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대한민국 태극기이 누리집은 대한민국 공식 전자정부 누리집입니다.

공식 누리집 주소 확인하기

go.kr 주소를 사용하는 누리집은 대한민국 정부기관이 관리하는 누리집입니다.
이 밖에 or.kr 또는 .kr등 다른 도메인 주소를 사용하고 있다면 아래 URL에서 도메인 주소를 확인해 보세요.
운영중인 공식 누리집보기

메아쿨파

  • 작성일 2022-09-09
  • 조회수 1,028

[아르코문학창작기금 - 수필]






메아쿨파



민혜




메아 쿨파, 메아 쿨파, 메아 막시마 쿨파!(내 탓이요, 내 탓이요, 내 큰 탓이로소이다!)
이 말은 라틴어로 미사를 올렸던 내 유년 시절의 통회 기도문이다.
영세를 받은 건 네 살 때였다. 신부님이 성수(聖水)로 이마를 씻는 순간 뭔지 모를 두려움에 나는 고양이처럼 발버둥쳤다. 모태를 벗어난 신생아의 첫 행동이 우는 일이듯 영혼이 거듭나는 세례식에서 나는 찢어지게 울었다. 까마득한 세월 저편의 그 광경은 성전에 스며들던 스테인드글라스의 영롱한 색채들과 조합되어 영상처럼 남아 있다.
그 후 엄마와 명동 성당에 다녔다. 고해성사를 접한 것은 초등학교 3학년이 되고서였는데, 당시는 ‘제2 바티칸 공의회의*‘가 열리기 전이라서 하느님의 사랑보다는 정의를 강조하는 편이었다. 때문인가 내게 처음 다가온 하느님은 어진 아버지이기에 앞서 심판자의 이미지로 불도장이 박혔다.
이렇게 시작된 신앙은 중학생이 되면서 회의로 번지다가 결국 고등학교 시절의 어느 날 나는 고해소를 찾아가 하느님이 안 계신 것 같다고 고백하기에 이르렀다. 연세 많은 신부님은 동의하기 힘든 훈계를 들려주셨다. 그건 마귀의 훼방이라는 거였다. 내가 기대한 건 종교적 방황에 대한 이해와 조언이었기에 그 길로 성당에 발길을 끊었다. 하지만 그 시점을 계기로 타 종교에까지 관심을 두며 종교적 외연을 넓힌 것 같다.
그러다가 서른 중반 무렵이 되었을 때 다시 가톨릭으로 돌아와 고해성사를 보기 시작했다. 성찰 시엔 대체로 십계명과 칠죄종(七罪宗)에 기초를 두고 살핀다. 칠죄종이란 인간이 범하는 죄의 뿌리가 되는 것을 의미하며 교만, 인색, 음욕, 탐욕, 질투, 나태, 분노(의로운 분노가 아닌, 무질서하게 남을 저주하는 폭력성의 분노)로 분류한다.
간혹 종교가 다른 이들이 고해성사를 놓고 묻는다. 어째서 하느님께 직접 고하지 않고 인간인 신부에게 하느냐는 것이다. 고해성사를 밑받침하는 가톨릭의 교리가 있음에도 나는 로마 바티칸의 교황도 고해성사를 본다는 정도만 알려 줄 뿐 논쟁을 삼간다. 믿음이란 사람의 머릿수만큼이나 다양하고 개인적인 거라 각자 마음 가는 대로 따를 수밖에 없는 일이다.
고해소에 들면 심저에서 웅크리고 있던 죄가 언설로 구체화되며 내 귓전을 울린다. 하여 죄는 보다 실제성으로 느껴진다. 몹시 계면쩍고 수치스러울 때도 있다. 고해성사란 이런 부담을 주는 면도 있는 셈이다. 난들 회피하고 싶은 적이 왜 없었을까만 한편으론 내가 왜 그러는지를 분석하는 게 흥미로웠다. 또 하나의 분신을 만들어 자신을 바라보는 것이다.
죄를 열거할 때는 내용은 간추려 말하되 중요한 부분은 반드시 그 핵심을 드러내었다. 밑바닥의 민낯을 파헤치며 표면 행위가 아닌 빙산의 밑동에 중점을 두었다. 자주 범하는 죄란 결심해도 다음에 또 걸려 넘어지고 만다. 그럼에도 내 존재의 나약함을 하느님께 맡기며 고백한다. 그래야 비로소 영혼의 정화가 이루어지는 것 같았다.
인간이 죄를 떨치기 힘든 것은 대개의 죄들이 우리에게 던져주는 마약성의 쾌감 때문일 터다. 교만이나 탐식 및 음란 행위 등은 길티 플레저(guilty pleasure)를 바탕에 깔고 인간을 취하게 만든다. 교만은 이상자아(ideal self)를 실제자아(real self)로 착각하거나 왜곡하는 것에서 기인하는 거라고 한다. 이 착각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객관적 자기인식이 수반돼야 하는데 초월적 존재에 자신을 비춰 보지 않고는 해결하기 힘든 일이었다.
사십 후반 무렵의 고해성사를 평생 잊을 수가 없다. 그 당시 나는 성당에서 많은 봉사를 했기에 신자들과의 교류도 잦았다. 그러던 중 봉사단체 단원들 댓 명이 모여 어떤 교우 얘기를 하게 되었다. 문제의 주인공은 신심 행사에만 지나치게 빠져든 듯 보였다. 학교 다니는 자식들이 있음에도 멀리 지방까지 다녀오는 행태를 놓고 교우들의 시선은 곱지 않았다. 이야기가 무르익자 담화는 어느새 험담으로 변질되어 모두가 한마디씩 심판관을 자처하였다. 그녀와 인접 거리에 살고 있던 나는 더 많은 걸 알고 있던 터라 몇 마디를 보탰다. 그러곤 2년의 세월이 흘렀다.
어느 날 아침이었다. 고해성사를 보려고 성찰하는데 문득 그날 쏟은 내 말이 혓바늘의 돌기처럼 솟으며 신경을 건드렸다. 타인에 대한 얘기가 오가는 건 그리 탓할 일은 아니다. 문제는 그녀의 가까운 이웃인 내가, 더구나 그녀의 힘든 형편을 잘 알고 있던 내가 험담에 동참하며 사실을 다소 과장했다는 것에 있었다. 보태 말했던 그 분량의 죄가 감때사나운 괴물이 되어 가슴 밑바닥에서 소리를 질러 대었다.
나는 고해소를 찾아가 잘못을 털어놓았다. 교우를 험담했다는 정도로 끝냈어도 될 거였지만 보다 상세히, 내 감정을 보태 좀 과장했다고, 그 점을 통회한다고 말씀드렸다. 고백이 끝나면 신부님들은 보통 기도나 희생, 미사 참례를 보속(補贖)으로 주기에 묵주기도나 성경 읽기나 미사 참례 중 하나가 떨어질 거라 예측했다. 한데 이번엔 전혀 달랐다.
“보속은, 하느님께 용서를 청하시고요, 그 교우의 명예를 회복해 주는 일입니다. 반드시 그 교우의 명예를 회복해 주세요. 하실 수 있겠어요?”
신부님은 거듭 물으셨고 나는 맥없이 “네” 하고는 고해소를 벗어났다. 그러나 2년의 시간이 흐르는 동안 그때 모였던 사람들은 모두가 이사를 가 버려 연락이 끊어진 상태였다. 결국 여기저기 수소문해 그녀를 비롯한 다른 두 명의 연락처를 알아내었다. 나는 우선 당사자에게 진심으로 용서를 청한 뒤 두 명의 교우에게도 전화 걸어 그날의 말을 정정하며 사과하였다. 그러고 나자 비로소 마음이 가벼워졌다.
어느 소설가는 죄란 인간이 다른 인간의 인생 위로 통과하면서 자기가 거기에 남긴 발자국을 잊어버리는 일이라고 했다. 맞는 말이다. 인간은 자주 자기 발자국을 무심히 지나쳐 버린다. 요즘은 고해성사 기도문이 다소 간소화됐지만 예전엔 고백하고 난 뒤 이런 기도를 올렸던 게 생각난다.
“… 이밖에 알아내지 못한 죄와 남이 나로 인하여 범한 죄 있을 것이니 신부는 나를 벌하고 사하소서, 아멘.”
그러나 심안이 밝지 않고서야 어찌 남이 나로 인한 과오까지 헤아릴 수 있을까. 죄란 씻고 씻어도 그 집요한 생산을 멈추지 않는다. 하기에 최소한 주제 파악은 하며 살려고 영혼의 쓰레기가 차오르면 고백소를 찾는다.
메아 쿨파, 메아 쿨파, 메아 막시마 쿨파!


* 제2차 바티칸 공의회: 1962년부터 1965년까지 로마에서 열린 가톨릭교회의 공의회로서 가톨릭교회가 장차 나아갈 길을 타진한 교회의 현대적 개혁이 이 공의회의 목적이었다.
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많은 부분이 쇄신되어 대격변 수준으로 가톨릭을 바꿨다.













민혜
작가소개 / 민혜

1992년 《창작수필》로 등단.
저서 : 『장미와 미꾸라지』, 『떠난 그대 서랍을 열고』, 『어머니의 불』


《아르코문학창작기금》


추천 콘텐츠

「스케치하는 시간」외 1편

스케치하는 시간 류미월 권태는 새로움을 갈구한다. 그렇고 그런 날이 계속될 때 훌쩍 집을 떠나 낯선 여행지를 걷다 보면 나를 다시 돌아보게 되는 여유가 생긴다. 지루한 ‘코로나 19’ 마스크 시대와 어제 같은 오늘이 반복되는 일상에 지쳐갈 무렵 문뜩 부러움의 대상이었던 그림 그리기가 생각났다. 유화나 수채화보다는 기초를 다지고 쉽게 접할 수 있는 연필 스케치를 시작했다. 사각사각 슥슥 연필심이 도화지를 채워나가는 소리가 좋다. 사진보다 섬세할 정도로 잘 그리는 중급반 동호인들을 볼 때면 존경심이 저절로 생긴다. 가로, 세로줄 긋기를 통해 감각을 익히고 H, 2H, 3H ... 6H, B, 2B, 3B ... 6B 연필을 사용해서 명암을 조절한다. 원기둥 그리기와 머그컵 그리기까지 끝내고 나니 슬슬 재미가 붙으며 오그라들었던 어깨가 펴진다. 시간이 날 때면 주방과 거실에 있는 사물들을 유심히 관찰하고 기본 스케치를 한다. 길을 가다가 야생화를 보면 정성 들여 여러 각도로 사진을 찍고 하나씩 불러내서 스케치북에 그려본다. 나 스스로 ‘자뻑’하며 만족하는 그림이 나왔을 때의 기쁨은 글 쓰는 맛과는 또 다른 즐거움을 준다. 오늘은 머그컵과 친해지는 날이다. 머그컵을 좌우대칭 정확히 파악한 후 비율에 맞게 스케치하고 짙은 색에서 중간색, 흐린 색으로 자연스럽게 연결되게 스케치를 채워나간다. 가로세로 명암을 넣으며 마지막 완성에 다다를 때는 숨소리도 죽여가며 몰입하게 된다. 머릿속을 하얗게 도화지처럼 비우고 오로지 스케치하는 사물만 생각하며 그린다. 하늘에 뜬 흰 구름처럼 평화로운 마음 상태에서 집중 몰입할 때의 순간이 좋다. 신문이나 책을 보다가 살림을 하다가 여유가 날 때 차 한잔하며 사각의 백지를 마주하는 순간은 한여름에 순백의 눈 위를 걷는 것처럼 청량하고 순수해지고 차분해지는 나와 마주하는 순간이다. 첫사랑을 떠올릴 때의 기분이 이랬을까? 그림을 잘 그려보겠다는 욕심이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어두운 부분은 더욱 진하게 하나의 빈틈이라도 있을까 봐 여백을 꽉꽉 채우게 된다. 기초 작업인 구성이 잘못됐을 때는 미련 없이 싹 지우고 다시 그려야 오류를 줄일 수 있다. 착각은 자유라지만 내가 그린 게 최고인 것 같고 틀림없어 보여서 한번 그린 건 쉽게 지우지 않게 된다. 안쪽부터 채워나가다 보면 기본 구성이 잘못되었음을 나중에 알게 된다. 연필로 밀도 있게 채워나가는 것보다 잘못 그린 부분을 지우개로 제대로 지우는 것이 최고의 소묘라는 걸 스케치를 배우면서 알게 되었다. 어디 스케치 뿐이랴. 우리의 삶도 자꾸 비워야 새것을 받아들이고 머릿속도 새로운 지식을 받아들이려면 고정관념을 과감하게 버려야 새것을 받아들일 공간이 커지는 법 아니던가. 스케치하는 시간은 힐링과 치유의 시간이 된다. 기분이 불쾌하고 속상하고 슬펐던 감정이 스케치하는 동안 상처가 아물 듯 기분이 좋아진다. 급하고 덜렁거리는 조급함이 산사(山寺)에서 참선을 하듯 고요하고 평화로워진다. 스케치하면서 그림을 완성

  • 관리자
  • 2023-11-15
눈 오는 날의 기호

눈 오는 날의 기호 류미월 간밤에 바른 자세로 잠을 못 자고 뒤척인 탓인지 아침에 눈을 뜨자 등 쪽이 불편하다. 이럴 때면 인근에 있는 의료기 체험을 할 수 있는 건강 카페에 가곤 한다. 따뜻한 자리에 누워서 척추 라인을 온열로 집중 관리받고 나면 통증이 줄어들고 온몸이 개운해진다. 체험 비용은 차 한 잔을 주문하면 된다. 체험을 마치고 넓은 창가 탁자에서 차 한잔하는데 정월의 함박눈이 펑펑 내린다. 달리는 자동차 위에도 애완견을 데리고 가는 여인의 어깨 위에도 꿈꾸는 푸드트럭 위에도 함박눈이 하염없이 내린다. 펄펄 내리는 눈송이가 갓 구운 고소한 빵 내음을 흩뿌리고, 한쪽 하늘에선 깃털 같은 함박눈이 춤추듯 내려와 바닥에 곤두박질치며 비릿한 슬픔을 뿌리고 간다. 어느 정도 함박눈이 퍼붓고 난 하늘이 맑아졌다. 하늘도 먹먹한 제 무게를 감당 못 할 때는 펑펑 소리 내 울듯 함박눈이 되어 내리는가 보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차를 마시는데 묵은지 같은 친구한테서 문자가 왔다. 친구도 눈 오는 날 친구가 그리웠나 보다. 느닷없이 먼 옛날 함박눈이 내리던 날 퇴근 후 명동거리를 빙빙 배회하다 소주잔을 기울이던 20대 시절의 추억이 떠오른다. 친구와 명동 골목 식당에서 낙지 덮밥을 먹으며 사는 게 매운 건지 음식에 고춧가루 때문인지 눈물 반 콧물 반을 흘리며 소주잔을 기울였다. 고달픈 삶을 서로 토닥이며. LP 판을 틀어주는 음악다방 구석진 자리에서 신청 곡을 메모지에 적어 DJ 박스에 건네곤 그 곡이 나오면 세상을 다 가진 듯 감격하며 듣던 일들이 파노라마처럼 스쳐 간다. 추억에 빠졌다가 의료기 체험 카페 문을 밀고 나서려는 순간 손을 힐끗 봤다. 거칠고 주름진 손이 세월의 무상함을 느끼게 한다. 거리를 걸었다. 눈은 먼 곳에서부터 수직으로 오다 사선으로 흩날리다 소리 없이 내린다. 가로수와 고층 빌딩과 벤치와 로드킬 당한 생쥐 몸 위에 소복소복 말없이 이불을 덮어주듯 내린다. 내리는 눈을 바라보고 있으면 미웠던 사람의 얼굴도 불현듯 스쳐 간다. 눈은 묘한 마력이 있다. 눈은 마음을 훈훈하게 해주고 욕심으로 가득 찬 마음을 잠시 내려놓게 한다. 멍하게 ‘눈 멍’을 때리고 정지된 화면처럼 있으면 머리를 옥죄던 근심 걱정이 지우개로 쓱쓱 지운 듯 잠시 사라진다. 요즘 들어 집안 살림살이에서도 잘 안 쓰는 그릇이나 옷과 책 그리고 자잘한 살림살이를 큰맘 먹고 버리고 있다. 버리고 나니 공간이 넓어지고 마음마저 뻥 뚫린 듯 시원해진다. 주방을 드나들 때면 그릇장에 남겨진 그릇들의 숨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다. 집은 좁다고 투덜대며 넓혀갈 생각만 할 일이 아니다. 필요 없는 것들을 처분하고 나서 집이 몇 평은 넓어진 느낌이다. 중년에 접어든 삶은 무조건 더하기만 고집할 일이 아니다. 때로는 빼기를 잘해야 편안한 삶이 된다는 걸 공감하고 있다. 되지 않을 것들을 붙잡고 있으면 에너지가 방전되고 화가 깊어져서 몸도 마음도 상하게 된다. 요즘 들어 아니다 싶은 것들은 하나씩 내려놓는 연습을 하고 있다. 물건이

  • 관리자
  • 2023-11-15
「상처가 주는 울림」외 1편

상처가 주는 울림 공화순 페북을 끊은 지 서너 달이 지났다. 가끔 궁금하고 친구요청 알림이 뜨면 어쩌다 휙 눈팅을 하게 된다. 그러다 낯익은 사람의 글이 눈에 들어왔다. 왜 사람들은 오래된 상처를 쉬이 털어버리지 못할까? 아니, 상처는 왜 쉬이 아물지 못하는 것일까. 나도 어릴 적 실수로 정강이에 깊은 상처를 얻었다. 일곱 살 즈음의 일이다. 안마당에 무를 담아놓은 고무 대야가 하필 어린 계집아이 눈에 띄었다. 대야 안에 가득한 무와 함께 커다란 부엌칼도 눈에 확 들어온 건 비극의 서막이었다. 고무 대야에 쪼그리고 앉아 작은 손으로 커다란 칼을 집어 들었다. 무를 잘라보고 싶은 충동을 이기지 못하고 무를 힘껏 내리쳤지만, 힘에 부쳤다. 칼은 무에 박혔고 얼마간 실랑이를 벌이다가 있는 힘을 다해 칼을 뽑았을 땐 순식간에 칼끝이 정강이를 깊이 도려내고 바닥에 떨어진 뒤였다. 눈 깜짝할 새 정강이 살점이 파이고 하얀 뼈가 보였다. 순간 놀란 가슴보다 정강이가 더 놀란 듯, 피도 나오지 않고 시간이 딱 멈춘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비명도 눈물도 없었다. 뒤미처 엄마한테 들키면 안 된다는 생각이 밀려왔다. 집안으로 뛰어들어가 광목천을 두르고 숨기기에 급급했다. 얼마 후, 들에서 돌아온 엄마는 다리를 처맨 것을 보셨고 나는 아무렇지도 않게 병원놀이를 한다고 거짓말을 했다. 상처는 아직도 깊숙한 자리로 남아 그날의 기억을 생생하게 상기시키곤 하는데 상처를 치료했던 기억이 없다. 병원놀이가 며칠째 계속되자, 엄마가 벗겨봤지만 이미 치료 시기를 놓친 뒤였다고 한다. 상처를 제때 치료했다면 흉터가 가볍게 남진 않았을까, 뒤늦게 후회도 해봤다. 정강이의 깊은 상처는 사춘기 시절 내내 치마 입는 것조차 신경이 쓰이게 했다. 크도록 짧은 치마를 입는 데 불편을 겪었다. 치마를 입을 때마다 스타킹은 필수요건이 돼버리고 겨울엔 두꺼운 스타킹과 부츠를 신으니 차라리 편했다. 페북의 그도 어릴 적 자전거를 타고 넘어져 앞니 두 개를 잃고 사십을 바라보는 지금까지 그 상처에 붙들려 살고 있다. 사람들은 모두 상처 한두 개쯤 지니고 살기 십상이다. 누군가는 쉬이 상처를 아물리고 다독이며 잘 살기도 할 것이다. 오랫동안 정강이 상처를 의식하고 살아온 나는 처음으로 내 상처에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벌써 50년을 넘게 내 몸에 지녀온 상처인데 한 번도 보듬어주지 못했다. 몇 년 전, 잡지에서 배에 있는 수술 흉터를 드러내고 활짝 웃으며 찍은 모델 사진을 보았다. 완벽한 아름다움 속에서 상처는 꽤 도드라졌다. 그것이 내게 신선한 도발이었다. 부조화에서 온 변화가 자꾸 눈길을 끌었다. 너무 지루한 고요 속에 쨍하고 금을 긋는 울림 같았다. 고등학교 들어갈 때, 시내에서 꽤 알아주는 의상실에서 교복을 맞춰 입었다. 학생들 무리에서 몸에 곡선을 매끈하게 빼준 교복 덕에 선배들 눈길을 사로잡곤 했다. 다행인지 남들보다 치마 길이가 길게 맞춰져서 정강이 절반 아래로 날씬한 다리만 보이고 다닐 수 있었다. 그래서 친구들은 어쩌다 내 정강이 상처를 발견하면

  • 관리자
  • 2023-11-10

댓글 남기기

로그인후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생각을 남겨 주세요!

댓글남기기 작성 가이드

  • 타인에게 불쾌감을 주는 욕설, 비방 등은 삼가주시기 바랍니다.
  • 주제와 관련 없거나 부적절한 홍보 내용은 삼가주시기 바랍니다.
  • 기타 운영 정책에 어긋나는 내용이 포함될 경우, 사전 고지 없이 노출 제한될 수 있습니다.
0 / 1500

댓글0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