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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텔프린스 소설가의방
호텔프린스 소설가의방 앤솔러지 미리보기-
호텔프린스 소설가의방 810호 : 체크인 - 박솔뫼
810 체크인 박솔뫼 밤의 오쿠보 역은 언제나처럼 경찰들이 순찰을 돌고 있었고 미간에 힘을 준 채 가게 앞에서 담배를 피우는 중년 여자들은 그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주변을 살핀다. 반미를 파는 슈퍼 앞에는 늘 맞은편에서 오는 누군가에게 하이파이브를 하며 인사를 하는 젊은이들이. 웃으며 담배를 피우다 다른 쪽 손으로 담배를 옮기며 하이파이브. 모여 있는 젊은이들 셋 중 둘은 전자담배를 들고 있고 이제 연초를 피우는 사람은 담배를 끊거나 전자담배로 옮겨 갔다기보다 서서히 사라졌거나 어딘가로 빨려 들어간 것 같은데 그 어디는 어디인지. 마치 웨딩홀처럼 넓은 지하의 가스토에는 근처 식당에서 일을 마친 여자들이 아직 어딘가에서 서빙을 하고 있는 친구들을 기다리고 있다. 위선생을 만난 곳은 이곳 가스토였는데 한국어 중국어 일본어 태국어가 테이블마다 들리는 이곳에서 그도 나도 혼자 온 사람이었고 한국어 사용자였다. 나는 노트북에 한국어 문서 파일을 열고 작업 중이었고 내 왼쪽에 앉은 그는 대체 어디서부터 들고 온 것인지 모를 한국 신문을 읽고 있었다. 대체로 한국인은 한국인을 알아보지만 한국 신문이 없었더라면 위선생이 어느 나라 사람인지 확신할 수는 없었을 것 같은데 그러니까 그는 어느 나라 사람일 것도 같은 느낌이었다. 눈이 마주치고 자연스럽게 옆 테이블에 앉은 그와 이야기를 하다 보니 우연히 둘 다 같은 호텔 체크인 시간을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게 신기하고 반가웠다기보다 그 순간은 조금 긴장되었는데 늦은 밤이었고 내가 갈 곳은 러브호텔에 가까운 곳이었는데 밤까지 시간당 2, 3천 엔쯤 받고 대실로 이용되다가 11시부터 숙박 손님을 받는 시스템이었고 그게 아니더라도 식당에서 옆자리에 앉은 사람과는 식당을 나서면 각자의 길을 가고 싶었다. 다행히도 위선생은 내게 크게 관심은 없었고 그저 피로해 보였다. 50대 중후반쯤 되었을까 도무지 무슨 일을 하는 사람인지 짐작이 되지 않았다. 언뜻 보면 단정에 가까운 초라한 행색이었지만 반지만은 화려하게 여러 개의 손가락 위에서 빛나고 있었고 말투는 요즘 한국에서 잘 듣지 못하는 90년대 주말 드라마의 한국어인데 얼마 전까지 한국에 있었는지 지난달에는 서울 어디를 갔다 왔고 하는 이야기를 했다. 여기저기 자주 오가시나봐요. 일이 있으니까 자주 오는데 요즘은 예전처럼 자주 움직이지는 않아요. 나 역시 누가 내게 무슨 일 하시는데요라고 물으면 왜 다짜고짜 그런 것을 물어보지라고 생각할 것이었으므로 참고 묻지 않았지만 마음속으로는 여러 번 아 자주 움직이는 일······ 사업하시는가봐요 가족들이 외국에 사시는가보지요 그것도 아니면 예술 관련 그런 계통이신가봐요 하고 자꾸만 위선생에게 묻게 되었다. 물었다기보다 머릿속으로 그런 질문을 만들어내고 따라 하는 목소리가 있고 그 목소리는 나와 닮은 듯 닮지 않았고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라스트 오더 안내가 입구에서부터 들려왔다. 모든 주문을 앉은
작성일 2024-11-18 작성자 문장지기 좋아요 0 댓글수 0 조회수 115상세보기 -
호텔프린스 소설가의방 809호 : 체크인 불가합니다 - 황모과
809 체크인 불가합니다 ─P 호텔의 고객이 될 자격 황모과 세븐 스타 프리빌리지 호텔, 약칭 P 호텔은 이 지역 최고 명당에 입지해 있었다. 역사적으로도 길흉이 엇갈려왔다는 이 도시에서도 지하 수맥이 거미줄처럼 퍼져가는 지점, 풍수 최적지였다. 이곳의 특별함은 유명했다. 한 달 월세를 능가하는 하루 숙박비도 그 이유 중 하나였다. 특별한 휴식을 누릴 고객은 특별한 능력(경제력)이 있는 사람들뿐, 고객의 품격(돈)은 입실과 함께 공인되었다. 투숙객은 번잡하고 흉흉한 바깥세상을 잊고 비일상적 공간 속에서 꿈 같은 휴식을 누린다. 경제력은 품위라는 명분까지 원 플러스 원으로 독점한다. P 호텔의 입실 시 체크인 코스는 까다롭기로 유명했다. 숙박비 지불 능력만이 입실 자격을 보증하는 것은 아니었다. 호텔의 운영 정책에 동의해야 입장할 수 있다. ‘아무나 받지 않는다’는 호텔 방침에 따라 고객은 체크인과 함께 선별 절차를 통과해야 했다. P 호텔은 고객의 품행을 테스트하는 평가 기준을 일절 공개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왜 통과했고 왜 탈락했는지 알 수 없었다. * “젠장, 힘들어 죽겠군!” 고객 1이 로비에 들어서며 불평했다. 바깥 소음이 완전히 차단된 로비에는 고요가 흐르고 있었다. 입장한 순간부터 바깥과 단절되는 것이다. 평소 P 호텔은 ‘소리도 인테리어도 무음도 호텔 서비스’라고 홍보했다. 무색과 무취도 호텔의 서비스 중 하나였다. 이는 곧 바깥은 잡다하고 혼잡하고 혼탁하다는 점을 암시하고 있었다. 리셉셔니스트가 고객 1에게 다가가 인사했다. “어서 오세요, 고객님. 오늘 하루 어떠셨나요?” 고객 1은 피곤했지만 공손히 응했다. P 호텔의 엄격한 체크인 검증 시스템에 대해 익히 들어왔다. “뭐. 열사병에 울화병까지 겹쳐 오늘 드디어 제삿날이구나, 했소. 그래도 시체는 아닌 상태로 도착했으니 다행이지 뭐요. 당신들도 송장치레할 수고는 덜었구려.” 고객 1의 답변은 퉁명스러웠다. 비꼬는 듯 쌀쌀맞은 고객 1의 답에 리셉셔니스트는 반갑게 답했다. “오시는 길도 고생 많으셨습니다, 고객님!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별것 아닌 것처럼 들리는 대화였지만 이로써 체크인 절차가 시작되었다. 호텔은 감시 카메라에 포착된 고객의 답변과 태도를 접수해 분석하기 시작했다. “고객님, 체크인을 위해 몇 가지 확인 사항이 있습니다. 번거로우시겠지만 잠시 협조해주시겠습니까?” 리셉셔니스트는 정중한 태도로 고객에게 신분증 제시와 얼굴 인식, 그리고 지문 날인까지 요청했다. 고객 1은 별다른 거부감없이 개인 정보를 몽땅 넘겼다. 고객 1은 평소에도 준법정신이 투철했다. 공공질서를 해치는 자들은 사사건건 절차와 제도에 딴지를 걸며 사회적 혼란을 가중시킨다고 생각하는 편이었다. 고객 1은 빨리 처리해주기를 바랐다. 깨끗하고 포근한 침대에 당장 몸을 맡기고 싶었다
작성일 2024-11-18 작성자 문장지기 좋아요 0 댓글수 0 조회수 69상세보기 -
호텔프린스 소설가의방 808호 : 철야(徹夜) - 양선형
808 철야(徹夜) 양선형 너는 대개 착각에 이름을 붙이는 편이었다. 이름을 붙이자마자 서술할 수 있을 만큼의 구체성이 뒤늦게 생성되는 듯했고, 검은 말은 폭우를 뚫고 대로의 야음을 통과해 너를 찾아온 모양인지 온몸이 흠뻑 젖어 있었다. 푸르릉거리는 기척과 헝클어진 갈기, 파르르 떨리며 낙하하던 물방울들, 풀죽은 동공을 천천히 상기하는 과정에서 검은 말의 환영이 네 머릿속에서 생생하게 되살아났다. 이 기억은 가짜였으나, 회상을 거듭할수록 검은 말의 잔상에 침울하며 서글픈 상실의 예감이 스며들었던 것이다. 그러나 검은 말이 밟고 있었던 러그 재질의 바닥에는 빗물의 자국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거대한 말, 어두컴컴한 말, 지쳐버린 말. 네 손이 종이의 여백에 무의미한 기호들을 적고 있었다. 네모, 회오리, 네모 속의 격자, 격자 속에 갇힌 별, 회오리 속의 미소, 미소를 휘감는 꽃받침. 네 손은 창문에 부딪혀 흘러내리는 빗물의 무늬를 모사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무섭게 총질을 하듯 쏟아지는 빗소리의 거센 리듬과는 달리, 보통 빠르기로 느긋하게. 이동하는 네 손이 느리게 잎사귀를 먹어치우는 벌레처럼 사각거리며 종이 위에 새롭게 반복되는 무늬들을 만들어냈다. 검은 말을 회상하며 너는 자전거 사고로 입원했을 당시의 병실을 떠올렸다. 실은 자전거 사고는 없었다. 너는 가족에 보탬이 되기 위해 의사에게 자전거 사고를 당했다고 거짓말을 해서 병원에 입원한 것이었다. 보험사에서 입원 일당을 받기 위해서였다. 나중에 그 보험이 ‘보험사기 의혹’으로 해약되어 보험금을 수령하지는 못했지만. 웃기지도 않은 일이다. 너는 병자를 연기하거나 병자의 자격을 획득하기 위해 매일 엉덩이에 뻐근한 주사를 맞아야만 했으니까. 너는 같은 병실에 입원했던─종일 보행기를 두 손으로 붙잡고 병원 복도를 어정거리듯 거닐며 재활에 몰두하던─할아버지 때문에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 할아버지는 호흡할 때마다 폐에 가래가 차오르는 듯한 가르랑거리는 소리를 냈고, 예민해진 너는 환자복 차림으로 한밤의 병원을 빠져나와 발길 닿는 곳까지 산책을 했다. 병원 주변은 낙후된 시골길이라 인적이 드물었다. 간혹 사람이 나타나면 형체의 절반이 음산한 어둠에 잘려 있었다. 종이에 가지런하게 정렬된 활자들을 해독할 수 없었다. 너는 손톱 위에 태양을 그렸다. 그것으로 무엇을 비출 수 있을까. 너는 때때로 네가 엮은 기호들의 빽빽한 사슬이 너를 지상으로 묶어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기호들은 눈에 묻은 속눈썹, 풀잎 위를 구르는 물방울, 허공을 부유하는 깃털 같은 것들이라 한 줌의 무게도 갖지 않는다. 너는 네게 주어졌던 많은 시간을 기호 쪼가리로 둔갑시켰다. 그 시간은 네게 돌이킬 수 없이 소중했을 테지만 너는 그 시간들을, 기호 쪼가리들을 배치하고 다시 허물어뜨리는 일에 사용했을 뿐이다. 아무도 네게 그러한 일을 하라고 명령하지 않았다. 너는 스스로에게 의무를 부과했고, 네가 엮은 기호들의 빽빽한 사슬로 너를 친친 동여맨 뒤
작성일 2024-11-18 작성자 문장지기 좋아요 0 댓글수 0 조회수 277상세보기 -
호텔프린스 소설가의방 807호 : 이벤트 - 김유담
807 이벤트 김유담 여자가 동그랗게 부푼 배를 감싸 안은 채 호텔 로비로 혼자 걸어 들어왔다. 한 손으로는 배를 받치고 나머지 한 손으로는 커다란 여행용 캐리어를 끌고 들어오는 여자의 곁으로 벨보이가 다가갔다. 여자는 짐 가방을 받으려는 그의 손길을 사양하며, 프런트로 향했다. “장기 투숙 이벤트 당첨돼서 체크인하려는데요. 오늘부터 투숙하기로 예약되어 있어요.” “네, 고객님. 잠시만요, 최이선 고객님 맞으시죠? 신분증 확인하겠습니다.” 여자는 고개를 끄덕이며 지갑에서 신분증을 꺼냈다. 호텔 1층에 위치한 데메테르 레스토랑에서는 지난 5~6월 두 달간 고객들을 상대로 명함 이벤트를 진행했다. 레스토랑에서 일정 금액 이상 식사한 고객들은 자신의 개인정보가 마케팅에 활용될 수 있다는 것에 동의한 후, 계산대 옆에 설치된 작은 상자에 명함을 넣었다. 추첨을 통해 당첨된 고객 1인에게 여름 한 달간 호텔 투숙권을 제공하는 행사였다. 이와 함께 여름 성수기 기간 동안 열흘 이상 호텔에 묵는 장기 투숙 고객에게 할인 혜택을 주는 행사도 대대적으로 홍보했다. 근처의 직장인들을 타깃으로 한 프로모션이었다. 명동역과 충무로역 사이에 위치한 J 호텔은 전형적인 비즈니스 호텔로 여름휴가 기간이 오히려 비수기에 가까웠다. 봄, 가을에 찾아오는 중국인 단체 관광객들도 여름철에는 방문이 뜸했고, 휴가객들도 도심 한복판에서 지내기보다는 지방이나 해외여행을 즐기는 추세였다. 호텔 측은 방을 비워두느니 할인 행사를 통해 장기 투숙 고객을 유치하는 게 낫다고 판단했다. 무더운 여름, 호텔에서 출퇴근하세요. 전기세 걱정 없이 쿨하게 여름 나기~! 호텔은 명함 이벤트에 응모한 직장인들의 연락처로 단체 광고 문자를 보냈다. 올여름이 유난히 더울 거라는 기상청의 예보도 광고 문구에 넣었다. 이선은 지난달 예전 직장 동료가 해외 발령을 받아 떠나는 환송회에 초대를 받아 J 호텔 레스토랑을 방문했다. 퇴사 이후 회사 근처로 나올 일이 없었지만 마침 병원 진료가 있는 날이라 회식에 참석하기로 했다. 식사가 끝난 뒤 동료들이 앞다퉈 각자의 명함을 상자 속으로 넣었다. “이선 씨도 넣어요. 명함 아직 갖고 있죠?” “이미 퇴사했는데, 이거 써도 되려나요?” “그냥 재미로 응모하는 거잖아요. 재직자만 가능하다는 조항도 없고.” 호텔 로비로 걸어 나오면서 동료 중 하나가 누군가 장기 투숙 이벤트에 당첨되면 방금 저녁을 먹은 레스토랑에서 밥을 사야 한다고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그는 왠지 이 중에서 당첨자가 나올 것 같다며 밝게 웃었다. “저는 다음 주면 한국에 없을 텐데 만약 제가 당첨되면 어쩌죠?” 해외 발령을 받은 동료가 갑자기 근심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어머, 그러면 꼭 나한테 줘요. 나 한 달간 호텔에서 출근 좀 해보게.” 팀장이 강요하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작성일 2024-11-18 작성자 문장지기 좋아요 0 댓글수 0 조회수 60상세보기 -
호텔프린스 소설가의방 806호 : 웰컴 투 더 시티 - 나푸름
806 웰컴 투 더 시티 나푸름 하지만 나와 말하기를 즐긴다고 해서 상대가 꼭 내게 호의를 보인다는 말은 아니었다. 403호는 매번 불만 섞인 어조로 짜증을 내며, 도대체 이딴 호텔에 어떻게 2주씩이나 갇혀 있으라는 건지 모르겠다고 했다. 옆방이 체크인한 이후부터 이상한 소리가 들리고, 내가 가져다준 식사는 형편없으며, 침대에서는 꿉꿉한 여름 장마 냄새가 난다고 했다. 그건 지금이 정말 여름철 장마 기간이고, 음식은 당신네 고장 음식을 흉내 낸 것에 불과하며, 옆방도 당신과 마찬가지로 진상이기 때문이었지만, 그런 말을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았다. 나는 카트에서 꺼낸 403호의 하루치 식사를 투입구에 밀어 넣으며, “죄송합니다, 손님. 시정하겠습니다”라고 마음에 없는 소리를 했다. 어차피 내가 해결해줄 수 있는 문제는 아니었다. 날씨를 바꿀 수도, 내가 알지 못하는 고장의 음식을 공수할 수도, 옆방 격리자의 움직임을 통제할 수도 없었다. 그렇게 순순히 사과하면 403호의 주의는 어느새 형편없지만 고향의 맛을 흉내라도 낸 음식을 향했다. 그래도 403호 정도면 평범했다. 404호에 비하면 그랬다. 나는 카트를 끌고 404호에 노크했다. 이 호텔에 묵은 지 일주일이 넘었는데도, 404호는 한 번도 식사를 찾지 않았다. 404호는 처음부터 식사 준비는 필요 없다고 했다. 관리인에게 전화로 보고하자, “그 방에는 빈 도시락통만 넣으세요”라는 식으로 해결책 같지 않은 답만 던져주었다. 노크를 들은 404호는 밝은 목소리로 나를 반겼다. 일주일간 격리되어 굶은 사람답지 않게 쾌활했다. 나는 404호가 어떻게 먹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지 묻지 않고, 그냥 특이한 사람으로 취급했다. 호텔 내에는 외부 음식 반입이 금지되어 있었지만 어떻게 숨겨 왔을지도 몰랐다. 404호는 내게 빈 도시락통을 내밀고, 나는 404호에게 새 도시락통을 내밀었다. 처음에는 어쩌면 이 흔한 디자인의 플라스틱 도시락통이 404호의 식사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다음날 그대로 도시락통을 반납하는 404호를 보고 추측이 틀렸다는 걸 알았다. 그래서 어떤 날은 관리자에게 통상 보고하며 슬쩍 물었다. 아침마다 벌어지는 빈 도시락통 교환이 도대체 무슨 의미이냐고 말이다. 관리자는 이렇게 답했다. “손님이 먹지 않는다고 해서, 우리 쪽에서 야박하게 식사도 준비해주지 않았다는 인상을 줄 수는 없으니까요. 그렇다고 진짜 도시락을 가져다준다면 손님이 온 곳의 문화를 이해해주지 않는다는 인식을 줄 수 있으니 빈 도시락통을 주는 겁니다. 일종의 체면치레죠.” 그때 나는 관리자의 말을 거의 이해할 수 없었지만, 마치 전부 알아들은 사람처럼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내게는 그게 일종의 체면치레였다. 404호는 내가 건넨 새 도시락통을 옆으로 밀어 넣고 어제의 대화를 마저 이어갔다. “생각해보세요, 그건 단지 경제적인 결정일 뿐이 아니라 환경에도 도움이 됩니다. 제 몸이 평생 만들어낼 음식물
작성일 2024-11-18 작성자 문장지기 좋아요 0 댓글수 0 조회수 49상세보기 -
호텔프린스 소설가의방 805호 : 부소니 호텔, 가을 - 기준영
805 부소니 호텔, 가을 기준영 염세정이 딸에게 듣기로, 원희지는 사춘기를 잘못 보낸 운동 천재라고 했다. “엄마, 정말이야. 어렸을 때 걔는 엄청나게 빨리 달렸고, 굉장히 높이까지 뛰었어. 그렇지만 주님이 걔가 뛰도록 허락하지 않으셨어. 그래서 운동선수가 되지 못한 거야. 엄마가 칠 년 전에 걔를 진심으로 만났더라면 어떻게 해서든 걜 도와주고 싶었을 거야. 희지네 집이 불에 탔을 때, 도의적인 차원에서라도 말이야. 하지만 엄마는 그때 나한테조차도 무관심했지. 밤낮으로 일만 했잖아. 엄마는 엄마의 문제를 피해서 일로 도망쳤어. 그래서 희지랑 내가 친해지게 된 거야. 우린 ‘답이 없는 삶’이란 개념을 열한 살 때 사이좋게 공유했어.” 염세정은 딸 권보경이 원희지에 대해 이야기할 때 눈빛과 목소리 톤에 은은하게 광기가 서리는 걸 보면서 놀라기도 했거니와, 말끝에 자기한테로 화살을 돌리기까지 하는 데는 어안이 벙벙하며 숨이 턱 막힐 지경이었다. ‘쟤가 왜 저러지? 얌전하기만 하던 애가 오늘 이상한 쪽으로 말문이 트였네. 내가 문제를 피해 뭐 어디로 도망쳤다고? 도의적인 차원과 답이 없는 삶이 어쩌고저쩌고! 아아, 우리 엄마가 예전에 나보고 딱 너 같은 아이 낳아서 고생 좀 해봐라 하며 푸념하던 게 떠오른다. 그때 결심한 대로 결혼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정말이지 이 상황에서 도망치고 싶구나. 숲으로, 숲으로 걸어 들어가고 있다고 생각해보자.’ 염세정은 화를 누르느라 얼굴이 붉어진 채로, 피톤치드를 뿜는 나무들 사이로 걸어 들어가는 자신을 상상해보며 잠시 숨을 골랐고, 그러고 난 뒤에야 정상 맥박을 되찾고는 딸에게 찬찬히 따져 물었다. “그래, 그게 네가 그 원희지인가 뭔가 하는 애의 버킷리스트를 같이 이뤄보겠다고 하는 이유야?” “응. 꼭 같이하고 싶어.” “그러니까, 그게 네 진심이라고?” “응, 분명하게 진심으로 그래. 엄마 말대로 걔한테 자극받아서 이러는 게 아니야. 걔가 나한테 뭘 어떻게 하자고 조른 건 아무것도 없어.” “휴, 알겠어. 내가 졌다. 내일 아침에 선생님께 전화를 드려볼게.” “와! 고마워, 엄마. 선생님한테는 자세한 얘기는 절대로, 절대로 하지 말고. 그럼 나중에 나만 피곤해진다고.” 염세정은 지난봄에 딸이 계절성 알레르기로 인해 눈꺼풀이 가렵고 목이 깔깔해서 수업에 집중하기 어렵다면서 조퇴를 반복해댄 통에 딸의 담임으로부터 자주 전화를 받았다. 그때마다 그는 딸이 내과와 이비인후과에 다니며 치료를 받아온 게 사실이며, 아이가 힘들다고 하니 조퇴하는 게 맞지 않겠느냐고 답할 수밖에 없었는데, 그러면 원칙주의자인 담임이 곧장 혀를 차며 이렇게 충고하곤 했다. “쯧쯧. 보경이가 그렇게 허약해서 어떡한대요. 그저께는 아침부터 책상에 그냥 엎드려 있던데, 보양식이라도 잘
작성일 2024-11-18 작성자 문장지기 좋아요 0 댓글수 0 조회수 52상세보기 -
호텔프린스 소설가의방 804호 : 배웅 - 최유안
804 배웅 최유안 故 고해준. 진해 해강장례식장 302호.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이게······ 끝인가? 부고에서 해준 아버지의 성함으로 보이는 이름을 다시 찾았다. 고, 고해준. 고, 고해준. 두어 번 다시 살펴도 고인의 이름은 친구 해준뿐이었다. 머리카락이 소름처럼 서는 느낌이었다. 스팸 같은 건가. “오늘의 애착 인형은 이 정도 갖고 놀았으면 됐다. 어서 가.” 박윤수의 말을 듣고 네, 대답하며 돌아서서 백 오피스로 돌아가는 혜원의 목소리는 어느새 한 톤 낮아져 있었다. 심장이 쿵쾅댈 때, 마치 균형을 맞추듯 외부로 나오는 반응이 차가워지는 건 버릇 같은 거였다. 잰걸음으로 사무실로 들어가면서 휴대폰을 다시 활성화시켰다. 들어가면 검색을 먼저 해봐야지. 요즘 유행하는 스팸 유형이나, 장례식장 피싱 유형 같은 걸로. 대체 어떤 못된 인간이 이렇게나 심각한 장난을 치는 거지? ‘故 고해준’ 글자 왼쪽 옆에 동그랗게 붙어 있는 해준의 증명사진은, 몇 년 전부터 해준의 카카오톡 프로필 사진이었다. 혜원은 엄지손톱만 한 크기의 사진에서 한동안 눈을 떼지 못했다. 치아로 아랫입술을 지그시 물었다 떼며, 혜원은 해준의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혹시 보이스피싱 같은 거라면, 입을 먼저 떼지 말고 그쪽에서 하는 말을 듣고 있다가 꺼버리자, 생각하면서. 통화음 두 번 만에 전화는 연결되었다. 혜원은 마른침을 거칠게 삼켰다. “고해준 씨 휴대폰입니다. 저는 고해준 씨 동생 고성준입니다.” 어라. 전기가 통하는 것처럼 발끝이 저릿했다. 그런 시나리오에 대응할 말을 준비하지 못했으므로, 혜원은 가만히 서 있는 것 말고 도리가 없었다. 상대방도 말을 기다리는지 전화를 끊지 않았다. 보이스피싱의 두려움 따위는 이미 다 머릿속에서 안개처럼 흩어져가고 있었다. “문자가 사실인가요?” 단어 사이마다 목소리 끝이 갈라져 나왔다. “그렇습니다.” 혜원은 눈을 꿈뻑였다. 탈의실 전등 빛이 깜빡거렸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러고도 아무 말 하지 못했다. 침묵이 또 흘렀다. 말을 잃은 혜원에게, 해준의 동생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사람이 천천히 입을 떼었다. “형이 최근에 연락했던 친구분들에게 연락을 돌렸습니다.” 몇 달 전 혜원의 생일에 만났던 사람 중에 해준이 있었다. 해준은 둘의 또 다른 친구 선의와 혜원의 생일을 맞아 을지로까지 왔었다. 간판도 없는 와인바에서 셋은 칠레산 레드 와인 한 병을 다 마시고 헤어졌다. 그날 두 시간 동안 해준이 어땠더라. 야위어 보이거나 슬퍼 보였나. 얼굴이 검거나 표정이 칙칙했나. “저랑 만난 날도 아픈 데가 없었거든요.” 혜원의 말에 답하는 동생의 목소리도 부쩍 낮아져 있었다. “네. 일이 있기 바로 전
작성일 2024-11-18 작성자 문장지기 좋아요 0 댓글수 0 조회수 141상세보기 -
호텔프린스 소설가의방 803호 : 맴맴 - 김지연
803 맴맴 김지연 다음 날 아침 일찍 눈이 떠졌다. 이상하게 배는 별로 고프지 않았지만 입안이 찝찝해 얼른 양치질부터 했다. 샤워를 하면서 오늘 해야 할 일들을 떠올렸다. 해야만 하는 일은 없었고 하고 싶은 일을 하면 됐지만, 그것도 떠올리기가 쉽지 않았다. 아무것도 없는 이곳에서 무엇을 할 수 있을지 알 수 없었다. 거울 앞에 서서 머리를 털면서 잠깐 바닷가를 산책해도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전에 호텔 카페에 가서 조식을 먹고 갈 만한 맛집이 주변에 있는지 찾아봐야겠다고 생각했다. 그 나머지 시간에도 딱히 할 일은 없으니 분위기 좋은 카페에서 차나 마시며 시간을 흘려보내도 좋았고 아니면 호텔로 돌아와 그냥 누워 있기만 하기로 했다. 창문을 여니 어렴풋이 파도 소리가 들려왔다. 다시 또 만족감이 차올랐다. 머리를 말리다 지쳐 잠깐 침대 끝에 멍하니 앉아 창밖이나 보았다. 모래사장에 사람이 한 명도 없어 쓸쓸해 보인다고 생각했을 즈음, 창문의 오른쪽 끝에서부터 흰 개 한 마리가 달려왔다. 개는 신이 난 듯 해변을 마구 내달렸고 다시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가 다시 왼쪽으로, 내 화면 밖으로 빠져나갔다. 창밖은 다시 쓸쓸해졌는데 이번에는 사람 한 명이 설렁설렁 걸어오기 시작했다. 흰색 셔츠에 회색 추리닝 같은 걸 입고 있었는데 바람이 제법 부는지 옷자락이 마구 펄럭거렸다. 개가 다시 돌아와 사람의 꽁무니를 쫓으며 방방 뛰었다. 무척이나 신이 나 보이는 방방거림이어서 나도 개와 함께 산책을 하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때 사람이 멈춰 서서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 한참 보았다. 아마도 휴대폰인 것 같았다. 둘은 다시 화면에서 사라져 나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전혀 특별할 거 없는 나의 계획, 계획이랄 것도 없는 그 계획은 조식을 먹는 일에서부터 좌절되었다. 직원이 아무도 없었던 것이다. 나는 1층의 카페에 갔다가 아무도 없어 로비에 앉아서도 한참을 기다렸지만 아무도 나타나지 않았다. 도대체 무슨 일인지를 알 수 없어 멍하니 앉아 있기만 했다. 그때 데스크에 있던 전화가 울리기 시작했다. 나는 고민하다가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백송희 씨? 송희 씬가요? 왜 휴대폰 전화는 안 받으시나요? 메시지는 확인하셨나요?” 여자는 그동안 무척이나 난감했었다는 듯 말끝에 한숨처럼 시발··· 하고 작게 읊조렸다. 나는 그걸 못 들은 사람처럼 물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죠?” “직원들이 모두 앓아누웠어요. 저는 감염병에 걸려서 격리를 해야 하고요. 송희 씨도 어쩌면 감염되었을지도 몰라요. 그래서 일주일간 호텔을 떠나실 수 없어요.” 나는 기가 차서 헛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그녀는 진지했고 이것은 코로나와는 차원이 다른, 훨씬 더 심각한 수준의 감염병이라고 했다. 나는 그런 병에 대해서 들어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그녀가 농담을 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아니면 내가 아직 잠이 덜 깼거나. 어쩌면 그녀와 난
작성일 2024-11-18 작성자 문장지기 좋아요 0 댓글수 0 조회수 48상세보기 -
호텔프린스 소설가의방 802호 : 당신을 기대하는 방 - 정선임
802 당신을 기대하는 방 정선임 1 당신은 인천 공항에 막 도착했다. 서윤아 Seo Yoona. 당신은 비행기 티켓에 인쇄된 자신의 이름을 잠시 들여다본다. 목적지는 리스본이었다. 침대 옆에 걸어 놓은 커다란 세계지도에서 별 스티커를 붙여 놓았던 곳 중 하나다. 당신은 가고 싶은 도시에는 별 스티커를, 다녀온 뒤에는 그 옆에 초승달 스티커를 붙여 놓았다. 본래 계획대로라면 동행은 네 명이었다. 당신은 수진, 은경, 민숙, 인애가 모여 있는 단체 채팅방에 올라온 메시지를 확인했다. 오늘이네, 부럽다, 잘 다녀와, 몸조심하고, 맛있는 거 많이 먹고, 사진 찍어서 올려줘 등등 다정하게 배웅하는 말들이 올라와 있었다. 그들은 해마다 함께 가고 싶은 여행지를 정했고 회비를 모았다. 여행 날짜가 다가오면 한 명씩 피치 못할 이유가 생겼다. 실직과 이직, 결혼과 출산, 육아와 간병, 갑작스런 출장과 질병 등등. 20년 지기인 그들에게는 익숙한 일이었다. 다섯 명이 온전히 떠난 적은 없었다. 이번에도 모두가 떠날 거라는 기대는 없었다. 적어도 셋이 떠나리라 생각했으나 은경과 둘만 시간이 되었다. 어제, 은경이 잔뜩 잠긴 목소리로 전화를 걸어왔다. 코로나 확진이라고 했다. 요즘은 출국하는 데 문제가 없지만 증세가 심해서 아무래도 여행은 무리인 것 같다고. 당신은 그저 몸조리를 잘하라며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도 그들과 함께 떠나기로 한 여행을 갑작스럽게 취소한 적이 있었다. 나 때문이었다. 사실 이번 여행 계획을 세운 건 수진이었다. 당신은 수진이 엑셀로 정리해준 일정을 들여다보다 한숨을 쉬었다. 본래 당신도 계획을 짰다. 다이어리를 빼곡하게 채우곤 했다. 그러나 당신은 이제 아무것도 계획하지 않았다. 3년 전부터 세계지도에는 더 이상 별도, 달도 늘어나질 않았다. 그것 또한 나 때문일까. 출국을 앞둔 지금도 당신은 망설이고 있었다. 나쁜 징조가 아닐까. 아예 하지 않는 게 낫지 않을까. 지난 3년간 당신은 이런 식으로 세워둔 계획을 자주 취소하고 유예함으로써 스스로를 고립시켰다. 당신은 운세 앱을 열어본다. 오늘의 운을 점수로 환산한 것이다. 70점이라, 나쁘지 않군. 당신은 그제야 결심한 듯 캐리어 가방을 부치고 보안 검색대로 향했다. 큰 짐을 부치고 배낭 하나만 둘러멘 당신은 모처럼 가뿐해 보였다. “이제 마음껏 떠나도 되잖아. 왜 떠나질 않아?” 답답해서 당신에게 소리를 지른 적이 있다. 나는 이제 그만 구름이나 바라보고 나비나 쫓아다니며 놀고 싶었다. 가벼워진 몸으로 보다 더 높이 뛰어올라 우주까지 날아가고 싶었다. 당신 주위를 떠돌며 지켜보고 싶지 않았다. 설마 내 말을 들은 건지 모르겠지만 당신이 벽장 안에서 커다란 여행 가방을 꺼냈을 때 나는 많이 기뻤다. 그래서 당신이 이번에는 쉽사리 체념하지 않기를 바랐다. 당신은 탑승 게이트 앞에 자리를 잡더니 단체 방에 인사를 남겼다. 그러고는 버릇처럼 내 사진을 넘겨보다가 그중 한 장을 골라 SNS에 올렸다. 당신이 오랜만에 울
작성일 2024-11-18 작성자 문장지기 좋아요 0 댓글수 0 조회수 95상세보기 -
호텔프린스 소설가의방 801호 : 고양이별의 체크인 - 장강명
801 고양이별의 체크인 장강명 H의 딸은 인터넷에 잘 접속하지 못했다. H가 딸에게 스마트폰을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대신 H는 죽음을 주제로 딸과 이야기를 나누려 했다. 하지만 H는 죽음에 대해 잘 몰랐다. 사실 H는 딸이 혈액암에 걸리기 전까지 어느 누구와도 죽음에 대해 깊은 대화를 나눠본 적이 없었다. 9살 소녀가 맞이할지 모르는 죽음에 대해 무슨 이야기를 해야 할지 H에게 가르쳐준 사람도 없었다. 친지도 의사도 죽음에 대해서는 말을 피했고, 죽음 이후에 대해서는 더 그랬다. 할 말이 궁했던 H는 동화 같은 이야기들을 지어냈다. “너는 절대 죽지 않는다고 말했지. 그래도 계속 딸이 물어보는 거야. 만약에, 아주 아주 만약에 만약에, 내가 죽으면 어떻게 돼, 하고 말이야. 그래서 너는 절대 죽을 일이 없지만, 만약에, 아주 아주 만약에 만약에, 네가 죽는다면, 하고 이야기를 지어냈어.” 착한 사람이 죽으면 천국에 가. H는 딸에게 말했다. 천국에 가면 그 사람이 키웠던 개가 뛰어나와서 주인을 반긴단다. “고양이는?” 딸이 물었을 때 H는 고양이별에 대한 이야기를 지어냈다. 개들은 지구를 떠난 뒤에도 사람과 같은 별에서 살게 되지만, 독립심이 강한 고양이들은 자기들만의 별에서 살게 된다고. H는 자기 딸이 고양이를 싫어하는 줄 알았다. 그래서 사후 세계에서는 사람이 고양이를 만나기 어려운 것처럼 묘사했다. “그러면 나는 단비 못 만나?” 단비는 H의 언니가 키웠던 고양이였다. 딸이 그 고양이를 각별하게 여길 거라고는 전혀 짐작하지 못했던 터라 H는 당황했다. 언니의 집에 갈 때마다 딸은 단비를 보면 비명을 지르며 도망 다니기 바빴다. 그게 어린아이의 사랑 표현이었던 걸까. 아니면 자기가 아는 존재 중 자기보다 먼저 죽은 존재가 그 고양이뿐인 딸이 사후 세계에서 고독을 겁내는 걸까? “대충 둘러댔어. 고양이별에 사람도 갈 수 있다고. 인간 전용 호텔이 있어서 그 호텔에 묵을 수 있다고. 사실 그 호텔의 입구는 여러 곳인데 천국에도 있어서 천국에서 어떤 문을 열고 들어가면 바로 고양이별에 있는 인간 전용 호텔의 로비가 나오게 돼 있다고.” 사람의 어떤 특성은 10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구나, 하고 나는 생각했다. 내가 아는 H는 재미있는 상상을 많이 하는 사람이었다. 친구들과 술을 마시거나 잡담을 할 때 그녀는 화제를 엉뚱한 방향으로 돌려 사람들을 웃기곤 했다. 실없는 농담도 자주 던졌지만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던 방향으로 어떤 사안의 문제점을 날카롭게 지적한 적도 있었다. 그윽한 목소리로 엉뚱한 이야기를 재치 있게 하는 그녀를 우리는 ‘우아한 4차원’이라고 부르며 좋아했다. “고양이별에서 고양이를 만나고 싶은 사람은 먼저 인간 전용 호텔에 가서 체크인을 해야 한다고 했어. 그러면 호텔에서 신원을 확인하고 방을 내주면 그 호텔 방 열쇠를 신분증처럼 사용해서 고양이별에서 허가된
작성일 2024-11-18 작성자 문장지기 좋아요 0 댓글수 0 조회수 51상세보기