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대한민국 태극기이 누리집은 대한민국 공식 전자정부 누리집입니다.

공식 누리집 주소 확인하기

go.kr 주소를 사용하는 누리집은 대한민국 정부기관이 관리하는 누리집입니다.
이 밖에 or.kr 또는 .kr등 다른 도메인 주소를 사용하고 있다면 아래 URL에서 도메인 주소를 확인해 보세요.
운영중인 공식 누리집보기

이제하, 「유자약전」

  • 작성일 2014-12-02
  • 조회수 1,452



“문학에서의 가장 큰 고함소리는 침묵입니다.”

- 이제하, 제9회 이상문학상 수상 연설문
《 왜 참고 견디지 않으면 안 되는가 》 중에서 -



이제하, 「유자약전」






“구두가 걸어 다니는 것이 보여요?”
하고 그녀가 띄엄띄엄 꿈 이야기를 시작한 것이다.
“모자가 흔들흔들 가고 있어요.”라든가 “소매가 올라갔다 내려왔어요.” 한다든가 “바지가 앞뒤로 왔다갔다 하누만. 참 우스워요.” 하고는 웃음을 터트리는 것으로, 그녀의 꿈은 대개 의복류거나 인간의 몸에 부착된 액세서리들로 국한되어 있었다. 예들 들면 “핸드백이 뒷걸음질치네.” “반지가 떴어.” 하는 식이다. 어떤 때는 “트럭이 달리네, 집이 무너지는 것 같아요.” 하고, 아무 얘깃거리도 안 되는 범상한 사실을 몹시 힘들어하며 얘기할 때도 있다. 이런 꿈은 말할 것도 없이 그녀의 눈에 보이는 것을 그대로 얘기하는 것이다. 그녀의 눈에는, 혹은 의식의 눈에는, 인간의 근육이거나 사지(四肢)거나 얼굴과 육체가 떨어져나가고 없다. 그녀는 필사적으로 그런 것을 보지 않으려 들고, 보이더라도 지워버리고 얘기를 않는다. 그녀는 이를테면 투명인간을 보듯이 사람들을 보기 시작한 것이다. 아이들이 공상 모험소설에 몰두하듯이 지치지도 않고, 그녀는 며칠 동안 끈질기게 열의와 진지성을 가지고 이런 비슷비슷한 사실을 얘기했다. 금방 조금 전에 한 똑같은 이야기를 다시 시작하면서, 그녀는 그것을 까맣게 잊고 있는 듯했다. 마치 그렇게 하지 않으면 수억만 개의 바지와 소매투성이와 단추와 모자들로만 구성된 어떤 숭고한 왕국(王國)을 새로 세울 수가 없다는 듯이.
그녀의 육체와 정신의 곤핍(困乏)이 비로소 절감돼서 외경스런 어떤 공포와 충동적인 본능에서인지 반무의식적으로 끌고 들어간 안경점에서, 그녀의 피로의 농도가 증명되었다. 유자의 시력은 0.1이하로 내려가 있었다. 나의 거칠은 협박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발버둥을 치듯이 막무가내로 안경 쓰기를 거부했다.
“나도 그렇게 보이냐? 나도 바지와 구두밖에 안 남아 보여?”
한쪽 심장을 없애버린 듯한 허탈감을 은밀히 맛보면서 내가 이렇게 확인을 하려 들자, 그녀는 밤거리의 건물들과 불빛들을 두리번거리던 눈으로, “오빠는 제가 잘 알고 있으니까.” 하고 지친 아이처럼 웃음을 보이고 있다. 무엇을 잘 알고 있다는 것일까?




▶ 작가_ 이제하 -소설가. 1937년 경남 밀양 출생. 「현대문학」 「한국일보」 등을 통해 시와 소설로 등단함. 지은 책으로 『초식』『기차, 기선, 바다, 하늘』『용』『소녀 유자』『능라도에서 생긴 일』『진눈깨비 결혼』등이 있으며 CD 「이제하 노래모음」이 있다.


▶ 낭독_ 오민석 - 배우. 연극 「만파식적」, 「봄은 한철이다」, 「바람직한 청소년」 등에 출연
문형주 - 배우. 연극 「맘모스 해동」, 「칼리큘라」, 「수인의 몸이야기」 등에 출연



배달하며

주인공 남유자의 본명은 문자(文子). 유자에 대한 짧은 전기를 쓰고 있는 화자는 그녀가 죽기 일 년 전쯤 같은 화실을 썼던 화가입니다. 유자가 하는 말은 진부한 세계, 억압이 지배하고 있는 세계에 저항하는 작가의 목소리가 투영되었을 거란 짐작이 들지요. 소설 속엔 이런 질문도 나오는군요.
“망원경을 바로 대고 세상을 볼 수 없을 때는 어떻게 합니까?”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도치하고 비약하는 수밖에요. 이 난해하고 불가해한 세상의 일들에 대해서. 2014년도 기어이 저물어가고 있는 모양입니다



문학집배원 조경란


▶ 출전_『밤의 수첩』(나남)

▶ 음악_ Backtraxx - mellow1 중에서

▶ 애니메이션_ 민경

▶ 프로듀서_ 양연식

추천 콘텐츠

손경숙 배우의 목소리로 듣는 김숨 소설가의 「벌」

봄을 세 번 나는 동안 벌통들에서 차례로 벌들이 부활했다. 벌들로 들끓는 벌통들을 바라볼 때마다 나는 죽은 아버지가 되살아난 것만 같은 흥분에 몸을 떨었다. 아카시아꽃이 지고 온갖 여름 꽃들이 피어날 때, 마씨와 나는 벌통과 함께 산에 들었다. 마씨는 벌들이 날아가지 못하게 벌통을 흰 모기장으로 감싸고 지게에 져 날랐다. 마씨의 뒤를 따르는 내 손에는 해숙이 싸준 김밥 도시락이 들려 있었다. 그날따라 너무 깊이 드는 것 같아 주저하는 내게 그가 재촉했다. “꽃밭을 찾아가는 거야. 조금 더 가면 꽃밭이 있지.” 정말로 조금 더 가자 꽃이 지천이었다. 토끼풀, 개망초꽃, 어성초꽃, 싸리나무꽃··· 홍자색 꽃이 흐드러지게 핀 싸리 나무 아래에 그는 벌통을 부렸다. 벌통에서 멀지 않은 곳에서 마씨와 내가 알몸으로 나뒹구는 동안 벌들은 꿀을 따 날랐다. 고슴도치 같은 그의 머리 위로 벌들이 날아다니는 것을 나는 꿈을 꾸듯 바라보았다. “당신 아내가 그러데, 나비를 기르면 좋을 거라고. 나는 나비가 벌보다 무서워. 우리 할머니가 나비 때문에 눈이 멀었거든. 도라지밭을 날아다니던 흰나비의 날개에서 떨어진 인분이 눈에 들어가서···” “해숙은 착한 여자야.” “착한 여자는 세상에 저 벌들만큼 널렸어!” “널렸지만 착한 여자와 사는 남자는 드물지.” 여름내 마씨와 내가 벌통을 들고 산속을 헤매는 동안 해숙은 아들과 집을 보았다. 우리가 돌아오면 그녀는 서둘러 저녁 밥상을 차려내왔다. 먹성이 좋은 마씨를 위해 그녀는 돼지고기와 김치를 잔뜩 넣고 찌개를 끓였다. 그녀에게 나는 산속에 꽃밭이 있다고 알려주었다. 벌과 나비가 어울려 날아다니는 꽃밭이. “우리도 데려가면 안 돼?” 그녀는 꽃밭을 보고 싶어 했다. “꽃밭까지 가는 길이 험해서 안 돼. 가는 길에 무덤이 얼마나 많은 줄 알아? 무덤들 중에는 내 아버지 무덤도 있지.” “근데 읍내 정육점 여자가 내게 묻더라.” “뭘?” “사내 하나에 계집 둘이 어떻게 붙어사느냐고.” “미친년!” “정말 미친년이야. 내가 살코기하고 비계하고 반반씩 섞어 달라고 했는데, 순 비계로만 줬지 뭐야.” 눈치챘던 걸까. 아니면 벌과 나비가 어울려 날아다니는 꽃밭을 보고 싶었던 걸까. 그날도 마씨와 나는 벌통과 함께 산에 들었다. 해숙이 우리를 몰래 뒤따르는 것을 알아차렸지만 나는 모르는 척했다. 해숙은 산벚나무 뒤에 숨어 마씨와 내가 토끼풀밭 위에서 알몸으로 나뒹구는 것을 지켜보았다. 날이 어두워져 집으로 돌아왔을 때 아들은 마당에서 혼자 울고 있었다. 부엌 도마 위에는 해숙이 정육점에서 끊어온 돼지고기가 덩그

  • 관리자
  • 2024-06-27
최윤, 『사막아, 사슴아』를 배달하며

  • 관리자
  • 2023-12-21
방현석, 『범도』를 배달하며

  • 관리자
  • 2023-12-07

댓글 남기기

로그인후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생각을 남겨 주세요!

댓글남기기 작성 가이드

  • 타인에게 불쾌감을 주는 욕설, 비방 등은 삼가주시기 바랍니다.
  • 주제와 관련 없거나 부적절한 홍보 내용은 삼가주시기 바랍니다.
  • 기타 운영 정책에 어긋나는 내용이 포함될 경우, 사전 고지 없이 노출 제한될 수 있습니다.
0 / 1500

댓글0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