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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가흠,「나프탈렌」중에서

  • 작성일 2013-01-24
  • 조회수 2,416


   둘의 대화는 하나를 묻고 멈춰 서고, 대답을 하고 다시 멈춰 섰다. 정적이 흐르는 동안, 손화자는 담배를 다시 피워 물었고, 백용현은 바쁘게 시선을 옮겼다.

   “나, 한쪽 가슴 다 도려냈어. 왼쪽 가슴.”
백 교수가 화들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뭔가 긴장감이 풀리고 있던 차였는데, 그는 다시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젊은 날, 그가 그토록 탐닉했던 전부의 절반이 사라졌다고 생각하니, 좀 이상했다.
“너 좋아했잖아. 절벽 가슴. ……이제 흔적도 없다, 한쪽은”
손화자가 도려낸 가슴 쪽을 손으로 짚었다.
“……….”
백용현은 눈을 천천히 끔벅이며 왼쪽 가슴이 있던 자리를 쳐다보았다. 그가 사랑했던 까맸던 젖꼭지가 불현듯 머릿속에서 튀어 올랐다.
“보여줄까?”
“……뭘 말인가?”
“가슴 있던 자리.”
“으흠.”
그는 고개를 돌리며, 돋보기를 만지작거렸다. 당돌한 그녀의 성격은 여전했다.
“별일도 아니야, 나 죽으면 가슴이 살았던 자리도 기억하고, 가슴이 사라진 자리도 기억하라고.”
“뭔가, ……그게, 무슨 말이야. 나이 먹고서도 당신은, ……여전히 추레하군.”
백용현은 불쾌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돌렸다. 그는 짐짓 화난 얼굴이었으나, 그를 바라보는 그녀의 표정은 장난기 가득, 미소가 번져 있었다.
손화자가 갑자기 일어나더니 옷을 벗기 시작했다. 그녀는 하얀 반팔 티셔츠에 얇고 헐렁한 카디건을 걸치고 있었는데, 그것을 벗는 데는 3초의 시간도 걸리지 않았다. 백용현은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그는 뒤돌아서 창 쪽을 바라보았다.
“지금……뭐하는 건가?”
“네가 변하지 않았다는 게, 나는 왜 이렇게 화가 나니. 아니, 젊었을 때의 네가 나이만 먹은 것 같아, 쓸쓸하기도 하다. ……넌 날 정면으로 바라보지도 못하잖냐. 넌 좀, 그래, 젊었을 때부터…….”
“당신이 나에 대해 뭘 안다고 그러는 건가? 몇십 년 만에 갑자기 찾아와서, 이렇게 무례한 일을 벌이는 이유가 뭐냔 말이야?”
“말했잖냐, 단순하게, 가슴이, 감정이 있었던 자리를 보여주려고 한다고. 있던 게 없어졌을 때 알게 되는 그 존재감 말이야, 젊은 날 한때 우리가 심취했었던 철학이잖아. 그때 알던 것들은 알던 게 아니었다는 말이지. 이렇게 늦은 나이에 그런 게 명징해질지는 몰랐다. 널 보러 온 이유도 간단해, 네가 정말 존재했었는지, 확인하러 온 거란 말이지.”
“……그래도 그렇지.”
“나, 환자잖아. 곧, 정말 죽는다니까.”
백용현이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거기엔 죽어가는 한 노인이 서 있었다. 이미 죽은 모습의 손화자가 서 있었다. 죽은 가슴 한쪽이 늘어져 있었고, 가슴이 살았던 자리가 움푹 패 있었다.


   ● 작가_ 백가흠 - 1974년 태어나 2001년 서울신문 신춘문예로 등단했다. 소설집『귀뚜라미가 온다』,『조대리의 트렁크』,『힌트는 도련님』, 장편소설『나프탈렌』이 있다.

   ● 낭독_ 김형석 - 배우. 연극 <블랙박스>, 뮤지컬 <천상시계> 등에 출연.
변진완 - 배우. 연극 <블랙박스>, 뮤지컬 <천상시계> 등에 출연.
지소흔 - 배우. 연극 <판타스틱스>, 등에 출연.
● 출전_ 『나프탈렌』(현대문학)
● 음악_ Digital Juice - BackTraxx
● 애니메이션_ 강성진
● 프로듀서_ 김태형


배달하며


젊어서 한때 부부였던 이들이 죽음을 앞두고 재회하여 벌이는 소동입니다. 여자 손화자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으나, 정년을 앞둔 백용현은 욕망이 사라지는 건 죽는 것이므로 제 욕망을 성찰 없이 승인하며 사는 사내입니다. 늙음과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야 누구도 벗을 수 없으니 욕망의 화신처럼 그려진 이 ‘추레한’ 사내가 그리 낯설지는 않습니다. “네가 변하지 않았다는 게, 나는 왜 이렇게 화가 나니.” 하는 여자의 질타가 맵습니다. 조금 차원 다른 이야기입니다만, 십년지기와 오랜만에 통화하는데 “난 요새 변해가는 것 같아, 개인주의자로.” 하고 친구가 자조하듯 말했습니다. “변하지 않는 인생이 가능할까?” 하고 말았습니다만, 그 친구 살아온 내력을 아는지라 고백이 무거웠습니다. 인생에 대해 성숙해진다는 것과 세파에 물들어간다는 게 선연하지 않아 곤혹스러운 나이에 이르렀다는 뜻만은 아닙니다. 개인주의자 정도는 부채감 없이 사는 사회여도 좋지 않을까, 그 말 보태어 전해주고 싶었죠.


문학집배원 전성태

한창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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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1건

  • 익명

    손화자의 마음이 이해가 갑니다. 너무 감성적인 여자라 혀도 차지 못하겠습니다.

    • 2013-02-01 00:15:01
    익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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