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대한민국 태극기이 누리집은 대한민국 공식 전자정부 누리집입니다.

공식 누리집 주소 확인하기

go.kr 주소를 사용하는 누리집은 대한민국 정부기관이 관리하는 누리집입니다.
이 밖에 or.kr 또는 .kr등 다른 도메인 주소를 사용하고 있다면 아래 URL에서 도메인 주소를 확인해 보세요.
운영중인 공식 누리집보기

오늘을 이야기하는 여섯 가지 시선 - 한국문학의 명장면

  • 작성일 2017-11-01
  • 조회수 2,067

[기획]

 

 

오늘을 이야기하는 여섯 가지 시선
- 한국문학의 명장면

 

 

 

 

하나.
박민정, 「버드아이즈 뷰」

 

강지희

 

 

[caption id="attachment_139820" align="aligncenter" width="400"]박민정, 「버드아이즈 뷰」
《문학들 41》, 문학들, 2015년.
[/caption]
[caption id="attachment_139821" align="aligncenter" width="400"]박민정, 「버드아이즈 뷰」
『제6회 문지문학상 수상작품집』, 문학과지성사, 2016년.
[/caption]

 

 

    재혁은 자신을 찍는 여러 대의 카메라를 올려다보며 자신의 모습을 상상했다. 오래 전부터 꿈꿔 온 풍경이었다. 자살을 중계하는 쓰레기 같은 뉴스 카메라. 그가 사랑하는 호러 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디스토피아였다. TV뉴스채널이 쓸데없이 많아질 때 재혁은 그가 꿈꾸던 장면에 다가가고 있다는 것을 직감했다. 반정부 집회 장면을 비추며 집회 참가자가 든 피켓에 쓰인 폰트가 북한에서 쓰이는 폰트라는 내용을 진지한 얼굴로 아나운싱하던 여자를 보던 날 재혁은 자신의 날이 도래했음을 깨달았다. 미래는 항상 우리보다 먼저 도착해 있다. 엿 같은 모습으로. 재혁은 트위터에 멘트를 남겼다.
    재혁은 리모콘을 발치에 내려놓았다. 그의 발치에 이미 스마트폰이 있었다. 꽃신을 벗어 두고 강물로 뛰어드는 소녀처럼. 재혁은 갑자기 이런 죽음의 장면이 진부하게 느껴져 당황했다. 겨우 술 먹고 뻗은 여자애들의 몸을 핸드폰 카메라로 몰래 찍던 녀석이 떠올랐다. 너도 찍어 봐. 괜찮아. 녀석이 하도 간곡하게 애원해서 재혁은 그 짓에 동참하는 흉내를 냈을 뿐이었다. 녀석은 그 후로도 오랫동안 자신에게 미안했던 모양이었다. 대학 시절 녀석은 굳이 재혁에게 메일을 보냈다. 법대 간 소식 들었다는 둥, 다행이라는 둥, 보태 준 것도 없이 주제넘게 지껄이는 내용이었다. 주원은 자신은 오랫동안 깊이 반성 중이라고 떠들었다. 차라리 누가 나를 벌해 주었으면 좋겠어. 누나들에게 너무 미안해. 왜 나를 벌해 주지도 않지. 애초부터 재혁에게 솟대 녀석들은 죄다 하찮은 녀석들이었지만, 주원이라는 녀석은 심해도 너무 심했다. 찐따 같은 행동이 지나쳤다. 재혁은 메일을 닫으며 한숨을 쉬었다. 그래. 그따위로 딸딸이나 치면서 살아라.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냐, 랑 내가 정말 잘못했다, 를 반복해서 뇌까리면서.

 

- 박민정, 「버드아이즈 뷰」 중에서

 

 

    올해는 스티브 잡스가 아이폰을 세상에 내놓은 지 십 년이 되는 해이다. 한국에서 ‘88만원 세대’라는 말이 나온 지도 정확히 십 년이 되었다. 이 둘이 결합하면서 현실에서는 더없이 궁핍하고 무력하지만, 사이버 세상에서는 무엇이든 실현가능하다는 전능감을 느끼는 기이한 존재들이 탄생했다. 지난 십 년이 일베, 몰카, 소라넷, 여성혐오, 김치녀, 메갈리아 등의 키워드로 점철된 것은 바로 이 어긋난 접합의 결과물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격렬하게 서로가 서로를 혐오하며 만들어진 전선은 이제 세대 사이가 아니라 젠더 사이에 놓여 있다.
    위에 인용한 장면에서 ‘재혁’은 SNS를 통해 미리 세상에 예고한 자신의 자살을 실행에 옮기려는 중이다. 남성연대 대표였던 ‘성재기’를 떠올리게 하는 이 자학적 쇼는 불특정 다수로부터 주목받기 위한 몸부림이지만, 이를 단순히 원한 감정에 사로잡힌 루저의 일탈 행위로 보기는 어렵다. 재혁은 강남의 사립고와 서울법대 출신의 남자로 상정되어 있고, 그를 사로잡고 있는 것은 세상 전체에 대한 멸시이기 때문이다. 소설은 재혁에게 유독 짙은 경멸의 대상이 되고 있는 ‘주원’에 초점을 맞춘다. 고등학교 시절 성추행을 저질렀다는 사실에 대해 적극적인 자기반성을 드러내고 다니는 주원의 기만적인 면모는 이 소설을 읽는 동안 자신의 정치적 온건함을 확인하고 싶어 하는 독자들을 불편하게 흔들어 놓는다.
    전체를 조감하는 ‘드론의 시선’은 재혁을 매개해 욕실에서 몰래 훔쳐보는 내밀한 ‘몰카의 시선’으로 매끄럽게 연결된다. 2000년대 초중반 편의점, 옥탑방, 고시원 등에서 고립되어 있던 청춘들은 지난 십 년 사이 쉴 새 없이 외설적으로 스스로를 전시하거나, 훔쳐보는 대상이 되었다. 세상을 조망하고 미래를 전망하는 ‘버드아이즈 뷰’가 불가능해진 시대에 개인과 사회는 이렇게 과잉 시선으로만 연결된다. 혼자 있을 때에도 온갖 SNS와 뉴스와 카톡으로 늘 함께일 수밖에 없는 이들에게 고독은 오히려 선망할 만한 특별한 존재방식이 되어 가는 중이다. 당신은 정말 재혁의 내면이 궁금한가? 하지만 우리가 현실세계에서 서로의 내면을 알아보는 방식 역시 이미 파편화되어 있는 SNS의 언어와 이미지를 통해서 이루어지고 있지 않은가? 자신의 자살을 중계하려는 죽음 충동과 타인의 육체를 훔쳐보는 에로스 사이에서 분열하는 재혁이야말로 타인에 대한 매혹과 혐오 사이에서 거대한 눈동자가 되어 가는 우리의 존재 양태를 고스란히 노출한다. 박민정의 「버드아이즈 뷰」는 기민한 시대감각으로 가장 먼저 도착한 미래의 소설이다.

 

 

 

 

 

작가소개 / 강지희

이화여대 국문과와 동대학원 박사과정 수료. 2008년 《조선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둘.
서유미, 「검은 문」

 

고봉준

 

 

 

[caption id="attachment_139820" align="aligncenter" width="400"]서유미, 「검은 문」
《문장웹진》 2012년 3월호
[/caption]
[caption id="attachment_139821" align="aligncenter" width="400"]서유미, 「검은 문」
『당분간 인간』, 창비, 2012년.
[/caption]

 

 

 

    “나쁠 것 없는 저녁이었다. 하지만 211번은 이런 평화가 거짓처럼 느껴졌다. 99번과 123번은 하루 종일 출구가 없는 것처럼, 등 뒤가 벽으로 막힌 것처럼 행동했다. 그들의 생활은 철저히 철창과 배식구를 중심으로 진행되었고 숫자와 밥그릇에 매여 있었다. 211번은 고개를 돌려 출구를 힐끗 보았다. 그것은 검고 음험한 수수께끼처럼 여전히 거기 있었지만 지워진 거나 마찬가지였다. 출구는 외면하고 살 수 있지만 끼니때마다 제공되는 음식과 사탕, 쌓아 놓은 숫자, 새하얀 시트가 깔린 침대를 외면하고 살 수는 없다. 무서운 것은 등 뒤의 출구가 아니라 눈앞에 버티고 있는 생활이다.”

 

- 『당분간 인간』, 창비, 2017, 215쪽.

 

 

    이 소설은 문학의 미적 가치가 ‘세계’에 대해 이야기하는 독창적인 방식의 창조에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숫자로만 지시되는 죄수들, 지루함을 견디기 위해 기계적으로 ‘벽돌’을 돌리는 행위, 무의미하고 무가치한 숫자의 증가에 집착하는 강박……. 이 작품의 공간적 배경, 정체불명의 ‘큐브’를 연상시키는 감옥 구조는 우리의 일상적 배치를 보여주는 알레고리적 장치들이다. ‘출구’를 향한 주인공의 탈주가 결국 ‘철창’으로 되돌아오는, ‘출구’ 없는 세계의 불가능성도 흥미롭지만, 현실 또는 세계에 대해 이야기하기 위해 부조리극의 무대처럼 세부적인 맥락을 모두 제거해 버린 형식, 미니멀리즘에 가까운 최소의 장치만으로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의 면모를 복합적으로 드러내는 작가의 능력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사실 ‘세계’와 ‘현실’의 부조리한 측면을 드러내는 작품들은 많다. 하지만 그것을 독창적인 말하기의 방식으로 드러내는 작품들은 드물다. 낯선 이야기 방식으로 익숙한 우리 ‘세계’를 보여주는 것, 그것이 이 작품이 지닌 매력이다.

 

 

 

 

 

작가소개 / 고봉준

2000년 《서울신문》 신춘문예로 등단. 평론집 『반대자의 윤리』,『다른 목소리들』,『유령들』『비인칭적인 것』이 있음. 현재 계간 《포지션》, 월간 《시인동네》편집위원.

 

 

 

 

 

 

 

셋.
정영문, 「어떤 작위의 세계」

 

김대산

 

 

 

정영문, 『어떤 작위의 세계』, 문학과지성사, 2011년.

 

 

    “나는 오래도록 너무도 작위적인 삶을 살아왔고, 이제는 작위적인 것이 내게는 자연스러웠다. 내가 작위적인 삶을 산 것은 삶의 그 무엇도 사실적으로 다가오지 않았고, 그에 따라 삶에 진지할 수 없었고, 삶의 어떤 사실들이 아니라 그 사실들에 대한 생각들에만 관여할 수 있었기 때문인데 이것이 나의 삶의 가장 큰 실질적인 어려움이기도 했다.”

 

- 정영문, 『어떤 작위의 세계』, 문학과지성사, 2011년, p.190

 

 

    정영문의 소설은 생각을 생각하게 하는 소설이다. 우리 모두는 생각한다. 하지만 생각을 생각하는 일은 드물다. 생각이 생각된 대상으로 표상(재현)되기 이전에 발생하는 생각의 현실적 운동의 과정을 경험하는 일은 더욱 드물다. 그 이유는 우리가 자연적인 감각세계와 사회적 관습의 세계에 대한 적응을 강요하는 실용적 삶에 매여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바쁜 사업적 생활(혹은 생존) 속에서 생각 자체를 생각할 틈이 없다. 생각은 항상 생각의 현실이 아닌 다른 현실로 대체된 실용적 삶에 종속되어 있으며, 그렇기에 실용적 삶에서 분리된 순수한 생각의 현실성은 비-현실성과 동일한 것으로 생각된다. 현대인이 처해 있는 의식 속에서 물리적 세계와 분리된 생각 자체는 비-현실적(혹은 비-사실적) 허구이거나 무용한 추상물이다. 정영문의 소설이 생각을 생각하기를 주제화하면서 드러내고 있는 것은 바로 그렇게 ‘그 자체로 생각된 생각 자체가 갖는 비-현실적 무능함에 대한 현대인의 일상적 의식’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말과 사물(혹은 언어와 존재)을 대립시키듯이 생각과 실천적 행위를 대립시킨다. 즉 우리는 다음과 같이 생각하면서 말한다. 말이 사물이 아니듯이, 생각은 행위가 아니다. 하지만 그렇게 말과 생각을 부정하는 일도 역시 말과 생각의 일(활동)이다. 말과 생각을 부정하면서 사물과 행위에 이르는 길은 인간에게 없다! 그러므로 정영문 소설에 등장하는, 말과 생각에 작위적으로 집착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주인공의 유희적 말과 생각은 인간의 숨겨진 본성(말과 생각과 분리될 수 없는 존재, 말과 생각과의 본질적인 내적 관계성을 갖는 존재)에 관한 진지한 관찰로부터 나온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파악된 말과 생각은, 대개 자연과학이 그렇게 하듯이, 어떤 주관에 맞세워져 그 주관과 분리된 객체 같은 것으로 관찰되는 것이 아니다. 혹은 일반적으로 생각을 생각하는 학문으로 알려진 논리학에서처럼 형식적으로 관찰되는 것도 아니다. 주관과 객관, 형식과 내용을 분리함이 없이 구체적인 방식으로 말을 말하고 생각을 생각하는 일, 혹은 말하면서 생각하고 생각하면서 말하는 일에 관한 진지한 관찰과 결합된 유희적(놀이적) 서술은 문학의 가능성에 속한다. 물론 그러한 가능성을 위해 왜 작위적이거나 허구적인 공간이 필요한지, 혹은 왜 창조성이 요구되는지 등에 대한 물음의 해답은 인간이 본질적으로 관계하고 있는 말과 생각의 비밀스러운 본성에 숨겨져 있을 것이다. 그 비밀스러운 본성은 존재인가 무인가? 의미인가 무의미인가? 정영문의 소설은 그런 물음과 연관된 삶의 어려움을 ‘진지한 언어놀이와 관련된 창조적 활동’으로 파악될 수 있는 문학적 예술로 변형시키고 있다.

 

 

 

 

 

작가소개 /김대산

1974년 출생. 2006년 《문학과 사회》 신인문학상 평론 부문으로 등단. 평론집 『달팽이 사냥』(2011)이 있음.

 

 

 

 

 

 

 

넷.
황정은, 「백의 그림자」

 

노태훈

 

 

 

[caption id="attachment_139820" align="aligncenter" width="400"]황정은, 「백의 그림자」
『세계의 문학 133』, 2009년.
[/caption]
황정은, 『백의 그림자』, 민음사, 2010년.

 

 

은교씨는 갈비탕 좋아하나요
좋아해요
나는 냉면을 좋아합니다
그런가요
또 무엇을 좋아하나요
이것저것 좋아하는데요
어떤 것이요
그냥 이것저것을
나는 쇄골이 반듯한 사람이 좋습니다
그렇군요
좋아합니다
쇄골을요?
은교 씨를요
......나는 쇄골이 하나도 반듯하지 않은데요
반듯하지 않아도 좋으니까 좋은 거지요
그렇게 되나요

 

- 황정은, 『백의 그림자』, 민음사, 2010, 39쪽

 

 

    어떤 작가는 그저 좋은 작품을 써내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고유의 스타일과 정서를 만들어 당대 소설의 흐름과 분위기마저 바꿔 놓는데, 정확히 황정은의 지난 십 년이 그랬다. 2008년 첫 소설집 『일곱시 삼십이분 코끼리 열차』로부터 2016년 『아무도 아닌』에 이르기까지 황정은은 누구도 가지 않았던 길을 걸으면서 한국 소설을 좀 더 섬세한 쪽으로, 좀 더 사려 깊은 방향으로 밀고 왔다. 황정은 소설의 인물들은 슬픔과 쓸쓸함을 꾸준히 단련해 쉽사리 절망이나 체념으로 빠지지 않았고, 아무것도 아닌 일이 아무것도 아닌 일이 아니게끔 스스로를 곱씹는 힘을 보여주었으며, 무엇보다도 어쨌든 그들에게는 삶이 지속되는 것만이 가장 중요함을 끈질기게 증명해 왔다. 그것은 그들을, 그리고 이 세계를 오래도록 응시한 자만이 얻을 수 있는 시선이었고, 그러한 시선은 때때로 우리가 미처 보지 못했던 아름다움을 빛나는 눈으로 포착해 내는데, 오래된 전자상가를 배경으로 은교와 무재의 사랑을 그려낸 『백의 그림자』(민음사, 2010)가 바로 그런 작품이다. 한국어로 쓰인 문장과 대화가 어떻게 그토록 낯설면서도 정확할 수 있는지, 그래서 그 흔한 사랑 이야기 없이도 얼마나 풍성한 관계를 보여줄 수 있는지, 그리고 그들이 속한 세계가 왜 결코 사라져서는 안 되는지, 이 소설은 정말로 아름답고 감각적으로 증명한다. 지금도 황정은 문학의 본령은 이 작품에 있고, 우리가 끝내 붙잡고 놓지 말아야 할 세계의 한 풍경도 이곳에 있다. 이 소설을 읽은 사람이라면 아마도 꽤 오랫동안 생각하고, 바라게 될 것이다. 은교와 무재가 여전히 서로를 확인해 가며 무사하기를.

 

 

 

 

 

작가소개 / 노태훈

문학평론가. 1984년생. 서울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2013년 중앙신인문학상으로 등단했다.

 

 

 

 

 

 

 

다섯.
박성원, 「고백」

 

서희원

 

 

[caption id="attachment_139820" align="aligncenter" width="400"]박성원, 「고백」,
『문학과사회 100』, 문학과지성사, 2012년.
[/caption]
박성원, 『고백』, 현대문학, 2015년.

 

 

   “나는 월리스 컬렉션의 「Daydream」을 신청하고는 술을 마셨어. 난 ‘젖 나오는 남자’에게 물었어. 이봐, 대체 저 많은 사람들은 모두 어디로 가고 있는 걸까? 라고. 그러자 박성원이 말했어. 글쎄, 하고 말이야.”

 

- 박성원, 『고백』, 현대문학, 2015년, 38쪽.

 

 

    “한국 문학의 명장면”을 추천해 달라는 청탁을 받았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사유의 범위를 ‘나’로 한정한 후 잊히지 않는 하나의 장면을 찾아내는 것이었다. 「고백」의 마지막 장면에서 발췌한 이 문장에는 네 개의 고유명사가 등장한다. 월리스 컬렉션(Wallace Collection)은 근대 유럽 장식미술의 걸작들을 모아 놓은 미술관이 아니고 1960년대 말 결성된 벨기에 출신의 록밴드이다. 그들의 대표곡인 「Daydream」은 영화 <미스터 노바디(Mr. Nobody, 2009)>에 삽입되어 영화팬들의 귓가에 아른거리기도 하였다. 그리고 세 명의 등장인물인 ‘나’와 친구인 ‘젖 나오는 남자’, 그리고 실제 작가의 이력을 참조한 인물 ‘박성원’은,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동일인물이다.
    이제는 사람들이 듣지 않는 오래된 음악을 틀어 주는 LP바에서 ‘나’, ‘젖 나오는 남자’, ‘박성원’이 나누는 이 대화는 사실 분열된 자아가 나누는 독백에 불과하며, 독자들에게 들려주는 고백에 다름 아니다. 이들은 「고백」의 모든 장면에서 예술, 특히 소설에 대한 진지한 탐색과 고민을 대화와 사건으로 펼쳐내고 있다. 하지만 그것이 이 마지막 장면에서 독백임이 밝혀진다. 그렇다면 이 소설은 정신이 분열된 한 자아의 기록으로 읽어야 하나? 아니면 누구와도 대화할 수 없는 사라져 가는 예술을 향수하고 간직하려는 자아의 안간힘으로 읽어야 하나? 내게는 후자로 읽힌다. 저 많은 사람들은 여기가 아닌 어디로 가버렸고, 아무도 듣지 않는 음악을 들으며, 이젠 아무도 읽지 않는 문자예술의 한 장르에 대해, 아무하고도 얘기할 수 없는 사람의 「고백」을 읽는 일은 더할 나위 없이 쓸쓸했지만, 잊을 수 없을 만큼 아름다웠다.

 

 

 

 

 

작가소개 / 서희원

2009년 《세계일보》, 《문화일보》 신춘문예 문학평론으로 등단. 《문예중앙》 편집위원 역임. 지금은 《현대문학》 편집자문위원.

 

 

 

 

 

 

 

여섯.
배명훈, 「예술과 중력가속도」

 

허희

 

 

 

[caption id="attachment_139820" align="aligncenter" width="400"]배명훈, 「예술과 중력가속도」
      『창작과비평 150』, 2010년.
[/caption]
배명훈, 『예술과 중력가속도』, 북하우스, 2016년.

 

 

    은경 씨는 몸을 잔뜩 구부려 온몸에 힘을 가득 모으더니 몇 발인가를 빠르게 앞으로 내디디며 공중으로 힘차게 뛰어올랐다. 그리고 두 팔을 자연스럽게 벌리고 가슴을 쫙 편 다음 긴 목선이 최대한 드러나도록 목을 쭉 뻗었다. 아무것도 아닌 단순한 동작이었지만, 언젠가 은경 씨가 한 말처럼 천장에 닿을 듯 굉장한 점프였다. 저쯤 가면 이제 아래로 내려가겠지 하는 지구인의 상식 때문에 위로 솟구쳐 올라가는 은경 씨의 동선이 더 비현실적으로 보였다. 이제는 떨어지겠지, 이제는 떨어지겠지. 은경 씨는 그런 상식의 착각을 세 번이나 저버리고 계속해서 위로 솟구쳐 올라갔다. 등에 로켓 엔진이라도 단 듯, 누군가 위에서 끌어당기기라도 하는 듯. 아니, 처음부터 하늘에 속해 있던 사람이 온몸에 지워진 중력의 구속을 끊어내고, 마침내 원래 있어야 할 곳으로 돌아가기라도 하는 것처럼.
    나는 은경 씨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지그시 감은 눈, 온몸 가득 무언가 소중한 것을 품은 듯 애틋한 표정. 저런 거였구나! 나는 처음으로 진짜 은경 씨를 만난 것 같았다. “예술 하는” 은경 씨. 환희에 찬 은경 씨. 다시는 보지 못할 은경 씨의 진짜 얼굴. 은경 씨는 그 상태 그대로 영원히 지면에 닿지 않을 것처럼 공중에 가만히 머물러 있었다.

 

- 배명훈,『예술과 중력가속도』, 북하우스, 2016, 196쪽.

 

 

    은경 씨는 달에서 예술―현대 무용을 했다. 하지만 달 기지가 폐쇄되면서 그녀는 지구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지구 중력은 달의 6배이다. 달에서 할 수 있었던 어마어마한 도약을 더 이상 은경 씨는 할 수 없게 됐다. 그녀의 남자 친구인 ‘나’의 말마따나, “달 출신들에게 지구의 중력이란 엄연히 실체를 가진 짐이었던 셈이다”. 그러던 어느 날 은경 씨가 ‘나’에게 티켓을 한 장 준다. 달 환경을 재연한 무대에서 펼쳐지는 공연 입장권이다. 그녀는 자신의 진짜 점프를 보여줄 수 있다고, 그러니까 무슨 일이 있어도 꼭 보러 와야 한다고 ‘나’에게 말한다. 은경 씨와 결혼을 약속한 마당에 뭐가 대수겠는가. 기꺼이 ‘나’는 공연이 열릴 미국으로 향한다.
    그런데 공연장에 도착하고 보니 이상한 느낌이 든다. 고래를 닮은 커다란 비행기가 공연장이었기 때문이다. 관객들이 탑승하자 비행기는 이륙한다. 그리고 서서히 하늘로 솟구쳤다가 갑자기 곤두박질친다. 가장 단순한 방법으로, 그러나 관객에게는 가장 고통스러운 방식으로, 공연에 맞게 중력의 크기를 조정하는 것이다. 엄청난 멀미에 시달리며 구토를 하는 사람들. ‘나’도 예외는 아니다. 그런 와중에 은경 씨가 출연하는 공연이 시작된다. 그녀는 “처음부터 하늘에 속해 있던 사람이 온몸에 지워진 중력의 구속을 끊어내고, 마침내 원래 있어야 할 곳으로 돌아가기라도 하는 것처럼” 점프를 했다. 그 순간만큼은 ‘나’도 멀미를 잊고, “공중에 가만히 머물러 있”는 은경 씨에게서 경이감을 느낀다.
    물론 우리는 안다. 은경 씨가 하는 예술도 결코 중력의 사슬을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 말이다. 아무리 높이 올라도 그녀는 결국 지상으로 내려오고 말 것이다. 노력해 봐야 어차피 환경적 한계를 벗어날 수 없다는 식의 빤한 체념을 하려는 것이 아니다. 단지 이런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은경 씨가 증명했듯이, 예술은 잠시나마 모든 제약을 넘어설 수 있는 에너지를 갖는다. 또한 그것은 ‘나’에게서 드러나듯이, 예술가가 아닌 예술을 감상한 사람마저 예술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파급력이 있다. 문제는 구조적 억압—중력이 아니라고, 이것이 무엇이든 상관없이 우리가 예술로 한번 훌쩍 초월해 볼 수 있지 않겠냐고, 「예술과 중력가속도」는 은경 씨가 하늘을 나는 아름다운 장면으로 우리에게 제안한다.

 

 

 

 

 

작가소개 / 허희

2012년 『세계의 문학』 신인상 평론 부문에 「감각적 경계인의 정치적 사색―김경주론」과 「잔혹한 세계 : 청춘의 테제―김사과‧윤이형‧박민규 소설에 나타난 청춘의 양태」가 당선되며 등단.

 

 

 

   《문장웹진 2017년 11월호》

 

추천 콘텐츠

산책과 가을의 일

[에세이] 산책과 가을의 일 박주영 오랜만에 동네 산책을 했다. 여름이 시작되고는 햇빛이 사라진 밤 산책을 하다가 그나마도 열대야 때문에 멈춘 지 오래되었다. 오늘은 해가 뜨기 전 일어났고 스탠드를 켠 책상에 앉아 소설을 썼다. 어느새 창밖이 밝아지는 걸 보다가 해가 완전히 뜨기 전에 바깥으로 나가 걷기로 했다. 산책은 어슬렁거리며 그냥 걷는 것이지만 소설가의 산책에는 생각이 없을 수 없다. 생각을 하지 않으려는 목적이었다면 달리기를 했을 것이다. 나는 산책과 걷기를 구분해서 다이어리에 기록한다. 산책이 바라보고 생각하며 이동하는 것이라면 걷기는 건강이라는 목적을 가장 염두에 둔 움직임이다. 여름이 아니라면 산책은 주로 오후나 해질 무렵에 한다. 늦게 자고 오전에만 일어나도 뿌듯한 사람이라 일어나자마자 소설을 쓰고 쉴 즈음이 대개 그 시간이기 때문이다. 산책을 하면서 내가 지금까지 쓴 것을 생각하다가 빈틈을 메울 생각이 떠오르기도 하고 다음 장면을 생각하기도 하고 이 소설이 제대로 가고 있는지 고심하기도 한다. 여름 해가 뜨기 전 오래간만에 소설을 생각하며 산책을 한다. 나는 문학 전공도 아니고 소설 쓰기를 배운 적도 없고 주변에 글 쓰는 사람도 없었다. 그래서 소설가가 된 후 소설가를 만날 기회가 생기면 알고 싶은 것들을 질문하곤 했다. 글쓰기가 잘 안 될 때는 어떻게 하느냐는 질문에 대한 2개의 대답을 기억한다. 한 분은 그냥 걷는다, 라고 답했고 한 분은 안 되어도 앉아서 써야지 어떡해, 라고 했다. 두 분 다 그때 20년 가까이 소설을 거뜬히 써온 분이었다. 나는 2개의 답을 지금껏 생각하고 있고 그게 지금의 나에게는 정답이 되었다. 하지만 정답을 안다고 정답대로 할 수 있는 건 아니다. 나는 자주 책상 앞에서 벗어나고 걷는 것이 아니라 누워 있는다. 그냥 진짜 누워만 있는데, 요즘은 소설 쓰는 일에 자주 지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또 한 분의 조언이 생각난다. 건강을 챙기고 운동을 해라, 그러지 않으면 장편소설을 쓸 수 없다. 여기의 조건은 ‘나이 들수록’이다. 비교적 늦은 나이에 등단했고 처음부터 장편소설을 썼던 나는 그 조언이 그때는 크게 와 닿지 않았다. 나는 이미 젊지도 않고 약해 빠졌는데 장편소설을 쓰는 데 그리 힘이 들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그 조언의 참 의미는 어떤 고비마다 왔다. 나이는 한 살씩 먹는 게 아니라 쌓여 있다가 한꺼번에 온다는 걸을 알게 되었다. 어느 날부터 손목이 아프기 시작하더니 어느새 허리가 아프기 시작하고 이제 어깨가 아프다. 남들은 여름휴가를 가는 시기 나는 병원을 다녔다. 의사는 어깨 인대가 손상되었다고 했다. 특정 자세를 취하지 말라고 했는데 그 자세는 하필 내가 반평생을 취해 온 자세이다. 지금도 나는 그 자세이다. 자판을 치고 노트에 글을 쓰려면 취할 수밖에 없는 자세. 그리고 의사는 옆으로 눕지 말라고 했다. 그런데 어릴 때부터 나는 그렇게 누운 자세로 책을 읽었다. 너무 크고 두껍고 무거운 책만 그 자세로 읽을

  • 관리자
  • 2024-10-01
다시 서정을 위해

[에세이] 다시 서정을 위해 권상진 스무 살 무렵이었던 것 같다. 서른이 되기 전에 시인이 되겠다고 주변에 떠들고 다녔던 기억이 아슴하다. 「홀로서기」를 외웠고 「지란지교를 꿈꾸며」를 외웠다. 이생진을 읽고 백창우를 읽고 박노해를 읽었다. 잔잔하게 때로는 웅장하게 가슴을 밀고 들어오는 시편들이 심장을 가로세로로 뛰게 만들었다. 백석과 김수영과 기형도의 이름은 몰랐지만 굳이 그들이 아니어도 충만한 시간들이었다. 시집이 이천 원에서 삼천 원 정도 할 때여서 큰 부담 없이 고를 수 있었고 외출할 때 시집 한 권을 들고 밖을 나서도 아무도 이상하게 쳐다보는 이도 없었다. 오히려 뭇 여성들의 시선이 슬쩍슬쩍 내 턱선을 지나 책장에 닿는 기분을 느낄 수 있어 좋았다. 생일이나 기념일에는 으레 서점에 들러 시집을 골랐다. 『넌 가끔가다 내 생각을 하지 난 가끔가다 딴 생각을 해』(원태연),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류시화), 『친구가 화장실에 갔을 때』(신진호) 같은 시집을 골라 슬쩍 건네던 날들이 아련하다. 스물이라는, 가라앉을 것 하나 없는 맑은 감정에서 속살거리는 말들을 시인들은 대신 말해 내고 있었다. 그러는 동안 십 대는 가고 이십 대가 펼쳐지고 있었다. 고등학교 입시에 실패하고 대학을 쫓겨나 군대를 다녀오고 나니 어느새 아무데도 기댈 수 없는 성인이 되어 있었다. 오래된 가난이 불편하지는 않았지만 그때부터 가난은 나를 가만히 두지를 않았다. 공장 일을 시작했는데 처음 해보는 노동이란 게 미치도록 좋았다. 종일 몸을 쓰고 땀을 흘리는 일이 알 수 없는 쾌감을 안겨 주었고 월급이라는 보상까지 덤으로 안겨 주었다. 시를 읽고 쓰는 일만큼 일이 재미있었고 누구의 도움 없이 혼자서도 살아낼 수 있다는 자신감이 더없이 좋았다. 지쳐 잠들기 전 문득 돌아본 시의 한때는 짧은 여행지의 추억처럼 아득하기만 했다. 나의 스물은 급류처럼 흘러갔고 시는 둑 너머에 있어 쉽게 손이 닿지 않았다. 하지만 일과 돈, 그리고 자립의 기쁨은 오래가지 않았다. 노동은 즐겁고 땀은 향기로웠지만 갑자기 내가 꿈꾸던 삶이 이런 것이었던가 하는 질문이 나를 툭 한 번 치고 갔다. 해지는 풍경만 봐도 맥박이 난동을 부리고 꽃과 낙엽의 표정을 살피면 왠지 모를 눈물이 맺히던 한 시절의 기억이 불현듯 피곤에 지친 등을 흔들어 깨웠다. 시인이 되겠다던 꿈을 무참히 짓밟고 나를 공장 노동자로 내몰았던 대학교 재단 이사장의 말이 떠올랐다. ‘약속은 지키면 좋은 것이고 못 지키면 어쩔 수 없는 일’이라던 그의 말. 그가 지키지 않은 약속 때문에 학교에서 쫓겨난 나는 궤도를 이탈해 버린 행성처럼 어둠 속으로 무작정 떠밀려가고 있었다. 막막한 혼돈 속으로 나를 밀어 넣었던 약속이란 단어가 다시 나를 수습하고 있었다. 시간은 이미 서른을 지나갔고 아무도 내게 왜 약속을 지키지 않느냐고 물어 보는 이는 없었지만 스스로와의 약속은 끝내 지켜주고 싶었다. 그렇게 시가 다시 내게로 왔다. 세월도 변했고 시도 변해

  • 관리자
  • 2024-10-01
과거를 보는 미래 SF

[에세이] 과거를 보는 미래 SF 곽재식 며칠 전 나는 한 행사에서 SF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소개하는 발표를 하나 맡게 되었다. 발표가 다 끝나고 질문 답변 시간이 되었는데 청중 중 한 분이 “SF라면 미래를 생각해 봐야 하는데, 왜 옛날 SF를 소개했느냐?”라고 질문했다. 그날 행사 중에는 답변을 짧게 드렸지만 이 내용은 한번 깊게 따져 볼 만한 재미난 주제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오늘은 그 이야기를 한번 해보려고 한다. 명작 SF로 자주 손꼽히는 1970년대 영화로 <>이라는 할리우드 영화가 있다. 찰턴 헤스턴이 주연을 맡아 대형 영화사에서 배급한 그야말로 정통 할리우드 영화인데 그러면서도 비참한 미래의 모습을 예상해서 보여주는 내용이다. 그 결말도 뻔한 할리우드 영화의 행복한 결말이라고 말하기는 매우 어려운 방향으로 흘러가기에 눈에 뜨이는 영화이기도 하다. 맨 마지막에 주인공이 외치는 대사는 SF 영화사에서 유명한 대사 순위를 꼽으면 상위권에 자주 오를 만큼 잘 알려져 있기도 하다. 이 영화에서 보여주는 미래는 인구가 너무나 빠르게 늘어났기 때문에 멸망해 가고 있는 세상이다. 인구가 너무나 많은 데 비해 식량과 자원은 부족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굶주리고 모든 물자가 부족해 다들 비참하게 살고 있다. 영화 제목인 “소일렌트 그린”이란 식량이 부족한 세상에서 특별히 개발해 보급 중인 신형 인공 식품을 말한다. 그러므로 <>은 19세기 맬서스의 등장 이후 수많은 사람들이 미래 인류의 멸망 시나리오라고 철석같이 밀었던, 맬서스 함정을 정통으로 다룬 영화다. “인구는 기하급수적으로 성장하는데, 식량은 산술급수적으로 성장한다.”라는 말은 어지간하면 한 번쯤 들어 보았을 것이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지구는 망한다, 그러니 사람이 많은 것은 해악이다, 라는 말을 하는 사람을 본 적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이런 생각은 곧 “사람이 곧 모든 파괴의 근원이며, 사람이 없어져야 지구가 살아난다.”는 생각으로도 자주 이어지기도 한다. 재미난 사실은 이 영화에서 다루는 멸망해 가는 미래가 2022년이라는 점이다. <>은 1973년에 개봉된 영화이므로 이 영화에서 말하는 2022년이란 영화가 제작되던 1972년으로부터 50년 후를 말하는 이야기일 것이다. 그런데 이 SF 영화에서 말하는 2022년의 미래라는 시간은, 2024년을 사는 현대의 우리에게는 2년 전의 과거가 되었다. 나는 영화를 보는 과정에서 이렇게 시간의 꼬임을 느낄 수 있다는 사실이 굉장히 신비롭다. 게다가 요즘 이 영화의 내용을 보다 보면 더욱 중요한 사실도 깨달을 수 있다. 실제 2022년이 인구가 너무 많아 식량 부족으로 멸망하는 시간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우리가 겪고 있는 2020년대는 인구가 너무 많은 것이 문제가 아니라 인구 감소와 초고령화가 문제인 시대다. 이러한 현상은 한국만 겪고 있는 문제도 아니다. 한국에서 인구 문제가 워낙 극심하게 나타나

  • 관리자
  • 2024-10-01

댓글 남기기

로그인후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생각을 남겨 주세요!

댓글남기기 작성 가이드

  • 타인에게 불쾌감을 주는 욕설, 비방 등은 삼가주시기 바랍니다.
  • 주제와 관련 없거나 부적절한 홍보 내용은 삼가주시기 바랍니다.
  • 기타 운영 정책에 어긋나는 내용이 포함될 경우, 사전 고지 없이 노출 제한될 수 있습니다.
0 / 1500

댓글0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