서 친구들이랑 같이 커리큘럼을 짜고 합평회를 하는 생활들. 학회까지는 아니지만 모여서 기성 작품들 합평을 하고 한 달에 한 번씩은 자기 작품을 내서 합평을 하고. 친구들이 많이 있을 때는 한 모임에 일고여덟 명이 있으니까 그 친구들이 다 작품을 내고 나면 아침 여덟 시에 만나서 밤 일고여덟 시까지 하는 거예요. 빈 강의실에서. 지금 생각해 보면 스물두 살 때라 애들이 모여서 서로 빨간 줄 그어 가면서 그렇게 몇 년을 했죠. 졸업하고 나서도.

 

   고봉준 : 그때 함께 공부했던 사람 중에 지금 등단해서 활동하는 분도 있나요?

 

   김이설 : 아니오, 그 친구들 중에 하나는 동화작가를 병행하면서 지방이긴 하지만 소설로 등단한 친구는 있어요. 그런데 활동은 못 하고 있구요.

 

   고봉준 : 저도 문창과 강의를 하고 있는데, 요즘은 문창과 학생들 중에 작가가 되고 싶어 하는 사람이 많지는 않더군요. 왜 그럴까요?

 

   김이설 : 요즘은 너무 재밌는 게 많지 않나요?

 

   고봉준 : 문창과에 왔으면 대개 작가를 꿈꾸고 있을 줄 알았는데 실제로 만나 보니 꼭 그렇지도 않더라구요?

 

   김이설 그런 경우는 많았죠. 딱히 좋아하는 것도 없고 싫어하는 것도 없고, 점수도 애매한데 책 읽는 건 싫지 않아. 그런 친구들이 와서 생활할 수 있는 과이기도 하고요. 저도 올해 초에 저희 학교 신입생들을 대상으로 오리엔테이션을 한다고 해서 갔어요. 선배들이 와서 이야기를 해보자 해서 갔는데, 저희 출신 중에 게임스토리를 쓰는 분이 계시더라고요. 저는 잘 모르는 분야니까, 그분이 좀 큰 회사를 다니시는데 회사 이름을 딱 말하니까 젊은 친구들이 ‘오~’ 하는 거예요. 그런데 저는 ‘소설 쓰는 김이설입니다’ 했더니 다 모르더라고요. 거기에는 평론하시는 분도 계셨고 시 쓰시는 분, 소설 쓰시는 분, 희곡 쓰시는 분, 그리고 게임 회사에서 콘텐츠를 만드시는 분이 계셨는데 젊은 친구들한테는 이분이 제일 인기가 많았어요. 스토리텔링 시대에서 이야기가 중요하다고 말하지만 이야기가 재미와 동급으로 묶여 있는, 요즘 친구들이 그런 게 아닐까 싶기도 하고. 저희 세대까지만 해도 문예창작 하면 작품을 완성하고, 이것이 문학성이든 대중성이든 자신의 색깔을 가지고 완성을 하는, 예술 행위라는 개념이 있었던 것 같아요. 그런데 요즘 친구들에게 문창과는 글을 잘 쓰는 능력을 배우는 곳이라든지, 혹은 작사를 할 수 있거나 부수적인, 현 시대 산업 트렌드에 맞게 잘 끼워 넣을 수 있는 요소를 키우는 공간으로 인식되고 있는 것 같아요. 재미있는 건 ‘응모’는 점점 더 많이 한다면서요? 그런 걸 보면 많이 씁쓸하죠.

 

 

 


   고봉준 : 작품에 관한 이야기를 시작해 볼까요? 등단작이 열세 살 노숙자 소녀에 관한 이야기인데, 흔히 말하는 신춘문예용과는 조금 달라요?

 

   김이설 그런가요?

 

   고봉준 : 신춘문예라는 게 신년에 신문에 실리는 거고, 문학이 꿈과 희망을 주어야 할 의무는 없지만, 그래도 사람들이 흔히 기대하는 감동이라든가 삶에 대한 따뜻한 시선, 이런 것이 암묵적으로 요구되는 사항의 하나인데, 이 작품은 꽤 파격적인 내용이잖아요. 혹시 이 작품의 창작 배경에 관해 들려주실 이야기가 있을까요?

 

   김이설 습작시절에는 등단이 하고 싶으니까 요즘은 어떤 소설들이 등단을 하는가 유심히 살펴보죠. 트렌드라는 것도 있고요. 우리 시대에는 이미지, 미문, 어떤 때는 환상적인 것들. 이런 트렌드에 있어서 내가 못 따라가서 등단을 못 하나 싶었는데, 어느 순간에 따라갈 수도 없거니와 따라갈 이유도 없다는 걸 느꼈었던 것 같아요. 늘 떨어지다 보니까 아집만 살아서 트렌드라는 게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한 것도 있었고. 지금도 그래요. 소설을 구상하게 된 계기는 제가 임신했을 때였는데, 요즘은 임신을 하면 아기의 성별을 알 수 있잖아요? 뱃속에 아이가 움직이고 있는데 딸이라는 거예요. 나도 여자고, 여자로서 서른두 살까지 살았는데, 이 사회에선 여자로 사는 게 불편하고 힘든 부분이 분명 있어요. 물론 남자 입장에서도 그럴 수 있지만 여자 입장에서는 더 힘들고 불편하고……. 좀 그런 부분이 있는데, 내 아이도 딸이란 이야기였죠. 나는 어떻게든 서른 살까지 버텨 왔는데, 내 아이를 이 사회에서 키워야 하잖아요? 내가 엄마로서, 인생의 선배로서, 혹은 사회 시스템을 먼저 구축한 사람으로서 어떻게 해주어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이 드는 거죠. 쉽게 표현하면 어떻게 키울까 고민하다 보니 관점이 달라졌어요. 옛날에는 그런 장면을 마주치면 채널을 돌렸지만 저런 세상을 알아 두어야 해, 왜냐하면 알아 두어야만 아이를 방어하든지 공격 하든지, 대처를 하든지 대안이 나올 것 아니에요? 그래서 알아야 한다는 생각부터 한 것 같아요. 때문에 사회를 바라보는 시점 자체가 바뀌었어요. ‘열세 살’ 같은 경우는 물론 지금도 그렇지만 노숙자 문제가 한창 많이 나오던 시기였어요. 여성 노숙자에 대한 어떤 취약점에 대해 보여주고자 하는 욕구가 있었어요. 그때 보고 착안하게 된 거죠.

 


   고봉준 :
세 권의 책을 내셨는데 소설 전체를 보면, 대개의 경우 주된 인물들이 여성이에요. 그리고 그 여성들을 둘러싸고 있는 세계는 아주 폭력적이거나 가혹하고. 뭐랄까요? 어떤 사람들은 페미니즘적인 문제의식에서 출발한 것은 아닐까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텐데, 실제로도 그런가요?

 

   김이설 저는 그게 처음에는 ‘내가 소설로 보여주는 세상이 여자 화자로 써야 내가 편하기 때문에 여자 화자로 썼다. 이것은 분명 여자 이야기가 아니라 사회 이야기다’라고 생각을 했는데 그렇게 말하기엔 제가 너무 뻔뻔한 것 같더라고요. 제 스스로가 이미 내가 여자라는 것, 내 아이가 딸이라는 것, 그리고 이 사회가 좀 더 여성이라는 성에 추악하다는 것을 더 많이 겪은 것 같고요. 그런데 굳이 여성해방 이런 것까진 아니고요. 다만 이 사회 현실에서 더 힘든 사람들, 햇빛을 덜 받는 (못 받는) 분들의 이야기를 좀 더 효과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인물은 여성이 더 수월했던 것 같아요. 그래야 이야기가 극적으로, 혹은 왜곡되거나 부풀려지거나 상징이 되거나 하고요. 그런 방법들의 여지가 여성이란 점이 저에겐 묘미이고요. 어떤 분이 당신이 아들을 낳았으면 소설이 달라졌겠느냐고 물어보는데, 아차 싶은 거예요. 정말 그랬을 것 같기도 하고요. ‘아, 내가 말로는 우리의 이야기를 했다고 했지만 결국엔 여자의 삶만 보고 있었던 거구나’라고 생각을 했어요. 때문에 최근의 단편에서는 남성 화자들을 좀 써보려고 했는데, 그건 좀 많이 힘들더라고요. 능수능란하게 다 하고 싶긴 하지만 그것도 숙제처럼 느껴지기도 하고 그래요.

 

   고봉준 : 저는 작품을 읽으면서 종종 ‘자연상태’라는 홉스의 가설이 떠올랐어요. 아니, ‘자연’이라는 말보다는 ‘전쟁’이라는 말이 훨씬 더 실감날 것 같네요. ‘전쟁 상태’, 일종의 예외 상태인 거죠. 법도, 도덕도, 삶에 대한 상식적인 믿음도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뭐랄까, 항구적인 예외 상태 같은 느낌? 그러니까 우리는 21세기 대한민국이라고 하는 고도 문명사회에 살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 이 세 권의 책을 관통하고 있는 배경은 그런 문명사회가 아니라 자연 상태에 가까운 듯해요. 마치 〈동물의 왕국〉 같은 걸 보는 느낌이 들기도 하고. 그 〈동물의 왕국〉에서는 여자도 고귀하지 않고, 남자도 고귀하지 않고, 인간이라고 말하기보다는 인간이 가지고 있는 동물성, 즉 암컷, 수컷으로서의 모습이 훨씬 더 적나라하게 등장을 하는 것 같은데, 실제로 그것이 작가가 지금의 한국 사회를 경험하고 있는 방식일까요?

 

   김이설 전적으로 그렇다고 말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아니라고 말할 수도 없는 부분이죠. 기본적인 것은 일단 사는 것에 대한 문제를 가지고 있는 것 같아요. ‘어떻게 살 것이냐’에 대한 문제. 또 하나는 힘의 논리가 여전히 팽배하고 있다고 느끼기 때문인 것 같아요. 그 힘의 논리라는 것이 경제적인 힘의 논리뿐만 아니라 외모가 잘난 여자와 외모가 못난 여자의 일생이라든지, 무식한 표현이긴 하지만, 있는 집 아이와 없는 집 아이, 여자와 남자일 수도 있고요. 있는 자는 계속 있게 되고……. 그런 행복하지 못한 삶? 남들은 다 발전하는 세상에서 나는 오늘도 생활비가 없어서 고민해야 하고, 아이들에게 못해 주고. 그런 다수의 현실적인 부분들, 그런 것들을 계속 말하고 싶은 것 같아요. 결국 힘의 논리, 있는 자는 계속 있을 수밖에 없고 반대로 없는 사람이라면 계속 없게 돼버리는. 그게 소위 나쁜 뜻으로 말하는 유전적인, 혈육의 유전이 아니라 시스템이 만들어 주는 유전일 수도 있고. 그런 문제들을 계속 생각을 하고 있는 것 같아요.

 

   고봉준 : 그러니까 예를 들면 어떤 인물들이 있는데, 이런 인물들에게 닥친 폭력이든 배제든 그것이 우연히 발생했다기보다는 작품을 읽으면 읽을수록 미리 결정되어 있다는 느낌을 받아요. 그 결정이라는 것이 부모 세대의 삶을 반복하거나 답습하고 있는 모습들로 느껴지기도 하는데. 실제로 현실을 비판하는 것에 포커스를 맞추고 있는 작가들의 경우에는 한 개인을 둘러싸고 있는 우연적인 세계의 침투 같은 것을 강조하겠지만, 선생님의 작품에서는 그게 내력이나 운명 같은 것처럼 묘사되고 있는데, 왜 그렇게 보시는지 잘 모르겠어요. 그러니까 아이는 태어날 때 운명이 결정되어서 태어나는 것 같다는 말이죠.

 

   김이설 그렇죠. 가난한 집 아이는 결국 가난한 성인이 되는 식으로 묘사가 되었는데 사실은, 잘못된 비유일지도 모르지만 드라마에 보면 있는 집 아들과 없는 집 아가씨가 만나서 결국엔 행복하게 잘살아요. 보는 사람은 너무 행복하고, 좋고, ‘아 나도 저렇게 살 수 있어’ 그래요. 드라마에 나오는 아줌마들은 날씬하고 예쁘고 게다가 애인도 있고 남편도 부자고. 그런데 내가 사는 아줌마들의 세상은 만날 남편이 남겨 둔 팬티 같은 것을 기워 입는 그런 삶이거든요. 매체에서 보여주는, 혹은 언론에서 영상으로 만나는 일상과 실제의 삶은 굉장한 거리감이 있다고 생각해요.

 

   고봉준 : 혹시 그것(거리감)이 「아무도 말하지 않는 것들」이라는 제목이 담고 있는 의미인가요?

 

   김이설 예, 그렇기도 하고요. 그런 지적도 받죠. 운명이 결정되어 버린 인물들이라고 말씀하시면서 ‘허무해진다’라는 표현도 하시는데, 저는 그것이 소설에서는 못 드러날지도 모르겠지만 제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사회가 그렇게 만들어버린 것이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들거든요. 내가 아무리 노력을 해도 얻어내지 못하는 어떤 기회. 돈이 없으면 기회를 만들지 못하는 현실사회의 어떤 것들. 그런 것들을 많이 생각하는 것 같아요.

 

   고봉준 : 그건 경험에서 오는 것이겠죠? 그런 경험 있으신가요?

 

   김이설 제가 2년제 문창과를 나왔는데 졸업을 하고 나서 일자리를 구해야 하잖아요. 그런데 어떤 신문에 출판사 편집자 모집 광고가 나왔는데 모두 4년제를 모집하는 거였어요. 따지고 보면 너 고등학교 때 공부 못 했으니까 2년제 갔잖아, 라고 말할 수도 있는 거잖아요. 그러면 왜 공부를 못 했는지, 그러니까 전부터, 전부터……. 나도 누구처럼 과외를 많이 받았으면, 누구네 집처럼 특례입학을 했으면. 뭐랄까, 극단적인 예지만 그런 식으로 접근했던 시기가 있었어요. 아주 오랜 습작시절 동안 ‘루저 의식’이 뼛속 깊이 있었던 것 같기도 해요. 나는 늘 무용한 인물이고, 이 무용함이 나의 잘못만은 아닌 것 같은 느낌들. 전적으로 나 혼자만의 문제가 아니라, 나도 어떻게 해보려고 했는데 나를 안 풀어 주는 느낌이었던 것 같기도 하고……. 개인적인 경험이냐고 물어보시니까 그런 것이었을 것 같아요. 제가 지금 당선이 되고 소설을 쓰니까 그 시절이 되게 열심히 하고 아름답고 좋았던, 성실했던 습작시절이라고 표현이 되지만 실제 그 시간에는 정말 저는 아무것도 안 하고 못 하고 있는, 오로지 책을 읽고 쓰고 있는 ‘루저’였거든요. 저희 아버지가 ‘고급 룸펜’이라고 말씀하실 정도로. 돈 들여 대학 보내 놨더니 집에서 소설 나부랭이나 읽고 있다고 표현하셨어요. 그렇게 십 년을 지내서 그런 것 같네요.

 


   고봉준 :
첫 장편 『나쁜 피』도 그렇고 최근에 읽은 『환영』도 동일하게, 인물을 중심에 두고 발생하는 폭력과 온갖 문제의 발원지가 사회이면서 동시에 ‘가족’이잖아요? 그래서 처음에는 ‘아, 이것이 우리가 살고 있는 자본주의 사회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거구나’라고 읽다가, ‘어, 그런데 이 모든 문제가 가족과 연관이 되어 있구나’라는 것을 느끼게 돼요. 결국 이것은 자본주의 사회를 비판하는 것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또 한편으로는 ‘가족’이라는 제도 자체를 비판하는 것이라고도 생각이 드는데, 특히 저는 『환영』이 그랬어요. 여자를 둘러싸고 뜯어먹고 있는 환경들. 예를 들면, 지금의 십대 아이들이나 이십대 초반의 아이들에게, 너 제일 중요한 게 뭐야? 물어보면 대부분 ‘가족’이라고 대답을 해요, 어처구니가 없긴 하지만 요즘의 아이들에게는 ‘가족’이 거의 유일한 유년의 현실이죠. 그러니까 가족을 부정하려고 하지도 않지만, 어떤 문제에 부딪히면 제일 먼저 ‘가족’으로 달려가요. 그렇게 성장한 아이들이 선생님의 이런 작품을 읽으면 아마 ‘가족을 이렇게 써도 되는 거야?’라고 반문할 것 같기도 해요. ‘가족’이라는 제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세요?

 

   김이설 정말 백지 상태의 생명을 사람화, 인간화 시키는 첫 번째 공간이 가족이잖아요. 가족 제도가 되어 있는 사회니까. 백지 상태로 태어난다고 해도 한 인물이 어떤 부모 밑에서 자라느냐에 따라서 아이의 성격이, 혹은 성향이, 혹은 기질이 바뀔 수 있다는 생각을 하는 것 같아요. 어떤 인물의 처음을 만들어 주는 공간이고 그러다 보면 소설 안에서의 인물들은 문제적 인물들이어야 하니까. 문제적 인물들을 움직이게끔 하려면 가족도 문제적 가족이어야 한다는 거죠. 맞는 표현인지 모르겠지만. 그래서 소설 속에 나오는 인물들이 항상 가족적 기원에서 문제들을 가지고 시작을 하는 것 같아요. 저는 사회의 가장 작은 단위로서 가족의 의미도 있다고 생각해요. 그러나 좀 더 쉽게 접근하면 삶의 희망을 얻는 것은 가족보다는 타인이고 삶의 대한 절망을 더 많이 느끼는 것도 타인인데 그것을 회복시켜 주는 것도 타인이거든요. 아까 말씀하셨듯이 가장 중요한 것이 가족이라는 말을 하지만 우리의 이상향과 옳음에 대한 이미지만 가지고 있고 그것이 현실과는 좀 다른데 이것이 맞다고만 생각을 하니까 문제가 되는 것 같아요. 사실 살면서 저에게 가장 큰 상처를 주었던 것이 ‘가족’이었거든요. 우리 아버지가 저한테 ‘너 소설 나부랭이만 읽고’라고 하셨던 그 말이 전 아직도 가슴에 박혀 있어요. 그런데 상처 회복이 쉽지 않아요. 타인은 오히려 쉽게 용서가 되는데 가족이어서 잘 안 돼요. 하지만 결국 또 가족이라는 이유로 못 버리고 안아요. 물론 버리기도 하지만 요즘엔. 결국 또 끌어안고 어떻게든 해결해 보려고 하는 이유는 가족이기 때문에 그렇거든요. 문제를 만드는 것도 가족인데 어떻게 해결해 보려고 주구장창 고생하는 것이 또 가족이기도 하죠. 그게 인간의 삶의 모습들, 일상의 모습들과 밀접한, 가까운, 그런 공간으로서 가족이라고 생각을 해요.

 

   고봉준 : 예를 들면 『환영』에서 여주인공이 돈을 벌러 나가서 결국 매춘의 길로 접어들게 되고, 그러면서 점점 삶이 망가지잖아요? 그 사람을 둘러싸고 있는, 예를 들면 돈을 달라고 SOS를 날리는 여동생, 그리고 그녀에게 들러붙어서 살고 있는 엄마. 거기다 갑자기 등장해서 그녀의 전세계약서를 들고 도망가 버리는 남동생. 악한 사람은 아니지만 무능력한 남편과 아이. 그렇게 봤을 때 이 여주인공이 도덕적인 타락의 길로 빠지는 원인의 포커스가 이 사회에 맞춰져 있는 건지 가족에 맞춰져 있는 건지 궁금해요.

 

   김이설 저는 기본적으로 가족이랑 사회의 문제를 별개로 안 보는 것 같아요. 결국 가족을 만들어낸 자체도 사회고, 이런 사회를 만들어낸 것도 가족 구성원의 위기적인 관계라고 생각을 하는 것 같아요. 가족적인 문제도 가지고 있고 사회적인 문제도 가지고 있고. 돈을 쉽게 벌 수 있는 구조, 노력을 한다고 해서 돈을 쉽게 버는 것이 아니라 나쁜 방법으로 더 많이 벌 수 있는. 그런 것이 통념화되어 있고 또 암암리에 가능한 사회라는 공간과 또 그것을 방치할 수밖에 없고. 여자를 몰아세우는 건 가족이기도 하니까. 그렇게 따로 생각하는 것 같지는 않아요.

 

   고봉준 : 그렇지만 여자가 돈을 벌기 위해 처음에 나가게 되는 이유는 가족 때문이잖아요. 남편을 위해서, 아이를 위해서, 가족을 위해서라는 명분을 가지고 나갔는데, 결국에 돌아와서는 가족을 혐오하거나 가족을 증오하게 되는 거잖아요?

 

   김이설 가족 때문에, 아이와 남편을 위해서 내가 나가는데 이 여자가 가지고 있는 최소한의 욕망은 ‘다른 사람과 비슷하게 살고 싶다’는 이야기라는 거거든요. ‘내가 돈을 많이 벌겠어’라는 게 아니라 ‘남들만큼만 살고 싶어’잖아요. 그것은 입장에 따라 다르거든요. 이 여자의 최소한의 욕망은 사람처럼 살고 싶고 남들처럼 살고 싶은 부분이라는 말이죠. 따지고 보면 사실은 자기 욕망을 위한 것이었던 거겠죠. 그래서 그 일들을 선택하게 되는 거죠.

 

   고봉준 : 그랬을 때 이런 게 있잖아요, 『환영』이라는 작품에 비추어서 이야기를 한다면, 남편과 아이를 위해서 돈을 벌기 위해 나갔는데, 작품이 전개될수록 남편과 아이가 귀찮아지거나 혐오스러운 존재로 바뀌고 있어요. 아이를 맡겨 놓고 잊어버리기도 하고, 남편이 하고 있는 일상적 행동에 화가 치밀기도 하고……. 사실은 제가 작품을 읽으면서 ‘이 여자의 진짜 욕망은 가족 때문이 아닐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어요.

 

   김이설 그렇겠죠. 말씀처럼 최소한의 욕망, ‘남들처럼 살고 싶어’라는 욕망. 최소한의 욕망이지만 최대의 욕망이기도 하겠죠.

 

   고봉준 : 그렇게 되었을 때 그 여자의 도덕적 타락에 대해 책임을 묻는다면 가족에게 더 많이 물을 수 있을까요? 사회에 더 많이 물을 수 있을까요?

 

   김이설 가족에게 물을 수도 있고 사회에도 물을 수도 있고 윤영이란 인물한테도 물을 수 있는 거죠. 저는 그것들이 윤영의 가치관이나 사회의 문제, 가족의 문제가 다 같이 맞물려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아요. 전적으로 얘가 문제가 있어서 인물이 이렇게 됐어가 아니라 그냥 총체적으로. 왜냐하면 소설을 쓸 때는 이 인물들이 만나는 모든 사건의 덩어리를 가지고 나가기 때문에 그렇게 설정을 해갔던 것 같아요. 윤영의 개인적인 문제도 있는 거죠. 그런데 도덕적 책임, 도덕적인 부분에 관한 질문을 받으면 대답을 잘 못하겠어요. 제가 도덕적이지 못한 사람이어서 모르겠는데, 좀 더 무책임하게 표현하면 도덕적이지도 못하고 윤리적이지도 못한 사회에서 왜 인물들한테 그런 질문을 해야 되는지 잘 모르겠고. 저는 끊임없이 우리 이야기라고 고집을 부리고 있는 것 같아요.

 

   고봉준 : 그렇다면, 비판의 맥락은 아니고, 예를 들면 여성 노숙자에 관한 이야기도 하셨으니까, 우리가 사실은 신문을 보거나 TV를 보거나 특히 TV에서 시사다큐 같은 것을 보면 우리 사회가 가지고 있는 여러 문제점 같은 것들이 등장하잖아요. 학교에 가면 아이들이 왕따를 당해 자살을 하고, 사회 곳곳에는 노숙자들이 방치되어 있고, 그 노숙자들은 전적으로 폭력에 노출되어 있죠. 『환영』에도 한 가족의 문제가 있는데, 그러면 소설이, 그러니까 ‘김이설’이라는 작가가 보았을 때, 소설이라는 것은 우리 사회의 어떤 단면을 드러내 주는 것에 포커스가 있는 것인지, 아니면 다른 무언가가 있다고 생각을 하시는지 궁금해요.

 

   김이설 저는 어떤 인터뷰 자리에서든 똑같은 대답을 했어요. 이런 질문에 대해서. 뭐라고 대답을 했느냐면, 어떤 선생님이 말씀하셨어요. ‘이 세상이 살 만한 세상인지 내가 과연 제대로 살고 있는지 자문하기 위해 읽는다’라고. 쓰고 있는 사람 입장에서도 그렇거든요. 이 세상이 과연 살 만한 세상인지, 나는 제대로 살고 있는지 자문하기 위해 쓰는 과정인 거죠. 대답이 될까요?

 

   고봉준 : 예, 그렇게 된다면 작가가 작품에서 꼭 보여주어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런 세상의 돌파구는 뭐라고 생각하세요? 작품 세 권을 읽으면 우리가 살고 있는 곳이 살 만하지 않은 곳이라는 걸 쉽게 깨달을 수 있잖아요. 인물들은 서로가 서로를 물어뜯고 싸우고 있거나, 겨우 버티고 있거나, 생활이라는 말보다는 차라리 ‘생존’이라는 말에 훨씬 더 가까운 상황에 직면하고 있는데, 그 상황이 우리의 삶과 무관하지 않겠지요. 그렇다면 거기서의 돌파구는 무엇일까요?

 

   김이설 저는 기본적으로 인간이 살아가는 것이 ‘견뎌내는 것’이란 생각이 들어요. ‘버텨내는 것’. ‘견디는 것’이라는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아요. 따지면 아주 비슷한 인물들, 솔직히 고백하면 자기 복제 같은 인물들이 계속 나오고 있는 것도 그런 주제를 많이 말을 못 했다라고 생각을 하는 것 같아요. 그리고 또 하나는 일단은 봐야 한다, 알아야 한다는 교훈을 주기 위한 그런 것이 아니라 무엇을 알아야 이야기하지, 이런 식으로 알아야 싸우든 화해하든 눈을 마주보고 있어야 뭐가 될 것 아니에요? 요즘 흔히 말하는 ‘소통’이라는 지겨운 표현을 위해서라도. 싸우고 나더라도 화해가 궁극의 선이라면, 그 전에 싸우든 어떻게 하든 간에 얼굴을 마주보고 알아야 할 것 아니에요? 그런 어떤 처음의 시작점인 것 같아요. 그래서 ‘아, 내 소설이 이런 역할을 해주길 원해’라고 느낀 적은 한 번도 없었어요. 그것을 위해서 쓰지도 않고 그런 역할의 소설이 될 수도 없겠지만 그래도 읽는 사람이 이건 뭐지? 왜 이렇게 불편하지? 사회가 왜 이 따위지? 라고 생각을 한 번씩 하는 게, 아마 그것이 시작이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해요. 그러면 누군가는 ‘르포 보고 신문 보면 더 끔찍한 사실이 많은데 왜 소설을 읽어’라고 말하겠죠. 그런데 르포로 만난 현실과 문학 안에서 만난 현실은 고민의 방향이나 색감이나 무게 등이 다르잖아요. 그런 것들이 다르기 때문에 해줄 수도 있다, 라고 생각이 들어요. 그렇기 때문에 이렇게 소설을 쓰고 있는 것 같아요.

 

   고봉준 : 남성 독자의 입장에서 소설을 읽으면 전반적으로 남자들은 대개 폭력적인 캐릭터로 그려져요?

 

   김이설 예. 무능력하거나.

 

   고봉준 : 『환영』의 남자는 무능력하죠. 그래서 마음에 들어요. 나머지는 다 육식동물 같은데 이 사람은 초식동물 같거든요.

 

   김이설 이 사회에서는 더 용서 못 받을 인물이잖아요. 차라리 힘을 가지고 있으면 내 식솔은 안 굶기잖아요. 내 핏줄 하나는 안 굶기고 살 수 있는데, 오히려 무능이 아주 악이 되는 세상……. 그런 모습들. 제 남편이 월급을 쥐꼬리만큼 받죠. 그래서 그런 건 아니고……. (웃음)

   고봉준 : 이런 상상력 또는 문제의식, 예를 들면 이렇게 이야기를 해보죠. 요즘에 젊은 소설가들은 소설의 형식적인 변주나 실험 같은 것에 에너지를 많이 투여하고 있다고 생각해요. 그 형식적인 변주나 변화를 통해서 무언가 다른 것을 얘기해 보려고 하는 사람들도 있구요. 그런 면에서 보면 김이설 작가의 작품은 상당히 전통적인 스타일에 가까워요?

   김이설 예, 촌스럽죠.


   고봉준 : 전통적인 방식인데, 다만 다른 게 있다면 전통적인 소설이 가져왔던 현실을 포장하려는 이데올로기적 봉합의지보다는 현실의 폐부를 까발리는 쪽으로 나아가고 있잖아요? 기법이나 형식의 세련성에 대한 고민들은 안 하나요?


   김이설 바보 같은 답변 같은데요, 시를 쓸 수 있는 머리와 산문을 쓸 수 있는 머리는 다르다고 생각해요. 물론 두 개 다 하고 계시는 분들도 있긴 하지만. 본래적으로 타고난 것 아닌가요? 하여튼 저는 그런 것을 고민해 본 적이 없어요. 언어에 관련된 부분이라든지, 형식적인 부분들, 혹은 환상이라든지 어떤 현실의 반대임을 위한. 환상이라 한다면 좀 더 벗어난 환상. 이런 것들에 대해서 고민을 해본 적이 별로 없어요. 왜냐하면 저는 상상력이 굉장히 없는 편인 데다가 지금의 내 옆에 것들을 같이 이야기하기도 벅차요. 제가 좀 촌스럽기도 하고. 그런데 그렇게 소설을 쓰시는 분들이 부럽기는 부러워요. 제가 구병모 작가를 부러워하고 좋아하는 이유는 사실은 구병모 작가랑 저랑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 같지만 맥락은 같거든요. 그런데 ‘나는 이렇게밖에 못 쓰는데’ 하는 피해의식이 있기도 해요. 그것은 제가 정말 능력이 못 돼서 못 가는 것 같아요, 거기까지. 저는 그냥 제가 늘 읽어 왔던 소설에 대한 어떤 답습이면서 이어달리기를 하고 있는 느낌? 그런 느낌이 들어요.


   고봉준 : 그러니까 스타일로 세계를 만드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스타일보다는 문제의식이나 주제를 가지고 세계를 만드는 사람도 있잖아요?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21세기는 스타일리스트가 촉망받거나 주목받는 세상인데, 그런 면에서 본다면 김이설 작가의 소설은 주목받기에는 핸디캡이 있는 것처럼 보여요. 그런데 정작 상황은 그렇지 않죠. 상당히 잘나가는 작가의 한 사람이잖아요?


   김이설 블루칩이라고 생각을 해요. 다들 이미 화려하니까 오히려 촌스러운 게 보이지 않았을까 싶기도 해요. 윤이형 작가랑 저랑 같은 해에 등단을 했어요. 어떤 기사였던가, 평론이었던가, 한창 한유주 작가, 윤이형 작가가 주목받던 시기였는데, 오히려 더 촌스러우니까 한 번 더 보게 되지 않았을까…….


   고봉준 : 이제 마무리를 할 시간이군요. 문학적 상상력이나 스타일에 있어서 큰 영향을 받은 작가가 있을까요?


   김이설 오정희 선생님의 초기 단편들, 김승옥 선생님의 초기 단편을 좋아했어요. 「무진기행」 같은 작품을 좋아했죠. 윤대녕 선생님의 문장도 굉장히 좋아해서 정말 열렬한 팬이었어요. 주변의 후배들이 저를 ‘윤빠’라고 불렀어요.


   고봉준 : 윤대녕 선생님이랑은 소설의 경향이 전혀 다른데요?


   김이설 그렇죠. 처음부터 문장이 단문이거나 거칠진 않았어요. 습작시절에 떨어질 때는 처음에는 장문을 고수했는데 점점 쳐내고. 습작시절이 길어지면서 합평을 계속 받다 보면 비문에 대한 강박관념이 생기잖아요? 문장을 잘못 쓰면 안 된다는 강박관념이 생겨서 문장이 길어지면 늘 문제가 생기니까 늘 쳐내게 되고. 그런 것도 있어요. 인물이 좀 피폐하고 거칠고 힘든데 문장이 유려하기에는 뭐랄까, 안 맞는다는 생각을 하는 거죠. 인물이 가난하고 아프고 슬프다 했을 때 그것을 ‘가난하고 아프고 슬퍼’라고 계속 쓰는 것보다 그냥 거친 단어 하나로 이 인물을 표현하고 싶은 욕심을 계속 갖고 있었던 것 같아요. 그런데 이제는 소위 ‘약발’이 떨어져서 지겨워지는…….


   고봉준 : 그래서 사실 작품을 읽으면서 지나칠 만큼 수사가 없다, 지나칠 정도로 건조하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건조하다’라는 것은 ‘직설적이다’라는 의미예요. 그래서 유려함보다는 단도직입적인 스타일을 고집한다고 생각했어요. 그것을 추구하시는 거죠?


   김이설 예. 힘들고 거친 세상을 그런 문장으로 그렇게 표현하고 싶은 것 같아요. 이런 표현들이 되게 애매한 게, 그럼 내가 마치 어떤 위치에 있어서 나와 다른 이들을 동정하는 시선처럼 전달이 될까 늘 기분이 좀 그런데, 그런 의미로서는 아니고 삶의 고단함들, 뭔가 불편한 관계들, 부조리한 세계에 대해서 그냥 덤덤하게 보여주고 싶은 것 같아요. 예, 덤덤하게. 사실은 그런 변명도 하거든요. 세상이 더 악랄한데 내 소설이 뭐가 더 악랄해? 언젠가 당신 소설에 폭력이 나오는 이유를 말해 달라, 인터뷰에서 이런 질문도 받았는데, ‘세상이 더 폭력적이지 않으냐, 그리고 이 폭력을 감추기 위해선 또 다른 폭력이 필요하고, 그런데 내 소설이 뭐가 폭력적이냐’라고 반문하기도 했거든요. 정말 무책임한 답변이란 생각이 들기도 하는데. 사실 그 생각에 대해선 여전하고요. 여하튼 영화, 게임, 드라마, 볼거리들, 스펙터클하고 희망적이고 기쁜 것들이 많잖아요. 소설도 그럴 수 있고요. 그런데 저까지 그런 걸 하고 싶은 것 같진 않아요. 그런 차별적인 것들을 갖고 싶긴 한 것 같아요. 그렇게 쓸 재주도 없지만. 자주 했던 답변 중엔 이런 것도 있어요. 가진 것이 많거나 예쁘거나, 그런 사람들의 이야기는 제가 아니어도 잘살 거니까. 우리가 같이 이야기하고 귀 기울일 일은 없다고 생각이 드는 것 같아요. 그들은 내가 아니어도 예쁘니까 잘살 것이고 부자니까 살 거니까.


   고봉준 : 그러면 ‘칙릿’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김이설 어우, 잘 읽죠. 재미있으니까. 그런데 읽으면서 반감은 분명히 있었죠. 내가 가질 수 없던 세계니까. 그들이 가지는 명품 백, 좋은 직장, 멋진 남자친구들, 어우, 저는 경험해 보지 못한 세계였거든요. 하지만 재밌어요. 판타지라든지 혹은 이상향? 나도 살 좀 더 빼면 예뻐지지 않을까? 나도 돈 많은 남자친구 만나면 명품 백 들 수 있지 않을까? 생각을 하죠. ‘칙릿’과 제 소설이 가야 하는 길 자체가 다르다는 생각이 들어요. ‘칙릿’은 그래서 가치가 없다든가 재미가 없다는 게 아니라 그 소설은 정말로 그렇게 써야 재미있고 좋은 ‘칙릿’인 거고, 제 소설은 그것과는 다르게 써야 좋은 소설로 가는 길이라는 생각을 하죠.


   고봉준 : 세 권의 작품집이 일정한 반복을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해요. 예를 들면 이미 말씀드린 것처럼 여성적인 계보가 핵심을 이루고 있고, 그 여성들이 남성적인 세상의 폭력에 노출되어 있고, 그녀들의 삶에 탈출구는 없고, 그래서 극한으로 치닫고 있지만 그 극한이라는 것이 언제 끝날지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모르는 상태로 있고……. 지금 혹시 구상하고 있거나 쓰고 있는 작품도 연속적인가요? 아니면 다른 이야기를 쓰려고 생각하시나요?


   김이설 청탁을 받을 때마다 끊임없이 다른 걸 쓰고 싶어 해요. 다른 걸 쓰고 싶어 하고 다르게 쓰겠다고 계속하는데……. 지금은 좀 다른, 그러니까 맥락을 넓혀 가고 싶어요. 뭐랄까, 아까 힘의 논리라고 이야기하는 그런 부분도 있긴 하지만 결국에는 상처에 대한 문제들, 아픔에 대한 이야기들, 고통에 대한 이야기들로 확장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그것이 피해자의 상처든, 피해자 가해자라는 것이 우습지만. 물론 같은 상처라고 표현하는 것이 그렇긴 하지만 피해자의 상처든 가해자의 상처든, 결국 ‘상처’라는 맥락 안에서는 함께 이야기할 수 있는 부분이 있지 않을까…….


   고봉준 : 인간이 살면서 갖게 되는 상처의 운명적인 성격이 지금 붙잡고 있는 문제의식이군요?


   김이설 그렇죠. 또 워낙 패턴화되고 있으니까 같이 공부했던 후배들이 제발 좀 ‘노 폭력’ ‘노 섹스’ 소설을 써보라고 그래서 ‘알았어, 내가 이번에는 노 폭력 노 섹스 소설을 쓰겠어.’ 하고 노트북에 포스트잇으로 써놨어요. 그리고 섹스를 테마로 한 소설집을 낼 테니까 원고를 달라는 청탁을 받았어요. 그래서 ‘아유, 그럼요 드려야죠.’ 하면서 얼른 드렸거든요. 어떤 작가들이든 다 그렇겠죠. 내가 자기 복제를 하고 있는 건 아닌지, 같은 소리를 계속하고 있는 건 아닌지, 계속 자문을 하고 아니길 굉장히 원하고 그래요. 그런데 잘 못하고 있어요. 제가 못하고 있었던 부분이라고 생각해요. 『환영』이 나온 이후로 굉장히 힘들었어요. 다른 책들에 비해 『환영』을 많이 읽으시기도 하셨고, 그러면서 이런 대화들을 계속 본격적으로 하면서 ‘아, 내가 아직도 많이 얼뜨기였구나.’라는 느낌, 좀 더 잘 써야 되겠다는 느낌을 굉장히 많이 갖고, 부끄럽고 창피하기도 하고 그랬었거든요. 아까 패턴화되는 부분들에 대해서 여자를 몰고 가는 현실, 탈출구가 없는 부분들이라고 표현을 하셨는데, 『환영』 같은 경우에는 이 여자가 자살을 할 수 있는 상황인데 최악과 최선을 고민하다가 다시 시작이다, 하면서 또 매춘을 하거든요. 긍정이냐 부정이냐, 라고 말을 해요. 이 치욕스런 삶을 버리고 죽는 것이 이 인물에겐 긍정인지 부정인지, 사회의 긍정인지, 아니면 그런 것을 다 감수하고도 살겠다고 선택을 한 것이 긍정인 것인지 부정인 것인지, 이런 고민들은 저 혼자 해야 할 것이 아니라 같이 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제 소설은 저 혼자 고민해서 답을 내는 게 아니라 ‘무엇일 것 같습니까?’라는 물음들의 지점으로 가야 할 것 같아요. 제가 답변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어떤 것 같습니까?’라고 물어보는 방식으로 가고 싶어요.


   《문장웹진 8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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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7-01
거대한 존재들의 무한한 경탄

[에세이] 거대한 존재들의 무한한 경탄 제이크 레빈 소개 거의 12년 동안 나는 한국 대학교에서 강의를 했다. 지난해부터 강의하는 교사의 내면적 생활과 관련된 일기와 같은 글들을 쓰기 시작했다. 외국인 교수로서 처음 강의를 시작했을 때 모든 것이 낯설고 이방인 같은 느낌이었는데 이제는 한국 문화에 익숙해졌지만 여전히 교수의 삶은 익숙하지 않다고 믿는다. 학생의 마음을 이해할 수 없고 다른 교수의 마음도 이해하기 어렵다. 다른 강의실에 들어갈 때마다 새로운 학생들을 만날 때마다 이전에 만나지 못했던 민족을 만나는 것 같이 나는 죽을 때까지 방랑자처럼 매일 새로운 것을 경험한다. 학교에서는 현실에 경험한 것이 꿈꾸는 것 같고 꿈꾸는 것이 더 현실처럼 느껴지듯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가 가끔은 사라진다. 이 산문은 시나 소설이 아니고 현실의 기록도 아닌 교사로서의 삶의 내면적 반응이다. 교사는 인간이다. 가끔 사회가 인문대 교사의 인간중심주의를 억압한다고 생각한다. 신자유주의의 자본주의는 모든 것을 계산하지만 인문학과 시의 영향력은 계산될 수 없는 가치다. 인간중심주의 가치를 점점 찾기 힘든 사회의 학생들은 학교에서 문화를 배워야 한다. 이 모순적인 긴장의 환경에 존재해야 한다. 학교의 목적은 타인의 인간성을 인정하는 것에 있다. 이 산문은 한 인간의 존재하는 기록이다. 거대한 존재들의 무한한 경탄이라는 제목은 완전한 이해가 불가한 타인의 인간성을 발견하는 것에서 왔다. 이 기록은 내 개인적 경험과 전해 들은 동료 교사들의 경험을 바탕으로 작성하였으며 영어로 작성한 문장을 나의 소중한 학생 김혜인이 나와 함께 번역하였다. 지우개 머리 어떤 날 나는 대답하기 위해 여기 있고, 어떤 날 나는 오직 듣기 위해 여기 있다. “질문 있어?” 많은 학생들이 질문의 형태로 자신의 의견을 말하는 그다지 어려울 것 없는 예술을 배웠다. 그런 질문에 대답하는 유일한 방법은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 이 질문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 질문자가 자신의 질문에 답변하는 동안 사용감 있는 지우개처럼 커피를 홀짝이며 머리에서 머리카락이 떨어지는 것을 느껴 보라. 학생들의 목소리는 배경소리가 되어 가다가, 불현듯 보이스 오버. 지우개는 부러지기 전까지 얼마나 많은 얼룩을 견딜 수 있을까? 숭고한 느낌 지난 몇 주간, 를 듣는 학생들은 책상 아래 숨어 있었다. “교수님, 저희는 불확실성에 머물고 있어요.” 그들은 말한다. 일정 기간 동안 불확실성에 머문 뒤, 한 학생이 책상 아래서 나타나는 경우가 종종 발생한다. “저는 숭고한 느낌을 얻었어요.” 그들이 말한다. “저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아름다움에 압도당해 죽음이 무섭고 두려워요.” “이제 제 핸드폰 돌려주시겠어요?” 정적. 학생이 나를 응시한다. 정적. 나는 천천히 커피 한 모금을 마시고 학생을 응시한다. 흰 두루미 “주말 잘 보냈니?&r

  • 관리자
  • 2024-07-01
아, ‘장르 문학’ 하시는구나

[에세이] 아, ‘장르 문학’ 하시는구나 김용언 미스터리 장르를 좋아하고, 열심히 읽고, 그에 관한 잡지를 만들고, 또 가끔은 관련 공모전 심사를 보면서 언제나 느끼는 바가 있다. 한국에서 미스터리 장르에 대한 이해도는 여전히 심각하게 척박하다는 점이다. 가장 모순되는 감정을 느끼는 순간은 ‘장르 문학’이라는 단어를 들을 때다. ‘(그냥) 문학’1)의 카테고리에 속하지 않는 나머지 소설들은 굳이 ‘장르 문학’이라고 불린다. SF, 판타지, 미스터리/스릴러, 로맨스, 공포, 무협 등의 꼬리표가 붙고 낱낱이 분류되며 ‘문학은 문학이지만 그냥 문학이라고 부르기보단 그 안의 장르로 명명되어야 하는’ 존재가 된다. 의문이 생긴다. 그렇다면 장르 문학에 속하지 않는 작품은 그냥 문학이 아니라 ‘비장르 문학’이 되어야 하지 않는가? 아니면 순문학 역시 일종의 장르임을 인정하면서 모든 작품을 ‘장르 문학’이라고 불러야 하는 건 아닐까? 예전 한국 문단에서는 ‘순(純)’이라는 단어가 참여 문학/민중 문학 등의 대립항처럼 불렸다고 하는데, 지금에 와서는 참여 문학/민중 문학도 ‘그냥’ 문학에 포함된 것 같다. 아무튼 거칠게 말해서 ‘장르’를 사용하지 않고 인간과 현실 자체에 집중하는 소설을 ‘그냥’ 문학으로 호명한다고 보는 게 맞을 것 같다. ‘장르’로 호명되는 특정한 이야기들에는 그 장르가 만들어지게 된 역사가 있고 또 그 안에서 통용되는 특정한 규칙이 존재한다. 그런 약속된 구조와 규칙을 이용해서 어떤 이야기를 만들어낸다고 해서, 그 결과물이 ‘그냥’ 문학으로 불릴 수 없고 장르 문학으로만 불려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하다. 오해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나는 장르 문학도 문학임을 인정하라고 고래고래 소리 지르기 위해 이 글을 쓰는 게 아니다(그건 너무 당연한 사실이기 때문에 굳이 받아들여 달라고 애원할 필요가 없다). 그런데 그 장르 문학 업계에서 일하는 사람으로서 불편해지는 순간들이 자꾸 찾아온다. 이를테면 한국 작가의 소설이 해외로 번역되었을 때 현지 리뷰들을 찾아보면, 스릴러/미스터리/공포 등의 명칭을 명확하게 부여하면서 소개한다. 한국에서는 기존 등단 작가들의 작품을 소개할 때 ‘추리적 기법을 활용한’ 또는 ‘경계를 넘어선 상상력을 발휘한’ 등의 애매모호한 문구로 시작할 때가 많은데, 해외에서는 자신들에게는 낯선 작가의 번역 작품의 특성을 단번에 설명하기 위해 ‘이것은 스릴러다’ 또는 ‘이것은 공포소설이다’라고 알려준 다음 그 작품의 특성이 어떤 점에서 새롭고 멋진지를 차근차근 설명했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여전히 장르 문학과 장르 아닌 ‘그냥&r

  • 관리자
  • 2024-0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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