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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겨진 보물 같은 책 이야기]공상은 풍선껌 같은 것

  • 작성일 2014-01-15
  • 조회수 796


[숨겨진 보물 같은 책 이야기]



공상은 풍선껌 같은 것!


서유미





나만 드넓은 캠퍼스를 혼자 떠도는 것 같고 한심한 인간이 된 것 같은 기분. 청춘에서 밀려나 한순간에 급격하게 시들어버린 것 같은 우울함. 신입생이 겪는 이 우울증은 짧게는 한두 달 이어지다 사라지고 길게는 일 년이 넘게 지속되기도 한다. 그럴 때 이 『태양의 탑』을 읽은 독자라면, 이 소설 속의 주인공인 ‘나’를 떠올린다면, 여러 모로 위안이 될 것 같다.



문학에 관심 있는 청소년들에게 책을 추천해달라는 부탁을 받고나서 어떤 책을 고를까, 고민하다가 자연스럽게 나의 중고등학생 시절을 돌아보게 되었다. 그때 난 어떤 사람이었고 무엇에 관심이 있었지? 새로운 해가 시작되는 시점에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십대 시절을 더듬어보는 건 달콤하고도 슬픈 일이다. 오래 전이라(슬프게도) 세세한 부분까지 기억나진 않지만 어떤 날, 어떤 일, 어떤 순간은 마치 엊그제 겪었던 일처럼 생생하게 떠올랐다(다행히 이건 좀 달콤하다).
십대, 하면 우리 가족이 오랫동안 살던 집, 그 중에서도 내가 썼던 방의 풍경, 그 방의 구조와 책상과 브로마이드가 붙어 있던 벽이 또렷하게 떠오른다. 그때나 지금이나 나는 집순이 스타일이라 집, 특히 내 방에서 지내는 걸 좋아한다. 그리고 공부는 안 하는 주제에 몇 시간씩 책상에 앉아서 일기와 편지를 끼적거렸고 뭔가를 쓰지 않을 때는 멍하게 앉은 채로 이런저런 공상에 빠져 허우적거렸다. 성적표를 받아본 엄마는 매번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면서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리고 “허구한 날 책상 앞에 앉아 있기에 공부하는 줄 알고 좋아했는데 성적이 이따위인 걸 보면 정신이 딴 데 나가 있거나 어디가 모자란 모양”이라고 한탄했다. 그러고 보면 학창 시절의 내 모습은 모범생의 껍데기를 쓴 불량학생에 가까웠다.
그때 내 머릿속을 떠돌던 공상의 주된 테마는 미래, 특히 대학 생활에 대한 것이었다. 언니나 오빠가 없던 내게 대학이라는 곳, 대학 생활이라는 것은 미지의 세계에 가까웠다. 그걸 엿볼 기회라고는 친구들에게 주워들은 이야기와 텔레비전에서 방영되는 몇몇 청춘 드라마의 내용뿐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부실하고 파편적인 에피소드를 토대로 펼쳐지던 공상의 내용이라는 건 실제의 대학 생활과는 너무 거리가 멀어서 차라리 망상이라고 하는 편이 맞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것의 현실성이나 실현 가능 여부와는 상관없이 그때의 그 터널 같은 시간이 지나가기만 한다면 무슨 짓이라도 하겠다는 듯 열심히 망상 속을 헤매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학교와 학원으로 이어지는 빡빡한 일정과 시험에 대한 스트레스, 미래에 대한 불안한 마음을 대학 생활과 대학생이 된 자신을 그려보는 것으로 이겨내는 학생들이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예전보다 실제에 가까운 대학 생활을 보여주는 영화, 드라마, 매체들이 도처에 널려 있지만 그래도 여전히 그들의 머릿속엔 공상에 가까운 기대들이 떠다니고 있지 않을까. 꿈과 희망이란 아무래도 현실과 좀 떨어져 있는 편이 더 근사하고 힘이 되니까.
그래서 나는 대학 생활에 관심이 많은 청소년들에게 그쪽 세계를 다루고 있는 책을 추천하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 책장을 뒤지기 시작했다. 이왕이면 의미도 있고 재미도 갖춘 책이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두리번거리는데, 한쪽 구석에서 책 한 권이 찌질하게 웃으며(왜 찌질한 웃음인지는 책을 읽어보면 알게 된다) 마네키네코(일본의 상점 앞에서 한쪽 앞발을 흔드는 고양이 인형)처럼 손을 흔들었다. 그게 바로 모리미 도미히코의 『태양의 탑』이다.
대학 생활, 이십대, 청춘의 키워드라면 뭐가 있을까. 단연코 연애를 첫 손가락에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중고등학생 때부터 연애를 시작하는 경우도 많지만, 어쩐지 진정한 연애는 이십대에 하게 될 것 같은 기분이 사랑을 대표적인 키워드로 꼽게 만든다. 그러나 사실 꽤 많은 청춘들의 연애는 짝사랑으로 시작해서 짝사랑 때문에 상처받고 혼자서 짝사랑에 종지부를 찍고 마는 짝사랑의 연속이라고 하는 게 더 맞지 않을까. 『태양의 탑』은 바로 짝사랑하던 여자를 집중 탐구하던 내가 연구 중지 선언을 받고 ‘그녀는 왜 나 같은 인간을 거부했는가’에 대해 해명하기 위해 쓰기 시작한 소설이다.
‘최강의 천재이자 변태 소설가’라고 불리는 작가 모리미 도미히코는 실제로 이 소설을 대학원 재학 중에 썼다고 한다. 변태 소설가라는 별명을 증명하듯 이 소설을 읽고 있으면 냄새나는 남자들 몇 명이 학교 근처 자취방에 모여앉아 시시껄렁한 농담 따먹기를 하며 시간 때우는 걸 지켜보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든다. 남학생들이 읽으면 아직 대학 생활을 경험하지 않았는데도 심정적으로 공감하며 킥킥거릴 내용이 가득하고, 여학생들이라면 찌질한 남자들의 모습에 혀를 내두르면서도 킥킥거리게 될 책이다. 짝사랑뿐 아니라 자취, 휴학, 아르바이트, 괴짜 선후배, 마음이 통하는 친구, 외톨이, 미래에 대한 걱정 같은 에피소드까지 한 그릇에 부어 버무리고 나면 모리미 도미히코 식의 대학 생활, 비빔밥 같은 청춘이 탄생한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나는 삼십대 후반이 아니라 고등학생 때 이 책을 만났다면 어땠을까 잠깐 생각해보았다. 작가가 나보다 어리니까(이건 역시 좀 슬프다) 그때 나왔다면 이 책과는 다른 버전의 이야기가 전개되었겠지만 그렇다고 해도 나는 대학의 낭만을 이따위(?)로 뭉개버리는 작가의 변태스러움에 분개하지 않았을까. 그만큼 이 소설은 풋풋하고 설레고 젊음이 넘실대는 청춘물과는 여러 모로 다르다. 『호밀밭의 파수꾼』의 계보를 잇는 청춘 사소설의 면모를 지니고 있지만 그보다는 우디 앨런의 유머 섞인 수다가 떠오르는 자학 청춘 소설에 가깝다. 고뇌와 깊이는 찾아보기 힘들고 뒤죽박죽, 엉망진창이라는 단어가 더 잘 어울리고 기상천외한 망상이 매연처럼 뭉게뭉게 피어나는 소설인 것이다.
이 글을 읽고 나서 실제로 이 책을 찾아 읽은 누군가가 ‘당신(그게 작가든 아니면 추천하는 나든)이 뭔데 나의 무지갯빛 꿈을 짓밟는 거냐’고 항의한다면 할 말은 없다. 대학 생활이 이렇게 찌질한 거라면, 이런 대학생이 될 거라면 대학엔 가지 않겠다고 선언해도 할 말이 없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차츰차츰 이 소설에 등장하는 다양한 인물들에게 공감하게 될 것이다. 인간이란 누구나 얼마쯤은 찌질한 면을 가지고 있으니까.
대학에 들어가면 의외로 많은 신입생들이 우울함에 빠진다. 따뜻한 봄을 기대하며 3월의 캠퍼스를 누비지만 강력한 꽃샘추위와 때늦은 눈발에 어리둥절해지는 것처럼 신입생으로 지내는 한 달 동안 처음 느꼈던 합격의 기쁨과 새로운 세계에 대한 희망은 서서히 사라지고 예상하지 못한 열패감이 단짝처럼 따라붙는다. 그건 대학의 모습이나 생활이 꿈꾸던 것과 달라서 느끼는 실망과는 또 다른 종류의 우울함이다. 그 우울감은 조바심과 비교에서 생겨난다. 다른 친구들은 학과 생활도 동아리 활동도 열심히 재미있게 잘하는 것 같은데, 선배들과도 친하고 친구도 많이 사귄 것 같은데, 뭔가 매일 바쁘고 이런저런 약속이 많은 것 같은데, 나만 드넓은 캠퍼스를 혼자 떠도는 것 같고 한심한 인간이 된 것 같은 기분. 청춘에서 밀려나 한순간에 급격하게 시들어버린 것 같은 우울함. 신입생이 겪는 이 우울증은 짧게는 한두 달 이어지다 사라지고 길게는 일 년이 넘게 지속되기도 한다. 그럴 때 이 『태양의 탑』을 읽은 독자라면, 이 소설 속의 주인공인 ‘나’를 떠올린다면, 여러 모로 위안이 될 것 같다. 많은 사람들이 바쁜 척, 친구가 많은 척, 재미있는 척하며 지내지만 사실은 그들도 외롭고 겁이 나서 애쓰고 있다는 걸 알게 된다.
읽고 나서 팬이 되느냐 안티가 되느냐 두 개의 갈림길이 존재하지만 내가 너무 쓰레기처럼 사는 게 아닐까, 이래 봬도 청춘인데 이렇게 살아도 괜찮나, 라는 생각이 들 때, 너만 그렇게 사는 게 아니다, 세상에는 이렇게 너저분한 인간도 있다, 라는 얘기가 듣고 싶을 때 찾아서 읽으면 제격인 소설이다. 비스듬히 누워서 봉지 안에 든 과자를 와작와작 씹으며 읽다 보면 의외로 즐거운 위로를 받을 수 있다. 읽고 나면 일본이 잘 산다고 하는데 대학생들은 이 모양이군, 일본의 소설가가 잘 쓰고 일본 소설이 잘 팔린다고 해봤자 겨우 이 정도군, 하며 배짱을 부릴 기운도 생긴다. 그래서 매스 미디어에 등장하는 낭만적이고 화려한 대학 생활, 핑크빛 로맨스를 꿈꾸는 소년소녀들에게 감히 이 책을 권한다.
물론 소년소녀들은 가깝고 먼 미래에 대해 더 많이 꿈꾸고 기대해야 한다. 나는 여전히 책상 앞에 앉아서 끼적거리거나 이런저런 공상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걸 좋아한다. 내게 미래는 아직 많이 남아 있고 겪지 못한 일들도 많으니까. 공상과 망상은 언젠가 깨어지고 수정되게 마련이지만 여전히 우리를 기분 좋게 만드는 풍선껌 같은 거니까.




《글틴 웹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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