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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들레예술문학상 심사후기]글쓰기, 말하는 입의 위대함

  • 작성일 2013-11-01
  • 조회수 675

[제2회 민들레예술문학상 심사후기]

 

 

글쓰기, 말하는 입의 위대함

 

 

고봉준(문학평론가)

 

 

 

 

    저녁 무렵, 트위터에 한 통의 메시지가 도착했다. 지난 학기에 내가 강의한 ‘문학개론’ 과목을 수강한 학생이었다. 그 강의에서 나는 학생들에게 ‘문학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자신의 답을 정리해 오는 과제를 내준 적이 있는데, 내게 메시지를 보낸 학생은 아직까지 그 질문을 화두처럼 붙들고 있다고 했다. 도대체 문학이란 무엇일까? 이 단순한 질문은 우리에게 엄청나게 많은 것을 요구한다. 우선 이 질문은 ‘문학’과 ‘문학 아닌 것’을 구분하는 잣대를 요구하고, 문학에 대한 개인적 취향 이상의 본질적인 규정을 요청한다. 당연히 그런 본질 따위는 없다. 아니, 설령 있다 해도 많은 시인․작가들이 이미-항상 그 본질을 위반하면서 도전하고 있으니 조만간 그 ‘본질’은 불완전한 대답이 될 운명이다. 받고 있을 테니 대답하는 순간 불완전한 해답이 될 운명일 것이다. 그래서 이 질문에 관한 한 나는 섣부른 대답보다는 질문 자체를 정면으로 마주하고 오랫동안 고민하는 치열한 자세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인간은 왜, 어떤 이유에서 글을 쓰기 시작했을까? 아마도 ‘무언가를 전달하거나 표현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엄밀하게 말하면 글쓰기는 둘 모두에, 문학은 ‘전달’보다는 ‘표현’에서 시작되었을 것이다. 표현하려는 욕망이 없는 사람은 글을 쓰지 않는다. 인류는 글쓰기/문학을 통해 ‘말’이라는 입의 기능 하나를 발명했다고 말하면 과장일까? 오랫동안 세상은 몇몇 예외적인 인간들을 제외한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입’은 먹는 기관이어야 한다고 가르쳐 왔다. ‘말하는 입’과 ‘먹는 입’, 즉 글쓰기나 정치에 어울리는 지식인-인간과 ‘먹고사니즘’에 충실해야 하는 노동하는-인간의 분할이 존재했던 것이다. 하지만 어느 순간 이 구분은 와해되었다. 오늘날 사람들은 ‘입’을 음식을 섭취하는 기관으로만 사용하지는 않는다. 그래서 이제 더 이상 ‘먹는 입’과 ‘말하는 입’의 구별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이것은 사실일까? 만일 여기서의 ‘말하는 입’이 일상적인 언어활동이 아니라 글쓰기를 포함하는 넓은 의미라면? 어쩌면 현대사회의 강력한 이데올로기인 ‘먹고사니즘’이 우리에게서 빼앗아간 것이 신체의 자유나 특정 이념만이 아닐지도 모른다. 오늘날 대다수 시민들, 특히 사회의 계급사다리 저층에 위치하고 있는 가난한 사람들 대부분은 ‘말하는 입’의 기능을 잃어버린 채 살고 있다. 그들은 자신들의 ‘입’을 무언가를 표현하는 데, 정치적인 주장이나 자신의 사고, 감정 등을 표현하는 데 사용하지 않는다. ‘먹고사니즘’은 인간에게서 성찰 기능과 표현 욕망을 빼앗고, 대신 눈앞의 이익에 대한 즉각적인 반응만이 중요하다고 가르친다. 그래서 이 이데올로기에 붙들린 사람들은 글쓰기, 특히 문학이나 예술적 표현은 먹고사는 일에 전혀 문제가 없는 유한계급만의 사치라고 생각하면서 자신에 내재하고 있는 그런 능력들을 없는 것으로 간주한다.

 

    나는 민들레예술문학상의 의미는 인간, 특히 가난한 사람들의 표현 욕망을 거세함으로써 그들을 단순한 노동자나 소비자의 수준에 머물도록 만들려는 힘에 대한 저항에 있다고 믿는다. 그것은 이 예술문학상에 투고된 응모작들을 읽어 보면 쉽게 확인된다. 투고의 동기나 이유와 별개로 응모자들은 이제까지 자신들의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던 글을 쓰면서 비로소 삶에 대한 성찰적 시선을 갖게 되고, 타인들에게 자랑할 만한 기억이 아닐지라도 자신의 목소리로 자신의 삶을 기술하는 경험을 하게 되었을 것이다. 어떤 순간에 왜 화가 났으며, 왜 그런 행동을 할 수밖에 없었는지, 그러면서도 어떤 감정을 느끼게 되었는가를 타인들을 향해 표현하게 된 것이다. 물론 ‘예술문학상’이라는 조건이 있기 때문에 그 표현 수준을 고려하지 않을 수는 없다. 하지만 심사를 진행하면서 새삼스레 느낀 것이 하나 있다. 그것은 어떤 글의 문학적 표현 수준이 곧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는 이유의 전부는 아니라는 사실이다. 어떤 글들, 아니 대부분의 글들이 나를 힘들게 했다. 타인의 고통과 상처를 읽고 듣는 과정은 결코 유쾌하지 않다. 차라리 문학적인 완성도가 높고 문장력이나 표현력이 뛰어난 작품들을 읽는 것이 쉬웠다. 그 순간에는 고통이나 상처로 얼룩진 삶의 맨얼굴과 마주하지 않아도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아름답게 표현된 고통과 상처는 어떤 감정의 동요나 불편함 없이 읽을 수 있지만, 투박하게 표현된 날것으로서의 상처는 대면하고 싶지 않았다. 애써 피하고 싶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 상처와 고통의 표현에 점수를 부여하고 등급을 매기는 행위 자체가 문학적인 태도가 아니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이 판단은 또 다른 문제로 이어진다. 그것은 여느 문학상 심사의 기준을 ‘민들레예술문학상’에 동일하게 적용할 수 있는지, 그렇게 해야 하는 것인지에 관한 것이다. 불행하게도, 심사를 맡은 사람은 눈앞에 놓인 수백 편의 글 가운데 극히 일부만, 그것도 순위를 매기는 방식으로 선택해야 한다. 그리고 그 선택은 공정성이나 타당성과는 별개로 심사자 자신이 납득할 수 있는 결과여야 한다. 일반적인 문학상 심사에서 심사자는 응모자보다 높은 위치에서 내려다보는 시선을 갖게 된다. 만일 이 높이에 대한 자신이 없다면 심사 자체가 불가능할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민들레예술문학상’ 심사에서 심사자에게 요구되는 첫 번째 조건이 그런 높이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차라리 첫 번째 독자라고 말하는 게 더 정확할 듯하다. 이번 심사를 진행하면서 아쉬웠던 점의 하나는 문학인-튜터들이 응모작을 매끈하게 손질한 흔적을 다수 발견한 것이었다. 물론 그들의 의도는 십분 이해할 수 있다. 한층 문학적으로 세련되고 깔끔한 글을 쓰도록 돕고 싶었을 것이며, 그것이 또한 자신에게 부여된 책무라고 믿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바로 그 행동이 정직한 독서와 감응을 방해하는 장치라고 느꼈다. 너무 매끈하게 다듬어진 상처의 기억들 앞에서 박수를 치는 일은 쉽지만 정서적인 반응을 하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이렇게 말할 수도 있겠다. 진정한 ‘문학적인 것’은 우리가 흔히 ‘문학적인 것’이라고 믿는 것과는 다른 곳에 존재한다고. 관습적인 의미의 ‘문학적인 것’이 ‘문학’이라는 이름으로 삶의 맨얼굴을 가리는 화장술이 되지 않기를 희망한다.

 

 

    《문장웹진 1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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