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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뭐라고 말해도 그래도 음악, 누가 뭐라고 해도 글{윤수현: 저 꽃 속에 찬란한 빛이,강성희:날아}

  • 작성자 송희찬
  • 작성일 2024-02-21
  • 조회수 494

 "네 꿈은 뭐니?" 선생님들의 학년 초 단골 질문이다. 그럼 우리는 뭐라 답할까? 나같은 경우는 "글 쓰는 작가요." 라고 답할 것 같다. 이를 보는 선생님의 태도는 그렇게 좋아 보이지는 않는다. 내 중2 담임 선생님 또한 좋은 표정은 아니었다. 그 이유는 현실적으로 작가로서의 삶은 어렵기 때문이다. 선생님이 이를 장담할 수 있었던 이유는 선생님도 글을 쓰는 것을 좋아하여 백일장에 여러 나가서 상을 받고 작가를 꿈꿨던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나에게 "글 쓰는거야 투 잡으로 뛸 수 있는 것이니까 잘 생각해봐." 라고 조언을 했다. 그러나 나는 내 꿈을 밀고 싶다. 이런 고민은 예비 고등학생 시기를 지네고 있는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2024년 나는 다양한 문학 활동과 더불어 내가 좋아하는 음악 감상을 이어나갔다. 그러던 중 <현역가왕>이라는 트롯 경연 프로그램에서 가수 윤수현의 마지막 현역의 노래인 <저 꽃 속에 찬란한 빛이>를 듣게 되었다. 이 노래의 원곡은 가수 박경희의 노래다. 가수 윤수현이 이 곡을 마지막 현역의 노래로 선택한 이유는 본인의 노래 생활이 이 노래와 같았기 때문이었다고 말했다. 그녀의 노래 인생은 처음부터 밝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의 곡 <천태만상>이 역주행을 하면서 그녀는 빛을 보기 시작했다. 나는 그녀의 곡을 듣고 나도 내 인생의 밝기가 처음부터 밝지 않을 수 있다 생각을 했다. 그런 마음가짐을 가지고 <싱어게인3>에 나온 강성희가 마자막 인생 곡으로 부른 <날아>를 들었다. 이 노래는 이승열 원곡 <미생>의 OST다. 그녀가 이 곡을 고른 이유는 <미생>의 대사 중 "그래도 바둑"이라는 대사가 있는데 본인의 인생에 있어 노래는 힘들어도 노래라 생각하기 때문에 곡을 선택했다고 하였다. 그래서 그런지 이 <날아>라는 곡과 <저 꽃 속에 찬란한 빛이>가 새롭게 들리면서 미래에 대한 고민을 하고 있는 나에게 많이 다가왔다. 그리고 이 두 곡이 내게 따뜻한 말 한마디를 건내주는 것 같았다.


{ 위 두 곡의 가수 해석은 어떻게 될까?}

 먼저 윤수현이 부른 <저 꽃 속에 찬란한 빛이>를 해석하면 윤수현 본인의 인생을 꽃에 비유하여 세상을 보지 못한 꽃봉오리 시절부터 활짝 꽃을 핀 지금의 시절까지 함께 노래에 표현했다.  이는 윤수현이 노래를 부를 때 표정을 보면 알 수 있다. 초반 "어둠에 묻쳐 지나간 그 세월의 그림자"이 부분의 시작을 진지한 표정으로 시작했다가 "찬란한 태양이 빛나는 거리" 이 부분 부터는 윤수현 특유의 밝은 에너지와 행복한 미소를 보여줬다. 이를 볼 때 그녀는 노래에 흠뻑젖어 자신의 인생과 이 노래를 동일시 했다. 

 그리고 강성희의 <날아>를 해석하면 "모든 것이 무너져 있고, 발 디딜 곳 하나 보이지 않아."이 부분에서 가사를 잊는 실수를 했다. 하지만 뒤로 갈수록 그 실수가 의도적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치 본인의 음악의 인생의 고달픔과 기쁨을 표현한 그런 뮤지컬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 마지막 "날아"를 진성으로 강하게 표현한 것으로 보아 그녀의 음악 인생이 앞으로도 더 나갈 것이고 음악과 함께하는 삶을 가질 것이다 라고 표현을 했다. 이를 보아 그녀 또한 본인의 인생을 음악으로 녹여냈다.


{ 관객들에게 전하는 메시지는? }

윤수현과 강성희의 무대를 보면 많은 사람들이 느꼈을 것이다. 그녀들이 얼마나 음악과 노래에 진심이었는지를.  그런 진심 때문일까? 많은 관객들은 이들의 노래로부터 위로를 받았을 것이다. 윤수현이 부른 박경희의 <저 꽃 속에 찬란한 빛이>도 그렇고 강성희가 부른 이승철의 <날아>를 들어도 모두 날개라는 단어가 떠오른다. 대표적인 가사로 "행복의 날개여 활짝 펴라"와 "날개를 펴고 날아" 부분이 있다. 날개는 상승을 의미한다. 또한 곡에서도 꽃봉오리와 발디딜 곳 하나 없는 도시에서 벗어나 날아오르 라고 말하고 있다. 이를 볼 때 이 곡들은 우리가 쓰러져 있고 무너질 때도 희망을 포기하지 말고 날아오르라고 말하고 있다. 특히 <날아>에서는 "거기서 멈춰 있지마, 그 곳은 네 자리가 아냐"라는 부분이 있다. 지금 우리가 힘들어 하고 있는 이 곳은 우리의 자리가 아니라는 것을 알려주는 것 같다.


{ 메시지를 받은 우리가 해야 할 것은 뭘까?}

 그럼 우리가 이제 나가야 할 자세는 뭐고 배워야 할 것은 뭘까? 나는 우리도 그들처럼 자신이 원하는 것에 대하여 용기를 잃지 않고 쭉 나아가면 언젠가는 힘든 이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을것이라는 작은 희망을 가지고 살아가야 한다. 그 것이 우리보다 더 먼저 경험한 이들이 얻은 가치이며 그들이 음악으로 전하는 마음이자 교훈이다. 


{ 누가 뭐라 말해도 그래도 음악, 누가 뭐라 말해도 그래도 글}

 나에게 이 노래들은 나의 꿈에 확신을 줬다.  미래는 지금 상황보다 더 혹독하게 내게 다가와서 날 공격하고 글이 내 삶을 뒤흔들 수 있다. 중 2 담임 선생님의 말처럼. 하지만 누가 뭐라 말해도 그래도 모든 나의 길은 글이다. 내가 위로받고 좋아하는 것이 글이기 때문이다. 강성희, 윤수현도 노래로서 위로 받고 좋아하는 애정이 담았기에 지금의 이 위치에 올라올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이제 본인들이 사랑하는 것으로 누군가에게 힘이 되어주는 존재가 되었다. 나도 이들처럼 누군가에게 힘이 되고 싶다. 누가 뭐라해도 길은 글에 있고 노래에 있었으니까. 그리고 그 선택의 길은 언제나 나고 행복이고 좋아한 것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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靑春 보다 圊芚(카임:청춘)

23년도 제 19회 문장청소년문학상 수상집인 을 글틴으로부터 선물 받았다. 나는 이 당시 장려상을 받아 우수작과 최우수작 그리고 대상작을 연구했다. 나는 신춘문예에서도 당선작보다 수상소감을 먼져본다.그 이유는 수상소감이야 말로 글쓰기를 배울 때 제일 기초적인 마음가짐을 배울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난 위 책을 읽을 때도 작품 뒤 작가노트를 제일 먼저 읽었다. 내가 제일먼저 읽은 작품은 문우인 모모코의 작품인도 아니고 시 부분의 최우수작인 도 아닌 소설부분 우수작 카임의 이었다. 내가 이 글을 제일 먼저 읽은 이유는 작기노트에 "저는 청춘 불신론자 입니다."라는 문구가 내 머리에 박혔기 때문이다. 청춘 불신론자가 쓴 청춘이라 이보다 더 흥미로운 것이 어디 있겠는가? 그래서 나는 이 소설을 제일 먼저 읽었다. 일단 청춘의 뜻은 푸를 청 봄 춘이라는 뜻을 가진 단어이지만 이 글에서는 주인공의 이름으로 들어갔다. 주인공의 이름은 춘 그것도 봄 춘이 아닌 어리석을 춘이다. 또한 그의 형제인 청 역시 푸를 청 맑을 청이 아닌 뒷간 청이다. 위 소설은 이 둘이 진짜 靑春을 찾는 과정과 그들의 암울한 청춘을 그린 작품이다. 나는 이 둘이 바닥에서 생활 하는 모습을 보고 많이 안타까움을 느꼈다."바닥을 기면 누릴 수 있는 구원은 없다(109p)"를 보더라도 그들이 얼마나 힘든 삶을 살았을 것을 짐작하기 어려울 만큼 어려웠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청춘 이 두 단어로 그들은 행복하지 않았다. 특히 동생인 청은 행복이 무엇인지 모르고 불행이 무엇인지 모를 정도록 힘들게 살았다. 옛말에 사람은 이름대로 산다고 했다. 이들의 이름은 노란색 미세먼지 더미였다. 그들의 청춘은 누랬고 그들의 절망역시 누런색이었다."우리의 절망은 중국산이야(111p)"라는 말로 그들이 누런 청춘을 버텨야 했고 살아야만 했다. 그래서 그들은 열심히 일했다. 정확히 춘은 열심히 일했다. 청이 도망갈까 전전긍긍하며 누구 부럽지 않게 열심히 했다. 그러던 어느날 춘과 함께 일하던 홍구가 사고로 떨어져 죽는 일이 발생했다. 모두들 이 일로 불안해 하던 중 춘도 홍구의 뒤를 그대로 밟을뻔했다. 그러나 다행이 홍구보다 낮은 층에 떨어져 허리만 나갔다. 그러나 춘은 치료를 받지 않았다. 이름처럼 어리석은 선택을 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이후 청이 공사판을 달리게 되었다. 그러나 이후부터 순수했던 청의 모습을 볼 수 없었다. 보이는 것은 누렇게 변한 청 뿐이었다. 그들의 청춘은 이름 값을 했다. 소설의 결말은 청이 20살이 되면서 동료 인부들과 술을 마시며 깨닫고 암울한 그들의 청춘을 보여주고 진짜 청춘을 보여주며 막을 내린다. 그러나 난 과연 청춘이 靑春일까?라는 생각을 했다. 청춘이라 하면 관념적으로 풋풋한 나이를 떠올린다. 나 또한 그렇다. 그러나 현재 우리나라를 살아가는 청춘들은 과연 풋풋할까? 라는 생각을 해봤다. 우리나라 10-30대 사망률 中 제일 높은 것은 자살이었다. 이 내용은 많이들 알 것이다. 그럼 우리가 쉽게 생각하는 청춘은 무엇인가 생각하면 10-30대를 말한다.

  • 송희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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