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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회] 펜

  • 작성일 2011-11-06
  • 조회수 551

 

 

강신주(철학자)

  

 


무엇을 쓸까

탁자에 배부된 답지는

텅 비어 있다

전 시간의 과목은 ‘진실’

절반도 채 메우지 못했는데

종이 울렸다

이 시간의 과목은 ‘사랑’

그 많은 교과서와 참고서도

이제는 소용이 없다

맨손엔 잉크가 마른 만년필

하나,

그 만년필 붙들고

무엇을 쓸까

망설이는 기억의 저편에서

흔들리는 눈빛

벌써 시간은 절반이 흘렀는데

답지는 아직도 순백이다

인생이란 한 장의 시험지,

무엇을 쓸까

그 많은 시간을 덧없이 보내고

치르는 시험은 이제

당일치기다

 

-오세영, 「무엇을 쓸까」       


  

이 쓰이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이럴 때 제게는 한 가지 요령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냥 컴퓨터 앞에서 버티는 겁니다. 네가 이기나 내가 이기나 보자는 식이지요. 이건 보통 인내심으로 힘든 겁니다. 인내가 바닥을 보일 때마다 플리니우스(Gaius Plinius Secundus, 23-79)의 교훈도 떠올려봅니다. “Nulla dies sine linea!” “단 한 줄이라고 글을 쓰지 않고 보내는 날이 없도록 하라!” 대부분의 경우에 승리를 거두는 것은 컴퓨터가 아니라 저입니다. 하지만 간혹 하루 종일 앉아 있어도 글을 한 줄도 쓰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머릿속이 백지처럼 하얗게 되는 아주 드문 경험입니다. 썼다가 지우고, 또 썼다고 또 지우고. 만약 종이에다 썼다면 아마 제 집필실에는 꾸겨진 종이들로 넘쳐났을 겁니다. 절망스러운 순간입니다. 이럴 때 저는 집필실 근처에 있는 대형서점을 찾곤 합니다. 물론 책을 읽거나 사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제 글도 쓰기 힘든데 말끔하게 정리된 남의 글을 보는 것은 너무나 힘든 일일 테니까요.

가 발걸음을 옮기는 곳은 대형서점 한쪽에 마련된 문구점입니다. 문구점에 들어서자마자 저는 만년필을 이것저것 만져봅니다. 과거에는 파카나 몽블랑이 만년필의 이름이라고 생각했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만큼 파카나 몽블랑은 과거 세대에게는 만년필 그 자체를 의미했던 브랜드였지요. 최근 문구점을 방문한 분은 격세지감을 느끼게 될 겁니다. 파카나 몽블랑 이외에도 너무나 다양한 브랜드의 만년필들이 우리를 유혹하고 있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한 가지 달라지지 않은 것이 있습니다. 만년필은 여전히 입학과 졸업을 축하하는 자리에 단골손님으로 등장한다는 겁니다. 하긴 저도 졸업식이나 입학식 때 주변의 친지들로부터 만년필을 선물로 받은 적이 있습니다. 무엇 때문에 졸업식이나 입학식 때 만년필이 선물로 등장했던 것일까요? 우선 생각해볼 수 있는 것이 졸업식이나 입학식이 모두 학교와 관련된다는 점입니다. 당연히 지성을 상징하는 것은 역시 칼이라기보다는 펜이 적격일 겁니다.

렇지만 더 중요한 것은 만년필이 가지는 특이한 성격이 지성인이면 갖추어야만 할 덕목을 알려준다는 사실 아닐까요? 만년필이 다른 필기구와 달라지는 결정적인 대목은 어디에 있을까요? 만년필은 글을 쓰다가 잠시 멈추면 바로 잉크가 나오는 경우가 별로 없습니다. 볼펜이나 다른 필기구에 비해 여간 불편한 것이 아닙니다. 결국 계속 지속적으로 글을 써야만 만년필은 필기구로서의 소임을 완수할 수 있는 법입니다. 사랑해주지 않으면 금방 토라지는 매혹적인 아가씨와 같지요. 하지만 쓰고 싶어도 더 이상 무엇을 써야 할지 감을 잡지 못할 때도 찾아오는 법입니다. 그럴 때 만년필도 토라지게 되겠지요. 이럴 때 만년필은 너무나 문턱이 높아 다다르기 힘든 오만한 여신처럼 보입니다. 충분히 쓸 것이 생겼거나 제대로 글의 구성이 되었을 때에만, 한 마디로 준비되었을 때에만 자신을 만질 수 있다고 위세를 떱니다. 만년필은 지성인을 길들입니다. 충분히 숙고된 말이나 글이 아니면 바깥으로 표현하지 못하도록 만듭니다.

담 삼아 하는 말이 있습니다. “너의 말은 머리를 거치지 않고 똥구멍에서 바로 입으로 나오는구나!” 만년필은 이렇게 냄새나고 더러운 생각을 하지 못하도록 하는 힘을 가지고 있었던 겁니다. 어느 날 오세영(吳世榮, 1942년 출생) 시인도 만년필을 꺼내들었나 봅니다. ‘진실’과 ‘사랑’, 어쩌면 우리 인생의 전부라고 할 수 있는 것을 쓰려고 합니다. 어쩌면 시인 자신의 삶을 정직하게 남은 사람들에게 전하려는 일종의 유서일 수도 있습니다. 자신의 진실과 사랑을 쓴다는 것은 이미 자신의 모든 것을 정리한다는 것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지요. 불행히도 시인은 자신의 의도대로 유서를 쓰지 못하고 있습니다. “맨손엔 잉크가 마른 만년필”을 덩그러니 들고 있게 된 것도 이런 이유에서입니다. 아직 시인은 만년필을 만질 때가 아니었나 봅니다. 하지만 무엇인가에 쫓기듯 시인은 진실과 사랑을 “당일치기” 시험을 보듯이 써 내려가고 싶습니다. 안타까운 일이지요. 아, 잉크가 마른 만년필처럼 시인은 자신도 생의 활력을 잃어버리고 멈춘 것이 아닌지 답답하기만 합니다. “망설이는 기억의 저편에서 흔들리는 눈빛. 벌써 시간은 절반이 흘렀는데 답지는 아직도 순백이다.”

인의 답답함이 저의 일인 것처럼 느껴지도록 만드는 구절입니다. 글이 써지지 않았던 오늘, 제가 문구점을 들린 것이나 그리고 오세영 시인의 시가 떠오른 것도 다 이유가 있었던 셈입니다. 만년필이 굳어져 버린다는 것은 글이 쓰이지 않는다는 것을 상징하기 때문이지요. 새로운 글을 쓰겠다는 각오처럼 저는 새로운 만년필을 구입하게 됩니다. 그 순간 저는 알게 됩니다. 아직 익지도 않은 생각을 쓰려고 하니 오세영 시인과 마찬가지로 글을 쓸 수가 없었던 겁니다. 어쩌면 저는 산책을 하면서 제 생각을 명료화하는 것이 좋았을지도 모릅니다. 글을 쓰겠다는 일념으로 키보드를 두드린다고 글이 저절로 쓰일 리 만무하기 때문이지요. 만년필의 뚜껑을 열 때까지 충분히 심사숙고해서 글의 전체 구조를 미리 파악했어야만 합니다. 혹은 컴퓨터를 켤 때까지 무엇을 어떻게 써야 할지 윤곽을 미리 잡아야만 했습니다.

행히도 아무리 숙고해도 글의 방향을 잡을 수가 없을 때, 혹은 방향을 잡았다는 자신감에 컴퓨터에 앉았지만 글이 쓰이지 않을 때가 오기도 합니다. 아무리 앉아 있어도 실마리가 보이지 않는 한계 상황에서는 멀찌감치 물러나 글쓰기에 거리를 두는 것이 현명할 수도 있습니다. 이럴 때 저는 문구점을 찾았던 겁니다. 흥미롭게도 이것은 저만 그런 것은 아닙니다. 20세기의 가장 탁월한 인문학자 벤야민(Walter Benjamin, 1892-1940)도 글이 쓰이지 않을 때에는 문구점에 들어가곤 했던 것 같습니다. 물론 그곳에서 그도 만년필을 만지작거립니다.

 

아무것이나 집필 도구로 사용하는 것을 피할 것. 특정한 종이, 특정한 펜, 특정한 잉크를 까다로울 정도로 고수하는 것은 유익한 일이다. 그것은 사치가 아니다. 오히려 그러한 용구를 풍부하게 갖추어놓는 것은 없어서는 안 될 요소이다.

 

─ 『일방통행로(Einbahnstrabe)』

 

을 쓰지 못해 말라버린 만년필을 버립니다. 그리고 마치 자신을 정화하기 위해 성스러운 곳을 찾아가는 것처럼 문구점을 찾아가는 벤야민의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아직 잉크를 채우지 않은 새로운 만년필을 삽니다. 물론 이 만년필은 벤야민이 주로 썼던 제품일 겁니다. 이어서 그는 만년필을 새롭게 채울 자신이 선호하는 잉크도 새롭게 구입합니다. 이 잉크는 만년필을 탄생시킬 겁니다. 마치 새로운 피가 수혈되었을 때 환자의 얼굴에 건강한 홍조가 나타나는 것처럼 말입니다. 이런 의례적인 행위는 분명 사치스러운 일입니다. 그것을 의식이나 했는지, 벤야민은 자신이 쓰고 있던 집필 도구를 버리고 동일한 종류의 새로운 집필 도구를 사는 것이 결코 사치가 아니라고 강변하고 있습니다. 쓸데없는 변명이라고 치부할 수도 있지만, 벤야민의 주장은 음미해볼 만한 가치가 충분히 있습니다.

천히 생각해보세요. 자신이 자주 찾곤 하는 문구점을 들렸을 때, 벤야민은 같은 집필 도구를 중복해서 사려고 한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사정은 정반대입니다. 이렇게 새로운 집필 도구를 새롭게 구입하면서, 벤야민은 완전히 새로운 만년필, 완전히 새로운 종이, 그리고 완전히 새로운 잉크로 완전히 새로운 글을 쓰겠다는 정신적 준비를 갖추고 있는 것입니다. 저와 마찬가지로 벤야민도 어지간히 글이 쓰이지 않는 답답함을 느꼈나 봅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벤야민이 글을 쓰려다가 쓸 수가 없다면 바로 문구점을 찾았다고 오해하지는 마십시오. 그랬다면 우리는 그의 방대한 저술들을 볼 수도 없을 테니까 말입니다. 문구점을 새롭게 찾는 것, 그리고 만년필을 만지작거리게 된 것은 글쓰는 사람이 최악의 상황에 이르렀다는 증거일 뿐이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새로운 집필 도구를 찾는 것은 작가들에게 매우 이례적인 경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쨌든 뻔질나게 문구점에 들어가 집필 도구를 산다고 해서 글이 저절로 나오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벤야민도 말했던 겁니다.

 

더 이상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는다는 이유로 결코 글쓰기를 멈추지 말 것. 어떤 일정(식사 시간, 선약)을 지켜야 하거나 아니면 작품을 끝마쳤을 때에만 중단하는 것이 문학적 명예의 준칙이다. (…) 저녁부터 꼬박 다음 날이 밝아올 때까지 매달려보지 않은 어떤 글도 결코 완벽하다고 간주하지 말 것.

 

─ 『일방통행로(Einbahnstrabe)』

 

인적으로 벤야민의 이 이야기는 지금 저에게도 하나의 철칙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지금도 제 다이어리에는 글쓰기에 대한 벤야민의 이야기가 적혀 있으니까요.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을 때에도 저는 계속 컴퓨터 앞에 앉아서 이것저것을 끄적거리고 지우기를 반복합니다. 물론 저보다 앞서 벤야민도 그렇게 했다는 의식을 가지면서 말이지요. 이건 지루하기 짝이 없는 전쟁입니다. 하지만 여기서 지면 끝장입니다. 글은 끝내 쓰이지 않을 테니까 말입니다. 하지만 대개의 경우 최대 7시간 안에 어느 사이엔가 글에 몰입하고 있는 제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났던 것일까요. 끄적거리고 지우는 그 과정은 바로 제가 쓰려는 테마를 명료화하고 그것을 어떤 식으로 표현할지 고민했던 시간이었던 겁니다. 이 지루한 시간을 견디지 못한다면, 벤야민이나 저는 쓰려고 했던 글을 완성하지 못했을 겁니다.

는 확신합니다. 만년필이 말라갈 정도로 글이 쓰이지 않을지라도, 글쓰는 사람이라면 마지막 희망을 놓지는 않을 거라는 걸요. 비록 오세영 시인이 만년필을 들고 당혹감을 느끼고 있다고 할지라도 말입니다. “인생이란 한 장의 시험지, 무엇을 쓸까?” 하지만 시인도 벤야민처럼 직감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비록 지금 자기만의 진실과 사랑에 대한 이야기가 쓰이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시인은 아직도 자신에게는 작은 시간이나마 남아 있다는 희망을 가져봅니다. “그 많은 시간을 덧없이 보내고 치르는 시험은 이제 당일치기다.” 어쩌면 말입니다. 오세영 시인도 저나 벤야민처럼 낡은 만년필을 과감하게 버리고 문구점에 들리는 것이 좋았을 수도 있습니다. 새로운 만년필과 잉크를 사는 겁니다. 그것은 새로운 집필 도구를 사는 것만이 아닙니다. 그것은 유쾌한 기분이나 혹은 새롭게 태어난 느낌을 사는 것이기 때문이지요. 천천히 새로운 만년필에 새로운 잉크를 붓는 순간, 오세영 시인의 이야기는 조금씩 풀려나오게 됐을지도 모를 일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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