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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오로라를 기다리고

  • 작성일 2022-09-09
  • 조회수 1,598

[아르코문학창작기금 - 소설(중단편)]



우리는 오로라를 기다리고




서정아






비행기에서 내리는 순간, 얼음 도시에서 뿜어져 나오는 냉기가 온몸의 숨구멍을 박음질하듯 날카롭게 내리꽂혔다. 나는 크림색 패딩 점퍼의 지퍼를 목까지 채우고 귀가 덮이는 털모자를 깊숙이 눌러썼다. 순식간에 몸 전체를 휘감아 버린 낯선 추위에 상체가 절로 웅크려졌다. 긴 비행시간 내내 얕은 잠에 들었다 깼다 하면서 꿈과 몽상과 잡념 사이에서 오래 헤맸기 때문에, 모처럼 현실 감각이 일깨워지는 기분이 그런대로 괜찮았다.
입국 수속을 마치고 수하물을 찾아 공항 밖으로 나오자마자, 바퀴 달린 캐리어를 가져온 것이 잘못된 선택이었음을 깨달았다. 차가 다니는 도로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눈이 잔뜩 쌓여 있었고, 발을 내디딜 때마다 흰 눈 더미에 깊은 흔적이 남았다. 그런 길 위에서 캐리어를 끌고 다니기는 아무래도 어려워 보였다. 나는 24인치짜리 진회색 캐리어를 양팔로 번갈아 들며 힘겹게 버스 정류장으로 향했다.
정류장에 도착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시내로 나가는 버스가 들어섰다. 버스가 달리는 동안 차창 밖으로 보이는 것은 오로지 하얀 눈으로 뒤덮인 산과 집들이었는데, 그 단순한 풍경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으니 다시 현실 감각이 무뎌지는 것만 같았다. 그렇게 물컹해진 마음의 자리에 또 그의 얼굴이 들어차 버렸고 나는 버스에서 내릴 때까지 내내 그 마음을 어쩌지 못했다.
시내로 나오니 도로의 사정이 그나마 나아졌지만 사람들이 밟고 다닌 눈이 얼어붙어 길이 무척 미끄러웠기 때문에 아주 느리게 걸어야 했다. 나는 캐리어를 조심스럽게 끌고 관광안내소를 찾아 오로라 투어를 예약한 다음 햄버거 가게에 들어갔다. 쏨이 일을 마치는 시각까지는 두 시간 정도를 기다려야 했다. 짐 보관소에 캐리어를 맡겨 놓고 시내 산책을 할 수도 있었지만, 긴 비행시간 내내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한 탓에 영하의 칼바람을 뚫고 걸어 다닐 의욕이 생기질 않았다. 나는 버거 세트 메뉴를 하나 주문하고 창가 쪽 자리에 앉았다. 쏨에게서 연락이 올 때까지 창밖 구경이나 할 작정이었다.
내가 여기 앉아도 될까?
몸을 잔뜩 웅크린 채 지나다니는 사람들을 멍하니 쳐다보고 있는데 누군가 내 어깨를 톡톡 두드리며 물었다. 고개를 돌려 보니 옅은 갈색의 곱슬머리 남자가 내 대각선 자리에 버거와 음료가 담긴 트레이를 내려놓고 있었다. 빈자리가 많은데 굳이 왜. 나는 대답 없이 그를 쳐다보았다. 하지만 내 의사를 묻는다기보다는 앉기 전에 그저 예의상 하는 말이었던 듯 그는 이미 의자에 털썩 앉아 버렸다.
창가 쪽 자리가 여기뿐이어서. 나는 테오야.
그는 마치 내 마음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변명했다. 그의 영어 발음에서 프랑스식 억양이 묻어 났다. 내 이름을 알려 주었더니 한국인인 것을 바로 알아챘다. 즐겨 보는 한국 드라마에서 비슷한 이름을 들었다고 했다.
트롬쇠에 살아?
아니, 오로라를 보러 왔어. 너도 그렇겠지만.
테오와 나는 각자 음식을 먹다가 창밖을 보다가 때때로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주고받았다. 알고 보니, 우리는 같은 여행사의 오로라 투어 프로그램에 참여하기로 되어 있었다.
오로라를 볼 수 있을까? 무척 운이 좋아야 한다던데.
나와 함께 가니까 볼 수 있을 거야. 난 운이 좋은 사람이거든.
테오는 한 점의 의심도 없다는 듯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하얗고 가지런한 이가 드러나는 그 미소가 인경과 닮아 보여서 마음이 덜컹 내려앉았다.


나를 데리러 온 쏨의 얼굴은 다소 지쳐 보였다. 3년 만이었는데, 그사이 내가 알지 못하는 시간의 먼지들이 그녀의 얼굴에 촘촘히 내려앉은 것만 같았다. 우리는 길게 포옹했다.
결국, 왔구나.
결국.
그런데 여기까지 와서 겨우 버거킹이야?
지구의 가장 북쪽에 있는 버거킹이잖아. 눈의 왕국에 사는 기분이 어때?
춥고 지겨워.
그래도 아름답잖아.
장난해? 망할 풍경 따위는 금방 지루해진다고.
쏨은 고개를 흔들며 내 캐리어를 끌었다. 나는 탁자 위에 있던 털모자를 눌러쓰고 그녀를 따라 밖으로 나갔다. 오후 네 시밖에 안 되었는데 밖은 이미 어두웠고 상점과 가로등의 불빛들이 간신히 시야를 밝혀 주고 있었다.
쏨의 집은 시내에서 차로 십여 분 정도의 거리였다. 작은 창이 여러 개 있는 연노란 색의 단층 주택이었는데 양쪽 면이 경사져 있는 뾰족한 지붕에는 흰 눈이 소복했다. 인경은 언젠가 그런 박공지붕의 목조주택에 살고 싶다고 이야기한 적이 있었다. 태풍에 취약할 텐데. 내 말에 그는 쓸쓸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아름다운 건 언제나 위험을 내포하고 있잖아. 그걸 알면서도 들끓는 마음을 어쩌지 못해서 자꾸 욕망하게 되는걸. 그땐 그 말이 단순히 박공지붕의 목조주택에 대한 이야기인 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어떤 말들은 시간이 흐르고 나서야 마음에 깊은 자취를 새기기도 했다.
두 시간쯤 지나 카알이 집으로 들어왔다. 카알은 내게 여기까지 오느라 힘들지 않았느냐고 물었는데, 실은 나보다 그의 얼굴이 더 피로해 보였다. 3년 전 태국에서 만났던 그 사람이 맞는가 싶을 정도로 얼굴이 푸석푸석하고 피부의 채도가 낮아 보였다. 태국에서 카알과 나는 같은 요가 클래스의 수강생이었고 쏨은 강사였다. 우리 셋은 요가 수업 후 몇 번 함께 술을 마시면서 가까워지게 되었는데 어느 순간 쏨과 카알 사이에 묘한 기류가 흐르더니 곧 연인이 되었다. 그때만 해도 나는 그들의 연애가 일시적인 것이라고 생각했다. 카알은 여행자였으니까. 스쳐 가는 여행자의 감정에 쏨이 상처 입는 것은 아닐까 걱정했다. 하지만 카알은 쏨과 만난 지 한 달 만에 그녀에게 함께 사는 것이 어떻겠냐고 제안했다. 노르웨이로 같이 가자던 카알의 말에 쏨은 하던 일을 정리하고 비행기 티켓을 끊었다. 망설임이라고는 없는 그들의 선택이 나는 놀랍고도 불안했다. 내 영어가 감정적인 뉘앙스를 충분히 전달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면 나는 쏨에게 내 걱정을 이야기했을 것이다. 그러나 불충분한 언어로 그녀와 나 사이에 오해를 만들고 싶지는 않았기에 그저 건강히 지내라는 평범한 작별 인사를 했었다.
카알이 만들어 준 순록 스테이크와 함께 우리는 와인을 마셨다. 창밖으로는 눈발이 휘날렸고 거실 벽난로에서는 주황색 불빛이 따뜻하게 타오르고 있었다. 얼어붙을 것만 같던 몸이 어느새 노곤하게 녹아내렸고 얼굴은 발갛게 달아올랐다. 카알은 대화 내내 허리를 두드렸다.
허리를 다친 거야?
구급대원이라면 대부분 갖고 있는 고질적인 통증이야. 게다가 오늘은 거구의 남자가 목을 맸거든. 안아 내리다가 허리에 무리가 온 거지.
저런… 안됐네.
흔한 일인걸. 응급 환자만큼이나 자살 사고 신고가 많으니까.
무섭지 않아?
뭐가? 시체 보는 거? 그것보다 죽은 사람의 어마어마한 무게가 더 무서워. 산 사람을 들 때랑은 다르다니까.
카알은 다시 허리를 두드렸다. 쏨이 그런 카알을 보며 낮은 한숨을 내쉬고는 말했다.
봐, 서인. 춥고 지겨운 곳이라고 했잖아.


투어 차량을 탑승하기로 한 장소에 도착하자 테오가 손을 흔들며 인사했다. 겨우 두 번째 만나는 것일 뿐인데 오래 알고 지낸 사람 같은 친숙함이 느껴졌다. 가끔 그런 순간이 있었다. 몇 번 만나지 않았는데도 아주 익숙하고 편하게 느껴지거나, 반대로 오랜 시간 만나 왔지만 낯설고 잘 모르겠다는 느낌이 드는 순간들.
우리는 가이드가 안내하는 대로 9인승 밴에 탑승했다. 오로라가 잘 보이는 스팟으로 가기 위해서는 시의 외곽 지역으로 이동해야 한다고 했다. 덜컹거리는 차 안에서 사람들의 설렘과 기대감이 기포처럼 떠올랐다. 여러 억양이 뒤섞인 가벼운 대화가 이어졌고 그러는 사이 점차 도시의 인공적인 빛들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차 안에서는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협주곡이 흘러나왔다. 테오는 어둠으로 가득한 창밖을 바라보다가 말했다.
아름다워.
뭐가?
지금 이 순간이.
오로라는 아직 보지도 못했는데?
그건 걱정 마. 난 운이 좋은 사람이라니까.
테오가 너스레를 떨자 맞은편에 앉아 있던 영국인 노부부가 우리도 그 덕 좀 볼까, 하며 함께 웃었다. 이제 이런 여행은 그들에게 마지막이 될 거라고 노부부는 말했다. 긴 비행시간도, 뼛속까지 얼어붙게 만드는 추위도, 이제 더는 감당하기가 어려울 거라고.
그러니 이번에 오로라를 보고 나면 우리는 따뜻한 휴양지에서 달콤한 과일이나 먹으며 여생을 보낼 거야.
그렇게 말하며 주름진 손을 서로 맞잡고 있는 노부부를 가만히 바라보니 어쩐지 눈에 물기가 차올라서 창 쪽으로 얼굴을 돌렸다. 시간이 지나고 모든 상황이 편해지면 오로라를 보러 가자고 인경은 내게 말했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그의 어깨에 기댔다. 기약 없는 희망 고문이라 해도 괜찮았다. 그는 진심으로 내게 미안해했고 어쨌거나 우리는 삶의 일부를 공유하는 중이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언제나 감정은 충만했기 때문에 나는 더 많은 것을 바라지는 않았다. 더 바라는 순간 현실에 대한 균형 감각이 깨져 버릴까 봐, 그러다 그를 잃게 될까 봐.
가이드는 눈이 잔뜩 쌓인 평원에 차를 세웠다. 우리는 차에서 내려 가이드가 나눠 주는 방한복을 덧입고 삼각대를 들었다. 모두들 두터워진 몸을 웅크린 채 펭귄처럼 우스꽝스럽게 걸었다.
여기가 좋겠어요.
가이드가 적당한 위치를 지정해 주었고 우리는 삼각대를 내려놓고 하늘을 바라보았다. 어두운 하늘에는 구름만 가득했다. 고개를 잔뜩 젖혀 사방을 둘러보았지만 기대했던 오로라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한참을 그러고 서 있는데 가이드가 고개를 저으며 차에 다시 타라고 했다. 영국인 노부부와 벨기에인 커플과 나와 테오는 고분고분하게 가이드의 말을 따랐다. 한 번에 성공하기는 쉽지 않은 일이라는 것을 모두 이미 잘 알고 있었다. 그래도 여전히 모두들 기대감에 사로잡혀 있었기에 다시 차에 올라타면서도 눈빛이 반짝였다.
하지만 두 번째와 세 번째 스팟에서도 우리는 끝내 오로라를 보지 못했다. 오늘은 아무래도 어려울 것 같다며, 가이드는 모닥불을 피우고 샌드위치와 커피를 나누어 주었다. 우리는 모닥불 앞에 둘러앉아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며 간식을 먹었다.
이봐, 테오. 너의 행운은 어떻게 된 거야?
벨기에 커플이 장난스럽게 말하자 테오는 입술을 쭉 내밀고 어깨를 으쓱했다.
미안, 방에 두고 왔나 봐. 하지만 내일이 있잖아.
모닥불을 쬐며 간식을 먹은 우리는 곧 가이드의 안내에 따라 자리를 정리하고 차에 탑승했다. 시내로 돌아오는 길은 차갑고 고요했다. 차 안의 사람들은 작은 목소리로 두런거리다가 이내 말이 없어졌다. 나는 어느샌가 잠이 들어 버렸고, 도착했다는 말소리에 눈을 뜨고 나서야 내가 테오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있었음을 알아챘다.


거의 정오가 다 되어서 일어났는데 창밖은 아직 온전히 밝지가 않았다. 여기 사람들은 이 정도의 빛만으로도 충분히 잘 살아갈 수 있는 걸까. 자주 발견된다는 목맨 시체도, 그것을 끊임없이 안아 내려야 하는 구급대원의 허리 통증도 궁극적으로는 부족한 일조량에서 비롯된 것이었을까.
연어와 야채 구이로 식사를 한 후 쏨과 카알은 내게 트롬쇠 전망대에 가자고 했다. 쏨은 오늘부터 휴가가 시작되었고, 카알은 야간 근무였다. 우리는 쏨이 운전하는 작은 차를 타고 전망대로 출발했다. 차 안에서 쏨은 태국어로 노래를 흥얼거렸다.
그만둬.
카알이 인상을 찡그리며 말했다.
그 노래 싫어.
왜 싫은데?
우울하고 불쾌해.
이건 전혀 그런 노래가 아냐. 그냥 네 마음이 그런 거겠지.
쏨은 그렇게 대꾸하고 다시 노래를 불렀다. 태국어를 발음할 때 쏨의 목소리는 영어를 할 때와는 좀 달라졌기 때문에 마치 다른 사람 같았다. 쏨이 계속해서 노래를 부르자 어느 순간 갑자기 카알도 노래를 시작했다. 노르웨이어로 된 노래였다. 자신의 노래에 방해를 받은 쏨은 목소리를 조금 높였고 그에 맞서듯 카알도 더 크게 노래를 불렀다. 어느새 그들은 악을 쓰듯 각자의 언어로 노래를 하고 있었다. 그것은 노래가 아니라 거의 싸움이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 덜컹, 하고 차가 흔들리더니 차선을 벗어나 쭉 미끄러졌고 차도의 가장자리에 쌓여 있던 눈 더미 속에 푹 처박혀 버렸다. 곧 터져 버릴 것처럼 시끄러웠던 차 안은 잠시 정적이 흘렀다. 카알은 멍하니 창밖을 보았고 쏨은 운전대에 얼굴을 파묻었다. 그래도 운이 좋네, 눈 더미에 부딪쳤으니까. 나는 고요 속에서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다행히 차에는 문제가 없었다. 우리는 밖으로 나와 눈 속에 장식품처럼 박혀 있는 작은 차를 밀어서 빼낸 다음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다시 전망대로 향했다. 입구에서 케이블카를 타고 정상에 올라가자 북극 도시의 풍경이 비현실적으로 펼쳐져 있었다. 저 멀리에는 설산이 보였다. 먼 곳에 있으면서도 손에 잡힐 것만 같은 아름다움이었다. 산꼭대기로 불어오는 칼바람이 눈을 시리게 했다.
나, 태국으로 돌아갈 거야.
카알이 커피를 사 오겠다며 자리를 뜨자 쏨이 무심한 말투로 내게 말했다. 나는 조금 놀라서 얼굴을 돌려 쏨을 바라보았다.
언제?
곧.
카알도 함께 가는 거야?
아니. 카알은 아직 몰라. 곧 이야기해야지.
왜 돌아가려는 거야? 카알하고 무슨 문제 있어?
그는… 좋은 사람이야. 너도 알다시피, 다정하고 성실하고 나에게 무척 잘하지. 하지만 어떤 순간마다 그를 잘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어. 2년 넘게 함께 살았는데도 말이야.
누구나 그렇지 않을까, 하고 나는 쏨의 말을 들으며 생각했다. 나 역시 인경을 잘 몰랐다. 잘 안다고 자신했었는데, 누구보다도 그를 잘 아는 것은 나라고 확신했었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그에 대해 안다고 여겼던 것이 과연 무엇이었나 싶었다.
무엇보다도 여긴 너무 춥고 해가 짧아. 태국에 돌아가면 선베드에 누워 종일 햇볕을 쬘 거야.
나는 그렇게 말하는 쏨의 옆얼굴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저 멀리 설산으로 눈을 돌렸다. 하얀 눈으로 뒤덮인 산은 이른 낙조와 함께 분홍빛으로 물들고 있었다. 아름다움은 언제나 가장 먼저 우리를 흔들어 놓고 매료시켰지만 순간의 마음을 영원히 붙잡아 두지는 못했다.


두 번째 투어에서도 오로라를 보는 것은 실패했다. 가이드는 구름이 너무 많아서 그렇다며 우리에게 미안해했다. 구름이 많은 것이 그의 탓은 아니었는데 그는 두 번의 잇따른 실패에 대해 큰 책임감을 느끼는 듯했다. 내일은 꼭 볼 수 있을 거라는 가이드의 말에 우리는 고개를 끄덕이며 하이파이브를 했다.
서인, 우리 술 마실 건데 같이 갈래?
밴에 타기 직전 벨기에 커플과 테오가 내게 다가와 물었다.
아직 문을 연 술집이 있을까?
내 방에서 마실 거야. 와인이 몇 병 있거든. 치즈랑 소시지도 있고.
테오의 말에 내가 바로 대답을 하지 못하고 망설이자 그는 내 어깨에 팔을 얹었다.
같이 가자. 너와 좀 더 이야기하고 싶어.
테오의 팔에서 느껴지는 무게와 온기에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우리 넷은 테오가 머무르고 있는 숙소 앞에서 함께 내렸다. 너희에게는 오로라보다 더 좋은 것이 있구나, 하고 웃으며 영국인 노부부가 손을 흔들었다.
우리는 테이블을 침대 옆에 놓고 둥글게 마주 앉았다. 테이블 의자가 두 개밖에 없었기 때문에 두 명은 침대에 걸터앉아야 했다. 테오의 방은 좀 추웠으나 술을 마시기 시작하자 몸이 빠르게 데워졌다. 우리의 목소리는 붉게 달아오른 얼굴 위로 가볍게 떠올랐다. 벨기에 커플은 신비주의에 빠져 있었기 때문에 영적인 체험을 공유하는 것에 열성적이었다. 오로라를 보러 온 것도 그런 이유에서라고 했다. 마지막 와인을 땄을 때 그들은 나와 테오에게 붙어 있는 부정하고 악한 기운을 제거해 주겠다며 배낭을 뒤적였다. 그들이 꺼낸 것은 푸른빛이 나는 작은 도자기 그릇과 나뭇잎 몇 장과 갈색 타조 깃털 하나, 그리고 성냥이었다. 그들은 도자기 그릇 위에 나뭇잎을 놓고 성냥으로 불을 붙이더니 알 수 없는 주문을 외며 타조 깃털을 그 위로 흔들었다. 그러고는 테오와 나의 손바닥에 재가 된 나뭇잎을 뿌렸다.
이제 손바닥을 마주하고 비비면 돼.
우리는 영문도 모르고 그들이 시키는 대로 했다. 나뭇잎 재는 바닥으로 모두 떨어졌고 벨기에 커플은 마치 자신들이 해야 할 의무를 다한 것처럼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이제 그만 가 보겠다고 했다. 그들이 아침까지 함께 있을 거라고 생각했었기 때문에 나는 좀 난처했다. 쏨에게는 아침에 들어가겠다고 이미 메시지를 보내둔 상태였고, 더군다나 차도 다니지 않는 시간이었다. 첫 버스 운행 시간에 맞춰 같이 나가자고 말해 볼까 생각하던 차에 테오가 먼저 그들에게 작별 인사를 하며 내 손을 잡았다. 재가 묻어 있던 손이었다. 테오의 손은 크고 따뜻해서 내 손등을 외투처럼 푹 감싸 버렸다.
우리가 그렇게 부정하고 사악해 보였나?
벨기에 커플이 떠난 뒤 우리는 검은 재가 묻은 서로의 손바닥을 보며 키득거렸다. 인경을 닮은 테오의 미소가 다시금 마음을 흔들었다.
이제 네 이야길 좀 해 봐.
무슨 이야길 할까.
너의 눈을 이렇게 슬프게 만든 사람에 대해서.
나는 테오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 사람의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 완벽하지도 않은 영어로 얼마나 제대로 이야기할 수 있을까. 아니, 한국어로 말한다 해도 그리 다르지 않을 것이다. 나는 과연 그에 대해 얼마나 이야기할 수 있는 걸까.


인경을 처음 만났던 그 겨울날에는 오전 내내 비가 내렸다. 군데군데 고인 물이 얼어 있어서 발걸음이 조심스러웠다. 스마트폰의 길찾기 앱을 들여다보며 음악 감상실 건물을 찾고 있을 때 검정색 중형차 한 대가 옆에서 멈췄다. 운전석에 있던 남자는 내게 음악 감상실 위치를 물었다. 나도 같은 곳을 찾고 있는 중이라고 하자 그는 같이 찾아보자며 길 가장자리에 주차를 하고 차에서 내렸다. 키가 무척 크고 나이를 가늠하기 힘든 얼굴이었다. 우리는 주위를 한참 빙빙 돌다가 마침내 어느 골목 입구에서 음악 감상실의 작은 간판을 찾아냈다. ‘Lien’이라는 프랑스어가 작은 필기체로 쓰여 있는 하얀 간판이었다.
불친절하지만 심플해서 멋있네요.
그렇게 말하는 그의 어법이 마음에 들었다. 투덜거리기는 쉬웠지만 좋은 점을 찾아내 말해주는 사람은 생각만큼 많지 않았다. 시작 시간이 5분밖에 남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는 서둘러 2층 감상실로 들어갔다. 관람객은 우리를 포함해 열 명쯤 되었고 운영자가 그날 감상할 음악에 대해 설명하는 중이었다. 그날의 감상곡은 글렌 굴드의 <골드베르크 변주곡>이었는데, 나는 그의 대각선 뒷줄에 자리를 잡고 앉았기 때문에 음악을 듣는 내내 그의 옆얼굴을 바라보게 되었다. 그리고 그 순간의 감정이 강렬한 기억으로 내게 각인되었던 것인지, 그 후로도 글렌 굴드의 연주곡을 들을 때면 언제나 그의 눈감은 옆모습이 떠오르곤 했다.
리앙에서는 정기적으로 음악 감상회를 열었고 우리는 가끔 그곳에서 마주쳤다. 한동안은 서로 미소 지으며 목례를 하는 것이 전부였다. 그러던 어느 날 음악 감상실에서 나오는데 예상치 못하게 폭우가 쏟아지고 있었고, 당황스러워하며 출입구 앞에 서 있는 내게 그가 말했다.
집까지 태워 줄게요. 불편하지 않다면.
그는 운전을 하며 그날 감상실에서 들은 연주곡에 대해 말하기 시작했고 나도 어느샌가 내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리앙에서 집까지는 이십여 분밖에 걸리지 않았지만, 우리는 집 앞에 차를 세워 두고 한 시간 넘게 이야기를 나눴다. 그의 차에서 내렸을 때 폭우는 그쳐 있었다. 그때 나는 우리의 관계가 깊어질 것을 예감했다.
인경은 그동안 만나 왔던 남자들과는 결이 다른 사람이었다. 복잡한 감정을 하나로 뭉뚱그려 버리지 않는 섬세함이 있었고, 문학과 음악에 대한 이해가 깊었다. 그가 사용하는 어휘는 풍부하고도 단정했다. 가장 좋은 점은 어떤 순간에도 겸손을 잃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런 사람을 만나기가 쉽지 않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나는 그를 꼭 붙들고 싶었다. 그가 기혼자임을 밝혔던 순간에도.
그는 아내와 1년째 별거 중이라고 했다. 미안하다고 말하는 그를 붙잡은 것은 나였다. 괜찮다고, 상황이 정리될 때까지 편하게 만나자고, 미안해할 것 없다고, 나는 그렇게 그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두 해 가까운 시간을 그와 함께했다.
가끔은 그가 어정쩡한 결혼 생활을 계속 유지하고 있다는 것에 대해 불쑥 화가 났고 얼굴조차 모르는 그의 아내에게 질투가 나기도 했다. 하지만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내가 먼저 손을 내밀어 놓고 그에게 부담을 주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중요한 것은 그와 함께 시간을 보낼 수 있다는 사실이니까, 그의 진심을 알고 있는 사람은 그의 아내가 아니라 나라고 확신했으니까.
하지만 지난가을 우리가 계획했던 짧은 여행을 앞두고 그에게서 연락이 끊어졌을 때, 그동안 내가 갖고 있었던 그 모든 확신들은 거센 바람 속에 놓인 가느다란 나뭇가지처럼 흔들리고 부서졌다. 전화를 아무리 걸어 봐도 연결이 되지 않았고 메시지에도 답이 없었다. 그렇게 며칠이 지나고 나서야 그의 신상에 대해 내가 아는 것이라곤 겨우 휴대폰 번호뿐이라는 사실을 자각했다. 주소는 아파트 이름까지만 알 뿐, 몇 동인지도 몰랐다. 별거 이후 홀어머니가 집에서 살림을 도맡아 주고 있다고 했기 때문에 그의 집에는 한 번도 가 본 적이 없었다. 그의 사무실 역시 어느 동네에 있다는 것만 알고 있었을 뿐, 정확한 위치나 전화번호조차 알지 못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그저 계속해서 전화를 걸고 메시지를 보내는 것뿐이었다.


눈싸움을 하자.
점심 식사를 마친 후 쏨이 말했다. 카알과 나는 동시에 어리둥절한 눈으로 쏨을 바라보았다. 카알은 야간 근무를 마치고 아침에 들어와 겨우 몇 시간 쉬었을 뿐이었고, 나 역시 테오의 숙소에서 잠시 눈을 붙였다가 아침 첫차를 타고 돌아왔기 때문에 무척 피곤한 상태였다. 점심을 먹고 나면 좀 더 자고 일어나서 마지막 오로라 투어를 갈 계획이었는데, 눈싸움이라니.
할 거지?
카알과 나는 쏨의 전투적인 눈빛에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그릇들을 대충 치워 놓고 외투와 털모자와 장갑으로 무장한 채 앞마당으로 나갔다. 북극의 짧은 일조 시간을 모처럼 만끽할 수 있는 한낮이었다. 몸은 추워도 햇빛에 눈이 부셨다. 카알과 쏨은 자주 그렇게 시간을 보내왔었는지 마당에 나오자마자 익숙하게 자리를 잡고 눈덩이를 뭉치기 시작했다. 나도 그들과 대략 정삼각형 형태가 되도록 자리를 잡은 후 잔뜩 쌓여 있는 눈을 한 덩어리씩 뭉쳤다. 어린 시절 모처럼 눈이 많이 왔던 어느 겨울 이후로는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던 놀이였다.
쏨이 먼저 양쪽으로 눈덩이를 던지면서 눈싸움에 시동을 걸었다. 조금 귀찮은 마음이었는데 막상 눈을 뭉쳐 던지기 시작하자 재미가 붙었다. 눈덩이는 가끔 서로의 몸을 맞추었고, 대부분은 그 전에 이미 떨어져 부서졌다. 우리는 어린애가 된 것처럼 깔깔거리며 눈싸움을 했다. 그러다 어느 순간 그 웃음이 멈췄다. 카알이 던진 눈덩이가 쏨의 얼굴을 정면으로 맞힌 것이었다. 쏨은 비명을 지르며 얼굴을 감싸 쥐었다. 하지만 카알은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쏨을 향해 눈을 던져 댔다. 쏨은 태국어로 악을 쓰듯 뭐라고 외치면서 일어났다. 그러더니 카알의 얼굴을 향해 눈덩이를 던지며 욕을 해 댔다. 카알 역시 그에 질세라 노르웨이어로 소리를 질러 가며 눈을 마구 던졌다. 그들이 하는 말의 의미를 정확히 알 수는 없었지만 더럽고 치졸한 말들이 공기 중에 뒤섞이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이제 그들에게 나는 안중에도 없었다. 애초에 눈싸움을 빙자해 그냥 싸움을 하고 싶었던 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죽어라고 소리를 지르고 눈을 던져 대는 두 사람을 보고 있으니 괜히 눈물이 났다. 나는 고인 눈물을 닦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부엌 유리창으로 카알과 쏨이 보였다. 저렇게 엉망진창이 되어도 끝까지 서로를 마주할 수 있다면 후회가 남지 않을까. 나는 그러지 못했기 때문에 이토록 후회하고 아직도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걸까.
인경의 아내로부터 전화를 받은 것은 그와 연락이 끊어진 지 세 달이 지났을 무렵이었다. 그녀는 단도직입적으로 용건을 말했다.
그 사람 죽었어요. 연락해도 소용없어요.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녀는 나와 인경의 관계를 안 지 오래되었다고, 하지만 곧 제자리로 돌아올 사람이라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저 두고 보았다고 했다. 나는 인경이 죽었다는 그녀의 말을 믿을 수가 없었다. 사실이라면 장지라도 알려 달라고 부탁했다.
착각 그만해요. 잠시 감정이 동했던 거지, 둘 사이에 남은 거 아무것도 없잖아요. 뭐 하나 제대로 아는 것도 없었으면서, 무슨 장지 운운하는 거예요? 그 사람 이 세상에 없는 줄도 모르고 몇 달이나 살았을 테니 계속 그렇게 살아요.
그녀의 말에 따르면 둘은 별거 중이 아니었고 이혼을 염두에 둔 적은 더더욱 없었다. 내가 알고 있는 사실 중 그녀의 말과 일치하는 한 가지는 결혼 십여 년이 지나도록 아이가 없다는 사실뿐이었다. 그 외의 것들은 모두 내가 알던 인경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었다. 그녀의 말을 들으면서 나는 계속해서 의심했다. 이 여자는 정말 인경의 아내일까. 인경이 죽었다는 것도 모두 거짓이 아닐까. 하지만 설령 그 모든 말들이 거짓이라 해도 내가 확인할 길은 없었다. 내가 그에 대해 정확히 알고 있는 정보는 휴대폰 번호 하나뿐이었으니까.
전화가 끊어진 후 나는 다시 통화 버튼을 눌렀다. 전화는 연결되지 않았다. 그렇게 끝내기에는 모든 게 너무 불확실했지만 끝내지 않을 방법은 없었다. 나는 무릎 사이에 얼굴을 파묻고 소리 내어 울었다. 내가 인경에 대해 알고 있었던 것은 무엇이었나. 그는 실존했었나. 모든 기억이 희뿌연 안개 속으로 사라져 버린 것만 같았다.


또다시 오로라 투어에 간다고 하자 쏨이 말했다.
관두고 나랑 술이나 마시자.
그래도 여기까지 왔는데 오로라는 봐야지. 오늘은 진짜 볼 수 있을 거래.
여행자한테 이런 말 미안하지만, 봐도 별거 없어. 사진으로나 멋있어 보이는 거지. 그냥 하늘의 색이 좀 달라질 뿐이야.
그래도 다들 신비롭고 아름답다고 하잖아.
사람들의 기대감이 만들어 낸 환상이지. 그거 하나 보자고 북극까지 왔는데 별거 아니었다고 말할 수는 없으니까.
어차피 오늘이 마지막 투어야. 술은 내일 마시자.
카알과 싸우고 마음이 잔뜩 닳아 버린 채로 집에 혼자 남아 있어야 하는 쏨이 걱정되긴 했지만 나는 옷을 챙겨 입고 길을 나섰다. 일찌감치 해가 져 버린 오후의 풍경은 아무래도 익숙해지지가 않았다.
언제나 집결 장소에 먼저 와 있던 테오는 보이지 않았다. 투어 차량이 출발할 때까지도 그가 오지 않자 벨기에 커플이 어떻게 된 거냐고 내게 물었다. 나는 어깨를 으쓱하고 테오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답은 오지 않았다. 다시 만나기로 약속한 것은 아니었지만 어쩐지 좀 서운한 마음이 들었다.
테오가 안 와서 어쩌나. 오늘은 꼭 운이 따라 줘야 하는데. 우리 인생에선 오늘이 오로라를 볼 수 있는 마지막 기회라고.
영국인 노부부가 푸념하듯 말했다. 테오는 어쩌자고 그렇게 자신만만했을까. 자신이 가진 운을 믿으라던 그 말에 사로잡혀 버린 우리는 그의 부재에 모두 불안해했다. 물론 돈과 시간이 충분하다면 얼마든지 투어에 다시 참여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다들 모처럼 시간과 경비를 들여 온 빠듯한 여행이었고, 오늘은 꼭 오로라를 보아야만 했다.
첫 번째와 두 번째 스팟에서 다시금 실패를 하고 투어 참가자들은 거의 기대를 접은 채 하품을 해 대며 지루함을 참고 있었다. 그런데 마지막 스팟에 도착했을 때였다. 가이드가 흥분된 목소리로 우리에게 외쳤다.
저기, 오로라가 보입니다! 모두 방한복을 챙겨 입고 내릴 준비 하세요.
꾸벅거리며 졸고 있던 나는 가이드의 목소리에 눈을 뜨고 방한복을 여몄다. 차내는 기쁨으로 웅성거렸다. 마침내 보는구나. 사흘간의 기다림이 헛되지는 않았구나. 사람들의 목소리는 투어 첫날 차량에 탑승할 때처럼 다시금 들떠 있었다.
그러나 차에서 내려 가이드가 가리키는 방향의 하늘을 바라보았을 때 나는 옅은 한숨을 내쉬고 언 땅을 괜히 발로 툭툭 찰 수밖에 없었다. 투어 회사의 광고판에 부착되어 있던 커다란 사진에서 본 오로라가 아니었다. 인터넷에서 보았던 여러 사진들과도 확연히 달랐다. 뭐랄까, 본래 오로라가 가져야 할 색깔에 물을 아주 많이 섞은 것 같은 흐릿한 녹색의 하늘빛이라고 해야 할까. 가이드가 말해 주지 않았더라면 알아보지도 못했을 것처럼 희미한 색깔이었다.
생각만큼 선명하게 보이지는 않겠지만, 사진으로는 멋지게 나올 겁니다. 셔터 스피드를 조절해서 찍어 보세요.
가이드의 말대로 셔터 스피드를 길게 해서 사진을 찍었더니 마침내 내가 보고 싶었던 오로라의 형상이 화면에 나타났다. 그런데 카메라 화면으로나 제대로 볼 수 있는 이 오로라는 과연 진짜 오로라가 맞을까. 우리가 기다렸던 오로라가 맞는 걸까.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며 무감각하게 셔터만 눌러 댔다. 그러는 사이 하늘에 그나마 흐릿하게 퍼져 있던 초록빛도 서서히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남은 것은, 차갑고 고요한 북극의 밤하늘뿐이었다.











서정아
작가소개 / 서정아

2004년 《부산일보》 신춘문예에 소설 「풍뎅이가 지나간 자리」 가 당선되어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소설집 『이상한 과일』, 『오후 네 시의 동물원』 이 있다.


《아르코문학창작기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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없는 사람

없는 사람 이혜오 휴대폰 알람은 새벽마다 나를 밀쳤다. 나는 미지근해진 자리끼처럼 엎질러졌다. 바닥에 쏟아진 나를 겨우겨우 주워 모아 연습실로 출근해서 스트레칭을 하면, 그제야 팔다리가 달린 사람의 몸을 감각할 수 있었다. 확실히, 그 시절의 나는 이미 엎질러진 나를 어떻게든 수습하는 기분으로 살았던 것 같다. * 댄스 학원에 다닌 것은 열네 살 때부터였다. 길거리 캐스팅이 될 만큼 뛰어나게 예쁘지 않은 나 같은 애들은 대개 그때부터, 혹은 그전부터 학원을 다니며 오디션을 준비했다. 대형 기획사의 공채 오디션에서는 번번이 떨어졌고, 열여섯, 중3 때 중소형 기획사 하나에서 내 영상을 보고 대면 오디션을 보러 오라는 제안을 했다. 엄마와 함께 서울에 가서 대면 오디션을 봤고, 합격 통보를 받았다.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가득한 계약서에 사인을 했다. 당시 사옥이 위치해 있던 청담동은 내가 살던 동진과는 완전히 다른 세계처럼 보였다. 동네 전체가 백화점 같았다고 할까. 깨끗하고, 반들거리고, 비싼 것들과 알아들을 수 없는 외국어로 가득한. 그 세계의 일부가 된 것이, 나는 기뻤다. 그다음부터는 새벽에 일어나 아침 연습을 하고, 학교에 갔다가 하교 후에는 연습실에 가서 레슨을 받고, 레슨이 끝나면 밤까지 연습을 하다가 숙소에 가서 잠을 청하고 다시 학교에 가는 패턴의 반복이었다. 연습생 숙소에는 나처럼 지방에서 올라온 연습생들이 때에 따라 열 명에서 열네 명까지 모여 살았다. 어깨선을 넘는 긴 머리를 한 여자애 열네 명이 한 공간에 모여 살면 상상을 초월할 만큼의 머리카락이 바닥에 떨어진다. 끝없이 쌓이는 머리카락을 줍고, 줍고, 또 줍다 보면 문득 인간의 머리에서 머리카락이 계속 자란다는 사실이 지긋지긋해지곤 했다. 그곳에선 언제나, 모든 자원이, 부족했다. 동진에서 부모님과 살 때는 부족할 수 있다는 상상조차 해 보지 못한 것들까지. 화장실과 콘센트의 개수나 냉장고와 옷장과 침대의 넓이, 그리고 프라이버시 같은 것들. 내가 온전히 혼자 있을 수 있는 공간은 이불 속밖에 없었다. 나는 좁다란 이층 침대에서 늘 머리끝까지 이불을 뒤집어쓰고 이어폰을 꽂은 채 잠들었다. 그 어둡고 텁텁한 공간만을 편안하다고 느꼈다. 나는 천천히, 깨끗하고, 반들거리고, 비싼 것들과 알아들을 수 없는 외국어로 가득한 세계에는 내 자리가 없다는 것을 깨달아 갔다. 회사가 작아서인지 제대로 된 트레이닝 시스템이랄 게 없어서, 데뷔 조가 아닌 연습생들은 제대로 관리를 받지 못했다. 어린애들이 우르르 들어왔다가 또 우르르 나갔다. 들짐승처럼 방치된 우리는 서로를 경계하고 미워했다가 또 끌어안았다가 하며 그 시간을 견뎠다. 물론 견디지 못하는 애들이 더 많았다. 고참들은 조급하고 불안한 마음을 텃세로 풀었고, 신입들은 눈치만 보다가 나가떨어졌다. 매일 갈등이 있었고 매일 누군가 울었다. 누가 언제 집으로 돌아가게 될지 모르는 상황에서 안정적인 관계를 만들기란 어렵다는 것. 그 정도의 스트레스 상황에서 남을 미워하지 않고 버티기는 힘들다는 것. 이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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