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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어리적인 직관, 압둘 키리한적인 표상, 압도하는 푼크툼

  • 작성일 2012-12-08
  • 조회수 1,351

 

   [내가 읽은 올해의 책]

 

 

정어리적인 직관, 압둘 키리한적인 표상, 압도하는 푼크툼

─ 서대경, 『백치는 대기를 느낀다』를 읽고

 

신동옥

 

 

 

 

   어쩌면 우리는 우리의 조상들로부터 물려받은 언어를 가지고 쓰기에, 바로 그 언어를 앞지른 자리에 뿌리내렸다고 여겨지는 의식에 기대어 쓰기에, 우리들이 쓴 모든 시는 죽은 단어에 기대고 모든 시인은 시체애호증을 앓는지도 모를 일이다. Signification Necrophilia! 우리가 쓰고자 하는 글은 막연한 어휘에 기댄다. 막연하지만 그 때문에 반쯤은 새로운 가능성에로 열린 이상한 어휘들 말이다. 시적인 표현들 속에서 낯익은 문장들이 불안해 보이는 이유다. 시가 목표로 하는 새로운 언어로의 이월은 애초에 불가능한 번역에 가깝다. 낯익은 문장으로 연속된 어휘로는 이월 또는 ‘돌발적인 마주침’과 같은 목표가 덧없다는 사실을 마주할 수밖에 없다. 낯익은 표현은 우리가 시를 통해 가닿으려는 어떠한 지경도 당분간 여기에는 없다는 결과지어진 사실을 말해 준다. 그러나 과연 그러한가? 그렇다고 언제까지고 시에 나쁜 이름만 부여해야 하는 것일까? 카프카는 썼다.

 

      나는 아무렇게나 문장 하나를 썼다.

      “그는 창밖을 내다보았다.”

      이런 문장이면 완전하다.

 

   카프카가 아무렇게나 쓴 문장은 ‘그는 창밖을 내다보았다’다. 어휘들은 주어, 서술어, 목적어, 더 깎아낼 것이 없는 단문이다. 문장이 향하는 곳을 알 수 없으므로 맥락이 없다. 맥락이 없으므로 의도가 없다. 의도가 없으므로 자유로울 수 있다. 카프카는 맥락도 의도도 수신자도 없으므로 알 수 없는 자유를 품은 저 완고한 단문을 두고 말한다. ‘이런 문장이면 완전하다.’ 저 세 문장이 서로를 겯지르고 있는 모양새를 자세히 보면 다른 지경이 열린다. 첫 번째 문장은 익숙한 언표 행위다. 어떤 시인은(예를 들면, 서대경은) 아무렇게나 문장 하나를 쓴다고 ‘말한다’. 과연 저 문장이 제일 앞머리에 놓인 것이 ‘아무렇게나’ 써 던진 것일까? ‘아무렇게나’는 문장 속에서 흘낏흘낏 만날 수 있는 자유의 낌새와 맞닿는다. 시인이 시로 말하기 시작하는 바로 그 순간순간마다 일어나는 자기 표상과의 고독한 조우의 맞은편에 자유가 잠시 자리한다. ‘아무렇게나’는 고독과 고통의 맞은편에 있는 신기루와도 같은 자유의 속성을 가르친다. ‘아무렇게나’라니? 바로 그 예지적인 속성으로 인해 자유는 저도 모르게 시에 귀속되는 것. 그러고 나면 정말 아무렇게나 쓴 문장 하나가 내던져진다. ‘그는 창밖을 내다보았다.’ 무미건조하고 아무런 특색이 없는 문장이다. 우리가 흔히 아무렇지도 않게 쓰는 상투적인 말투 이상도 이하도 아닌 문장이다. 안에 쓰인 단어들은 주위를 둘러보면 습관적으로 마주할 수 있는 ‘대상’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시를 쓰고자 했던 자라면 리듬도 아우라도 없어서 차마 시에다가 쓰기 힘든 문장이다. 낡아 빠져서 차마 산문 문장에 쓰기에도 민망한 문장들이다. 아무렇게나 쓴 문장은 상투적이고, 의미가 없으며, 낡아 빠진 단어들만 불러내오니 저 고색창연한 ‘연필 글쓰기’를 연상케 한다. 그러나 두 번째 문장이 암시하는 바는 바로 시적 직관이 태어나는 자리리라. 저 완고한 단문 문장 안에서 단어와 단어들의 연결로는 아무런 리듬도 아우라도 전하지 못한다. 저 단문은 세계가 그 자체 단 한 문장으로 의미를 품고 있다거나, 진리를 숨기고 있다거나, 다른 경계를 열어 보일 것이라는 근원주의적인 망상을 배반한다. 문장 하나로 무엇인가를 이룰 수 있다는 허위를 배격한다. 문장에 대한 다른 방식의 자각 속에서 카프카는(예를 들면, 서대경은) 맥락이 없는 단문의 아포리아가 세계를 향해 적의(敵意)를 노출할 수밖에 없음을 비판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리듬과 아우라는 문장과 문장의 연속에서 비롯됨을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예를 들어, 카프카의 「인디언이 되고 싶은 소망」은 완결되지 않은 반복구만으로도 짧은 한 편의 소설이 될 수 있다고 말하지 않는가? 명명백백하고 무미건조한 단문의 문장은 바로 직관이 태어나는 자리를 암시하는 것이리라. 그가 누구인지 아무도 모르고, 어떤 건물에 붙은 어떤 방식으로 열리고 닫힌 창문인지 모호하고, 어느 곳을 향해 어떻게 내다보았는지 무엇을 보았는지 우리는 알 수가 없다. 그러니 저 단문 문장은 (시적인) 의미를 감추는 방식으로, 의미의 잉여를 뿜어내고 있는 것이다. 바로 그 바깥, 잉여의 자리가 직관의 자리다. 시인은(예를 들면, 서대경은) 잉여의 문장을 끊임없이 소환하고, 절개하는 방식으로 자신의 직관을 드러내 보인다. 그러고 나면 애초에 곁으로 치워 두었던 신비로움이나 아우라나 알 수 없는 리듬 같은 것이 저 스스로 저를 만들어내고 있는 양을 우리는 보는 수가 있다. 카프카는 마지막으로 쓴다. ‘이런 문장이면 완전하다.’ 이 마지막 문장의 이면에서 건방진 열망 같은 것이 읽히는가? ‘소박한 삶(예를 들면, 서대경 시인의 시 제목이기도 하다)’의 완결형 같은 것이 읽히는가? 무언가를 쓰려고 했으니 썼다는 사실을 보여준 첫 문장, 그 ‘아무렇게나’의 자유가 직관으로 향하는 익숙한 단문을 불러냈다. 아무것도 표현하지 않았는데, 어떤 시적인 신념 같은 것을 강요하지도 않았는데, 단순히 문장 세 개를 이어 붙였는데, 이상하다? 생각지도 못한 이상한 표상 같은 것이 저 스스로 발생하고 있지 않는가! 단순히 이어 붙인 문장의 얼개가 빚어내는 이상한 신비의 표상 말이다. 카프카는 단 세 문장만으로 ‘언표 행위’에서 ‘시적 직관’으로 ‘신비의 표상’으로 이어지는 포에지(Poesie)의 내밀한 작동 구조를 엿보고 있는 셈이다. 세 문장을 조율하는 카프카의 기획은(예를 들면, 서대경의 기획은) 우발적이고 얼개는 촘촘하다. 어쩌면 시란 시인이 만든 직관들이 평행하게 뻗어 가며 만드는 표상이고, 그 표상들은 수렴하지 않고 발산한다. 시는 결국 개별자의 삶의 리듬에 함몰된다. 때문에 시인은 직관 앞에서는 아직 어린아이와도 같고, 표상 이전에는 아직 할 말을 찾지 못한 그러한 사람일 뿐이다. 카프카는 또 이렇게 말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렇게 태어난 한 편의 글이 당신과 만날 때 증폭되는 압도적인 푼크툼(Punctum)의 울림. 리처드 로티는 말했다.

   “언어를 변화시키는 사람은 그 변화로 말미암아 새로운 유의 인간이 될 것이다.”

   이로써 나는 서대경에 대해 단 한 마디 말도 하지 않고, 서대경의 『백치는 대기를 느낀다』에 대해 한 편의 글을 썼다.

 

   《문장웹진 1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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