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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_자선 단편소설] 옥상에서 만나요

  • 작성일 2015-04-01
  • 조회수 1,651

 

[공개인터뷰, 나는 왜_작가 자선 단편소설]

 

 

옥상에서 만나요

 

 

 

정세랑

 

 


 

    63빌딩과 남산타워와 한강이 한눈에 보이는 멋진 삼각형의 꼭짓점에 서 있어도 전혀 행복하지 않을 수 있다는 걸, 너라면 알겠지. 너라면 가장 잘 알 거야. 나는 그 회사 옥상에서, 다리 사이로 뜨거운 에어컨 환풍기 바람이 나오는 걸 느끼며 오래오래 앉아 있었어. 옥상에 벤치를 놔주는 인간적인 회사가 아니었기 때문에, 빗물 자국으로 더러워진 환풍기를 의자 삼아 숨겨 올라온 비싸고 달달한 디저트를 먹었지. 초코 바나나 타르트, 블루베리 슈크림, 꽃처럼 피어나는 다양한 이름의 설탕을. 하지만 설탕조차도 내가 점프를 생각하는 걸 멈추게 할 수 없었어. 달고 신 것으로 녹일 수 없는 나쁜 생각들.
    원, 투, 쓰리, 포, 점프. 사선으로 스텝을 밟아 가로대를 뛰어넘는 높이뛰기 선수처럼 그 옥상 난간을 뛰어넘고 싶었어.
    아니면 양손으로 그 난간을 무지개색 철봉처럼 쥐고 스핀, 스핀 돌아뛰어내리기를 하고 싶었지. 배꼽 밑에서 단단한 강철이 느껴진 다음 끊임없는 활강.
    그것은 순간적이고 강렬한 충동이 아니었어. 그보다 항상 같은 농도로 마음 안쪽을 흐르고 있었지. 무심결에 언젠가는 정말 점프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런 불안마저도 둔탁하게 느껴졌어. 그래서 나는 뛰어내리는 대신, 주변 다른 빌딩의 옥상에 올라오는 사람들을 바라보곤 했어. 마치 먼 바다에서 마주친 선원들처럼 손을 흔들고 싶은 마음이었지. 하지만 그 멀리서도 내 시선을 느꼈는지, 그 사람들은 부담스러워하며 얼른 내려가곤 했어.
    지금 나는 너한테 손을 흔들고 있어.
    “너 나랑 내 러시아 여자 친구랑 한번 안 만날래?”
    박 피디가 손등으로 내 뺨을 쓰다듬으며 되도 않는 스리섬을 제안했을 때, 나는 화도 내지 못했어. 나도 배울 만큼 배운 여자인데 대체 왜 여기서 이 수모를 당하고 있나 생각했지. 아무나 피디가 될 때 피디가 되어서는, 똑똑한 후배들한테 밀리고 나니 우리 같은 을한테나 진상을 부리는 박 피디. 입사 이래 이 인간을 격주로 보고 있었어.
    내가 한숨을 쉬며 화제를 바꾸려 할 때, 맞은편에 앉아 있던 사수가 고개를 돌리는 걸 보았어. 많이도 아니고 7.5도쯤. 나는 왜 그 7.5도를 감지하고 마는 것일까? 어쩌면 누구나 이만큼은 다 힘든 것일 텐데, 결국 나를 내모는 건 스스로의 결벽증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지. 점점 나빠져 가는 간 수치가 그대로 드러나는 선배의 얼굴. 선배의 와이프는 오늘도 저 체취 나쁜 남자를 기다리겠지. 7.5도의 비겁함은 눈감아 주기로 했어.
    유명 스포츠 신문의 광고사업부. 사실, 이름만 들으면 다 아는 회사에 다닌다는 건 언뜻 꽤 괜찮아 보일지도 몰라. 친구들은 나더러 배가 불렀다고 그랬지. 하지만 실상은 달랐어. 내 주 업무는 비뇨기과 의사들, 마사이 워킹 신발 회사 사장들, 건강식품 회사 임원들 접대였거든. 대체 왜 그런 자리에 날 뽑았는지……. 아마 분명 어떤 할당량 때문이었을 거야. 그리고 내기를 했겠지. 쟤 얼마나 버티나 보자, 하고. 권위 있는 남자들 다수를 여자 사회 초년생이 버텨내기란 원래도 힘든데, 그 배경이 룸살롱이라면 말 다한 거 아니니. 나도, 부서 사람들도, 회사의 모두도 알고 있었어. 우리가 의례적으로 해야 하는 일들을 하며 돈만 까먹을 뿐, 생산적인 일은 하나도 하지 않는다는 걸. 수챗구멍쯤으로 여겨지는 걸 너도 알고 나도 아는 상황이란. 만약 광고사업부 사원이 아니라, 기자였으면 상황이 나았을까? 기자들 위주로 돌아가는 회사니까? 이제 와선 그것조차 확신할 수 없어.
    “이직을 하지 그래?”
    이런 말, 너도 자주 듣니. 이직이란 거, 남들만큼 난 쉽지 않았어. 서른 개쯤 넣으면 하나쯤 다음 단계로 통과되는 이력서를 가지고 어떻게 쉬웠겠어. 고향의 아빠는 신장투석을 매주 받아야 하고, 아빠를 돌보는 엄마는 류머티즘이 있고, 그런 부모님과 함께 사는 남동생은 아무리 봐도 우울증인 거 같았어. 나는 집안에서 유일한 경제인이었고, 의료보험이고 뭐고 다 나한테 달려 있었는데.
    언니들이 아니었으면, 난 정말 뛰어내리고 말았을 거야. 경리부의 맏언니 민정 언니, 편집 기자인 소연 언니, 제작물류부의 예진 언니. 세 사람은 마치 운명의 마녀들처럼, 다정하게 머리를 안쪽으로 기울이고 함께 고민해 주었어. 내가 처음 머리카락을 짧게 치고 왔을 때 놀라고 속상해서 눈물이 고였던 언니는 셋 중에 누구였더라.
    입사 때 어깨 아래까지 내려오던 머리를, 스포츠머리보다 조금 길게 밀어버린 거였어. 룸살롱 언니들과 구분되고 싶었거든. 반항심을 표출하려고 왁스로 뾰족뾰족 세우기도 했지. 옷도 칼 같은 바지 정장만 입었는데, 나름대로 온당히 대해 달라는 몸부림이었는데, 아뿔싸, 그게 회사 사람들과 접대처 사람들에게 남아 있던 일말의 배려심까지 날려버렸던 거야. 쟤 여자애니까 좀 봐주자, 하는 뒤틀린 배려심마저. 옥상에 서 있으면 두피에 바람이 느껴졌어. 바람마저 어딘지 공격적이었어. 난 뭘 한 걸까. 진지하게 여겨지려고 머리를 자르고 스타일을 바꿨는데 그저 룸살롱 언니들한테만 살가움을 이끌어내고 말았으니. 괜히 미안하더라고.
    회사 언니들과 나는 한 달에 한 번씩, 회사에 남아도는 영화시사회 표로 외출을 했어. 여배우들처럼 화려한 옷을 입고, 여배우들처럼 끔찍하게 죽지 않기 위해 애를 썼던 거야. 그리고 대창이나 장어 같은 고영양식을 먹었지. 반짝이는 원피스를 입고서.

 

    그러므로 친애하는 세 언니가 차례차례 시집을 가버리자, 그것도 무려 반년 동안 한꺼번에 가버리자, 내가 받은 충격은 어마어마한 것이었어. 처음 민정 언니가 90년대풍 두껍고 커다란 아저씨 가죽점퍼를 입은, 어딜 봐도 난 형사요, 온몸에 쓰여 있는 사람을 데리고 왔을 때는 떨떠름했지. 소연 언니가 400을 친다는 준프로급 당구돌이를 데리고 왔을 때는 뜨악했고, 마지막으로 예진 언니가 전통 악기를 만든다는 장구돌이를 데리고 왔을 땐 대체 이게 무슨 사태인가 싶었던 거야. 앞의 둘은 그렇다 치고, 마지막은 대체 어디서 만났담?
    “결혼해야겠더라고. 너 그거 아니? 몇 년 전에 한참 훌라후프 유행할 때, 나 집에서 막 울었어. 아무리 자리를 옮겨 봐도 훌라후프가 안 돌아가는 거야. 싸구려 행어니 부직포 서랍이니 온통 걸려서 도저히 돌릴 수가 없는 거야. 근데 결혼해서 둘이 합치면, 그래도 집에서 훌라후프는 돌아간다?”
    결혼을 하고 언니들은 회사를 그만뒀어. 아니, 일을 그만둔 건 아냐. 결혼을 한다고 일을 그만둘 수 있는 경우, 요즘 어딨어. 다만 돈을 조금 적게 받긴 해도 더 편한 직장으로 옮겨간 거지. 미세한 개선이었겠지만, 누군가가 안전그물이 되어 줄 때의 안도감이 언니들의 얼굴에 떠올랐어. 그 윤기가 자꾸 눈에 띄어서 난 심술이 났지.
    아니, 얼굴이 아니지. 메신저 대화명에 떠올랐다는 게 맞겠다. 우리는 예전처럼 옥상에서 매일 만날 순 없었으니까. 굉장한 풍광의 옥상에서는 언니들의 담배연기가 사라졌지. 나는 혼자 버려진 기분이 들었어. 예뻐해 주던 이모가 자기 애가 생기고는 예전만큼 예뻐해 주지 않아 삐친 조카처럼. 그래서 어느 날 메신저에서 예진 언니에게 물었지.
    ― 언니, 어떻게 그렇게 갑자기 결혼해 버린 거야? 어디서 만났어?
    별거 아닌 물음이었는데, 언니는 메신저 저편에서 뭔가를 한참 지웠다 썼다 했어. 대기 중입니다, 상대방이 메시지를 입력 중입니다, 상태 표시가 자꾸 바뀌었지.
    ― 만나서 얘기해 줄게. 다른 언니들이랑 다 같이 만나자.
    결국 그 말만 하더라구.

 

    간만에 네 사람이 모였어. 언니들은 나를 맞은편에 두고 셋이 한편에 앉았지. 정말 마녀들처럼.
    “언니들 어쩜 나만 버리고, 그렇게 쏙 가버려요? 사람들이 의리가 없어. 비결 좀 알려줘. 나도 시집 좀 가자.”
    “너도 가고 싶긴 하니?”
    민정 언니가 물었어.
    “당연하지. 왜 안 가고 싶어 할 거라 생각해요?”
    그러자 언니의 시선이 내 부숭부숭한 머리칼에 와 닿는 걸 느낄 수 있었지. 약간의 짜증과 염려가 동시에 섞여 있었어.
    “너 이거 다른 데 안 말할 자신 있어?”
    의자 깊이 기대어 있던 소연 언니가 물었어. 나는 열렬히 고개를 끄덕였어. 동공을 크게 열어 나의 믿음직한 영혼을 보여주면서 말야.
    그러자 예진 언니가 뭔가 얄팍하고 누리끼리한 노트 같은 걸 하나 내밀었어.
    “고대로부터 내려오는 주문서야.”
    “뭘 주문한다고요?”
    “이 바보 자식, 오더(order) 말고 스펠(spell) 말야!”
    소연 언니가 발끈했지만, 나는 여전히 떨떠름한 기분이었지. 언니들이 단체로 맛이 갔나? 워낙에 사주 보러 다니고 그런 거 좋아하는 언니들이긴 했지만 나름 단단한 생활인들인데 이거 왜 이래.
    “……고대로부터 내려왔다는데 왜 인쇄물이에요?”
    “고대로부터 내려온 걸 구한말이나 식민지 시대 초기에 인쇄한 거 같아.”
    “어디서 구했어요?”
    “동대문. 청계천 쪽 헌책방집.”
    “…….”
    “야, 안 믿기면 하지 마, 그만큼 절박하지 않으면 하지 말란 말이야!”
    “아, 알았어, 절박하다고, 절박해요.”
    언니들의 서슬 푸름에 질려, 나는 얼른 책을 받아 왔지.

 

    『규중조녀비서(閨中操女秘書)』라는 말도 안 되는 제목의 그 책에는 제목만큼이나 말도 안 되는 주문들이 가득 모여 있었어. 남편의 시앗을 제거하는 주문, 학문에 뜻이 없고 주색잡기만 하는 장남을 정신 차리게 하는 주문, 엉덩이가 가벼운 막내딸을 처신하게 하는 주문, 입이 가벼운 동네 이웃에게 갚아 주는 주문, 얹혀사는 군식구를 내보내는 주문……. 그것은 주문서라기보다 전근대 여성들의 고민을 모아 둔 책이라고 하는 게 맞을 것 같았지. 주문에 필요한 재료는 다 또 얼마나 엽기적인지. 닭을 네 번 훔쳐 먹은 오소리의 귀와 뒷발을 대체 어디서 구하겠어? 파삭파삭 오래된 종이를 넘기면서, 난 스스로가 너무 한심했어. 나는 매니시 룩, 보이프렌드 재킷이 잘 어울리는 현대 여성인데 왜 이런 걸 거들떠보고 있나 하고.
    언니들이 포스트잇을 붙여 둔, 붉은 실로 이어진 운명의 남자를 소환하는 법을 펼쳤지. 다른 것과 마찬가지로 가관이었어. 한문으로 된 부분은 역사학과를 나온 소연 언니가 분홍색 하이텍씨로 꼼꼼하게 잘 풀어 놨더라구. 요약하자면 이랬어.

 


    1. 영기가 깃든 북쪽 산을 강 건너에서 바라보며, 노을 녘에 높고 정갈한 곳에 소환진을 그린다.
    2. 티 없는 적옥, 청옥, 녹옥, 자옥, 백옥을 오망성 모양으로 둘 것.
    3. 미리 준비한 정제수 3분의 1, 달빛 아래서 흘린 눈물 3분의 1, 월경혈 3분의 1을 잘 섞어 생년월일과 태어난 시를 비단 종이 위에 쓴다. 이때 왼손 약지를 사용할 것.
    4. 위의 종이를 태우며, 조용히 읍(揖)하고 읍(泣)할 것.
    5. 정혼자를 맞아들여 일월성신이 인도하는 앞날을 따라갈 것.

 

    다른 것은 다 몰라도, 월경혈에서 나는 깜짝 놀라고 말았지. 그래서 소연 언니한테 전화를 했어.
    “언니언니, 이거 뭐야, 월경혈은 다 뭐야?”
    그러자 소연 언니가 전화 너머에서 움찔하는 걸 느꼈지.
    “고대의 주문이란 원래 조금쯤 찝찝하고 그래야 효과가 있는 거야.”
    “이 색깔별 옥은 다 어디서 구했어요?”
    “옥은 역시 춘천이지.”
    “앗, 언니 주말마다 어딜 다니나 했더니 옥 사러 간 거였어?”
    “티가 없어야 해. 민정 언니가 약간 티 있는 옥을 잘못 구해서 두 번 했잖아. 옥 시장 다니며 신중하게 골라. 모양도 스크래치 없이 둥근 걸로 잘 골라.”
    “비단 종이는요?”
    “인사동에 우리 단골 가게 생겼잖아. 그 집 약도 줄게.”
    “북쪽 산이 보이는 강 건너 언덕은 어떡하지?”
    “회사 옥상이 딱이야. 주말에 철문 잠그고 거기서 해. 고대의 주문이 언덕 대신 빌딩도 쳐주더라, 얘.”
    “……언니, 이거 정말 효과 있어?”
    “일단 해봐. 깜짝 놀랄걸?”
    언니와 전화를 끊고, 나는 약국에 갔어. 정제수를 사러. 그나마 가장 쉬운 품목이었지. 그리고 5주에 걸쳐 나머지를 준비했어. 눈물은 쉬웠으나, 암컷 원숭이 떼처럼 주기가 하나 되었던 언니들이 없으니 생리가 좀 불규칙해지고 말았거든.

 

    막상 일요일 쌀쌀한 저녁, 회사 옥상 문을 잠그고 그곳에 서니, 마음이 착 가라앉았어. 누가 내가 이러고 있는 꼴을 보면 어쩌나 싶던 불안감도 건조한 서울 공기에 날아가고 말았지. 멀리 보이는 남산타워는 소원을 비는 탑처럼 보였고.
    주문서에서 요구하지는 않았지만 나는 목욕재계를 하고, 새로 산 속옷을 입었어. 너는 분명 내가 뭘 잘못했을 거라고 생각할 거야. 하지만 아냐, 정말로 아냐. 나는 제사 음식을 준비하는 정승집 맏딸처럼 신중했어. 그곳에서 벗어날 수 있다면 뭐든 할 수 있었어. 언니들 말대로 절박했지. 친근하게 팔을 잡는 척하며 손등으로 가슴을 건드리는, 아무렇지 않게 무릎을 치는 척하며 허벅지 안쪽으로 손가락을 돌리는 변태 아저씨들로부터 벗어날 수만 있다면. 나는 캐비닛 안의 몇 년 마른 플러스펜보다도 가치가 없는 소모품이었어. 모두 내가 완전히 소모되기만 기다리는 것 같았어. 누군가 한 사람에게만이라도 플러스펜보다 가치 있는 무언가가 될 수 있다면. 스테이플러 심 같은, 면봉 같은, 클립 같은 그런 기분을 잠시라도 잊을 수 있다면. 그 모든 것의 답이 이게 아니리라는 걸 알면서도.
    번개라도 칠 줄 알았지.
    아무 빛도 소리도 없었어.
    나는 실패한 줄 알고, 예의 벤치 대신 쓰는 에어컨 환풍기 위에 앉았어. 그새 기온이 뚝 떨어져서 환풍기는 멈춰 있었지. 끊었던 담배가 매우 생각났기 때문에, 그럴 때마다 먹는 주전부리를 찾아 가방 안을 더듬었어. 담배를 닮은 가는 막대과자를 찾았어. 언제 넣어 놨는지도 모르는, 뜯긴 봉투 때문에 산화될 대로 산화된 과자. 먼지 맛이 났어. 구부정하게 앉아 오독오독 씹었지. 주전부리를 항상 주변부리라고 잘못 말하던 옛 남친도 잠깐 떠올랐어. 그놈이라도 잡을 걸 그랬나……. 미리 가지고 올라간 양동이의 수돗물로 소환진이나 지워야겠다, 다시 몸을 일으켰을 때였어.
    거기 남편이 있었어.
    그걸 남편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말야.

 

    나는 비명을 질렀고, 옥상 계단 뒤로 미친 듯이 뛰어가 몸을 숨겼어. 경련을 일으키는 손가락으로 뒷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냈어. 그리고 민정 언니에게 전화를 걸었지. 가장 최근 목록이 민정 언니였거든.
    “언니!”
    그러나 민정 언니는 뭐라뭐라 속삭이더니 얼른 끊어버렸어. 시댁에 가 있는 모양이었어. 소연 언니는 아예 받지 않았지. 나는 예진 언니의 이름을 검색했어.
    “어, 왜.”
    “언니언니, 소환 말야!”
    “어, 했어?”
    “그거 말 그대로 소환이었어요?”
    “응, 나타났지? 아휴, 우리 남편은 소가죽 벗긴 걸 들고 있었고, 소연 언니네는 큐대를 들고 있었고, 민정 언니는…….”
    “아악, 됐고 됐고, 처음부터 사람이었어?”
    “에이, 남자는 천천히 사람 만드는 거야. 놈팡이에서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는 거지.”
    “그게 아니라 외모가!”
    “왜? 그렇게 못생겼어?”
    “못생기고 잘생기고를 떠나서 일단 사람이 아닌데요?”
    “뭐?”
    나는 빼꼼, 다시 소환진 쪽을 내다보았어. 아아, 남편은 사람이 아니었어. 어떻게 봐도 사람은 아니었어. 대충 사람의 실루엣을 하고 있었지만 도저히 사람으로 볼 수 없었지.
    인간이면서 인간 아닌 것.
    옷이면서 옷 아닌 것.
    얼굴이면서 얼굴 아닌 것.
    그건 마치 전위적인 예술을 위해 사는 설치미술가가 죽은 동물과 철사, 늪에서 오래 썩은 나무로 엮어 놓은 것 같은 형상이었다니까. 소환술도 일종의 순간이동 같은 거니까, 차원의 경계에서 부작용으로 몸이 찢겨버린 걸까? 내가 엉뚱한 짓을 해서 사람 하나를 죽인 걸까? 나는 패닉하고 말았고, 예진 언니가 무슨 일이냐고 계속 묻는데도 대답 없이 전화를 끊고 말았어. 버릇없이.
    유일하게 안심했던 부분은, 남편이 숨을 쉬고 있었다는 거야.
    그리고 다음 순간 그 안심이 순식간에 증발했던 것은, 남편의 발이 허공에 떠 있었기 때문이야.
    나는 기절할 것 같았지만, 인간으로서 최대한 예의를 갖춰 남편에게 다가가 인사를 했지. 혹시나 외계인일 경우, 지구인 전체가 예의 없다고 생각하면 안 되잖아.
    안녕하세요, 랬던가. 아마 헛소리를 했을 거야. 남편의 얼굴을 제대로 쳐다도 못 봤지. 대충 얼굴 근처라고 생각되는 부분을 보았지만, 오염된 가죽의 너울거림 같은 것밖에 발견하지 못해서 다시 발끝을 내려다봤어. 허공에 떠 있는 남편의 발에서, 그래도 발톱 비슷한 걸 발견했어. 아무리 봐도 금속성이었지만.
    “저기, 제가 잘못 건 것 같거든요?”
    마치 전화를 잘못 걸었다는 것처럼, 어이없는 변명도 해봤어. 내 운명적 상대가 당신일 리 없으니, 제발 어디서 왔는지 몰라도 그 세계로 돌아가라고 말이야.
    횡설수설하는 나의 말이 그치자, 남편이 대답했어.
    “……망.”
    하지만 나는 바람소리에 잘 듣지 못했지.
    “네? 뭐라고요?”
    남편은 다시 입을 열지 않았어. 그러나 뒤늦게 나의 청신경은 지나간 단어를 복원해 냈어.
    그것은, 멸망, 이었지.

 

    남편을 소환하려다가 멸망의 사도를 소환해 낸 여자라니. 넌 아직도 내 얘기를 듣고 싶니? 내가 지구 멸망의 주범으로 기억될 역적이라도?
    나는 옥상에 시원하게 토했어. 그러고는 물을 한 동이 더 길어와 옥상을 치웠어. 토하고 나니 기분이 나았어. 내 인생이 그렇지. 다들 잘만 이루는 작은 소원도 내가 바라면 대재앙이 되어버리는 게 당연하다고, 시니컬한 깨달음이 정신을 차리게 해주었어. 욕을 몇 마디 했던가. 멸망의 사도는 별로 개의치 않고 계속 소환진이 있던 자리쯤에 떠 있었어.
    “어디 가지 말고, 여기 있어요.”
    뭐든 간에, 내가 불렀으니. 나는 성숙한 사회인이자 시민으로서의 책임감을 느끼며 옥상 문을 열고 사무실로 내려갔어. 멸망의 사도를 옥상에서 이동시켜야 했으니까. 다행히 작년에 가져다 놓고 치우지 않았던 핑크 후드와 체크 담요가 있었지. 민정 언니가 버리고 간 넉넉한 카디건도 있었어. 나는 그걸 가져다가 멸망의 사도에게 두리두리 감았어. 차원을 건너온 내 남편은 아주 우스꽝스러운 꼴이 되었지만, 그래도 처음처럼 무서워 보이진 않았어.
    장갑을 끼지 않고 만져도 될까, 망설였던 것은 사실이지만 다행히 남편의 손은 독성 점액질로 덮여 있거나 하진 않았어. 내가 조용히 손을 끌자, 미끄러지듯 나를 따라왔지. 콜택시를 불러 그를 밀어 넣었어. 택시 아저씨는 그저 성형수술한 사람이려니 했을 거야. 회사 근처엔 빌딩 하나를 통째 차지한 거대 성형외과들이 즐비했거든.

 

    현관에 박스를 깔아 줬어. 어차피 허공에 떠 있는데 비단 이불이 무슨 소용이겠어? 그렇게 초야를 맞았지.
    잠이 올 리가 없었어.
    “아침에 뭐 먹고 싶은 거 없어요?”
    예의상 물었는데,
    “……망.”
    남편이 대답했지. 지구를, 인류를 아침밥으로 줄 수 없는 내가 한심스러웠어. 두 시간이나 잤을까, 새벽에 새 밥을 지어서 내밀어 봤지만 남편은 한 입도 먹지 않았어. 멸망의 사도에게 아이 밥 먹이듯 숟갈을 떠미는 내 모습이라니.
    그 후 며칠 내내 노력하지 않았던 건 아니야. 몇 번이고 메뉴를 바꿔 먹이려 했지만, 허사였어. 결국 나는 완전히 포기하고, 남편을 방치했지. 그거 알아? 사람은 정말 적응을 잘하는 동물이야. 불합리함을 지나 부조리함에 가까운 직장에도 적응했듯, 나는 멸망의 사도 남편에게도 적응했어. 남편이 현관에 떠 있든 말든 깊이 잤고, 옷을 갈아입었고, 속옷 빨래를 널었지. 신경이 쓰이지 않았냐고? 아니. 솔직히, 남편이 나 없는 사이 서랍을 뒤지며 변태 짓이라도 하는 게 나았을 거야. 백 배 나았지.
    나는 너무 좌절해 있었어. 더 나빠질 게 없다고 생각해도 더 나빠지는 게 인생이란 걸 알면서도, 기가 막혔어.
    그래서 어쨌는 줄 알아?
    언니들과 연락을 끊었어. 지금 생각하면 바보 같지만 말야, 당시에는 견딜 수가 없었거든. 뭔가 잘못되었다는 걸 깨달은 언니들 셋이 번갈아 전화를 걸고, 찾아오고 했지만 감당할 수가 없었어. 뿐만 아니라 가족들이 올라오는 일도 미리 막았어. 누굴 집에 들일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으니까.
    그리고 남편은 점점 상태가 나빠졌지. 딱히 지표가 이거다, 할 수는 없었지만 본디의 상태보다 점점 나빠지고 있었어. 더 퀭해지고 더 어두워지고 더 그로테스크해지고 더 너울거렸지. 자다가도, 남편이 공중에서 진동하는 소리에 깨어나는 일이 잦아졌어.
    하루는 그 진동소리가, 신음인 걸 알았지. 나는 부슬부슬한 극세사 잠옷을 입고 남편 앞에 섰어. 미처 감지 못 하고 잠든 머리에서는 담배와 위스키 냄새가 났지만, 상관없었어. 남편에게 코가 있는지도 확신할 수 없었으니까.
    “우린 아닌 것 같아요.”
    남편이 진동을 멈췄어. 나는 의사 표현을 좀 더 확실히 하려고 남편에게 가까이 갔어.
    “어떤 우주에서도, 어떤 차원에서도 우리가 서로의 상대일 리 없어.”
    눈이 있을 법한 자리를 들여다보자, 남편도 날 물끄러미 보는 것 같았지. 하지만 난 그의 표정을 전혀 읽을 수 없어서, 비명을 지르고 싶어졌어.
    그때였어.
    남편이 두 손을 뻗어 내 머리를 감싼 것은.
    비명은 편도선쯤에서 얼음이 되었지. 나는 몸부림을 치고 싶었지만, 녹슬고 휘어진 철근 파이프 같은 남편의 손가락들이 머리를 옥죄어 오자, 그마저도 할 수 없었어.
    남편이 고개를 숙여, 입술이라고 생각되는 축축한 구멍을 내 정수리에 밀착시켰어. 돌기인지, 이빨인지, 빨판인지 알 수 없는 작은 기관들이 일제히 뭔가를 빨아올리기 시작했지.
    오래였던가.
    순간이었던가.
    나는 쇼크 속에 기절했어.

 

    다음날 아침, 나는 이불 위에서 깼어. 남편이 나를 옮겨 준 건지, 내가 비몽사몽간에 기어간 건지는 알 수 없었어.
    그리고 놀랍게도 몸이 가뿐했지.
    그렇게 가뿐할 수가 없었어. 몸의 모든 독소가, 노폐물이, 적체되어 있던 중금속 성분이 다 빠져나간 것 같았어. 스트레칭도 안 했는데 말랑말랑 모든 관절이 부드러웠고, 눈이 건조하지도 않았고, 기분 나쁜 땀이 배어 있지도 않았어. 누군가 나를 키보드 청소하듯 해체해서 먼지를 털고 다시 조립한 것 같았다니까. 새로 태어난 것처럼 뽀송했다면, 넌 이해하겠니. 마지막으로 상쾌하게 일어난 게 언제였는지 기억이나 하니?
    눈곱도 떼지 않은 채로 남편에게 갔어. 고개를 이리 들이밀고, 저리 들이밀고, 용기를 내서 쿡쿡 찔러 보았지. 어젯밤 같은 갑작스러운 스킨십은 없었어.
    하지만, 뭐랄까.
    남편은 윤기가 돌아 보였어. 잘 먹은 것처럼 윤기가.
    “어제 나한테서 뭘…….”
    빨아 먹었냐, 고 말하려다가 나는 잠시 언어를 순화했지.
    “가져갔어요? 무언가, 빨아들였잖아요.”
    바람이 불지 않아도 너울거리는 해진 옷자락을 쥐고 내가 수줍게 물었을 때, 남편이 다시 한 번 대답했어.
    “……절망.”
    아.
    귀지도 다 빠져나간 걸까, 나는 그제야 남편의 말을 제대로 들었던 거야. 멸망이 아니라 절망, 이었어.
    나는 간만에 절망 프리한 상태로 출근을 했지. 저녁이면 미량이 다시 몸속에 쌓이겠지만, 더는 두렵지 않았어.

 

    매일 저녁, 내 정수리를 맡겼음에도 불구하고 남편은 점점 더 배고파했지. 단자가 헐거워진 진공청소기처럼 약한 모터 소리를 냈어. 그도 그럴 법한 게, 처음에는 평생 쌓인 절망을 먹였으니 먹을 만했겠지만, 하루치 절망이란 건 가루약 한 봉지만큼도 안 될 것이었어. 쓰디쓰지만 적은 양.
    안사람의 의무를 중히 생각하는 나는 다른 방법을, 다른 먹잇감을 찾아야 했어. 마침, 대학 동기 중 하나가 해고를 당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친구에게는 미안하지만 쾌재를 불렀어. 대학 때부터 맺고 끊는 게 좀 불분명하더니 남자가 많은 회사에 입사해 사고를 친 게 뻔했는데, 나는 무조건 친구를 편들고 위로했지. 이태원에서 테킬라 샷을 왕창 먹인 다음 업고 우리 집으로 왔어.
    남편은 내가 보기엔 꽤 고마워하는 표정을 지으며, 기꺼이 내 친구의 절망을 빨았어. 나는 공모자의 은밀한 미소로 화답을 하고는 친구가 깨기 전에 얼른 택시를 잡아 데려다줬어.
    다음날 친구에게 전화가 왔어.
    “어제 나 누구랑 싸웠냐? 귀 뚫은 거 맨 위에 거에서 피가 나.”
    남편이 머리 양쪽을 꽉 쥘 때 건드린 모양이었어. 나는 아무렇지도 않게 잡아뗐지.
    “어디 니트에 걸린 거 아냐?”
    “그래? 흠. 그래도 그렇게 마신 것치고 숙취가 하나도 없는 게 신기하다, 야. 넌 속 괜찮아?”
    “나야 말끔하지.”
    첫 납치 이후로, 나는 점점 더 대범해졌어. 상을 당한 회사 동료, 이혼한 친척, 유전병 증세가 서서히 나타나기 시작한 동네 오빠, 불임인 걸 알게 된 아는 동생, 유학을 포기한 대학원생, 교통사고로 회복 못 할 부상을 입은 운동선수, 공무원 시험 5수생, 발톱이 빠져 중요한 공연을 놓친 무용수, 사업을 말아먹은 삼촌, 기러기 아빠, 첫사랑에 실패한 여중생, 임용이 안 된 교수, 도박 중독자, 재계약에 실패한 비정규직, 아나운서 준비생, 부인과 사별한 교감 선생님, 수해를 당한 농민, 청년 인턴, 아토피가 심한 미용실 언니, 이민에 실패해 돌아온 이민자, 대필 작가, 가입 펀드가 마이너스 60에 다다른 투자자, 형무소 간수, 우울증 환자, 대입 재수생, 구제역 돌 때의 축산업자, 퇴폐 검사의 부인, 가출 청소년, 무명 밴드 베이시스트, 거식증 환자…….
    그렇게 활기차게 사람들을 만나고 다닌 적은 없었어. 그리고 그들 모두가 훨씬 가벼운 표정으로 세상을 걸어 다닐 걸 생각하면 기분이 좋아졌지. 우리 부부는 세계 평화랄지, 한 번도 존재한 적 없었던 이상향이랄지 그런 걸 곧 이룩할 것 같았어. 멸망의 사도는 무슨, 희망의 사도잖아.
    물론 일이 그렇게 잘 풀릴 리는 없었지.

 

    “너, 박수무당이랑 동거한다며?”
    “엑? 그건 대체 어디서 나온 소리예요?”
    “너희 집에 데려가서 살풀이해 준다며?”
    “누가 그래요?”
    “2팀 한 기자가 그러던데?”
    나는 오래 고민하지 않았어. 2주의 기간을 주고, 회사를 그만두었던 거야. 소문 때문이 아니었어. 그보다는 절망을 떨치고 일어난 남동생이 자력갱생을 하여서 경제적 부담이 덜해졌고, 회사에서 가장 절망하고 있던 사람들은 대충 구한 것 같았고, 남편을 먹이려니 개인적인 인맥은 이미 바닥난 후였기 때문이었지.
    그러고 나서 나는 한 번도 고려한 적 없는 선택을 하게 되었어. 모교로 돌아간 거야. 역시 한 번도 고려한 적 없는 전공까지 골랐지. 상담심리학. 절망한 사람들을 물색하기에 그보다 좋은 분야가 어디 있겠어. 대학원도 물론 교수들이 내 손을 잡고 술을 먹여 달라 하고 지옥 같은 건 매한가지였지만, 나는 이를 악물었지. 나같이 메롱메롱한 사람을 악물게 하다니 얼마나 이상한 세상이야. 매일 저녁 남편에겐 진수성찬이었어.
    힘겹게 상담심리사 자격증을 딴 후에, 나는 서울을 떠났어. 큰 강의 작은 지류가 지나가는 한적한 소도시로 향했지. 망한 공단과 노선도 몇 개 없는 버스터미널 하나가 있는 곳에 새로 자리를 잡은 거야. 솔직히 말할게. 처음엔 힘들었어. 서울의 매연 섞인 공기가 그리울 정도였다니까.
    지방자치단체에서 하는 허울만 좋은 청소년센터에 일을 구했으니, 연봉도 형편없었어. 예전 월급의 반 조금 넘나. 결혼을 하면 규모가 커져야 하는데, 난 반대로 줄어들었어.
    옥상 바로 아래, 먼지 냄새 나는 사무실. 나는 왜 만날 먼지를 몰고 다니나……. 그래도 이곳은 햇빛마저 다른지 항상 옛날 영화 같은 기분이 났어. 수도 없이 빤 것 같은, 원래의 색깔을 알 수 없는 커튼이 마음에 들었어.
    알아? 소도시의 청소년, 특히 망한 공단이 있는 지역의 청소년들은 서울 애들보다 훨씬 더 농도 짙은 절망을 한다는 거? 내 선택은 아주 탁월했던 거야.
    “이 이상한 건 뭐예요?”
    처음 아이들은 남편을 경계했어.
    “그, 음, 그거, 명상을 도와주는 장승이야.”
    나는 당황해서 얼른 둘러댔지.
    “아.”
    믿냐? 정말 믿는 거냐? 아이들을 속이는 게 이렇게 쉽다니, 난 믿을 수 없었지. 그나마 다행인 건 남편이 점점 정말 장승처럼 되어 갔다는 거야. 어리고 진한 절망을 섭취할수록 목질화되어 갔거든. 갈색도 아니고 회색도 아닌 반투명한 결정들이 맺히더니, 남편의 발이 무거워져 어느 날인가에는, 땅에 닿았어. 조경 비용을 하나도 들이지 않은 옥상은 풀 한 포기 없이, 주먹만 한 자갈들만 가득 깔아 놓아 휑했는데 남편을 거기 세우니 그래도 좀 보기 나았어. 남편은 마치 그 옥상에 서기 위해 이 세계로 온 것 같았지. 어울렸어. 사무실에 있으면 철새들이 날아가다 남편 곁에서 쉬는 소리를 들을 수가 있었어. 자갈자갈 꽥꽥, 자갈 꽥, 자갈 꽥 그런 소리였지. 철새들은 처음엔 좀 귀여웠고, 날이 갈수록 시끄러워졌지만 내가 올라가면 금방 날아가 버렸어. 바나나킥을 손가락 사이에 끼우고 남편과 오래도록 서 있고 싶었지만, 그러면 나는 팔이 아파지고 철새들은 배가 아파졌겠지.
    그렇게 남편은 매일 배불리 먹을 수 있었고, 나는 유명한 상담심리사가 되어 갔어. 지역 신문에서 취재도 왔다니까.
    지역 신문 기자가 물었지.
    “비결이 뭡니까?”
    “명상법을 도입했어요. 상담이 끝나고, 옥상에서 명상을 해요.”
    남편을 배경으로 인터뷰 사진도 찍었지.

 

    말이 없어진 남편에게 섭섭하진 않았어. 오래된 부부는 다 그런 거지. 가끔 나는 상담실을 잠그고 혼자 옥상에 올라가 남편을 눕혔어. 애교 있게 팔베개를 해달라고 조르거나, 절망이 굳어 단단하고 딱딱해진 몸 위에 누워 보기도 했지. 아름다운 결정, 짙은 형상, 내 운명적 사랑을 안고 하늘 아래에……. 머리를 기르진 않았지. 강바람이 두피에 바로 와 닿는 게 좋아서.
    이제 내가 있는 옥상은 뛰어내려도 살아남을 수 있는 높이야. 더는 뛰어내리고 싶지도 않고.
    하지만 너는.
    내 후임으로 왔다는 너는, 아마도 그 옥상에 있겠지. 내가 너에 대해 이상한 책임감을 느끼는 게 왜인지는 모르겠어. 분명히 말할게. 연민은 아냐. 그저 『규중조녀비서』를 받을 사람이 너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뿐이야. 너는 분명 울 테고, 운다면 비가 들지 않는 가장 안쪽의 에어컨 환풍기 위에 앉아 울겠지. 너의 귀걸이나 반지, 라이터나 전화기 같은 게 떨어져서 그 밑으로 들어간다면 좋을 텐데. 밑면에 내가 방수 처리를 해서 붙여 놓은 이 편지와 비서(秘書)를 발견할 수 있게.
    너라면 이해할 수 있을 거야. 모든 사랑 이야기는 사실 절망에 관한 이야기라는 걸. 그러니 부디 발견해 줘. 나와 내 언니들의 이야기를. 너의 운명적 사랑을. 그 지옥 구멍에서 올라올 수 있는 계단을.
    옥상에서 만나, 시스터.

 

 

 

작가소개 / 정세랑(소설가)

1984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고려대 국어국문학과, 역사교육학 전공. 2010년 판타스틱과 네이버 오늘의 문학에 「드림, 드림, 드림」을 발표하며 등단. 『덧니가 보고 싶어』, 『지구에서 한아뿐』 발간.

 

 

   《문장웹진 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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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책과 가을의 일

[에세이] 산책과 가을의 일 박주영 오랜만에 동네 산책을 했다. 여름이 시작되고는 햇빛이 사라진 밤 산책을 하다가 그나마도 열대야 때문에 멈춘 지 오래되었다. 오늘은 해가 뜨기 전 일어났고 스탠드를 켠 책상에 앉아 소설을 썼다. 어느새 창밖이 밝아지는 걸 보다가 해가 완전히 뜨기 전에 바깥으로 나가 걷기로 했다. 산책은 어슬렁거리며 그냥 걷는 것이지만 소설가의 산책에는 생각이 없을 수 없다. 생각을 하지 않으려는 목적이었다면 달리기를 했을 것이다. 나는 산책과 걷기를 구분해서 다이어리에 기록한다. 산책이 바라보고 생각하며 이동하는 것이라면 걷기는 건강이라는 목적을 가장 염두에 둔 움직임이다. 여름이 아니라면 산책은 주로 오후나 해질 무렵에 한다. 늦게 자고 오전에만 일어나도 뿌듯한 사람이라 일어나자마자 소설을 쓰고 쉴 즈음이 대개 그 시간이기 때문이다. 산책을 하면서 내가 지금까지 쓴 것을 생각하다가 빈틈을 메울 생각이 떠오르기도 하고 다음 장면을 생각하기도 하고 이 소설이 제대로 가고 있는지 고심하기도 한다. 여름 해가 뜨기 전 오래간만에 소설을 생각하며 산책을 한다. 나는 문학 전공도 아니고 소설 쓰기를 배운 적도 없고 주변에 글 쓰는 사람도 없었다. 그래서 소설가가 된 후 소설가를 만날 기회가 생기면 알고 싶은 것들을 질문하곤 했다. 글쓰기가 잘 안 될 때는 어떻게 하느냐는 질문에 대한 2개의 대답을 기억한다. 한 분은 그냥 걷는다, 라고 답했고 한 분은 안 되어도 앉아서 써야지 어떡해, 라고 했다. 두 분 다 그때 20년 가까이 소설을 거뜬히 써온 분이었다. 나는 2개의 답을 지금껏 생각하고 있고 그게 지금의 나에게는 정답이 되었다. 하지만 정답을 안다고 정답대로 할 수 있는 건 아니다. 나는 자주 책상 앞에서 벗어나고 걷는 것이 아니라 누워 있는다. 그냥 진짜 누워만 있는데, 요즘은 소설 쓰는 일에 자주 지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또 한 분의 조언이 생각난다. 건강을 챙기고 운동을 해라, 그러지 않으면 장편소설을 쓸 수 없다. 여기의 조건은 ‘나이 들수록’이다. 비교적 늦은 나이에 등단했고 처음부터 장편소설을 썼던 나는 그 조언이 그때는 크게 와 닿지 않았다. 나는 이미 젊지도 않고 약해 빠졌는데 장편소설을 쓰는 데 그리 힘이 들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그 조언의 참 의미는 어떤 고비마다 왔다. 나이는 한 살씩 먹는 게 아니라 쌓여 있다가 한꺼번에 온다는 걸을 알게 되었다. 어느 날부터 손목이 아프기 시작하더니 어느새 허리가 아프기 시작하고 이제 어깨가 아프다. 남들은 여름휴가를 가는 시기 나는 병원을 다녔다. 의사는 어깨 인대가 손상되었다고 했다. 특정 자세를 취하지 말라고 했는데 그 자세는 하필 내가 반평생을 취해 온 자세이다. 지금도 나는 그 자세이다. 자판을 치고 노트에 글을 쓰려면 취할 수밖에 없는 자세. 그리고 의사는 옆으로 눕지 말라고 했다. 그런데 어릴 때부터 나는 그렇게 누운 자세로 책을 읽었다. 너무 크고 두껍고 무거운 책만 그 자세로 읽을

  • 관리자
  • 2024-10-01
다시 서정을 위해

[에세이] 다시 서정을 위해 권상진 스무 살 무렵이었던 것 같다. 서른이 되기 전에 시인이 되겠다고 주변에 떠들고 다녔던 기억이 아슴하다. 「홀로서기」를 외웠고 「지란지교를 꿈꾸며」를 외웠다. 이생진을 읽고 백창우를 읽고 박노해를 읽었다. 잔잔하게 때로는 웅장하게 가슴을 밀고 들어오는 시편들이 심장을 가로세로로 뛰게 만들었다. 백석과 김수영과 기형도의 이름은 몰랐지만 굳이 그들이 아니어도 충만한 시간들이었다. 시집이 이천 원에서 삼천 원 정도 할 때여서 큰 부담 없이 고를 수 있었고 외출할 때 시집 한 권을 들고 밖을 나서도 아무도 이상하게 쳐다보는 이도 없었다. 오히려 뭇 여성들의 시선이 슬쩍슬쩍 내 턱선을 지나 책장에 닿는 기분을 느낄 수 있어 좋았다. 생일이나 기념일에는 으레 서점에 들러 시집을 골랐다. 『넌 가끔가다 내 생각을 하지 난 가끔가다 딴 생각을 해』(원태연),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류시화), 『친구가 화장실에 갔을 때』(신진호) 같은 시집을 골라 슬쩍 건네던 날들이 아련하다. 스물이라는, 가라앉을 것 하나 없는 맑은 감정에서 속살거리는 말들을 시인들은 대신 말해 내고 있었다. 그러는 동안 십 대는 가고 이십 대가 펼쳐지고 있었다. 고등학교 입시에 실패하고 대학을 쫓겨나 군대를 다녀오고 나니 어느새 아무데도 기댈 수 없는 성인이 되어 있었다. 오래된 가난이 불편하지는 않았지만 그때부터 가난은 나를 가만히 두지를 않았다. 공장 일을 시작했는데 처음 해보는 노동이란 게 미치도록 좋았다. 종일 몸을 쓰고 땀을 흘리는 일이 알 수 없는 쾌감을 안겨 주었고 월급이라는 보상까지 덤으로 안겨 주었다. 시를 읽고 쓰는 일만큼 일이 재미있었고 누구의 도움 없이 혼자서도 살아낼 수 있다는 자신감이 더없이 좋았다. 지쳐 잠들기 전 문득 돌아본 시의 한때는 짧은 여행지의 추억처럼 아득하기만 했다. 나의 스물은 급류처럼 흘러갔고 시는 둑 너머에 있어 쉽게 손이 닿지 않았다. 하지만 일과 돈, 그리고 자립의 기쁨은 오래가지 않았다. 노동은 즐겁고 땀은 향기로웠지만 갑자기 내가 꿈꾸던 삶이 이런 것이었던가 하는 질문이 나를 툭 한 번 치고 갔다. 해지는 풍경만 봐도 맥박이 난동을 부리고 꽃과 낙엽의 표정을 살피면 왠지 모를 눈물이 맺히던 한 시절의 기억이 불현듯 피곤에 지친 등을 흔들어 깨웠다. 시인이 되겠다던 꿈을 무참히 짓밟고 나를 공장 노동자로 내몰았던 대학교 재단 이사장의 말이 떠올랐다. ‘약속은 지키면 좋은 것이고 못 지키면 어쩔 수 없는 일’이라던 그의 말. 그가 지키지 않은 약속 때문에 학교에서 쫓겨난 나는 궤도를 이탈해 버린 행성처럼 어둠 속으로 무작정 떠밀려가고 있었다. 막막한 혼돈 속으로 나를 밀어 넣었던 약속이란 단어가 다시 나를 수습하고 있었다. 시간은 이미 서른을 지나갔고 아무도 내게 왜 약속을 지키지 않느냐고 물어 보는 이는 없었지만 스스로와의 약속은 끝내 지켜주고 싶었다. 그렇게 시가 다시 내게로 왔다. 세월도 변했고 시도 변해

  • 관리자
  • 2024-10-01
과거를 보는 미래 SF

[에세이] 과거를 보는 미래 SF 곽재식 며칠 전 나는 한 행사에서 SF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소개하는 발표를 하나 맡게 되었다. 발표가 다 끝나고 질문 답변 시간이 되었는데 청중 중 한 분이 “SF라면 미래를 생각해 봐야 하는데, 왜 옛날 SF를 소개했느냐?”라고 질문했다. 그날 행사 중에는 답변을 짧게 드렸지만 이 내용은 한번 깊게 따져 볼 만한 재미난 주제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오늘은 그 이야기를 한번 해보려고 한다. 명작 SF로 자주 손꼽히는 1970년대 영화로 <>이라는 할리우드 영화가 있다. 찰턴 헤스턴이 주연을 맡아 대형 영화사에서 배급한 그야말로 정통 할리우드 영화인데 그러면서도 비참한 미래의 모습을 예상해서 보여주는 내용이다. 그 결말도 뻔한 할리우드 영화의 행복한 결말이라고 말하기는 매우 어려운 방향으로 흘러가기에 눈에 뜨이는 영화이기도 하다. 맨 마지막에 주인공이 외치는 대사는 SF 영화사에서 유명한 대사 순위를 꼽으면 상위권에 자주 오를 만큼 잘 알려져 있기도 하다. 이 영화에서 보여주는 미래는 인구가 너무나 빠르게 늘어났기 때문에 멸망해 가고 있는 세상이다. 인구가 너무나 많은 데 비해 식량과 자원은 부족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굶주리고 모든 물자가 부족해 다들 비참하게 살고 있다. 영화 제목인 “소일렌트 그린”이란 식량이 부족한 세상에서 특별히 개발해 보급 중인 신형 인공 식품을 말한다. 그러므로 <>은 19세기 맬서스의 등장 이후 수많은 사람들이 미래 인류의 멸망 시나리오라고 철석같이 밀었던, 맬서스 함정을 정통으로 다룬 영화다. “인구는 기하급수적으로 성장하는데, 식량은 산술급수적으로 성장한다.”라는 말은 어지간하면 한 번쯤 들어 보았을 것이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지구는 망한다, 그러니 사람이 많은 것은 해악이다, 라는 말을 하는 사람을 본 적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이런 생각은 곧 “사람이 곧 모든 파괴의 근원이며, 사람이 없어져야 지구가 살아난다.”는 생각으로도 자주 이어지기도 한다. 재미난 사실은 이 영화에서 다루는 멸망해 가는 미래가 2022년이라는 점이다. <>은 1973년에 개봉된 영화이므로 이 영화에서 말하는 2022년이란 영화가 제작되던 1972년으로부터 50년 후를 말하는 이야기일 것이다. 그런데 이 SF 영화에서 말하는 2022년의 미래라는 시간은, 2024년을 사는 현대의 우리에게는 2년 전의 과거가 되었다. 나는 영화를 보는 과정에서 이렇게 시간의 꼬임을 느낄 수 있다는 사실이 굉장히 신비롭다. 게다가 요즘 이 영화의 내용을 보다 보면 더욱 중요한 사실도 깨달을 수 있다. 실제 2022년이 인구가 너무 많아 식량 부족으로 멸망하는 시간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우리가 겪고 있는 2020년대는 인구가 너무 많은 것이 문제가 아니라 인구 감소와 초고령화가 문제인 시대다. 이러한 현상은 한국만 겪고 있는 문제도 아니다. 한국에서 인구 문제가 워낙 극심하게 나타나

  • 관리자
  • 2024-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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